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하연은 무의식적으로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매장의 입구에서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하연에게 아주 익숙한 사람, 한서준과 민혜경이었다.하연은 B시라는 곳이 너무 좁은 것이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혜경과 서준이 손을 잡은 채 매장으로 들어섰다. 마치 가족이 된 듯한 두 사람의 모습에 하연의 가슴이 내려앉는 듯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가슴 시림이 엄습해왔다.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것만 같았다.‘두 사람의 약혼 소식을 듣자마자 두 사람이 약혼반지를 고르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3년간의 결혼 기간 동안 서준이 하연에게 준 선물은 결혼반지가 유일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서준은 치수를 재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서준이 잠든 틈을 타서 하연이 몰래 서준의 치수를 측정했어야 했다. 그랬던 서준이 지금은 직접 VERE매장에 나타나 혜경과 함께 결혼반지를 고르려 하다니.하연은 어리석었던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한 대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연은 서준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했던 과거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고, 진심을 다하여 서준을 대했던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기 시작했다. 하연이 어깨를 짓누르는 비참함을 느끼던 바로 그때, 뒤에서 하성이 나타났다. 하성이 붕대를 감은 손으로 힘겹게 푸른색 다이아몬드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내 안목, 어때?”실의에서 벗어난 하연이 하성이 건네는 반지를 받아 들고는 옅게 웃었다.“예뻐요, 제가 직접 디자인한 스타일을 골랐네요?” “그래? 그럼 나랑 마음이 통한 거네? 기분이다! 오빠가 이 다이아몬드 선물로 사줄게, 어때?”하성이 하연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하성이 조각 같은 얼굴과 큰 몸으로 하연이 서준과 혜경을 볼 수 없도록 하연의 앞을 막아섰다. “아니, 괜찮아요. 또 인터넷에 이야기가 어떻게 퍼질지 모르잖아요.”하연이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하성이 짓궂은 미소를 지어 보인 후, 한쪽 무릎을 꿇은 채 푸른색 다이아몬드 반지를 하연에게 건
“민씨 가문 아가씨의 약혼자 신분으로 그런 질문을 하시는 겁니까?” 하연이 붉은 입술을 열어 또박또박 말했다.“아니면, 제 전 남편의 신분으로 그런 질문을 하시는 겁니까?”“생각해 보시죠, 대체 어떤 신분으로 그런 질문을 하시는 건지.”서준은 멍해졌다.‘내가 선을 넘었구나.‘이 세상에서 가장 물어볼 자격이 없는 사람이 바로... 나야.’‘나 역시 다른 사람과 낄 결혼반지를 고르고 있었잖아. 난, 최하연의 일에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어.’서준이 혜경을 향해 긴 다리를 내디뎠다. “이제 그만 가자.”혜경의 눈동자에 이상한 기운이 반짝였다. “하지만 서준 씨, 우리, 아직 반지를 고르지 않았잖아!” “다른 데서 고르자.”혜경이 서준의 뒤를 쫓았다. 혜경이 아담한 몸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겨 서준의 팔을 붙잡고 말했다.“잠깐 기다려봐!”두 사람이 매장을 떠난 뒤에도 하연은 웃음을 되찾지 못했다. 하성이 조각 같은 얼굴로 하연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아직도 괴로운 거야?”“뭐라고요? 한 번만 더 그런 식으로 말하면, 오빠가 나를 괴롭힌다고 큰오빠한테 다 이를 거예요!” 하연이 하성을 위협했다.하성이 계속해서 하연을 달랬다.“그러지 마, 큰 형이 나한테 너를 돌보라고 시킨 건데, 네가 나를 큰 형한테 일러바치면 어떡해, 나, 분명 좋은 꼴은 못 보게 될 거야.”잠시 후, 최씨 저택.한참 동안 거실에 앉아 하연과 하성을 기다리던 운석이 두 사람의 손에 들린 큰 쇼핑백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여신님, 왜 하성이 녀석이랑 쇼핑을 하면서 저는 부르지 않으신 겁니까?” 하성과 운석은 아주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만나기만 하면 서로를 헐뜯기 바빴다. 그리고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성이 운석을 업신여기고 있다는 것이었다.운석이 하연이 못생겼다고 소문을 낸 바 있었기 때문에 하성은 어릴 적부터 운석을 상대하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하연은 못생기지 않았으며, 오히려 아름다웠
