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정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피식 웃던 소은호는 바로 돌아섰다.전동하... 은근 존재감을 드러낸단 말이지.혼자 남겨진 MC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그때, 소은호가 뒤를 따라온 비서에게 분부했다.“이 팀장 내 방으로 오라고 해요.”“네.”기자들을 한 명씩 배웅한 뒤에야 이건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소은호의 사무실로 향했다.소은호 역시 에두르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이 팀장님, 며칠 뒤면 전 A시 본사로 돌아갈 겁니다. 이 팀장님도 저와 함께 돌아가시죠? 지성 프로젝트는 다른 담당자가 맡게 될 겁니다. 이틀 안에 인수인계 작업 모두 끝내놓으세요.”아, 드디어 올 게 왔구나...이건의 표정이 창백하게 질렸다.오늘 기자회견에서 이건은 최선을 다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륭하다는 평가를 줄 수는 없었다. 기껏해야 나쁘지 않았다 정도...?특히 인재가 넘쳐나는 SC그룹에서 아무 직원이나 세워놔도 이 정도 기량을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제가... 어디가 부족한 겁니까?”이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솔직히 이건 본인도 자신이 지성그룹을 담당한 뒤로 제대로 해낸 것 하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사고 연발이었다.처음 사고가 났을 때 S시에 내려온 게 소은정이 아니라 소은호였다면 진작 해고당했을지도 모른다.본사로 돌아가라는 건... 아직 기회가 있는 건가?한편 이건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소은호가 픽 웃었다.“뭐가 부족했는지 지성 프로젝트를 어떻게 진행했는지 이 팀장님이 더 잘 아시지 않나요?”정곡을 찌르는 소은호의 날카로운 질문에 이건의 안색이 더 창백해졌다.“대표님, 그게...”하지만 소은호는 그와 쓸데없는 말로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다는 듯 손을 들어 말을 잘라버렸다.“이 팀장님, 질문 하나만 하겠습니다. 앞으로 큰 사고 없이 지성 프로젝트를 끝낼 자신 있으십니까? 그럴 자신 있다면 여기 남으시고 없다면 저랑 함께 본사로 들어가시죠.”두 가지 선택지를 주는 듯했지만 강압적인 말투와 표정은 이미 이건이 선택
해고는 아니라고 했지만 소은호가 제안한 자리는 행정팀에서도 물품 보급 등을 담당하는 직책으로 그룹의 센터나 다름 없는 기획팀과는 그 지위를 비교할 수도 없었다.좌천이라... 해고당하기 전에 내 발로 나가라는 건가...왠지 울컥하는 기분에 창백하게 질렸던 이건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하지만 소은호는 그의 초조함 따위는 그와 아무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여전히 휴대폰만 보고 있었다.이건이 이 제안을 거절하지 않을 것, 아니 거절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이미 100% 확신하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거만함에 가까운 그 자신감이 괘씸했지만 이건은 결국 그 예상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네, 제가 먼저 인사 이동 신청서 제출하겠습니다.”“그래요.”드디어 고개를 든 소은호가 경고가 담긴 목소리로 한 마디 덧붙였다.“아, 이 일은 제가 직접 은정이한테 얘기할 테니 이 팀장님은 가만히 계세요. 지금 은정이는 건강 회복 중이라 이건 전적으로 제 결정이거든요.”“네, 알겠습니다.”은정 대표님한테 읍소할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거네.마지막 희망의 끈까지 끊어지고 이건은 결국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사무실을 나섰다.그제야 소은호는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응, 은정아. 이 팀장, 행정팀으로 옮기기로 했어.”“이 팀장님이 그러겠다고 했어?”소은정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그럼. 싫다고 말할 여지 자체를 안 줬거든. 프로젝트 하나를 난장판을 만들어놓고 네 부탁만 아니었다면 진작 해고했을 거야.”소은호의 냉정한 말투에 소은정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래. 이 팀장님 나이도 있고 행정팀도 나쁘지 않지.”“그래. 끊을게.”말을 마친 소은호는 바로 인사 이동 및 인수 인계에 관한 지시를 내렸다.마음이 안 좋긴 했지만 소은정 역시 감성만으로 회사일을 처리할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음으로 이를 묵인했다.아니, 오히려 힘든 말을 대신 해 준 오빠에게 고마움을 느꼈다.기자 회견이 끝나고 프로젝트에 관련된 일들도 다시 정도에 들어섰고 소은정도 드디어 한시름
