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경은 오늘을 위해 많은 준비를 했다. 고급스럽게 차려입은 수제 맞춤옷은 한 달 전부터 예약한 스타일로, 임신 5개월이지만 볼륨이 있는 스커트 디자인이 허리라인을 잘 가리고 있었다. ‘뭐, 봐줄 만은 하네.’ 손을 다 닦은 하연은 한마디 했다. “너도 오는데 내가 왜 못 와?” 그리고는 혜경을 무시하며 화장실을 나갔다. “거기 서,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혜경이 뒤 따라 나왔다. 하이힐을 신고 있었던 그녀는 바닥에 있는 물 때문에 발바닥이 미끄러져 앞으로 넘어지려 했다. “아!” 혜경은 순간 뱃속의 아이가 생각나 넘어지지 않으려고 허둥대고 있을 때, 누군가의 손에 붙잡혀 품에 안겼다. 혜경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남자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자 혜경은 놀라 갑자기 안색이 변하며 자신을 도와준 사람을 그대로 밀쳤다. 그리고 그녀는 고개도 들지 않고 자신의 치맛자락을 정리한 후 허둥지둥 도망쳤다. 남자 역시도 뒤이어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하연은 이 모습을 보고 매우 이상하다고 느꼈다. ‘혜경이 저 젊은 남자를 그냥 두고 도망간다고? 예전이라면 화부터 낼 사람이? 물론 오늘은 중요한 날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만, 웬일이지?’ 하연은 시간 보고 드레스 갈아입기 위해 다시 들어갔다. 한편. 연회장의 은은한 음악이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가운데, 금빛 조명 아래서 사람들은 작은 소리로 올해 세계 발전 추세에 대해 이야기했다. 긴 다리의 하민은 무대 위로 걸어 올라갔다. 그가 오케스트라 쪽을 바라보자, 연주자들이 연주를 멈췄다. 현장 사람들도 대화를 멈추고 오늘의 마지막 순서를 기다렸다.최동신은 뒷짐을 지고 무대 아래에 서서 위쪽의 하민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최동신은 이미 경영에서 반쯤 물러난 상태여서 하민이 대신 나서서 발언하는 것이 적절했다.일찍 죽은 아들과 며느리가 어쨌든 자신에게 훌륭한 혈통을 남겼다고 생각하는 최동신은 하민을 보며 더없는 만족감을 느꼈다.“여러분, 저희 할
혜경에게 무대까지는 겨우 10걸음밖에 안 되는 거리였지만, 그 사이에 마치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는 것처럼 느끼게 했다. ‘난 내가 뛰어난 명문가 집안 아가씨라고 생각했는데, 하연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어.’ 하연과 혜경은 사실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생신 연회에서 여러분을 만나 뵙게 되어 너무 기쁩니다.” 하연이 미소 지었다. “요즘 저에 대한 소문이 떠들썩해서 여러분도 잘 아실 거라고 생각됩니다.” 이 말을 듣고 방금까지 하연의 등장으로 놀란 기자들이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셔터를 눌러 중대 뉴스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DS그룹 B시 지사의 최하연 사장이 바로 최동신 회장의 손녀였어.’ ‘최 대표와 그녀가 연인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남매일 줄은 생각도 못했어.’ ‘다시 두 사람을 보니 정말 닮은 것이 누가 봐도 남매잖아!’ 하연은 웃음을 거두며 진지한 표정을 했다. “여기서 진지하게 한 말씀 더 드리면, 저와 사이먼은 그저 평범한 친구 사이일 뿐이고 한 대표를 만나기 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였습니다.” “사소한 일에 이렇게 공개적으로 해명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고 마지막이 될 겁니다.” “그리고...” 하연의 예리한 시선이 서준과 혜경,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갔다. “저와 한 대표의 결혼은 이미 옛말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모두 그런 제 과거를 더 이상 염두에 두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연은 전남편과 전처가 만나 서로 얼굴을 붉히며 민망해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침착하고 담담하게 말했다. 한 명은 정정당당하게 성명을 낸 전처, 다른 한 명은 임신 5개월이 된 내연녀를 데리고 연회에 참석한 찌질한 남자, 지금 누가 옳고 그른지 모두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기자들은 서둘러 카메라를 서준과 혜경 두 사람에게 돌려 한바탕 셔터를 눌렀다. 서준은 여전히 냉정을 유지하며 자제하고 있었지만, 카메라 불빛 아래 혜경은 오히려 마음속에서 큰 동요가 일어났다. ‘결국 외부의 여론이 다
