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경꾼들이 분분히 놀랐다.민진현은 B시의 도박계에서 타짜라고 불리우던 사람이었다. 비록 최근 몇 년간 도박에 손을 대지는 않았으나, 반쪽짜리 타짜인 송승헌에 비하면 절대적으로 위협적인 인물이었다.명망 높은 노인이 젊은이를 이토록 압박하다니, 민진현은 자신의 권세를 믿고 남을 업신여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연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거만한 태도로 말했다.“만약 민 회장님께서 패하신다면...”하연이 민진현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허!’‘나더러 한서준의 세컨드라는 걸 인정하라고? 웃기시네!“절대 안 져!”민진현이 목소리를 높였다.“나와 내기를 할 것인지 아닌지만 말하게!” 이는 분명, 민진현이 막강한 세력으로 하연을 압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구경꾼들 중에서 이에 대해 입을 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민 회장님께서 패하신다면, 민혜경이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스스로의 뺨을 때리며 제 결혼에 끼어든 것에 대한 용서를 빌어야 할 겁니다!” 곧이어 하연의 눈동자가 민진현의 엄지손가락에 끼워진 백옥반지로 향했다. “그리고... 그 백옥 반지도 저에게 넘기시죠!” 하연의 말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크게 놀랐다.“어머, 저 백옥 반지, 국보에 버금가는 거 아니야?” “일 년 내내 민 회장님의 곁을 따라다닌 사람도 저 반지의 가치를 알 수 없었다며?”“민 회장님께서 가장 아끼시는 물건이라던데... 최 사장님 정말 대담하다!” 모두가 당황스럽다는 표정으로 하연을 바라보았다. “왜요? 못하시겠어요? 저에게 벌거벗은 것과 같은 창피를 주고 싶으신 모양인데, 민 회장님께서도 그 정도 큰 물건은 거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연이 침착하게 말했다.민진현이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돌리며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혔다. ‘감히 이 반지를 내기에 걸려고 하다니!’최근 언론으로 인해 요동치는 ST그룹의 주가를 생각하자, 민진현의 눈동자가 싸늘해졌다.“좋아, 그렇게 하지!”“자신 있는 거야?”여은이 걱정스럽다는 듯 하연에게 물었다. “당연하지.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민 회장님 말이에요, 정직하신 분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요.”“어머, 최 사장님을 속이려다 들키니까 했던 말을 번복하시려는 거예요? 만약 최 사장님께서 속임수인 줄 모르셨다면 그건 정말 억울한 일이잖아요!”“최 사장님더러 한 대표님의 세컨드라는 걸 인정하라고 강요하는 건 너무도 부도덕한 일이에요.”“우리가 연예계 전문 기자이기는 하지만, 없는 사실을 지어내서 기사를 쓰는 건 아니잖아요? 민 회장님, 노망이라도 나신 거 아니에요?” “마음껏 떠들어보라지!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쓸 데 없는 말들일 뿐이니까!”화가 난 민진현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불거졌다. 민진현은 주위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말들이 거북한 듯했다. “여기 있네!”민진현이 백옥 반지를 손가락에서 힘껏 책상 위에 내려놓으려다가,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하연의 손가락에 살짝 끼워 넣었다.민진현의 말투는 위협으로 가득 차 있었다.“잘 보관해두게, 곧 다시 찾으러 갈 테니.” “그때 다시 이야기하시죠.”하연이 돌아가자는 의미로 여은을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최 사장님,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제가 그 백옥 반지를 보관할 수 있는 안전한 상자를 구해드리겠습니다.” 옆에서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웨이터가 하연의 타짜다운 면모에 탄복하며 말했다. “아닙니다. 혹시, 비닐봉지를 좀 얻을 수 있을까요? 거기 담아 가면 될 것 같은데.” 하연이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무렇게나 놓아 둘 물건입니다. 소중히 다뤄주실 필요 없어요.” 다시 한번 모두가 깜짝 놀랐다.백옥 반지는 감히 가치를 가늠할 수 없는 국보급 문물과도 같은 것으로, 민진현의 목숨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소중한 반지를 비닐봉지 따위에 담아 가려 하다니! 하연의 말을 들은 민진현은 분노가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이미 하연의 손에 들어간 백옥 반지를 돌려받을 방법은 없었다. 민진현이 온 힘을 다해 의자를 걷어찬 후, 자리를 떠났다. “민 회장님
