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죠, 우 상무님?”하연이 우지나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하고는 싱겁다는 듯 웃었다. 갑자기 우지나가 호명되자, 회의실의 모든 사람들이 어색하게 웃기 시작했다. “최 사장님 말씀은...”하연이 손가락에 끼워진 푸른색 다이아몬드 반지를 만지작거리다가 화살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우지나를 쏘아보며 말했다.“우 상무님, 왜 마지막으로 올라오신 겁니까?” “저요?”우지나가 스스로를 가리켰다.“그저, 화장실에 다녀왔을 뿐입니다.”“최 사장님, 정말 열심이시군요. 부하 직원이 화장실에 다녀오는 것까지도 관리하시니 말입니다.”“화장실에 다녀오는 것만큼 간단한 일이 아니었던 것 같아 여쭙는 겁니다.”하연이 정기태로부터 받은 자료를 우지나의 앞에 내팽개쳤다.“기항그룹의 주식을 사들이고 있던 사람들에게 빨리 손을 떼라고 전하러 갔던 거 아닙니까?” 하연이 내팽개친 자료를 훑어본 성재가 하연의 뜻을 알아차렸다. 하연의 목소리가 광풍과 폭우 전의 고요함과 같이 낮게 깔렸다. “우 상무님, 설명해 주셔야겠습니다.” 우지나는 자신의 앞에 내팽개쳐진 자료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자세히 보니, 우지나의 얼굴은 창백하여 입술도 떨리고 있었다. 게다가 식은땀까지 흘리며 긴장하고 있는 듯했다. “최대한 은밀히 진행한다고 한 건데, 이 여자한테 들켜버리다니!”하연이 웃기 시작했다.“제가 모은 증거만으로도 이미 충분합니다.”“우리 DS그룹과 정보를 공유할 때, 고의적으로 나노로봇에 대한 소스코드를 주식 시장에 유출한 후, 주식투자자들을 공포에 떨게 하여 주식을 헐값에 팔아 치우게 하고, 어부지리로 더 많은 기항그룹의 주식을 손에 넣으신 거 아닙니까?” “임 대표님, 우 상무님께서 솔직하게 사실을 털어놓으실 생각이 없으신가 봅니다.”“임 대표님, 제가 사람을 시켜 기항그룹의 주식을 사들이라고 한 건, 그저 주식이 외부인의 손에 넘어갈까 걱정됐기 때문입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정말이지 다른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마음을 다 잡은 우지나가 분주하게 변
“임 대표님은 임 대표님 일에만 신경 쓰시죠.”서준이 눈살을 찌푸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와 관련된 문제는 이미 해결됐습니다. 단지, 세상 물정에 다소 섭섭할 뿐이지요.”성재가 서준에게 물 한 병을 건넸다. “한 대표님, 곧 약혼하신다고 들었습니다.”“아직 결정된 건 아닙니다.”서준이 성재가 건넨 물병을 밀어내고는 긴 다리를 뻗으며 회의실을 떠났다. ...돌아가는 길.하경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아까 네 편을 들던 사람이 한서준이야?”하경의 말을 들은 하연은 다소 화가 난 듯했다.“누가 내 편을 들었다는 거예요? 그 사람은 돈이 중요했을 뿐이라고요!”하경이 고개를 끄덕였다.“그 사람, 그런대로 잘 생겼더라. 근데 여자 안 좋아하잖아. 너랑은 안 어울려. 헤어지길 잘했지.” 하경의 말에 하연은 말문이 막혔다.‘못 살아 정말...’ “그래요, 그래서 오빠 말대로 헤어졌잖아요.” 하연이 서준과 결혼식을 올릴 당시, 하경은 바다 건너에서 업무에 시달리고 있던 터라 결혼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하경은 매제의 인품을 증명하기 위하여 특별히 서준의 노트북을 해킹했었다. 하경은 해킹한 노트북을 이용하여 서준을 탈탈 털어보려 했지만, 놀랍게도 서준의 노트북에는 남자라면 좋아할 만한 그 어떤 것도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하경은 서준이 무성욕자인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고, 근거를 정리하여 하연에게 메일로 보냈으나 철저히 무시당했었다. 단 한 번도 사랑을 나누지 않았던 지난 3년간의 결혼 생활을 돌이켜보자니, 하연은 서준이 부부생활을 할 수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럼, 도대체 민혜경은 어떻게 그 사람의 아이를 가진 거야?’ “근데 오빠, 왜 이번에도 혼자 왔어요? 내 새언니 될 사람은요?” “몰라, 꿈속에 있는 건지, 아니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건지... 아무튼 아직 못 만났어.”하경이 상큼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내가 이래라저래라 할 일은 아니지만, 빨리 찾아봐요. 더 미루다 가는
