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안부르면 안 올 거냐?]하민은 영상통화 분위기가 좀 얼어붙자, 긴장을 풀려고 하성에게 직접 물었다.하성은 호되게 혼나고 나서 얼굴을 들지 못했다.“그럴 리가, 할아버지의 생신에 어떻게 감히 안 갈 수 있겠어.”하연이 뒤에서 몰래 웃었다. ‘셋째 오빠 다룰 수 있는 사람은 큰오빠와 할아버지뿐이구나.’최동신은 나이에 비해 꽤 정정한 편이었다.[하연이의 나노로봇 프로젝트를 잘 도와라.]최동신은 최하경에게 당부했다.“아이고, 할아버지, 둘째 오빠한테 말 안 하셔도 돼요. 오빠도 최선을 다할 거예요.” 하연은 두 오빠의 목을 양팔로 껴안고 환하게 웃었다.하경은 담담하게 대답했다.“물론이죠.”하연이 지금 이렇게 사업에 전념하는 것을 보고 최동신은 마음이 놓였다.[할아버지 이제 쉬셔야 해. 끊는다.] 최하민이 화면 앞으로 나와 말했다.가족은 그제야 영상통화를 마쳤다....거실에서 민진현은 한가롭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그는 좋은 소식을 기다리며 습관적으로 엄지손가락을 어루만지다가 아끼던 백옥 반지를 아직 되찾지 못한 것을 깨닫고 마음이 울적해졌다. 하지만 곧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자 다시 기뻐서 트로트 곡조를 흥얼거렸다.한쪽에 서 있던 집사는 오랫동안 앉지도 못하고 서서 내내 시간만 확인했다. 아까 보냈던 사람들이 아직도 답장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민진현의 흥을 깰까 봐 슬그머니 다른 쪽으로 가서 문신남에게 전화를 걸었다.수차례의 통화 시도 끝에 겨우 연결되었다.“이봐! 너희들 뭐 하는 거야? 이런 사소한 일을 아직도 못 끝냈어? 그 여자 물건 뺏었어?”[여기는 경찰서입니다. 마침 관계자들을 찾고 있었는데 지금 서로 나와주십시오.]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울렸다.집사는 놀라서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얼른 민진현에게로 달려갔다.“회장님, 큰일났습니다. 그 사람들이 지금 경찰서에 있답니다. 지금 회장님께 좀 오시라고 하는데요!”민진현은 놀라서 찻잔뿐만 아니라 찻주전자까지 모두 깨뜨렸다.‘반반한 얼굴 하나 믿고
[내 말이 맞잖아?] 하연의 조롱하는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렸다.한서준은 전혀 사과하지 않았다.“민진현은 네가 상대할 만한 사람이 아니야. 다 너를 위해서라고.”[나를 위해주는 척은 됐어, 그 인간이 공격해오면 나도 나대로 방법이 있어!]전화가 갑자기 끊기고 점차 어두워지는 핸드폰 화면을 보면서 서준의 눈에서 분노가 일었다.‘이런 바보 같으니!오늘 내 말 안 듣고, 그때 가서 어떻게 하는지 보자!’이때 차 앞좌석의 비서가 보고했다.“한 대표님, 구동후 실장님이 F국 쪽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겼다고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직접 가보셔야겠습니다.”한서준은 눈을 감고 숨을 잠깐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알았어, 가장 빠른 비행기편으로 예약해.”F국 쪽의 업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구동후를 보내서 정세를 살피는 중이었다.최근 회사의 업무에서 손을 뗄 수 없었다. 하연이 있을 때보다 훨씬 바빠진 것은 사실이었다.‘최하연, 한 번쯤 고생해봐도 좋겠지. 다 잃고 가진 게 없을 때 손을 내밀어 도와주고 다시 HT그룹으로 돌아와서 도와달라고 하는 편이 훨씬 쉽겠지...’...하연이 전화를 끊은 후 고개를 돌리자 하경이 하성과 통화중인 것을 발견하고 달려들어 끊게 하려고 했다. 이미 통화가 끝난 것을 보고 손을 놓았다.“방금 왜 전화 못 하게 했어? 네 그 찌질한 전남편 욕할 거였는데!”“요새 좀 덜 맞아서 몸이 근질근질하지?”하경이 눈빛으로 경고하자, 하성은 즉각 고분고분하게 말을 들었다.하연은 서준과 통화한 후 답답한 마음이었다. 그런데 오빠들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고 갑자기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마음이 개운해졌다. 전 세계를 적으로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내 뒤에서 응원해주는 가족과 친구들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가족과 친구들이 바로 하연의 전부였다.하연은 가볍게 웃었다.“둘째 오빠, 좀 살살 해. 셋째 오빠 팔이 이제 좀 나았는데.”“그래! 사랑하는 동생을 이렇게 험하게 다루다니! 나중에 큰형이랑 할아버지께 다 말할 거야!”하성
