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연은 그제야 하성의 의도를 파악했다.“그러니까 여정 씨를 우리 DS 엔터에 합류시키겠다는 거예요?”“응. 맞아.”“아...”하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사실 이제 막 설립된 신생 그룹이 안여정처럼 이미 데뷔하고 인기까지 얻은 연예인과 계약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도 그럴 게, 연예인이라는 직업이 원래 인기로 돈 벌어 먹고사는 직업이니까...때문에 여정이 DS 그룹에 기꺼이 합류한다는 게 놀라운 일이다.“혹시 저 안 반겨 주시나요?”여정이 농담조로 말했다.“아니요. 그럴 리가요. 여정 씨가 우리 엔터에 합류하면 저희야 영광이죠.”“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여정은 눈을 들어 하성을 흘긋거렸다. 그 눈빛은 하연에게 너무나도 익숙했다.때문에 하연은 단번에 여정의 속내를 알아버렸다.‘목적이 따로 있었군.’하연이 뭐라 말하려던 그때,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 이에 하연은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꺼내 바로 확인했다. 하지만 액정에 뜬 전화번호를 본 순간 기대에 찬 눈빛은 다시 실망감으로 뒤덮였다.약 몇 초 지난 뒤에야 하연은 수신 버튼을 눌렀다.“하연아, 지금 회사야?”전화 건너편에서 가흔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신 디자이너님이 웬일로 나한테 다 전화를 했을까?”하연은 말하면서 하성과 여정을 흘긋거렸다.“너희 회사에서 DS 엔터를 설립했다며? 연예인들 많이 끌어들였을 테니 스폰서가 필요하지 않아?”“뭐야? 평소에 연락도 잘 안되더니 우리 회사 일에 빠삭하네?”“VERE가 마침 최근에 협찬을 고려해 보고 있거든. 여은과 얘기하다가 마침 네 소식 들어서 전화해 봤어. 우리 만나서 얘기할까?”“응, 좋지. 나 회사에 있어. 정 실장더러 너 데리러 가라고 할게.”“필요 없어. 다 큰 어른이 길 하나 못 찾을까 봐? 나 주차장에 차만 세워놓고 바로 올라갈게.”전화를 끊은 하연은 하성을 흘긋거렸다.“오빠, 가흔이 여기로 온대요.”가은의 이름을 듣고도 하성의 표정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그럼 너희끼리 얘기 나눠.
“너 대체 무슨 생각 하는 거야?”“오빠, 혹시 여정 씨한테 다른 마음은 없어?”하성은 그제야 하연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아채고는 입꼬리를 올렸다.“최하연, 너 이제 오빠 사생활도 다 캐네?”하성이 제 질문을 교묘하게 피하자 하연은 조급한 듯 따져 물었다.“오빠 설마 여정 씨 좋아하는 거예요?”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하성이 손가락으로 하연의 이마를 튕겼다.“너도 참, 무슨 생각 하는 거야? 여정은 그냥 후배야. 그 이상은 절대 아니야.”“그러면서 성 빼고 불렀잖아. 오빠가 거짓말하는지 알 게 뭐야.”하연은 아픈 듯 제 이마를 감싸 쥐며 투덜댔다.“최하연! 내가 어떻게 말해야 믿을 건데?”“저야 당근 오빠 믿죠. 하지만 여정 씨는 아닐걸요.”여정이 제 오빠를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 이미 똑똑히 봤으니까. 그 눈빛은 분명 좋아하는 사람을 보는 눈빛이다.“오빠...”“그만,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하연은 눈알을 데구루루 글리며 한참을 생각하다가 끝내 마음속에 묻고 있던 말을 꺼냈다.“오빠 혹시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그 말을 꺼낸 순간 공기 속에 침묵이 흘렀고, 하성의 얼굴에도 부자연스러운 기색이 스쳐 잠깐 스쳐 지났다. 하지만 하성은 이내 그 감정을 숨긴 채 덤덤하게 대답했다.“없어.”너무나도 단호한 두 글자였다.하연은 그 순간 속으로 가흔을 대신해 한숨을 쉬었다. 그동안 제삼자로서 하연과 친구들 모두 가흔의 마음을 지켜봐 왔다.하지만 하필 당사자인 하성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으니...“하연아, 다른 일 없으면 난 갈게.”“네. 가요.”그 말을 끝으로 하성은 곧바로 사무실을 나섰다. 그러다 마침 가흔과 맞닥뜨리고 말았다.하성은 눈을 가늘게 접으며 걸음을 멈추더니 가흔을 빤히 바라봤다.그때 가흔이 먼저 하성에게 인사했다.“오빠도 여기 있었네요?”“하연이 찾으러 왔어?”“네.”가흔은 대답하면서 무의식적으로 가방끈을 꽉 움켜쥐었다.“그럼 전 들어가 볼게요.”이윽고 짤막한 한마디를 남긴
