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의 얼굴은 순간 어두워졌지만 이내 설명했다.“예전에는 그랬죠. 하지만 지금은 저와 아무 관계도 아닙니다.”하연이 바보도 아니고, 안나의 태도가 전과 180도 달라진 게 무엇 때문인지 당연히 알고 있다.바로 자신의 진짜 신분을 알았다는 거!하연은 겉웃음을 치며 여전히 차가운 눈으로 안나를 바라봤다.“안나 이사님, 일개 비서가 아무리 간이 배 밖으로 나와도 혼자서 이런 짓을 어떻게 벌여요? 누구의 지시를 받지 않은 이상.”하연의 말에 안나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이내 백지장이 되었다.이윽고 뭐라 설명하려고 입을 뻐끔거릴 때, 하연이 기회도 주지 않고 말했다.“안나 이사님, 이렇게 쓸데없는 짓 할 시간에 일에 신경 쓰세요. 밖에 나와 일하면 실적으로 얘기해야죠.”하연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상혁과 함께 뒤돌아 떠나버렸다.그 뒤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안나는 떠나가는 두 사람을 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심지어 지난날에 대한 후회 때문에 마음이 말이 아니었다.IM 그룹은 DS 와 FL 그룹과 협력하고 난 뒤 짧은 시간 동안 주가가 단번에 십여 퍼센트 급등해 원래 HY에 투자했던 투자자가 하나둘 모두 IM에 모여들었다.그 때문에 원래 HY와 비등비등하던 IM 그룹은 단번에 HY 그룹을 멀리 떨어뜨렸다.그리고 하연은 계약을 체결한 이튿날 곧바로 B시에 돌아왔다.하연이 회사에 도착하자 일찌감치 기다리고 있던 호현욱이 웃는 얼굴로 하연을 반겨주었다.“최 사장님, 오셨습니까?”하연 역시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계약 체결이 끝나 바로 돌아왔어요. 왜요? 저한테 볼일 있나요?”“최 사장님이 작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돼서 특별히 와 본 겁니다. 무사한 걸 보니 마음이 놓이네요.”하연은 눈썹을 치며 올리며 대답했다.“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별문제 없어요. 이렇게 큰 프로젝트를 아직 끝마치지 못했는데 제가 어떻게 쓰러지겠습니까?”하연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문을 열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문을 닫는 순간 얼굴에 드리
“응.”하연의 대답에 태훈은 칼 하나를 꺼내 택배를 뜯었다. 그랬더니 안에 있던 사진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이에 태훈은 다급히 사진을 모두 주어 하연에게 건넸다.“확인해 보세요.”그 사진을 본 순간 하연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이제야 모든 퍼즐이 맞아떨어지네.”‘이 모든 사건의 배후가 익숙한 사람일 거라고는 생가지도 못했는데.’“민혜경도 연루되어 있다니 일이 재밌어 지네.”하연은 입가에 냉소를 머금었다.“지난번에는 민혜경이 운이 좋아 몇 달 사이에 나왔지만, 이번에는 민혜경뿐만 아니라 이번 일에 가담한 사람들에게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드리면 어떤 책임이 뒤따르는지 알려줘야지.”“최 사장님 이 번 일은 제가 해결하겠습니다.”그 말에 하연은 손을 저었다.“아니야, 이번에는 내가 직접 할 거야.”그 시각, 자기 계획이 탄로 났다는 걸 알 리 없는 혜경은 하연이 D시에서 이미 죽었다고 확신했다.따라서 기분이 좋아진 혜경은 서준에게서 받은 블랙카드를 들고 백화점에서 쇼핑을 즐기며 크고 작은 쇼핑백에 자신을 위한 선물을 이것저것 고르고 나서야 그만뒀다.이윽고 하연이 운영하는 브랜드숍 앞에 멈춰서더니 뒤에 있는 겨호원에게 말했다.“이 가게 다 엎어! 내가 사들여서 싹 리모델링할 테니까. 해외 브랜드 화장품을 사들여 화장품 매장을 꾸릴 거거든.”“그리고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두 명 정도 고용해서 메이크업 서비스도 제공할 거야. 지금 젊은 여자애들은 모두 가꾸는 걸 좋아하니 장사가 잘될 거야.”“...”예나가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 리 없는 혜경은 황홀한 표정으로 자기 미래를 그렸다.그때 예나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물 한 대야를 퍼와 그대로 혜경에게 뿌렸고, ‘아!’ 하는 비명이 들리더니 혜경은 단번에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어 버렸다.이윽고 예나는 혜경이 반응할 새도 없이 싸늘한 목소리로 비아냥거렸다.“대낮부터 꿈꾸고 있다니. 이제 좀 정신이 들어?”혜경은 얼굴에 묻은 물을 모두 닦아냈지만 여전히 처참한