“안 돼,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해. 다른 사람들이 내가 무서워한다고 느끼게 하면 안 돼.”‘그런 뜬소문으로 나를 굴복시키려고?’‘내 사전에 ‘굴복’이라는 단어는 없어!’하연은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 출근 준비를 했다.DS그룹 빌딩 안.문화 예술계 기자들이 이미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다.빨간 포르쉐 한 대가 그들 앞에 세워져 있다.차 안의 정기태가 말했다.“사장님, 선글라스를 쓰거나 모자로 가리시겠어요? 이 사람들이 함부로 사진 찍는 것 때문에 언짢으실 수 있습니다.”“아니요.” 하연은 밝은 웃음을 지으며 차량의 룸미러를 향해 자신의 화장을 보면서 아름다우면서도 예리함이 느껴지는 것을 보고 아주 만족해했다.“그런 루머들에 휘둘릴 내가 아니라는 걸 보여줄 거야.”기태는 먼저 차에서 내렸고 한쪽의 경호원들은 이미 인간띠를 만들어 기자들을 뒤로 물러서게 했다.기태가 차문을 열고 하연이 차에서 내리는 것을 맞이했다.고급 큐빅이 박힌 치마를 입어 하연의 온몸이 눈부시게 빛나고, 여전히 빈틈없는 완벽한 웃음을 보였다. 기자들은 흑역사가 만천하에 공개된 하연이 대중 앞에서 얼굴을 못 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하연은 전혀 그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카메라 플래시가 쉬지 않고 터지자 하연은 확신에 찬 눈빛으로 안으로 들어갔다.“최하연 씨! 결혼 중 외도한 것에 대해 한 대표님께 사과할 생각입니까?”“이 결혼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사이먼과 부적절한 관계였습니까?”“그 학교폭력 피해자들의 이름을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까?”“죄값은 어떻게 치를지 생각해 보셨습니까?”이때 기자의 뒤쪽에서 밀크티 컵이 날아와 최하연의 뒤통수를 내리치려 하자 한 그림자가 재빠르게 나타나 손으로 컵을 막았다.하민의 눈동자는 날카로운 화살처럼 컵이 날아온 방향을 확인하고 한쪽의 경호원들을 향해 달려갔다.“컵 던진 사람을 찾아라.”“네!”하연은 갑자기 나타난 하민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코끝이 찡해져서 하민의 팔을 붙잡고 기대어 섰다.어려움이 닥쳐서 도움이 필요할
[예쁜 언니, 우리 민성시립대학교 정문 앞에서 만나기로 할까요?]하연은 그제야 자신이 최근에 외출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떠올렸다.[너희들 지금 어디 있니? 내가 사람을 보낼게, 이 쪽으로 같이 와.]한 시간 뒤.DS그룹 빌딩 입구에서 기자들은 시간을 끌며 떠나지 않고 모두 사진을 한 차례 더 찍기 위해 하연이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렸다.그때 업무용 차량 한 대가 멈추고 차에서 똘똘한 눈을 가진 학생 셋이 내렸다.눈치 빠른 기자는 한눈에 맨 앞의 소녀가 올해의 B시 대학 입시 수석 합격자인 김혜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뒤에 있는 두 남자아이 역시 김혜인에 못지 않은 실력자였다. 각각 이과 제1위 정성민과 올해 청소년문학상(장편소설 부문) 대상을 받은 전시원이었다.그들의 윗입술 위 인중에는 모두 옅은 수술 흉터가 있는데, 그것은 선천성 구순구개열 수술 흔적이었다.마침 11월, 바로 대학입시가 결과가 나올 때 유명인들의 스캔들 외에 대학입시 결과도 네티즌들의 관심사 중 하나였다.카메라와 마이크가 김혜인과 친구들 앞으로 다가왔다.“우선 김혜인, 정성민, 전시원 세 학생이 매우 높은 점수로 민성시립대학교에 합격한 것을 축하합니다.”보통 얼굴에 결함이 있는 아이들은 카메라를 마주하면 다소 열등감을 느끼고 부끄러워하지만, 이 세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웃으며 학생답게 말했다.“감사합니다.”“세 학생이 정말 어려운 가정에서 전국의 학생들이 동경하는 민성시립대학교에 합격했네요. 학생들의 실력과 정신력 모두 대단합니다. 혹시 이번 입시에서 합격한 학생들만의 비결을 알려주실 수 있나요?”“예쁜 언니가 항상 우리를 후원해 주셨어요.”“그분은 저와 친구들이 학교에 다니는 동안 모든 비용을 지원해 주셨고, 또 저희 사는 동네에 의료전문가를 보내주셔서 구순구개열 수술을 받도록 도와주셨습니다.”“입시 준비 기간동안 저희에게 길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 주셨어요.”기자들은 비록 스캔들이나 가십을 캐내려고 질문할 때 일부러 지나치게 자극적인 언사로 극단적인 추측성 기사
하연은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맞아, 내가 그 사람 맞아.”“근데 어떻게 언니를 그렇게 욕할 수 있어요? 제가 내려가서 다 말할게요!” 전시원은 셋 중 성격이 가장 급했다.“나도 같이 가!”“나도!”“아니야, 잘못한 게 없으면 결국 진실은 밝혀지기 마련이야.” 하연은 자신을 염려하고 편드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만 오해하지 않으면 돼.”하연은 세 아이들에게 대학에 입학하면 무엇이 더 필요한지 같은 것들을 물어보고, 모두 자기에게 말하라고 했다. 생활비로 쓸 카드를 줘서 너무 빠듯하게 살지 않아도 되게끔 처리했다.또한 자신이 후원자임을 알리지 말라고 아이들에게 신신당부한 뒤 경호원을 배치해 지하 주차장을 통해 세 아이를 내보냈다.세 아이를 보내자마자 나운석에게서 또 전화가 왔다.그는 최근에 하연의 지시로 자주 출장을 갔는데, 하연에게 미안한 마음 때문에 기꺼이 먼 길을 자청해서 다녔다.전화에서 그는 하연에게 먼저 언론의 보도가 얼마나 악의적이고 날조됐는지를 비난하고, 또 하연을 위로하며 하연이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의미 있는지를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속히 귀국하고 싶다는 마음을 전했다.하연은 한참 몰래 웃다가 목청을 가다듬고 대답했다.“이번에 M국에서 업무가 끝나면 D국으로 돌아와 며칠간 있으면서 할아버지 생신연회에 참석해도 됩니다.”운석은 하연의 말에 신나서 전화를 끊었다.최하민이 다시 문을 밀고 사무실로 들어왔다.여동생의 웃는 모습을 보고, 한결 여유 있는 표정으로 말했다.“원래 너랑 이틀 동안 같이 있을 생각이었는데, 이사회에 일이 좀 있어서 오늘 가야 돼. 나는 이번에 하경이와 함께 가고, 하성이가 너랑 같이 있어줄 거야.”하연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턱을 책상에 괴고 엎드렸다.“셋째 오빠는 너무 시끄러운데.”“하성이가 있어야 네가 안 심심할 걸.”“알았어요, 큰오빠랑 둘째 오빠도 기운 내요.”아마도 주가 하락 문제로 귀국해야 하는 상황일 것이다. 꼭 하민이
