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은 해외로 전화를 걸었다.“팀 최정예 멤버 전원 다 일어나서 지금 온라인으로 내 동생과 게임하도록 해주세요.전문 바텐더가 방금 만든 칵테일을 하연에게 건네주었다.“몇 분만 기다리면 사람들이 곧 들어올 거야.”하연은 힘없이 게이밍 다리를 동그랗게 하고 의자에 앉아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바다 건너 G국은 현재 시간 새벽이었다.EDF e스포츠 클럽의 책임자 존은 전화를 받고 깜짝 놀라 일어나서 즉시 슬리퍼를 신고 팀원들의 방 입구로 달려가 급하게 팀원들을 소집했다.3분 뒤 잠에서 덜 깬 팀원들은 담요를 걸치고 하품을 연발하며 방에서 나왔다.“존, 지금 새벽이야. 평소에 새벽 훈련하지도 않는데 뭐하는 거야!”존 역시 다크 서클이 확연했지만 겨우 기운을 쥐어짜내서 신나는 척했다.“여러분 잘 들으세요! 우리 팀 사장님한테서 방금 연락이 왔어요.”팀원들은 이 말을 듣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소문으로만 듣고 실제로는 만난 적이 없는 사장, 말보다는 돈이 더 많은 부자로서 분기마다 EDF에 600억원의 상금을 지급한다. 큰 대회에서 우승하면 금액이 더 높다.얼마 전 EDF가 ‘위너스 클럽' 글로벌 파이널에서 우승하자 사장은 2000억원의 큰 보너스를 지급했다.그날 밤은 우승이라는 명예보다 어마어마한 현금폭탄 때문에 팀원 전체가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지경이었다.“전원 30초 내로 로그인한다! 사장님의 여동생과 함께 탑을 밀어버리는 거야!”팀원들은 1초라도 늦을 세라 재빨리 컴퓨터 책상 앞으로 달려갔다.존은 멤버들을 다 자리에 앉히고 즉시 하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성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응, 멤버들이 게임하면서 내 동생 플레이에 좀 신경 써주고, 바론은 내 동생이 죽이게 넘겨주면 돼.]“알겠습니다.”하성은 전화를 끊고 하연을 게임에 접속시켰다.새로운 판이 시작되어 탑, 정글러, 미드, 서포터가 모두 자리잡고 나자 하연이 나타나 닉네임을 ‘바론은 내가 죽인다’로 고친 후 게임을 시작했다.짧디짧은 15분의 플레이 후 하연의 마지막 일
하성은 담담하게 존에게 연락했다.“팀원들에게 경기 잘 하라고 하세요. 상금이 적지 않을 겁니다.”그런 다음 전화를 끊었다.“오빠, 언제부터 게임팀에 투자했어요?”하연은 칵테일을 한 모금 마시면서 궁금한 표정으로 하성에게 물었다.“아직은 게임 초보잖아, 맨날 지기만 하고. 팀 동료들에게 원망을 들을 수도 있어. 그래서 홧김에 4 천억원을 들여가지고 사람들을 찾아서 팀을 만들었는데, 아직은 잘 안돼. 돈을 들이붓기는 하는데 팀 성적은 그냥 그래.”하성은 게이밍 의자를 흔들며 제멋대로 웃었다.“앞으로 이 팀은 네 거야. 오늘 너한테 선물하는 거야.”하연은 윙크했다.“그럼 잘 받을게!”핸드폰에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고 하연은 생각없이 통화 거절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뜻밖에도 상대방이 한 번 더 전화를 걸어왔다.“여보세요.”[최하연, 내가 얼마나 무서운 줄 알았으면 손가락질 당하면서라도 와서 우리 혜경이한테 곱게 사과해.]민진현은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인터넷에서 사람들에게 단체로 욕을 먹는 기분이 어떠냐?]하연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아, 이 정도 실력이세요?”하연은 여유롭게 말했다.“당신이 수십 년 동안 업계 탑을 달리길래, 이제 다른 능력도 좀 있나 했더니, 수법이 다 시정 잡배나 하는 짓거리네요.”“도박으로 판 당 몇 백만 원씩 벌고, 경호원들 시켜 협박이나 하고, 사방에 유언비어를 날조하고...,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동네 깡패나 하는 짓인데, 다른 사람 앞에서 덕망 높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나요?”[비록 내 수법이 어디 내놓기 부끄럽기는 해도, 너를 B시에 발도 못 붙이게 하기는 충분하지.]민진현은 냉혹하게 흥얼거렸다.[이것이 마지막 기회야. 네가 내 반지를 돌려주면 혹시 아나? 내가 기분이 좋아져서 너에 관한 악성 루머에다 물타기 좀 하라고 할지.][그래도 네가 내놓지 않으면...]전화기 너머의 민진현의 목소리는 대단한 수단이라도 숨기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안 내놓으면 어쩔 건데요?”