차문이 열리자 하연이 차에서 내렸다.“아, 오랫동안 근육을 안 썼더니 온 몸이 근질근질하네.”그녀는 눈앞에 서있는 사람들을 훑어보았다.“한꺼번에 덤빌래? 아니면 한 명씩 덤벼보던가?”칼을 든 이 건장한 남자들은 보기와 달리 강한 하연을 상대로 한번 싸워보고 싶었다. 풀숲으로 나가떨어져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동료를 확인하고 다시 차 안을 들여다보니 하연이 다른 일행 없이 혼자인 것을 알고 일순간 마음을 놓았다.문신을 한 남자는 담배를 물고 부하의 머리를 옆으로 밀어젖히고 하연 앞으로 왔다.“너도 보다시피, 우리가 수는 더 많다. 눈치 있게 회장님 반지를 내놓으면, 네가 좀 덜 다치는 거지.”하연은 비웃으며 말했다.“민진현이 보낸 패거리들이군.”“멍청한 것, 뭐 그렇게 질문이 많아, 내놓을 거야, 말 거야?”하연은 재빨리 문신한 남자가 피우던 담배를 빼앗아 꽁초를 그의 이마에 비벼서 끄고 이어서 옆차기를 하여 그를 한쪽으로 치워버렸다.하연이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말 많으면 짜증나지, 너부터 맞자.”“젠장, 감히 나를 때리다니!” 문신남은 땅에서 버티며 입속에서 빠진 이를 뱉어냈다.“저 여자 치워!”모두 덤벼 하연을 에워싸고 덤볐지만 연이어 비명을 지르며 멀리 나가떨어졌다.10분도 안 되어 모두 바닥에 누워 곡소리를 냈다.하연은 문신남 앞에 가서 경멸하는 눈빛으로 말했다.“네가 얘들 두목이야?”“뭐... 그렇다고 할 수 있죠.”“방금 나를 치우라고 했을 때는 이 말투가 아니었는데.”하연은 그를 발로 걷어찼다.“두 사람씩 밧줄로 묶어서 경찰서로 끌고 가세요.”“아! 예쁜 누님, 괜찮습니다. 다음에 절대 또 덤비러 못 옵니다.”“나한테 맞아 이 거리에서 죽고 싶은지, 아니면 경찰서 가서 자수하든지 네가 선택해.” 하연의 눈빛이 점차 험악해졌다. 문신남은 하연의 말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뼛속 깊이 느꼈다.“야, 튀어. 빨리 튀어!”문신남은 하연이 생각을 바꿀까 봐 얼른 대응했다. 하연의 싸움 솜씨가 보통이 넘어서
[그리고, 안부르면 안 올 거냐?]하민은 영상통화 분위기가 좀 얼어붙자, 긴장을 풀려고 하성에게 직접 물었다.하성은 호되게 혼나고 나서 얼굴을 들지 못했다.“그럴 리가, 할아버지의 생신에 어떻게 감히 안 갈 수 있겠어.”하연이 뒤에서 몰래 웃었다. ‘셋째 오빠 다룰 수 있는 사람은 큰오빠와 할아버지뿐이구나.’최동신은 나이에 비해 꽤 정정한 편이었다.[하연이의 나노로봇 프로젝트를 잘 도와라.]최동신은 최하경에게 당부했다.“아이고, 할아버지, 둘째 오빠한테 말 안 하셔도 돼요. 오빠도 최선을 다할 거예요.” 하연은 두 오빠의 목을 양팔로 껴안고 환하게 웃었다.하경은 담담하게 대답했다.“물론이죠.”하연이 지금 이렇게 사업에 전념하는 것을 보고 최동신은 마음이 놓였다.[할아버지 이제 쉬셔야 해. 끊는다.] 최하민이 화면 앞으로 나와 말했다.가족은 그제야 영상통화를 마쳤다....거실에서 민진현은 한가롭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그는 좋은 소식을 기다리며 습관적으로 엄지손가락을 어루만지다가 아끼던 백옥 반지를 아직 되찾지 못한 것을 깨닫고 마음이 울적해졌다. 하지만 곧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자 다시 기뻐서 트로트 곡조를 흥얼거렸다.한쪽에 서 있던 집사는 오랫동안 앉지도 못하고 서서 내내 시간만 확인했다. 아까 보냈던 사람들이 아직도 답장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민진현의 흥을 깰까 봐 슬그머니 다른 쪽으로 가서 문신남에게 전화를 걸었다.수차례의 통화 시도 끝에 겨우 연결되었다.“이봐! 너희들 뭐 하는 거야? 이런 사소한 일을 아직도 못 끝냈어? 그 여자 물건 뺏었어?”[여기는 경찰서입니다. 마침 관계자들을 찾고 있었는데 지금 서로 나와주십시오.]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울렸다.집사는 놀라서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얼른 민진현에게로 달려갔다.“회장님, 큰일났습니다. 그 사람들이 지금 경찰서에 있답니다. 지금 회장님께 좀 오시라고 하는데요!”민진현은 놀라서 찻잔뿐만 아니라 찻주전자까지 모두 깨뜨렸다.‘반반한 얼굴 하나 믿고
[내 말이 맞잖아?] 하연의 조롱하는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렸다.한서준은 전혀 사과하지 않았다.“민진현은 네가 상대할 만한 사람이 아니야. 다 너를 위해서라고.”[나를 위해주는 척은 됐어, 그 인간이 공격해오면 나도 나대로 방법이 있어!]전화가 갑자기 끊기고 점차 어두워지는 핸드폰 화면을 보면서 서준의 눈에서 분노가 일었다.‘이런 바보 같으니!오늘 내 말 안 듣고, 그때 가서 어떻게 하는지 보자!’이때 차 앞좌석의 비서가 보고했다.“한 대표님, 구동후 실장님이 F국 쪽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겼다고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직접 가보셔야겠습니다.”한서준은 눈을 감고 숨을 잠깐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알았어, 가장 빠른 비행기편으로 예약해.”F국 쪽의 업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구동후를 보내서 정세를 살피는 중이었다.