“그 부분은 제가 외부에 분명히 설명하겠습니다.” 이 말을 마친 서준이 곧바로 몸을 돌려 회장실을 떠나자, 민진현이 서준이 나간 문을 향해 찻잔을 던졌다. 산산조각 나버린 찻잔은 아무렇게나 바닥에 널브러졌다.분노를 가라앉힌 민진현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날 좀 도와줘야겠어. 깨끗하게 처리해 주게.”“최하연...”민진현의 어두운 얼굴에 음흉함이 가득해졌다.“우리 민씨 가문이 어느 정도인지, 똑똑히 보여줘야겠어.”...일주일 후.드디어 기항 그룹과 기술 업데이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날이 밝았다. 하연과 정기태가 함께 회의실로 향하는 복도를 걷고 있었다.기항 그룹에서 열리는 이번 회의는 다른 그룹의 임원들도 참석할 예정이었다. 진보한 기술 혁신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하연이 회의실에 들어서자마자,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성재와 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앉아만 있었다. 하연이 가방을 내려놓으며 물었다.“임 대표님, 무슨 일 있으세요? 표정이...”성재가 두 손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시종일관 웃음을 띠던 성재의 총명한 눈동자에는 뚜렷한 조의만이 가득했다.성재가 우지나를 향해 말했다.“우 상무님, 지금 상황에 대해 최 사장님께 보고드리세요.”“최 사장님, 한 시간 전, 다크 웹에 대량의 나노로봇의 핵심 암호화 파일이 생겨났습니다. 다행히 아직 그 안의 소스 코드를 돌파한 사람은 없는 걸로 보이지만, 곧 돌파하는 사람이 생기는 건 시간문제일 겁니다.”우지나가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이 소스 코드 말입니다. 불과 이틀 전에 DS그룹에 공유된 걸로 알고 있는데, 왜 하필 오늘 정보가 누설된 걸까요?”“그러니까, 지금 우 상무님 말씀은... 우리 DS그룹이 정보를 누설했다는 겁니까?”하연은 몹시 당황스러웠으나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확실한 증거도 없이 함부로 말씀하시면 곤란합니다.” “DS 그룹에 정보를 공유한지 며칠도 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 일이 생기니, 의심을 거둘
성재 역시 우지나와 같은 생각인 듯했다. “최 사장님, 지금 농담하실 때가 아닙니다. 지금도 해커들은 암호를 해독하고 있을 거예요.” “제가 아니라면 아닌 겁니다.”하연이 자신만만하다는 듯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앉고는 고개를 돌려 작은 목소리로 정기태에게 물었다.“오고 있습니까?”정기태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10분 내로 도착하실 겁니다.”하연이 가볍게 웃으며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실 분이 한 분 더 계십니다. 모두 저와 함께 내려가 맞이해주시죠.”회의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심지어는 하연이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이라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지금이 어떤 때인데, 다 같이 한 사람을 마중 나가자는 겁니까? “최 사장님, 아직도 사태에 대한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하신 모양이군요!”“답답합니다, 정말!”하연은 사람들의 말을 듣고 있지 않는 듯했다. 하연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나중에 저를 따라오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나 하지 마십시오.”서준이 하연을 따라 몸을 일으켰다. “저는 최 사장님과 함께 가겠습니다.”성재는 마음이 편치 않았으나, 두 명의 대주주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세 명의 고위 임원들이 회의실을 떠난 상황에서, 어찌 한낱 주주들 따위가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다른 방법이 없던 주주들 역시 하나둘씩 하연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하연을 선두로 한 강대한 무리의 사람들이 한 사람이 나타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몇 분 후, 노란색 택시 한 대가 기항그룹의 입구에 멈춰 섰다.모두가 서로를 쳐다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누구야?”“거물 급 인사인가 봐.” 곧이어 190이라는 큰 키에 온화한 외모를 가진 한 남성이 차량에서 내렸다. 그 남성은 검은색 사복을 입고 있었으며 절제된 분위기를 뽐내고 있었다.“왔구나!”하연이 빠르게 달려가 최하경을 끌어안은 후, 귀에 대고 속삭였다.“오빠, 부탁 좀 할게요!”“응, 별거 아니더라.”하경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죠, 우 상무님?”