“이어서 최씨 가문은 명예훼손에 가담한 모든 연예매체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방침입니다.” “또한 앞으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 기업들을 인수할 겁니다.” 하민은 이 말을 하며 차가운 시선으로 민진현을 노려보았다. 사람들 사이에서 샴페인을 들고 있는 민진현은 안색이 크게 변하며 당황했다. 그는 B시 전체 연예계를 규합해 헛소문으로 무너뜨리려고 했던 사람의 배경이 이렇게 대단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현장에 있던 기자들도 모두 놀랐다. ‘이건 노골적으로 공격하겠다는 거잖아!’ ‘B시의 연예계에서 이제 피바람이 불겠군!’ 한편 여은이 이끄는 위클리 뉴스는 가장 먼저 하연의 정체와 ‘예쁜 언니’ 선행에 대해 보도해 네티즌들의 화제를 모으고 있었다. “와! 전생에 우주를 몇 번 구해야 최고 부자의 손녀가 될 수 있을까? 너무 부러워요.” “돈도 많고 사랑도 있고, 거기다 이렇게 예쁜데, 그 한서준은 바보 아니야? 이혼을 하다니!” “분명히, 장님이 틀림없어요.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그렇게 평범한 내연녀를 찾았을까요?” “완전 반전이라니까!” “저 근데, 최하연에게 헤어진 또 다른 형제자매가 있을까요? 제 생각에는 저일 거 같은데.” ... 하연이 하민의 팔짱을 낀 채 내려와 최동신 곁으로 다가서자 민진현이 웃는 얼굴로 다가왔다. “최 사장님이 최 회장님의 손녀일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보는 눈이 없어서 대단하신 분을 몰라봤어요.” “제가 오해했지 몹니까? 모두 오해예요.” 지금 민진현의 늙은 얼굴에 가득한 알랑거리는 미소가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민망하게 했다. 최동신이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민 회장이 내 소중한 손녀에게 한 짓을 어떻게 그냥 단순한 오해로 넘어갈 수 있을까요?” “불량배를 보내 내 여동생을 해치려 하고, 악담을 퍼붓고, 모함하고, 거기에 당신 손녀는 고의로 교통사고를 내서 사람을 다치게 하기까지 했지요.” 하민의 눈빛이 한 겨울 서리처럼 더 차가워졌다. “이제 ST그룹과 확실히 계산할 때가 된 거
백옥반지는 자신이 평생 소중히 여겼던 보배라 늘 잘 관리하고 세심하게 보관해 왔는데, 지금 하연에 의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비닐봉지에 담겨 있자, 민진현은 마음속으로 안타까워 애가 탔다. “사장님?” 하연이 살짝 손짓하자 정기태는 그 반지를 민진현 앞에 내밀었다. 민진현은 기뻐했고, 하연이 관대한 마음으로 자신에게 백옥반지를 돌려주려 한다고 생각했다. “최 사장님, 정말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우신 분이 마음씨도 착하시다니요.” 민진형은 자신의 오른손에 다시 낄 반지를 되찾고 싶어 안달이 났다. 하지만 그는 다음 순간 하연이 가볍게 던지는 말을 듣고 놀랐다. “민 회장님이 진심으로 잘못을 고치고 싶다면, 망치로 그것을 직접 부숴서 성의를 보이세요.” “예?” ‘부수라고?’ 민진현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내가 애지중지하던 이 값진 보배를 네 가벼운 말 한마디로 부술 거 같아?’. 민진현은 안타까움에 하마터면 생각이 말로 튀어나올 뻔했다. “시중에 내놓으면 어림잡아도 2000억짜리 반지인데 그걸 부숴버리라고요?” 민진현은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민 회장님이 보상해 주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이 반지 정도면 그럭저럭 보상이 될 거 같아요. 왜요? 회장님은 그러기에 좀 아까운 건가요?” 민진현의 변화무쌍한 표정을 바라보는 하연의 무표정한 얼굴엔 아무 감정도 없었다. ‘그래 아까워! 너무 아까워서, 죽는 것보다 더 괴롭다고!’ ‘하지만 지금은 최하연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우리 ST그룹 전체를 구해야 해!’ 민진현은 마음속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계산하고 있었다.잠시 후. 민진현이 결국 이를 악물고 또박또박 말했다. “망치를 가져오세요!” 몇 사람이 이 소리를 들었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모두 모여들어 구경을 했다. “어머나, 진짜야?” “저 반지가 엄청 비싼 거 아니야? 근데 정말 부숴야 해? 너무 아까워!” “모르는 소리마! 지금 최 사장님한테 미움을 샀으니, 보상하려면 ST그룹 열 개라도
