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패딩으로 온몸을 감싼 추하나는 수척해 보이면서도 얼굴에 살짝 살이 올라 있었다.“오랜만이네요.”놀라긴 했지만 소은정은 별일 없다는 듯 다가갔다.추하나도 창백한 미소를 지었다.“대표님, 제가 노시는데 방해된 건 아니죠?”“그럴 리가요. 그런데 나 만나러 온 거 맞아요? 우혁이 보러 온 게 아니라?”고개를 젓는 추하나의 눈동자가 살짝 어두워졌다.그 모습에 소은정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두 사람의 애정전선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게 분명했으니까.이때 추하나가 가방에서 파일을 하나 꺼냈다.“회사로는... 찾아갈 엄두가 안 나서요. 오늘 대표님이 파티에 참석하신다는 얘기를 듣고 이거 전해 드리려고 왔어요.”파일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한 소은정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떨려왔다.회사 해체 제안서였다.내용을 쭉 훑어보던 소은정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아니 이게 도대체... 하나 씨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회사잖아요.”소은정의 질문에 추하나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그렇죠. 심혈 맞죠. 그런데 앞으로는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아서요.”깊은 한숨을 내쉰 추하나의 눈동자가 눈물로 반짝였지만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은지 빠르게 고개를 숙였다.“대표님 덕분에 다시 시작할 용기를 가질 수 있게 됐어요. 자본, 기회, 인맥... 제가 가진 모든 건 다 대표님 덕분이었어요. 그래서 이 결정을 내리게 됐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난 게 대표님이기도 하고요.”추하나가 목이 메는 듯 말을 멈추었다.“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나한테 말해 봐요. 내가 도와줄게요.”고개를 젓던 추하나가 한숨을 쉬었다.“저... 임신했어요. 그래서 앞으로 로펌 운영은 힘들 것 같아요. 커리어 우먼도 누구나 다 하는 게 아닌가 봐요.”“임신이요?”소은정이 눈이 커다래졌다.소은정은 자연스럽게 박우혁을 돌아보았다.“우혁이 아이 아니에요.”추하나의 말에 소은정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강서진... 그 사람 아이에요.”낮은 목소리로 말하던 추하나가 입술을 깨물었
한참을 고민하던 소은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하나 씨, 무슨 선택을 하든 난 하나 씨 응원해요. 하나 씨가 진심으로 행복해졌으면 좋겠으니까.”한숨을 내쉬던 소은정이 말을 이어갔다.“혹시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지 얘기해요.”추하나의 결정에 실망한 건 아니었다. 그저... 그녀가 안쓰러울 따름이었다.두 사람은 어쩌면 같은 입장이긴 했지만 일을 처리하는 방식은 확연히 달랐다.소은정에게는 박수혁에게 대항할 수 있는 자본이 있었지만 추하나는 달랐다.그녀가 노력해 쌓은 견고한 성이 강서진에게는 모래성 정도로 보일 테니까.그래서 어떻게든 도우려고 했던 건데...추하나가 먼저 결정을 내린 이상 이제 그녀가 무언가를 강요할 수는 없었다.아이를 가졌다는 건 관계를 가졌다는 말인데 두 사람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네, 그럴 거예요. 전 대표님이 참 부러워요. 언제 어디서든 항상 당당하시잖아요. 저도... 앞으로 대표님이 행복하시길 빌게요.”말을 마친 추하나가 깊은 한숨과 함께 돌아서고 천천히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소은정이 탄식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다시 어색하게 변할 수밖에 없었다.언제부터 듣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건 분명 박우혁이었으니까.방금 전까지 잔뜩 신나 있던 박우혁이었지만 지금은 마치 주인 잃은 강아지처럼 풀이 잔뜩 죽어있었다.제대로 서 있을 힘조차 없는지 벽에 기댄 모습에... 소은정도 할 말을 잃고 말았다.도대체 무슨 말을 하면 될까? 위로? 동정? 응원?또각또각 앞으로 걸어간 그녀가 물었다.“들었어?”붉어진 눈시울이 대답을 대신했다.무인도에서 생사를 넘나들 때도 이런 표정을 짓지 않던 사람인데...항상 속 없이 웃던 박우혁도 절망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구나 싶었다.세상에 둘도 없는 보기 좋은 커플이었는데 이렇게 비참하게 관계가 끝날 줄이야.힘없이 웃던 박우혁이 돌아서려던 그때 소은정이 그 앞을 막아섰다.“너답지 않게 왜 그래? 사랑한다면서?
