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비행기 사고에서 하연은 한서준이라는 남자의 실체를 확실히 깨닫고 자신의 결혼을 객관적으로 되돌아볼 수 있었다. 내가 잘해 주는 만큼 상대도 나에게 잘 할 거라고 생각했던 착각에서 깨어난 것이었다.근데 두 번째는?돌고 돌아 제자리였다.‘내 옆에는 아무도 없구나.’하연은 눈을 내리깔고 자신의 깨진 휴대전화 액정을 쳐다보며 침묵에 잠겼다. 눈시울은 어느새 붉어져 흠뻑 젖었다.이때 갑자기 밖에 광풍이 세차게 불었다. 헬리콥터 한 대가 천천히 착륙했고, 이어서 양복과 가죽 구두를 걸치고 귀티 나는 키 큰 남자가 내려왔다.그의 표정은 침착하고 의연했다. 착륙한 후 한눈에 자신이 찾으려는 사람을 알아보고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헬리콥터의 소리가 너무 커서 구조된 다른 승객들은 모두 걸어 들어오는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모두들 이 남자가 누굴 데리러 왔는지 궁금해했다.“멋져, 다친 공주님 데리러 온 거야!”하연은 그 사람들이 말하는 방향으로 볼 기분이 아니었다. 다만 이 말을 들은 후 눈물이 펑펑 쏟아져 멈추지 않았다.다들 친구나 가족들이 데리러 왔지만 하연만 여전히 혼자였다.사방이 갑자기 조용해지고 차분한 발자국 소리가 하연의 귀에 들렸다. 점점 또렷하게 들려왔다.하연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들어 발자국 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뒤에는 온통 불빛이었고, 남자는 부상당한 승객들의 기대에 가득 찬 눈빛을 뚫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왔다.누구인지 똑똑히 보려고 노력했는데 쏟아지는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려져서 윤곽만 겨우 보였다. 아주 익숙한 실루엣이었다. 점점 더 가까워지자 하연은 자기도 모르게 그 이름을 불렀다.“부... 상혁?”발자국 소리가 하연 앞에서 멈추고 상혁의 따뜻한 손이 하연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상혁은 엄지손가락으로 하연의 눈물을 가볍게 닦았다. 마치 하나밖에 없는 보물을 대하는 것 같았다.“나 왔어, 하연아.”낮고 강한 상혁의 목소리는 하연의 마음속 불안을 잠재웠다. 마치 따뜻한 태양이 안개를 비
최동신은 손자 삼형제를 데리고 거실에서 오랫동안 기다렸다.모두 사고 뉴스 보도를 보면서, 처음에는 하연이 무사한 것을 다행으로 여겼지만, 생각할수록 뭔가가 맞지 않았다. 어쩌다 이 두 사람이 이미 인터넷에서 커플이 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최하성은 후회막급이었다. 급히 친구를 만나러 가지 말았어야 했다. 하연 혼자 비행기를 타고 D국으로 돌아오게 해서는 안되는 거였다.부동건은 이 때 손님을 맞기 위해 혼자 거실에 있다가 아들과 아내가 나오자 바로 안심했다.“상혁아, 얼른 최 회장님께 인사드려.”상혁은 앞으로 나가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회장님, 안녕하세요.”“음.”최동신은 감색 한복을 입었다. 머리카락이 이미 백발에 가까웠지만 몸도 건강하고 정신도 또렷했다.하민과 상혁은 서로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원래 동창으로서 평소에 관계가 좋은 편이었다.하경은 마치 데이터를 분석하는 듯한 눈빛으로 상혁을 살펴보았다. 마음속으로는 다음에는 상혁의 컴퓨터를 해킹하여 그의 사생활과 인품을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했다.하성은 팔짱을 낀 채 적의로 가득 차 있었다. ‘대체 어떤 인간이 나만의 하연이를 빼앗으러 왔지? 자기 힘으로 이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하연이 지금 자고 있어요.”상혁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동생을 왜 이렇게 친하게 하연이라고 불어요?”하성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먼저 물었다.“무례하게 굴지 마라!” 최동신은 하성에게 경고했다.최동신은 고개를 돌려 위엄 있는 말투로 말했다.“지금 언론에서 자네와 우리 하연이에 대해 말이 많은데,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하연이를 시집보내는 것이 네 소원일세. 물론 빠르면 빠를수록 더 좋고.”조진숙은 이 일을 꺼내자마자 매우 흥분했다.“우리 상혁이가 하연이 항공편에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만사를 제쳐두고 헬리콥터를 타고 공항에 가서 찾아 데려왔는데, 이것만 봐도 100점을 주고도 남지 않겠어요?”부동건은 물론 조진숙과 마찬가지로 하연을 며느리로 삼고 싶어서 얼른