정예나는 이 말을 듣고 얼굴빛이 급격히 변했다.“뭐라고 하셨죠?”예나의 표정이 당황한 것을 보고, 민혜경은 웃음을 터뜨렸다. 굉장히 거만하고 광기 어린 웃음이었다. 마치 이날이 드디어 온 것처럼.“믿기지 않나요? 하지만 사실이에요. 최하연은 D시에서 이미 죽었어요. 곧 이 소식이 당신 귀에도 들어갈 거예요.”그러자 예나는 참지 못하고 완전히 폭발했다. 그리고 빗자루를 집어 들고 혜경을 향해 휘둘렀다. “이 나쁜 년, 추잡하고 더러운 불륜녀, 쓰레기보다 더 쓰레기 같은 년, 내가 여기서 헛소리 못 하게 해 줄게. 내가 널 죽여버리겠어!”혜경은 급히 피하면서도 입을 놀렸다. “하하하, 어디 한번 해봐! 네가 날 욕해도 최하연은 다시 살아나지 않을 거야. 어쩌면 지금쯤 시신도 온전치 않을 걸.”“내가 충고 하나 할게. 하연에게 많은 종이돈을 준비하는 게 좋을 거야. 그러면 저 세상에서 걔가 너를 보호해 줄 거야.”예나는 눈이 붉어지며 혜경의 앞에 다가가 뺨을 세게 때렸다. 하지만 혜경은 아픔을 느끼지 않는 듯 계속 웃음을 터뜨렸고, 옆에 있던 보디가드가 재빨리 예나를 제지했다. 예나는 두 명의 보디가드를 떨쳐낼 수 없어 분통이 터졌고, 결국 보디가드에게 밀려 가게 문 앞에 쓰러졌다.혜경은 잔인한 웃음을 지었고 이내 한쪽 다리를 절뚝이며 허리를 지탱했다. 그러고는 예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와 싸우려면 너희는 아직 멀었어. 다음 생애에서도 최하연은 나의 상대가 되지 못할 거야! 안타깝긴 하다. 하연의 죽음을 직접 보지 못했으니. 하하하!”그 말을 끝으로, 혜경은 주저 없이 돌아서서 떠났다. 그리고 예나는 멍하니 서서 그저 혜경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곧 예나는 정신을 차렸고 즉시 전화기를 꺼내 하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하연은 전화를 받지 않았고, 예나는 순간 절망에 빠졌다. 그러자 두려움에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렸다. “하연아, 제발 전화 좀 받아!”예나는 여러 번 전화를 걸었지만 하연은 받지
정예나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정말 점점 더 건방지네.”그러자 최하연은 예나를 달래며 말했다. “적이 방심하면 망하기 마련이야. 나도 걔와의 문제를 해결할 때가 됐어.”전화를 끊고 나서, 정태훈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사장님, 곽대철 씨와 연락이 되었습니다. 내일 저녁 8시에 드래곤 펜션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하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시간에 도착할 거라고 전해줘.”이에 태훈이 되물었다. “F 국 본부에 알려야 할까요? 인력을 배치할까요?”“그럴 필요 없어. 우리 지역의 보안 인력을 데려가면 충분해. 여기는 법치 사회이고, 상대도 무모한 짓을 하지 않을 거야.”“알겠습니다, 사장님.”태훈이 나간 후, 하연은 창밖을 바라보며 이 도시의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책상을 두드리며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다음 날, 저녁 7시.훈련된 보디가드들이 DS그룹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하연은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서 회의에 참석했다. 개조된 검은색 자동차는 도로를 따라 달려 드래곤 펜션에 도착했다.“사장님, 도착했습니다.”하연은 검은색 작업복을 입고 있었고 차에서 내려 냉철한 표정으로 펜션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입구에 도착하자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연 아가씨, 정말 용감하시네요. 혼자서 오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하연은 고개를 들어 40대 중반의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건장한 피조물에 중년으로 보였다. “곽대철 씨, 소문으로 익히 들었습니다.”하연은 걸음을 멈추고 대철 옆에 앉아 있는 남자를 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유심히 살펴보는 것을 느꼈다. 하연은 그 남자를 알아봤는데 바로 사진 속 민혜경과 함께 있던 남자, 심영수였다. 영수는 눈빛이 어두워지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하연 아가씨, 앉으세요!” 대철은 하연을 자리에 앉히며, 곧바로 사람들에게 차를 내오라고 지시했다.“가만히 서 있지 말고, 아라비카 원두를 간 커피를 하연 아가씨에게 타 드려.”하지만 하연은 그 말을 무시하며, 대철 앞에 있는
이 일에 대해 곽대철은 알지 못했기에 의아해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죠?”그러자 최하연은 가식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이쯤 하시면 됐는데, 곽대철 씨는 왜 모르는 척하시죠?”이에 대철의 얼굴이 즉시 어두워졌고 옆에 있는 심영수에게 말했다. “영수, 무슨 일이야? 하영 아가씨를 어떻게 건드렸는지 솔직히 말하지?”이 말을 들은 영수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고, 곧 대철의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속삭이자 대철은 그 말을 듣고는 갑자기 탁자를 쳤다. “이런 멍청한 놈!”영수는 깜짝 놀라며 대철을 진정시키려 했다.“형님, 화내지 마세요. 제가 그땐 순간적으로 충동을 아니 충동적이었습니다.”대철은 마음속의 분노를 억누르며, 하연 앞에서는 화를 내지 않았다. 심영수는 대철과 오랜 시간 함께해온 오른팔이었다. 