최근 회사의 업무에서 손을 뗄 수 없었다. 하연이 있을 때보다 훨씬 바빠진 것은 사실이었다.‘최하연, 한 번쯤 고생해봐도 좋겠지. 다 잃고 가진 게 없을 때 손을 내밀어 도와주고 다시 HT그룹으로 돌아와서 도와달라고 하는 편이 훨씬 쉽겠지...’...하연이 전화를 끊은 후 고개를 돌리자 하경이 하성과 통화중인 것을 발견하고 달려들어 끊게 하려고 했다. 이미 통화가 끝난 것을 보고 손을 놓았다.“방금 왜 전화 못 하게 했어? 네 그 찌질한 전남편 욕할 거였는데!”“요새 좀 덜 맞아서 몸이 근질근질하지?”하경이 눈빛으로 경고하자, 하성은 즉각 고분고분하게 말을 들었다.하연은 서준과 통화한 후 답답한 마음이었다. 그런데 오빠들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고 갑자기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마음이 개운해졌다. 전 세계를 적으로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내 뒤에서 응원해주는 가족과 친구들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가족과 친구들이 바로 하연의 전부였다.하연은 가볍게 웃었다.“둘째 오빠, 좀 살살 해. 셋째 오빠 팔이 이제 좀 나았는데.”“그래! 사랑하는 동생을 이렇게 험하게 다루다니! 나중에 큰형이랑 할아버지께 다 말할 거야!”하성
“안 돼,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해. 다른 사람들이 내가 무서워한다고 느끼게 하면 안 돼.”‘그런 뜬소문으로 나를 굴복시키려고?’‘내 사전에 ‘굴복’이라는 단어는 없어!’하연은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 출근 준비를 했다.DS그룹 빌딩 안.문화 예술계 기자들이 이미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다.빨간 포르쉐 한 대가 그들 앞에 세워져 있다.차 안의 정기태가 말했다.“사장님, 선글라스를 쓰거나 모자로 가리시겠어요? 이 사람들이 함부로 사진 찍는 것 때문에 언짢으실 수 있습니다.”“아니요.” 하연은 밝은 웃음을 지으며 차량의 룸미러를 향해 자신의 화장을 보면서 아름다우면서도 예리함이 느껴지는 것을 보고 아주 만족해했다.“그런 루머들에 휘둘릴 내가 아니라는 걸 보여줄 거야.”기태는 먼저 차에서 내렸고 한쪽의 경호원들은 이미 인간띠를 만들어 기자들을 뒤로 물러서게 했다.기태가 차문을 열고 하연이 차에서 내리는 것을 맞이했다.고급 큐빅이 박힌 치마를 입어 하연의 온몸이 눈부시게 빛나고, 여전히 빈틈없는 완벽한 웃음을 보였다. 기자들은 흑역사가 만천하에 공개된 하연이 대중 앞에서 얼굴을 못 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하연은 전혀 그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카메라 플래시가 쉬지 않고 터지자 하연은 확신에 찬 눈빛으로 안으로 들어갔다.“최하연 씨! 결혼 중 외도한 것에 대해 한 대표님께 사과할 생각입니까?”“이 결혼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사이먼과 부적절한 관계였습니까?”“그 학교폭력 피해자들의 이름을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까?”“죄값은 어떻게 치를지 생각해 보셨습니까?”이때 기자의 뒤쪽에서 밀크티 컵이 날아와 최하연의 뒤통수를 내리치려 하자 한 그림자가 재빠르게 나타나 손으로 컵을 막았다.하민의 눈동자는 날카로운 화살처럼 컵이 날아온 방향을 확인하고 한쪽의 경호원들을 향해 달려갔다.“컵 던진 사람을 찾아라.”“네!”하연은 갑자기 나타난 하민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코끝이 찡해져서 하민의 팔을 붙잡고 기대어 섰다.어려움이 닥쳐서 도움이 필요할
[예쁜 언니, 우리 민성시립대학교 정문 앞에서 만나기로 할까요?]하연은 그제야 자신이 최근에 외출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떠올렸다.[너희들 지금 어디 있니? 내가 사람을 보낼게, 이 쪽으로 같이 와.]한 시간 뒤.DS그룹 빌딩 입구에서 기자들은 시간을 끌며 떠나지 않고 모두 사진을 한 차례 더 찍기 위해 하연이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렸다.그때 업무용 차량 한 대가 멈추고 차에서 똘똘한 눈을 가진 학생 셋이 내렸다.눈치 빠른 기자는 한눈에 맨 앞의 소녀가 올해의 B시 대학 입시 수석 합격자인 김혜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뒤에 있는 두 남자아이 역시 김혜인에 못지 않은 실력자였다. 각각 이과 제1위 정성민과 올해 청소년문학상(장편소설 부문) 대상을 받은 전시원이었다.그들의 윗입술 위 인중에는 모두 옅은 수술 흉터가 있는데, 그것은 선천성 구순구개열 수술 흔적이었다.마침 11월, 바로 대학입시가 결과가 나올 때 유명인들의 스캔들 외에 대학입시 결과도 네티즌들의 관심사 중 하나였다.카메라와 마이크가 김혜인과 친구들 앞으로 다가왔다.