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씨 가문 아가씨의 약혼자 신분으로 그런 질문을 하시는 겁니까?” 하연이 붉은 입술을 열어 또박또박 말했다.“아니면, 제 전 남편의 신분으로 그런 질문을 하시는 겁니까?”“생각해 보시죠, 대체 어떤 신분으로 그런 질문을 하시는 건지.”서준은 멍해졌다.‘내가 선을 넘었구나.‘이 세상에서 가장 물어볼 자격이 없는 사람이 바로... 나야.’‘나 역시 다른 사람과 낄 결혼반지를 고르고 있었잖아. 난, 최하연의 일에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어.’서준이 혜경을 향해 긴 다리를 내디뎠다. “이제 그만 가자.”혜경의 눈동자에 이상한 기운이 반짝였다. “하지만 서준 씨, 우리, 아직 반지를 고르지 않았잖아!” “다른 데서 고르자.”혜경이 서준의 뒤를 쫓았다. 혜경이 아담한 몸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겨 서준의 팔을 붙잡고 말했다.“잠깐 기다려봐!”두 사람이 매장을 떠난 뒤에도 하연은 웃음을 되찾지 못했다. 하성이 조각 같은 얼굴로 하연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아직도 괴로운 거야?”“뭐라고요? 한 번만 더 그런 식으로 말하면, 오빠가 나를 괴롭힌다고 큰오빠한테 다 이를 거예요!” 하연이 하성을 위협했다.하성이 계속해서 하연을 달랬다.“그러지 마, 큰 형이 나한테 너를 돌보라고 시킨 건데, 네가 나를 큰 형한테 일러바치면 어떡해, 나, 분명 좋은 꼴은 못 보게 될 거야.”잠시 후, 최씨 저택.한참 동안 거실에 앉아 하연과 하성을 기다리던 운석이 두 사람의 손에 들린 큰 쇼핑백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여신님, 왜 하성이 녀석이랑 쇼핑을 하면서 저는 부르지 않으신 겁니까?” 하성과 운석은 아주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만나기만 하면 서로를 헐뜯기 바빴다. 그리고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성이 운석을 업신여기고 있다는 것이었다.운석이 하연이 못생겼다고 소문을 낸 바 있었기 때문에 하성은 어릴 적부터 운석을 상대하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하연은 못생기지 않았으며, 오히려 아름다웠
“그 부분은 제가 외부에 분명히 설명하겠습니다.” 이 말을 마친 서준이 곧바로 몸을 돌려 회장실을 떠나자, 민진현이 서준이 나간 문을 향해 찻잔을 던졌다. 산산조각 나버린 찻잔은 아무렇게나 바닥에 널브러졌다.분노를 가라앉힌 민진현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날 좀 도와줘야겠어. 깨끗하게 처리해 주게.”“최하연...”민진현의 어두운 얼굴에 음흉함이 가득해졌다.“우리 민씨 가문이 어느 정도인지, 똑똑히 보여줘야겠어.”...일주일 후.드디어 기항 그룹과 기술 업데이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날이 밝았다. 하연과 정기태가 함께 회의실로 향하는 복도를 걷고 있었다.기항 그룹에서 열리는 이번 회의는 다른 그룹의 임원들도 참석할 예정이었다. 진보한 기술 혁신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하연이 회의실에 들어서자마자,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성재와 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앉아만 있었다. 하연이 가방을 내려놓으며 물었다.“임 대표님, 무슨 일 있으세요? 표정이...”성재가 두 손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시종일관 웃음을 띠던 성재의 총명한 눈동자에는 뚜렷한 조의만이 가득했다.성재가 우지나를 향해 말했다.“우 상무님, 지금 상황에 대해 최 사장님께 보고드리세요.”“최 사장님, 한 시간 전, 다크 웹에 대량의 나노로봇의 핵심 암호화 파일이 생겨났습니다. 다행히 아직 그 안의 소스 코드를 돌파한 사람은 없는 걸로 보이지만, 곧 돌파하는 사람이 생기는 건 시간문제일 겁니다.”우지나가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이 소스 코드 말입니다. 불과 이틀 전에 DS그룹에 공유된 걸로 알고 있는데, 왜 하필 오늘 정보가 누설된 걸까요?”“그러니까, 지금 우 상무님 말씀은... 우리 DS그룹이 정보를 누설했다는 겁니까?”하연은 몹시 당황스러웠으나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확실한 증거도 없이 함부로 말씀하시면 곤란합니다.” “DS 그룹에 정보를 공유한지 며칠도 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 일이 생기니, 의심을 거둘