그랬기에 지금 하연 때문에 영수를 처벌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애써 웃으며 말했다. “하연 아가씨, 무슨 오해가 있지 않을까요?”그러자 하연은 대강 상황을 짐작하고 말했다. “곽대철 씨, 저는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어요. 그런데 오해라고요?”대철은 하연의 신분을 알고 있었고 대철은 B시에서 어느 정도 세력을 가졌지만, 하연과 정면으로 맞설 용기는 없었다. 그래서 화해를 시도하며 직접 커피 한 잔을 따라 하연에게 건넸다. “하연 아가씨, 저희 부하가 결례를 범했습니다. 사과의 의미로 이 커피를 제 사과로 받아 주시고 화해하면 안 될까요?”그러자 하연은 냉소하며 손을 뻗어 커피잔을 쳤고 잔이 땅바닥으로 떨어져 깨졌다. 이에 영수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 “당신! 이렇게 무례하게 굴면 형님도 더는 사과하지 않을 거야. 도대체 뭘 원하길래 이러는 거야?”영수의 말에 하연은 눈을 들어 영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원하는 건 쉬워요. 심영수 씨 목숨을 원하거든요.”짧은 말 속에 담긴 위압감에 모두가 떨었다. 그들은 한 여자가 이렇게 강력한 기운을 뿜어낼 줄 몰랐다. 몇 초 후, 영수는 비웃으며 말했다. “내 목숨을 원한다고?
“하연 아가씨, 어떻게 하실 건가요?”최하연은 곽대철의 의도를 대략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분명히 말했다. “곽대철 씨, 체스는 체스고, 문제는 문제입니다. 설명이 필요합니다.”대철은 모든 체스 말을 제자리에 놓기 시작했고 체스 말을 움직이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체스 한판으로 결정합시다. 만약 하연 아가씨가 이기면, 영수를 데려가세요. 제가 막는 일은 없을 겁니다.”“하지만 하연 아가씨가 지면, 우리 사이의 원한은 이로써 끝나는 겁니다. 과거의 일은 모두 잊어야 합니다.”체스판은 도박판 같다는 말이 대체로 이런 의미였다. 심영수는 대철의 말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마 대철이 자신을 보호하려 한다는 것으로 알아들었다. 왜냐하면 체스를 둔다고 하면 대철의 실력은 B시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실력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하연이 영수와 체스를 둔다면, 이길 가능성이 없었다.“어떻게 하실 건가요? 최 사장님, 도전할 용기가 있나요?” 영수는 조롱하며 말했다. 하연이 이 도전에 응하기만 한다면, 반드시 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하연은 살짝 고개를 젓자 대철은 하연이 겁먹은 줄 알고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하연이 곧 말했다. “그러기엔 이 판이 너무 작아요.”하연의 말에 대철은 흥미를 느꼈다.“하하하. 하연 아가씨, 이보다 더 큰 내기가 있나요?”그러자 하연은 진지하게 말했다. “이 자리에 오래 계셨죠? 이제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넘겨주는 게 어떨까요?”이에 영수는 불같이 화를 냈다. “그게 무슨 뜻이야! 감히 우리 형님을 건드리려는 거야? 우리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아?”하지만 하연은 영수의 말을 무시하고 대철을 바라보았다. “만약 곽대철 씨가 진다면, 이 작은 조직의 리더를 바꿔야죠. 안 그래요?”대철은 진지한 얼굴로 하연의 말을 고려했다. 그리고 하연이 진지하게 말하자 승리에 대한 자신감이 다시 생겼다.“하연 아가씨, 만약 당신이 이긴다면, 제가 제 자리를 당신에게 넘겨 리더로 인정하겠습니다.”“또한, 하연 아
옆에 있던 심영수가 조용히 말했다. “형님, 잠시 쉬었다 하시는 게 어떨까요?”하지만 곽대철은 손짓으로 영수를 막으며 말했다. “관전하는 사람은 말하지 않는 법이야, 이 규칙도 모르나?”이에 영수는 바로 침묵하며, 시선을 최하연에게로 돌렸다. 하연은 내내 평온하게 체스판을 바라보며, 얼굴에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비록 이번 체스 게임이 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지만,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이에 영수는 속으로 냉소하며 생각했다. ‘계속 잘난 척해봐라, 얼마나 버티는지 보자.'“안 돼, 안 돼, 왜 내 캐논을 먹으려고 해.” 대철은 급히 말을 끊으며 말했다. “내가 이 수를 잘못 두었네요. 이 수를 철회할 수 있습니까?”대철은 자기 말을 원래대로 되돌리며 말했다. “영수가 제 사고를 어지럽히는 바람에 생각이 흐려졌습니다. 하연 아가씨, 한 수 되돌릴 수 있겠습니까?”하연은 말없이 대철을 바라보았고, 표정으로 대철에게 되묻고 있었다. ‘그게 되겠습니까?’표정으로 거절하는 하연에 대철은 낯빛이 어두워졌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좋아요, 먹히면 먹히는 거죠!”대철은 자기 말을 체스판에서 빼내었다. 원래 팽팽했던 체스판에서 하연이 분명히 우세를 점하게 되었고 대철의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토록 강한 상대는 처음이었고 하연의 실력은 예상 밖이었다.대철은 더욱 신중 해졌고, 체스 경기는 한 시간 이상 계속되었지만, 승부를 가릴 수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인내심이 뛰어났다.“하연 아가씨, 아가씨는 제가 존경하는 첫 사람입니다. 저랑 이렇게 오래 체스를 둘 수 있다니.”대철은 체스를 20년 넘게 연구해 왔다고 대철과 체스를 둔 사람 중에 30수를 넘긴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하연의 체스 실력은 완전히 압도했다.“과찬입니다. 저도 어릴 때 할아버지께 배운 것이 전부입니다. 평소에는 잘 두지 않거든요.”대철은 속에서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하연 아가씨, 너무 겸손하시군요.”그리고 하연은 마지막 말을 움직이며