이때, 어디선가 최고급 스포츠카 엔진의 굉음이 들려왔다. 선이 유려한 보라색 스포츠카 한 대가 수많은 최고급 차량의 사이를 지나 하연과 여은의 앞에 멈춰 섰다.오른손에 깁스를 한 하성이 차량의 조수석에서 내렸다. “하연아, 오빠 왔다!”하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하성의 오른손에 있는 깁스를 바라보았다.“다 낫지도 않았으면서 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거예요?” 사실, 하연은 하성이 F국에서 잘 휴양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몰래 귀국한 것이었다. 하성이 자신을 따라 귀국할 것이라고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보고 싶었어!”“그리고, 다 낫지 않아도 당연히 널 데리러 와야지.”하성이 서준을 힐끗 쳐다본 후, 주권을 선포하기라도 하는 듯 운전기사를 향해 하연에게 차 키를 건네주라고 지시했다.“오늘은 네가 운전해.”“날 믿을 수 있겠어요?”차 키를 받아든 하연의 눈동자에 한 가닥의 불안감이 스쳤다. 사고를 당한 후, 하연은 며칠간 악몽에 시달렸다. 하연은 꿈에서 하성이 죽는 것을 보았고, 다시는 가족을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공포에 질려 잠에서 깨곤 했다. 이 모든 것은 혜경이 벌인 교통사고에 대한 트라우마로 인한 것이었다.“그럼, 당연하지.”하성이 하연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다 지나간 일이잖아.”“그럼, 오빠의 새 차 좀 운전해 볼까요?” 하연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오빠 말이 맞아. 다 지나간 일이야. 민혜경도 또 그런 짓을 벌이지는 않을 거야.’‘내 운명은 내가 정해. 트라우마 따위에 질 수 없어.’파티장을 떠나기 전, 하성이 대단히 매섭고 차가운 눈초리로 서준을 쏘아보며 말했다.“당신의 세컨드, 잘 관리하는 게 좋을 거야. 교통사고 건도, 우리 하연이 이 사건을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고 결심하지 않았으면, 우리 쪽은 민혜경을 사적으로 처리했을 텐데! 우리 쪽은 두려울 게 하나도 없었어!”울적함이 파도가 되어 서준의 가슴을 덮쳤다. 서준이 하연을 향해 소리쳤다.“나, 아이가 태어나기만 하면... 혜경이랑 갈
하연이 발걸음을 멈추고 말했다.“아직 내가 시킨 대로 사죄하지도 않았으면서,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혜경이 화를 참지 못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너 같은 X한테 무릎을 꿇으라고? 이게 미쳤나 진짜?!” 혜경은 하연의 거만한 표정이 너무도 거슬렸다. ‘그때 확실히 죽여버렸어야 했는데.’“무릎? 안 꿇어도 돼. 곧 태어날 아이도 너랑 같이 감옥에 가게 될 테니까. 난, 네가 스스로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기를 기다릴 거야.”하연이 싸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설령 내가 감옥에 간다 하더라도, 나한테는 서준 씨와 맺은 사랑의 결실이라는 게 있어. 우리 두 사람의 관계는 영원히 끊어지지 않을 거야.” 혜경이 하연의 말에 반격하고 나섰다.“난, 너랑 달라. 3년간의 결혼 기간 동안 애 하나 갖지 못한 너 같은 X이랑은 다르다고!”순식간에 하연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다. 아이, 이것은 풀지 못한 하연의 한이었다. 3년간의 결혼 기간 동안 하연이 가장 많이 들었던 모욕 역시 이것이었다. ‘고의로 교통사고를 일으켜 나를 해친 것도 모자라, 고작 아이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법의 심판을 피하고, 내 앞에서 큰소리까지 치고 있다니...’하연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하연이 혜경에게 다가가 멱살을 잡았다. 혜경이 몸이 종잇장처럼 뒤로 젖혀졌다. “다시 지껄여봐!”하연 보다 키가 작았던 혜경은 뒤꿈치가 땅에서 떨어져 공중에서 버둥댈 수밖에 없었다. 만약 하연이 혜경의 멱살을 잡고 있는 두 손을 놓는다면, 혜경은 그 즉시 땅바닥에 널브러질 것이었다. 혜경은 출산을 앞둔 임산부였다. 바닥에 널브러진다면 틀림없이 사고가 날 것이었다. 순간적인 공포를 느낀 혜경이 애원하기 시작했다.”나, 나, 난 임산부야. 그만해!”“너, 여태 잘만 까불었잖아?”하연이 차갑게 웃었다.“갑자기 두려워지기라도 한 거야?”혜경이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온몸을 벌벌 떨었다.혜경이 도움을 청하기 위해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한밤중이었던 탓인지 자신을 도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하연은 무의식적으로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매장의 입구에서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하연에게 아주 익숙한 사람, 한서준과 민혜경이었다.하연은 B시라는 곳이 너무 좁은 것이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혜경과 서준이 손을 잡은 채 매장으로 들어섰다. 마치 가족이 된 듯한 두 사람의 모습에 하연의 가슴이 내려앉는 듯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가슴 시림이 엄습해왔다.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것만 같았다.‘두 사람의 약혼 소식을 듣자마자 두 사람이 약혼반지를 고르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3년간의 결혼 기간 동안 서준이 하연에게 준 선물은 결혼반지가 유일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서준은 치수를 재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서준이 잠든 틈을 타서 하연이 몰래 서준의 치수를 측정했어야 했다. 