성재 역시 우지나와 같은 생각인 듯했다. “최 사장님, 지금 농담하실 때가 아닙니다. 지금도 해커들은 암호를 해독하고 있을 거예요.” “제가 아니라면 아닌 겁니다.”하연이 자신만만하다는 듯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앉고는 고개를 돌려 작은 목소리로 정기태에게 물었다.“오고 있습니까?”정기태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10분 내로 도착하실 겁니다.”하연이 가볍게 웃으며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실 분이 한 분 더 계십니다. 모두 저와 함께 내려가 맞이해주시죠.”회의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심지어는 하연이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이라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지금이 어떤 때인데, 다 같이 한 사람을 마중 나가자는 겁니까? “최 사장님, 아직도 사태에 대한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하신 모양이군요!”“답답합니다, 정말!”하연은 사람들의 말을 듣고 있지 않는 듯했다. 하연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나중에 저를 따라오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나 하지 마십시오.”서준이 하연을 따라 몸을 일으켰다. “저는 최 사장님과 함께 가겠습니다.”성재는 마음이 편치 않았으나, 두 명의 대주주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세 명의 고위 임원들이 회의실을 떠난 상황에서, 어찌 한낱 주주들 따위가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다른 방법이 없던 주주들 역시 하나둘씩 하연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하연을 선두로 한 강대한 무리의 사람들이 한 사람이 나타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몇 분 후, 노란색 택시 한 대가 기항그룹의 입구에 멈춰 섰다.모두가 서로를 쳐다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누구야?”“거물 급 인사인가 봐.” 곧이어 190이라는 큰 키에 온화한 외모를 가진 한 남성이 차량에서 내렸다. 그 남성은 검은색 사복을 입고 있었으며 절제된 분위기를 뽐내고 있었다.“왔구나!”하연이 빠르게 달려가 최하경을 끌어안은 후, 귀에 대고 속삭였다.“오빠, 부탁 좀 할게요!”“응, 별거 아니더라.”하경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죠, 우 상무님?”하연이 우지나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하고는 싱겁다는 듯 웃었다. 갑자기 우지나가 호명되자, 회의실의 모든 사람들이 어색하게 웃기 시작했다. “최 사장님 말씀은...”하연이 손가락에 끼워진 푸른색 다이아몬드 반지를 만지작거리다가 화살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우지나를 쏘아보며 말했다.“우 상무님, 왜 마지막으로 올라오신 겁니까?” “저요?”우지나가 스스로를 가리켰다.“그저, 화장실에 다녀왔을 뿐입니다.”“최 사장님, 정말 열심이시군요. 부하 직원이 화장실에 다녀오는 것까지도 관리하시니 말입니다.”“화장실에 다녀오는 것만큼 간단한 일이 아니었던 것 같아 여쭙는 겁니다.”하연이 정기태로부터 받은 자료를 우지나의 앞에 내팽개쳤다.“기항그룹의 주식을 사들이고 있던 사람들에게 빨리 손을 떼라고 전하러 갔던 거 아닙니까?” 하연이 내팽개친 자료를 훑어본 성재가 하연의 뜻을 알아차렸다. 하연의 목소리가 광풍과 폭우 전의 고요함과 같이 낮게 깔렸다. “우 상무님, 설명해 주셔야겠습니다.” 우지나는 자신의 앞에 내팽개쳐진 자료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자세히 보니, 우지나의 얼굴은 창백하여 입술도 떨리고 있었다. 게다가 식은땀까지 흘리며 긴장하고 있는 듯했다. “최대한 은밀히 진행한다고 한 건데, 이 여자한테 들켜버리다니!”하연이 웃기 시작했다.“제가 모은 증거만으로도 이미 충분합니다.”“우리 DS그룹과 정보를 공유할 때, 고의적으로 나노로봇에 대한 소스코드를 주식 시장에 유출한 후, 주식투자자들을 공포에 떨게 하여 주식을 헐값에 팔아 치우게 하고, 어부지리로 더 많은 기항그룹의 주식을 손에 넣으신 거 아닙니까?” “임 대표님, 우 상무님께서 솔직하게 사실을 털어놓으실 생각이 없으신가 봅니다.”“임 대표님, 제가 사람을 시켜 기항그룹의 주식을 사들이라고 한 건, 그저 주식이 외부인의 손에 넘어갈까 걱정됐기 때문입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정말이지 다른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마음을 다 잡은 우지나가 분주하게 변
“임 대표님은 임 대표님 일에만 신경 쓰시죠.”서준이 눈살을 찌푸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와 관련된 문제는 이미 해결됐습니다. 단지, 세상 물정에 다소 섭섭할 뿐이지요.”성재가 서준에게 물 한 병을 건넸다. “한 대표님, 곧 약혼하신다고 들었습니다.”“아직 결정된 건 아닙니다.”서준이 성재가 건넨 물병을 밀어내고는 긴 다리를 뻗으며 회의실을 떠났다. ...돌아가는 길.하경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아까 네 편을 들던 사람이 한서준이야?”하경의 말을 들은 하연은 다소 화가 난 듯했다.“누가 내 편을 들었다는 거예요? 그 사람은 돈이 중요했을 뿐이라고요!”하경이 고개를 끄덕였다.“그 사람, 그런대로 잘 생겼더라. 근데 여자 안 좋아하잖아. 너랑은 안 어울려. 헤어지길 잘했지.” 하경의 말에 하연은 말문이 막혔다.‘못 살아 정말...’ “그래요, 그래서 오빠 말대로 헤어졌잖아요.” 하연이 서준과 결혼식을 올릴 당시, 하경은 바다 건너에서 업무에 시달리고 있던 터라 결혼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하경은 매제의 인품을 증명하기 위하여 특별히 서준의 노트북을 해킹했었다. 