그러자 주변 사람들도 모두 무릎을 꿇고 외쳤다.“보스!”심영수는 이 장면을 보고 마음속에서 분노가 끓어올랐다. 자기 동료들이 모두 최하연을 보스로 인정했기에 이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몰랐다.“영수, 아직도 뭐 하고 서 있어? 빨리 무릎 꿇고 대장님께 빌어. 목숨만이라도 살려달라고 하란 말이다.” 대철의 말에 영수는 속으로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꿇었다. 이에 하연은 잠시 멈칫했다. 대철이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고 언행이 일치하는 사람이었다.“다들 일어나세요.”대철은 손짓으로 사람들을 일으키고는 부하의 태도를 갖추고 다가와 말했다.“보스, 이제부터 우리는 당신을 따를 것입니다. 영수의 일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목숨을 원하시면 바로 처리하겠습니다.”하연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가볍게 말했다. “목숨은 필요 없어요. 하지만 해야 할 일이 있어요.”영수는 한숨을 쉬며 자신의 목숨을 건진 것에 안도했다.“최 사장님, 아니, 보스.” 영수는 급히 호칭을 고쳐 말했다. “명령을 내려 주시죠.”하연이 말했다. “내가 원하는 건 간단해요. 받은 대로 돌려주는 거죠. 내 말 이해하겠어요?”영수는 잠시 망설였다. 조희경은 영수의 여자였고,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기에 그렇게 대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연은 영수가 주저하는 것을 보고 말했다. “싫다는 건가요?”하연은 몸을 기울이며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는데 강력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싫다는 건가요? 아니면 대신 벌을 받고 싶다는 건가요?”영수는 몸을 떨었고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자, 영수는 자신을 보호하기로 했다. “3일만 주세요. 반드시 만족시켜 드리겠습니다.”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워했다. 그리고 돌아서려는 순간, 대철이 하연을 불렀다. “보스, 저희는요? 어떤 명령이든 내리세요.”“필요할 때 다시 찾죠. 그전까지는 이곳을 관리해 주세요.”이에 대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보스. 안녕히 가세요!”모두가 하연을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정문 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부동건이 고개를 돌리자, 최하연이 부상혁의 팔을 자연스럽게 끼고 등장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많은 이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잘생긴 남자와 우아한 여자의 조합. 누가 봐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 ‘딱 봐도 좋은 그림이야. 저 둘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길을 끌어...’ “회장님, 부상혁 대표님은 정말 복도 많으십니다. 최씨 가문의 따님과 이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부동건의 표정이 확 풀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묘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부동건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젊은 사람들이 서로 마음이 맞아 좋아하는 걸, 우리 어른들은 그저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줘야 하는 일일 뿐이지요.” “게다가 상대가 최씨 가문의 따님이라니, 정말 금상첨화가 아닙니까.” 부동건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역시 상혁이다. 내 아들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상혁은 오늘 이 자리에서 당당히 아버지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었다. 