똑같이 연결이 되지 않았다, 뉴스에서 상혁이 하연을 안고 가는 장면을 보고, 서준은 가슴에서 끓어오르는 질투심을 억제할 수 없었다. ‘저 여자는 정말 전남편쯤은 전혀 안중에도 없단 말이야?’ 서준은 서류철을 바닥에 내동댕이쳤고, 순식간에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한 대표님, 모레 칼리파 호텔에서 최씨 가문의 최동신 회장님의 칠순 연회가 있습니다. 저희도 초청되었는데 바로 비행기표를 예매할까요?” 구동후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예매해!” ... 밤의 칼리파 호텔. 이때 펜트하우스에는 전 세계 최고 부자인 최동신의 70세 생일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전 세계의 손꼽는 부호들이 모두 가족을 데리고 참석했다. 연회에 사용되는 모든 식재료는 외국에서 공수해 세계 최고의 프랑스 요리사를 직접 초청하여 조리했고, 연회의 음악은 세계 유명 오케스트라를 초청하여 연주하게 해서 하객들이 연회를 충분히 즐기도록 준비했다. 한눈에 봐도 이번 연회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었다. 요 며칠간‘악녀 최하연’과 ‘여우 최하연’이라는 두 가지 화제의 열기가 조금씩 사그라들고 있었다. ‘예쁜 언니를 찾습니다.’ 화제는 점점 더 뜨거워지면서 온 온라인상에서 ‘예쁜 언니’를 찾아 그녀의 선행을 보도하려고 했다. 이번 연회에 초대된 사람들은 부자이거나 귀족이었기에 보안은 매우 엄격했다. 초청된 유명 인사들은 모두 최씨 가문의 의외의 계획에 놀랐는데, 최동신이 자신의 칠순 연회에서 대외적으로 알리지 않은 어린 손녀를 소개한다고 해서 모두들 기대가 큰 상황이었다. 운좋게 이 일을 보도할 수 있게 선발된 기자들도 큰 영광으로 생각하며 바로 대서특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금 하연은 의상실에서 준비중이었다.하민은 M국의 가장 실력 있는 전문 스타일링팀을 초대했고,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화려한 드레스를 공수해 와 오늘 밤 하연을 가장 빛나는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당부를 남기고 떠났다. 하연은 상혁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하연아, 네가 나오는 그 순간을
연회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중심 위치에서 최동신과 하민은 사람들과 인사말을 나누었는데 두 사람에게서 자연스러운 카리스마가 풍겼다. 민진현이 민혜경을 데리고 뒤에서 걸어왔다. “최 회장님, 칠순 축하드립니다.” 민진현은 최동신에 대한 존중을 담아 낮은 어조로 말했다. 최동신은 여전히 인사를 나누고 있었지만 눈빛이 점점 차갑게 가라앉았다. “민 회장님, 언제 다시 부호 순위 100위 안으로 복귀하셨나요?” 마치 윗사람이 우쭐대며 아랫사람에게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민진현은 이 말에 당황했지만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딱 100위입니다. 겨우 턱걸이했어요.” 민씨 가문과 최씨 가문의 세력 차이가 너무 컸고, 이번에 부호 순위 100위 안에 들기 위해 민진현은 많은 힘을 썼다. “오늘 밤 손녀를 소개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민진현은 옆에 있는 민혜경을 바라보고 웃으며 말했다. “제 손녀가 사람 사귀는 걸 좋아하니, 회장님 손녀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혜경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최 회장님, 대표님 두 분을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하민은 혜경을 힐끗 쳐다보고는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여동생에게 혜경 씨처럼 교통사고를 일으키는 친구는 필요하지 않을 거 같군요.” 이 말을 들은 혜경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민진현은 하민이 하연의 사고를 두고 한말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하민의 태도를 이해했고 하연을 생각하는 남자이니 이 정도 이야기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흥. 우리가 눈에 거슬리다 이건가? 상관없어! 네 할아버지에게만 잘 보이면 되니까.’ 여기까지 생각한 민진현은 잠시 후에 따로 기회를 봐서 최동신과 몇 마디 나누면서 다시 하연과의 일을 이야기하기로 했다. “그럼 두 분 계속 연회를 즐기세요. 저희는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최동신이 눈썹을 치켜세우고 민진현과 혜경을 힐끗 쳐다보고는 작별을 고했다. 민진현은 웃으며 대답했다. “예, 회장님.” 혜경은 한눈에 무리 속에서 서준의 모