하경은 해킹한 노트북을 이용하여 서준을 탈탈 털어보려 했지만, 놀랍게도 서준의 노트북에는 남자라면 좋아할 만한 그 어떤 것도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하경은 서준이 무성욕자인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고, 근거를 정리하여 하연에게 메일로 보냈으나 철저히 무시당했었다. 단 한 번도 사랑을 나누지 않았던 지난 3년간의 결혼 생활을 돌이켜보자니, 하연은 서준이 부부생활을 할 수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럼, 도대체 민혜경은 어떻게 그 사람의 아이를 가진 거야?’ “근데 오빠, 왜 이번에도 혼자 왔어요? 내 새언니 될 사람은요?” “몰라, 꿈속에 있는 건지, 아니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건지... 아무튼 아직 못 만났어.”하경이 상큼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내가 이래라저래라 할 일은 아니지만, 빨리 찾아봐요. 더 미루다 가는
차문이 열리자 하연이 차에서 내렸다.“아, 오랫동안 근육을 안 썼더니 온 몸이 근질근질하네.”그녀는 눈앞에 서있는 사람들을 훑어보았다.“한꺼번에 덤빌래? 아니면 한 명씩 덤벼보던가?”칼을 든 이 건장한 남자들은 보기와 달리 강한 하연을 상대로 한번 싸워보고 싶었다. 풀숲으로 나가떨어져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동료를 확인하고 다시 차 안을 들여다보니 하연이 다른 일행 없이 혼자인 것을 알고 일순간 마음을 놓았다.문신을 한 남자는 담배를 물고 부하의 머리를 옆으로 밀어젖히고 하연 앞으로 왔다.“너도 보다시피, 우리가 수는 더 많다. 눈치 있게 회장님 반지를 내놓으면, 네가 좀 덜 다치는 거지.”하연은 비웃으며 말했다.“민진현이 보낸 패거리들이군.”“멍청한 것, 뭐 그렇게 질문이 많아, 내놓을 거야, 말 거야?”하연은 재빨리 문신한 남자가 피우던 담배를 빼앗아 꽁초를 그의 이마에 비벼서 끄고 이어서 옆차기를 하여 그를 한쪽으로 치워버렸다.하연이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말 많으면 짜증나지, 너부터 맞자.”“젠장, 감히 나를 때리다니!” 문신남은 땅에서 버티며 입속에서 빠진 이를 뱉어냈다.“저 여자 치워!”모두 덤벼 하연을 에워싸고 덤볐지만 연이어 비명을 지르며 멀리 나가떨어졌다.10분도 안 되어 모두 바닥에 누워 곡소리를 냈다.하연은 문신남 앞에 가서 경멸하는 눈빛으로 말했다.“네가 얘들 두목이야?”“뭐... 그렇다고 할 수 있죠.”“방금 나를 치우라고 했을 때는 이 말투가 아니었는데.”하연은 그를 발로 걷어찼다.“두 사람씩 밧줄로 묶어서 경찰서로 끌고 가세요.”“아! 예쁜 누님, 괜찮습니다. 다음에 절대 또 덤비러 못 옵니다.”“나한테 맞아 이 거리에서 죽고 싶은지, 아니면 경찰서 가서 자수하든지 네가 선택해.” 하연의 눈빛이 점차 험악해졌다. 문신남은 하연의 말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뼛속 깊이 느꼈다.“야, 튀어. 빨리 튀어!”문신남은 하연이 생각을 바꿀까 봐 얼른 대응했다. 하연의 싸움 솜씨가 보통이 넘어서
[그리고, 안부르면 안 올 거냐?]하민은 영상통화 분위기가 좀 얼어붙자, 긴장을 풀려고 하성에게 직접 물었다.하성은 호되게 혼나고 나서 얼굴을 들지 못했다.“그럴 리가, 할아버지의 생신에 어떻게 감히 안 갈 수 있겠어.”하연이 뒤에서 몰래 웃었다. ‘셋째 오빠 다룰 수 있는 사람은 큰오빠와 할아버지뿐이구나.’최동신은 나이에 비해 꽤 정정한 편이었다.[하연이의 나노로봇 프로젝트를 잘 도와라.]최동신은 최하경에게 당부했다.“아이고, 할아버지, 둘째 오빠한테 말 안 하셔도 돼요. 오빠도 최선을 다할 거예요.” 하연은 두 오빠의 목을 양팔로 껴안고 환하게 웃었다.하경은 담담하게 대답했다.“물론이죠.”하연이 지금 이렇게 사업에 전념하는 것을 보고 최동신은 마음이 놓였다.[할아버지 이제 쉬셔야 해. 끊는다.] 최하민이 화면 앞으로 나와 말했다.가족은 그제야 영상통화를 마쳤다....거실에서 민진현은 한가롭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그는 좋은 소식을 기다리며 습관적으로 엄지손가락을 어루만지다가 아끼던 백옥 반지를 아직 되찾지 못한 것을 깨닫고 마음이 울적해졌다. 하지만 곧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자 다시 기뻐서 트로트 곡조를 흥얼거렸다.한쪽에 서 있던 집사는 오랫동안 앉지도 못하고 서서 내내 시간만 확인했다. 아까 보냈던 사람들이 아직도 답장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민진현의 흥을 깰까 봐 슬그머니 다른 쪽으로 가서 문신남에게 전화를 걸었다.수차례의 통화 시도 끝에 겨우 연결되었다.“이봐! 너희들 뭐 하는 거야? 이런 사소한 일을 아직도 못 끝냈어? 그 여자 물건 뺏었어?”[여기는 경찰서입니다. 마침 관계자들을 찾고 있었는데 지금 서로 나와주십시오.]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울렸다.집사는 놀라서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얼른 민진현에게로 달려갔다.“회장님, 큰일났습니다. 그 사람들이 지금 경찰서에 있답니다. 지금 회장님께 좀 오시라고 하는데요!”민진현은 놀라서 찻잔뿐만 아니라 찻주전자까지 모두 깨뜨렸다.‘반반한 얼굴 하나 믿고
