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 나름 제작용을 하는 대한민국과 달리 동남아의 일부 나라에서는 사람 목숨이 파리보다 더 가볍게 여겨지기도 했다.전동하가 안쓰럽다는 눈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이제 괜찮아요. 앞으로 다시 그럴 일 없을 거예요. 걱정말아요.”전동하의 곁에 기댄 소은정의 목소리는 여전히 무겁기만 했다.“내가 그곳에서 봤던 것들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할 거예요.”그런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춘 전동하가 어색하게 화제를 돌렸다.“그럼 도움을 준 사람은 없었어요?”“도움이요?”멈칫하던 소은정은 도혁의 애인을 떠올렸다.흉측한 모습의 부하들 중에서 그녀는 유일한 위로였으니까.“있었죠. 좋은 사람이었어요. 비록 대놓고 도와주진 않았지만 은근슬쩍 많이 챙겨줬었죠. 그 방에서 날 빼내주기도 했고요. 뭐 아쉬운 게 있다면... 도혁 그 쓰레기 같은 자식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거지만.”처음엔 혹시 누군가 꽂아둔 스파이가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도혁을 바라보는 여자의 눈을 본 순간 그 추측은 접는 수밖에 없었다.도혁을 바라보는 그 눈동자, 그것은 소은정이 너무나 익숙한 모습,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여인의 모습이었다.말로는 그저 수많은 섹파일 뿐이라고 돈과 명예를 위해 도혁의 곁에 있는 것뿐이라고 했지만 도혁이 위험에 빠진 순간에도 여자는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정말 그저 속물적인 욕심 때문이었다면 도혁이 위기에 빠진 순간 혼자 살겠다고 도망쳤을 테니까.전동하가 미간을 찌푸렸다.“도혁 주위에 여자가 많았다는 정보는 들었어요. 여자가 자주 바뀐다고.”“맞아요. 나도 그렇게 들었어요.”소은정이 고개를 끄덕였다.도혁은 놀라울 정도로 차갑고 이성적인 사람이었고 여색에는 딱히 관심이 없는 남자였다.뭐 그 덕분에 그 집에서 무사히 있을 수 있었던 거였지만.“그 여자... 한국에서 동남아로 팔려간 거죠?”“그건 어떻게 알아요?”여자의 과거에 대해 묻는 순간, 확 굳어버린 표정 때문에 차마 묻지 못한 이야기기도 했다.“가족 중에 조폭에게 미움을 산 사람이 있
잠시 후, 소은정이 입을 삐죽 내민 채 툴툴거렸다.“그런데 안 졸려요? 방금 전에 깨어난 환자 맞냐고요!”소은정의 말에 전동하가 웃음을 터트렸다.“은정 씨가 곁에 있는데 내가 잠이 올 리가 없잖아요.”망설이던 전동하가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여기 누워요.”“싫거든요.”소은정이 미간을 찌푸렸다.이에 전동하가 그녀의 팔을 잡아끌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득을 이어갔다.“은정 씨가 옆에 누우면 잠이 잘 올 것 같단 말이에요.”하지만 소은정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아무리 봐도 바로 잠들 건 같진 않은데...’그럼에도 속는 셈 치고 천천히 침대 위로 올라갔다.VIP 병실이라 그런지 두 사람이 누워도 공간은 널널했다.전동하 때문에 잔뜩 곤두세웠던 신경이 풀린 탓일까? 베개에 머리를 댄 소은정은 잠이 솔솔 밀려오기 시작했다.‘안 돼! 자지 마! 동하 씨 자면 집에 가야지.’소은정이 억지로 눈을 뜨며 말했다.“잠들 것 같으면 말해 줘야 해요?”이에 전동하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네. 일단 잠깐 눈 붙여요. 잠 들 것 같으면 깨워줄 테니까.”조용한 병실, 나른한 전동하의 목소리까지... 소은정의 눈꺼풀은 결국 내려앉았다.그런 그녀를 전동하는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이 순간이 평생 이어져도 나쁘지 않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행복도 잠시.전동하의 표정이 의미심장하게 굳었다.‘은정 씨를 구하러 갔을 때... 모든 인맥을 동원해서 도혁의 라이벌이라는 독사와 접선했었지. 박수혁 대표도 독사를 이용한 걸까? 그렇다면...’전동하의 눈이 서늘하게 변했다.소은정이 납치를 당한 건 어디까지나 박수혁 때문, 그런데도 인질의 안전이 아닌 그룹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박수혁의 모습에 전동하는 실망스러우면서도 치가 떨렸다.‘은정 씨는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야... 난 그렇게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라서 말이야. 박수혁 씨, 앞으로 조금 번거로워질지도 몰라. 내 작은 복수라고 생각해줘.’다음 날, 회진을