“우선 김혜인, 정성민, 전시원 세 학생이 매우 높은 점수로 민성시립대학교에 합격한 것을 축하합니다.”보통 얼굴에 결함이 있는 아이들은 카메라를 마주하면 다소 열등감을 느끼고 부끄러워하지만, 이 세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웃으며 학생답게 말했다.“감사합니다.”“세 학생이 정말 어려운 가정에서 전국의 학생들이 동경하는 민성시립대학교에 합격했네요. 학생들의 실력과 정신력 모두 대단합니다. 혹시 이번 입시에서 합격한 학생들만의 비결을 알려주실 수 있나요?”“예쁜 언니가 항상 우리를 후원해 주셨어요.”“그분은 저와 친구들이 학교에 다니는 동안 모든 비용을 지원해 주셨고, 또 저희 사는 동네에 의료전문가를 보내주셔서 구순구개열 수술을 받도록 도와주셨습니다.”“입시 준비 기간동안 저희에게 길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 주셨어요.”기자들은 비록 스캔들이나 가십을 캐내려고 질문할 때 일부러 지나치게 자극적인 언사로 극단적인 추측성 기사
하연은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맞아, 내가 그 사람 맞아.”“근데 어떻게 언니를 그렇게 욕할 수 있어요? 제가 내려가서 다 말할게요!” 전시원은 셋 중 성격이 가장 급했다.“나도 같이 가!”“나도!”“아니야, 잘못한 게 없으면 결국 진실은 밝혀지기 마련이야.” 하연은 자신을 염려하고 편드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만 오해하지 않으면 돼.”하연은 세 아이들에게 대학에 입학하면 무엇이 더 필요한지 같은 것들을 물어보고, 모두 자기에게 말하라고 했다. 생활비로 쓸 카드를 줘서 너무 빠듯하게 살지 않아도 되게끔 처리했다.또한 자신이 후원자임을 알리지 말라고 아이들에게 신신당부한 뒤 경호원을 배치해 지하 주차장을 통해 세 아이를 내보냈다.세 아이를 보내자마자 나운석에게서 또 전화가 왔다.그는 최근에 하연의 지시로 자주 출장을 갔는데, 하연에게 미안한 마음 때문에 기꺼이 먼 길을 자청해서 다녔다.전화에서 그는 하연에게 먼저 언론의 보도가 얼마나 악의적이고 날조됐는지를 비난하고, 또 하연을 위로하며 하연이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의미 있는지를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속히 귀국하고 싶다는 마음을 전했다.하연은 한참 몰래 웃다가 목청을 가다듬고 대답했다.“이번에 M국에서 업무가 끝나면 D국으로 돌아와 며칠간 있으면서 할아버지 생신연회에 참석해도 됩니다.”운석은 하연의 말에 신나서 전화를 끊었다.최하민이 다시 문을 밀고 사무실로 들어왔다.여동생의 웃는 모습을 보고, 한결 여유 있는 표정으로 말했다.“원래 너랑 이틀 동안 같이 있을 생각이었는데, 이사회에 일이 좀 있어서 오늘 가야 돼. 나는 이번에 하경이와 함께 가고, 하성이가 너랑 같이 있어줄 거야.”하연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턱을 책상에 괴고 엎드렸다.“셋째 오빠는 너무 시끄러운데.”“하성이가 있어야 네가 안 심심할 걸.”“알았어요, 큰오빠랑 둘째 오빠도 기운 내요.”아마도 주가 하락 문제로 귀국해야 하는 상황일 것이다. 꼭 하민이
하연은 잠깐 당황했지만 곧바로 상혁의 귀에 속삭이듯 다가가며 말했다. “아직도 반응이 있네, 부 대표님은 아무나 거절하지 않는 건가요? 오늘 만약 다른 여자가 여기 앉아 있었다면...” 그녀의 농담과 향기가 귀를 간지럽히자, 상혁은 잠시 고개를 돌려 미묘하게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다른 사람은 없을 거야.” “그럼 나만?” 하연의 말에 상혁은 약간 무너지는 듯했지만 이내 그녀를 밀어내며 대꾸했다. “나의 의미는, 너도 아니야.” 하연의 얼굴에 순간 실망이 떠올랐다. 그녀는 입술을 내밀며 차 안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상혁은 잠시 침묵하며 그가 느끼던 생리적 반응이 가라앉길 기다린 후 차분히 말했다. “내려.” “당신은 의사한테 가는데, 내가 왜 내려야 해요?” “다시 붕대 싸매.” 상혁은 이 말을 던지며 차에서 내렸다. 하연도 그제야 그 의미를 깨닫고는 피식 웃으며 따라나섰다.F국에 돌아온 후 상혁의 위장병이 계속 재발하고 있었다. 불규칙한 생활과 식사가 병을 악화시켰고, 의사는 그의 상태를 보고 좋지 않은 얼굴을 했다. “부 대표님, 몸이 재산입니다. 이렇게 무리하다가는 일이 끝나기도 전에 몸이 망가집니다.” 하연은 밖에서 간호사가 다시 붕대를 감아주는 동안 그 말을 들었다. 상혁은 숨을 고르며 가볍게 대답했다. “제 몸 상태는 제가 잘 알아요. 약만 먹으면 돼요.”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계속 잔소리를 했다. “위장은 쉬게 해야 하는데, 아플 때 약을 먹는 건 이미 늦은 겁니다. 평소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혹시 비서도 없으십니까?” 상혁도 많은 비서가 있긴 했지만, 바쁜 스케줄 때문에 제대로 된 식사를 거의 하지 못했다. 비서가 가져다준 음식은 몇 시간 동안 방치되곤 했다. 오늘도 병원에 온 것은 원신민의 강력한 요구 때문이었다.의사가 잔소리를 멈추자, 상혁은 미세하게 당황하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의사는 밖을 힐끗 보며 한마디 더 덧붙였다.“밖에 계신 아가씨는 대표님의..