하성은 해외로 전화를 걸었다.“팀 최정예 멤버 전원 다 일어나서 지금 온라인으로 내 동생과 게임하도록 해주세요.전문 바텐더가 방금 만든 칵테일을 하연에게 건네주었다.“몇 분만 기다리면 사람들이 곧 들어올 거야.”하연은 힘없이 게이밍 다리를 동그랗게 하고 의자에 앉아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바다 건너 G국은 현재 시간 새벽이었다.EDF e스포츠 클럽의 책임자 존은 전화를 받고 깜짝 놀라 일어나서 즉시 슬리퍼를 신고 팀원들의 방 입구로 달려가 급하게 팀원들을 소집했다.3분 뒤 잠에서 덜 깬 팀원들은 담요를 걸치고 하품을 연발하며 방에서 나왔다.“존, 지금 새벽이야. 평소에 새벽 훈련하지도 않는데 뭐하는 거야!”존 역시 다크 서클이 확연했지만 겨우 기운을 쥐어짜내서 신나는 척했다.“여러분 잘 들으세요! 우리 팀 사장님한테서 방금 연락이 왔어요.”팀원들은 이 말을 듣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소문으로만 듣고 실제로는 만난 적이 없는 사장, 말보다는 돈이 더 많은 부자로서 분기마다 EDF에 600억원의 상금을 지급한다. 큰 대회에서 우승하면 금액이 더 높다.얼마 전 EDF가 ‘위너스 클럽' 글로벌 파이널에서 우승하자 사장은 2000억원의 큰 보너스를 지급했다.그날 밤은 우승이라는 명예보다 어마어마한 현금폭탄 때문에 팀원 전체가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지경이었다.“전원 30초 내로 로그인한다! 사장님의 여동생과 함께 탑을 밀어버리는 거야!”팀원들은 1초라도 늦을 세라 재빨리 컴퓨터 책상 앞으로 달려갔다.존은 멤버들을 다 자리에 앉히고 즉시 하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성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응, 멤버들이 게임하면서 내 동생 플레이에 좀 신경 써주고, 바론은 내 동생이 죽이게 넘겨주면 돼.]“알겠습니다.”하성은 전화를 끊고 하연을 게임에 접속시켰다.새로운 판이 시작되어 탑, 정글러, 미드, 서포터가 모두 자리잡고 나자 하연이 나타나 닉네임을 ‘바론은 내가 죽인다’로 고친 후 게임을 시작했다.짧디짧은 15분의 플레이 후 하연의 마지막 일
하성은 담담하게 존에게 연락했다.“팀원들에게 경기 잘 하라고 하세요. 상금이 적지 않을 겁니다.”그런 다음 전화를 끊었다.“오빠, 언제부터 게임팀에 투자했어요?”하연은 칵테일을 한 모금 마시면서 궁금한 표정으로 하성에게 물었다.“아직은 게임 초보잖아, 맨날 지기만 하고. 팀 동료들에게 원망을 들을 수도 있어. 그래서 홧김에 4 천억원을 들여가지고 사람들을 찾아서 팀을 만들었는데, 아직은 잘 안돼. 돈을 들이붓기는 하는데 팀 성적은 그냥 그래.”하성은 게이밍 의자를 흔들며 제멋대로 웃었다.“앞으로 이 팀은 네 거야. 오늘 너한테 선물하는 거야.”하연은 윙크했다.“그럼 잘 받을게!”핸드폰에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고 하연은 생각없이 통화 거절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뜻밖에도 상대방이 한 번 더 전화를 걸어왔다.“여보세요.”[최하연, 내가 얼마나 무서운 줄 알았으면 손가락질 당하면서라도 와서 우리 혜경이한테 곱게 사과해.]민진현은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인터넷에서 사람들에게 단체로 욕을 먹는 기분이 어떠냐?]하연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아, 이 정도 실력이세요?”하연은 여유롭게 말했다.“당신이 수십 년 동안 업계 탑을 달리길래, 이제 다른 능력도 좀 있나 했더니, 수법이 다 시정 잡배나 하는 짓거리네요.”“도박으로 판 당 몇 백만 원씩 벌고, 경호원들 시켜 협박이나 하고, 사방에 유언비어를 날조하고...,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동네 깡패나 하는 짓인데, 다른 사람 앞에서 덕망 높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나요?”[비록 내 수법이 어디 내놓기 부끄럽기는 해도, 너를 B시에 발도 못 붙이게 하기는 충분하지.]민진현은 냉혹하게 흥얼거렸다.[이것이 마지막 기회야. 네가 내 반지를 돌려주면 혹시 아나? 내가 기분이 좋아져서 너에 관한 악성 루머에다 물타기 좀 하라고 할지.][그래도 네가 내놓지 않으면...]전화기 너머의 민진현의 목소리는 대단한 수단이라도 숨기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안 내놓으면 어쩔 건데요?”