소은정의 집에 그대로 두고 왔던 소은정의 “답례품”을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대표님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전해 드리고 오라고 신신당부를 하셨습니다. 대표님의 도움에 정말 감사드린다고 이런 방법으로나마 고마움을 전하고 싶으시다네요. 더 좋은 방법이 안 떠오르신다고. 그러니까... 받아주세요.”파일을 태워버릴 듯 이글이글 불타는 눈빛으로 책상을 노려보던 박수혁은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더 좋은 방법이 안 떠올 리가 없을 텐데. 그냥 내 뜻대로 움직이고 싶지 않은 거겠지.”두 사람 사이에 끼어있는 우연준은 말 그대로 가시방석이었다.어쩌면 소은정을 향한 박수혁 대표의 마음은 정말 진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꾸만 뒤로 향하려는 박수혁과 달리 소은정은 앞만 바라보고 있다. 박수혁이 여전히 실패한 결혼 생활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지금, 소은정은 전동하와 이미 달콤한 연애를 시작했다.박수혁 대표님... 안 되긴 했지만 어차피 두 분은 안 될 운명이야.그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던 우연준은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고 사무실에 잠깐 동안의 정적이 감돌았다.“은정이 몸은 어떻습니까?”“아,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유독 가스 때문에 폐에 조금 무리가 가긴 했지만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이거 다시 가지고 가요. 그리고 이런 거 필요없다고 은정이한테 전해요.”윽, 결국 이 말까지 해야 하는 건가.목소리를 가다듬은 우연준이 결국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대표님께서 끝까지 받지 않으신다면 다른 선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하, 플랜 B가 있는 건가?흥미롭다는 듯 박수혁이 눈썹을 치켜세우고 우연준은 조심스레 수표 한 장을 꺼냈다.항상 포커페이스던 박수혁의 표정이 드디어 일그러졌다.1초... 2초... 약 10초 뒤, 그제야 상황을 인지한 건지 박수혁은 뒤늦은 헛웃음을 지었다.하여간 소은정... 나 빡치게 만드는 데는 뭐 있다니까.쾅!박수혁이 책상 밑에 있는 서랍장을 힘껏 걷어찼다.그의 발에 채이는 게 자신의 정강이가 아닌 것에 감사하
“하, 가봐요.”그리고 우연준에게 보여주 듯 수표를 들어 바로 찢어버렸다.사람을 뭘로 보고...한편, 행여나 박수혁의 마음이 바뀌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 우연준은 다급하게 사무실을 나선 뒤 바로 소은정에게 상황을 보고했다.“대표님, 성공입니다!”수화기 저편에서 소은정의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네, 그럼 이만 퇴근하세요.”하늘을 바라보던 우연준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제 봄이 오려는 듯 어느덧 따뜻해진 봄바람과 햇살이 그의 마음마저 살랑이게 만들었다.한편, 소은정은 전동하의 성화에 김하늘, 성강희, 한유라와 함께 그가 남긴 주소로 가보기로 했다.성강희의 차가 소은정의 저택 앞에 멈춰 서고 집사가 문을 나서는 소은정을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최 팀장이 곁에 있다지만 그래도 너무 위험한 거 아닐까요?”반면 소찬식은 흔쾌히 허락하곤 손을 저었다.“아니야. 그냥 가. 집에만 있어도 병난다? 가서 바람도 쐬고 기분 전환도 하고 와.”캐주얼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소은정은 뻔뻔하게 달라붙는 소은해와 함께 성강희의 차에 탔다.싱글벙글인 소은정을 바라보던 성강희가 피식 웃었다.“지성 프로젝트 때문에 몇십 억 손해봤다면서? 식음이라도 전폐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어떻게... 얼굴이 더 좋아졌다? 볼이 좀 빵빵해진 것 같기도 하고?”성강희의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소은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이 자식... 은정이한테 뚱뚱해졌다는 말을 해...?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만?성강희를 노려보던 소은정이 바로 반격을 시작했다.“주연화 씨라고 했나? 아직도 강희 너 찾고 있는 거 같던데. 내가 도와줄까?”순간, 표정이 싸해진 성강희가 울상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은정아, 너 진짜 잔인하다. 나도 그 여자 때문에 진짜 짜증 나 죽겠다고. 그것 때문에 기분전환 하려고 나온 건데 굳이 그 얘기를 꺼내야겠어?”찰랑이는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소은정이 코웃음을 쳤다.“네가 먼저 까분 거다?”지난 10년간, 말로는 소은정을 당해낼 수 없다는 것 하나는 제대로