그랬던 서준이 지금은 직접 VERE매장에 나타나 혜경과 함께 결혼반지를 고르려 하다니.하연은 어리석었던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한 대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연은 서준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했던 과거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고, 진심을 다하여 서준을 대했던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기 시작했다. 하연이 어깨를 짓누르는 비참함을 느끼던 바로 그때, 뒤에서 하성이 나타났다. 하성이 붕대를 감은 손으로 힘겹게 푸른색 다이아몬드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내 안목, 어때?”실의에서 벗어난 하연이 하성이 건네는 반지를 받아 들고는 옅게 웃었다.“예뻐요, 제가 직접 디자인한 스타일을 골랐네요?” “그래? 그럼 나랑 마음이 통한 거네? 기분이다! 오빠가 이 다이아몬드 선물로 사줄게, 어때?”하성이 하연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하성이 조각 같은 얼굴과 큰 몸으로 하연이 서준과 혜경을 볼 수 없도록 하연의 앞을 막아섰다. “아니, 괜찮아요. 또 인터넷에 이야기가 어떻게 퍼질지 모르잖아요.”하연이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하성이 짓궂은 미소를 지어 보인 후, 한쪽 무릎을 꿇은 채 푸른색 다이아몬드 반지를 하연에게 건
“민씨 가문 아가씨의 약혼자 신분으로 그런 질문을 하시는 겁니까?” 하연이 붉은 입술을 열어 또박또박 말했다.“아니면, 제 전 남편의 신분으로 그런 질문을 하시는 겁니까?”“생각해 보시죠, 대체 어떤 신분으로 그런 질문을 하시는 건지.”서준은 멍해졌다.‘내가 선을 넘었구나.‘이 세상에서 가장 물어볼 자격이 없는 사람이 바로... 나야.’‘나 역시 다른 사람과 낄 결혼반지를 고르고 있었잖아. 난, 최하연의 일에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어.’서준이 혜경을 향해 긴 다리를 내디뎠다. “이제 그만 가자.”혜경의 눈동자에 이상한 기운이 반짝였다. “하지만 서준 씨, 우리, 아직 반지를 고르지 않았잖아!” “다른 데서 고르자.”혜경이 서준의 뒤를 쫓았다. 혜경이 아담한 몸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겨 서준의 팔을 붙잡고 말했다.“잠깐 기다려봐!”두 사람이 매장을 떠난 뒤에도 하연은 웃음을 되찾지 못했다. 하성이 조각 같은 얼굴로 하연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아직도 괴로운 거야?”“뭐라고요? 한 번만 더 그런 식으로 말하면, 오빠가 나를 괴롭힌다고 큰오빠한테 다 이를 거예요!” 하연이 하성을 위협했다.하성이 계속해서 하연을 달랬다.“그러지 마, 큰 형이 나한테 너를 돌보라고 시킨 건데, 네가 나를 큰 형한테 일러바치면 어떡해, 나, 분명 좋은 꼴은 못 보게 될 거야.”잠시 후, 최씨 저택.한참 동안 거실에 앉아 하연과 하성을 기다리던 운석이 두 사람의 손에 들린 큰 쇼핑백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여신님, 왜 하성이 녀석이랑 쇼핑을 하면서 저는 부르지 않으신 겁니까?” 하성과 운석은 아주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만나기만 하면 서로를 헐뜯기 바빴다. 그리고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성이 운석을 업신여기고 있다는 것이었다.운석이 하연이 못생겼다고 소문을 낸 바 있었기 때문에 하성은 어릴 적부터 운석을 상대하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하연은 못생기지 않았으며, 오히려 아름다웠
“그 부분은 제가 외부에 분명히 설명하겠습니다.” 이 말을 마친 서준이 곧바로 몸을 돌려 회장실을 떠나자, 민진현이 서준이 나간 문을 향해 찻잔을 던졌다. 산산조각 나버린 찻잔은 아무렇게나 바닥에 널브러졌다.분노를 가라앉힌 민진현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날 좀 도와줘야겠어. 깨끗하게 처리해 주게.”“최하연...”민진현의 어두운 얼굴에 음흉함이 가득해졌다.“우리 민씨 가문이 어느 정도인지, 똑똑히 보여줘야겠어.”...일주일 후.드디어 기항 그룹과 기술 업데이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날이 밝았다. 하연과 정기태가 함께 회의실로 향하는 복도를 걷고 있었다.기항 그룹에서 열리는 이번 회의는 다른 그룹의 임원들도 참석할 예정이었다. 진보한 기술 혁신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하연이 회의실에 들어서자마자,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성재와 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앉아만 있었다. 하연이 가방을 내려놓으며 물었다.“임 대표님, 무슨 일 있으세요? 표정이...”성재가 두 손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시종일관 웃음을 띠던 성재의 총명한 눈동자에는 뚜렷한 조의만이 가득했다.성재가 우지나를 향해 말했다.