[내 말이 맞잖아?] 하연의 조롱하는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렸다.한서준은 전혀 사과하지 않았다.“민진현은 네가 상대할 만한 사람이 아니야. 다 너를 위해서라고.”[나를 위해주는 척은 됐어, 그 인간이 공격해오면 나도 나대로 방법이 있어!]전화가 갑자기 끊기고 점차 어두워지는 핸드폰 화면을 보면서 서준의 눈에서 분노가 일었다.‘이런 바보 같으니!오늘 내 말 안 듣고, 그때 가서 어떻게 하는지 보자!’이때 차 앞좌석의 비서가 보고했다.“한 대표님, 구동후 실장님이 F국 쪽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겼다고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직접 가보셔야겠습니다.”한서준은 눈을 감고 숨을 잠깐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알았어, 가장 빠른 비행기편으로 예약해.”F국 쪽의 업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구동후를 보내서 정세를 살피는 중이었다.최근 회사의 업무에서 손을 뗄 수 없었다. 하연이 있을 때보다 훨씬 바빠진 것은 사실이었다.‘최하연, 한 번쯤 고생해봐도 좋겠지. 다 잃고 가진 게 없을 때 손을 내밀어 도와주고 다시 HT그룹으로 돌아와서 도와달라고 하는 편이 훨씬 쉽겠지...’...하연이 전화를 끊은 후 고개를 돌리자 하경이 하성과 통화중인 것을 발견하고 달려들어 끊게 하려고 했다. 이미 통화가 끝난 것을 보고 손을 놓았다.“방금 왜 전화 못 하게 했어? 네 그 찌질한 전남편 욕할 거였는데!”“요새 좀 덜 맞아서 몸이 근질근질하지?”하경이 눈빛으로 경고하자, 하성은 즉각 고분고분하게 말을 들었다.하연은 서준과 통화한 후 답답한 마음이었다. 그런데 오빠들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고 갑자기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마음이 개운해졌다. 전 세계를 적으로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내 뒤에서 응원해주는 가족과 친구들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가족과 친구들이 바로 하연의 전부였다.하연은 가볍게 웃었다.“둘째 오빠, 좀 살살 해. 셋째 오빠 팔이 이제 좀 나았는데.”“그래! 사랑하는 동생을 이렇게 험하게 다루다니! 나중에 큰형이랑 할아버지께 다 말할 거야!”하성
호텔 로비에는 이미 많은 하객들이 모여 축하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분위기는 화기애애했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그러나 그때, 송혜선이 부동건의 팔짱을 끼고 등장하자, 순간적으로 홀 전체가 술렁였다.“저거... 부 회장의 정부 아니야? 어떻게 저 여자가 여기가 어디라고 저렇게 당당히 나타난 거지?”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리자, 그 말이 그대로 서해정의 귀에 들어왔다. 그리고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서해정은 코웃음을 치며 가시 돋힌 말을 내뱉었다.“이런 자리에까지 기어들어올 정도로 정말 뻔뻔하네. 부동건도 정말 갈수록 가관이야.”조진숙과 오랜 친분을 쌓아온 찬구인 서해정은 부동건의 이런 행동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몰랐어?”옆에 있던 하객 하나가 서해정의 소매를 살짝 잡으며 조용히 속삭였다.“부 회장이 이번에 송혜선을 정식 부인으로 올릴 생각이라던데?”서해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뭐라고? 진심이야?”“처음엔 그냥 뜬소문인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까 꽤 가능성이 있어 보여.”서해정은 입술을 삐죽이며 불쾌함을 감추지 못했다.‘우리 진숙이 불쌍해서 어쩌나...’이어서 송혜선을 향한 시선이 더욱 싸늘해졌다.“결국 첩은 첩일 뿐이야. 설령 정식 부인이 된다고 해도, 그 꼬리표는 절대 떼지 못할걸?”...사실, 부동건은 애초에 송혜선을 이 자리에 데려올 생각이 없었다.그러나 출발 직전, 그녀가 다가와 어리광을 부렸다.그 순간부터, 부동건의 얼굴에는 미묘한 불쾌감이 감돌았다.“오늘은 상혁이의 약혼식이야. 네가 따라올 이유가 없잖아.”그러나 송혜선은 환하게 웃으며 태연하게 말했다.“상혁이의 경사스러운 날인데, 당연히 축하하러 가야죠. 저도 기분 좋은 일에 함께하고 싶어요.”부동건은 눈살을 찌푸렸다.“네 상태가 점점 무거워지고 있어. 집에서 푹 쉬어야 할 때야. 괜히 사람들 많은 곳에서 불편하게 굴지 마.”하지만 그녀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걱정 마세요, 회장님. 다영이가 저랑 같이 있을 거예요. 문제될 거 없어