하연이 우지나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하고는 싱겁다는 듯 웃었다. 갑자기 우지나가 호명되자, 회의실의 모든 사람들이 어색하게 웃기 시작했다. “최 사장님 말씀은...”하연이 손가락에 끼워진 푸른색 다이아몬드 반지를 만지작거리다가 화살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우지나를 쏘아보며 말했다.“우 상무님, 왜 마지막으로 올라오신 겁니까?” “저요?”우지나가 스스로를 가리켰다.“그저, 화장실에 다녀왔을 뿐입니다.”“최 사장님, 정말 열심이시군요. 부하 직원이 화장실에 다녀오는 것까지도 관리하시니 말입니다.”“화장실에 다녀오는 것만큼 간단한 일이 아니었던 것 같아 여쭙는 겁니다.”하연이 정기태로부터 받은 자료를 우지나의 앞에 내팽개쳤다.“기항그룹의 주식을 사들이고 있던 사람들에게 빨리 손을 떼라고 전하러 갔던 거 아닙니까?” 하연이 내팽개친 자료를 훑어본 성재가 하연의 뜻을 알아차렸다. 하연의 목소리가 광풍과 폭우 전의 고요함과 같이 낮게 깔렸다. “우 상무님, 설명해 주셔야겠습니다.” 우지나는 자신의 앞에 내팽개쳐진 자료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자세히 보니, 우지나의 얼굴은 창백하여 입술도 떨리고 있었다. 게다가 식은땀까지 흘리며 긴장하고 있는 듯했다. “최대한 은밀히 진행한다고 한 건데, 이 여자한테 들켜버리다니!”하연이 웃기 시작했다.“제가 모은 증거만으로도 이미 충분합니다.”“우리 DS그룹과 정보를 공유할 때, 고의적으로 나노로봇에 대한 소스코드를 주식 시장에 유출한 후, 주식투자자들을 공포에 떨게 하여 주식을 헐값에 팔아 치우게 하고, 어부지리로 더 많은 기항그룹의 주식을 손에 넣으신 거 아닙니까?” “임 대표님, 우 상무님께서 솔직하게 사실을 털어놓으실 생각이 없으신가 봅니다.”“임 대표님, 제가 사람을 시켜 기항그룹의 주식을 사들이라고 한 건, 그저 주식이 외부인의 손에 넘어갈까 걱정됐기 때문입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정말이지 다른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마음을 다 잡은 우지나가 분주하게 변
“임 대표님은 임 대표님 일에만 신경 쓰시죠.”서준이 눈살을 찌푸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와 관련된 문제는 이미 해결됐습니다. 단지, 세상 물정에 다소 섭섭할 뿐이지요.”성재가 서준에게 물 한 병을 건넸다. “한 대표님, 곧 약혼하신다고 들었습니다.”“아직 결정된 건 아닙니다.”서준이 성재가 건넨 물병을 밀어내고는 긴 다리를 뻗으며 회의실을 떠났다. ...돌아가는 길.하경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아까 네 편을 들던 사람이 한서준이야?”하경의 말을 들은 하연은 다소 화가 난 듯했다.“누가 내 편을 들었다는 거예요? 그 사람은 돈이 중요했을 뿐이라고요!”하경이 고개를 끄덕였다.“그 사람, 그런대로 잘 생겼더라. 근데 여자 안 좋아하잖아. 너랑은 안 어울려. 헤어지길 잘했지.” 하경의 말에 하연은 말문이 막혔다.‘못 살아 정말...’ “그래요, 그래서 오빠 말대로 헤어졌잖아요.” 하연이 서준과 결혼식을 올릴 당시, 하경은 바다 건너에서 업무에 시달리고 있던 터라 결혼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하경은 매제의 인품을 증명하기 위하여 특별히 서준의 노트북을 해킹했었다. 하경은 해킹한 노트북을 이용하여 서준을 탈탈 털어보려 했지만, 놀랍게도 서준의 노트북에는 남자라면 좋아할 만한 그 어떤 것도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하경은 서준이 무성욕자인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고, 근거를 정리하여 하연에게 메일로 보냈으나 철저히 무시당했었다. 단 한 번도 사랑을 나누지 않았던 지난 3년간의 결혼 생활을 돌이켜보자니, 하연은 서준이 부부생활을 할 수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럼, 도대체 민혜경은 어떻게 그 사람의 아이를 가진 거야?’ “근데 오빠, 왜 이번에도 혼자 왔어요? 내 새언니 될 사람은요?” “몰라, 꿈속에 있는 건지, 아니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건지... 아무튼 아직 못 만났어.”하경이 상큼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내가 이래라저래라 할 일은 아니지만, 빨리 찾아봐요. 더 미루다 가는