“우 상무님, 지금 상황에 대해 최 사장님께 보고드리세요.”“최 사장님, 한 시간 전, 다크 웹에 대량의 나노로봇의 핵심 암호화 파일이 생겨났습니다. 다행히 아직 그 안의 소스 코드를 돌파한 사람은 없는 걸로 보이지만, 곧 돌파하는 사람이 생기는 건 시간문제일 겁니다.”우지나가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이 소스 코드 말입니다. 불과 이틀 전에 DS그룹에 공유된 걸로 알고 있는데, 왜 하필 오늘 정보가 누설된 걸까요?”“그러니까, 지금 우 상무님 말씀은... 우리 DS그룹이 정보를 누설했다는 겁니까?”하연은 몹시 당황스러웠으나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확실한 증거도 없이 함부로 말씀하시면 곤란합니다.” “DS 그룹에 정보를 공유한지 며칠도 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 일이 생기니, 의심을 거둘
성재 역시 우지나와 같은 생각인 듯했다. “최 사장님, 지금 농담하실 때가 아닙니다. 지금도 해커들은 암호를 해독하고 있을 거예요.” “제가 아니라면 아닌 겁니다.”하연이 자신만만하다는 듯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앉고는 고개를 돌려 작은 목소리로 정기태에게 물었다.“오고 있습니까?”정기태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10분 내로 도착하실 겁니다.”하연이 가볍게 웃으며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실 분이 한 분 더 계십니다. 모두 저와 함께 내려가 맞이해주시죠.”회의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심지어는 하연이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이라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지금이 어떤 때인데, 다 같이 한 사람을 마중 나가자는 겁니까? “최 사장님, 아직도 사태에 대한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하신 모양이군요!”“답답합니다, 정말!”하연은 사람들의 말을 듣고 있지 않는 듯했다. 하연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나중에 저를 따라오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나 하지 마십시오.”서준이 하연을 따라 몸을 일으켰다. “저는 최 사장님과 함께 가겠습니다.”성재는 마음이 편치 않았으나, 두 명의 대주주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세 명의 고위 임원들이 회의실을 떠난 상황에서, 어찌 한낱 주주들 따위가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다른 방법이 없던 주주들 역시 하나둘씩 하연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하연을 선두로 한 강대한 무리의 사람들이 한 사람이 나타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몇 분 후, 노란색 택시 한 대가 기항그룹의 입구에 멈춰 섰다.모두가 서로를 쳐다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누구야?”“거물 급 인사인가 봐.” 곧이어 190이라는 큰 키에 온화한 외모를 가진 한 남성이 차량에서 내렸다. 그 남성은 검은색 사복을 입고 있었으며 절제된 분위기를 뽐내고 있었다.“왔구나!”하연이 빠르게 달려가 최하경을 끌어안은 후, 귀에 대고 속삭였다.“오빠, 부탁 좀 할게요!”“응, 별거 아니더라.”하경이 담담하게 말했다
“대표님, 부남준 상무님이 돌아오셨습니다.” 최상층 사무실에서, 원신민이 차분하게 보고했다. 부상혁은 고개를 들고 시선을 멀리 두었다. 그는 느긋하게 외투를 정리하며 평온한 얼굴로 앉아,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원신민은 말을 이어갔다. “상무님께서 동남아에서 상당히 많은 지지를 얻어내셨습니다. 현재 이사회에서도 분위기가 매우 긍정적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회장님도 잇달아 칭찬을 아끼지 않고 계십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핸드폰에서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상혁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을 본 그의 눈빛에 순간적으로 부드러운 기운이 스쳤다. [부 대표님? 오늘 저녁 시간 괜찮으세요? 만나고 싶어요!!]메시지에는 귀여운 이모티콘이 하나 붙어 있었다. 메시지의 주인은 분명 지금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상혁은 망설임 없이 전화를 걸었다. 벨소리가 두 번 울리기도 전에, 수화기 너머로 하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갑자기 전화했어요?]그녀는 상혁의 전화해 의아하다는 듯한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옆에 있던 원신민은 이를 보고 눈치를 챘는지 두 발짝 물러섰다. 그리고 조용히 옆에서 대기했다. 상혁은 미간을 풀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최 사장님께서 만나고 싶다니, 제 심장이 너무 두근거려서 도저히 기다릴 수가 없어서요.” 하연은 가볍게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부 대표님, 자제력이 아직 부족한 것 같네요!]“그렇죠, 제가 최 사장님 앞에서는 특히 더 자제력이 부족해요.” 그의 목소리에는 다른 뜻이 담겨 있었다. 하연은 전화기 너머에서 얼굴이 붉어졌고, 서둘러 말을 돌렸다. [정 실장이 콘서트 티켓 두 장을 가져왔어요. 오늘 저녁에 우리 같이 보러 가요.] “그럼 내가 저녁에 데리러 갈게.” [좋아요.] 전화를 끊고, 상혁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깊었지만, 차가운 고요함이 가득했다. 곧, 그의 저음이 울려 퍼졌다. “가자. 이제