사람들 틈에 있던 혜경은 당황하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옷자락을 움켜쥐었고 얼굴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할아버지...” 혜경은 민진현이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버릴까 봐 걱정하며 입을 열었다. 지금 민진현의 마음속에는 이미 모든 것에 대한 판단이 썼다. ST그룹은 그의 평생의 피와 땀이었기에 어떤 것이 더 중요한지는 분명했고 그는 이미 결정을 내렸다. “최 사장님, 걱정 마세요. 혜경이가 한 짓에 대해서는 반드시 대가를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민진현이 사람들 앞에서 공언했다. 지금 그는 하연 앞에서 납작 엎드렸는데 그 어디에도 옛날의 그 기세 좋던 자존심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연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민진현은 아무 말 없이 혜경을 끌고 나와 차가운 목소리로 호통쳤다. “빨리 최 사장님께 사과드려!” “할아버지...” 혜경을 아직도 망설이며 몸부림을 쳤다. ‘내가 지금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연에게 사과한다면, 앞으로 어떻게 상류층에서 고개를 들 수 있겠어?’ “빨리 사과하지 못해?” 민진현의 인내심이 거의 한계에 이르렀다. 혜경은 지금 사과하지 않으면 민진현에게 버림받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가족에게 버림받게 된 사람은 그 어떤 지위도 보장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혜경은 이를 악물고 모든 교만과 자존심을 내려놓아야만 했다. “미안해.” “하하, 그렇게 무지막지한 일들을 해놓고 사과 한마디로 끝내려고? 우리 하연이는 너 때문에 교통사고로 죽을 뻔했어.” 예나가 말을 하자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더 커졌다. “민 회장님이 걱정하는 게 당연하네. 일부러 교통사고를 내다니, 그건 범죄야.” “사과로 될 거면 경찰이 뭐 하러 있겠어?” “내가 최 사장이었으면 진작에 저 여자를 경찰에 신고해서 감옥살이를 시켰을 거야. 내연녀 주제에 어떻게 시건방 떠는 걸 그냥 놔둘 수 있겠어?” “...” 여러 사람의 말소리를 듣던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나서지 않았고 모두가 혜경이 민씨 가문의 경호원에게 끌려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역시 내연녀는 결국 벌을 받을 수밖에 없어.’ 한편 사람들 사이에서 각종 안타까워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한씨 가문이 최씨 가문과 관계를 맺었다면, 더 높을 곳에 오를 수도 있었을 텐데!” “한 대표가 명문가인 최씨 집안의 아가씨와 결혼한 거였네. 원래는 미담이었는데 그걸 기어코 스스로 내연녀와 바람을 피워서 이혼까지 하다니.” “한 대표, 사람이 덜 됐어! 아마 지금 후회로 속이 타들어갔을 걸?” “...” 서준은 주위의 사람들의 좋지 않은 시선과 비난을 느꼈다. 그의 회한에 찬 눈은 사람들에게 둘러 쌓인 별과 같은 하연을 주시하고 있었고, 마음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교차했다. 아까부터 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혼 후 하연의 신분이 너무나 달라져 버리면서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서준은 3년 전, 하연이 먼저 그를 찾아와서 결혼을 제의하고 그들의 신분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기로 한 것을 기억했다. 그는 다행스럽게도 당시 하연에게 자상하고 친절하게 대했고, 그건 다른 누구와 결혼해도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하연도 3년 동안 줄곧 아내로서의 본분을 다했다. 다만 서준은 최고 부자의 손녀인 그녀가 신분까지 숨기고 그와 결혼한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늘 궁금했다. “한 대표님, 대표님과 제 여동생 사이의 감정적 문제에 관해 따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하민이 어느새 그의 곁에 서 있었다. 서준은 하연을 향한 시선을 거두었다. 비록 많은 유언비어들이 난무했지만 그 속에서도 시종일관 담담함을 유지하며 그는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이 침착하고 여유로운 모습만큼은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었다. 만약 모든 선입견을 버린다면, 서준은 정말 괜찮은 남자였고 최씨 집안 아가씨와도 잘 어울렸다. “최 대표님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요?” 하민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한 대표님, 대표님과 하연이 사이에