첫 비행기 사고에서 하연은 한서준이라는 남자의 실체를 확실히 깨닫고 자신의 결혼을 객관적으로 되돌아볼 수 있었다. 내가 잘해 주는 만큼 상대도 나에게 잘 할 거라고 생각했던 착각에서 깨어난 것이었다.근데 두 번째는?돌고 돌아 제자리였다.‘내 옆에는 아무도 없구나.’하연은 눈을 내리깔고 자신의 깨진 휴대전화 액정을 쳐다보며 침묵에 잠겼다. 눈시울은 어느새 붉어져 흠뻑 젖었다.이때 갑자기 밖에 광풍이 세차게 불었다. 헬리콥터 한 대가 천천히 착륙했고, 이어서 양복과 가죽 구두를 걸치고 귀티 나는 키 큰 남자가 내려왔다.그의 표정은 침착하고 의연했다. 착륙한 후 한눈에 자신이 찾으려는 사람을 알아보고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헬리콥터의 소리가 너무 커서 구조된 다른 승객들은 모두 걸어 들어오는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모두들 이 남자가 누굴 데리러 왔는지 궁금해했다.“멋져, 다친 공주님 데리러 온 거야!”하연은 그 사람들이 말하는 방향으로 볼 기분이 아니었다. 다만 이 말을 들은 후 눈물이 펑펑 쏟아져 멈추지 않았다.다들 친구나 가족들이 데리러 왔지만 하연만 여전히 혼자였다.사방이 갑자기 조용해지고 차분한 발자국 소리가 하연의 귀에 들렸다. 점점 또렷하게 들려왔다.하연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들어 발자국 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뒤에는 온통 불빛이었고, 남자는 부상당한 승객들의 기대에 가득 찬 눈빛을 뚫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왔다.누구인지 똑똑히 보려고 노력했는데 쏟아지는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려져서 윤곽만 겨우 보였다. 아주 익숙한 실루엣이었다. 점점 더 가까워지자 하연은 자기도 모르게 그 이름을 불렀다.“부... 상혁?”발자국 소리가 하연 앞에서 멈추고 상혁의 따뜻한 손이 하연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상혁은 엄지손가락으로 하연의 눈물을 가볍게 닦았다. 마치 하나밖에 없는 보물을 대하는 것 같았다.“나 왔어, 하연아.”낮고 강한 상혁의 목소리는 하연의 마음속 불안을 잠재웠다. 마치 따뜻한 태양이 안개를 비
최동신은 손자 삼형제를 데리고 거실에서 오랫동안 기다렸다.모두 사고 뉴스 보도를 보면서, 처음에는 하연이 무사한 것을 다행으로 여겼지만, 생각할수록 뭔가가 맞지 않았다. 어쩌다 이 두 사람이 이미 인터넷에서 커플이 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최하성은 후회막급이었다. 급히 친구를 만나러 가지 말았어야 했다. 하연 혼자 비행기를 타고 D국으로 돌아오게 해서는 안되는 거였다.부동건은 이 때 손님을 맞기 위해 혼자 거실에 있다가 아들과 아내가 나오자 바로 안심했다.“상혁아, 얼른 최 회장님께 인사드려.”상혁은 앞으로 나가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회장님, 안녕하세요.”“음.”최동신은 감색 한복을 입었다. 머리카락이 이미 백발에 가까웠지만 몸도 건강하고 정신도 또렷했다.하민과 상혁은 서로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원래 동창으로서 평소에 관계가 좋은 편이었다.하경은 마치 데이터를 분석하는 듯한 눈빛으로 상혁을 살펴보았다. 마음속으로는 다음에는 상혁의 컴퓨터를 해킹하여 그의 사생활과 인품을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했다.하성은 팔짱을 낀 채 적의로 가득 차 있었다. ‘대체 어떤 인간이 나만의 하연이를 빼앗으러 왔지? 자기 힘으로 이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하연이 지금 자고 있어요.”상혁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동생을 왜 이렇게 친하게 하연이라고 불어요?”하성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먼저 물었다.“무례하게 굴지 마라!” 최동신은 하성에게 경고했다.최동신은 고개를 돌려 위엄 있는 말투로 말했다.“지금 언론에서 자네와 우리 하연이에 대해 말이 많은데,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하연이를 시집보내는 것이 네 소원일세. 물론 빠르면 빠를수록 더 좋고.”조진숙은 이 일을 꺼내자마자 매우 흥분했다.“우리 상혁이가 하연이 항공편에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만사를 제쳐두고 헬리콥터를 타고 공항에 가서 찾아 데려왔는데, 이것만 봐도 100점을 주고도 남지 않겠어요?”부동건은 물론 조진숙과 마찬가지로 하연을 며느리로 삼고 싶어서 얼른