아침부터 아주 다이나믹한 표정을 보여주는 소은정의 모습을 전동하는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았다.한편 소은정은 불만 가득한 눈빛으로 전동하를 바라보고 있었다.무심결에 팔을 움직이던 전동하는 밤샘 팔베개 때문에 저릿한 느낌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아침부터 왜 화를 내고 그래요.”후다닥 침대에서 내려온 소은정은 바로 병실을 나서려고 했다.이에 전동하가 그녀를 불러세웠다.“한 원장님 지금 회진 도는 중이에요. 지금 나가면 바로 마주칠지도 모르는데. 조금 있다가 가는 게 어때요?”그 목소리에 소은정의 뒷모습이 살짝 움찔거렸다.‘하, 여기서 잔 것도 모자라서 다른 사람한테 들키기까지 했다고?’창피함과 분노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용솟음쳤다.“어제 말했잖아요. 잠 들 것 같으면 얘기하라고. 그런데 왜 안 깨웠어요? 내가 우스워지는 게 좋아요?”환자라는 신분 때문에 어떻게든 화를 눌러보려 했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다 싶었다.전동하가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솔직히 나도 그냥 스르륵 잠들었어요. 은정 씨 깨울 겨를도 없이요. 그러니까 화내지 말아요. 그리고 다른 사람이 보면 뭐 또 어때요. 옷도 다 제대로 챙겨입고 있고... 지금 내 컨디션에 뭐 다른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저분들은 의사니까 과학적으로 그런 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지 않을까요?”소은정은 전동하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화가 조금 풀리긴 했지만 얼굴은 점점 더 화끈 달아올랐다.“두고봐요!”그런 전동하를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봐 준 소은정이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괜히 옷매무시를 정리한 소은정이 병실 문을 빼꼼 열었다.‘휴, 다행이다. 아무도 없네.’병실로 돌아가 보니 어느새 도착한 소은해가 아침을 먹고 있었다.그녀의 등장에 소은해가 눈썹을 치켜세웠다.“오, 전 대표는 깼어? 아빠가 아침 챙겨주셨어. 깼으면 가져다 주게.”고개를 그덕인 소은정이 텅 빈 배를 어루만지며 소은해의 맞은편에 앉았다.식사에 열중하던 그때, 포크를 내려놓은 소은해가 진지하게 물었다.“이제
성강희의 질타에 입을 벙긋거리던 한유라는 결국 변명을 포기했다.이때 소은정이 결국 나섰다.“유라 탓하기 전에 너 스스로부터 돌아보시지? 네 입이 워낙 가벼워야 말이지. 실수로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기라도 하면 계획이 엉망이 되버리잖아.”이에 놀랍게도 성강희는 눈시울을 붉히기 시작했다.“내가 그렇게 생각없는 사람으로 보여? 네 안전과 직결된 일인데! 진작 알았으면 내가 먼저 가서 널 구했을 거야!”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트릴 것 같은 모습에 소은정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전동하의 얼굴도 질투심으로 조금 어두워졌다.하지만 곧 아무렇지 않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강희 씨가 알았으면 죽기내기로 달려들었을 거잖아요. 그럼 소은호 대표님의 계획이 물거품이 되는 거니까요.”‘하, 내가 다혈질인 건 어떻게 알았대?’정곡을 찔린 성강희가 고개를 홱 돌렸다.‘하긴 내가 갔다간... 괜히 사망자만 한 명 더 늘어나겠지. 인질이 한 명 더 늘어나거나.’이때 다가온 한유라가 성강희의 뒤통수를 살짝 때렸다.“너 아직도 은정이한테 이상한 마음 품고 있는 거 아니지? 야, 너 요즘 연애한다면서. 해외 유학파 출신의 여비서라고 그랬나? 언제 소개해 줄 거야?”한유라의 자연스러운 화제 전환에 소은정도 김하늘도 눈이 동그래졌다.납치당해 있었던 소은정은 물론이고 요즘 드라마 제작 때문에 바쁘게 보낸 김하늘 역시 성강희의 열애 사실에 대해서는 새까맣게 모르고 잇는 상태였다.하지만 역시 가장 당황한 건 성강희.한유라의 질문에 성강희는 말까지 더듬거렸다.“너... 너 그건 도대체 어디서 들었어?”‘아니, 아직 사귀는 것도 아니고 겨우 썸 정도인데 어떻게 안 거래?’“우리 남편이 말해줬어.”한유라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그 뒤로 이어진 세 여자의 압박 심문에 성강희는 결국 모든 진실을 실토하는 수밖에 없었다.“아, 그냥 조금 알아가는 중이야. 좋은 직원이기도 하고 해서 눈여겨 본 것뿐이라고. 아직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괜한 소문 퍼트리지 마.”