“이 정도의 약점을 부남준이 쉽게 너를 놓아줄 하연 없을 텐데?” “그건 제 추측일 뿐이에요!” 연지는 급히 상혁의 다리를 붙잡고 말했다. “그 재무 보고서에는 부남준과 다른 이사들, 특히 정규인과의 결탁을 증명할 수 있는 많은 세부 사항이 있어요.” 상혁은 정규인의 이름이 나오자 살짝 눈을 들었다. “어디에 있지?” “제 금고 안에 있어요.” “원신민.” 원신민이 재빨리 다가와 연지를 일으켜 세웠다. “내가 같이 가서 가져오지.” “대표님...” 상혁은 허락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연지의 머리카락을 살짝 잡아들며 라이터를 켰다. 불길이 일면서 머리카락이 재가 되어 날아갔고, 연지는 공포에 찬 표정을 지었다. 원신민이 연지의 입을 재빨리 막아 그녀가 소리 지르지 못하게 했다. 다행히 머리카락은 한 움큼만 탔을 뿐이었다. “알다시피, 황연지, 날 배신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겠지.” 연지는 공포에 질린 눈물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하연은 다영과 헤어진 뒤 자신의 차로 걸어가던 중, 갑자기 한 차량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한 발짝 물러섰다. 마치 상혁이 항상 타고 다니고 있는 차였다. 하연의 가슴이 쿵쾅거렸다. 차 문이 열리자 운전기사가 내려왔다. “부상혁 대표님께서 모시길 원하십니다.” 하연이 입술을 굳게 다문 채로 검게 칠해진 방탄유리를 바라보았는데, 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차 안은 향이 피워져 있었고, 정신을 안정시키는 듯한 상쾌한 향이었다. 남자는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으며, 그의 잘생긴 얼굴이 희미한 조명 속에서도 돋보였다. “무슨 일로 부르셨나요?” 하연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다음 순간, 손목이 붙잡혔고, 그녀는 한순간에 상혁의 품에 안겨버렸다. 남자의 강한 향이 공기 중에 가득 퍼졌다. 그러자마자 차가 출발하면서 뒤로 밀리는 힘 때문에 하연은 더욱 상혁의 가슴에 밀착되었다. 상혁은 하연의 머리를 감싸 안으며 눈을 떴다. “내 회사
하연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멍하니 서 있었다. 다영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최씨 가문은 혼인을 통해서가 아니더라도 후손들이 영원히 번영할 수 있는 가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상혁도 역시 그런 혼인의 필요가 없었다. 부남준은 달랐다. 그는 차남이었고, 어머니 집안의 지원이 없었기에 혼인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다영에게는 이 모든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어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최하연 씨, 만약에 남준 씨를 좋아하지 않으신다면 거리를 두세요. 괜한 오해를 피하려면 말이에요.” ‘이미 오해는 깊어진 것 같아.’하연은 무력하게 생각했다. ‘내가 지금의 문제는 부남준이 나랑 거리를 두지 않으려 한다고 말할 수도 없잖아.’“정다영 씨의 뜻은 이해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으니, 조언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미래는 정다영 씨가 스스로 잘 판단하시길 바랍니다.” 하연이 최대한 체면을 유지하며 말했다. “하지만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부남준은 그렇게 겉보기만큼 단순한 사람이 아닙니다.” “단순하지 않다면 오히려 더 좋아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여자들은 강한 남자에게 끌리기 마련이다. 부남준의 성격을 마주할 때마다, 다영 역시 어느새 그의 매력에 빠져들고 말았다.둘은 주차장의 동남쪽 모퉁이에서 발생한 작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여자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목에는 끔찍할 정도로 붉게 번진 화상 자국이 있었다. 남자는 차 안 뒷좌석에 앉아 문을 열어두고 있었다. 그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경멸하는 표정을 지었다. “누가 너를 시켜서 덫을 놓았냐?” “아무도 시키지 않았습니다.” 