첫 비행기 사고에서 하연은 한서준이라는 남자의 실체를 확실히 깨닫고 자신의 결혼을 객관적으로 되돌아볼 수 있었다. 내가 잘해 주는 만큼 상대도 나에게 잘 할 거라고 생각했던 착각에서 깨어난 것이었다.근데 두 번째는?돌고 돌아 제자리였다.‘내 옆에는 아무도 없구나.’하연은 눈을 내리깔고 자신의 깨진 휴대전화 액정을 쳐다보며 침묵에 잠겼다. 눈시울은 어느새 붉어져 흠뻑 젖었다.이때 갑자기 밖에 광풍이 세차게 불었다. 헬리콥터 한 대가 천천히 착륙했고, 이어서 양복과 가죽 구두를 걸치고 귀티 나는 키 큰 남자가 내려왔다.그의 표정은 침착하고 의연했다. 착륙한 후 한눈에 자신이 찾으려는 사람을 알아보고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헬리콥터의 소리가 너무 커서 구조된 다른 승객들은 모두 걸어 들어오는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모두들 이 남자가 누굴 데리러 왔는지 궁금해했다.“멋져, 다친 공주님 데리러 온 거야!”하연은 그 사람들이 말하는 방향으로 볼 기분이 아니었다. 다만 이 말을 들은 후 눈물이 펑펑 쏟아져 멈추지 않았다.다들 친구나 가족들이 데리러 왔지만 하연만 여전히 혼자였다.사방이 갑자기 조용해지고 차분한 발자국 소리가 하연의 귀에 들렸다. 점점 또렷하게 들려왔다.하연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들어 발자국 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뒤에는 온통 불빛이었고, 남자는 부상당한 승객들의 기대에 가득 찬 눈빛을 뚫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왔다.누구인지 똑똑히 보려고 노력했는데 쏟아지는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려져서 윤곽만 겨우 보였다. 아주 익숙한 실루엣이었다. 점점 더 가까워지자 하연은 자기도 모르게 그 이름을 불렀다.“부... 상혁?”발자국 소리가 하연 앞에서 멈추고 상혁의 따뜻한 손이 하연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상혁은 엄지손가락으로 하연의 눈물을 가볍게 닦았다. 마치 하나밖에 없는 보물을 대하는 것 같았다.“나 왔어, 하연아.”낮고 강한 상혁의 목소리는 하연의 마음속 불안을 잠재웠다. 마치 따뜻한 태양이 안개를 비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정문 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부동건이 고개를 돌리자, 최하연이 부상혁의 팔을 자연스럽게 끼고 등장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많은 이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잘생긴 남자와 우아한 여자의 조합. 누가 봐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 ‘딱 봐도 좋은 그림이야. 저 둘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길을 끌어...’ “회장님, 부상혁 대표님은 정말 복도 많으십니다. 최씨 가문의 따님과 이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부동건의 표정이 확 풀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묘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부동건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젊은 사람들이 서로 마음이 맞아 좋아하는 걸, 우리 어른들은 그저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줘야 하는 일일 뿐이지요.” “게다가 상대가 최씨 가문의 따님이라니, 정말 금상첨화가 아닙니까.” 부동건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역시 상혁이다. 내 아들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상혁은 오늘 이 자리에서 당당히 아버지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었다. 한편, 송혜선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 얼굴에 띄웠던 미소는 점점 사라져 갔고,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하연에게 향했다. 오늘의 하연은, 나무나 예쁘고... 아니, 그냥 눈이 부실 만큼 찬란했다. 그리고 또렷한 이목구비에 윤기 흐르는 머릿결, 화사하게 피어난 얼굴빛까지. 하연의 행복함이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송혜선의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정다영... 그년, 나를 속였어.’ 그동안 하연 쪽에서 뭔가 반응이 있을 줄 알고 기다려 왔다. 하지만 소식은커녕, 정다영조차 자취를 감췄다. ‘다영이 걔가 하연이에게 약 먹이는 계획이 분명 실패한 거야. 그렇지 않고 선 지금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서 있을 수는 없어.’ 이대로 배가 불러오면, 섣불리 손도 쓸 수 없게 된다. ‘
