이에 우연준이 웃음을 터트렸다.“아부하는 거 아닙니다.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이에요.”잠시 후 두 사람이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고 우연준의 에스코트를 받아 뒷좌석에 앉으려던 소은정이 최성문을 발견하고 흠칫했다.최성문은 말없이 그녀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은호 대표님이 특별히 부탁하셨습니다. 앞으로 공식적인 장소에는 최 팀장님이 항상 동행하는 걸로요. 그 자체로도 위압감을 줄 수 있으니까요.”우연준의 설명에 소은정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워낙 큰일이 있기도 했고... 최 팀장이 곁에 있으면 나도 안심이 되긴 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돌아온 지 한 달도 안 지났어. 여기서 또 무슨 일 생기면... 하, 진짜 부적이라도 써야 하나.’발표회는 애프터는티 같은 비교적 가벼운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전체적인 기획은 은호 대표님께서 다 준비해 두셨습니다. 이제 남은 건 계약 체결뿐이에요. 상대 고객이 워낙 시끌벅적한 걸 좋아하셔서 이런 파티가 열리게 된 거고요.”“아, 클라이언트의 요구였구나.”소은정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렇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시끌벅적한 걸 좋아하면 사람도 꽤 많이 초대했겠네요.”“네. 저희 그룹과 좋은 인연을 유지하고 있는 대표님들과 재원들, 그리고 기자들도 참석할 예정입니다. 대표님께서는 그저 잠깐 얼굴만 비춰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우연준의 설명에 소은정이 고개를 끄덕였다.“뭐, 그런 건 제 주특기죠.”잠시 후, 소은정을 태운 차량이 파티장에 도착했다.소은호는 이번 파티를 위해 호텔 펜트하우스 전체를 대관했는데 아름다운 조명과 우아한 인테리어와 어우러져 왠지 비현실적인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소은정의 등장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정말 소은정 대표네. 저 드레스... 내가 사고 싶었는데... 우리 나라에 딱 한벌 들어온 걸 저분이 사셨구나... 이쁘다.”“역시 미모 하나는 끝내준다니까.”“게다가 능력도 출중하고...”...우아한 미소를 장착
“난 그냥 이사들 꼭두각시지 뭐.”윤 화백의 투정에 소은정은 물론이고 항상 점잖던 우연준마저 입꼬리를 올렸다.“소은호 대표가 직접 올 줄 알았는데 여기서 널 만날 줄은 몰랐다?”“아, 저도 우리 오빠 꼭두각시죠 뭐.”화기애애한 분위기 가운데, 우연준이 소은정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겼다.“대표님, 계약서에 사인하셔야죠.”소은호가 워낙 신경 쓰고 있는 프로젝트라 우연준의 마음도 왠지 조급해졌다.“자, 그럼 꼭두각시들끼리 계약서에 사인부터 하고 대화나눠볼까요?”이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SC그룹은 유럽 시장에서만큼은 태한그룹을 넘어서게 되었다.비록 박수혁이 가지고 있는 자본의 근본은 태한그룹이 아닌 신포 인터네셔널, 전 세계 최고의 투자 기업이지만 말이다.기자들이 보는 가운데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악수까지 마친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싱긋 웃어보였다.기자들이 자리를 떠난 뒤에야 파티장 분위기는 다시 들끓어 오르기 시작했다.당연하게도 지켜보는 눈이 없으니 다들 마음이 편해진 모양이었다.기회를 노리던 사람들이 바로 소은정 대표 주위로 다가왔다.“소 대표님, 며칠 전에 스키 여행 다녀오셨다면서요? 차라도 한 잔 하려고 전화드렸더니 비서님이 그러시더라고요.”그 질문에 흠칫하던 소은정이 자연스레 미소를 지었다.“아, 그러게요. 시간이 잘 안 맞았네요. 다음에 기회 되면 다시 약속 잡기로 해요.”“정말 부럽습니다. 대표직에 계시면서도 언제든지 그렇게 여행도 떠나시고. 요즘 사람들 말로는 워라밸이 라고 한다죠?”남의 속도 모르면서 부럽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향해 소은정은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대화를 나누던 소은정은 대충 핑계를 대고 그 자리를 떴다.이때,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윤 화백이 슬쩍 다가왔다.“스키 여행이라니. 스위스는 요즘 날씨도 안 좋다던데. 사고 같은 건 없었어?”진심으로 그녀를 걱정하는 표정에 소은정이 미소를 지었다.“저 여행 안 갔어요.”‘아, 그냥 핑계였던 건가?’대충 상황을 눈치챈