“최 사장님!” 서준은 부드럽게 하연을 불렀고, 다음 순간 시선을 옆쪽의 최동신에게로 향했다. “회장님, 최 사장님과 단둘이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최동신은 별다른 언급 없이 하연에게 그 결정을 넘겼다. 하연의 표정은 담담했고 아무런 감정도 없이 입가가 살짝 올라가는 정도였다. “그렇게 하죠.” 최동신은 내키지 않는 듯한 눈빛으로 떠나기 전에 여전히 한마디 조언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연아, 이미 이혼했으니 예전 관계는 깨끗하게 끊어. 우물쭈물, 다른 여자들처럼 굴지 말고.” 서준은 반박하지 않고 고개를 약간 숙이며 최동신을 배웅했다.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 거야?” 하연은 담담한 표정으로 평범하게 말했다. 서준은 3년 전 혼인증명서를 발급받던 날, 하연이 다소 수줍게 그의 옆에 서 있고, 사진작가가 카메라를 들고 그들의 첫 번째 사진을 찍었던 것이 떠올랐다. 회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고, 정신을 차리자 하연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3년 전, 왜 신분을 숨기고 나와 결혼한 거야?” 하연은 서준이 자신에게 이 문제를 물어볼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미 이혼한 사이이니 질문에 대해 답하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한 대표는 왜 그걸 알고 싶어?” 서준의 눈이 하연을 뚫어지게 응시했는데, 그 눈이 마치 심연의 바다처럼 깊어 생각을 알 수 없었다. “그냥 대답만 해주면 돼.” 하연의 눈동자가 흐려지며 생각이 이미 오래전 일로 향했다. “내 가족은 내가 당신과 함께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나는 당신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까.”그래서 하연은 자신의 모든 신분과 지위를 내려놓고 가족과 친구들의 기대를 배신한 채 망설임 없이 서준을 선택했다. 다만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다행히 내가 이제 현실을 깨달아서 말이야. 사랑 안에서 두 사람이 목표를 향해 함께 달려가지 않고, 자기 생각만 강요하면 그저 상대방에게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어렸을 때 보지 말았어야 할 사람을 함부로 본
“지분양도 협의서는 이미 모든 이사회 구성원들에게 이메일을 보냈어. B시에서 열릴 금년 이사회 때 네가 새 대표로 취임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발표될 거야.” 비록 최동신 칠순 연회 때 이미 이 소식을 발표했지만, 하연은 여전히 전체 DS그룹을 책임져야 하는 것에 부담을 느꼈다. “오빠, 너무 빠른 거 아니야? 알잖아, 난 그룹에 합류한 지 얼마 안 돼서 익숙하지 않은 업무가 아직 많아.” “네 능력은 누구나 다 알고 있어. 잊지 말라고, 그때 DS그룹에게 닥친 위기를 네가 모두 해결했잖아! 난 내 동생을 믿어. 능력이 있으니 반드시 DS그룹을 잘 관리할 수 있을 거야.” “그래도...” 하연은 여전히 망설였다. 하민이 손을 내밀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넌 우리 최씨 명문가 집안의 아가씨야. 그러니 대를 이어 책임을 받아들이는 게 당연하잖아. 그러니 너무 스트레스받지 마. 도움이 필요할 땐 언제든 우리가 힘이 되어줄 테니.” 하연은 마음속에서 온정을 느꼈다. “고마워, 오빠, 나 열심히 해볼게.” “마음 편히 네가 하고 싶은 데로 해봐. 오빠는 무조건 네 편이야.” 이 말이 마치 하연에게 안정제를 먹인 것처럼 그녀의 마음을 안심시켰다. “알았어, 오빠.” B시로 돌아온 후, 정기태는 곧 열릴 이사회의 세부 사항을 하연과 의논했고, 모든 준비를 마친 후 마침내 이사회를 맞이했다. 오전 9시, DS그룹 최상층 회의실에 DS그룹의 모든 이사들이 모였다. 하연이 등장하자마자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프로페셔널하면서도 시크한 분위기와 함께 여장부다운 카리스마를 풍겼다. 앞서 하연이 대표의 비서를 맡게 되었을 때, 모두 하연의 정체를 추측하며 온갖 유언비어가 난무했었다. 그러나 누구도 하연의 정체가 최씨 가문의 넷째 아가씨일 줄은 예상 못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회사 전체가 발칵 뒤집혔고, 그동안의 유언비어도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하연이 첫 번째 자리에 앉자 정기태는 하연의 지분양도 협의서를 내놓았다. “이사 여러분,
전용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해 문이 천천히 열리자마자 주슬기가 눈에 들어왔다.“부 대표님.” 슬기는 공손하게 인사하며 미소를 띠고 다가갔다. “우연히 지나가는 길에 들러봤는데, 이렇게 마주치다니 운이 좋네요.”상혁은 코트를 들고 약간 무심한 태도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나요?”“원래는 없었는데요... 지금은 저녁 식사나 함께할까 해서요. 몇 가지 상의할 일이 있거든요.” 슬기는 재빠르게 대답하면서도 적절한 거리를 유지했다.상혁은 본능적으로 거절하려다가 잠시 생각한 뒤, 뜻밖에도 승낙했다.“좋아요, 장소는 제가 정하죠.”슬기는 의아했지만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네, 좋아요.”곧 원신민이 급하게 와서 상혁의 지시를 받았다. “오늘 당장 시내에서 가장 큰 식당에 방을 예약해.”그곳의 방은 최소한 3일 전에 예약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기에, 원신민은 바쁘게 움직였다. 슬기는 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의할 게 큰일은 아닌데, 이렇게 정식으로 예약할 필요는 없을 텐데요.”