‘정말... 부 대표님을 대신할 수 있을까?’연지는 눈에 의심과 불안이 섞인 채 남준을 바라봤다.“상무님, 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계신 겁니까?”여자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남준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그 웃음은 마치 어두운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불길한 유성처럼 섬뜩했다.그 순간, 연지의 등줄기를 싸늘한 한기가 훑고 지나갔다.조명이 비친 남자의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 블랙홀처럼 빨아들일 듯했다.남준은 천천히 몸을 돌려, 테이블 위에 놓인 술병을 집어 들었다. 유려한 손길로 술을 술잔에 가득 따라낸 후, 한 잔을 연지 앞으로 내밀었다.“내일이 무슨 날인지는 알지?”‘내일?’연지는 본능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생각하더니, 곧 깨달았다.“내일은 약혼식... 부 대표님과 하연 씨의 약혼식 날입니다.”남준은 손목을 살짝 돌리며, 술잔 속 액체를 천천히 흔들었다.술이 잔 속에서 부드럽게 회전했다.그는 반쯤 눈을 가늘게 뜨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모든 것이 남준의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듯이.“오래 기다렸지. 드디어 그날이 왔군.”연지는 흐름을 감지하며 조심스레 물었다.“설마... 상무님, 약혼식을 망치시려는 건가요?”남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가볍게 술잔을 기울이며 잔을 비웠다.남자의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너무도 명확했다.연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만약 이 약혼식이 깨진다면... 나도 손해 볼 건 없지.’남준은 조용히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의 결합은 단순한 약혼이 아니다. 이 약혼식에는 양가의 주요 인물들이 총출동해. 사람이 많다는 건, 우리에게 기회가 많다는 뜻이겠지.”연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입을 열었다.“제가 무엇을 하면 됩니까?”남준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가볍게 던졌다. 유리가 바닥에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눈앞의 남자는 상혁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거의 판박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닮은 눈매, 흡사한 이목구비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얼굴에 자리하고 있었다.순간적으로 하연은 착각할 뻔했다.‘세상에 이렇게까지 닮은 사람이 있을 수가 있나?’그때, 남자의 시선이 하연에게 닿았다. 그리고 눈빛에는 짧은 순간 놀라움과 흥미가 스쳤고, 곧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이렇게 예쁜 분이 밤에 혼자 노시는 건가요? 연락처라도 하나 주고 가는 게 어때요?”이 남자는 상혁과 외모만 닮았을 뿐, 막상 입을 여는 순간 그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단순한 생김새를 넘어, 풍기는 분위기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그 차이는 너무도 확연했다.“죄송하지만, 관심 없어요.”하연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단 한 치의 여지도 남기지 않았다.남자는 눈썹을 살짝 올렸지만, 전혀 불쾌한 기색 없이 태연하게 지갑에서 금빛 명함을 꺼내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그럼 그냥 친구로라도. 이 정도도 안되나요?”고급스러운 금박이 감도는 종이 위에 큼직하게 적힌 영문 이름.[세븐]하연은 그 명함을 받지 않았다. 그 대신 자연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겼고, 그 순간 그녀의 약지에 빛나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선명하게 드러났다.“미안하지만, 안 돼요.”남자의 반응을 기다릴 것도 없이, 하연은 가볍게 몸을 틀어 걸음을 옮겼다.남자는 하연이 멀어지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며, 여유롭게 입꼬리를 올렸다....VIP룸 안.남준은 가죽 소파에 느긋하게 몸을 기댄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연기가 폐 깊숙이 들어갔다가 천천히 뿜어져 나오는 동안,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공허했다.그때, 문이 열리며 황연지가 들어왔다.그녀는 성큼 다가와 공손하게 인사했다.“오셨습니까?”남준은 담배를 비벼 끄고, 재떨이에 던졌다.“왔군.”연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상무님, 절 찾으셨다면서요.”남준은 얕게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새해를 맞아 너한테 특별한 선물을 하나 주