소은정을 어떻게든 숨기려는 우연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한석의 시선은 오직 소은정만을 바라보고 있었다.“소 대표님... 이게 지금...”‘저희 대표님은 지금 은정 씨가 죽은 줄 알고 계신다고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우연준이 먼저 선수를 쳤다.“이 비서님, 지금 저희 대표님께서 중요한 대화 중이시라... 저랑 얘기하시죠.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한편, 소은정은 이한석의 집요한 시선을 애써 피하며 윤 화백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역시나 그녀의 예상대로 평생 그림만 그려온 윤화백은 사업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게 없는 백지 상태였다.이미 세계 톱 화가인 윤 화백에게 돈 버는 일은 그동안 굉장히 쉬웠었다.예술은 가치를 매길 수 없는 법, 오직 그의 그림이라는 이유로 천문학적인 금액을 지불하려는 사람들이 차고 넘쳤으니까.하지만 윤 화백의 연로한 아버지가 사업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회사의 중심축이 사라지게 되었다.아버지의 평생 정성을 들여 키운 회사가 이사들 손에 분해되는 것만은 막고 싶었던 윤 화백은 결국 팔자에도 없는 사업가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다행히 진짜 경영은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그저 꼭두각시로서 사람들 앞에 서는 역할만 하면 되긴 했지만 갑자기 바뀐 삶의 패턴에 윤 화백은 나름 힘든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윤 화백의 얘기를 듣고 있던 소은정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솔직히 선생님 나이도 적진 않은데... 예순 넘어서 경영이 웬말이에요.”“이 자식아. 그래도 난 젊었을 때 실컷 즐겼잖냐.”윤 화백의 말에 대충 눈을 흘기던 소은정이 한쪽 구석에서 대화를 나누는 이한석과 우연준을 힐끗 쳐다보았다.그 시선을 느낀 건지 하필 이한석 역시 고개를 돌렸고 그 날카로운 눈빛에 소은정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아니야. 날 보는 게 아니야. 좀 더 뒤쪽을...’왠지 불안한 느낌에 고개를 돌리려던 그때, 윤 화백이 먼저 입을 열었다.“어, 저 사람은 내 그림을 구매했던 사업가잖아? 아직도 너 좋다고 쫓아다니는 거니?
솔직히 이한석도 박수혁의 결정이 딱히 이해가 가는 건 아니었다.복수... 이미 죽은 판에 복수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그 복수는 도대체 죽은 사람을 위한 것일까? 아니면 죽은 자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산 자의 마지막 발버둥일까?‘하지만 이젠 대표님이 뭐라고 하셔도 은정 씨는 마음을 돌리지 않으실 거야.’한때 누구보다 가까웠던 사이가 이제는 다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멀어졌다는 사실에 이한석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대표님은 도혁의 제안을 왜 거절하신 걸까? 은정 씨를 그렇게 사랑하시면서. 그런 범죄자들이 정말 약속을 지킬 거라 생각하신 건가? 분명 안진을 동남아 공항까지 데려다줬으면서 왜 다시 생각을 바꾸신 걸까? 대표님에 대한 은정 씨의 무게와 도혁에 대한 안진의 무게가 같을 거라 생각하신 걸까?’이번 일을 통해 박수혁도 아마 큰 교훈을 얻게 되었을 것이다.이 세상에는 장사가 아닌 거래도 많으며 선택지가 없는 상황도 수없이 많다는 걸 말이다.그 뒤로 박수혁은 각성이라도 한 듯 미친듯이 복수를 이어갔고 복수를 마친 뒤에는 폭발이 일어났던 곳에서 가슴이 터져라 오열했으며 결국 영혼이 빠져나간 듯 멍한 얼굴로 귀국했다.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은 박수혁의 삶의 의지를 완전히 없애버렸다.그런 그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이한석은 한 초대장에서 SC그룹의 이름을 발견하고 박수혁에게 전했었다.조금이나마 기운을 차렸으면 싶다는 마음에서였다.그런데 못 이기는 척 온 자리에서 멀쩡히 살아있는 소은정을 만나게 됐을 줄이야. 박수혁도, 이한석도 놀라우면서도 당황스러웠다.며칠 사이에 마음 고생이 심했는지 박수혁은 삐쩍 마른 모습이었다.누가 보면 저승 문턱에서 돌아온 게 소은정이 아니라 박수혁인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겨우 발걸음을 옮긴 박수혁의 눈동자에서 수많은 감정들이 봇물처럼 터져나왔다.후회, 놀라움, 기쁨...하지만 벅찬 그와 달리 소은정의 반응은 무덤덤하기만 했다.