황연지가 흐느끼며 대답했다. “저는 그저 대표님과 최 사장님의 소문을 들었고, 오랫동안 지시를 받지 못해 불만이 쌓였을 뿐이에요. 그래서 일부러 덫을 놓고 복수하고 싶었던 거예요.” 이를 듣고 상혁은 고개를 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하연의 몸은 완전히 굳어버렸다. 서로의 체온이 맞닿았고, 한쪽은 차갑고, 다른 쪽은 뜨거웠다. 하연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내 마음속에 있는 사람은 남자야, 네 그림과는 전혀 상관없어.” “그리기가 두려운 거야?” 남준은 그녀의 손을 잡고 그림 쪽으로 밀어붙였다. “그리기 두려우면, 내가 대신 그려줄까?” “날 놔!” 하연은 힘을 주어 저항하다가 잉크병을 쳐서 넘어뜨렸고, 남준은 즉각 그녀를 보호하려 하며 둘의 거리는 더 가까워졌다. 잉크는 그의 옷에 쏟아졌다. 하늘이 깜짝 놀라 숨을 들이마셨다. “상무님...” 그와 동시에, 문밖에서 낮은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연은 본능적으로 돌아보았고, 그곳에 서 있는 정다영을 보았다. 정다영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남준 씨...” 남준은 다영을 보자마자 안색이 순간에 어두워졌다. “다영 씨는 여기 왜 왔어요?” 그는 마치 무언가 방해받은 것처럼 짜증이 난 표정이었다. 다영은 선물을 들고 있었다. “이거 몸에 좋다고 우리 어머니가 남준 씨도 드셔보라고 하셨어요.”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그녀가 조심스레 선물을 내밀었다.사실 이 핑계는 다영이가 둘만의 시간을 만들기 위해 준비된 것이었지만, 자신이 들어왔을 때 다른 여자가 남준과 친밀한 화면을 목격한 것을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다.“필요 없어요. 그냥 돌아가요. 이 비서, 정다영 씨를 집까지 안전하게 모셔다드려.” “저... 남준 씨...” 다영은 말끝을 흐리며 떠나기 싫어하는 기색을 보였다. “남준 씨, 이분은 누구세요?” 하연은 남준과 엮이기 싫어 얼른 그를 밀어내고는 빠르게 나와서 말했다. “정다영 씨, 우리 나중에 개인적으로 이야기하자.” 하연이는 다영을 데리고 나가려고 했지만, 다영은 움직이려 하지 않고 눈물을 글썽이며 남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준은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나도 이따가 회의가 있어요. 먼저 옷을 갈아입고 갈
부남준은 하연을 사무실로 끌어들인 뒤, 하연이가 믿기 힘들다는 듯 물었다. “왜 황연지를 해고한 거야?” 남준은 느긋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가 화상 입었잖아.” “내가 원하는 건 공평하고 공정한 처리야. 너의 독단적인 행동을 원한 게 아니라고.” “지금 상황에서 네 신분이 이미 밝혀졌는데, 그 사람들이 여전히 공평함을 믿을 것 같아?” 남준은 말하면서도 한 손으로는 비서에게 약상자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그는 면봉을 꺼내 하연에게 약을 발라주려고 해서 하연의 손을 억지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말이야, 최 사장님이 손을 다쳤다면, 황연지 한 명 해고하는 걸로 충분히 배상이 될 것 같아?” 하연 남준의 농담을 무시하며 말했다. “나도 일부러 황연지에게 부딪힌 게 아니야. 첫째로, 동기도 없었고, 둘째로, 내가 굳이 적을 죽이려다 내 몸도 해치는 일을 할 필요가 있을까?” 누가 더 잘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하자면, 하연이 당연히 연지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총애받았을 것이다.“바로 그 동기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네가 직원을 괴롭히는 건 너무나도 당연하고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거야.” 남준은 하연의 손에 약을 발라주며, 신중하게 말했다. “보통 사람들의 부유층에 대한 반감을 과소평가하지 마.” 하연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아 손을 빼려 했지만, 남준은 계속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내가 듣기로는 DS그룹의 성적이 꽤 좋은데, 최 사장님의 정신이 이런 사소한 일들조차 이해하지 못하다니. 가족들은 확실히 너를 너무도 잘 보호했나 보군.” 하연은 그가 비꼬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비웃지 마.” 그녀는 대답하면서 손을 뺐다. “그러니까 왜 날 찾아왔어?”남준은 물었다.“그냥 길 지나가다가 목말라서 물 한 잔 마시러 들렀어.” 하연은 억지로 핑계를 댔지만, 남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고 웃으며 면봉을 던지고 화장실로 손을 씻으러 갔다.하연의 시선은 남준의 비서에게