하연은 파티 장소를 한 고급 프라이빗 클럽으로 정했다. 회원제로 운영되는 곳이라,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재력가나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밤이 깊어지자, 화려한 조명이 반짝이는 공간에서 단순한 싱글파티라기보다는 절친들끼리의 조촐한 모임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었다.고급스러운 좌석에 앉아 몇 잔 가볍게 마시던 중, 하연은 임신 중이라 과일 주스를 마시고 있었다.그때, 예나가 다가와 감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너도 결국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됐구나. 네 상혁 오빠랑 드디어 정식으로 부부가 되다니, 정말 부럽다.”그녀는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덧붙였다.“반면에 나는 아직도 싱글이야.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혼자라니, 가끔은 나도 좀 서글프다.”여은은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으며 장난스럽게 받아쳤다.“네가 서글픈 게 아니라, 애초에 연애할 마음이 없는 거겠지.”“내가 들었는데, 요즘 너네 가게에 어떤 남자가 매일같이 찾아온다며? 혹시 마음이 좀 움직인 거 아냐?”예나는 당황하며 급히 말을 잘랐다.“그럴 리가! 그냥 친한 친구일 뿐이야.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절대 아니야.”여은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키득거렸다.“진짜? 근데 왜 이렇게 부정하는데?”예나는 반박하려다 결국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 애 나보다 어리잖아. 그리고... 나 연하남이 별로야.”절친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하연은 흥미가 동했다.‘뭔가 재미있는 얘기가 나올 것 같은데?’“연하남? 이거 뭔가 숨겨진 이야기 있는 거 아니야?”여은은 재빠르게 하연에게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너 F국에 있어서 몰랐지? 이 둘, B시에서 꽤 핫했어.”그리고는 짧게 요점을 정리해서 들려주었다.“03년생 남자야. 올해 딱 스물두 살! 나이에 비해 성숙하더라구. 우리 예나, 아주 귀여운 연하남한테 꽂혔나 봐.”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예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헛소리하지 마!”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눈빛에
다영은 온몸이 떨렸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간절하게 답했다.“정말 아무것도 듣지 않았어요...”“정말이요?”남준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다영은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질 듯했지만, 입술을 꽉 악물고 끝까지 버텼다.“정말이에요.”남준은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아까의 위압적인 분위기가 사라지며,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리고는 큰 손으로 여자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마치 겁에 질린 새끼 고양이를 달래듯 말했다.“긴장할 필요 없어요. 그냥 가볍게 물어본 거예요.”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영은 몸은 여전히 뻣뻣하게 긴장한 채로 있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남준을 살폈다.남자가 예전과 다를 바 없이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자, 그녀는 간신히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큰일 날 뻔했어...’“그리고 남준 씨, 원래라면 설날연휴에는 나랑 같이 어머님께 인사드리러 가야 하는데...”그러자 남준은 흔쾌히 수락했다.“네... 당연히 그래야죠. 우리는 곧 부부가 될 사이잖아요. 원래 부부는 한몸이잖아요.”남준은 자연스럽게 말하며 그녀를 바라봤다.다영이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남준의 대답에 다영은 순간 놀란 듯 그를 다시 바라봤다.“남준 씨... 아직도 저랑 결혼할 생각이세요?”남준은 그녀를 당연하다는 듯 품에 끌어안았다.그리고는 여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나지막이 말했다.“당연하죠. 제가 당신을 두고 다른 사람을 선택할 것 같아요?”그 확고한 대답에 정다영은 가슴이 벅차올랐다.“난 그냥...”“그냥 뭐요?”남준이 여자의 말을 끊었다.“혹시 파혼이라도 할까 봐요?”“네.”다영은 작게 하고 끄덕였다.그러자 남준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럴 일 없어요.”그 말에 다영의 눈가가 붉어졌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남자의 품에 파고들었다.그리고 남준을 꼭 끌어안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역시... 남준 씨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아요.”남준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웃었다.남자의 손이 다영의 귀 옆