똑같이 연결이 되지 않았다, 뉴스에서 상혁이 하연을 안고 가는 장면을 보고, 서준은 가슴에서 끓어오르는 질투심을 억제할 수 없었다. ‘저 여자는 정말 전남편쯤은 전혀 안중에도 없단 말이야?’ 서준은 서류철을 바닥에 내동댕이쳤고, 순식간에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한 대표님, 모레 칼리파 호텔에서 최씨 가문의 최동신 회장님의 칠순 연회가 있습니다. 저희도 초청되었는데 바로 비행기표를 예매할까요?” 구동후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예매해!” ... 밤의 칼리파 호텔. 이때 펜트하우스에는 전 세계 최고 부자인 최동신의 70세 생일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전 세계의 손꼽는 부호들이 모두 가족을 데리고 참석했다. 연회에 사용되는 모든 식재료는 외국에서 공수해 세계 최고의 프랑스 요리사를 직접 초청하여 조리했고, 연회의 음악은 세계 유명 오케스트라를 초청하여 연주하게 해서 하객들이 연회를 충분히 즐기도록 준비했다. 한눈에 봐도 이번 연회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었다. 요 며칠간‘악녀 최하연’과 ‘여우 최하연’이라는 두 가지 화제의 열기가 조금씩 사그라들고 있었다. ‘예쁜 언니를 찾습니다.’ 화제는 점점 더 뜨거워지면서 온 온라인상에서 ‘예쁜 언니’를 찾아 그녀의 선행을 보도하려고 했다. 이번 연회에 초대된 사람들은 부자이거나 귀족이었기에 보안은 매우 엄격했다. 초청된 유명 인사들은 모두 최씨 가문의 의외의 계획에 놀랐는데, 최동신이 자신의 칠순 연회에서 대외적으로 알리지 않은 어린 손녀를 소개한다고 해서 모두들 기대가 큰 상황이었다. 운좋게 이 일을 보도할 수 있게 선발된 기자들도 큰 영광으로 생각하며 바로 대서특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금 하연은 의상실에서 준비중이었다.하민은 M국의 가장 실력 있는 전문 스타일링팀을 초대했고,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화려한 드레스를 공수해 와 오늘 밤 하연을 가장 빛나는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당부를 남기고 떠났다. 하연은 상혁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하연아, 네가 나오는 그 순간을
연회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중심 위치에서 최동신과 하민은 사람들과 인사말을 나누었는데 두 사람에게서 자연스러운 카리스마가 풍겼다. 민진현이 민혜경을 데리고 뒤에서 걸어왔다. “최 회장님, 칠순 축하드립니다.” 민진현은 최동신에 대한 존중을 담아 낮은 어조로 말했다. 최동신은 여전히 인사를 나누고 있었지만 눈빛이 점점 차갑게 가라앉았다. “민 회장님, 언제 다시 부호 순위 100위 안으로 복귀하셨나요?” 마치 윗사람이 우쭐대며 아랫사람에게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민진현은 이 말에 당황했지만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딱 100위입니다. 겨우 턱걸이했어요.” 민씨 가문과 최씨 가문의 세력 차이가 너무 컸고, 이번에 부호 순위 100위 안에 들기 위해 민진현은 많은 힘을 썼다. “오늘 밤 손녀를 소개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민진현은 옆에 있는 민혜경을 바라보고 웃으며 말했다. “제 손녀가 사람 사귀는 걸 좋아하니, 회장님 손녀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혜경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최 회장님, 대표님 두 분을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하민은 혜경을 힐끗 쳐다보고는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여동생에게 혜경 씨처럼 교통사고를 일으키는 친구는 필요하지 않을 거 같군요.” 이 말을 들은 혜경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민진현은 하민이 하연의 사고를 두고 한말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하민의 태도를 이해했고 하연을 생각하는 남자이니 이 정도 이야기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흥. 우리가 눈에 거슬리다 이건가? 상관없어! 네 할아버지에게만 잘 보이면 되니까.’ 여기까지 생각한 민진현은 잠시 후에 따로 기회를 봐서 최동신과 몇 마디 나누면서 다시 하연과의 일을 이야기하기로 했다. “그럼 두 분 계속 연회를 즐기세요. 저희는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최동신이 눈썹을 치켜세우고 민진현과 혜경을 힐끗 쳐다보고는 작별을 고했다. 민진현은 웃으며 대답했다. “예, 회장님.” 혜경은 한눈에 무리 속에서 서준의 모
혜경은 오늘을 위해 많은 준비를 했다. 고급스럽게 차려입은 수제 맞춤옷은 한 달 전부터 예약한 스타일로, 임신 5개월이지만 볼륨이 있는 스커트 디자인이 허리라인을 잘 가리고 있었다. ‘뭐, 봐줄 만은 하네.’ 손을 다 닦은 하연은 한마디 했다. “너도 오는데 내가 왜 못 와?” 그리고는 혜경을 무시하며 화장실을 나갔다. “거기 서,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혜경이 뒤 따라 나왔다. 하이힐을 신고 있었던 그녀는 바닥에 있는 물 때문에 발바닥이 미끄러져 앞으로 넘어지려 했다. “아!” 혜경은 순간 뱃속의 아이가 생각나 넘어지지 않으려고 허둥대고 있을 때, 누군가의 손에 붙잡혀 품에 안겼다. 