여정은 그 말에 화내는 기색 하나 없이 오히려 관대하게 말했다.“괜찮아요, 선배님 일 봐요. 저 혼자서 둘러봐도 되니까.”여정이 그렇게 말하자 하성은 오히려 미안했는지 먼저 제안했다.“내 매니저 붙여줄 테니까 필요한 건 뭐든 말해.”“네, 선배님.”하성이 떠나자 여정의 얼굴에 걸렸던 미소는 싹 사라졌다. 이윽고 고개를 돌려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눈을 번뜩였다....사무실 안.하연은 가흔을 보자 다급하게 일어섰다.“네가 갑자기 오다니 너무 놀라운데?”“길가다 들른 거야.”가흔은 싱긋 웃으며 가방을 내려놓더니 이내 눈을 내리깔며 물었다.“하성 오빠가 여기 왜 있어?”“아, 오빠도 너처럼 나한테 힘 보탠다고 DS 엔터랑 계약했어.”“하성 오빠가 DS 엔터랑 계약했다고?”가흔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응, 우리 엔터의 첫 번째 연예인이야.”하연은 가흔이 하성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바로 말을 보탰다.“VERE 주얼리가 우리 회사에 협찬한다면 모델 할 사람은 하성 오빠뿐이겠네...”“아.”가흔의 짤막한 대답에 하연은 앞으로 다가가 가흔의 손을 잡았다.“가흔아, 난 사실 네가 우리 오빠한테 네 마음 고백하는 것도 좋다고 봐.”가흔은 눈이 어두워지더니 이내 입을 삐죽거렸다.“아니야. 가끔 드러내지 말아야 할 감정이란 것도 있어. 차라리 지금처럼 이렇게 남는 것도 좋아.”“하지만 말 안 하면 오빠가 영원히 모를 텐데.”“모르는 게 차라리 나아.”가흔은 눈을 들어 하연을 바라봤다.“사실 두 사람 대화 밖에서 들었어.”“오빠 말 믿지 마. 오빠는 그냥 아닌 척하는 거야. 그게 진심이 아닐지도 몰라.”하연은 하성에 대해 잘 알기에 지난 몇 년 동안 자기 오빠가 가흔에게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을 리 없다고 확신했다.“됐어. 감정은 강요할 수 없어. 하늘의 뜻에 맡겨야지.”약간 허탈하기도 하면서도 개의치 않다는 듯 말하는 가흔의 모습에 하연은 걱정이 앞섰다. 가흔의 말대로 감정은 강요할 수 없지
“좋아. 그렇다면 바로 계약서 작성할 테니까 문제없으면 계약하자.”“응.”“VERE에서 곧 새로운 시리즈를 런칭할 예정인데 이번 시리즈의 모든 작품 모델은 DS 소속 아티스트한테 모델을 맡길게.”하연은 잠깐 고민하다가 대답했다.“그렇다면 우리 셋째 오빠랑... 안여정 씨한테 맡겨 줘. 우리 회사 소속 연예인 중에 인기 있는 사람은 아직 이 두 명뿐이니.”가흔은 시선을 거두며 무심코 대답했다.“그래, 이번 시즌 두 사람의 주얼리 모델은 우리 브랜드에 맡겨줘.”“내가 나중에 매니저랑 따로 상의해서 알려줄게.”“그래.”일 얘기를 마친 뒤, 하연은 직접 가흔을 회사 로비까지 데려다줬다. 하지만 하필이면 여정과 마주쳤다.여정은 가흔을 위아래로 살피더니 먼저 하연에게 인사했다.“사장님, 안녕하세요.”하연은 결국 두 사람을 서로 소개해 줬다.“여정 씨, 이분은 VERE 주얼리 신가흔 대표예요. 앞으로 여정 씨한테 VERE 주얼리 협찬해줄 거예요.”가흔이 VERE 주얼리 대표라는 말에 여정의 눈은 반짝 빛났다.VERE 주얼리는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주얼리 브랜드이니 그럴 만도 했다.VERE 주얼리는 독특하고 세련된 오리지널 디자인만 추구하기에 젊은 사람들에게 매우 인기 있다.여정의 눈에 드리웠던 경멸은 어느새 사라졌다. 심지어 먼저 나서서 가흔에게 인사했다.“신 대표님, 안녕하세요. 저는 DS 소속 연예인 안여정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가흔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예의를 차리는 동시 약간의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여정과 말을 섞지 않고 하연에게 말을 걸었다.“하연아, 나 먼저 갈게. 세부 사항은 나중에 따로 예기해.”“그래.”가흔을 배웅하고 나니 여정이 궁금한 듯 불쑥 나타나 말했다.“사장님, 신 대표님과 사이가 좋아 보이네요.”“어릴 때부터 친구라 각별해요.”여정은 그 말에 흠칫 놀랐다.가흔이 하연과 사이가 이렇게 좋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으니.‘어쩐지 하성 선배가 특별하게 대한다 했어. 가운데 최 사장님이 끼
하연은 제 앞에 서 있는 상혁을 위아래로 훑어봤다.그러다가 상혁이 멀쩡한 걸 확인하고 나서야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삐죽거렸다.“지난 이틀 동안 어디 갔어요? 연락도 안 되고. 난 또 오빠가...”하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상혁은 손을 뻗어 하연을 품에 끌어안았다.익숙한 포옹에 하연은 순간 안심되었다. 이렇게 상혁의 품에 안겨 있으니 입가에서 맴돌던 말도 다시 삼켜버렸다.그때 상혁이 뜨거운 숨결을 내뱉으며 하연의 귓가에 속삭였다.“미안해, 많이 걱정했어?”사실 BN 그룹 본사 일 때문에 상혁은 그동안 F국에서 회사 일을 처리하느라 연락도 못 했다.하지만 하연의 부재중 전화를 확인하자마자 바로 귀국했고, 도착하자마자 이곳으로 달려왔다. 한시라도 빨리 하연을 보기 위해서.그때 하연이 입을 삐죽거리며 삐진 듯 말했다.“왜 전화도 안 받고 문자도 안 해요? 내가 얼마나...”“응, 알아. 다음에는 절대 이러지 않을게.”눈을 들어 상혁을 훑어보던 하연은 피곤함이 역력한 상혁의 얼굴을 보자 순간 마음이 아팠다.“오빠, 혹시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여기로 달려왔어요?”“응, 네가 걱정할까 봐. 그리고 화낼까 봐 직접 사과하러 왔지.”“그럼... 아직 휴식도 못 했겠네요?”상혁은 하연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네 얼굴 보니까 피곤함이 싹 사라졌어.”