상혁은 태연하게 말했다. “업무 관련된 일이라면 허술하게 할 수 없죠.”상혁은 대수롭지 않게 밖으로 나갔고, 그가 탄 엘리베이터와는 다른 엘리베이터가 마침 내려오고 있었다.“부 대표님의 비서가 낯이 익어요. 어디서 본 적 있죠?” 슬기가 호기심을 보였다.이 업계에서, 특히 이사급의 비서라면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닐 것이다. 원신민은 과거에 이씨 가문의 장남을 도와주면서 정계와 조직폭력배 쪽 모두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방을 예약하는 것은 그에게 쉬운 일이었다.그 식당의 매니저가 직접 나와 원신민을 맞이했다. “원 비서님, 이렇게 갑자기 방문해 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방을 예약하신다고요? 1층과 2층은 이미 만석이지만, 최상층에 있는 방은 아직 비어있습니다. 그곳을 부 대표님께 해 드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원신민은 상혁이 슬기와의 식사에 그렇게 화려한 공간이 필요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손으로 테
이현의 말을 듣고 옆에 있던 양국성도 조금 의외였다.경쟁이 격해지는 상황은 많이 봐왔지만, 이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양국성은 이현의 제안에 맞장구를 치며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오늘은 제가 한턱 낼게요.”사실 이현의 정체에 대해서는 이미 소문이 퍼져 있었고, 양국성도 ‘한명준’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다.게다가 이번에 오기 전, 정태산에게도 은밀히 말을 들은 터라, 양국성은 자신의 권한 내에서 최대한 ‘한명준’을 도우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현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양국성도 이미 자신을 설득하기 시작했으니 하연은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이현을 한 번 쳐다보고 나서 대답했다. “좋습니다.” 차 안에서, 정태훈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분명히 가기 싫어하셨잖아요.” 하연이 대답했다. “한명준이 이 사업을 맡게 된 건 예측했지만, 남산을 선택할 줄은 몰랐어. 만약 내가 그때 남산 땅을 받아들였더라면, 이 사람이 어디를 선택했을지 궁금해.” 하연은 곰곰이 생각하며 말했다. “이건 혹시 속내를 감추기 위한 선전술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차에서 내리자마자, 하연이도 이현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녀는 하이힐을 신고 계단을 오르고 있었고, 이현은 손을 뒤로 살짝 뻗어 그녀를 가볍게 받쳐주었다. “이모가 이번 사업을 저한테 맡기면서, 사업하는 법을 배우게 하려는 거예요. 이제 저도 더 이상 가게만 운영하던 ‘손이현’이 아니에요.” 하연은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이미 알고 있어요. 다시 상기시킬 필요는 없어요.” 이현은 깊은 눈빛으로 하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하연 씨가 기억하는 손이현은 더 이상 없어요. 이제부터 돌아온 건 과거의 한명준만 있어요.” 그제야 하연이 그를 흘깃 쳐다보며 쏘아붙였다. “과거의 한명준은 의기양양하고 당당한 청년이었죠. 지금 당신의 모습이 그 당당한 청년과 닮은 게 뭐가 있어요?” 그녀가 기분이 나쁘면 말이
하연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원 비서한테 우유로 바꾸라고 했어용!” 상혁의 얼굴은 조금 어두워졌지만, 하연은 능숙하게 일어섰다. “나도 오후에 회의가 있어서 먼저 가야 해요. 커피는 더 이상 마시면 안 돼요. 저녁에 또 올게요.” 상혁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저녁이면 이미 퇴근했을 텐데.” “그럴 리가 있나요? 나 원 비서한테 물어봤는데... 당신은 요즘 새벽까지 매일 야근한다면서?” 하연이 문가에 서서 농담처럼 말했다. “부 대표님, 총책임자가 하는 일 정말 쉽지 않죠?” 상혁은 얼굴을 돌리며 미소를 숨겼다. “내일 당장 원신민 해고해야겠군.” ‘원 비서 감히 이렇게 빨리 날 배신했더니...’하연은 오늘도 신에너지와 관련된 회의를 준비하고 있었고, 이번에는 B시에서 온 조사팀과의 회의였다. 제대로 된 홍보팀이 없는 상황이라, 하연은 CS그룹의 몇몇 직원을 빌려와 회의를 진행했다. 그 결과, 저녁 만찬에서 성공적으로 계약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국장님,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오늘 낮잠은 잘 주무셨나요? 방은 만족하셨는지요? 만약 문제가 있었다면 제가 바로 시정하겠습니다.” 하연 웃으며 인사하며 방으로 들어섰다. 