혜경은 오늘을 위해 많은 준비를 했다. 고급스럽게 차려입은 수제 맞춤옷은 한 달 전부터 예약한 스타일로, 임신 5개월이지만 볼륨이 있는 스커트 디자인이 허리라인을 잘 가리고 있었다. ‘뭐, 봐줄 만은 하네.’ 손을 다 닦은 하연은 한마디 했다. “너도 오는데 내가 왜 못 와?” 그리고는 혜경을 무시하며 화장실을 나갔다. “거기 서,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혜경이 뒤 따라 나왔다. 하이힐을 신고 있었던 그녀는 바닥에 있는 물 때문에 발바닥이 미끄러져 앞으로 넘어지려 했다. “아!” 혜경은 순간 뱃속의 아이가 생각나 넘어지지 않으려고 허둥대고 있을 때, 누군가의 손에 붙잡혀 품에 안겼다. 혜경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남자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자 혜경은 놀라 갑자기 안색이 변하며 자신을 도와준 사람을 그대로 밀쳤다. 그리고 그녀는 고개도 들지 않고 자신의 치맛자락을 정리한 후 허둥지둥 도망쳤다. 남자 역시도 뒤이어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하연은 이 모습을 보고 매우 이상하다고 느꼈다. ‘혜경이 저 젊은 남자를 그냥 두고 도망간다고? 예전이라면 화부터 낼 사람이? 물론 오늘은 중요한 날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만, 웬일이지?’ 하연은 시간 보고 드레스 갈아입기 위해 다시 들어갔다. 한편. 연회장의 은은한 음악이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가운데, 금빛 조명 아래서 사람들은 작은 소리로 올해 세계 발전 추세에 대해 이야기했다. 긴 다리의 하민은 무대 위로 걸어 올라갔다. 그가 오케스트라 쪽을 바라보자, 연주자들이 연주를 멈췄다. 현장 사람들도 대화를 멈추고 오늘의 마지막 순서를 기다렸다.최동신은 뒷짐을 지고 무대 아래에 서서 위쪽의 하민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최동신은 이미 경영에서 반쯤 물러난 상태여서 하민이 대신 나서서 발언하는 것이 적절했다.일찍 죽은 아들과 며느리가 어쨌든 자신에게 훌륭한 혈통을 남겼다고 생각하는 최동신은 하민을 보며 더없는 만족감을 느꼈다.“여러분, 저희 할
혜경에게 무대까지는 겨우 10걸음밖에 안 되는 거리였지만, 그 사이에 마치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는 것처럼 느끼게 했다. ‘난 내가 뛰어난 명문가 집안 아가씨라고 생각했는데, 하연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어.’ 하연과 혜경은 사실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생신 연회에서 여러분을 만나 뵙게 되어 너무 기쁩니다.” 하연이 미소 지었다. “요즘 저에 대한 소문이 떠들썩해서 여러분도 잘 아실 거라고 생각됩니다.” 이 말을 듣고 방금까지 하연의 등장으로 놀란 기자들이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셔터를 눌러 중대 뉴스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DS그룹 B시 지사의 최하연 사장이 바로 최동신 회장의 손녀였어.’ ‘최 대표와 그녀가 연인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남매일 줄은 생각도 못했어.’ ‘다시 두 사람을 보니 정말 닮은 것이 누가 봐도 남매잖아!’ 하연은 웃음을 거두며 진지한 표정을 했다. “여기서 진지하게 한 말씀 더 드리면, 저와 사이먼은 그저 평범한 친구 사이일 뿐이고 한 대표를 만나기 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였습니다.” “사소한 일에 이렇게 공개적으로 해명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고 마지막이 될 겁니다.” “그리고...” 하연의 예리한 시선이 서준과 혜경,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갔다. “저와 한 대표의 결혼은 이미 옛말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모두 그런 제 과거를 더 이상 염두에 두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연은 전남편과 전처가 만나 서로 얼굴을 붉히며 민망해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침착하고 담담하게 말했다. 한 명은 정정당당하게 성명을 낸 전처, 다른 한 명은 임신 5개월이 된 내연녀를 데리고 연회에 참석한 찌질한 남자, 지금 누가 옳고 그른지 모두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기자들은 서둘러 카메라를 서준과 혜경 두 사람에게 돌려 한바탕 셔터를 눌렀다. 서준은 여전히 냉정을 유지하며 자제하고 있었지만, 카메라 불빛 아래 혜경은 오히려 마음속에서 큰 동요가 일어났다. ‘결국 외부의 여론이 다