성강희가 한 바퀴 둘러보더니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승마장이었네, 여기 말들 다 순종 귀족 말들인가 봐, 너희 아버지가 기르던 말들만큼 케어를 잘해놨네.”소은정이 흠칫 놀랐다. 정말? 소찬식은 말들을 무척이나 사랑했었다. 흥미를 벗어나 승마에 빠져 살아 주위 사람 중 소찬식이 말을 좋아한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소찬식이 갖고 있던 말은 모두 비싸고 특이한 말들이었다. 소은정 역시 그런 아버지 아래에서 말과 함께 자랐었다. 소찬식의 딸 답게 승마도 수준급이었다. 하지만 이후에 소찬식이 승마에 흥미를 점차 잃어가고 낚시에 재미를 붙여 소은정도 아쉬워했었다. 근데 전동하가 소은정을 위해 승마장을 열었다고? 멍 해있는 소은정 옆으로 승마장 직원이 다가와 소은정에게 인사를 건넸다.“은정 아가씨, 어서 오세요. 여기 말들은 전부 전대표님이 은정 아가씨를 위해 기른 말들입니다. 좋아하시는 말이 있나요? 만약 좋아하시는 말이 없다면 다른 품종을 알아보겠습니다.”소은정은 너무 놀라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소은해와 성강희도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소은해가 소은정을 가리키면서 말했다.“얘를 위해 기른 말이라고요? 다시 말해 소은정을 위해 오픈한 승마장이라고요?”직원이 웃으면서 말했다.“네. 이 승마장은 오로지 은정 아가씨와 아가씨의 친구들을 위해 관리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개방되지 않습니다.”소은해가 놀리는 듯 웃으면서 말했다. “은정 아가씨의 전대표 통이 엄청나게 크시네.”소은정은 그런 소은해를 흘겨보고는 그 직원에게 다시 물었다. “개방을 하지않는다고요?”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네. 들어가는 케어 비용은 모두 전대표님께서 결산하십니다. 은정 아가씨의 완벽한 승마 체험을 위해 다른 사람들은 들여보내지 않습니다.”세상에! 김하늘과 한유라도 벙찐 얼굴을 하고서 있었다. 전동하는 평소에는 내색하지 않더니 한방이 있었다. 소은정은 어이없는 얼굴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전에 소은정이 소은해
성강희의 재촉에 세 사람도 말을 고르러 갔다.한 사람씩 각자 마음에 드는 말을 골랐고 모두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소은정은 한눈에 마음에 드는 말을 골랐다. 소은정이 고른 말은 갈색빛의 순수혈통의 말이었다. 옆의 직원이 말을 끌고 그녀의 앞에 다가왔다. 자세히 말을 지켜보던 소은정은 자신의 마음에 쏙 들어 기뻐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말의 털은 윤기가 흘렀고 목도 길게 뻗어 하나의 미술 작품을 보는 것만 같았다. “아가씨, 이 말은 전대표님이 특별히 데려온 순수 혈통의 말입니다. 이 말은 3대가 모두 순수혈통입니다. 어릴 때 경기에 나가 우승을 한 적도 있었죠. 모든 사람의 눈에 보기에도 제일 좋은 경마 떡잎이었습니다.”역시! 소은정은 마음속으로 이 말의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그저 보기에도 고귀하였다.“그럼 이걸로 할게요. 성격은 온순한가요?”“걱정하지 마세요. 조금 장난스럽긴 해도 절대 난폭하지는 않습니다.”소은정은 고개를 끄덕이었다.“먼저 옷부터 갈아입을게요.”승마장에 오기 전에 승마복으로 갈아입지 않았던 소은정은 지금의 옷이 승마를 하기에는 불편해 보였다. 옆에 있던 직원이 말했다.“네, 피팅룸은 이쪽입니다.”옷을 갈아입고 나온 소은정은 승마장에서 이미 신나게 승마를 하고있는 친구들을 보았다. 소은해가 고른 아라비아 말은 일부러 소은해에게 대드는 것처럼 아래위로 펄쩍펄쩍 뛰었다. 소은해도 화가 났는지 말을 혼내기 시작했다. 성강희와 한유라는 옆에서 그 모습을 보면서 깔깔 웃고 있었다. 그들이 고른 두 말 모두 성격이 온순하여 소은해의 말에 의해 다칠까 봐 일부러 소은해와 멀리 떨어져 그를 지켜보았다. 김하늘도 한편에서 그런 소은해를 지켜보면서 걱정되기는 하지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소은정도 그런 소은해를 보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순간 옆에서 승마장의 직원이 소은정에게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은정 아가씨의 휴대 전화인가요?”소은정은 그녀의 휴대전화를 건네받고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전동하에게서 걸려 온