양국성은 친근하게 하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정말 만족스러웠습니다. 최 사장님께서 세심하게 신경 써주신 덕분에 일이 아주 순조로웠어요. 그리고 정태산 지사님께서도 최 사장님께 안부 꼭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한 마지막 말은 하연에게 작게 속삭였다. 하연의 얼굴에 잠시 어두운 기색이 스쳤고, 정태산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지사님께 제 안부 전해주시고, 부상혁 대표님께서도 잘 지낸다고 말씀드려주세요.” “부상혁 대표님이요?” 양국성이 놀라며 물었다. “아, 최 사장님께서 오해하신 것 같네요. 그날 제가 보고하러 갔을 때 한 검사장님도 계셨거든요. 그분이 최 사장님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한창명? 의외의 인물이었
하연은 말한 대로 다음 날 아침, 집에서 일하는 요리사에게 부탁해 위장에 좋은 닭죽을 끓였다. 요리사는 하연이가 이렇게 식단에 신경 쓰는 걸 처음 본 듯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가씨, 이걸 회사에 가져가실 건가요?” 하연은 조금 머쓱해하며 말했다. “내가 먹는 게 아니에요.” 요리사는 놀란 듯 물었다. “아가씨, 남에게 주는 거면, 직접 요리해 보시는 게 어때요? 남자가 감동할 거예요.” 하연 웃으며 대답했다. “그거 알아요. 근데, 시간이 좀 필요해요.” 그녀는 쑥스러워하면서도, 손에 들린 수프 냄비를 들고 바로 DL그룹으로 향했다. 마치 비밀 작전을 수행하듯, 하연은 원신민에게 말했다. “다른 사람한테 들키지 않게 해줘요.” 원신민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긁적이며 말했다. “최 사장님, 부 대표님은 아직 회의 중이신데요.” “언제 끝나요?” “아마도 두 시간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하연 시계를 보며 말했다. “이제 점심시간이 다 됐잖아요. 이렇게 직원들까지 압박하는 거 아니에요?” 원신민은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회사 일이니까요.” 하연 한참을 생각하다가 손짓하며 말했다. “내가 너희 대표님은 밥을 먹게 할 방법이 있는데, 들어볼래요?” 원신민은 귀를 기울였다.5분 후, 비서가 회의실로 들어와서 말했다. “대표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상혁은 불쾌해하며 말했다. “바로 말해.” “대표님 책상 위에 있는 백란화에 뱀이 말려들었습니다...” 회의실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고, 몇몇이 외쳤다. “그런 건 부하 직원들이 처리하면 되지 않나? 굳이 부 대표님께서 나설 일은 아니지 않나?” 하지만 상혁의 안색은 오히려 좋지 않았다. 부동건은 난초를 매우 사랑했고, 그 백란화는 상혁이 부동건에게 물려받은 소중한 것이었다. 백란화를 돌보는 일은 상혁이 DL그룹을 물려받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머리가 아파져 오던 상혁은 잠시 쉬기로 결심하며
하연은 잠깐 당황했지만 곧바로 상혁의 귀에 속삭이듯 다가가며 말했다. “아직도 반응이 있네, 부 대표님은 아무나 거절하지 않는 건가요? 오늘 만약 다른 여자가 여기 앉아 있었다면...” 그녀의 농담과 향기가 귀를 간지럽히자, 상혁은 잠시 고개를 돌려 미묘하게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다른 사람은 없을 거야.” “그럼 나만?” 하연의 말에 상혁은 약간 무너지는 듯했지만 이내 그녀를 밀어내며 대꾸했다. “나의 의미는, 너도 아니야.” 하연의 얼굴에 순간 실망이 떠올랐다. 그녀는 입술을 내밀며 차 안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상혁은 잠시 침묵하며 그가 느끼던 생리적 반응이 가라앉길 기다린 후 차분히 말했다. “내려.” “당신은 의사한테 가는데, 내가 왜 내려야 해요?” “다시 붕대 싸매.” 상혁은 이 말을 던지며 차에서 내렸다. 하연도 그제야 그 의미를 깨닫고는 피식 웃으며 따라나섰다.F국에 돌아온 후 상혁의 위장병이 계속 재발하고 있었다. 불규칙한 생활과 식사가 병을 악화시켰고, 의사는 그의 상태를 보고 좋지 않은 얼굴을 했다. “부 대표님, 몸이 재산입니다. 이렇게 무리하다가는 일이 끝나기도 전에 몸이 망가집니다.” 하연은 밖에서 간호사가 다시 붕대를 감아주는 동안 그 말을 들었다. 상혁은 숨을 고르며 가볍게 대답했다. “제 몸 상태는 제가 잘 알아요. 약만 먹으면 돼요.”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계속 잔소리를 했다. “위장은 쉬게 해야 하는데, 아플 때 약을 먹는 건 이미 늦은 겁니다. 평소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혹시 비서도 없으십니까?” 상혁도 많은 비서가 있긴 했지만, 바쁜 스케줄 때문에 제대로 된 식사를 거의 하지 못했다. 비서가 가져다준 음식은 몇 시간 동안 방치되곤 했다. 오늘도 병원에 온 것은 원신민의 강력한 요구 때문이었다.의사가 잔소리를 멈추자, 상혁은 미세하게 당황하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의사는 밖을 힐끗 보며 한마디 더 덧붙였다.“밖에 계신 아가씨는 대표님의..
