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연은 멍하니 핸드폰만 바라보며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잊어버렸다.“아가씨, 생강차예요. 따뜻할 때 드세요.”김애령의 목소리는 깊은 생각에 빠진 하연을 현실로 끌어냈다. 그제야 하연은 마음을 가다듬으며 대답했다.“여기 놔줘요.”“네, 아가씨.”김애령이 테이블 위에 생강차를 내려놓고 떠나려던 그때, 하연은 갑자기 불러세웠다.“이모님, 누군가 갑자기 연락이 안 닿는 거 혹시 뭔 사고라도 난 걸까요?”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하연을 보자 김애령은 그제야 상황을 대충 짐작했다.“혹시 부 대표님 때문에 그러세요?”“아니, 그게...”자기 속마음을 들킨 하연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그때 김애령이 웃으며 설명했다.“아가씨가 요즘 매일 부 대표님 얘기를 입에 달고 사셨잖아요. 그러니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 있어야죠.”하연의 얼굴은 순간 더 빨개졌다.“무, 무슨 소리예요!”“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부 대표님은 아마 일 때문에 당분간 연락이 안 되는 걸 거예요. 아마 그 일이 해결되면 맨 처음 아가씨께 연락할걸요?”“정말 그럴까요?”하연은 살짝 확신이 없는 말투로 되물었다.그것도 자기가 상혁을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지 눈치채지 못한 채로.“당연하죠.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차 드세요. 이따가 기사님 오면 바로 출근해야 하잖아요.”“네.”덕분에 하연의 마음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다.“알겠어요, 고마워요 이모님.”김애령이 웃으며 방을 떠나자 하연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연락처를 뒤져봤다.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상혁의 소식을 물어 볼만한 사람이 없었다.‘내가 상혁 오빠에 대해 너무 아는 게 없나?’그 뒤로, 하연은 오전 내내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심지어 태훈이 똑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른다.“최 사장님, 이 프로젝트 어때요? 승인할까요?”몇 번의 질문 끝에 하연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뭐라고?”태훈은 난감한 듯 안경을 밀어 올리더니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하연에게 건넸다.“사장님, 오늘 상태가 좀 이상한데요?”“
하연은 그제야 하성의 의도를 파악했다.“그러니까 여정 씨를 우리 DS 엔터에 합류시키겠다는 거예요?”“응. 맞아.”“아...”하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사실 이제 막 설립된 신생 그룹이 안여정처럼 이미 데뷔하고 인기까지 얻은 연예인과 계약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도 그럴 게, 연예인이라는 직업이 원래 인기로 돈 벌어 먹고사는 직업이니까...때문에 여정이 DS 그룹에 기꺼이 합류한다는 게 놀라운 일이다.“혹시 저 안 반겨 주시나요?”여정이 농담조로 말했다.“아니요. 그럴 리가요. 여정 씨가 우리 엔터에 합류하면 저희야 영광이죠.”“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여정은 눈을 들어 하성을 흘긋거렸다. 그 눈빛은 하연에게 너무나도 익숙했다.때문에 하연은 단번에 여정의 속내를 알아버렸다.‘목적이 따로 있었군.’하연이 뭐라 말하려던 그때,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 이에 하연은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꺼내 바로 확인했다. 하지만 액정에 뜬 전화번호를 본 순간 기대에 찬 눈빛은 다시 실망감으로 뒤덮였다.약 몇 초 지난 뒤에야 하연은 수신 버튼을 눌렀다.“하연아, 지금 회사야?”전화 건너편에서 가흔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신 디자이너님이 웬일로 나한테 다 전화를 했을까?”하연은 말하면서 하성과 여정을 흘긋거렸다.“너희 회사에서 DS 엔터를 설립했다며? 연예인들 많이 끌어들였을 테니 스폰서가 필요하지 않아?”“뭐야? 평소에 연락도 잘 안되더니 우리 회사 일에 빠삭하네?”“VERE가 마침 최근에 협찬을 고려해 보고 있거든. 여은과 얘기하다가 마침 네 소식 들어서 전화해 봤어. 우리 만나서 얘기할까?”“응, 좋지. 나 회사에 있어. 정 실장더러 너 데리러 가라고 할게.”“필요 없어. 다 큰 어른이 길 하나 못 찾을까 봐? 나 주차장에 차만 세워놓고 바로 올라갈게.”전화를 끊은 하연은 하성을 흘긋거렸다.“오빠, 가흔이 여기로 온대요.”가은의 이름을 듣고도 하성의 표정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그럼 너희끼리 얘기 나눠.