“이어서 최씨 가문은 명예훼손에 가담한 모든 연예매체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방침입니다.” “또한 앞으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 기업들을 인수할 겁니다.” 하민은 이 말을 하며 차가운 시선으로 민진현을 노려보았다. 사람들 사이에서 샴페인을 들고 있는 민진현은 안색이 크게 변하며 당황했다. 그는 B시 전체 연예계를 규합해 헛소문으로 무너뜨리려고 했던 사람의 배경이 이렇게 대단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현장에 있던 기자들도 모두 놀랐다. ‘이건 노골적으로 공격하겠다는 거잖아!’ ‘B시의 연예계에서 이제 피바람이 불겠군!’ 한편 여은이 이끄는 위클리 뉴스는 가장 먼저 하연의 정체와 ‘예쁜 언니’ 선행에 대해 보도해 네티즌들의 화제를 모으고 있었다. “와! 전생에 우주를 몇 번 구해야 최고 부자의 손녀가 될 수 있을까? 너무 부러워요.” “돈도 많고 사랑도 있고, 거기다 이렇게 예쁜데, 그 한서준은 바보 아니야? 이혼을 하다니!” “분명히, 장님이 틀림없어요.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그렇게 평범한 내연녀를 찾았을까요?” “완전 반전이라니까!” “저 근데, 최하연에게 헤어진 또 다른 형제자매가 있을까요? 제 생각에는 저일 거 같은데.” ... 하연이 하민의 팔짱을 낀 채 내려와 최동신 곁으로 다가서자 민진현이 웃는 얼굴로 다가왔다. “최 사장님이 최 회장님의 손녀일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보는 눈이 없어서 대단하신 분을 몰라봤어요.” “제가 오해했지 몹니까? 모두 오해예요.” 지금 민진현의 늙은 얼굴에 가득한 알랑거리는 미소가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민망하게 했다. 최동신이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민 회장이 내 소중한 손녀에게 한 짓을 어떻게 그냥 단순한 오해로 넘어갈 수 있을까요?” “불량배를 보내 내 여동생을 해치려 하고, 악담을 퍼붓고, 모함하고, 거기에 당신 손녀는 고의로 교통사고를 내서 사람을 다치게 하기까지 했지요.” 하민의 눈빛이 한 겨울 서리처럼 더 차가워졌다. “이제 ST그룹과 확실히 계산할 때가 된 거
백옥반지는 자신이 평생 소중히 여겼던 보배라 늘 잘 관리하고 세심하게 보관해 왔는데, 지금 하연에 의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비닐봉지에 담겨 있자, 민진현은 마음속으로 안타까워 애가 탔다. “사장님?” 하연이 살짝 손짓하자 정기태는 그 반지를 민진현 앞에 내밀었다. 민진현은 기뻐했고, 하연이 관대한 마음으로 자신에게 백옥반지를 돌려주려 한다고 생각했다. “최 사장님, 정말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우신 분이 마음씨도 착하시다니요.” 민진형은 자신의 오른손에 다시 낄 반지를 되찾고 싶어 안달이 났다. 하지만 그는 다음 순간 하연이 가볍게 던지는 말을 듣고 놀랐다. “민 회장님이 진심으로 잘못을 고치고 싶다면, 망치로 그것을 직접 부숴서 성의를 보이세요.” “예?” ‘부수라고?’ 민진현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내가 애지중지하던 이 값진 보배를 네 가벼운 말 한마디로 부술 거 같아?’. 민진현은 안타까움에 하마터면 생각이 말로 튀어나올 뻔했다. “시중에 내놓으면 어림잡아도 2000억짜리 반지인데 그걸 부숴버리라고요?” 민진현은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민 회장님이 보상해 주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이 반지 정도면 그럭저럭 보상이 될 거 같아요. 왜요? 회장님은 그러기에 좀 아까운 건가요?” 민진현의 변화무쌍한 표정을 바라보는 하연의 무표정한 얼굴엔 아무 감정도 없었다. ‘그래 아까워! 너무 아까워서, 죽는 것보다 더 괴롭다고!’ ‘하지만 지금은 최하연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우리 ST그룹 전체를 구해야 해!’ 민진현은 마음속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계산하고 있었다.잠시 후. 민진현이 결국 이를 악물고 또박또박 말했다. “망치를 가져오세요!” 몇 사람이 이 소리를 들었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모두 모여들어 구경을 했다. “어머나, 진짜야?” “저 반지가 엄청 비싼 거 아니야? 근데 정말 부숴야 해? 너무 아까워!” “모르는 소리마! 지금 최 사장님한테 미움을 샀으니, 보상하려면 ST그룹 열 개라도