차문이 열리자 하연이 차에서 내렸다.“아, 오랫동안 근육을 안 썼더니 온 몸이 근질근질하네.”그녀는 눈앞에 서있는 사람들을 훑어보았다.“한꺼번에 덤빌래? 아니면 한 명씩 덤벼보던가?”칼을 든 이 건장한 남자들은 보기와 달리 강한 하연을 상대로 한번 싸워보고 싶었다. 풀숲으로 나가떨어져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동료를 확인하고 다시 차 안을 들여다보니 하연이 다른 일행 없이 혼자인 것을 알고 일순간 마음을 놓았다.문신을 한 남자는 담배를 물고 부하의 머리를 옆으로 밀어젖히고 하연 앞으로 왔다.“너도 보다시피, 우리가 수는 더 많다. 눈치 있게 회장님 반지를 내놓으면, 네가 좀 덜 다치는 거지.”하연은 비웃으며 말했다.“민진현이 보낸 패거리들이군.”“멍청한 것, 뭐 그렇게 질문이 많아, 내놓을 거야, 말 거야?”하연은 재빨리 문신한 남자가 피우던 담배를 빼앗아 꽁초를 그의 이마에 비벼서 끄고 이어서 옆차기를 하여 그를 한쪽으로 치워버렸다.하연이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말 많으면 짜증나지, 너부터 맞자.”“젠장, 감히 나를 때리다니!” 문신남은 땅에서 버티며 입속에서 빠진 이를 뱉어냈다.“저 여자 치워!”모두 덤벼 하연을 에워싸고 덤볐지만 연이어 비명을 지르며 멀리 나가떨어졌다.10분도 안 되어 모두 바닥에 누워 곡소리를 냈다.하연은 문신남 앞에 가서 경멸하는 눈빛으로 말했다.“네가 얘들 두목이야?”“뭐... 그렇다고 할 수 있죠.”“방금 나를 치우라고 했을 때는 이 말투가 아니었는데.”하연은 그를 발로 걷어찼다.“두 사람씩 밧줄로 묶어서 경찰서로 끌고 가세요.”“아! 예쁜 누님, 괜찮습니다. 다음에 절대 또 덤비러 못 옵니다.”“나한테 맞아 이 거리에서 죽고 싶은지, 아니면 경찰서 가서 자수하든지 네가 선택해.” 하연의 눈빛이 점차 험악해졌다. 문신남은 하연의 말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뼛속 깊이 느꼈다.“야, 튀어. 빨리 튀어!”문신남은 하연이 생각을 바꿀까 봐 얼른 대응했다. 하연의 싸움 솜씨가 보통이 넘어서
[그리고, 안부르면 안 올 거냐?]하민은 영상통화 분위기가 좀 얼어붙자, 긴장을 풀려고 하성에게 직접 물었다.하성은 호되게 혼나고 나서 얼굴을 들지 못했다.“그럴 리가, 할아버지의 생신에 어떻게 감히 안 갈 수 있겠어.”하연이 뒤에서 몰래 웃었다. ‘셋째 오빠 다룰 수 있는 사람은 큰오빠와 할아버지뿐이구나.’최동신은 나이에 비해 꽤 정정한 편이었다.[하연이의 나노로봇 프로젝트를 잘 도와라.]최동신은 최하경에게 당부했다.“아이고, 할아버지, 둘째 오빠한테 말 안 하셔도 돼요. 오빠도 최선을 다할 거예요.” 하연은 두 오빠의 목을 양팔로 껴안고 환하게 웃었다.하경은 담담하게 대답했다.“물론이죠.”하연이 지금 이렇게 사업에 전념하는 것을 보고 최동신은 마음이 놓였다.[할아버지 이제 쉬셔야 해. 끊는다.] 최하민이 화면 앞으로 나와 말했다.가족은 그제야 영상통화를 마쳤다....거실에서 민진현은 한가롭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그는 좋은 소식을 기다리며 습관적으로 엄지손가락을 어루만지다가 아끼던 백옥 반지를 아직 되찾지 못한 것을 깨닫고 마음이 울적해졌다. 하지만 곧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자 다시 기뻐서 트로트 곡조를 흥얼거렸다.한쪽에 서 있던 집사는 오랫동안 앉지도 못하고 서서 내내 시간만 확인했다. 아까 보냈던 사람들이 아직도 답장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민진현의 흥을 깰까 봐 슬그머니 다른 쪽으로 가서 문신남에게 전화를 걸었다.수차례의 통화 시도 끝에 겨우 연결되었다.“이봐! 너희들 뭐 하는 거야? 이런 사소한 일을 아직도 못 끝냈어? 그 여자 물건 뺏었어?”[여기는 경찰서입니다. 마침 관계자들을 찾고 있었는데 지금 서로 나와주십시오.]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울렸다.집사는 놀라서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얼른 민진현에게로 달려갔다.“회장님, 큰일났습니다. 그 사람들이 지금 경찰서에 있답니다. 지금 회장님께 좀 오시라고 하는데요!”민진현은 놀라서 찻잔뿐만 아니라 찻주전자까지 모두 깨뜨렸다.‘반반한 얼굴 하나 믿고
하연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이현의 말이 그동안 떠돌던 소문을 확인해 주는 듯했다. “갑자기 왜 그런 결정을 내렸어요?” 이현은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머금고, 감회가 어린 듯 말했다. “예전엔 내가 사업에서도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결국 나 자신을 과대평가했던 거죠.” 그는 눈을 들어 하연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말하는 게 나로서는 최선의 선택이겠지.’ 그가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듯한 이 말들 속에는,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체면을 지키면서도 이별의 뜻이 담겨 있는 방식이었다. 이현은 한때 상혁과 정면 승부를 벌이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하연을 자신의 곁으로 다시 두고 싶었다. 하지만 운명은 이현과 하연을 번번이 엇갈리게 만들었고, 끝없이 스쳐 지나가게 했다. 이현의 모든 집착과 미련은, 하연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마치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게 하연이 선택한 행복이라면, 이현은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건 조용히 축복해주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애초에 이 길을 선택하지 않는 게 나았을지도 몰라요. 차라리 계속 가게 운영하는 게 더 어울렸을 텐데...” “그래도 다행이죠. 너무 늦기 전에 깨달았으니까. 