“너 대체 무슨 생각 하는 거야?”“오빠, 혹시 여정 씨한테 다른 마음은 없어?”하성은 그제야 하연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아채고는 입꼬리를 올렸다.“최하연, 너 이제 오빠 사생활도 다 캐네?”하성이 제 질문을 교묘하게 피하자 하연은 조급한 듯 따져 물었다.“오빠 설마 여정 씨 좋아하는 거예요?”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하성이 손가락으로 하연의 이마를 튕겼다.“너도 참, 무슨 생각 하는 거야? 여정은 그냥 후배야. 그 이상은 절대 아니야.”“그러면서 성 빼고 불렀잖아. 오빠가 거짓말하는지 알 게 뭐야.”하연은 아픈 듯 제 이마를 감싸 쥐며 투덜댔다.“최하연! 내가 어떻게 말해야 믿을 건데?”“저야 당근 오빠 믿죠. 하지만 여정 씨는 아닐걸요.”여정이 제 오빠를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 이미 똑똑히 봤으니까. 그 눈빛은 분명 좋아하는 사람을 보는 눈빛이다.“오빠...”“그만,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하연은 눈알을 데구루루 글리며 한참을 생각하다가 끝내 마음속에 묻고 있던 말을 꺼냈다.“오빠 혹시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그 말을 꺼낸 순간 공기 속에 침묵이 흘렀고, 하성의 얼굴에도 부자연스러운 기색이 스쳐 잠깐 스쳐 지났다. 하지만 하성은 이내 그 감정을 숨긴 채 덤덤하게 대답했다.“없어.”너무나도 단호한 두 글자였다.하연은 그 순간 속으로 가흔을 대신해 한숨을 쉬었다. 그동안 제삼자로서 하연과 친구들 모두 가흔의 마음을 지켜봐 왔다.하지만 하필 당사자인 하성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으니...“하연아, 다른 일 없으면 난 갈게.”“네. 가요.”그 말을 끝으로 하성은 곧바로 사무실을 나섰다. 그러다 마침 가흔과 맞닥뜨리고 말았다.하성은 눈을 가늘게 접으며 걸음을 멈추더니 가흔을 빤히 바라봤다.그때 가흔이 먼저 하성에게 인사했다.“오빠도 여기 있었네요?”“하연이 찾으러 왔어?”“네.”가흔은 대답하면서 무의식적으로 가방끈을 꽉 움켜쥐었다.“그럼 전 들어가 볼게요.”이윽고 짤막한 한마디를 남긴
여정은 그 말에 화내는 기색 하나 없이 오히려 관대하게 말했다.“괜찮아요, 선배님 일 봐요. 저 혼자서 둘러봐도 되니까.”여정이 그렇게 말하자 하성은 오히려 미안했는지 먼저 제안했다.“내 매니저 붙여줄 테니까 필요한 건 뭐든 말해.”“네, 선배님.”하성이 떠나자 여정의 얼굴에 걸렸던 미소는 싹 사라졌다. 이윽고 고개를 돌려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눈을 번뜩였다....사무실 안.하연은 가흔을 보자 다급하게 일어섰다.“네가 갑자기 오다니 너무 놀라운데?”“길가다 들른 거야.”가흔은 싱긋 웃으며 가방을 내려놓더니 이내 눈을 내리깔며 물었다.“하성 오빠가 여기 왜 있어?”“아, 오빠도 너처럼 나한테 힘 보탠다고 DS 엔터랑 계약했어.”“하성 오빠가 DS 엔터랑 계약했다고?”가흔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응, 우리 엔터의 첫 번째 연예인이야.”하연은 가흔이 하성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바로 말을 보탰다.“VERE 주얼리가 우리 회사에 협찬한다면 모델 할 사람은 하성 오빠뿐이겠네...”“아.”가흔의 짤막한 대답에 하연은 앞으로 다가가 가흔의 손을 잡았다.“가흔아, 난 사실 네가 우리 오빠한테 네 마음 고백하는 것도 좋다고 봐.”가흔은 눈이 어두워지더니 이내 입을 삐죽거렸다.“아니야. 가끔 드러내지 말아야 할 감정이란 것도 있어. 차라리 지금처럼 이렇게 남는 것도 좋아.”“하지만 말 안 하면 오빠가 영원히 모를 텐데.”“모르는 게 차라리 나아.”가흔은 눈을 들어 하연을 바라봤다.“사실 두 사람 대화 밖에서 들었어.”“오빠 말 믿지 마. 오빠는 그냥 아닌 척하는 거야. 그게 진심이 아닐지도 몰라.”하연은 하성에 대해 잘 알기에 지난 몇 년 동안 자기 오빠가 가흔에게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을 리 없다고 확신했다.“됐어. 감정은 강요할 수 없어. 하늘의 뜻에 맡겨야지.”약간 허탈하기도 하면서도 개의치 않다는 듯 말하는 가흔의 모습에 하연은 걱정이 앞섰다. 가흔의 말대로 감정은 강요할 수 없지
“좋아. 그렇다면 바로 계약서 작성할 테니까 문제없으면 계약하자.”“응.”“VERE에서 곧 새로운 시리즈를 런칭할 예정인데 이번 시리즈의 모든 작품 모델은 DS 소속 아티스트한테 모델을 맡길게.”하연은 잠깐 고민하다가 대답했다.“그렇다면 우리 셋째 오빠랑... 안여정 씨한테 맡겨 줘. 우리 회사 소속 연예인 중에 인기 있는 사람은 아직 이 두 명뿐이니.”가흔은 시선을 거두며 무심코 대답했다.“그래, 이번 시즌 두 사람의 주얼리 모델은 우리 브랜드에 맡겨줘.”“내가 나중에 매니저랑 따로 상의해서 알려줄게.”“그래.”일 얘기를 마친 뒤, 하연은 직접 가흔을 회사 로비까지 데려다줬다. 하지만 하필이면 여정과 마주쳤다.여정은 가흔을 위아래로 살피더니 먼저 하연에게 인사했다.“사장님, 안녕하세요.”하연은 결국 두 사람을 서로 소개해 줬다.“여정 씨, 이분은 VERE 주얼리 신가흔 대표예요. 앞으로 여정 씨한테 VERE 주얼리 협찬해줄 거예요.”