최씨 가문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부씨 가문의 본가는 싸늘하고 조용했다.예년과 다름없이, 설날이 되면 부동건은 집안의 남자들과 함께 조상들에게 제사를 올려야 했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른 아침부터 송혜선은 핸드폰을 손에 쥐고 부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연결음만 울릴 뿐, 남준은 끝내 받지 않았다. ‘이 녀석은 정말이지, 사람 속을 태우는 재주가 있다니까.’ 송혜선의 얼굴에 점점 초조한 기색이 드러났다. 옆에서 지켜보던 조봉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때? 아직도 전화를 안 받아?” 송혜선은 짙어진 눈매로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 녀석, 정말 사람을 신경 쓰게 만드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조봉규는 부드러운 말투로 그녀를 달랬다. “혹시 무슨 사정이 있어서 늦는 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너무 걱정 마십시오. 남준이가 철없는 아이도 아니고.” ‘철없는 아이가 아닌데 이러겠어?’ 송혜선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최대한 감정을 눌렀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이 원래부터 남준이를 못마땅해했는데. 이런 중요한 제사까지 빠지면, 분명 뒷말이 나올 거야.” 그녀의 말투에는 이미 불안과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그러는 사이, 두 사람이 작은 응접실에서 나와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그때, 정면에서 다가오던 부동건과 마주쳤다. 부동건은 갓 외투를 정리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송혜선과 조봉규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 손동작이 살짝 느려지며 묘한 시선을 던졌다. “조 선생, 올해도 그렇게 혜선이 옆에 딱 붙어서 열심히 잘 보살펴 주세요.” 그 말 한마디에, 분위기가 묘하게 변했다.조봉규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회장님, 제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부동건은 묘한 눈빛을 유지한 채, 덤덤히 말했다. “혜선이가 아이를 무사히 낳으면, 그에 대한 보상도 충분히 해줄 테니
두 집안이 한데 모여 북적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이런 귀한 순간을 마음껏 즐기며 보내다 보니, 어느덧 설날 전날이 되었다. 모두 함께 전용기를 타고 F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설날이 밝았다. 올해는 오랜만에 최씨 가문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인 데다, 기쁜 소식까지 겹친 한 해였다. 그 덕분인지 최동신은 평소보다 더욱 설 준비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최씨 가문의 본가는 분주했다. 집사와 고용인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저택 곳곳을 장식했다. 새빨간 복주머니와 길상 문양이 새겨진 장식들이 하나둘 자리 잡았고, 정원에는 화려한 등불이 걸리며 설 분위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하연이 계단을 내려오자, 기다렸다는 듯 최하성이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 “하연아, 새해 복 많이 받아라.” 그러면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하연은 두 눈을 반짝이며 얼른 봉투를 받았다. “와! 이렇게 두꺼워요? 하성 오빠 최고!” 그때, 계단 위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있다.” 최하경이었다. 그 역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들고 내려왔다. “작년, 재작년 다 해외에 있어서 못 챙겨줬잖아. 그래서 올해 한꺼번에 더 두둑이 넣었다.” “와! 이건 더 두껍잖아요! 이러다 손목 나가겠어요!” 하연은 연달아 두 개의 두툼한 봉투를 받아 들고, 각각 한쪽 팔을 오빠들에게 걸었다. “오빠들 있어서 진짜 좋아요!” 최하성, 최하경 둘 다 서로를 바라보며 우애가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그리고 최하민과 예아름이 나란히 들어왔다. 추운 바깥 공기를 뚫고 들어오자마자, 하민은 아름의 목에서 목도리를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그는 안쪽에서 떠들썩하게 웃고 있는 세 남매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집이 이렇게 활기찬 게 얼마 만이에요!” 아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러게요. 앞으로 더 행복한 일만 가득할 거예요.” 하민은 아내의 허리를 가볍