혜경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남자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자 혜경은 놀라 갑자기 안색이 변하며 자신을 도와준 사람을 그대로 밀쳤다. 그리고 그녀는 고개도 들지 않고 자신의 치맛자락을 정리한 후 허둥지둥 도망쳤다. 남자 역시도 뒤이어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하연은 이 모습을 보고 매우 이상하다고 느꼈다. ‘혜경이 저 젊은 남자를 그냥 두고 도망간다고? 예전이라면 화부터 낼 사람이? 물론 오늘은 중요한 날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만, 웬일이지?’ 하연은 시간 보고 드레스 갈아입기 위해 다시 들어갔다. 한편. 연회장의 은은한 음악이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가운데, 금빛 조명 아래서 사람들은 작은 소리로 올해 세계 발전 추세에 대해 이야기했다. 긴 다리의 하민은 무대 위로 걸어 올라갔다. 그가 오케스트라 쪽을 바라보자, 연주자들이 연주를 멈췄다. 현장 사람들도 대화를 멈추고 오늘의 마지막 순서를 기다렸다.최동신은 뒷짐을 지고 무대 아래에 서서 위쪽의 하민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최동신은 이미 경영에서 반쯤 물러난 상태여서 하민이 대신 나서서 발언하는 것이 적절했다.일찍 죽은 아들과 며느리가 어쨌든 자신에게 훌륭한 혈통을 남겼다고 생각하는 최동신은 하민을 보며 더없는 만족감을 느꼈다.“여러분, 저희 할
혜경에게 무대까지는 겨우 10걸음밖에 안 되는 거리였지만, 그 사이에 마치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는 것처럼 느끼게 했다. ‘난 내가 뛰어난 명문가 집안 아가씨라고 생각했는데, 하연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어.’ 하연과 혜경은 사실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생신 연회에서 여러분을 만나 뵙게 되어 너무 기쁩니다.” 하연이 미소 지었다. “요즘 저에 대한 소문이 떠들썩해서 여러분도 잘 아실 거라고 생각됩니다.” 이 말을 듣고 방금까지 하연의 등장으로 놀란 기자들이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셔터를 눌러 중대 뉴스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DS그룹 B시 지사의 최하연 사장이 바로 최동신 회장의 손녀였어.’ ‘최 대표와 그녀가 연인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남매일 줄은 생각도 못했어.’ ‘다시 두 사람을 보니 정말 닮은 것이 누가 봐도 남매잖아!’ 하연은 웃음을 거두며 진지한 표정을 했다. “여기서 진지하게 한 말씀 더 드리면, 저와 사이먼은 그저 평범한 친구 사이일 뿐이고 한 대표를 만나기 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였습니다.” “사소한 일에 이렇게 공개적으로 해명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고 마지막이 될 겁니다.” “그리고...” 하연의 예리한 시선이 서준과 혜경,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갔다. “저와 한 대표의 결혼은 이미 옛말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모두 그런 제 과거를 더 이상 염두에 두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연은 전남편과 전처가 만나 서로 얼굴을 붉히며 민망해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침착하고 담담하게 말했다. 한 명은 정정당당하게 성명을 낸 전처, 다른 한 명은 임신 5개월이 된 내연녀를 데리고 연회에 참석한 찌질한 남자, 지금 누가 옳고 그른지 모두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기자들은 서둘러 카메라를 서준과 혜경 두 사람에게 돌려 한바탕 셔터를 눌렀다. 서준은 여전히 냉정을 유지하며 자제하고 있었지만, 카메라 불빛 아래 혜경은 오히려 마음속에서 큰 동요가 일어났다. ‘결국 외부의 여론이 다
전용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해 문이 천천히 열리자마자 주슬기가 눈에 들어왔다.“부 대표님.” 슬기는 공손하게 인사하며 미소를 띠고 다가갔다. “우연히 지나가는 길에 들러봤는데, 이렇게 마주치다니 운이 좋네요.”상혁은 코트를 들고 약간 무심한 태도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나요?”“원래는 없었는데요... 지금은 저녁 식사나 함께할까 해서요. 몇 가지 상의할 일이 있거든요.” 슬기는 재빠르게 대답하면서도 적절한 거리를 유지했다.상혁은 본능적으로 거절하려다가 잠시 생각한 뒤, 뜻밖에도 승낙했다.“좋아요, 장소는 제가 정하죠.”슬기는 의아했지만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네, 좋아요.”곧 원신민이 급하게 와서 상혁의 지시를 받았다. “오늘 당장 시내에서 가장 큰 식당에 방을 예약해.”그곳의 방은 최소한 3일 전에 예약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기에, 원신민은 바쁘게 움직였다. 