허징인이 상혁을 찾았다는 소식은 남준에게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두 사람이 만나지는 않은 것 같아. 물론 앞으로도 절대 마주할 일이 없을 테니까 별문제는 생기지 않을 거야.’남준은 마음을 다잡았지만, 속내에서는 의문이 피어올랐다.‘내가 오래 지켜본 부상혁이라면, 이유 없이 움직일 리가 없는데...’하지만 상혁이 허징인을 언급했다는 것 자체가 심상치 않았다.남준은 조용히 시선을 들어 상혁을 바라보았다. 상혁은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을 뿐인데, 그 자체로 압도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왕좌에 앉은 자처럼, 이 남자의 존재만으로도 숨이 막힐 듯한 위압감이 느껴졌다.‘혹시... 무언가 알고 있는 건가?’의심이 한 번 피어나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간다. 그러나 남준이가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급히 뛰어 들어온 부하가 숨을 헐떡이며 보고했다.“상무님, 교도소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남준은 정다영의 집에 인사를 가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 옷깃을 정리하던 손이 멈춰 섰고, 표정이 굳어졌다.“무슨 일인데 그래?”부하는 다급한 얼굴로 모든 걸 털어놓았다.“정규인이 교도소에서 난동을 부렸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변호사를 불러서 항소재판을 열겠다고 난리를 치고 있습니다.”남준의 표정이 급격히 변했다. 순식간에 부하의 멱살을 움켜쥐며 낮은 목소리로 윽박질렀다.“잘 갇혀 있던 놈이 왜 갑자기 그러는 건데?”부하는 당황하여 중얼거렸다.“혹시... 어쩌면 허징인과 그 아들...”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준이 단칼에 잘라버렸다.“말도 안 돼. 이 일은 우리 쪽만 알고 있어. 교도소 안에 있는 정규인이 대체 어떻게 알겠어?”부하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맞습니다. 우리 쪽에서 철저히 감시하고 있습니다. 그가 외부와 접촉할 방법은 없습니다.”그러나 의구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정규인,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남준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멱살을 놓았다.‘이상한 일이 벌어지면 반드시
하미주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다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뭔가 수상했는데,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얼굴의 표정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졌다. 어떤 상황이든, 그녀가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 딸이 후회하지 않는 길을 가는 것. “다영아, 너는 마음이 너무 순진해. 제발, 누군가에게 이용당하는 일만은 없었으면 좋겠구나.” 그러나 다영은 마치 그 말이 기분 나쁘다는 듯, 휙 손을 뿌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엄마, 그런 말씀 이제 그만하세요.” 다영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내 선택을 믿어요. 그리고 엄마도 나를 응원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만약 아직도 의심이 된다면, 내일 남준 씨가 오면 직접 물어보세요.” 하미주가 무슨 말을 더 하기 전에, 다영은 그대로 돌아서서 방을 나가버렸다. 딸이 사라진 자리에서, 하미주는 그저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설날 다음 날.아침부터 집사는 현관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곧장 앞으로 다가가 공손히 인사했다. “부 대표님.” 상혁은 무심하게 손목을 들어 올려, 소매 끝을 단정히 정리했다. 우아하면서도 여유로운 움직임.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목소리. “어제 맡긴 일, 확인했나요?” 집사는 목소리를 낮추며 조용히 보고했다. “후원 CCTV를 확인한 결과, 어젯밤 그곳에 있던 사람은 남준 도련님이었습니다.” 상혁의 손이 멈추지 않았다. 그저 차분하게 마지막 단추를 여미고, 시계를 찬 후 말했다. “알았어요. 나가봐요.” 집사가 조용히 퇴장하자, 상혁은 변함없는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이미 남준이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형,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상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답했다.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서로 마주 앉아 있었지만, 그 사이에 감도는 공기는 묘한 정적으로 가득 차 있었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서둘러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정신을 바짝 차리며 정다영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엄마, 남준 씨가 아마 많이 바쁜가 봐요. 