주차장.그녀가 차에 타려던 그때, 누군가 그녀의 팔목을 덥썩 잡았다.언제부터 그녀를 기다렸는지 짐작 조차 가지 않는 박수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당신이 왜 여기 있어?”“나랑 얘기 좀 해.”쫙 뻗은 그는 온몸은 우울한 분위기로 가득했다.“도대체 왜 이래? 아직도 모르겠어. 우리는 안 돼. 안 된다고!”소은정의 말에 박수혁이 이를 악물었다.“서진이랑 그 전 와이프도 얼마나 안 좋게 끝났는지 알잖아? 그런데 그 두 사람도 다시 시작하기로 했어. 그런데 우리는 왜 안 되는데?”“하나 씨가 무슨 선택을 했든 비난하고 싶은 생각 없어. 하지만... 난 달라. 난 절대 그런 선택 안 해.”소은정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난 절대 헤어진 남자랑 다시 시작하는 일 따위 안 해.”박수혁의 차가운 표정에도 그녀는 천천히 그의 손을 떨쳐냈다.그녀의 감정없는 눈동자에 자극이라도 받은 듯한 박수혁이 그녀를 거칠게 차로 밀었다.“도대체 나한테 왜 이래?”차오르는 감정을 누르는 듯 그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전동하 그 자식이... 도대체 뭐가 그렇게 좋은데? 그 자식은 그쪽 집안 사람들한테 이미 버림받았어. 앞으로 걔가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 넌 지금 가라앉는 배에 타려는 거나 마찬가지야...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소은정은 아무리 밀쳐내도 꿈쩍도 하지 않는 박수혁을 노려보았다.“설령 그렇다 해도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박수혁, 제발 나한테 신경 좀 꺼. 내가 누구랑 사귀든 너랑은 상관없는 거라고!”그녀의 말에 박수혁이 소은정의 턱을 거칠게 잡아채 키스를 시작했다.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린 소은정이 온힘을 다해 그를 밀어냈지만 미약한 그녀의 힘 따위 우습다는 듯 박수혁의 몸은 태산처럼 그녀를 눌러왔다.그리고 발버둥치는 소은정의 입술을 더 거세게 탐했다.술을 많이 마셨는지 힘겹게 숨을 쉴 때마다 자극적인 알코올향이 그녀를 어지럽게 만들었다.어느 순간, 힘이 다 빠진 건지 소은정의 팔이 맥없이 떨어지고 드디어 기회를 잡은 박수혁이
조용한 주차장.바늘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그대로 들릴 것만 같을 정도로 고요한 주차장, 소은정은 분노로 가득찬 시선으로 박수혁을 노려보고 있었다.그녀의 분노,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수가 되어 박수혁의 가슴을 찌르고 있었다.“행여라도 그런 생각하고 있었던 거라면 내 맘 잘 들어. 만약 임신하면...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 아이 지울 거야. 그러니까 꿈도 꾸지 마. 내가 원하지 않는 아이, 품을 생각도 나을 생각도 없어. 선 지켜. 안 그럼 진짜 너 죽고 나 죽고니까.”말을 마친 소은정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거칠게 차문을 연 뒤 시동을 걸고 주차장을 벗어나갔다.우두커니 혼자 남은 박수혁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비틀거렸다.벨소리가 울리고 강서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어떻게 됐어? 내가 방해한 건 아니지? 은정 씨는? 술에 약 좀 타. 그럼 좀 수월할 거니까. 이미 엎지른 물이 되면 어쩔 수 없이 형 말에 따르게 될 거야. 나 좀 봐...”두 눈을 질끈 감은 박수혁이 말없이 전화를 끊었고 자신의 차문에 거세게 발길질을 함으로써 화풀이를 대신했다.아니, 난 못해... 난 은정이의 눈물을 보고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없어... 은정이의 증오에 의연할 자신이 없어...그래, 내가 날 너무 과대평가했네. 내가 날 너무 쓰레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이대로 포기하진 않을 거야. 절대...깊은 밤이라 그런지 도로에는 차 한 대 보이지 않았다. 소은정은 엑셀을 거세게 밟으며 텅 빈 거리를 빠르게 달렸다.아직도 쿵쾅대는 심장이 방금 전 일이 꿈이 아니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하, 어디서 그런 더러운 수작을 배워와서는... 난 추하나처럼 계획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거야. 내 머리털 하나라도 건드리면 평생 숨도 못 쉬게 고통스럽게 만들어줄 거야.이때 곁에 내팽개치 듯 던지던 휴대폰이 울렸다.차량 모니터에 전동하의 이름이 뜨고 방금 전까지 마음을 가득 채우던 분노가 억울함으로 바뀌며 코끝이 시큰해졌다.그래도 그녀는 별