한유라의 말에 깜짝 놀란 전동하가 자연스레 소은정을 바라보았다.아무 생각없이 김하늘과 웃고 있는 소은정의 모습에 전동하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우리가 결혼을 할 수 있을까? 우린 신혼여행 어디로 가면 좋을까...’시간은 조용히 흐르고 소은정의 친구들은 점심 때가 되어서야 병원을 나섰다.보름 내내 병원에만 있었던 소은정은 슬슬 몸이 쑤시기 시작했지만 전동하를 혼자 남겨두는 게 도저히 마음에 놓이지 않았다.오후쯤, 재활운동을 하고 돌아온 전동하는 소은정과 함께 태블릿으로 기사를 보기 시작했다.연예면 뉴스에서 시선을 못 떼는 소은정을 힐끗 바라보던 전동하가 웃었다.“그러게 재밌어요? 솔직히 이런 스캔들... 사실무근인 경우가 더 많지 않아요?”그러자 소은정이 그를 흘겨보았다.“일단 여기서 일차적으로 필터링하고 관심가는 기사는 오빠나 도준호 대표한테 물어보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있잖아요.”소은정의 설명에도 전동하는 딱히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받아들이기로 하고 아무런 불평 없이 조용히 소은정의 곁을 지켰다.솔직히 전동하 본인 역시 몸 상태가 거의 다 회복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고 조금 답답하기도 했지만 의사가 퇴원하라고 할 때까지 시간을 꽉꽉 채울 생각이었다.소은정의 케어를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전동하의 눈꺼풀이 점점 내려오려던 그때, 소은정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오빠?”“은정아, 나 오늘 항공편이었는데 기상 악화로 비행기가 못 뜨고 있어. 3시간 뒤면 SC그룹 발표회거든. 내가 못 가면 너라도 가야 할 것 같아. 어차피 우 비서가 다 준비했고 넌 그냥 얼굴만 비추면 돼.”전화를 받자마자 속사포처럼 말을 뱉어내던 소은호가 어딘지 무거운 목소리로 한 마디 덧붙였다.“굉장히 중요한 발표회야. 무조건 대표가 참석해야 해.”잠깐 고민하던 소은정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우 비서님한테 병원으로 와달라고 해줘.”“그래, 그럼 부탁할게.”통화를 마친 소은정이 전동하를 돌아보았다.‘동하 씨만 두고 가도 정말 괜찮
이에 우연준이 웃음을 터트렸다.“아부하는 거 아닙니다.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이에요.”잠시 후 두 사람이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고 우연준의 에스코트를 받아 뒷좌석에 앉으려던 소은정이 최성문을 발견하고 흠칫했다.최성문은 말없이 그녀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은호 대표님이 특별히 부탁하셨습니다. 앞으로 공식적인 장소에는 최 팀장님이 항상 동행하는 걸로요. 그 자체로도 위압감을 줄 수 있으니까요.”우연준의 설명에 소은정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워낙 큰일이 있기도 했고... 최 팀장이 곁에 있으면 나도 안심이 되긴 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돌아온 지 한 달도 안 지났어. 여기서 또 무슨 일 생기면... 하, 진짜 부적이라도 써야 하나.’발표회는 애프터는티 같은 비교적 가벼운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전체적인 기획은 은호 대표님께서 다 준비해 두셨습니다. 이제 남은 건 계약 체결뿐이에요. 상대 고객이 워낙 시끌벅적한 걸 좋아하셔서 이런 파티가 열리게 된 거고요.”“아, 클라이언트의 요구였구나.”소은정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렇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시끌벅적한 걸 좋아하면 사람도 꽤 많이 초대했겠네요.”“네. 저희 그룹과 좋은 인연을 유지하고 있는 대표님들과 재원들, 그리고 기자들도 참석할 예정입니다. 대표님께서는 그저 잠깐 얼굴만 비춰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우연준의 설명에 소은정이 고개를 끄덕였다.“뭐, 그런 건 제 주특기죠.”잠시 후, 소은정을 태운 차량이 파티장에 도착했다.소은호는 이번 파티를 위해 호텔 펜트하우스 전체를 대관했는데 아름다운 조명과 우아한 인테리어와 어우러져 왠지 비현실적인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소은정의 등장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정말 소은정 대표네. 저 드레스... 내가 사고 싶었는데... 우리 나라에 딱 한벌 들어온 걸 저분이 사셨구나... 이쁘다.”“역시 미모 하나는 끝내준다니까.”“게다가 능력도 출중하고...”...우아한 미소를 장착