가흔이 VERE 주얼리 대표라는 말에 여정의 눈은 반짝 빛났다.VERE 주얼리는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주얼리 브랜드이니 그럴 만도 했다.VERE 주얼리는 독특하고 세련된 오리지널 디자인만 추구하기에 젊은 사람들에게 매우 인기 있다.여정의 눈에 드리웠던 경멸은 어느새 사라졌다. 심지어 먼저 나서서 가흔에게 인사했다.“신 대표님, 안녕하세요. 저는 DS 소속 연예인 안여정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가흔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예의를 차리는 동시 약간의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여정과 말을 섞지 않고 하연에게 말을 걸었다.“하연아, 나 먼저 갈게. 세부 사항은 나중에 따로 예기해.”“그래.”가흔을 배웅하고 나니 여정이 궁금한 듯 불쑥 나타나 말했다.“사장님, 신 대표님과 사이가 좋아 보이네요.”“어릴 때부터 친구라 각별해요.”여정은 그 말에 흠칫 놀랐다.가흔이 하연과 사이가 이렇게 좋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으니.‘어쩐지 하성 선배가 특별하게 대한다 했어. 가운데 최 사장님이 끼
하연은 제 앞에 서 있는 상혁을 위아래로 훑어봤다.그러다가 상혁이 멀쩡한 걸 확인하고 나서야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삐죽거렸다.“지난 이틀 동안 어디 갔어요? 연락도 안 되고. 난 또 오빠가...”하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상혁은 손을 뻗어 하연을 품에 끌어안았다.익숙한 포옹에 하연은 순간 안심되었다. 이렇게 상혁의 품에 안겨 있으니 입가에서 맴돌던 말도 다시 삼켜버렸다.그때 상혁이 뜨거운 숨결을 내뱉으며 하연의 귓가에 속삭였다.“미안해, 많이 걱정했어?”사실 BN 그룹 본사 일 때문에 상혁은 그동안 F국에서 회사 일을 처리하느라 연락도 못 했다.하지만 하연의 부재중 전화를 확인하자마자 바로 귀국했고, 도착하자마자 이곳으로 달려왔다. 한시라도 빨리 하연을 보기 위해서.그때 하연이 입을 삐죽거리며 삐진 듯 말했다.“왜 전화도 안 받고 문자도 안 해요? 내가 얼마나...”“응, 알아. 다음에는 절대 이러지 않을게.”눈을 들어 상혁을 훑어보던 하연은 피곤함이 역력한 상혁의 얼굴을 보자 순간 마음이 아팠다.“오빠, 혹시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여기로 달려왔어요?”“응, 네가 걱정할까 봐. 그리고 화낼까 봐 직접 사과하러 왔지.”“그럼... 아직 휴식도 못 했겠네요?”상혁은 하연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네 얼굴 보니까 피곤함이 싹 사라졌어.”“이거 놔요. 여기 회사예요.”하연은 다급히 상혁을 밀어냈다. 하지만 어깨에 손이 닿는 순간 상혁은 무의식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그걸 바로 눈치챈 하연은 걱정스럽게 물었다.“혹시 다쳤어요?”하연은 걱정 가득한 말투로 물어보며 당장이라도 상혁의 어깨를 확인하려고 했다. 그러자 상혁은 하연의 손을 덥석 잡았다.“걱정할 거 없어, 나 괜찮아.”하연은 상혁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방금 분명 살짝 밀었는데 눈살을 찌푸릴 정도라면 상처가 심할 게 뻔했다.“어디 보여줘 봐요.”하연은 손을 뻗으며 완강한 태도로 말했다. 아까 어깨를 만지면서 붕대가 감겨 있는 걸 봤기에 하연은 제 생각을 더
말이 끝나기 바쁘게 상혁은 하연을 제 품에 와락 껴안으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그래.”상혁과 그렇게 꼭 붙어 있으니 하연은 요란하게 북을 치는 제 심장을 더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그 순간 하연은 도망치듯 상혁의 품에서 빠져나오려 했다.“구급상자는 어디 있어요? 상처 치료해 줄게요.”“괜찮아. 의사가 처리했어.”“오빠 상처 터진 것 같아서 그래요.”하연은 말을 마치자마자 뒤돌아 구급상자를 찾기 시작했다. 어디 있는지도 모른 채 여기저기 찾아 헤매는 하연을 상혁은 미소를 머금은 채 바라보다가 얼른 일어나 반대편 캐비닛으로 걸어갔다.“이 안에 있어.”하연은 머쓱해서 얼른 앞으로 가 구급상자를 받아 들었다.“앉아요. 약 갈아줄게요.”상혁은 고분고분 자리에 앉아서는 깊은 눈동자로 하연을 빤히 쳐다봤다.하연은 얼른 구급상자를 열어 도구를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상혁의 상처를 치료해 주기 시작했다. 하연의 동작은 매우 가벼웠고 동작 하나하나 매우 조심했다. 그러다 붕대를 떼어내자 하연은 붕대 아래 상처를 똑똑히 확인했다.딱 봐도 날카로운 칼날에 질린 듯한 상처였다.하연은 일순 눈살을 찌푸렸다.‘이건 절대 보통 상처가 아니야.’“오빠, 대체 어쩌다가 다친 거예요?”상혁은 하연이 걱정하는 게 싫어 덤덤하게 말했다.“별일 아니야, 작은 사고가 있었어. 괜찮아.”끝까지 말하지 않는 상혁을 하연은 더 이상 다그쳐 묻지 않았다.“앞으로 조심해요. 또 이렇게 다치지 말고.”그러고는 면봉에 요오드를 묻혀 상처를 조심스럽게 처리하기 시작했다.상처에 새로운 붕대를 감은 뒤 하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제야 너무 긴장한 탓에 자기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는 걸 발견했다.“약 제때에 갈아야 빨리 낳을 수 있어요.”“그래, 알았어.”말을 마친 하연은 구급상자를 처리하기 시작했고 그사이 상혁은 어디론가 전화했다.“5분 뒤에 내 개인 별장으로 와.”“상혁 오빠, 누구랑 전화했어요?”옆에 있던 하연은 의아한 듯 물었다.그러자 상혁