집사 아저씨도 소은정의 차를 보고 의외라는 표정을 짓다 곧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맞이했다.“아가씨, 식사 하셨어요? 그런데 술 드셨어요? 일단 꿀물이라도 드릴까요?”“아니에요. 술 먹고 운전을 어떻게 해요. 그냥 냄새가 묻었나봐요. 꿀물은 괜찮으니까 일찍 쉬세요, 아저씨.”소은정의 미소에 집사 아저씨도 자상한 미소로 화답했다.집으로 들어간 소은정은 소은호가 거실에 앉아 메일을 확인하고 있는 걸 발견했다.소은호 역시 여동생의 갑작스러운 귀가가 의아한 듯 물었다.“오늘은 왜 여기로 왔어?”대충 미소로 대답을 대신한 그녀가 물었다.“아빠는?”“주무셔.”이에 소은정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나 방으로 들어간다?”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소은호가 여동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감정 변화에 무딘 그마저도 소은정의 모습이 왠지 이상하게 느껴졌으니까.방으로 들어온 소은정은 바로 욕조에 물을 받아 몸을 담그었다.어디서 나타난 건지 소호랑이 소파에 폴짝 뛰어올랐다.“엄마, 나 이번에 또 선물 많이 샀어요. 엄마한테 주려고요.”소호랑의 새 취미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던 그녀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그래, 고마워.”비록 역시 그녀의 카드로 긁은 거겠지만 그녀를 위해 준비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기뻤다.“호랑아, 나 물 한잔만 줄래?”소은정의 말에 소호랑은 방안의 스마트 시스템을 이용해 정수기를 가동시켰다.물 한 잔을 한꺼번에 넘겨버린 소은정이 깊은 한숨과 함께 침대에 오르려던 그때.“똑똑똑.”노크 소리에 소은정이 고개를 돌렸다.“은정아, 나야.”오빠가 왜 이 시간에...?소은호의 목소리에 소은정은 다시 아무렇지 않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었다.“응, 오빠...”문 밖에 서 있는 소은호가 선물 상자를 건네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시연이한테 주려고 했는데 다시 보니까 너한테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더라고. 에르메스 신상이야. 음... 여자들은 백이 만병통치약이라며.”무뚝뚝한 오빠의 선물에 눈시울이
오빠의 질문에 흠칫하던 소은정은 침묵으로 대답했다.멍하니 바닥만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소은호가 강수를 두었다.“말 안 할 거야? 그럼 내일 우 비서한테 물어볼 수밖에 없겠네. 네가 오늘 어딜 갔었고 누굴 만났었는지 말이야.”입술을 깨물던 소은정이 살짝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나 오늘 하나 씨 만났어.”뜬금없이 추하나를 언급하자 소은호가 미간을 지푸렸다.코를 훌쩍이던 소은정이 말을 이어갔다.“강서진 씨 전 와이프 말이야. 얼마 전까지 우혁이랑 잘 사귀고 있었는데 오늘 만났더니 다시 강서진 씨랑 재결합한다더라고. 그 남자 아이를 가졌다면서... 로펌도 다 포기하겠대.”소은호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고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망설이던 소은정이 오빠의 눈치를 살피다 결국 그녀의 기분을 엉망으로 만든 가장 큰 이유를 뱉어냈다.“박수혁 그 개자식이 술 먹고 날... 실컷 욕을 해주긴 했지만 기분은 별로 안 좋네.”소은호의 시선이 순간 차가워졌다.“그 자식이 널 범하려고 한 거야?”“뭐 그렇게 심각하진 않았는데 그래도 기분은 기분이 더러워. 난 추하나랑은 달라. 감히 내 털끝 하나라도 건드려 봐. 정말 죽여버릴 거니까. 박수혁도 내가 그런 사람이란 걸 아니까 끝까지 행하지 못한 거겠지.”소은정이 이를 악물었다.“왜 그걸 이제야 말해? 박수혁 그 자식... 정말 제대로 미쳤네. 너랑 전 대표가 사귀는 걸 알고도 가만히 있는 게 이상하다 싶었어.”“개자식... 맞아도 싸.”여전히 코를 훌쩍이는 그녀의 모습에 소은호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어떻게 복수를 하고 싶어? 오빠한테 말해. 내 동생이 나약하게 애 때문에 전 남편에게 돌아가는 꼴은 못 보니까. 둘 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가만히 안 놔둘 거야.”대한민국에서 감히 박수혁에게 칼을 들이밀 세력이 있다면 아마 SC그룹뿐일 것이다.소은호의 말에 우울하던 소은정의 마음도 조금 편해지는 기분이었다.“나도 그렇게 말했어.”누가 남매 아니랄까 봐 말투도 똑같은 모습에 괜히