소은정이 말했다.“어떻게 이런 좋은 말을 까먹을 수 있어요? 한눈에 봐도 최고의 말이잖아요!”“당시에도 다들 이 얘기를 했었어요. 하지만 정말로 경주마로 키우게 된다면 고난도의 훈련을 받아야 했을 거예요. 제가 데려오면 더 이상 우승을 위해서만 살지 않아도 되잖아요!”소은정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했다.“이 말은 동하씨의 마음을 알고 있을까요?”“아마도?” 전동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소은정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면서 말했다. “저는 이제 승마하러 가 볼게요. 이따 다시 연락할게요. 선물 너무너무 고마워요! 동하씨 최고!”전동하가 웃으면서 말했다.“은정씨 마음에 들면 됐어요.”전동하는 다정한 말투로 대답했고 소은정의 전화를 끊었다.소은정을 생각하면서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억눌렸던 마음이 그나마 나아지는 듯했다. 비서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오면서 말했다.“전대표님, 회장님이 대표님을 보자십니다.”멈칫하던 전동하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환한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차가운 표정만이 남아있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어요.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어떻게 할 것 같아요?”그 사람은 전동하의 생부였다. 그의 비서도 전동하와 전인국 회장 사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아마 최후의 발악을 하지 않을까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잖아요.”전동하가 입술을 깨물면서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거부하세요.”비서님이 머뭇거리더니 말했다.“이미 두 번째 면담 요청입니다. 만약 이번에도 거절한다면 회장님은 한국 쪽으로 눈길을 돌리거나 마이크 쪽으로 시선을 돌릴 거예요.”비서의 말을 들은 전동하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했다. 전동하는 이를 악물었다. 온화하고 겸손한 얼굴이 점차 차가운 얼굴로 바뀌었다. “들어오라고 해요.”비서님은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려 나갔다. 전동하는 전인국의 절망하거나 애걸복걸하는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가 좋거나 나쁜 것은 상관없었다. 그
전동하는 고개를 들어 비서에게 눈치를 주었다.비서는 꾸벅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 전동하는 손을 뻗어 차를 내려주었다. 물이 끓어오르고 향긋한 차향이 사무실에 맴돌았다. 전인국의 당황하는 모습을 본 전동하는 순간 웃음이 터져 고개를 떨구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 전인국이 입술을 삐죽이면서 말했다.“뭐가 웃겨? 설마 내가 무릎이라도 꿇고 빌길 바랐어?”절대 사생아 앞에 고개를 떨굴 수는 없었다. 심지어 전동하는 그가 포기했던 양자였다. 전동하의 눈이 살짝 반짝이더니 덤덤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한국에 가서 무수한 사람들을 만나고 무수히도 많은 의심을 했어요. 왜 날까?”전인국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전동하는 덤덤하게 다시 말을 이어갔다.“왜 내가 당신의 아들일까? 왜 또 나는 당신의 사생아일까?”“지금 여기서 그 얘기가 왜 나와? 네가 내 아들이 된 걸 이미 복으로 생각해야지. 네 애미가 죽고 내가 너를 전인그룹에 데려왔어. 너한테 신분과 지위를 주고 굶어 죽지 않게 한 걸 고맙게 생각하기는커녕...”전동하가 시큰둥하게 코웃음을 쳤다. 전인국은 쓸쓸한 어투로 말했다.“아니지. 내가 운이 없어서 이렇게 된 거겠지.”전인국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테이블을 손으로 있는 힘껏 내리쳤다. 전동하의 목소리는 여전히 덤덤했다. “저는 아무도 부럽다는 감정이 뭔지 몰랐어요. 그저 어쩔 수 없는 일로만 생각했는데 한국에 갔다가 온 후 저는 누군가가 부럽기 시작했어요.”“누군데?”전인국이 차갑게 물었다.“SC그룹 사람들이요.”전동하는 약간 울먹이는 듯했으나 이내 자신의 감정을 숨겼다. “뭐라고?”SC그룹이라는 소리를 들은 전인국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전인국은 SC그룹이 자신한테 한 일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미국에 돌아올 때 소은정이 자신의 앞에서 짓던 승자의 웃음을 잊을수 없었다. 전인국의 자존심이 뭉개져 없어지는 듯 했었다. 한낱 여자아이가 자신을 불안하게 하고 또 전기섭이 그녀보다 강하지 못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