‘부씨 가문의 장손, 절대로 부상혁의 아이가 되어서는 안돼!!’ 이 말은 송혜선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이미 그녀 마음 깊숙이 뿌리를 내려 단단히 자리 잡고 있었다. “어머님, 이 일은 남준 씨의 의사를 따라야 할 것 같아요.” 다영은 입가에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표정은 어딘가 씁쓸했고, 눈동자에는 해결되지 않는 고민이 어른거렸다. 송혜선은 별다른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 이 일은 너무나도 당연한 절차에 불과했고, 복잡한 문제가 될 이유는 없었다. “걱정 말아. 남준이한테는 내가 직접 이야기할 테니까. 이런 중요한 문제 앞에서는 우리 남준도 절대 흐릿한 태도를 보이지 않을 거야.” 송혜선은 미소를 지으며 다정하게 다영을 안심시켰다. 다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깊은 밤. 격렬한 사랑의 열기가 가라앉은 후, 다영은 온몸에 땀이 촉촉이 배어 침대에 누워 있었다.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부남준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미련 하나 없이 자리에서 훌쩍 일어섰다.그 순간, 다영이 남준의 등 뒤에서 두 팔로 단단히 그를 끌어안았다. 남준의 눈빛이 어두워지며 손에 쥔 동작이 멈췄다. “갑자기 왜 이래요?”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한결같이 차분했다. 다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의 등에 얼굴을 바짝 붙인 채 더욱 힘껏 그를 끌어안았다. “조금만 더 있어주면 안 될까요?” 남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아침 일찍, 중요한 일이 있어서 서둘러야 해요.” 다영은 그의 품에서 천천히 물러섰다. 침대 머리맡의 희미한 빛이 그녀의 눈동자 속 기대감을 비추고 있었다. “남준 씨, 우리 아이를 가져보는 게 어때요?” 남준의 표정은 여전히 깊고 변함없었다. 그는 다영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했죠?” 다영은 그를 응시하며 눈망울을 반짝였다. “남준 씨
남준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습니다.” 정지철은 얼굴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한걸음에 다가가 차 문을 열어 주었다. “자, 그럼 우리 집으로 가세.” 동시에, 정씨 가문의 저택은 불빛으로 환히 밝아져 있었다. 정다영은 오랜 시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벌써부터 문밖으로 자꾸만 향하며,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주머니, 기사님께 전화 한 번 해 보세요. 왜 아직도 안 오시는 거죠?” 가정부인 왕순미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께서 직접 모시러 가셨으니, 곧 도착하실 겁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밖에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다영은 얼굴에 웃음을 띄우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뛰어나갔다. “분명히 남준 씨일 거야.” 문을 나서자 찬바람이 불어왔고, 다영은 몸을 살짝 떨었지만, 마음속 설렘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남준 씨!” 차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다영의 시선은 오직 한 곳만을 향했다. 하지만 차에서 내린 이는 기대했던 남준이 아니었다.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그녀는 놀란 듯 말했다. “어머님, 여기 웬일이세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실망이 묻어났지만, 금세 태연한 척하며 표정을 고쳐 잡았다. “왜? 내가 오면 안 되는 거니?” 차에서 내린 사람은 바로 송혜선이었다. 송혜선은 어두운 색의 패딩을 입고 있었지만, 부드럽게 불룩 나온 배는 그녀의 우아함과 품격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다영은 서둘러 다가가 송혜선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다만 이렇게 늦은 시간에 오실 줄 몰랐고, 미리 말씀도 없으셨잖아요.” 송혜선은 다영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다정하게 말했다. “남준이가 돌아온다길래 네 아버지가 연락을 줬거든. 그래서 겸사겸사 들러본 거야.” 다영은 그 말을 듣고 속으로는 상황을 이해했다. 단순히 들르겠다는 말은 구실에 불과했고, 내일 있을 이사회를 염두에 둔 방문임이 분명했다.