그저 낯선 이를 바라보는 것 같은 무표정이 박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윤 화백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뭐 일적으로 너한테 다시 연락할 일이 있을까? 나도 이제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그냥 쉬고 싶은 마음뿐이야.”그의 말에 싱긋 웃던 소은정이 돌아섰지만 성큼성큼 다가온 박수혁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가지 마. 제발...”애원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고개를 돌린 소은정의 눈동자는 여전히 차갑기만 했다.“이거 놔.”그 모습에 충격을 받은 건지 손에 꽉 주었던 힘이 스르륵 풀렸다.“은정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이 입술 사이에서 소은정의 이름만 흘러나왔다.‘이렇게 보낼 순 없어. 뭐라고 말할 자격도 없다는 거 알아. 그래도 무슨 해명이라도 하고 싶어... 널 향한 내 사랑이 그냥 가식이었다고 세상 사람들 다 그렇게 말해도 상관없는데... 너만큼은 그렇게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내가 심했다는 거 알아. 그래도...’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박수혁의 눈시울이 붉어졌다.하지만 소은정은 이 상황 자체가 짜증 난다는 듯 팔짱을 낀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이때 우연준이 다시 다가섰다.“저기... 저희 대표님 지금 컨디션이 완벽히 정상은 아니십니다. 어서 병원으로 다시 돌아가셔야 해요. 부탁드리겠습니다.”부탁이라는 단어와 달리 우연준의 말투는 강경했다.그 동안 소은정을 곁에 모시며 우연준이 느낀 소은정은 쿨한 척 하지만 원한관계에 있어선 한없이 쪼잔해질 수 있다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그런 그녀가 다시 박수혁과 엮일 가능성은 0%, 그러니 우연준 입장에서도 더 이상 형식적인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우연준의 말에 박수혁의 표정은 더 다급해졌다.“다쳤어?”하지만 그 초조함마저도 소은정은 웃길 따름이었다.“그 상황에서 살아남은 것 자체가 기적인데 뭐. 다친 게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날카로운 비수처럼 박수혁의 심장을 난도질했다.곧이어 박수혁의 입에서 가장 하고 싶었던 그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미안해...”
파티장 밖.어느새 차에 탄 소은정은 여전히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노을이 먹구름에 가리워져 거무튀튀한 하늘, 그녀의 기분처럼 우중충했다.부랴부랴 다시 차에 탄 우연준이 뒷좌석을 힐끗 바라보았다.“병원으로 갈까요?”시간을 확인하던 소은정이 대답했다.“학교로 가죠. 마이크 픽업하고 병원으로 가요.”이에 우연준이 고개를 끄덕이고 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여느때보다 더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우연준이 다시 조심스레 소은정의 눈치를 살폈다.‘아무렇지 않은 척하시지만 얼마나 짜증이 나시겠어. 내 실수야. 애초에 초대장 따위도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이렇게 각자의 생각을 가슴에 품은 채 차는 마이크의 학교 앞에 도착했다.비록 기숙학교였지만 전동하가 의식을 회복한 뒤로는 매일 병원으로 드나들고 있는 마이크였다.비록 전동하의 신경은 온통 소은정에게 쏠려있느라 마이크와는 딱히 대화도 나눌 틈이 없었지만 하루가 달리 좋아지는 모습에 마이크도 꽤 기쁜 모양이었다.마이크의 안전이 걱정되었던 소은정이 경호원을 붙여줄까 묻기도 했었지만 마이크는 단호하게 거절했었다.지금 그를 케어하는 경호원, 시터는 워낙 마이크의 성격을 잘 맞춰주는 사람들이라 가끔씩 몰래 나가서 노는 게 가능한 거지... 새로운 사람들이 갑자기 늘어나면 꼼짝없이 새장 안에 갇힌 신세가 되어버릴 것이다.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마이크는 하교 시간을 맞추어 교문을 나섰다.깡총깡총 뛰어나온 마이크는 우연준, 그리고 그 뒤에 세운 차를 발견하고 더 환하게 미소 지었다.역시나 마이크를 발견하고 차에서 내린 소은정이 싱긋 웃었다.“오늘 학교는 어땠어? 즐거웠어?”“그럼요! 우리 학교에서 내가 공부 제일 잘해요! 나이는 내가 가장 어리지만.”기회를 잡았다는 듯 바로 자기 자랑을 하는 모습에 소은정이 밤톨 같은 머리를 쓰다듬었다.“가자. 누나가 맛있는 거 사줄게.”이에 마이크가 눈을 반짝이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우리 둘만 가는 거예요?”잠시 후. 패스트푸드점