슬기는 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의할 게 큰일은 아닌데, 이렇게 정식으로 예약할 필요는 없을 텐데요.”상혁은 태연하게 말했다. “업무 관련된 일이라면 허술하게 할 수 없죠.”상혁은 대수롭지 않게 밖으로 나갔고, 그가 탄 엘리베이터와는 다른 엘리베이터가 마침 내려오고 있었다.“부 대표님의 비서가 낯이 익어요. 어디서 본 적 있죠?” 슬기가 호기심을 보였다.이 업계에서, 특히 이사급의 비서라면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닐 것이다. 원신민은 과거에 이씨 가문의 장남을 도와주면서 정계와 조직폭력배 쪽 모두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방을 예약하는 것은 그에게 쉬운 일이었다.그 식당의 매니저가 직접 나와 원신민을 맞이했다. “원 비서님, 이렇게 갑자기 방문해 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방을 예약하신다고요? 1층과 2층은 이미 만석이지만, 최상층에 있는 방은 아직 비어있습니다. 그곳을 부 대표님께 해 드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원신민은 상혁이 슬기와의 식사에 그렇게 화려한 공간이 필요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손으로 테
이현의 말을 듣고 옆에 있던 양국성도 조금 의외였다.경쟁이 격해지는 상황은 많이 봐왔지만, 이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양국성은 이현의 제안에 맞장구를 치며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오늘은 제가 한턱 낼게요.”사실 이현의 정체에 대해서는 이미 소문이 퍼져 있었고, 양국성도 ‘한명준’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다.게다가 이번에 오기 전, 정태산에게도 은밀히 말을 들은 터라, 양국성은 자신의 권한 내에서 최대한 ‘한명준’을 도우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현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양국성도 이미 자신을 설득하기 시작했으니 하연은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이현을 한 번 쳐다보고 나서 대답했다. “좋습니다.” 차 안에서, 정태훈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분명히 가기 싫어하셨잖아요.” 하연이 대답했다. “한명준이 이 사업을 맡게 된 건 예측했지만, 남산을 선택할 줄은 몰랐어. 만약 내가 그때 남산 땅을 받아들였더라면, 이 사람이 어디를 선택했을지 궁금해.” 하연은 곰곰이 생각하며 말했다. “이건 혹시 속내를 감추기 위한 선전술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차에서 내리자마자, 하연이도 이현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녀는 하이힐을 신고 계단을 오르고 있었고, 이현은 손을 뒤로 살짝 뻗어 그녀를 가볍게 받쳐주었다. “이모가 이번 사업을 저한테 맡기면서, 사업하는 법을 배우게 하려는 거예요. 이제 저도 더 이상 가게만 운영하던 ‘손이현’이 아니에요.” 하연은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이미 알고 있어요. 다시 상기시킬 필요는 없어요.” 이현은 깊은 눈빛으로 하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하연 씨가 기억하는 손이현은 더 이상 없어요. 이제부터 돌아온 건 과거의 한명준만 있어요.” 그제야 하연이 그를 흘깃 쳐다보며 쏘아붙였다. “과거의 한명준은 의기양양하고 당당한 청년이었죠. 지금 당신의 모습이 그 당당한 청년과 닮은 게 뭐가 있어요?” 그녀가 기분이 나쁘면 말이
하연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원 비서한테 우유로 바꾸라고 했어용!” 상혁의 얼굴은 조금 어두워졌지만, 하연은 능숙하게 일어섰다. “나도 오후에 회의가 있어서 먼저 가야 해요. 커피는 더 이상 마시면 안 돼요. 저녁에 또 올게요.” 상혁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저녁이면 이미 퇴근했을 텐데.” “그럴 리가 있나요? 나 원 비서한테 물어봤는데... 당신은 요즘 새벽까지 매일 야근한다면서?” 하연이 문가에 서서 농담처럼 말했다. “부 대표님, 총책임자가 하는 일 정말 쉽지 않죠?” 상혁은 얼굴을 돌리며 미소를 숨겼다. “내일 당장 원신민 해고해야겠군.” ‘원 비서 감히 이렇게 빨리 날 배신했더니...’하연은 오늘도 신에너지와 관련된 회의를 준비하고 있었고, 이번에는 B시에서 온 조사팀과의 회의였다. 제대로 된 홍보팀이 없는 상황이라, 하연은 CS그룹의 몇몇 직원을 빌려와 회의를 진행했다. 그 결과, 저녁 만찬에서 성공적으로 계약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국장님,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오늘 낮잠은 잘 주무셨나요? 방은 만족하셨는지요? 만약 문제가 있었다면 제가 바로 시정하겠습니다.” 하연 웃으며 인사하며 방으로 들어섰다. 