“이 정도의 약점을 부남준이 쉽게 너를 놓아줄 하연 없을 텐데?” “그건 제 추측일 뿐이에요!” 연지는 급히 상혁의 다리를 붙잡고 말했다. “그 재무 보고서에는 부남준과 다른 이사들, 특히 정규인과의 결탁을 증명할 수 있는 많은 세부 사항이 있어요.” 상혁은 정규인의 이름이 나오자 살짝 눈을 들었다. “어디에 있지?” “제 금고 안에 있어요.” “원신민.” 원신민이 재빨리 다가와 연지를 일으켜 세웠다. “내가 같이 가서 가져오지.” “대표님...” 상혁은 허락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연지의 머리카락을 살짝 잡아들며 라이터를 켰다. 불길이 일면서 머리카락이 재가 되어 날아갔고, 연지는 공포에 찬 표정을 지었다. 원신민이 연지의 입을 재빨리 막아 그녀가 소리 지르지 못하게 했다. 다행히 머리카락은 한 움큼만 탔을 뿐이었다. “알다시피, 황연지, 날 배신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겠지.” 연지는 공포에 질린 눈물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하연은 다영과 헤어진 뒤 자신의 차로 걸어가던 중, 갑자기 한 차량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한 발짝 물러섰다. 마치 상혁이 항상 타고 다니고 있는 차였다. 하연의 가슴이 쿵쾅거렸다. 차 문이 열리자 운전기사가 내려왔다. “부상혁 대표님께서 모시길 원하십니다.” 하연이 입술을 굳게 다문 채로 검게 칠해진 방탄유리를 바라보았는데, 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차 안은 향이 피워져 있었고, 정신을 안정시키는 듯한 상쾌한 향이었다. 남자는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으며, 그의 잘생긴 얼굴이 희미한 조명 속에서도 돋보였다. “무슨 일로 부르셨나요?” 하연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다음 순간, 손목이 붙잡혔고, 그녀는 한순간에 상혁의 품에 안겨버렸다. 남자의 강한 향이 공기 중에 가득 퍼졌다. 그러자마자 차가 출발하면서 뒤로 밀리는 힘 때문에 하연은 더욱 상혁의 가슴에 밀착되었다. 상혁은 하연의 머리를 감싸 안으며 눈을 떴다. “내 회사
하연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멍하니 서 있었다. 다영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최씨 가문은 혼인을 통해서가 아니더라도 후손들이 영원히 번영할 수 있는 가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상혁도 역시 그런 혼인의 필요가 없었다. 부남준은 달랐다. 그는 차남이었고, 어머니 집안의 지원이 없었기에 혼인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다영에게는 이 모든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어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최하연 씨, 만약에 남준 씨를 좋아하지 않으신다면 거리를 두세요. 괜한 오해를 피하려면 말이에요.” ‘이미 오해는 깊어진 것 같아.’하연은 무력하게 생각했다. ‘내가 지금의 문제는 부남준이 나랑 거리를 두지 않으려 한다고 말할 수도 없잖아.’“정다영 씨의 뜻은 이해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으니, 조언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미래는 정다영 씨가 스스로 잘 판단하시길 바랍니다.” 하연이 최대한 체면을 유지하며 말했다. “하지만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부남준은 그렇게 겉보기만큼 단순한 사람이 아닙니다.” “단순하지 않다면 오히려 더 좋아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여자들은 강한 남자에게 끌리기 마련이다. 부남준의 성격을 마주할 때마다, 다영 역시 어느새 그의 매력에 빠져들고 말았다.둘은 주차장의 동남쪽 모퉁이에서 발생한 작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여자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목에는 끔찍할 정도로 붉게 번진 화상 자국이 있었다. 남자는 차 안 뒷좌석에 앉아 문을 열어두고 있었다. 그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경멸하는 표정을 지었다. “누가 너를 시켜서 덫을 놓았냐?” “아무도 시키지 않았습니다.” 황연지가 흐느끼며 대답했다. “저는 그저 대표님과 최 사장님의 소문을 들었고, 오랫동안 지시를 받지 못해 불만이 쌓였을 뿐이에요. 그래서 일부러 덫을 놓고 복수하고 싶었던 거예요.” 이를 듣고 상혁은 고개를 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하연의 몸은 완전히 굳어버렸다. 