연지는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괜찮아요, 제 잘못이에요.” 남자 직원은 바로 반발했다. “뭐가 연지 씨의 잘못이에요? 연지 씨가 뭘 잘못했는데요? 연지 씨가 피해자잖아요.” 연지는 남자 직원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기며 조용히 말했다. “그만해요, 이분은 DS 그룹의 최하연 사장님이에요.” “최... 최...?” 남자 직원은 다시 하연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한층 낮췄고, 연지를 데리고 가려 했다. “자, 내가 널 처리해 줄게요.” 이 상황이 되니 하연은 마치 권력을 휘두르는 자, 강압적인 자로 여겨지기 시작했다.하연의 머릿속이 아파지며, 그녀는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잠깐 서봐요. 황연지 씨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 여기서 딱 정확히 말해 봅시다. CCTV를 확인하면 다 알 수 있잖아요.” 연지는 사과하며 말했다. “최 사장님, 제 잘못이에요. CCTV까지는 필요 없어요. 죄송해요, 제가 당신까지 다치게 했네요.” “너...” 하연은 더 화가 났다. ‘차라리 황연지가 맞서 싸우면 모르겠지만, 이렇게 무조건 고개를 숙이며 순순히 사과하니 마치 내가 진짜 잘못한 사람처럼 보이잖아.’주변의 많은 시선들이 하연에게 집중되자, 하연은 더욱더 참을 수 없었다. “그래요. 기왕 내가 날 무서워한다면... 좋아요!! 내가 마음대로 하는 게 맞다고 치자. 아무튼 CCTV는 반드시 봐야겠어요!” 멀리서 상혁이 이쪽에서 나는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었다. “저쪽에선 무슨 일이야?” 원신민이 발돋움하며 말했다. “무슨 소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층은 부남준의 영역이었다. 상혁은 입을 굳게 다물고 이쪽으로 걸어왔다.연지는 불쌍한 얼굴로, 머리에 커피가 묻어 있었다. “정말 괜찮아요...” 이때, 부남준 사람들 속에서 나와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일이야?” 하연은 남준과 마주할 생각이 없었지만, 그가 정말로 나타났다. “CCTV를 확인하면 되잖아. 확인해.”
“이건 도 잘 몰라요.” 정민의 권한은 고위급 기밀에 알 수 없었다. 하연은 그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증거를 정태훈에게 넘기자, 태훈이 바로 ‘까마귀’를 찾으러 갔다. 마침내 이틀도 지나지 않아 그 땅은 DS그룹의 소유가 되었다. 하지만, ‘까마귀’가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모두가 알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 일로 인해 정민도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수 없었다. 하연이 정민을 다시 찾으러 갔을 때, 정민은 이미 그곳을 떠난 상태였다. 예전에 만났던 정민을 아는 ‘여자 동료’가 하연에게 말했다.“정민 언니... 고향으로 돌아갔어. 마치 무슨 급한 일이 있어서 도망치듯이 갔다던데. 그쪽 정민 언니의 사촌이라고 했잖아, 정말 몰랐어?” 하연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언니가 말하긴 했는데 이렇게 빨리 떠날 줄은 몰랐어요.” “정민 언니의 옛 애인 ‘까마귀’가 지금 언니를 온통 찾아다니고 있으니 빨리 도망가야지.” 하연은 그 말을 들으며 다시 한번 씁쓸하게 웃었다.“...”하연은 DL그룹 본사를 찾아갔다. 안내데스크 직원이 하연을 보고 전혀 놀라지 않으며 말했다. “최 사장님, 누구를 찾으셨나요?” 하연은 입을 열었다가 망설이며 말을 바꿨다. “부남준 상무님을 뵈러 왔어요.” 직원은 곧바로 부남준의 비서에게 연락을 취했고, 하연이는 대기실로 안내되었다. “상무님은 아직 바쁘셔서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하연은 대기실에서 부남준의 사무실을 볼 수 있었다. 그곳에는 중년 남성이 있었는데, 그는 다름 아닌 바로 하연이 그날 부씨 가문 저택의 서재에서 본 부건국이었다. 부남준은 부건국에게 친절한 듯 보였지만, 부건국은 다소 기가 죽은 모습이었다. 두 사람이 무슨 말을 나누고 있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부씨 가문 가족이 부남준을 이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은 그의 권력이 점차 돌아오고 있음을 의미했고, 부남준이 DL그룹에서 차지하는 위치도 더 이상 간과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시선을 돌린 하연은