양국성은 친근하게 하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정말 만족스러웠습니다. 최 사장님께서 세심하게 신경 써주신 덕분에 일이 아주 순조로웠어요. 그리고 정태산 지사님께서도 최 사장님께 안부 꼭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한 마지막 말은 하연에게 작게 속삭였다. 하연의 얼굴에 잠시 어두운 기색이 스쳤고, 정태산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지사님께 제 안부 전해주시고, 부상혁 대표님께서도 잘 지낸다고 말씀드려주세요.” “부상혁 대표님이요?” 양국성이 놀라며 물었다. “아, 최 사장님께서 오해하신 것 같네요. 그날 제가 보고하러 갔을 때 한 검사장님도 계셨거든요. 그분이 최 사장님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한창명? 의외의 인물이었
하연은 말한 대로 다음 날 아침, 집에서 일하는 요리사에게 부탁해 위장에 좋은 닭죽을 끓였다. 요리사는 하연이가 이렇게 식단에 신경 쓰는 걸 처음 본 듯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가씨, 이걸 회사에 가져가실 건가요?” 하연은 조금 머쓱해하며 말했다. “내가 먹는 게 아니에요.” 요리사는 놀란 듯 물었다. “아가씨, 남에게 주는 거면, 직접 요리해 보시는 게 어때요? 남자가 감동할 거예요.” 하연 웃으며 대답했다. “그거 알아요. 근데, 시간이 좀 필요해요.” 그녀는 쑥스러워하면서도, 손에 들린 수프 냄비를 들고 바로 DL그룹으로 향했다. 마치 비밀 작전을 수행하듯, 하연은 원신민에게 말했다. “다른 사람한테 들키지 않게 해줘요.” 원신민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긁적이며 말했다. “최 사장님, 부 대표님은 아직 회의 중이신데요.” “언제 끝나요?” “아마도 두 시간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하연 시계를 보며 말했다. “이제 점심시간이 다 됐잖아요. 이렇게 직원들까지 압박하는 거 아니에요?” 원신민은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회사 일이니까요.” 하연 한참을 생각하다가 손짓하며 말했다. “내가 너희 대표님은 밥을 먹게 할 방법이 있는데, 들어볼래요?” 원신민은 귀를 기울였다.5분 후, 비서가 회의실로 들어와서 말했다. “대표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상혁은 불쾌해하며 말했다. “바로 말해.” “대표님 책상 위에 있는 백란화에 뱀이 말려들었습니다...” 회의실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고, 몇몇이 외쳤다. “그런 건 부하 직원들이 처리하면 되지 않나? 굳이 부 대표님께서 나설 일은 아니지 않나?” 하지만 상혁의 안색은 오히려 좋지 않았다. 부동건은 난초를 매우 사랑했고, 그 백란화는 상혁이 부동건에게 물려받은 소중한 것이었다. 백란화를 돌보는 일은 상혁이 DL그룹을 물려받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머리가 아파져 오던 상혁은 잠시 쉬기로 결심하며
하연은 잠깐 당황했지만 곧바로 상혁의 귀에 속삭이듯 다가가며 말했다. “아직도 반응이 있네, 부 대표님은 아무나 거절하지 않는 건가요? 오늘 만약 다른 여자가 여기 앉아 있었다면...” 그녀의 농담과 향기가 귀를 간지럽히자, 상혁은 잠시 고개를 돌려 미묘하게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다른 사람은 없을 거야.” “그럼 나만?” 하연의 말에 상혁은 약간 무너지는 듯했지만 이내 그녀를 밀어내며 대꾸했다. “나의 의미는, 너도 아니야.” 하연의 얼굴에 순간 실망이 떠올랐다. 그녀는 입술을 내밀며 차 안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상혁은 잠시 침묵하며 그가 느끼던 생리적 반응이 가라앉길 기다린 후 차분히 말했다. “내려.” “당신은 의사한테 가는데, 내가 왜 내려야 해요?” “다시 붕대 싸매.” 상혁은 이 말을 던지며 차에서 내렸다. 하연도 그제야 그 의미를 깨닫고는 피식 웃으며 따라나섰다.F국에 돌아온 후 상혁의 위장병이 계속 재발하고 있었다. 불규칙한 생활과 식사가 병을 악화시켰고, 의사는 그의 상태를 보고 좋지 않은 얼굴을 했다. “부 대표님, 몸이 재산입니다. 이렇게 무리하다가는 일이 끝나기도 전에 몸이 망가집니다.” 하연은 밖에서 간호사가 다시 붕대를 감아주는 동안 그 말을 들었다. 상혁은 숨을 고르며 가볍게 대답했다. “제 몸 상태는 제가 잘 알아요. 약만 먹으면 돼요.”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계속 잔소리를 했다. “위장은 쉬게 해야 하는데, 아플 때 약을 먹는 건 이미 늦은 겁니다. 평소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혹시 비서도 없으십니까?” 상혁도 많은 비서가 있긴 했지만, 바쁜 스케줄 때문에 제대로 된 식사를 거의 하지 못했다. 비서가 가져다준 음식은 몇 시간 동안 방치되곤 했다. 오늘도 병원에 온 것은 원신민의 강력한 요구 때문이었다.의사가 잔소리를 멈추자, 상혁은 미세하게 당황하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의사는 밖을 힐끗 보며 한마디 더 덧붙였다.“밖에 계신 아가씨는 대표님의..