“이거 놔요. 여기 회사예요.”하연은 다급히 상혁을 밀어냈다. 하지만 어깨에 손이 닿는 순간 상혁은 무의식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그걸 바로 눈치챈 하연은 걱정스럽게 물었다.“혹시 다쳤어요?”하연은 걱정 가득한 말투로 물어보며 당장이라도 상혁의 어깨를 확인하려고 했다. 그러자 상혁은 하연의 손을 덥석 잡았다.“걱정할 거 없어, 나 괜찮아.”하연은 상혁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방금 분명 살짝 밀었는데 눈살을 찌푸릴 정도라면 상처가 심할 게 뻔했다.“어디 보여줘 봐요.”하연은 손을 뻗으며 완강한 태도로 말했다. 아까 어깨를 만지면서 붕대가 감겨 있는 걸 봤기에 하연은 제 생각을 더
말이 끝나기 바쁘게 상혁은 하연을 제 품에 와락 껴안으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그래.”상혁과 그렇게 꼭 붙어 있으니 하연은 요란하게 북을 치는 제 심장을 더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그 순간 하연은 도망치듯 상혁의 품에서 빠져나오려 했다.“구급상자는 어디 있어요? 상처 치료해 줄게요.”“괜찮아. 의사가 처리했어.”“오빠 상처 터진 것 같아서 그래요.”하연은 말을 마치자마자 뒤돌아 구급상자를 찾기 시작했다. 어디 있는지도 모른 채 여기저기 찾아 헤매는 하연을 상혁은 미소를 머금은 채 바라보다가 얼른 일어나 반대편 캐비닛으로 걸어갔다.“이 안에 있어.”하연은 머쓱해서 얼른 앞으로 가 구급상자를 받아 들었다.“앉아요. 약 갈아줄게요.”상혁은 고분고분 자리에 앉아서는 깊은 눈동자로 하연을 빤히 쳐다봤다.하연은 얼른 구급상자를 열어 도구를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상혁의 상처를 치료해 주기 시작했다. 하연의 동작은 매우 가벼웠고 동작 하나하나 매우 조심했다. 그러다 붕대를 떼어내자 하연은 붕대 아래 상처를 똑똑히 확인했다.딱 봐도 날카로운 칼날에 질린 듯한 상처였다.하연은 일순 눈살을 찌푸렸다.‘이건 절대 보통 상처가 아니야.’“오빠, 대체 어쩌다가 다친 거예요?”상혁은 하연이 걱정하는 게 싫어 덤덤하게 말했다.“별일 아니야, 작은 사고가 있었어. 괜찮아.”끝까지 말하지 않는 상혁을 하연은 더 이상 다그쳐 묻지 않았다.“앞으로 조심해요. 또 이렇게 다치지 말고.”그러고는 면봉에 요오드를 묻혀 상처를 조심스럽게 처리하기 시작했다.상처에 새로운 붕대를 감은 뒤 하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제야 너무 긴장한 탓에 자기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는 걸 발견했다.“약 제때에 갈아야 빨리 낳을 수 있어요.”“그래, 알았어.”말을 마친 하연은 구급상자를 처리하기 시작했고 그사이 상혁은 어디론가 전화했다.“5분 뒤에 내 개인 별장으로 와.”“상혁 오빠, 누구랑 전화했어요?”옆에 있던 하연은 의아한 듯 물었다.그러자 상혁
상혁은 곧바로 피터에게 말했다.“내 일정은 앞으로 숨김없이 하연한테 공유해. 사실대로 알려줘.”그 말이 떨어진 순간 피터의 눈에 놀라움이 스쳐 지났다. 상혁은 신분과 배경도 있고 그동안 비즈니스를 하면서 적도 많이 생겨 안전을 위해 일정은 늘 비밀로 했었다.게다가 상혁을 따라 일한 수년 동안 피터는 늘 뒤에서 정체를 드러낸 적 없었다. 그런데 오늘 상혁이 저를 눈앞의 여자에게 소개해 줬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이로써 상혁이 하연을 백 퍼센트 믿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네, 대표님.”상혁의 명령에 피터는 늘 의심을 품지 않기에 상혁이 하연을 백 퍼센트 믿는다니 그 역시 하연을 백 퍼센트 믿기로 했다.“그래, 가 봐.”“네, 대표님.”피터가 떠난 뒤 상혁은 하연의 손을 잡았다.“하연아, 그동안 내가 특별히 처리해야 할 문제가 있었어.”하연도 이제는 어느 정도 눈치챘기에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그러고는 눈을 들어 상혁을 바라봤다.“알았어요. 다만 앞으로 절대 다치지 마요.”“그래.”상혁은 하연의 볼을 빤히 바라봤다. 그 순간 공기 속에 야릇한 분위기가 흘렀고, 그걸 인지한 하연은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치며 도망쳤다.“오빠, 저 이제 집에 갈게요.”하지만 일어서기도 전에 상혁이 하연의 팔을 잡아당겼다.“늦어서 위험해.”“네?”상혁의 말에 뭔가 생각난 듯 하연은 얼굴을 붉혔다.“그건... 안 되지 않나요?”상혁은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싱긋 웃었지만 함부로 선을 넘으려 하지는 않았다. 이제야 하연이 조금씩 저를 받아들이고 있는데 급할 필요 없으니.“네가 안방 써, 내가 객실에서 잘게. 오늘 하루만 여기서 지내. 늦은 시간에 너 집에 돌려보낸 걸 어머니가 알면 또 뭐라 하셔.”조진숙을 방패막이로 꺼내자 하연은 마지못해 동의했다.“그래요, 그럼 저 먼저 올라가서 쉴게요. 잘 자요.”하연은 뒤돌자마자 총총걸음으로 도망쳤다. 마치 뒤에서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헐레벌떡 위층에 올라온 하연은 안방 문을 쾅 닫아