그리곤 진심을 담은 남자의 목소리가 멈추었다. 하지만 하연의 눈가에는 이미 촉촉한 눈물이 맺혀 있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글귀, 한 글자 한 글자마다 상혁이 진심을 담아 전한 마음이 느껴졌다. 이건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상혁이 하연에게 건네는 가장 솔직하고 깊은 속마음이었다. 그때, 뒤에서 들려온 부드러운 목소리. “하연아.” 하연은 본능적으로 뒤돌아섰다. 그리고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숨이 멎었다. 아까까지의 편안한 차림은 온데간데없이, 눈앞의 상혁은 새하얀 수트를 차려입고 있었다. 반듯하게 맨 보타이, 정갈하게 빗어 넘긴 머리, 그리고 손에 들린 한 다발의 꽃. ‘동화 속에서 막 나온 왕자님 같아.’ 하연은 멍하니 서서 남자를 바라보았다. 상혁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하연의 가슴이 터질 듯이 뛰었다. 남자의 시선, 남자의 걸음, 그가 다가오는 순간의 모든 것이 하연의 가슴속 깊이 새겨졌다. 마침내, 상혁은 하연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은 마주 섰고, 서로의 눈동자에 상대방의 모습이 담겼다.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떨림이 전해지는 듯했다. 조용한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상혁이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꽃을 건넸다. 남자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하연아...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말이 끝나자, 그는 왼발을 살짝 앞으로 내디디더니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작은 벨벳 상자를 꺼냈다. 이어서 뚜껑을 열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혁의 눈빛에는 단 하나의 감정만이 가득 차 있었다. 바로 사랑이었다. “한때 나는 사랑이란 영화 속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널 만나고, 그게 아니란 걸 알았어.” “사랑은 영화 속 한 장면이 아니라,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서로를 아껴주고, 이해하고, 감싸주는 거라는 걸.” “그래서 나는... 너와 함께, 그런 사랑을 하
둥근 형태의 테라스는 새하얀 난간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위로 푸릇푸릇한 덩굴식물이 감싸고 있었다. 연둣빛 야자수 잎 사이로 작고 앙증맞은 꽃들이 군데군데 피어 있었고, 은은한 향기가 바람에 실려왔다. 테라스 중앙에는 우아한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이미 차와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하연아, 우리 저기에 앉자.” 상혁은 하연의 손을 잡고 테이블로 이끌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직접 꽃차를 따라주었다. 하연은 손으로 찻잔을 감싸고 조심스레 한 모금 머금었다. 부드러운 향이 입안 가득 퍼지며 깊은 여운을 남겼다. “이거 무슨 차예요? 향이 너무 좋아요.” “목련차야. 테라스 뒤쪽에 한가득 피어 있는데, 한번 가볼래?” ‘목련꽃이 이렇게 가까이에서 피어 있다니.’ 순백의 꽃잎이 겨울을 이겨내고 피어나는 모습이라니,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연은 찻잔을 내려놓고 기대에 찬 눈빛을 보냈다. “가보자!” 둘은 테라스를 나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하얀 원형 아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너머로 눈부신 꽃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우와...’ 하연은 숨을 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순백의 목련이 바람에 살랑이고, 보랏빛 라벤더가 넘실댔으며, 튤립이 형형색색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각종 귀한 품종의 꽃들이 경쟁하듯 피어나고 있었고, 이 모든 아름다움이 한데 어우러져 마치 꿈 속을 걷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상혁은 걸음을 멈추고 어디선가 꽃으로 엮은 화관을 꺼내더니, 조심스레 하연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하연아, 여기는 너만을 위한 꽃밭이야.” 놀란 듯 하연이 눈을 깜빡이며 상혁을 올려다보았다. ‘설마...?’ 여자의 가슴이 터질 듯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상혁은 하연의 손을 잡고, 꽃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길을 따라 걷자 길이 점점 넓어졌고, 상혁과 함께 그 길을 따라 가자 점점 하연의 시야가 트였다.