한편, 송혜선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 얼굴에 띄웠던 미소는 점점 사라져 갔고,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하연에게 향했다. 오늘의 하연은, 나무나 예쁘고... 아니, 그냥 눈이 부실 만큼 찬란했다. 그리고 또렷한 이목구비에 윤기 흐르는 머릿결, 화사하게 피어난 얼굴빛까지. 하연의 행복함이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송혜선의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정다영... 그년, 나를 속였어.’ 그동안 하연 쪽에서 뭔가 반응이 있을 줄 알고 기다려 왔다. 하지만 소식은커녕, 정다영조차 자취를 감췄다. ‘다영이 걔가 하연이에게 약 먹이는 계획이 분명 실패한 거야. 그렇지 않고 선 지금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서 있을 수는 없어.’ 이대로 배가 불러오면, 섣불리 손도 쓸 수 없게 된다. ‘
이 질문에 송혜선은 눈을 반짝이며 부동건을 바라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젠 나를 당당히 소개해 줄 때가 됐겠지.’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는 부동건의 정식 아내로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회장님, 말씀 좀 해보세요?” 조금은 성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주변의 시선도 하나둘 송혜선과 부동건을 향했다. 모두 속으로는 뻔히 알고 있었다. 부동건이 과연 예전 애인을 진짜로 정실로 앉혔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부동건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숨기거나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담백하게 말했다. “오 회장님, 이 사람은 제 딸의 어머니입니다.” 순간, 송혜선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딸의... 어머니?’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이 살짝 흔들렸다. 금세 넘칠 듯한 와인, 애써 잡고 있는 감정. ‘지금... 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억울함이 툭 하고 솟구쳤다. 심지어 손에 힘이 들어가며 하얗게 질린 손등이 떨렸다. 오병지는 단번에 눈치챘고, 싱긋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고, 대신 가볍게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부 회장님, 여전히 복이 많으시네요.” 부동건은 공손하게 웃으며 송혜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손길엔 무언의 위로가 담겨 있었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저와 이 사람의 결혼식엔 꼭 오셔서 축배 들어주세요.” 그 말에 송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결혼식...?’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이어서 고개를 들며 수줍게 웃었다. “회장님...” 부동건은 말없이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그 행동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 시선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송혜선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던 눈빛이, 지금은 선망과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결국, ‘부동건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송혜선은 온
부지윤의 ‘한 달 잔치’는 그야말로 성대한 수준의 파티였다. 초대받은 인사들만 봐도, 그 위세가 느껴졌다. F국 재계의 실력자들, 정재계의 핵심 인물, 이름만 대면 아는 명문가 자제들이 대거 초청됐고, 심지어 부씨 가문 어른들에게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직접 청첩장을 보냈다. 이 정도면, 사실상 이 아이를 공식적으로 가문에 편입시키겠다는 의지나 다름없었다. 부동건이 이 아이에게 얼마나 애정을 집착하듯 쏟고 있는지, 이날 행사 하나로 증명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부동건은 스스로의 체면과 명예를 걸고, 딸을 세상에 내보이고 있었다. ...잔치 당일, 연회장은 유난히 붐볐다. 샹들리에의 조명이 화사하게 반짝였고, 고급스러움이 풍겨 나는 악단의 선율이 분위기를 감싸고 있었다. 송혜선은 산후조리를 마친 직후였지만, 여전히 그만의 풍채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예전보다 조금 살이 오른 듯했지만, 그 덕에 오히려 분위기가 더 너그러워 보였다. 