“뭘 그렇게 봐?”상혁의 목소리가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하연을 현실로 잡아끌었다. 하지만 시선만은 여전히 한 곳을 응시하고 있다가 결국 그 물건을 가리키며 물었다.“오빠한테 어떻게 목마 모양 도자기 장식품이 있어요?”하연의 시선을 따라 확인한 상혁은 싱긋 웃었다.“왜? 너도 있어?”“네. 이거 제 거랑 똑같아요. 아쉽게도 제 건 진작 깨졌지만...”하연은 시선을 거루며 서글픔 어조로 말했다.그 순간 상혁의 눈에 이상한 빛이 스쳐 지났지만 이내 숨겼다.“아쉽네. 일찍 자.”상혁은 말하면서 손에 들고 있던 새 잠옷과 목욕 타월을 하연에게 건넸다.“알았어요, 오빠도 일찍 쉬어요. 잘 자요.”상혁은 더 이상 방에 머물지 않고 객실로 향했고, 하연은 상혁한테서 받은 잠옷과 목욕 타월을 들고 싱긋 미소 지었다.그 시각, 한씨 저택.서준이 일을 마치고 집에 왔을 때는 벌써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기사는 차를 차고에 멈춰 세우더니 술에 취해 뒷좌석에 앉아 있는 서준에게 귀띔했다.“대표님, 댁에 도착했어요.”“네, 기사님도 얼른 들어가 보세요.”서준이 차에서 내렸을 때 커다란 정원은 아주 조용했다. 고개를 들어 눈앞의 별장을 확인한 서준은 저도 모르게 과거를 회상했다.고작 반년이 흘렀는데 별장은 너무 썰렁해졌다. 하연과 이혼한 뒤 서준은 사실 이 별장에 한 번도 발을 들인 적이 없다.서영과 이수애를 A국으로 쫓아낸 바람에 이 커다란 집에 이제는 서준과 강영숙 둘뿐이다.서준이 성큼성큼 대문 안으로 걸어 들어오자 최향숙이 나와 서준을 반겼다.“대표님, 어서 오세요.”그러면서 서준의 손에서 외투를 받아 현관에 걸어 두었다.“저녁에 어르신께서 대표님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함께 식사하겠다면서.”그 말에 서준은 걸음을 우뚝 멈췄다.“할머니는 주무시나요?”“진작 잠자리에 드셨어요.”최향숙이 뭔가 말하려다가 다시 입을 다무는 모습에 서준이 물었다.“또 무슨 일 있어요?”“이런 말씀드려도 될지 모르겠네요. 요즘 어르신 기분이 안 좋
다른 곳에서 있던 조봉규가 소란이 일자마자 급히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송혜선에게 다가가며 다급히 말했다. “설날인데, 뭐하러 이렇게 화를 내...” 조봉규가 입을 여는 순간, 남준의 온몸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남준의 시선이 날카롭게 쏘아붙었고, 조봉규는 본능적으로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애써 태연한 척하며 한 발 다가섰다. 송혜선의 팔을 조심스레 부축하며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건강이 우선입니다.” ‘건강?’남준은 손에 쥔 염주를 힘껏 움켜쥐었다. 힘이 들어간 손등에는 핏대가 서고, 눈빛은 살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시선은 서로 닿아 있는 두 사람의 손목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입가에 엷은 조소가 떠올랐다. “조 선생님, 참으로 열정적인 분이시군요. 설날에도 근무 태세를 유지하시다니.” 조봉규는 눈치가 빠른 인물이었다. 당연히 그의 말 속에 담긴 조롱을 알아챘다. 그러나 겉으로는 한껏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머리를 숙였다. “별말씀을요. 환자의 곁을 지키는 게 제 본분입니다.” 남준은 가만히 조봉규를 노려보다가, 짧고 날 선 경고를 던졌다. “그렇다면 본분에만 충실하시죠. 여긴 부씨 가문의 본가이니까.”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남준아!” 송혜선이 다급히 나섰다. 남준을 나무라는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조봉규를 감싸려는 의도가 분명히 깔려 있었다. 남준의 눈빛은 더욱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송혜선은 오히려 기세를 올려 쏟아내듯 말했다. “네가 좀 더 나서서 잘했더라면, 부상혁한테 밀릴 일도 없었어! 내가 왜 조진숙한테 설날마다 굽신거려야 하냐고?” “지금, 어머니는 나를 원망하시는 겁니까?”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남준의 손에서 염주의 한 알이 ‘탁' 하고 부서졌다. “남준아!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송혜선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염주는 영적인 기운이 깃든 물건이야. 함부로 부수면 불길한 일이 생길