고개를 돌려 반짝이는 눈빛으로 하연이 상혁을 바라보았다. “여긴 어디예요?” 상혁은 여자의 시선을 따라 앞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때 버려졌던 작은 섬인데. 나중에 내가 사들였어.” 그는 자연스럽게 하연의 손을 잡으며 손가락을 맞물렸다. “어때? 마음에 들어?” 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네, 좋아요!” ‘좋다니 다행이야. 오랜 시간 공들여 준비한 보람이 있었네.’이 순간을 상혁이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그는 하연의 손을 살짝 당기며 말했다. “일단 우리 아침부터 먹자. 그리고 이따가 바닷가에 데려가 줄게.” “좋아요.” 이 섬은 남태평양 깊숙한 곳에 자리한 작은 외딴섬이었다. 한때는 몇 년 동안 방치되어 잡초가 무성하고 황폐했지만, 우연한 기회에 상혁이 이곳을 매입해 전문가에게 맡겼다. 불과 2년 만에 섬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집도 짓고, 길도 만들고, 섬 전체가 아름답게 정돈되었다. 한낮이 되자 햇살이 섬을 따스하게 감쌌다. 하연과 상혁은 손을 잡고 깔끔하게 정돈된 자갈길을 따라 걸었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따뜻했다. 바람이 불어오자 하연의 원피스 자락이 살짝 날렸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멀리 두었다. 눈앞에는 하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고, 곱디고운 모래가 햇빛 아래 반짝이고 있었다. “저기 봐요! 야자수가 있어요!” 하연은 설레는 듯 조심스레 뛰어나갔다. 상혁은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그녀가 가는 곳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푸른 하늘 아래, 키가 큰 야자수들이 가지런히 줄지어 서 있었다. 커다란 잎사귀들이 바닷바람을 타고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마치 오랜 세월을 품고 바다의 이야기를 속삭이는 것 같았다. 하연은 신발을 벗고 모래 위에 발을 내디뎠다. 발끝을 감싸는 모래가 부드럽고도 간질거려, 묘한 전율이 발끝에서부터
가정부는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연신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다영은 손에 힘을 주며 눈빛을 날카롭게 번뜩였다. “정말이야?” 가정부는 몸을 잔뜩 웅크리며 떨었다. “정말 없습니다. 다만...” “다만 뭐?” 가정부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가 결국 떨리는 손으로 오늘 아침 신문을 내밀었다. “아가씨, 아가씨가 직접 보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다영이 반응하기도 전에, 가정부는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다영은 신문을 펼쳤고, 눈앞에 펼쳐진 것은 부남준의 충격적인 스캔들이었다. 각종 유명 유흥지에서 여성들과 어울리는 사진들, 도저히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장면들이 페이지를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게 말이 돼? 남준 씨가 나한테 이럴 리가 없어.’ “이건 거짓말이야!” 신문을 쥐고 있는 다영의 손의 힘에 의해 손이 하얗게 질려 갔다. 그녀는 결국 신문을 찢어버렸다. 그때, 송혜선이 아래층에서 천천히 내려오며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일이야?” 다영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송혜선에게 달려가 팔을 붙잡았다. “어머님, 남준 씨가 어떻게 저한테 이럴 수 있어요?” ‘이럴 수가 없어!’ 송혜선은 미간을 좁히며 한숨을 쉬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다영은 바닥에 떨어진 신문을 집어 송혜선에게 내밀었다. 송혜선은 대충 훑어보더니, 피식 웃음을 흘렸다. 부남준의 사생활에 대해서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애초에 회사 권력을 잡기 위해 정지철의 힘을 빌리지 않았더라면, 송혜선은 감히 정다영을 건드릴 일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 정지철은 구속됐고, 정씨 가문도 몰락했으니, 다영에게 아직 이용 가치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지 않았다면, 송혜선은 진작에 다영을 내쫓았을 것이다. 다영에게 이렇게 함부로 행동하지 못했을 것이다.“이런 신문 기사 하나에 휘둘리지 마라, 다영아.” 송혜선은 태연하게 다영의 손을 두드리며 말했다. “넌 남준이의 약혼녀야. 네가 남준이를 의심하면
상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묻지 않고, 조용히 하연을 품에 안았다. “아직 저녁 안 먹었지? 네가 좋아하는 요리들 준비해뒀어.” 하연은 눈을 들어 남자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정말 맛있는 저녁이 되겠네.” 상혁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코끝을 톡 하고 건드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우리 하연이, 여전히 먹을 것 앞에서는 못 참는구나.” 식탁 위에는 하연이 좋아하는 요리들이 정성스레 차려져 있었다. 마늘 버터 가리비, 새우찜, 전복찜, 킹크랩, 탕수육까지. 하연은 만족스럽게 식사를 즐겼고, 상혁은 그녀 옆에서 직접 새우를 까서 접시에 올려주었다. “부 대표님의 또 다른 재능이 새우 까기였나 봐요?” 하연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상혁은 마지막 한 마리를 까서 그녀 앞에 내밀며 미소 지었다. “너만을 위한 서비스야.” “그럼 나는 정말 행운아네요.” 하연은 미소를 지으며 새우를 한입에 넣었다. 그때, 테이블 위의 휴대폰이 깜빡였다. 원신민이 보낸 메시지였다. [부 대표님, 그 사진들 보낸 사람이 정다영 씨였습니다.]