“이 정도의 약점을 부남준이 쉽게 너를 놓아줄 하연 없을 텐데?” “그건 제 추측일 뿐이에요!” 연지는 급히 상혁의 다리를 붙잡고 말했다. “그 재무 보고서에는 부남준과 다른 이사들, 특히 정규인과의 결탁을 증명할 수 있는 많은 세부 사항이 있어요.” 상혁은 정규인의 이름이 나오자 살짝 눈을 들었다. “어디에 있지?” “제 금고 안에 있어요.” “원신민.” 원신민이 재빨리 다가와 연지를 일으켜 세웠다. “내가 같이 가서 가져오지.” “대표님...” 상혁은 허락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연지의 머리카락을 살짝 잡아들며 라이터를 켰다. 불길이 일면서 머리카락이 재가 되어 날아갔고, 연지는 공포에 찬 표정을 지었다. 원신민이 연지의 입을 재빨리 막아 그녀가 소리 지르지 못하게 했다. 다행히 머리카락은 한 움큼만 탔을 뿐이었다. “알다시피, 황연지, 날 배신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겠지.” 연지는 공포에 질린 눈물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하연은 다영과 헤어진 뒤 자신의 차로 걸어가던 중, 갑자기 한 차량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한 발짝 물러섰다. 마치 상혁이 항상 타고 다니고 있는 차였다. 하연의 가슴이 쿵쾅거렸다. 차 문이 열리자 운전기사가 내려왔다. “부상혁 대표님께서 모시길 원하십니다.” 하연이 입술을 굳게 다문 채로 검게 칠해진 방탄유리를 바라보았는데, 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차 안은 향이 피워져 있었고, 정신을 안정시키는 듯한 상쾌한 향이었다. 남자는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으며, 그의 잘생긴 얼굴이 희미한 조명 속에서도 돋보였다. “무슨 일로 부르셨나요?” 하연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다음 순간, 손목이 붙잡혔고, 그녀는 한순간에 상혁의 품에 안겨버렸다. 남자의 강한 향이 공기 중에 가득 퍼졌다. 그러자마자 차가 출발하면서 뒤로 밀리는 힘 때문에 하연은 더욱 상혁의 가슴에 밀착되었다. 상혁은 하연의 머리를 감싸 안으며 눈을 떴다. “내 회사
하연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멍하니 서 있었다. 다영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최씨 가문은 혼인을 통해서가 아니더라도 후손들이 영원히 번영할 수 있는 가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상혁도 역시 그런 혼인의 필요가 없었다. 부남준은 달랐다. 그는 차남이었고, 어머니 집안의 지원이 없었기에 혼인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다영에게는 이 모든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어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최하연 씨, 만약에 남준 씨를 좋아하지 않으신다면 거리를 두세요. 괜한 오해를 피하려면 말이에요.” ‘이미 오해는 깊어진 것 같아.’하연은 무력하게 생각했다. ‘내가 지금의 문제는 부남준이 나랑 거리를 두지 않으려 한다고 말할 수도 없잖아.’“정다영 씨의 뜻은 이해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으니, 조언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미래는 정다영 씨가 스스로 잘 판단하시길 바랍니다.” 하연이 최대한 체면을 유지하며 말했다. “하지만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부남준은 그렇게 겉보기만큼 단순한 사람이 아닙니다.” “단순하지 않다면 오히려 더 좋아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여자들은 강한 남자에게 끌리기 마련이다. 부남준의 성격을 마주할 때마다, 다영 역시 어느새 그의 매력에 빠져들고 말았다.둘은 주차장의 동남쪽 모퉁이에서 발생한 작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여자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목에는 끔찍할 정도로 붉게 번진 화상 자국이 있었다. 남자는 차 안 뒷좌석에 앉아 문을 열어두고 있었다. 그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경멸하는 표정을 지었다. “누가 너를 시켜서 덫을 놓았냐?” “아무도 시키지 않았습니다.” 황연지가 흐느끼며 대답했다. “저는 그저 대표님과 최 사장님의 소문을 들었고, 오랫동안 지시를 받지 못해 불만이 쌓였을 뿐이에요. 그래서 일부러 덫을 놓고 복수하고 싶었던 거예요.” 이를 듣고 상혁은 고개를 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하연의 몸은 완전히 굳어버렸다. 