부동건의 말은 송혜선을 전적인 신뢰를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면, 과연 부동건은 스스로를 어떻게 납득할까?’ ‘결국 속아서 살아온 날이 우스운 바보일 뿐...’ 조진숙은 아무 말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애틋한 사랑인데,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 서류들, 가져가.” “나 다른 뜻은 없어.” 부동건은 조진숙의 단호한 태도에 살짝 주춤했지만, 곧장 다시 설득을 시도했다. “네가 아직 날 원망하고 있다는 거 알아. 그동안... 혹시 네가...” “착각하지 마.” 조진숙은 부동건의 말을 끊었다. 더 이상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부동건은 한 발 더 다가섰다. “하지만 네가 이걸 받지 않는다면, 결국 날 아직도 원망하고 있다는 뜻 아니야?” 조진숙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가슴 깊숙이 가라앉은 감정이 불쑥 떠오르는 듯했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감정을 정리한 뒤,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부동건은 말없이 서류를 정리하더니, 숙련된 손놀림으로 만년필을 열어 조진숙 앞에 내밀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대답이었다. “후회할 거였으면, 애초에 여기 오지도 않았어.” 이번엔 조진숙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펜을 들어, 서류 맨 아래에 단호한 필체로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부디 이 선택을 후회하는 날이 오지 않길 바라.” 부동건은 서류를 덮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마음속에 짓눌려 있던 무언가가 비로소 내려앉는 듯했다. 그는 문득 나직이 말했다. “이제야... 후회한들, 이제 돌아갈 길도 없어.” 조진숙은 그 말에 가슴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끝내 시선을 돌렸다. 담담한 표정 속에 모든 감정을 삼키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 “이건... 다 정해진 운명이야.” ‘운명의 장난...’ ‘어쩔 수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제 뜻대로 하게 해주십시오.” 부동건의 태도가 단호했다. 이를 지켜보던 부해철이 더 이상의 말은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미 네가 마음을 정했다면, 내가 더 이상 뭐라 할 수도 없지. 다만, 앞으로 그 여자를 내 앞에 데려오지는 마라. 네가 어떻게 살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 “그리고...” 부동건이 무슨 말을 더 하려 했지만, 부해철은 손을 휘저으며 등을 돌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뒷모습만이 남았다. ‘그렇게까지 반대할 줄은 몰랐네...’ 부동건은 묘한 기분으로 그 자리에 멈춰섰다. ...설날 온 나라가 한 해의 끝을 보내고,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 예전에는 늘 조진숙과 상혁 모자가 함께 보내던 명절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달랐다.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의 본가가 가까운 데다, 명절이 지나면 하연과 상혁의 약혼식이 있을 예정이었다.그래서 조진숙이 제안했고, 양가 가족들이 함께 부씨 가문에서 설날 저녁을 보내기로 했다. 그 덕분에 조진숙은 하루 종일 분주하게 준비에 매진했다. 그러나 제사가 끝나자마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진숙아, 새해 복 많이 받아.” 부동건이 어색한 미소를 띠며 낮은 자세로 인사를 건넸다. 평소 같았으면 송혜선과 함께 명절을 보낼 사람이, 오늘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조진숙에게는 뜻밖이었다.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여긴 웬일이죠?” “잠깐 들렀어, 당신한테 할 말도 있고 해서.” 조진숙은 그의 시선을 따라 문득 집안 분위기를 둘러보았다. 송혜선이 이곳에 들어온 이후, 부씨 가문 본가는 한 지붕 아래에서도 철저하게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있었다.그 경계는 뚜렷했고, 불필요한 마주침은 없었다. 부동건이 송혜선과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이후, 둘은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만약 이번 일이 없었다면, 조진숙 역시 이미 오래전에 이 집을 떠났을 터였다. “들어와.