서로의 체온이 맞닿았고, 한쪽은 차갑고, 다른 쪽은 뜨거웠다. 하연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내 마음속에 있는 사람은 남자야, 네 그림과는 전혀 상관없어.” “그리기가 두려운 거야?” 남준은 그녀의 손을 잡고 그림 쪽으로 밀어붙였다. “그리기 두려우면, 내가 대신 그려줄까?” “날 놔!” 하연은 힘을 주어 저항하다가 잉크병을 쳐서 넘어뜨렸고, 남준은 즉각 그녀를 보호하려 하며 둘의 거리는 더 가까워졌다. 잉크는 그의 옷에 쏟아졌다. 하늘이 깜짝 놀라 숨을 들이마셨다. “상무님...” 그와 동시에, 문밖에서 낮은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연은 본능적으로 돌아보았고, 그곳에 서 있는 정다영을 보았다. 정다영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남준 씨...” 남준은 다영을 보자마자 안색이 순간에 어두워졌다. “다영 씨는 여기 왜 왔어요?” 그는 마치 무언가 방해받은 것처럼 짜증이 난 표정이었다. 다영은 선물을 들고 있었다. “이거 몸에 좋다고 우리 어머니가 남준 씨도 드셔보라고 하셨어요.”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그녀가 조심스레 선물을 내밀었다.사실 이 핑계는 다영이가 둘만의 시간을 만들기 위해 준비된 것이었지만, 자신이 들어왔을 때 다른 여자가 남준과 친밀한 화면을 목격한 것을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다.“필요 없어요. 그냥 돌아가요. 이 비서, 정다영 씨를 집까지 안전하게 모셔다드려.” “저... 남준 씨...” 다영은 말끝을 흐리며 떠나기 싫어하는 기색을 보였다. “남준 씨, 이분은 누구세요?” 하연은 남준과 엮이기 싫어 얼른 그를 밀어내고는 빠르게 나와서 말했다. “정다영 씨, 우리 나중에 개인적으로 이야기하자.” 하연이는 다영을 데리고 나가려고 했지만, 다영은 움직이려 하지 않고 눈물을 글썽이며 남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준은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나도 이따가 회의가 있어요. 먼저 옷을 갈아입고 갈
부남준은 하연을 사무실로 끌어들인 뒤, 하연이가 믿기 힘들다는 듯 물었다. “왜 황연지를 해고한 거야?” 남준은 느긋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가 화상 입었잖아.” “내가 원하는 건 공평하고 공정한 처리야. 너의 독단적인 행동을 원한 게 아니라고.” “지금 상황에서 네 신분이 이미 밝혀졌는데, 그 사람들이 여전히 공평함을 믿을 것 같아?” 남준은 말하면서도 한 손으로는 비서에게 약상자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그는 면봉을 꺼내 하연에게 약을 발라주려고 해서 하연의 손을 억지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말이야, 최 사장님이 손을 다쳤다면, 황연지 한 명 해고하는 걸로 충분히 배상이 될 것 같아?” 하연 남준의 농담을 무시하며 말했다. “나도 일부러 황연지에게 부딪힌 게 아니야. 첫째로, 동기도 없었고, 둘째로, 내가 굳이 적을 죽이려다 내 몸도 해치는 일을 할 필요가 있을까?” 누가 더 잘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하자면, 하연이 당연히 연지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총애받았을 것이다.“바로 그 동기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네가 직원을 괴롭히는 건 너무나도 당연하고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거야.” 남준은 하연의 손에 약을 발라주며, 신중하게 말했다. “보통 사람들의 부유층에 대한 반감을 과소평가하지 마.” 하연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아 손을 빼려 했지만, 남준은 계속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내가 듣기로는 DS그룹의 성적이 꽤 좋은데, 최 사장님의 정신이 이런 사소한 일들조차 이해하지 못하다니. 가족들은 확실히 너를 너무도 잘 보호했나 보군.” 하연은 그가 비꼬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비웃지 마.” 그녀는 대답하면서 손을 뺐다. “그러니까 왜 날 찾아왔어?”남준은 물었다.“그냥 길 지나가다가 목말라서 물 한 잔 마시러 들렀어.” 하연은 억지로 핑계를 댔지만, 남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고 웃으며 면봉을 던지고 화장실로 손을 씻으러 갔다.하연의 시선은 남준의 비서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