이제라도 진짜 의미 있는 일을 찾아야겠어요.” 하연은 조용히 남자의 말을 들으며, 친구로서 진심을 담아 말했다. “어쩌면 새로운 곳에서 당신만의 행복을 찾을 수도 있을 거예요.” 이현은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아요.” 그 순간, 오랫동안 이현의 마음속에 얹혀 있던 무거운 돌덩이가 스르르 사라지는 기분이들었다. 심지어 그 한때의 집착과 미련도 함께 흩어져 갔다. 그는 가볍게 몸을 돌려 준비해 온 선물 상자를 꺼내며 말했다. “새해가 지나면 하연 씨 약혼식이 있을 테니, 나는 참석하지 않겠지만, 이 약혼 선물만큼은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약혼 선물’이라는 말이 하연의 귀에 맴돌았다. 이것이 하연이 이현과 함께 들려온 남
“하연이, 집에서 지내는 게 더 편할 거예요. 저는 상관없습니다.” “너는 항상 우리 하연이만 생각하는구나.” 최동신은 농담 섞인 말투였지만, 어딘가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그래.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긴 하지. 집안 가정부들은 어릴 때부터 하연이를 봐왔으니, 생활 습관을 잘 알고 있고 이곳이 하연이가 편하긴 할 거야.” “아침부터 나갔다던데, 너랑 같이 있던 게 아니었어? 그럼 얘가 어디 간 거지?” 최동신은 가정부를 불러 말했다. “하연 아가씨한테 전화 좀 걸어보게.” “어르신, 이미 전화드렸는데 받지 않으십니다.” 최동신은 미간을 좁혔다. “무음으로 해놔서 못 들었나...” 하지만 최동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혁의 주머니에서 진동음이 울렸다. 문자 메시지였다. 상혁은 화면을 열어 확인하는 순간, 눈빛이 짙어졌다. 최동신은 미묘한 변화를 감지했다. “상혁아,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야?” 상혁은 잠시 멈칫했지만, 다시금 평정을 찾고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업무 관련한 일이라서요.” 최동신은 배려 깊게 말했다. “일이 우선이지. 얼른 가봐라.” 최씨 가문의 본가를 나서며, 상혁은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봤다. 문자 메시지 하단에 찍힌 ‘TW카페’ 네 글자가 유독 선명했다. ...평일 오전의 TW 카페는 한산했다. 한 시간 전. 다시 ‘한명준’이 된 손이현은 급히 카페로 향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창가 소파에 앉아 있는 하연이 눈에 들어왔다. 햇살이 유리창을 통해 여자에게 내려앉아,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함을 자아냈다. 이현의 발걸음도 순간 멈췄다. 그는 한동안 하연을 바라보며 흐트러진 숨을 고르던 중, 직원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손님, 몇 분이세요?” 이현은 가볍게 손짓했다. “약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곧장 하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다리게 했나요?” 하연은 시선을 들어 평온한 표정으로
“이게 뭐야?” 송혜선은 무심한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얼굴에는 별다른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시선만큼은 솔직했다. 하지만 사진 속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그녀의 눈빛이 확연히 달라지면서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사진을 낚아채고 하나하나 넘겨봤다. 사진마다 담긴 장면이 송혜선을 점점 흥분하게 만들었다. ‘흥, 최씨 가문의 귀한 딸이 두 남자를 동시에 만나고 있다니, 이거 재미있어지겠는데?’ 사진 속 남자는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고고한 분위기, 남다른 기품까지...비록 사진에는 전부 뒷모습만 담겨 있었지만, 남자가 결코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송혜선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모든 사진을 훑어본 뒤 나지막이 말했다. “이 정도는 그냥 친한 남녀 사이에서 있을 수 있는 일 아닐까? 선을 넘은 정황은 없잖아. 겉보기엔 별 문제 없어 보이는데?” 하지만 정다영의 생각은 달랐다. 이미 그녀는 오래전부터 하연의 일거수일투족을 사설 탐정을 통해 추적해왔다. 그리고 사진 속 ‘한명준’이라는 남자와 하연 이 둘 사이에는 단순한 친분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어머님, 이 남자가 누군지 아세요?” 다영의 목소리는 은근한 흥분을 담고 있었다. “바로 B시 한씨 가문의 사람이란다.” “B시 한씨 가문?” 송혜선은 순간적으로 하연의 전 남편이 한씨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하지만 자신이 분명 들은 바에 따르면 한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상태였다. “최하연의 전남편은 감옥에 간 걸로 아는데, 또 다른 한씨 가문 사람이 나타났다는 거예요?” “하여튼 복잡한 사연이 많았어. 한두 마디로 설명하기 어렵단다.” 다영은 하연과 ‘한명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는 몰랐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건, 이 일을 이용하는 것이었으니까.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죠. 중요한 건, 우리가 부상혁에게 무엇을 보여주느냐는 겁니다.” ‘남자