송혜선은 급히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했다. “아무래도 남준이가 좀 늦나 봐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는 게 어떨까요?” 부동건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얼굴을 굳혔다. “말 같지도 안은 소리를 하고 있어! 오늘 같은 날에, 시간 개념도 없이 늑장을 부려.” 송혜선은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남준이 오면 꼭 제가 주의를 줄게요.” “교육 똑바로 시켜. 좀 상혁이 하는 것에 반만큼이라도 신중했으면, 나도 그 녀석한테 좀더 잘해 줬을 거야.” ‘또 시작이군.’ 송혜선은 속이 쓰렸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오면 오는 거고, 못 오면 어쩔 수 없지.” 부동건은 한 치의 여지도 주지 않고 단호하게 내뱉곤,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어서 남준이를 찾아와! 오늘 제사에 참석하지 못하면, 앞으로 나를 어머니라고 부를 생각은 하지도 마.” 송혜선의 가슴이 격하게 오르내렸다. 이 모든 노력들이 사소한 실수 하나로 무너질 순 없었다. ...부씨 가문은 제사에 있어서 철저한 예법을 중시했다. 다행히도 상혁은 부동건과 수년간 제사를 지내며 익숙해져 있었고, 모든 절차를 한 치의 오차 없이 진행했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 역시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건아, 상혁이가 있어서 네 대가 끊길 걱정은 없겠구나.” “앞으로 부씨 가문의 대업을 상혁이가 이어간다면, 우리 늙은이들도 한시름 덜겠어.” 부동건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야 물론이죠. 상혁이는 부씨 가문의 기둥이 될 인재입니다.” 상혁은 겸손한 태도로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앞으로도 많이 지도해 주십시오.” “어디 우리가 너희 젊은이들에게 배우는 게 더 많지!” “...”제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부남준이 느지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동건은 남준을 보자마자 눈빛이 차갑게 식었지만, 일단 감정을 누르고 말했다.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어서 와서 절부터 올려라.” 남준은 살짝 눈썹을
최씨 가문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부씨 가문의 본가는 싸늘하고 조용했다.예년과 다름없이, 설날이 되면 부동건은 집안의 남자들과 함께 조상들에게 제사를 올려야 했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른 아침부터 송혜선은 핸드폰을 손에 쥐고 부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연결음만 울릴 뿐, 남준은 끝내 받지 않았다. ‘이 녀석은 정말이지, 사람 속을 태우는 재주가 있다니까.’ 송혜선의 얼굴에 점점 초조한 기색이 드러났다. 옆에서 지켜보던 조봉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때? 아직도 전화를 안 받아?” 송혜선은 짙어진 눈매로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 녀석, 정말 사람을 신경 쓰게 만드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조봉규는 부드러운 말투로 그녀를 달랬다. “혹시 무슨 사정이 있어서 늦는 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너무 걱정 마십시오. 남준이가 철없는 아이도 아니고.” ‘철없는 아이가 아닌데 이러겠어?’ 송혜선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최대한 감정을 눌렀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이 원래부터 남준이를 못마땅해했는데. 이런 중요한 제사까지 빠지면, 분명 뒷말이 나올 거야.” 그녀의 말투에는 이미 불안과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그러는 사이, 두 사람이 작은 응접실에서 나와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그때, 정면에서 다가오던 부동건과 마주쳤다. 부동건은 갓 외투를 정리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송혜선과 조봉규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 손동작이 살짝 느려지며 묘한 시선을 던졌다. “조 선생, 올해도 그렇게 혜선이 옆에 딱 붙어서 열심히 잘 보살펴 주세요.” 그 말 한마디에, 분위기가 묘하게 변했다.조봉규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회장님, 제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부동건은 묘한 눈빛을 유지한 채, 덤덤히 말했다. “혜선이가 아이를 무사히 낳으면, 그에 대한 보상도 충분히 해줄 테니