상혁은 곧바로 피터에게 말했다.“내 일정은 앞으로 숨김없이 하연한테 공유해. 사실대로 알려줘.”그 말이 떨어진 순간 피터의 눈에 놀라움이 스쳐 지났다. 상혁은 신분과 배경도 있고 그동안 비즈니스를 하면서 적도 많이 생겨 안전을 위해 일정은 늘 비밀로 했었다.게다가 상혁을 따라 일한 수년 동안 피터는 늘 뒤에서 정체를 드러낸 적 없었다. 그런데 오늘 상혁이 저를 눈앞의 여자에게 소개해 줬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이로써 상혁이 하연을 백 퍼센트 믿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네, 대표님.”상혁의 명령에 피터는 늘 의심을 품지 않기에 상혁이 하연을 백 퍼센트 믿는다니 그 역시 하연을 백 퍼센트 믿기로 했다.“그래, 가 봐.”“네, 대표님.”피터가 떠난 뒤 상혁은 하연의 손을 잡았다.“하연아, 그동안 내가 특별히 처리해야 할 문제가 있었어.”하연도 이제는 어느 정도 눈치챘기에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그러고는 눈을 들어 상혁을 바라봤다.“알았어요. 다만 앞으로 절대 다치지 마요.”“그래.”상혁은 하연의 볼을 빤히 바라봤다. 그 순간 공기 속에 야릇한 분위기가 흘렀고, 그걸 인지한 하연은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치며 도망쳤다.“오빠, 저 이제 집에 갈게요.”하지만 일어서기도 전에 상혁이 하연의 팔을 잡아당겼다.“늦어서 위험해.”“네?”상혁의 말에 뭔가 생각난 듯 하연은 얼굴을 붉혔다.“그건... 안 되지 않나요?”상혁은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싱긋 웃었지만 함부로 선을 넘으려 하지는 않았다. 이제야 하연이 조금씩 저를 받아들이고 있는데 급할 필요 없으니.“네가 안방 써, 내가 객실에서 잘게. 오늘 하루만 여기서 지내. 늦은 시간에 너 집에 돌려보낸 걸 어머니가 알면 또 뭐라 하셔.”조진숙을 방패막이로 꺼내자 하연은 마지못해 동의했다.“그래요, 그럼 저 먼저 올라가서 쉴게요. 잘 자요.”하연은 뒤돌자마자 총총걸음으로 도망쳤다. 마치 뒤에서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헐레벌떡 위층에 올라온 하연은 안방 문을 쾅 닫아
“뭐 하는 거야? 빨리 이 주스를 연회장으로 가져가!” 홀 매니저가 다가와 살짝 꾸짖었다. 여자는 급히 고개를 숙이며 질투로 번들거리던 눈빛을 감추고는 얌전히 대답했다. “네, 바로 가겠습니다.” 다영은 태어나서 가사일 한 번 손댄 적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트레이를 들고 발걸음을 옮겼다. “잠깐!” 매니저가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 “너 신입이야? 본 적이 없는 얼굴인데?” 다영의 심장이 두근거리며 가슴 속에서 송혜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 고향 친척 중 하나가 DS그룹에서 일하고 있어. 오늘 밤엔 그 사람 신분을 쓰는 게 편할 거야.” 침착함을 되찾은 다영은 고개를 들어 냉정하게 대답했다. “저는 고객지원부의 진미입니다. 연회 인력이 부족해서 임시로 지원 나온 거예요.” 매니저는 그녀의 명찰을 한 번 흘깃 본 뒤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트레이를 건네받았다. “신입이라면 전면에 나가면 실수하기 쉬워. 내실에서 돕는 게 좋겠어.” “알겠습니다.” 매니저가 떠난 뒤, 다영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다시 연회장을 바라봤을 때, 앞줄에 앉아 있던 하연과 상혁은 이미 모습을 감췄다. 2층 휴게실 안. 원신명은 한 손에 신선한 오렌지 한 봉지를, 다른 손에 포장을 뜯지 않은 녹즙기를 들고 들어왔다. “대표님, 주문하신 오렌지와 녹즙기입니다.” 원신명은 궁금한 듯 물었다. “대표님, 직접 오렌지 주스를 만드시는 건가요?” 상혁은 짧게 대답했다. “원 비서, 거기 두고 가면 돼.” 원신명은 얼른 다가가 도움을 자청했다. “대표님, 이런 건 제가 할게요.” “와이프가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싶다는데, 남에게 맡길 수는 없지.” ‘와이프’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왔고, 마치 그 단어를 그의 마음속에서 수없이 되뇌었던 것처럼 익숙했다. 원신명은 곧 깨달았다. ‘아, 대표님이 직접 최하연 씨를 위해 주스를 준비하시고 싶은 거구나!’ “원 비서, 연말인데도