배가 항구에 서서히 가까워질 때, 허징인은 저 멀리 보이는 부두를 응시하면서 머릿속에서 끔찍했던 기억들이 마치 영화처럼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날의 비명, 피 냄새, 그리고 민찬의 얼굴...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고 싶지 않았는데...’ 그녀는 참았던 감정이 북받쳐 오른 듯 숨을 깊게 들이쉬며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난간을 꽉 잡은 여자의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하얀 손등에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허징인의 떨리는 손끝은 마음속 분노와 슬픔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때, 상혁이 조용히 허징인 곁에 다가왔다. 남자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바닷바람에 섞여 들려왔다. “배에서 내리면, 제 부하들이 안전한 곳으로 허징인 씨를 모실 겁니다. 모든 게 끝날 때까지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마세요.” 허징인은 거센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여자의 차가운 눈빛과 함께 낮고 냉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부 대표님, 하나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한겨울의 서리처럼 차가웠다. “제 남편이 부남준 밑에서 오랜 시간 일을 했어요. 물론, 제 남편도 깨끗한 사람은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저와 민찬이를 지키기 위해 부남준의 죄를 대신 뒤집어쓴 적도 많았어요.” 잠시 말을 멈춘 허징인은 숨을 고르며 상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 제 남편은 민찬이의 죽음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동안 자신과 부남준 사이에 있었던 모든 부정한 거래를 실토할 겁니다.” 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부 대표님께서 제 남편에게 이 소식을 전할 방법을 찾아주시길 바랍니다.” 허징인의 목적은 단순했다. ‘정규인을 이용해 부남준을 무너뜨릴 단서를 만들어야 해. 민찬이의 억울한 죽음을, 그리고 수많은 희생자들의 한을 풀기 위해!’ 상혁은 잠시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이윽고, 그의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상혁의 원래 무심하던 표정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주 작은 변화였지만, 그가 감정적으로 흔들렸다는 건 분명했다. 상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담배 한 갑을 꺼내 들었다. 남자의 길고 날렵한 손가락이 담배 한 개비를 집어 들고는 정확히 입술 끝에 물었다. 그다음엔 상혁은 침착하게 라이터를 켜고 담배를 태우기 시작했다. 그는 담배를 깊이 들이마신 뒤, 한순간 숨을 멈췄다가 연기를 천천히 내뱉었다. 연기 사이로 보이는 남자의 눈빛은 이전보다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이 판이 점점 흥미로워지고 있어.’ 그러나 허징인은 자신의 분노에 사로잡혀, 상혁의 변화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차가운 웃음을 터뜨렸다. “부남준은 제가 가진 증거를 빼앗으면 모든 게 끝날 줄 알았겠죠. 그래서 절 죽이고 모든 걸 덮으려 했던 거고요. 정말 어리석은 꿈을 꾼 거죠.” 허징인의 목소리는 점점 격앙되었다. 감정이 폭발하면서 그녀는 마치 스스로를 증명하려는 듯 말을 쏟아냈다. “부남준도 설마 이런 상황까지는 생각 못 했겠죠. 제가 이런 처지에 놓일 거라고는 꿈에도 예상 못 했을 거예요. 하지만 증거를 손에 넣는 순간부터 전 모든 걸 철저히 준비해 뒀어요. 단 한 치의 빈틈도 없도록 말이에요.” 상혁은 담배를 쥔 손을 잠시 멈추고, 허징인을 바라봤다. 남자의 눈빛엔 전에 없던 흥미와 약간의 감탄이 섞여 있었다. “허징인 씨, 오늘 정말 날 실망시키지 않는군요.” 허징인은 상혁의 반응에 반응하지 않았고, 대신 스스로를 비웃듯 쓴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처음엔 그저 제 아들과 평범하게 살고 싶었어요. 그 사람이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둔다면, 제가 가진 증거는 영원히 세상에서 사라졌을 겁니다.” 그녀는 한순간 말을 멈췄다. 그리고 다음 순간, 허징인의 눈이 새빨갛게 충혈되며,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폭발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에요. 그놈이 제 아들을... 민찬이를 죽였어요! 제 손으로 지켜야 했던