상혁은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으려 손수건으로 손을 닦고 나서야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메시지를 확인한 남자의 눈빛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이건 예상 밖이군.’ 그러나 그는 곧 차분하게 타이핑을 시작했다. [남준이는 요즘 뭐 하고 다니지?]원신민의 답장은 빠르게 도착했다. [부남준 상무님은 최근 여러 장소를 돌아다니며, 여성들과 어울리고 있습니다.]상혁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진 확보 가능해?][어렵지 않습니다.][서여은 편집장 요즘 기사거리가 부족하다던데, 도와줘야겠어.] 메시지를 받은 원신민은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부 대표님, 한 방에 끝내버리는구나.’ [알겠습니다, 대표님.]상혁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하연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아직 할 일이 남아있었어요?” “작은 일 좀 정리했어.” 그는
하연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이현의 말이 그동안 떠돌던 소문을 확인해 주는 듯했다. “갑자기 왜 그런 결정을 내렸어요?” 이현은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머금고, 감회가 어린 듯 말했다. “예전엔 내가 사업에서도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결국 나 자신을 과대평가했던 거죠.” 그는 눈을 들어 하연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말하는 게 나로서는 최선의 선택이겠지.’ 그가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듯한 이 말들 속에는,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체면을 지키면서도 이별의 뜻이 담겨 있는 방식이었다. 이현은 한때 상혁과 정면 승부를 벌이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하연을 자신의 곁으로 다시 두고 싶었다. 하지만 운명은 이현과 하연을 번번이 엇갈리게 만들었고, 끝없이 스쳐 지나가게 했다. 이현의 모든 집착과 미련은, 하연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마치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게 하연이 선택한 행복이라면, 이현은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건 조용히 축복해주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애초에 이 길을 선택하지 않는 게 나았을지도 몰라요. 차라리 계속 가게 운영하는 게 더 어울렸을 텐데...” “그래도 다행이죠. 너무 늦기 전에 깨달았으니까. 이제라도 진짜 의미 있는 일을 찾아야겠어요.” 하연은 조용히 남자의 말을 들으며, 친구로서 진심을 담아 말했다. “어쩌면 새로운 곳에서 당신만의 행복을 찾을 수도 있을 거예요.” 이현은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아요.” 그 순간, 오랫동안 이현의 마음속에 얹혀 있던 무거운 돌덩이가 스르르 사라지는 기분이들었다. 심지어 그 한때의 집착과 미련도 함께 흩어져 갔다. 그는 가볍게 몸을 돌려 준비해 온 선물 상자를 꺼내며 말했다. “새해가 지나면 하연 씨 약혼식이 있을 테니, 나는 참석하지 않겠지만, 이 약혼 선물만큼은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약혼 선물’이라는 말이 하연의 귀에 맴돌았다. 이것이 하연이 이현과 함께 들려온 남
“하연이, 집에서 지내는 게 더 편할 거예요. 저는 상관없습니다.” “너는 항상 우리 하연이만 생각하는구나.” 최동신은 농담 섞인 말투였지만, 어딘가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그래.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긴 하지. 집안 가정부들은 어릴 때부터 하연이를 봐왔으니, 생활 습관을 잘 알고 있고 이곳이 하연이가 편하긴 할 거야.” “아침부터 나갔다던데, 너랑 같이 있던 게 아니었어? 그럼 얘가 어디 간 거지?” 최동신은 가정부를 불러 말했다. “하연 아가씨한테 전화 좀 걸어보게.” “어르신, 이미 전화드렸는데 받지 않으십니다.” 최동신은 미간을 좁혔다. “무음으로 해놔서 못 들었나...” 하지만 최동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혁의 주머니에서 진동음이 울렸다. 문자 메시지였다. 상혁은 화면을 열어 확인하는 순간, 눈빛이 짙어졌다. 최동신은 미묘한 변화를 감지했다. “상혁아,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야?” 상혁은 잠시 멈칫했지만, 다시금 평정을 찾고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업무 관련한 일이라서요.” 최동신은 배려 깊게 말했다. “일이 우선이지. 얼른 가봐라.” 최씨 가문의 본가를 나서며, 상혁은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봤다. 문자 메시지 하단에 찍힌 ‘TW카페’ 네 글자가 유독 선명했다. ...평일 오전의 TW 카페는 한산했다. 한 시간 전. 다시 ‘한명준’이 된 손이현은 급히 카페로 향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창가 소파에 앉아 있는 하연이 눈에 들어왔다. 햇살이 유리창을 통해 여자에게 내려앉아,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함을 자아냈다. 이현의 발걸음도 순간 멈췄다. 그는 한동안 하연을 바라보며 흐트러진 숨을 고르던 중, 직원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손님, 몇 분이세요?” 이현은 가볍게 손짓했다. “약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곧장 하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다리게 했나요?” 하연은 시선을 들어 평온한 표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