하연은 상혁이 자신을 도울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의 얼굴에 장난기 어린 표정이 떠올랐다. 마치 못된 장난을 치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우리 졸업 날짜가... 며칠이더라?”그 말에 상혁의 평온했던 표정이 순간 무너졌다. 얼굴에 잠시 분노가 스쳐 갔다. 하연은 그의 반응을 보며 장난기가 잦아들었다.“농담이에요. 나도 당연히 기억하고 있어요.”하연은 그제야 상혁을 달래듯 메모장을 받아 들고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녀의 미소는 긴장감으로 가득했던 순간을 잠시나마 밝게 비추는 듯했다.“내가 한명준의 선물을 받을 뻔했어요. 하지만 다행히 우리 넷째 오빠가 있잖아요. 오빠가 내가 고생하는 걸 두고 보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하연은 이미 이득을 본 주제에 오히려 얄밉게 굴며, 일부러 두 사람이 감정이 깊어지던 때 사용했던 애틋한 호칭으로 상혁을 불렀다.상혁의 몸도 순간에 마치 굳혔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연은 그가 준 땅이 절대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사람을 시켜 조사해 보았다. 그런데 조사 결과, 그 땅은 이 도시에서 악명 높은 깡패, 별명 ‘까마귀’의 손에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하연은 예상치 못한 결과에 미간을 찌푸리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 땅이 그렇게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을 줄은 몰랐다.정태훈이 말했다. “그 사람, 까마귀는 굉장히 위험한 인물입니다. 그 땅이 값어치 있다는 걸 알고 계속 내놓지 않으려 합니다.” 상혁이 준 주소는 ‘까마귀’의 애인의 집이었다. 그녀는 눈에 띄지 않도록 소박한 옷으로 갈아입고 홀로 그곳으로 향했다. 그러나 도착해 보니 그곳은 마치 사창가 같은 장소였다. 남녀가 뒤섞여 있었고, 코를 찌르는 불쾌한 냄새가 가득했다.“정민 언니 만나러 왔어요.” 길가에 서 있던 여자는 하연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정민 언니? 무슨 일로 찾는 거야?” “저는 정민 언니의 친척입니다. 좋은 거래를 소개해 드리려고 왔어요.” 하연은 장난스럽게 눈을 깜빡였
상혁은 한 손으로 단추를 잠그며 말했다. “사실 꽤 좋은 거래였어. 아쉽네.” 이 순간, 그가 사업을 하는 사람의 태도로 하연의 말을 대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었다. 하연의 미간이 찌푸려졌고, 말문이 막힌 채 그대로 서 있었다. 하연의 고통스러운 모습이 상혁의 눈에 잠깐 비쳤는지, 결국 그는 약간의 연민을 보였다. “부남준을 만났어?” 하연이 고개를 들었다. “네 몸에서 부남준이가 좋아하는 남자 향수가 나네. 오늘 부남준이 정다영 씨와의 만남은 순조로웠나?”하연은 상혁이 모든 걸 이미 손에 쥐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설마 당신이 주선한 거였어요?” 상혁이 모호하게 미소를 지었다. “정다영 씨는 재능 있는 남자를 좋아해. 이 사회에서 부남준은 정다영 씨에게 치명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지.” 하연은 드디어 기억났다.“정다영의 아버지가 지금도 DL그룹의 이사였고, 정다영과 부남준의 결혼은 부남준에게 득이 될 뿐이야.” “왜 굳이 스스로 적을 만들어요?”상혁은 하연의 다리를 힐끔 보았다. 그녀는 아직 발목이 완전히 낫지 않은 듯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이 오기 전까지 누가 적인지 알 수 없어.”하연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 생각에는 정다영이 부남준과 결혼하면 두 집안이 단단히 결속되고, 상혁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결국 가족의 지지가 없이는 부남준을 막아내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상혁은 하연을 지나쳐 서류를 들고 검토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늦었어. 이제 돌아가.” 그는 밤새도록 잠을 잤고, 이미 시간이 늦었지만 하연은 움직이지 않고 의자에 주저앉아 무언가를 깊이 생각했다. 상혁이 이미 계획을 세운 것 같다면, 하연도 자신이 정다영을 굳이 경고할 필요가 없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 일보다 더 급한 문제가 있었다. 조승원이 계약을 취소했고, 지금 하연에게 남은 시간에 새로운 땅을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손이현은 하연이가 굴복하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그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