금발 남자의 얼굴엔 잔인한 기색이 스쳤다. 허징인과 민찬에게 단 한 줌의 자비도 보이지 않았다. “저년의 입과 코를 꽁꽁 막아. 빈틈 하나도 남기지 말고.” 허징인은 절망에 빠진 눈으로 민찬을 바라보았다. ‘내 아들... 우리 민찬이...!’ 울부짖는 어린 민찬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가운데, 그녀는 거대한 배의 20미터 높이의 갑판에서 차갑고 무자비하게 바다로 내던져졌다. 얼음처럼 차가운 바닷물이 온몸을 감싸고, 숨을 쉴 수 없는 답답함이 허징인을 집어삼켰다. 순식간에 의식은 멀어지고, 그녀의 몸은 깊고 어두운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여기서 이렇게 끝나는 건가...?’ 그러나 의식이 다시 돌아왔을 때, 허징인은 머리가 지끈거리고 무겁게 아파왔다. ‘아... 여긴 어디지?’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머리를 눌러본 뒤에야, 그녀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낯선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나는 바다에 던져졌는데... 대체 여긴 어디지?’ 그리고 그녀의 뇌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이름, 민찬. ‘민찬? 설마... 설마 내 아들...!’ 그 순간, 절망감이 몰려오며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나왔다. 갑자기, 문이 거칠게 열렸다. 허징인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뒷걸음질쳤다. ‘누구야? 또다시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너무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녀의 입술이 떨렸다. “부상혁 대표님...?” 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허징인 씨, 오랜만이네요.” 상혁 곁에 있던 원신민은 눈치를 보며 조용히 방을 나가고, 문을 닫았다. 허징인은 불신과 놀라움으로 가득 찬 표정으로 상혁을 바라보았다. “부 대표님, 어떻게... 어떻게 여기에...?” 여자의 목소리는 떨리고, 대답을 기다리며 불안감이 가득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지만, 허징인은 곧 머리를 굴렸다. ‘설마... 나를 구한 사
“조사가 끝났습니다.” 원신민은 망설임 없이 지도를 꺼내 상혁의 앞에 펼쳐 놓았다. “이 배는 F국 항구에서 출발해 서해안을 따라 항해한 후, 이 항로를 통해 태평양을 건너 L국의 T시 항구에 도착...” 원신민의 손가락이 지도 위를 천천히 움직이며 항로를 또렷하게 그려냈다. “대표님, 우리가 이 사람을 빼돌릴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은 오늘 밤입니다. 배가 F국 영해를 벗어나면 일이 훨씬 까다로워질 겁니다.” 상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긴 손가락 끝으로 지도 위 특정 지점을 톡 건드렸다. ‘역시 냉철해.’ 원신민은 눈치를 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굵직한 뱃고동 소리가 항구를 울렸다. 거대한 배는 서서히 항구를 떠나 물결을 헤치며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이 배는 15층짜리 대형 크루즈로, 가장 아래층은 화물칸으로 쓰이고, 그 위로는 승객의 숙소, 식당, 그리고 각종 오락 시설이 층층이 자리 잡고 있었다. 허징인과 아들 민찬은 가장 아래층의 음침하고 습한 방에 배치되었다. 방에는 좁은 창문 하나만 달려 있어 바깥의 희미한 빛이 들어오는 것이 전부였다. “엄마, 무서워요!” 민찬은 허징인의 품에 파고들며 온몸을 덜덜 떨었다. 허징인은 아들을 꼭 끌어안으며 본능적으로 달랬다. “괜찮아, 민찬아. 엄마가 있잖아.”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하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낯선 남자들이 순식간에 방으로 들이닥치며 좁은 공간을 가득 메웠다. 허징인은 경악하며 외쳤다. “당신들 누구야? 뭐 하려는 거야?” 이 사람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외국인이었다. 그는 거대한 체구와 빽빽이 자란 턱수염을 가졌고, 강렬한 눈빛으로 허징인을 꿰뚫듯 쳐다보았다. 이어서 다소 서툴지만 알아듣기 쉬운 F국말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바로 남준이 말한 여자인가?” 