서로의 체온이 맞닿았고, 한쪽은 차갑고, 다른 쪽은 뜨거웠다. 하연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내 마음속에 있는 사람은 남자야, 네 그림과는 전혀 상관없어.” “그리기가 두려운 거야?” 남준은 그녀의 손을 잡고 그림 쪽으로 밀어붙였다. “그리기 두려우면, 내가 대신 그려줄까?” “날 놔!” 하연은 힘을 주어 저항하다가 잉크병을 쳐서 넘어뜨렸고, 남준은 즉각 그녀를 보호하려 하며 둘의 거리는 더 가까워졌다. 잉크는 그의 옷에 쏟아졌다. 하늘이 깜짝 놀라 숨을 들이마셨다. “상무님...” 그와 동시에, 문밖에서 낮은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연은 본능적으로 돌아보았고, 그곳에 서 있는 정다영을 보았다. 정다영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남준 씨...” 남준은 다영을 보자마자 안색이 순간에 어두워졌다. “다영 씨는 여기 왜 왔어요?” 그는 마치 무언가 방해받은 것처럼 짜증이 난 표정이었다. 다영은 선물을 들고 있었다. “이거 몸에 좋다고 우리 어머니가 남준 씨도 드셔보라고 하셨어요.”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그녀가 조심스레 선물을 내밀었다.사실 이 핑계는 다영이가 둘만의 시간을 만들기 위해 준비된 것이었지만, 자신이 들어왔을 때 다른 여자가 남준과 친밀한 화면을 목격한 것을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다.“필요 없어요. 그냥 돌아가요. 이 비서, 정다영 씨를 집까지 안전하게 모셔다드려.” “저... 남준 씨...” 다영은 말끝을 흐리며 떠나기 싫어하는 기색을 보였다. “남준 씨, 이분은 누구세요?” 하연은 남준과 엮이기 싫어 얼른 그를 밀어내고는 빠르게 나와서 말했다. “정다영 씨, 우리 나중에 개인적으로 이야기하자.” 하연이는 다영을 데리고 나가려고 했지만, 다영은 움직이려 하지 않고 눈물을 글썽이며 남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준은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나도 이따가 회의가 있어요. 먼저 옷을 갈아입고 갈
부남준은 하연을 사무실로 끌어들인 뒤, 하연이가 믿기 힘들다는 듯 물었다. “왜 황연지를 해고한 거야?” 남준은 느긋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가 화상 입었잖아.” “내가 원하는 건 공평하고 공정한 처리야. 너의 독단적인 행동을 원한 게 아니라고.” “지금 상황에서 네 신분이 이미 밝혀졌는데, 그 사람들이 여전히 공평함을 믿을 것 같아?” 남준은 말하면서도 한 손으로는 비서에게 약상자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그는 면봉을 꺼내 하연에게 약을 발라주려고 해서 하연의 손을 억지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말이야, 최 사장님이 손을 다쳤다면, 황연지 한 명 해고하는 걸로 충분히 배상이 될 것 같아?” 하연 남준의 농담을 무시하며 말했다. “나도 일부러 황연지에게 부딪힌 게 아니야. 첫째로, 동기도 없었고, 둘째로, 내가 굳이 적을 죽이려다 내 몸도 해치는 일을 할 필요가 있을까?” 누가 더 잘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하자면, 하연이 당연히 연지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총애받았을 것이다.“바로 그 동기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네가 직원을 괴롭히는 건 너무나도 당연하고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거야.” 남준은 하연의 손에 약을 발라주며, 신중하게 말했다. “보통 사람들의 부유층에 대한 반감을 과소평가하지 마.” 하연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아 손을 빼려 했지만, 남준은 계속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내가 듣기로는 DS그룹의 성적이 꽤 좋은데, 최 사장님의 정신이 이런 사소한 일들조차 이해하지 못하다니. 가족들은 확실히 너를 너무도 잘 보호했나 보군.” 하연은 그가 비꼬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비웃지 마.” 그녀는 대답하면서 손을 뺐다. “그러니까 왜 날 찾아왔어?”남준은 물었다.“그냥 길 지나가다가 목말라서 물 한 잔 마시러 들렀어.” 하연은 억지로 핑계를 댔지만, 남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고 웃으며 면봉을 던지고 화장실로 손을 씻으러 갔다.하연의 시선은 남준의 비서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