“제가 요즘 입덧이 심해서 기름진 음식은 못 먹거든요.” 하연의 말에 부동건은 금방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랬구나. 그렇다면 다음에 혜선 이모에게 담백한 음식을 준비해 달라고 부탁할게.” 부동건은 미소를 지으며 따뜻한 시선을 보냈다. 곁에 있던 비서는 부동건의 눈짓을 읽고, 즉시 보온 통을 조용히 치워갔다. “혜선 이모는 그런 일을 잘 아니까, 모르는 게 있으면 혜선 이모에게 물어보렴.” 그 말이 떨어지자, 사무실 공기가 순식간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하연은 상혁의 표정이 차갑게 변한 것을 느꼈다. 그의 주변에는 금세 폭풍이 몰아칠 듯한 기운이 감돌았다. 하연은 상혁의 손을 살짝 잡으며 그를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삼촌도 점점 사람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시는 것 같네요. 혜선 이모도 지금 임신 중이신데, 어떻게 그런 부탁을 드릴 수 있겠어요?” 부동건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대단한 일도 아닌데 뭐가 걱정이냐, 넌 걱정하지 말거라.” 하연은 여전히 단호한 태도로 거절했다. “아니에요. 전 늘 진숙 이모가 해주신 음식을 먹어서, 다른 분이 만든 건 익숙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녀가 조용히 조진숙을 언급하자, 부동건은 잠시 당황한 듯 멈칫했다. 곧 코를 문지르며 멋쩍게 말했다. “그렇구나, 내가 생각이 짧았다. 진숙 이모는 어릴 때부터 널 봐왔으니 네 입맛을 가장 잘 알겠지.” 그는 말을 돌리며 덧붙였다. “그럼 앞으로 이런 건 진숙 이모에게 부탁하자꾸나.” 상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이런 일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들의 단호한 어조에 부동건은 더 이상 할 말을 잃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젊은 사람들 일은 내가 나설 일이 아니지. 다만 너희 둘이 잘 지내길 바라는 마음일 뿐이다.” 부동건은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이제 너희가 가정을 이루고 일도 안정적으로 맡게 되어, 정말 기쁘구나.” 그는 마치 옛날을 떠올리는 듯
상혁은 하연을 단숨에 품 안으로 끌어당기며 밀착했다. “대범하다는 건 과장이야. 그저 한 번의 신세를 갚았을 뿐이야.” 하연은 그의 말에 질투가 더 짙어졌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을 톡톡 찌르며 따져 물었다. “어떤 일이길래 부 대표님이 그렇게 큰 손을 쓰셨나요?” 전진그룹의 프로젝트는 최소 몇억에 달하는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었다. 하연은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니면, 부 대표님이 나한테 감추고 싶은 무슨 비밀이라도 있는 건가요?” 상혁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그녀의 귀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그는 나지막이 말했다. “네 작은 머릿속엔 도대체 무슨 생각이 그렇게 가득하니?” 상혁의 큰 손은 자연스럽게 하연의 어깨로 내려왔다. 그는 몸을 숙이며 하연의 시선을 마주했다. 깊고 진지한 눈동자 속에 하연의 모습만 담겨 있었다. 상혁은 하연을 장난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거 알아? 하연아, 너 지금 엄청 귀엽다.” 하지만 하연은 여전히 진지했다. “부 대표님, 화제를 돌리지 말아요.” “응.”상혁은 가볍게 대답하며 그녀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는 그 모임에서 들었던 말이 하연의 귀를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설명하기 시작했다.“주슬기에게 이익을 준 건, 단지 주슬기에게 빚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야. 이 세상에서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다른 얽매임이 없다는 걸 뜻하지.” 잠시 말을 멈춘 후, 그는 덧붙였다. “하지만, 하연아. 오늘 너의 모습은 정말 마음에 들었어.” 하연이 질투를 하고, 다른 여자를 신경 쓰는 모습...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상혁의 마음을 기쁘게 했다. 하연의 얼굴은 금세 붉어졌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상혁의 손등을 꼬집으며 말했다. “부 대표님, 오해하지 말아요. 그냥 우리 아이 아빠가 걱정돼서 그런 거예요... 으읏!” 하연의 말이 끝나