최하성은 오늘 검정색 정장을 입고 등장했다. 그의 차가운 분위기와 단정한 모습은 단번에 모든 직원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최 대표님!”하성을 마주친 직원들은 공손하게 인사했다. 하성은 살짝 고개를 끄덕일 뿐, 시선을 주지 않고 빠르게 행사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오늘 저녁 만찬은 매우 풍성했다. 동서양의 요리가 조화를 이루며 대부분 직원들의 입맛과 식습관을 세심하게 고려한 모습이었다. 준비에 꽤 공을 들인 것이 분명했고, 결과적으로 반응도 좋았다. 연말 만찬이 시작되기 전, 하성은 DS그룹의 대표이사로서 무대에 올라 인사말을 했다. 하성은 차분한 걸음으로 무대에 오르며, 그의 존재감은 단번에 분위기를 압도했다. 그가 화려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단 몇 마디 간결한 말로도, 관중석에서는 뜨거운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번 연말 행사는 생중계되고 있었으며, 하성이 등장하자마자 팬들과 네티즌들이 빠르게 몰려들었다.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시청자 수가 십만 명을 돌파했다. [최하성 씨, 오랜만이에요! 보고 싶었어요!][연예계에 최하성이 없으니 허전한 기분이에요. 최하성 씨, 돌아와 주세요!][다들 동감! 언제쯤 복귀할 수 있는 거죠?][복귀 요청 99%!!][...] 팬들의 댓글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하성의 인기는 생중계 플랫폼 순위에서도 단연코 1위를 차지했다. 무대 아래에서 생중계를 담당하던 진행자는 이 뜨거운 열기를 놓치지 않고 하성에게 다가갔다. “최 대표님, 생중계 채팅창에 팬들이 사장님의 새해 계획에 대해 굉장히 궁금해하고 있어요. 오늘 이 특별한 밤에 팬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될까요?” 하성은 미소를 머금으며 카메라를 응시했다. 그 순간, 생중계 채팅창은 순식간에 폭발했다. 선물 아이콘이 화면을 뒤덮었고, 댓글은 끊임없이 새로 고침 되었다. “안녕하세요, 하성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저와 DS그룹을 응원해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도 DL 그룹
“어머님, 정말로 부 회장님과 결혼하세요?” 이 얘기는 다영에게 있어 꽤 충격적이었다. 세간에서는 송혜선과 부동건의 관계를 두고 여러 말이 떠돌았고, 그중 가장 많이 들려온 것은 송혜선이 ‘첩’이라는 점이었다. 한때 정지철 부인도 이 사실을 꽤 꺼려했던 터라, 다영은 송혜선이 이렇게 대놓고 정식으로 자리 잡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언제 결혼 승낙을 받으신 거예요?” 송혜선은 이미 불룩해진 배를 가볍게 쓸며, 깊은 눈빛 속에 숨겨진 야망을 드러냈다. “부회장님께서 말씀하시길, 새해도 지나고 이제 곧 아이가 태어날 테니 우리 모자에게 반드시 정당한 신분을 보장해 주시겠다고 하셨어.” “그러니... 다영아, 우리 남준이를 믿어야 해. 지금은 잠시 밀려난 상황이지만,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잖니?” 다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더욱 굳게 다졌다. “어머님, 걱정 마세요. 저는 언제나 남준 씨를 도울 거예요.” 송혜선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더욱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그래야지. 남준이도 절대 너를 저버리지 않을 거야.” 그러다 두 사람이 화제를 돌리며 덧붙였다. “지금 부 회장님이 부상혁을 중시하며 DL그룹의 운영을 맡긴 데는 이유가 있어. 결국은 부씨 가문의 장손이라는 명분 때문이지.” “하지만, 임신 초기에는 변수가 많아. 무슨 사고라도 생기면, 어떻게 되겠니?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잖니?” “만약 그 아이가 사라지면, 부상혁 쪽의 지렛대도 없어진 셈이니 남준이한테 분명 유리한 상황이 될 거야. 그렇지 않겠니?” “...” 다영은 멍하니 한참 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어머님, 그게 무슨 뜻이에요?” 송혜선은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조그마한 흰색 약병을 다영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 약은 무색무취야. 일반인이 먹으면 아무 이상이 없지만, 임신한 사람이 먹으면 삼 일 안에 유산이 돼.” 다영의 손이 떨리며 본능적으로 병을 놓치듯 뺐다. “어머님,
“정다영 씨의 상상력은 참 풍부하시네요.” 상혁은 입꼬리를 비틀며 약간의 비웃음을 섞어 말했다. “세상을 잘 모르는 아가씨다운 모습이라 참 순진하긴 한데, 이런 험한 세상에선 지나치게 순진한 건 별로 좋지 않아요.” 더는 말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듯, 상혁은 뒤돌아 떠났다. 다영은 마치 머릿속이 폭발이라도 한 듯, 귓가에서 찡하는 이명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럴 리 없어요, 남준 씨는 그럴 리 없어요!” 그녀는 낮게 중얼거리며 자신을 설득하려 애쓰며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이미 수없이 눌렀던 번호를 다급히 눌렀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건 여전히 차갑고 무미건조한 여성의 자동응답 소리뿐이었다. “안 돼!” 