마이크가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그러니까요. 아빠는 햄버거 절대 안 사주거든요. 두고 봐요. 이제 어른 되면 내가 직접 패스트푸드 가게 차릴 거예요! 시간이 더 빨리 흘렀으면 좋겠다.”아이만이 할 수 있는 원대한 꿈 발표에 우연준이 소리없이 웃음을 터트렸다.‘전 대표님이 이 자리에 없어서 다행이네. 행여나 아시면 병상에서 벌떡 일어나시겠어.’“사업하려고? 아빠 의견도 묻는 게 좋지 않을까? 사업적으로는 아빠가 선배잖아.”또 꺄르르 웃음을 터트리던 마이크가 소은정의 얼굴을 잡혔다.“누나, 그런데 오늘은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아요?”정곡을 찔린 소은정이 당황한 표정을 짓고 최성문과 우연준은 눈치껏 콜라를 마시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아까부터 기분 안 좋았잖아요. 아빠가 누나 화나게 만든거죠? 누나, 조금만 기다려요. 내가 성인 되면 아빠는 바로 차버리는 거예요. 내가 아빠보다 더 잘해 줄게요.”천진난만한 마이크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린 소은정이 대답했다.“아빠 때문 아니야. 그냥...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만났거든.”잠깐 멈칫하던 소은정이 말을 이어갔다.“마이크는? 마이크는 싫어하는 사람 있어?”그녀의 질문에 진지하게 고민하던 마이크는 고개를 끄덕이다 곧 다시 고개를 저었다.“저번에 날 괴롭혔던 형아도, 형 편만 들어주던 선생님도 싫어요. 그런데... 어차피 지난 일이니까 그냥 잊어버리려고요. 이제 다시 만날 일도 없을 텐데 괜히 미워해 봤자 내 기분만 나빠지잖아요.”기특한 마이크의 말에 소은정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잊어야지.”“어른들은 고민이 더 많겠죠? 그래도 잊어버리는 게 좋아요!”마이크의 조언에 조금 마음이 편해진 소은정이 다시 아이스크림을 한 스푼 떠먹었다. 방금 전보다 훨씬 더 달콤한 맛이었다.잠시 후, 거하게 식사를 마친 마이크는 소은정과 함께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다.병실에서 영어로 된 책을 읽던 전동하가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이렇게 빨리...”당연히 소은정인 줄 알고 활짝 웃던 전동하는 그
“네.”짧게 대답한 소은정이 병실을 나서고 어느새 전동하, 마이크 두 부자만 남게 되었다.한편, 전동하의 말에 마이크 역시 죄책감이 밀려왔다.쪼르르 전동하 곁으로 다가간 마이크가 먼저 아빠의 손을 잡았다.“아빠, 얼른 나아서 우리 같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평소에 정크푸드를 먹는 걸 제한하긴 했지만 전동하는 그래도 아이들 입맛에 맞추어 나름 융통성있는 아버지였다.그런 아빠를 속였다는 생각에 방금 전 맛있게 먹은 햄버거가 속이 턱 걸린 듯했다.왠지 전동하의 신뢰를 져버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눈시울까지 붉히는 마이크의 모습에 전동하도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래. 아빠가 자고 있을 때 마이크도 걱정 많이 했다면서?”전동하의 질문에 마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마이크, 아빠는 널 기르면서 최선을 다했어. 아빠가 못해 주는 부분은 수잔이 해주고 있다고 생각하고. 아빠한테 진짜 가족은 마이크뿐이야. 아빠가 가장 사랑하는 것도 마이크고. 아빠한테 뭐 하고 싶은 말 없어?”평소 투닥거리는 게 일상이었던 부자 사이였는데 갑자기 이렇게 낯간지러운 말을 들으니 눈에 고였던 눈물이 결국 또르르 흘러내렸다.한참을 망설이던 마이크가 결국 솔직하게 모든 걸 내뱉었다.“그게 오늘... 누나랑 패스트푸드 가게에 갔었어요. 누나는 잘못한 거 없어요. 내가 가고 싶다고 떼쓴 거거든요.”귀여운 아이의 모습에 전동하는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았다.한편 마이크는 평소 혼날 때 벌을 받았던 것처럼 두 팔을 들었다.“아빠, 다신 거짓말 안 할게요.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진심으로 반성하는 모습에 전동하는 다시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우리 마이크는 착한 아이니까 약속은 꼭 지키겠지? 하지만...”전동하가 말꼬리를 늘어트리자 마이크 역시 급 긴장하기 시작했다.이에 전동하가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나랑 예쁜 누나 무슨 사이인 거 알지?”전동하의 질문에 마이크는 대답하고 싶지 않은 듯 입술을 앙다물었다.하지만 전동하는 말을 이어갔다.“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