두 집안이 한데 모여 북적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이런 귀한 순간을 마음껏 즐기며 보내다 보니, 어느덧 설날 전날이 되었다. 모두 함께 전용기를 타고 F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설날이 밝았다. 올해는 오랜만에 최씨 가문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인 데다, 기쁜 소식까지 겹친 한 해였다. 그 덕분인지 최동신은 평소보다 더욱 설 준비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최씨 가문의 본가는 분주했다. 집사와 고용인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저택 곳곳을 장식했다. 새빨간 복주머니와 길상 문양이 새겨진 장식들이 하나둘 자리 잡았고, 정원에는 화려한 등불이 걸리며 설 분위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하연이 계단을 내려오자, 기다렸다는 듯 최하성이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 “하연아, 새해 복 많이 받아라.” 그러면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하연은 두 눈을 반짝이며 얼른 봉투를 받았다. “와! 이렇게 두꺼워요? 하성 오빠 최고!” 그때, 계단 위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있다.” 최하경이었다. 그 역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들고 내려왔다. “작년, 재작년 다 해외에 있어서 못 챙겨줬잖아. 그래서 올해 한꺼번에 더 두둑이 넣었다.” “와! 이건 더 두껍잖아요! 이러다 손목 나가겠어요!” 하연은 연달아 두 개의 두툼한 봉투를 받아 들고, 각각 한쪽 팔을 오빠들에게 걸었다. “오빠들 있어서 진짜 좋아요!” 최하성, 최하경 둘 다 서로를 바라보며 우애가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그리고 최하민과 예아름이 나란히 들어왔다. 추운 바깥 공기를 뚫고 들어오자마자, 하민은 아름의 목에서 목도리를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그는 안쪽에서 떠들썩하게 웃고 있는 세 남매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집이 이렇게 활기찬 게 얼마 만이에요!” 아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러게요. 앞으로 더 행복한 일만 가득할 거예요.” 하민은 아내의 허리를 가볍
그리곤 진심을 담은 남자의 목소리가 멈추었다. 하지만 하연의 눈가에는 이미 촉촉한 눈물이 맺혀 있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글귀, 한 글자 한 글자마다 상혁이 진심을 담아 전한 마음이 느껴졌다. 이건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상혁이 하연에게 건네는 가장 솔직하고 깊은 속마음이었다. 그때, 뒤에서 들려온 부드러운 목소리. “하연아.” 하연은 본능적으로 뒤돌아섰다. 그리고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숨이 멎었다. 아까까지의 편안한 차림은 온데간데없이, 눈앞의 상혁은 새하얀 수트를 차려입고 있었다. 반듯하게 맨 보타이, 정갈하게 빗어 넘긴 머리, 그리고 손에 들린 한 다발의 꽃. ‘동화 속에서 막 나온 왕자님 같아.’ 하연은 멍하니 서서 남자를 바라보았다. 상혁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하연의 가슴이 터질 듯이 뛰었다. 남자의 시선, 남자의 걸음, 그가 다가오는 순간의 모든 것이 하연의 가슴속 깊이 새겨졌다. 마침내, 상혁은 하연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은 마주 섰고, 서로의 눈동자에 상대방의 모습이 담겼다.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떨림이 전해지는 듯했다. 조용한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상혁이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꽃을 건넸다. 남자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하연아...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말이 끝나자, 그는 왼발을 살짝 앞으로 내디디더니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작은 벨벳 상자를 꺼냈다. 이어서 뚜껑을 열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혁의 눈빛에는 단 하나의 감정만이 가득 차 있었다. 바로 사랑이었다. “한때 나는 사랑이란 영화 속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널 만나고, 그게 아니란 걸 알았어.” “사랑은 영화 속 한 장면이 아니라,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서로를 아껴주고, 이해하고, 감싸주는 거라는 걸.” “그래서 나는... 너와 함께, 그런 사랑을 하