다영은 절망하며 비명을 지르고는 갑작스레 밖으로 뛰쳐나갔다. 깊은 겨울밤, 바람은 더욱 매섭게 몰아치고 있었다. ...창밖의 거센 바람에 창문이 덜컹이며 울렸다. 병원의 VVIP 병실 안. 다영은 온몸을 떨며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초점 잃은 눈동자는 텅 빈 듯했고, 난방이 틀어져 있어도 그녀를 감싼 차가운 공기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다영아, 이렇게 늦은 밤에 무슨 일이야?” 송혜선은 평소와 같은 말투로 물었고, 전혀 이상한 기색은 비추지 않았다. 실은 송혜선도 이미 알고 있었다. 정지철이 이제는 구속되고 정씨 가문이 더 이상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다영의 마음에는 여전히 남준의 존재가 얽매여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다영에게서 더 많은 가치를 끌어낼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송혜선 또한 명확이 알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스치자, 송혜선은 표정을 가다듬고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넸다. “자, 물 한 잔 마시고 몸 좀 녹여.” 다영은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린 듯, 송혜선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간절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님, 남준 씨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세요, 제발요!” 송혜선은 한숨을 쉬며 어쩔 수 없다
며칠 사이, 정다영은 차갑게 닫힌 문을 수없이 마주했다. 한때 주변 사람들이 다영을 떠받들며 찬란한 별처럼 여겼지만, 이제 집안의 사건이 터지자 사람들은 그녀를 피하려고만 했다. 마치 다영에게 다가가기만 해도 불행이 전염될 것처럼... 그렇게 다영은 세상의 차가운 이면과 인간관계의 허망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자연스레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바꾸었다. “송 여사와 남준이는 요즘 집에 없는 걸로 아는데, 정 다영 씨는 왜 여기에 있는 거죠?” 상혁은 평범한 어조로 물었지만, 그 말은 다영을 잠시 멈칫하게 했다. 그녀는 곧바로 대답했다. “남준 씨가 곧 돌아온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상혁은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그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날이 추우니 안에서 기다려요.” 말을 마친 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남겨진 건 남자의 차가운 뒷모습뿐이었다. 다영은 상혁을 따라가며 급히 소리쳤다. “부 대표님, 잠깐만요...” 상혁이 발걸음을 멈췄다. “무슨 할 말이라도?” 다영은 망설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며칠 동안 그녀가 이리저리 뛰어다닌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버지를 이 난관에서 구해내기 위해서... 그리고 지금, 아버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눈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제 아버지와 관련된 일입니다.” 상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건 검찰 소관이에요. 전문 변호팀을 고용하면 사건의 진행 상황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을 거예요.” 다영은 초조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부 대표님, 이건 분명 오해입니다. 제 아버지는 회사에 평생을 바친 분입니다. 아버지는 공문서를 위조하거나 계약서를 조작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녀는 자기 아버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즉, 정지철은 딸을 희생하더라도 자신의 미래를 망칠 행동은 절대 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분명히 이번 일에는 뭔가 숨겨진 진실