이 질문에 송혜선은 눈을 반짝이며 부동건을 바라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젠 나를 당당히 소개해 줄 때가 됐겠지.’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는 부동건의 정식 아내로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회장님, 말씀 좀 해보세요?” 조금은 성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주변의 시선도 하나둘 송혜선과 부동건을 향했다. 모두 속으로는 뻔히 알고 있었다. 부동건이 과연 예전 애인을 진짜로 정실로 앉혔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부동건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숨기거나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담백하게 말했다. “오 회장님, 이 사람은 제 딸의 어머니입니다.” 순간, 송혜선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딸의... 어머니?’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이 살짝 흔들렸다. 금세 넘칠 듯한 와인, 애써 잡고 있는 감정. ‘지금... 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억울함이 툭 하고 솟구쳤다. 심지어 손에 힘이 들어가며 하얗게 질린 손등이 떨렸다. 오병지는 단번에 눈치챘고, 싱긋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고, 대신 가볍게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부 회장님, 여전히 복이 많으시네요.” 부동건은 공손하게 웃으며 송혜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손길엔 무언의 위로가 담겨 있었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저와 이 사람의 결혼식엔 꼭 오셔서 축배 들어주세요.” 그 말에 송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결혼식...?’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이어서 고개를 들며 수줍게 웃었다. “회장님...” 부동건은 말없이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그 행동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 시선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송혜선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던 눈빛이, 지금은 선망과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결국, ‘부동건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송혜선은 온
부지윤의 ‘한 달 잔치’는 그야말로 성대한 수준의 파티였다. 초대받은 인사들만 봐도, 그 위세가 느껴졌다. F국 재계의 실력자들, 정재계의 핵심 인물, 이름만 대면 아는 명문가 자제들이 대거 초청됐고, 심지어 부씨 가문 어른들에게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직접 청첩장을 보냈다. 이 정도면, 사실상 이 아이를 공식적으로 가문에 편입시키겠다는 의지나 다름없었다. 부동건이 이 아이에게 얼마나 애정을 집착하듯 쏟고 있는지, 이날 행사 하나로 증명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부동건은 스스로의 체면과 명예를 걸고, 딸을 세상에 내보이고 있었다. ...잔치 당일, 연회장은 유난히 붐볐다. 샹들리에의 조명이 화사하게 반짝였고, 고급스러움이 풍겨 나는 악단의 선율이 분위기를 감싸고 있었다. 송혜선은 산후조리를 마친 직후였지만, 여전히 그만의 풍채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예전보다 조금 살이 오른 듯했지만, 그 덕에 오히려 분위기가 더 너그러워 보였다. 그녀가 행사장에 들어서자, 평소 자주 어울리던 재벌가 부인들이 앞다투어 다가왔다. “혜선씨는 진짜 복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 고생 끝에 드디어 볕뜰날이 왔네요.” “부 회장님이 이렇게까지 챙기시는 거 보니까, 이제 정말 한 자리 하시겠어요.” “정말 이러다 조만간 ‘겹경사’ 나는 거 아니예요? 우리라도 미리 축하해줘야 하는 거야?” 송혜선은 그 소리에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얄미울 정도로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역시 사람은 자리가 높아야 대접 받는 거야.’ “지윤이는 회장님의 첫 딸이잖아요. 그러니까 귀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회장님이 우리 모녀를 절대 가볍게 보지 않으신다는 건, 여기 있는 분들도 느끼셨을 테고요.” 그 말에 다들 박수까지 치며 웃었다. “이제 우리도 호칭 바꿔야지, 사모님!” 누군가 먼저 그렇게 불렀고, 뒤이어 몇몇이 장난처럼 따라 불렀다. 송혜선은 그 말에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턱을 살짝 들며, 그 호칭이 제법 익숙