“마침 ZT그룹의 서류가 도착했네요. 최 사장님, 함께 올라가시죠.” 연지의 말에 하연은 자연스럽게 주의를 기울였다. “DL그룹이 ZT그룹과도 협력하고 있나요?” 연지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원래는 없었죠.” 바로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연지는 공손하게 손짓하며 말했다. “먼저 타시죠.” 하연은 앞장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고, 연지는 뒤따라 옆에 섰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올해 사업 조정으로 ZT그룹과 협력할 기회가 조금 생겼습니다. 게다가 부 대표님께서 ZT그룹을 꽤 신경 써 주신 덕에, 자연스레 왕래가 잦아졌죠.” 하연은 시선을 고정한 채 연지의 말 속에 숨은 의미를 느꼈다.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호기심 섞인 말투로 물었다. “오, 그게 무슨 뜻이죠?” 연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사실 연말은 늘 우리 회사에서 가장 바쁜 시기인데, 최근 부대표님께서 전진그룹의 프로젝트를 모두 ZT그룹에 넘기셨거든요. 덕분에 이번 연말은 꽤나 한가해졌어요. 전진그룹이라면 바로 무역협회 전영철 회장님 회사잖아요.”하연은 연지의 말 속에서 핵심을 놓치지 않았다. 전진그룹은 F국에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기업으로, 그 기반은 단단했고 산하 프로젝트도 방대했다. 그런 이익을 고스란히 주슬기에게 넘겼다니, 충분히 의심할 만했다. 하연의 마음속에 의혹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평정을 유지하며 연지를 흘깃 바라봤다. 연지가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낸 건 분명 의도가 있었다. 하연은 차갑게 눈을 좁히며 물었다. “그 말은, DL그룹이 그 프로젝트를 전부 ZT그룹에 넘겼다는 거네요?” 연지는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그런데 부 대표님께서 이 일을 말씀 안 하셨나 봐요?” 하연은 옅게 미소 지으며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 “이렇게 말해 줬으니, 덕분에 알게 됐네요.” 연지는 속이 뜨끔하며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급히 변
하성은 핸드폰 화면을 힐끗 보더니, 온통 빨갛게 물든 주식 그래프를 보고는 손을 뻗어 하연의 머리를 가볍게 헝클었다. “우리 하연이, 이제 완전 큰 부자가 됐네.” 하연은 활짝 웃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다 오빠 덕분이에요. 역시 든든한 나무 밑에 있어야 시원하게 쉴 수 있는 거죠.” 하성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눈에 애정 어린 미소를 띄웠다. “하연이 네가 기댈 수 있는 나무가 될 수 있어서 오히려 내가 영광이지.” 하연은 문득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오빠가 있어서 참 좋아요.” 하성은 책상 위의 서류를 들어 흔들며 웃었다. “그럼, 최 사장님. 이 프로젝트, 이제 나한테 넘겨줄 준비는 됐습니까?” 하연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네, 오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업무 인수인계를 시작했다. 하성은 업무를 빠르게 익혔다. 그의 예리한 감각과 타고난 사업적 통찰력은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심지어 정태훈도 하성의 능력에 감탄하며 연신 칭찬했다. “하성 도련님, 처음부터 연예계에 발을 들이지 말았어야 했어요. 이렇게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니, 우리 최 사장님보다 더 대단한 걸요.” 하성은 장난스레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말했다. “정 실장까지 이런 입발린 소리를 하다니, 어울리지 않네.” 태훈은 황급히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진심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는 하성을 한번, 하연을 한번 번갈아 보며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최씨 가문 분들은 모두 사업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으십니다. 하민 도련님이든, 하연 아가씨든, 지금의 하성 도련님까지, 모두 뛰어난 경영 실력을 가지셨죠. DS그룹은 누구 손에 맡겨도 틀림없이 번창할 겁니다.” 하연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들었죠, 오빠? 이제 회사는 오빠한테 맡기고, 저는 잠시 쉬어야겠어요.” 하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지. 지금 너는 우리 집안