최씨 가문 본가 후원에 있는 온실에서는 조용히 바둑알이 내려놓아는 소리가 들렸다. 상혁과 최동신은 마주 앉아 바둑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상혁아, 지금 이 바둑판은 승부가 거의 결정 난 것 같은데!” 바둑판 위에서 흑과 백이 치열하게 맞서며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최동신은 한 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자네의 백돌이 반 집 차이로 우위를 점하고 있어. 대단해! 예전보다 실력이 많이 늘었어.” 상혁은 겸손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할아버지 기백이 여전히 넘치시니 제가 아직 배울 점이 많습니다.” 최동신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탄식했다. “늙었지. 이제는 예전 같지 않다.” 그러나 그는 곧 말을 돌려 흑돌을 손에 들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부터 자네도 조심해야겠어.” 최동신은 그 말을 하며 흑돌을 바둑판 위에 툭 하고 내려놓았다. 그 돌이 놓인 자리로 인해 한순간 바둑판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바둑판 위에 집중되었다. 상혁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손을 멈췄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우위를 점하고 있던 상황이 단 한 수로 인해 역전이 된 것이다. “할아버지의 바둑 실력은 늘 감탄할 따름입니다. 제가 이 점을 간과하고 놓치고 있었네요.” 상혁은 차분하게 패배를 인정하며 판세를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최동신은 손에 들고 있던 바둑알을 다시 주우며 훈계하듯 말했다. “그렇지. 이길 수 있는 상황도 한 수의 실수로 모두 망쳐버릴 수 있는 법이다.” 상혁은 최동신의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 최동신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들리는 말에 DL그룹의 실질적인 권한은 이제 자네가 잡았고, 자네 동생은 동남아 지사로 발령이 났다고 들었네.” “겉으로 보기엔 좋은 상황 같아 보이지만, 상혁이, 네가 한 수라도 실수하는 날엔 모든 걸 망칠 수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이 말은 단순한 충고 이상의 뜻을 담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남준은 무심코 말을 뱉었다. 그의 음성엔 조급함이 묻어 있었다. 남준은 방 안을 계속해서 왔다 갔다 하며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연말 이후로 예정되어 있지 않았나? 어떻게 앞당겨진 거지?” 연지는 침착하게 보고했다. “들리는 말로는 이번 사건이 중대한 만큼 생각보다 빠르게 처리되면서 연말 전에 재판이 열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남준은 발걸음을 멈추고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부상혁이 나를 궁지로 몰아넣고, 정규인의 입을 열어 내 약점을 찾아내려는 것이겠지.” 그는 잠시 멈칫하다가,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하지만 부상혁도 모르는 게 있지. 정규인의 입은 결코 열리지 않을 거란 사실을 말이야.” 연지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상무님, 그 말은 혹시...” 그러나 그녀의 말은 남준의 강렬한 눈빛으로 끊겼다. 서로의 눈이 마주친 순간, 연지는 남준의 의도를 즉각 이해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 정규인의 사건은 법원에서 열렸고, 법정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경찰들이 구치소에서 정규인을 호송해 나오자, 멀리서 그의 초췌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정규인의 기운 없는 모습에서 예전의 당당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법정 방청석을 둘러보다가, 맨 끝자락에서 누군가를 발견했다. 순간, 정규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는 갑작스럽게 방청석을 향해 달려들며 미친 듯이 외쳤다. “여기 왜 왔어! 당장 나가! 나가란 말이야!” 경찰들이 급히 정규인을 제지하려 했으나, 그의 필사적인 몸부림에 저지당했다. “진정해!” 경찰은 엄중히 경고했지만, 그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그러다 결국, 경찰봉이 그의 등을 강하게 내려쳤다. 퍽! 정규인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고, 그의 몸은 앞으로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방청석의 허징인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