그는 허징인의 얼굴을 훑어보더니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저 여자일 뿐인데, 너무 똑똑하면 손해만 볼 뿐이에요.” 남준이 허징인에게 다가가며, 몸을 숙여 그녀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기까지 왔으니, 내가 원하는 걸 이제 줘야 하지 않겠어요?” 허징인은 차갑게 비웃으며 얼굴을 굳혔다. “뭐가 그렇게 겁나십니까, 상무님? 제가 약속을 어길까 봐요? 아니면... 그 물건들이 엉뚱한 사람 손에 들어갈까 봐요?” “그건 사모님이 그런 기회를 잡을 수 있을 때의 이야기죠.” 남준의 목소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허징인은 이를 악물고 주먹을 꽉 쥐었고, 속으로는 분이 차올랐지만, 상황을 감안해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함부로 해서는 안 되겠어. 지금은 일단 물러서는 게 최선이야.’ “걱정하지 마세요, 상무님. 이미 약속한 이상, 전 제 말을 반드시 지킬 겁니다.” 허징인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며 남준과 눈을 맞췄다. “상무님도 본인의 약속을 지키길 바랍니다.” 남준은 가볍게 손을 펼치며 대답했다. “당연하죠.” 허징인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작전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제가 반은 먼저 드리고, 나머지는 우리가 안전한 곳에 도착하면 드릴게요.” “안 돼요!” 남준이 단호히 그 제안을 거절했다. “지금 사모님한테는 조건을 제시할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 안 그래요?” 허징인은 눈을 감고 결연한 태도로 말했다. “그럼 차라리 지금 절 죽이세요. 하지만 제가 죽으면 그 물건들이 공개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알아두세요.” “엄마!” 곁에 있던 민찬이 울먹이며 그녀의 다리에 매달렸다. “엄마, 무서워요!” 허징인은 민찬을 꼭 안으며 남준을 노려보았다. ‘이 상황에서 물러서면 끝장이야. 적어도 내 아이는 지켜야 해.’ “상무님, 선택은 당신 몫입니다.” 남준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침묵했다. 남자의 눈빛은 한층 더 날카로워졌고, 어금니를 악물더니 잠시 후 말했다. “죽음도 불사하다니, 사모님의 배짱은 보통이 아니
집에 돌아온 하연은 좀처럼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침실 안. 은은한 조명이 켜진 방에서, 하연은 소파에 몸을 웅크린 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대표님...” 가정부가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들고 조심스레 부르며 방으로 들어왔다. 상혁은 문틈 사이로 방 안의 하연을 흘깃 바라보며 손으로 가정부를 막았다. “내가 할게요.” 가정부가 물러난 뒤, 상혁은 바로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벽에 기대어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때, 상혁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는데, 원신민에게서 온 메시지였다.그 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상혁은 짧은 문장을 확인한 뒤, 입가에 가볍게 조소를 띄우며 휴대폰 화면을 껐다. 마치 모든 걸 손아귀에 쥐고 있는 사람의 태도였다. 그는 이내 천천히 방의 문을 열었다. “하연아.” 남자의 차분한 목소리에 하연은 깜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상혁을 바라보며 조금 의아한 듯 물었다. “언제 들어왔어요?” 상혁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에 들고 있던 우유를 하연의 손에 쥐어주었다. “따뜻할 때 마셔.” 남자의 부드러운 말에 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곧 우유를 들고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잠시 후, 컵이 바닥을 드러냈다. “잠깐 회사에 좀 다녀올게. 집에서 푹 쉬고 있어.” 상혁은 하연이가 들고 있던 유리잔을 받아들며 말했다. “이 밤중에요? 무슨 일 있는 거예요?” 하연은 살짝 의아해했다. “회사에 급한 일이 있어서. 아마 늦을 거야.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남자는 고개를 숙여 하연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지금 이 순간이 난 참 행복해.” 상혁의 눈에는 하연이가 자신의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 ‘이 행복이 오래가길, 조금이라도 더 오래가길...’ 하연은 상혁의 목에 팔을 두르고 그의 품에 안기며 살짝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도요. 정말 행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