“오빠, 정말 나한테도 숨길 거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잖아요!” 하연은 점점 초조해졌다.하성은 대수롭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다 지난 일이야.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거잖아.”“하지만...” 하연이 더 말하려 하자, 하성은 서둘러 동생의 말을 잘랐다. 그는 손으로 하연의 어깨를 주무르며 화해를 구하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 “됐어. 하연아, 오빠 이제 막 돌아왔는데 좀 쉬게 해 줘. 내일이면 회사에 나가야 하는데, 남은 마지막 자유 시간마저 빼앗을 거야?”하연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섰다. “알았어요. 더 이상 묻지 않을게요. 다만, 후회하지 않으면 좋겠어요.”하성은 입가를 살짝 끌어올리며 대답했다. “응, 알았어. 난 할아버지랑 좀 있다가 갈게.”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바로 몸을 돌려 떠났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떠나는 하성의 뒷모습을 보며, 하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결국 그녀는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꺼내 신가흔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가흔에게도 아무런 답장이 오지 않았다. 마치 그 메시지가 허공으로 사라져 버린 듯했다.다음 날. 하성이 DS그룹을 맡게 된다는 소식이 삽시간에 퍼지며 많은 언론의 관심을 끌었다. 이른 아침부터 회사 입구에는 여러 매체의 기자들이 몰려들어 첫 번째 단독 기사를 얻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서여은이 하연에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하성 오빠가 DS그룹을 맡는다는 소문 들었는데, 진짜야?] 하연은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리며 답장을 보냈다. [응, 맞아.] 여은은 깜짝 놀라며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왜 갑자기 하성 오빠가 DS그룹을 맡아? 그리고 너는? 혹시 너는 상혁 오빠랑 사랑에 빠져서 정신없는 거 아니야?]하연은 당황하며 짧게 답했다. [나 임신했어.]순간 채팅창에는 감탄사로 가득 찬 메시지가 연달아 올라왔다. [!!!] [하연아, 너 진짜 너무 빠르잖아!]하연이 답장을 쓰기도 전에 여은
손이현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창밖의 하늘은 이미 노을로 물들어 있었다. 눈부신 석양이 한 폭의 그림처럼 창유리를 통해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온 비서는 창밖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이현을 발견하고 나지막이 말했다. “상무님, 깨어나셨습니까?”이현은 천천히 시선을 거두며 평온한 얼굴로 대답했다. “응. 오늘 고생 많았어.”그 말에 비서는 마치 큰 짐을 내려놓은 듯 숨을 내쉬며 미소 지었다. “전 괜찮습니다. 상무님, 그리고 이젠 정말 건강 좀 생각하세요. 그러다가 큰일 나십니다. 더 쉬세요.”이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고 있어.”“사장님,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목마르시죠? 물 한 잔 가져오겠습니다.” 비서는 그렇게 말하며 유리잔에 따뜻한 물을 따라 내밀었다. “오늘 하루 아무것도 드시지 않으셨으니 제가 도시락 하나 포장해 올게요.”이현이 막 말리려 했지만, 이미 비서는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쓴웃음을 지으며 천장을 바라보다가 무언가 결심한 듯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하연은 가만히 있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임신 중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연말 전까지 모든 일을 마무리해야 한다며 고집을 부렸다.“이젠 홀몸도 아닌데. 몸도 챙기고 뱃속의 아이도 생각해야지.” 최동신은 진심 어린 충고를 했지만, 하연은 자기 할아버지의 팔짱을 끼고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할아버지, 걱정 마세요! 저 정말 괜찮아요. 그리고 지금 큰오빠, 새언니 달콤한 신혼이잖아요. 둘만의 행복한 시간을 좀 보낼 수 있게 큰 오빠 몫까지 제가 해야죠.”최동신은 하연의 이 말에 딱히 반박할 수 없었다. 최 노인에게는 손자, 손녀 모두 소중했기 때문이다. 하민이 이제 막 신혼을 맞이했으니 당연히 더 신경 써줘야 했다.“정 실장이 있잖아. 정 실장이 네 옆에서 오래 도왔으니. 정 실장한테 맡기면 되지, 네가 다 할 필요는 없잖아.” 그 말의 하연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걱정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