“난 그냥 이사들 꼭두각시지 뭐.”윤 화백의 투정에 소은정은 물론이고 항상 점잖던 우연준마저 입꼬리를 올렸다.“소은호 대표가 직접 올 줄 알았는데 여기서 널 만날 줄은 몰랐다?”“아, 저도 우리 오빠 꼭두각시죠 뭐.”화기애애한 분위기 가운데, 우연준이 소은정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겼다.“대표님, 계약서에 사인하셔야죠.”소은호가 워낙 신경 쓰고 있는 프로젝트라 우연준의 마음도 왠지 조급해졌다.“자, 그럼 꼭두각시들끼리 계약서에 사인부터 하고 대화나눠볼까요?”이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SC그룹은 유럽 시장에서만큼은 태한그룹을 넘어서게 되었다.비록 박수혁이 가지고 있는 자본의 근본은 태한그룹이 아닌 신포 인터네셔널, 전 세계 최고의 투자 기업이지만 말이다.기자들이 보는 가운데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악수까지 마친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싱긋 웃어보였다.기자들이 자리를 떠난 뒤에야 파티장 분위기는 다시 들끓어 오르기 시작했다.당연하게도 지켜보는 눈이 없으니 다들 마음이 편해진 모양이었다.기회를 노리던 사람들이 바로 소은정 대표 주위로 다가왔다.“소 대표님, 며칠 전에 스키 여행 다녀오셨다면서요? 차라도 한 잔 하려고 전화드렸더니 비서님이 그러시더라고요.”그 질문에 흠칫하던 소은정이 자연스레 미소를 지었다.“아, 그러게요. 시간이 잘 안 맞았네요. 다음에 기회 되면 다시 약속 잡기로 해요.”“정말 부럽습니다. 대표직에 계시면서도 언제든지 그렇게 여행도 떠나시고. 요즘 사람들 말로는 워라밸이 라고 한다죠?”남의 속도 모르면서 부럽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향해 소은정은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대화를 나누던 소은정은 대충 핑계를 대고 그 자리를 떴다.이때,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윤 화백이 슬쩍 다가왔다.“스키 여행이라니. 스위스는 요즘 날씨도 안 좋다던데. 사고 같은 건 없었어?”진심으로 그녀를 걱정하는 표정에 소은정이 미소를 지었다.“저 여행 안 갔어요.”‘아, 그냥 핑계였던 건가?’대충 상황을 눈치챈
소은정을 어떻게든 숨기려는 우연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한석의 시선은 오직 소은정만을 바라보고 있었다.“소 대표님... 이게 지금...”‘저희 대표님은 지금 은정 씨가 죽은 줄 알고 계신다고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우연준이 먼저 선수를 쳤다.“이 비서님, 지금 저희 대표님께서 중요한 대화 중이시라... 저랑 얘기하시죠.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한편, 소은정은 이한석의 집요한 시선을 애써 피하며 윤 화백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역시나 그녀의 예상대로 평생 그림만 그려온 윤화백은 사업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게 없는 백지 상태였다.이미 세계 톱 화가인 윤 화백에게 돈 버는 일은 그동안 굉장히 쉬웠었다.예술은 가치를 매길 수 없는 법, 오직 그의 그림이라는 이유로 천문학적인 금액을 지불하려는 사람들이 차고 넘쳤으니까.하지만 윤 화백의 연로한 아버지가 사업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회사의 중심축이 사라지게 되었다.아버지의 평생 정성을 들여 키운 회사가 이사들 손에 분해되는 것만은 막고 싶었던 윤 화백은 결국 팔자에도 없는 사업가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다행히 진짜 경영은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그저 꼭두각시로서 사람들 앞에 서는 역할만 하면 되긴 했지만 갑자기 바뀐 삶의 패턴에 윤 화백은 나름 힘든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윤 화백의 얘기를 듣고 있던 소은정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솔직히 선생님 나이도 적진 않은데... 예순 넘어서 경영이 웬말이에요.”“이 자식아. 그래도 난 젊었을 때 실컷 즐겼잖냐.”윤 화백의 말에 대충 눈을 흘기던 소은정이 한쪽 구석에서 대화를 나누는 이한석과 우연준을 힐끗 쳐다보았다.그 시선을 느낀 건지 하필 이한석 역시 고개를 돌렸고 그 날카로운 눈빛에 소은정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아니야. 날 보는 게 아니야. 좀 더 뒤쪽을...’왠지 불안한 느낌에 고개를 돌리려던 그때, 윤 화백이 먼저 입을 열었다.“어, 저 사람은 내 그림을 구매했던 사업가잖아? 아직도 너 좋다고 쫓아다니는 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