진윤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마침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남준은 법을 무시하고, 사람을 죽였어요. 부씨 가문이 이 일에 개입한다면... 여론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감싸려 들면 들수록, 결국은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겠죠.” ‘이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가문의 존망이 걸린 문제야.’ 맞은편 소파에 앉은 상혁은 다리를 꼬고,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눈빛엔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세속의 먼지 따윈 전혀 묻지 않은 사람처럼. 진윤의 말이 끝났지만, 상혁의 표정엔 미동 하나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씨 가문은 항상 법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여왔습니다. 그건 변하지 않습니다, 여사님.” 그는 손짓으로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거기엔 작은 검은색 USB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 안에... 고나희 씨가 남긴 게 있습니다. 여사님께 드리라고 하더군요.” 순간, 진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표정으로, USB를 바라봤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그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희가... 뭔가를 남겼다고...?’ 사고는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딸의 마지막을 함께할 시간조차 없이, 그녀는 세상을 떠났고, 어떤 유언도,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줄 알았다. “나희... 그 애가... 무슨 말을 남겼다는 거예요...” 진윤은 입을 틀어막았다. 눈물은 이미 참을 수 없다는 듯 쏟아지려 하고 있었다. 상혁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사람이 떠난 건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남겨진 마음은, 누군가가 반드시 전해야죠.” 그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거운 공기를 뒤로한 채, 조용히 방을 나섰다. 잠시 후.룸 안에서 낮고, 억눌렀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희야...” 진윤은 USB를 손에 쥐고,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울고 있
진윤은 송혜선이 내민 공백 수표를 내려다보며 손끝까지 떨렸다. 종이 한 장.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그녀의 심장을 조용히 갉아먹었다. ‘돈이란 게... 사람을 어디까지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 건지.’ 그녀는 허탈하게 웃었다. “돈, 참 좋은 거죠. 수많은 집이 그거 하나 때문에 무너지고, 사람 목숨도 스스럼없이 거래되고.” 그녀의 눈빛이 서서히 날카로워졌다. “고경수도 그랬어요. 결국 돈 때문에 스스로 감방에 들어갔고, 지금 당신은 그 돈으로 내 아이의 죽음을 사겠다는 거죠.” 진윤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을 꿰뚫었다. “송 여사님의 눈엔... 돈이면 뭐든 다 해결돼요?” 송혜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진윤은 고개를 들었다. 쭉 뻗은 어깨, 흐트러지지 않은 눈빛으로 조용히 말했다. “근데, 저에게 그딴 건... 아무 의미 없어요.” 테이블 위의 수표는 그녀 눈엔 그저 휴짓조각에 불과한 쓰레기였다. ‘내 아이 이름 위에 적힌 숫자가 많을수록, 그 애는 더 억울해지는 거야.’ 그런 진윤의 단호함에, 송혜선도 이내 표정을 굳혔다. “정말 고집 세시네요, 여사님.”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용히 진윤 쪽으로 다가섰다. 10센티미터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서, 송혜선은 하찮다는 듯이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며 진윤에게 시선을 내리꽂았다. “그 자존심,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 볼까요?” 그 말투엔 이젠 더 이상 숨길 필요 없는 위협이 담겨 있었다. “당신에게는 지금, 아무것도 없어요. 남편은 감옥, 딸은... 하늘에 있어. 그런데도 이렇게 버티겠다고? 부씨 가문이 마음만 먹으면, 당신 같은 사람 하나쯤 사라지게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에요.” 진윤은 순간 움찔했지만, 눈동자는 미동도 없이 그대로 송혜선을 바라봤다. 송혜선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참, 고경수 씨 말인데요. 그 사람, 아직 당신한테 마음 있더라. 감방에서 계속 당신 얘기만 했대요.”