둥근 형태의 테라스는 새하얀 난간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위로 푸릇푸릇한 덩굴식물이 감싸고 있었다. 연둣빛 야자수 잎 사이로 작고 앙증맞은 꽃들이 군데군데 피어 있었고, 은은한 향기가 바람에 실려왔다. 테라스 중앙에는 우아한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이미 차와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하연아, 우리 저기에 앉자.” 상혁은 하연의 손을 잡고 테이블로 이끌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직접 꽃차를 따라주었다. 하연은 손으로 찻잔을 감싸고 조심스레 한 모금 머금었다. 부드러운 향이 입안 가득 퍼지며 깊은 여운을 남겼다. “이거 무슨 차예요? 향이 너무 좋아요.” “목련차야. 테라스 뒤쪽에 한가득 피어 있는데, 한번 가볼래?” ‘목련꽃이 이렇게 가까이에서 피어 있다니.’ 순백의 꽃잎이 겨울을 이겨내고 피어나는 모습이라니,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연은 찻잔을 내려놓고 기대에 찬 눈빛을 보냈다. “가보자!” 둘은 테라스를 나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하얀 원형 아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너머로 눈부신 꽃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우와...’ 하연은 숨을 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순백의 목련이 바람에 살랑이고, 보랏빛 라벤더가 넘실댔으며, 튤립이 형형색색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각종 귀한 품종의 꽃들이 경쟁하듯 피어나고 있었고, 이 모든 아름다움이 한데 어우러져 마치 꿈 속을 걷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상혁은 걸음을 멈추고 어디선가 꽃으로 엮은 화관을 꺼내더니, 조심스레 하연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하연아, 여기는 너만을 위한 꽃밭이야.” 놀란 듯 하연이 눈을 깜빡이며 상혁을 올려다보았다. ‘설마...?’ 여자의 가슴이 터질 듯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상혁은 하연의 손을 잡고, 꽃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길을 따라 걷자 길이 점점 넓어졌고, 상혁과 함께 그 길을 따라 가자 점점 하연의 시야가 트였다.
고개를 돌려 반짝이는 눈빛으로 하연이 상혁을 바라보았다. “여긴 어디예요?” 상혁은 여자의 시선을 따라 앞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때 버려졌던 작은 섬인데. 나중에 내가 사들였어.” 그는 자연스럽게 하연의 손을 잡으며 손가락을 맞물렸다. “어때? 마음에 들어?” 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네, 좋아요!” ‘좋다니 다행이야. 오랜 시간 공들여 준비한 보람이 있었네.’이 순간을 상혁이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그는 하연의 손을 살짝 당기며 말했다. “일단 우리 아침부터 먹자. 그리고 이따가 바닷가에 데려가 줄게.” “좋아요.” 이 섬은 남태평양 깊숙한 곳에 자리한 작은 외딴섬이었다. 한때는 몇 년 동안 방치되어 잡초가 무성하고 황폐했지만, 우연한 기회에 상혁이 이곳을 매입해 전문가에게 맡겼다. 불과 2년 만에 섬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집도 짓고, 길도 만들고, 섬 전체가 아름답게 정돈되었다. 한낮이 되자 햇살이 섬을 따스하게 감쌌다. 하연과 상혁은 손을 잡고 깔끔하게 정돈된 자갈길을 따라 걸었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따뜻했다. 바람이 불어오자 하연의 원피스 자락이 살짝 날렸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멀리 두었다. 눈앞에는 하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고, 곱디고운 모래가 햇빛 아래 반짝이고 있었다. “저기 봐요! 야자수가 있어요!” 하연은 설레는 듯 조심스레 뛰어나갔다. 상혁은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그녀가 가는 곳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푸른 하늘 아래, 키가 큰 야자수들이 가지런히 줄지어 서 있었다. 커다란 잎사귀들이 바닷바람을 타고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마치 오랜 세월을 품고 바다의 이야기를 속삭이는 것 같았다. 하연은 신발을 벗고 모래 위에 발을 내디뎠다. 발끝을 감싸는 모래가 부드럽고도 간질거려, 묘한 전율이 발끝에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