이른 아침.깊은 잠에 빠져있던 소은정은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것 같은 소리에 부스스 눈을 떴지만 곧 다시 잠을 청했다.적어도 이 집에서 그녀의 잠을 방해하는 사람은 없었으니까.내가 잘못 들었나...?하지만 연이어 들리는 노크 소리와 발톱으로 문을 긁는 것 같은 소음이 이건 그녀의 착각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었다.베개로 귀를 막던 소은정이 결국 짜증스레 일어나 맨발로 방문을 벌컥 열었다.이에 문에 기대 있던 소호랑이 중심을 잃고 털썩 쓰러졌다.몸통이 동그란 것이 호랑이 무늬만 없었다면 아기 돼지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그 귀여운 모습에 머리끝까지 치밀던 짜증이 신기하게도 사그러들었다.하지만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괜히 화난 척 소호랑을 노려보았다.“소호랑, 너 귀여우면 다야? 또 엄마 잘 때 방해하면 확 팔아버린다?”데굴데굴 구르던 소호랑이 잔뜩 불쌍한 표정으로 소은정의 잠옷 치맛자락을 물었다.“안 돼요! 엄마... 그리고 은호 삼촌이 엄마 깨우라고 시킨 거란 말이에요!”역시나 고개를 든 그녀의 시야에 우유 한 잔을 마시며 2층으로 올라오는 소은호의 모습이 들어왔다.“하, 깼어? 난 네가 죽은 줄 알았네.”이에 소은정이 바로 오빠를 노려보았다.“오늘 휴가 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깨워?”시계를 확인하던 소은호가 진심으로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벌써 오전 10시야. 언제까지 잘 거야? 새벽에 낚시 나가셨던 아빠도 아까 돌아오셨어...”하, 미인은 잠꾸러기라는 말도 몰라?잔뜩 화난 소은정이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농담이고 내려가 봐. 애타게 널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니까.”의아한 표정을 짓던 소은정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설마...뭔가 깨달은 듯한 소은정이 바로 방을 나서려던 그때, 소은호가 그녀의 옷깃을 잡았다.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의 꼴을 살피던 소은호가 말했다.“뭐가 그렇게 급해? 세수하고 옷도 갈아입고 나가. 어차피 이미 충분히 오래 기다렸어. 10분 정도는 더 기다려도 돼.”어쩔 수 없이
어제 저녁 자신이 보였던 추태를 생각한 소은정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그러면 안 되었던 건데...한강에서 뺨 맞고 종로에서 화풀이라고... 박수혁에게서 얻은 부정적인 기운을 전동하에게 풀면 안 되는 것이었다...이건 동하 씨한테 너무 불공평하니까...그녀의 발걸음 소리를 들은 건지 전동하의 뒷모습이 살짝 떨려왔다.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부드러운 전동하의 이목구비에 햇살이 드리웠다. 미간 사이에 피곤함이 살짝 드리운 모습에 소은정의 가슴이 욱신거렸다.그녀를 향해 팔을 벌린 전동하가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서프라이즈. 나 보니까 좋아요?”익숙한 목소리에 흠칫하던 소은정은 코끝이 시큰해졌다. 또 우는 거야? 소은정, 너 왜 이렇게 약해졌어...하지만 그 이유를 자세히 생각하기도 전에 그녀의 다리는 전동하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그렇게 전동하와 소은정은 주위 사람들의 시선 따위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서로를 와락 끌어안았다. 마음을 차분하게 만드는 전동하의 체취가 소은정의 코끝을 스쳤다.출장 내내 매일 통화도 문자도 하며 서로의 일상을 공유했지만 그 동안 소은정은 단 한 번도 그에게 보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하지만 집 앞까지 찾아온 전동하를 본 순간 소은정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아, 정말 보고 싶었었구나...언제부터인가 전동하도 그녀의 삶에 중요한 부분이 되어 버렸다.처음 사귀기로 했을 때는 분명 전동하에 대한 보상 심리도 조금 담겨있었다.그녀가 마음을 끝까지 열어주지 않는다면 전동하가 스스로 지쳐 떨어져나갈 거라 생각했다.하지만 전동하와 함께 지내며 바뀐 건 오히려 그녀였다.언제부터 이렇게 빠져버린 걸까? 기억도 나지 않았다.한참을 안고 나서야 그녀를 풀어준 전동하가 그녀의 얼굴 구석 구석을 훑어보았다.그의 눈동자가 그리움과 반가움으로 일렁거렸다.“이렇게 보고 싶어 하는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일찍 올 걸 그랬네요.”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소은정이 다급하게 손을 빼냈다.“누가 보고 싶었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