“그저...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을 뿐이에요. 여사님. 같은 여자로서, 제 처지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해해주시리라 믿어요.” 진윤은 피식, 코웃음을 쳤다. 커피잔을 천천히 들어올리더니,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천천히 한 모금 머금었다. “이해? 아니요. 전 그런 거 몰라요.” 단칼처럼 냉정하게 잘라버린 말이었다. 그 한 마디에 송혜선의 입술이 경직되며 굳어버렸다. ‘이런, 내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아...’ 하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송혜선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진윤의 손등을 잡았다. “여사님... 따님 일에 대해서는, 정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윤이 빠르게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이내 터져나온 감정. “사과? 한 아이가 죽었는데, 고작 한 마디 사과로 끝내겠다고요?” “아니면... 송 여사님의 눈엔 제 딸 목숨이 그깟 아무렇게나 다뤄도 되는 값싼 거였어요?” 그 목소리는 카페 전체를 울릴 만큼 컸고, 송혜선은 순간 움찔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진윤의 눈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여사님. 흥분하지 마세요... 결국... 이 모든 건 우리 부씨 집안이... 정말 죄송합니다.” 진윤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웃음 속에서,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결국 끌어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웃으면서 울었다. 그 모습은 너무 아프고, 너무 무너져 있었다. 진윤은 눈물을 닦으려 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송혜선은 주섬주섬 가방에서 티슈를 꺼내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하지만 진윤은 그것조차 거부했다. “됐어요. 그런 거, 필요 없으니까.” “송 여사님, 솔직히 말해봐요 오늘 여기서 만나자고 한 것도 당신 아들 부남준이 꼬투리 잡혀서, 지금 당장 날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니까 이렇게 만나자고 한 거잖아요.”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 애 죽고, 그동안 단 한 번이라도 날
“닥쳐!!” 송혜선이 낮게 내뱉었다. “그 비밀, 평생 당신 뱃속에 묻어둬.”“아니면... 다시는 당신 딸 얼굴 못 볼 줄 알아.” 조봉규는 그제야 자신이 입을 잘못 놀렸다는 걸 깨달았다. 급히 손바닥으로 자기 입을 철썩 때리며 말했다. “화내지 마, 혜선아. 나도 그냥... 기분 좋아서, 그만...” “앞으로 이 집에서 그 얘긴 두 번 다시 꺼내지 않을게. 약속해.” 조봉규의 간절한 다짐에도, 송혜선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를 한번 쏘아봤다. 곧이어, 목소리를 낮추며 화제를 돌렸다. “부동건, 딸한테 명분은 준다더니, 정작 혼인신고 얘긴 입도 안 뗐어. ‘이러다 또 마음 변하는 거 아니야?’” 그녀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안 돼. 남준이 일은 어떻게 해서라도 반드시 준비해야 해.’ 그 말엔 조봉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알아봤는데, 유가족 쪽에서 합의서만 받아낼 수 있으면, 그 사건도 다시 볼 여지가 있대.” 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진짜야?” “응. 듣자 하니까 고경수 와이프, 진윤... 아직 F국에 있다더라. 기회만 되면 한번 만나봐. 그쪽에서 합의서를 써주기만 하면, 다시 기회는 생길 거야.” “근데 지금 당신 산후조리 중이잖아. 몸이 먼저야.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하지만 혜선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남준이가 내 인생의 마지막 희망이야. 기회가 있다면... 어떤 수라도 써야 해.’ 며칠 후, 송혜선은 드디어 고경수의 아내 진윤과 연락이 닿았다. 하지만 의외로, 진윤은 단 한 마디 망설임 없이 만남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평일 오전, 한산한 분위기의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진 실내엔 손님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고, 송혜선은 긴 트렌치코트에 머리까지 스카프로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 밖에서는 누구도 그녀를 쉽게 알아볼 수 없게끔. 카페 입구에 들어선 그녀는 안쪽을 빠르게 훑었다. 한눈에 알아봤다. 구석 창가에 앉은, 수척한 얼굴의