“이모...” 하연은 조진숙을 꽉 끌어안으며 말문이 막혔다. 지금은 어떤 말도 조진숙에게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되든 간에, 이모 곁엔 항상 저희가 있어요.” 조진숙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하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고맙다.” ... 한적한 교외에 위치한 독채 빌라. 고급스러운 소형 승용차 한 대가 천천히 차고로 들어섰다. 황연지는 휴대폰으로 위치를 확인한 뒤,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빌라는 꽤 외진 곳에 있었고, 오랜 기간 비어 있었던 듯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연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상무님? 계신가요?”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텅 빈 집안의 메아리뿐이었다. 연지는 2층으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용기를 냈다. 계단 끝에 닫혀 있는 문 하나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상무님, 안에 계신가요?” 그녀는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잠시 망설이던 연지는 문을 조심스레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코를 찌르는 강렬한 술 냄새가 그녀를 덮쳤다. 연지는 본능적으로 코를 막고 안으로 더 들어갔는데, 방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낯익은 실루엣을 발견했다. “상무님?” 이사회 이후 부남준은 자취를 감췄고, 외부에서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없단다. 그렇게 된 지가 삼 일째였다. 연지는 재빨리 그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상무님, 괜찮으세요?” 남준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비록 지금의 그는 어딘가 지쳐 보였지만, 그 매서운 매의 눈은 여전히 날카로운 빛을 띄고 있었다. 그는 황연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입가에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너였구나?” 연지는 아침에 급히 소식을 듣고 서둘러 이곳으로 달려왔다. “상무님, 사라지신 며칠 동안 정다영 씨가 상무님을 계속 찾고 있었습니다.” 정다영은 남준을 찾기 위해 거의 미쳐버린 상태였고, 부남준을 찾을 수 있는 곳은 모조리 뒤지고 있었다.
저녁에 하연과 상혁은 음악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자마자 집 안의 불이 자동으로 켜졌다. “돌아왔니?” 하연과 상혁은 동시에 고개를 들어 소파에 홀로 앉아 있는 조진숙을 보았다. 지금의 조진숙은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어머니, 집에 계셨네요?” 조진숙은 자리에서 일어나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희 기다리고 있었어.” 하연은 활짝 웃으며 조진숙에게 다가가 옆자리에 앉았다. “이 늦은 시간까지 기다린 거예요? 일찍 주무시지 그러셨어요.” 하연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조진숙은 손을 들어 하연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너희가 안 들어오면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 하연은 그녀의 팔짱을 끼며 더 애교를 부렸다. “이모가 이렇게 저희를 걱정해주니까, 너무 좋아요!” 조진숙은 하연의 손등을 살짝 두드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사실 오늘은 너희에게 할 말이 있어서 기다린 거야.” 상혁은 소파의 다른 쪽에 앉아 조진숙의 말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하연과 눈빛을 교환한 상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하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모, 무슨 일 있으신 거예요?” 조진숙은 살짝 고개를 저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아무 일도 아니야. 그냥 네 동건이 삼촌이 송혜선과 결혼하기로 했다는 것뿐이야.” 이 말은 마치 고요한 연못에 큰 돌멩이를 던진 것처럼 분위기를 흔들었다. 상혁은 무의식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조진숙이 그를 불러 세웠다. “상혁아, 흥분하지 마라.” 상혁은 걸음을 멈추고 눈빛을 깊게 내리깔았다. “가서 직접 얘기를 해봐야겠어요.” “그럴 필요 없어.” 조진숙이 단호히 말하며 표정은 여전히 여유로웠고, 마치 이번 일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듯했다. “아들아, 이제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란다. 남녀가 서로 좋아해서 함께 사는 건 그저 대수롭지 않은 일일수도 있다. 하지만 결혼은 그런 장난스러운 일은 아니잖아. 네 아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