일 끝나면 꼭 세배하러 올 거예요.” 하지만 하미주는 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은 눈이 멀지 않은 이상, 최근의 분위기를 못 느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요즘 들어 사람들의 태도가 어떻게 변하는지 똑똑히 보고 있었다.지금 자신마저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힘이 빠진다면, 언제든 등을 돌릴 준비가 되어 있는 게 세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애초에 하미주는 딸과 남준의 결혼 자체를 반대한 사람이었다. 하미주가 보기엔, 아무리 돈이 많고, 외형적으로 그럴듯해 보여도, 남준은 결국 ‘첩’의 자식이었다. 그런 가정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자랐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다영은 기어코 남준을 붙잡겠다고 난리였다. 그것도 마치, 그 남자가 아니면 죽기라도 할 것처럼. 결국 정지철이 남준을 높게 평가하자, 하미주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거였다. 그래서 약혼까지는 허락했는데 예전엔 그럭저럭 신경을 써주던 남준이, 이제는 대놓고 얼굴도 안 비췄다. 하미주는 아주 불만이 많았다.‘명절에 처가집 한 번 들를 생각도 없는 사위가 과연 제대로 가정을 꾸릴 생각이 있을까? 말 다 했지.' 이렇게 생각하자 그녀는 딸의 손을 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다영아, 엄마가 하는 말 기분 나빠하지 말고 잘 들어. 이제 네 아버지가 그런 상황이니, 우리 집도 예전 같지 않아.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도 너도 잘 알고 있지?” 다영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는 당연히 알았다. 아니,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은 더욱 필사적으로 버텨야 한다고 결심했다. 이 기회에 확실히 자리 잡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건 시간 문제일 테니까. “엄마, 집안 사정이랑 내 결혼은 상관없는 일이에요.” 하미주는 깊은 한숨을 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
상혁은 풍등을 들고 하연과 함께 마당으로 나왔다. 타이밍 좋게 하인이 라이터를 건네주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멀지 않은 곳에서 부남준이 조용히 고개를 내밀었다. 몰래 지켜보던 그는,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풍등을 펼치는 모습을 바라봤다. 상혁이 직접 가운데 심지에 불을 붙였다. 뜨거운 열기가 천천히 풍등을 부풀게 만들었고, 풍등은 두 사람 앞에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연아, 빨리 소원 빌어!” 하연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간절히 소원을 빌었다. 상혁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또 다른 소원을 빌었다. ‘언제나 우리 둘이 해마다, 해마다, 서로를 마주할 수 있기를.' “다 됐어요.” 하연이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 눈빛에는 반짝이는 빛이 서려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서서히 손을 놓았다. 풍등은 하늘을 향해 천천히 날아올랐고, 점점 멀어지더니 마침내 한 점이 되어 사라졌다. “어떤 소원 빌었어?” 상혁이 손끝으로 하연의 귓불을 살짝 어루만지며 물었다. 하연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깜빡이며 말했다. “소원은 말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대요.” “그래? 그럼, 네 소원이 꼭 이루어지길 바랄게.” 두 사람은 다시 눈을 마주쳤다. 상혁의 숨소리가 깊어졌다. 그는 하연의 턱을 살며시 잡고,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을 맞췄다. 조심스러웠던 키스는 점점 더 깊어져 갔다. 하연은 숨이 가빠졌다. 상혁을 밀어보려 했지만, 오히려 더 깊이 끌어안겼다. 여자의 허리는 유연하게 휘어졌고, 상혁의 등은 팽팽한 활처럼 긴장됐다. 결국, 하연도 상혁의 목을 감싸 안고, 키스에 응답했다. 그러나 그 순간, 불청객 같은 전화벨 소리가 분위기를 깨뜨렸다. 하연은 화들짝 놀라며, 급하게 상혁을 밀어냈다.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익은 사과처럼 새빨개졌다. “전화 울리는데요?” 하연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져 있었다. 묘하게 사람을 간지럽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상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