조봉규의 말은 하나하나 송혜선의 마음을 쳤다. “정 안 되면, 우리도 그냥 확 뒤엎어. 어차피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이잖아. 신발 신은 놈들이야 겁낼 게 많겠지만, 우린 맨발이야.”‘맞아... 지금이라도 안 붙잡으면, 우린 끝장이야.’송혜선의 눈빛이 점점 확고해졌다. 그렇게 마음을 굳힌 채로, 그녀는 곧장 부동건을 찾아갔다.하지만 부동건은 송혜선의 말에 귀를 기울일 틈조차 없었다. 부남준의 사건이 악화로 치닫고 있었다. 갓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결정적 증거들이 줄줄이 쏟아지고 있었고, 경찰 쪽 수사도 속도를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건... 덮을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법 앞에선 아무리 부동건이라도 무력하군.’무거운 책임감과 죄책감이 부동건의 어깨를 짓눌렀다. ‘자식 교육을 제대로 못한 죄, 그건 부모의 몫이야...’그저 무기력하게,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 송혜선의 말은 부동건의 귀에 닿지도 않았다.그는 오히려 조용히 갓 인큐베이터에서 나온 막내딸을 품에 안았다. 부드러운 솜털이 보일 정도로 작고 여린 얼굴. 손가락 하나만 잡혀도 녹아버릴 듯한 느낌이었다.‘이 아이는... 내 마지막 기적일지도 몰라.’부동건은 딸을 안고 있을 때만큼은 세상의 복잡한 모든 것이 잠시 잊히는 듯했다. 그리고 눈가가 부드러워졌다.“딸아, 네 엄마랑 진짜 많이 닮았네. 크면 예쁘겠다... 아주.”그는 미소를 머금으며 속삭였다.“지윤이라고 이름 지었어. 복 많은 아이라고 하더라. 부씨 가문 첫 딸, 제대로 키울 거야. 우리 지윤이는, 아빠의 제일 소중한 딸이 될 거야.”‘그래... 남준이는 못 지켜도, 이 아이만큼은...’부동건의 얼굴은 어느새 기쁨으로 가득했다.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송혜선의 속은 서늘했다.‘정작 내가 말하려던 건, 이게 아닌데...’그녀는 조용히 손을 뻗어 아이를 부동건의 품에서 안아올렸다.“조심해요, 아직 작아서... 그렇게 막 들면 안 돼요.”부동건은 걱정스러운 말투로 송혜선을 바라보며 말했다.“이
부동건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밝은색으로 혈기가 도는가 싶더니 이내 새파랗게 질리더니, 순식간에 붉어졌다.‘이게 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가...’조진숙은 그런 부동건의 반응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차갑고 단호한 말투로 말을 던지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섰다.“당신 입으로 한 말, 잊지 마.”철컥-곧이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조진숙은 완전히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남겨진 부동건은 깊은숨을 내쉬었다.‘딱 한 발, 그 한 걸음이 이렇게까지 망가뜨릴 줄은 몰랐네...’하지만 그는 여전히 조진숙의 마지막 말이 담고 있던 진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평소처럼, 그저 ‘조심하라는 경고’ 정도로 여긴 것이다.그 후 부동건은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형사 전문 변호사를 찾았고, 부남준의 사건을 맡겼다. 그것뿐, 그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소식을 들은 송혜선은 더 이상 산후조리고 뭐고 할 틈이 없었다. 벌떡 몸을 일으키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외쳤다.“남준이는 부동건 당신 아들이란 말이야. 그런데도 이 상황에서 이 사람이 저렇게 손 놓고 있는다고?”그녀에게 있어 부동건은 F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재벌이었다. 사람 하나 죽었든, 법을 어겼든, 그 모든 걸 덮는 것쯤은 그에게 있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그 정도 힘도 못 쓰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내가 그 옆에 왜 있었겠어?’그런데도 부동건은 변호사 하나 붙인 걸로 끝이라니. 송혜선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안 돼. 내가 직접 가서 말해야겠어.”그녀가 일어나려는 순간, 조봉규가 급히 다가와 그녀를 막아섰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어조로 송혜선을 다독였다.“혜선아, 지금은 당신 몸이 먼저야. 다른 건 잠시 내려놔.”하지만 송혜선은 남자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남준이 내 아들이야. 내가 안 나서면 누가 나서? 그 애랑 나, 이 지경이 되도록 얼마나 참고 견뎠는지 몰라? 이제 와서 그냥 두라고?”송혜선은 황급히 신발을 신고, 나갈 채비를 했다. 그 옆에서 어쩔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