그녀가 행사장에 들어서자, 평소 자주 어울리던 재벌가 부인들이 앞다투어 다가왔다. “혜선씨는 진짜 복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 고생 끝에 드디어 볕뜰날이 왔네요.” “부 회장님이 이렇게까지 챙기시는 거 보니까, 이제 정말 한 자리 하시겠어요.” “정말 이러다 조만간 ‘겹경사’ 나는 거 아니예요? 우리라도 미리 축하해줘야 하는 거야?” 송혜선은 그 소리에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얄미울 정도로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역시 사람은 자리가 높아야 대접 받는 거야.’ “지윤이는 회장님의 첫 딸이잖아요. 그러니까 귀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회장님이 우리 모녀를 절대 가볍게 보지 않으신다는 건, 여기 있는 분들도 느끼셨을 테고요.” 그 말에 다들 박수까지 치며 웃었다. “이제 우리도 호칭 바꿔야지, 사모님!” 누군가 먼저 그렇게 불렀고, 뒤이어 몇몇이 장난처럼 따라 불렀다. 송혜선은 그 말에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턱을 살짝 들며, 그 호칭이 제법 익숙
진윤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마침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남준은 법을 무시하고, 사람을 죽였어요. 부씨 가문이 이 일에 개입한다면... 여론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감싸려 들면 들수록, 결국은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겠죠.” ‘이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가문의 존망이 걸린 문제야.’ 맞은편 소파에 앉은 상혁은 다리를 꼬고,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눈빛엔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세속의 먼지 따윈 전혀 묻지 않은 사람처럼. 진윤의 말이 끝났지만, 상혁의 표정엔 미동 하나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씨 가문은 항상 법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여왔습니다. 그건 변하지 않습니다, 여사님.” 그는 손짓으로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거기엔 작은 검은색 USB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 안에... 고나희 씨가 남긴 게 있습니다. 여사님께 드리라고 하더군요.” 순간, 진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표정으로, USB를 바라봤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그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희가... 뭔가를 남겼다고...?’ 사고는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딸의 마지막을 함께할 시간조차 없이, 그녀는 세상을 떠났고, 어떤 유언도,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줄 알았다. “나희... 그 애가... 무슨 말을 남겼다는 거예요...” 진윤은 입을 틀어막았다. 눈물은 이미 참을 수 없다는 듯 쏟아지려 하고 있었다. 상혁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사람이 떠난 건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남겨진 마음은, 누군가가 반드시 전해야죠.” 그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거운 공기를 뒤로한 채, 조용히 방을 나섰다. 잠시 후.룸 안에서 낮고, 억눌렀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희야...” 진윤은 USB를 손에 쥐고,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울고 있
진윤은 송혜선이 내민 공백 수표를 내려다보며 손끝까지 떨렸다. 종이 한 장.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그녀의 심장을 조용히 갉아먹었다. ‘돈이란 게... 사람을 어디까지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 건지.’ 그녀는 허탈하게 웃었다. “돈, 참 좋은 거죠. 수많은 집이 그거 하나 때문에 무너지고, 사람 목숨도 스스럼없이 거래되고.” 그녀의 눈빛이 서서히 날카로워졌다. “고경수도 그랬어요. 결국 돈 때문에 스스로 감방에 들어갔고, 지금 당신은 그 돈으로 내 아이의 죽음을 사겠다는 거죠.” 진윤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을 꿰뚫었다. “송 여사님의 눈엔... 돈이면 뭐든 다 해결돼요?” 송혜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진윤은 고개를 들었다. 쭉 뻗은 어깨, 흐트러지지 않은 눈빛으로 조용히 말했다. “근데, 저에게 그딴 건... 아무 의미 없어요.” 테이블 위의 수표는 그녀 눈엔 그저 휴짓조각에 불과한 쓰레기였다. ‘내 아이 이름 위에 적힌 숫자가 많을수록, 그 애는 더 억울해지는 거야.’ 그런 진윤의 단호함에, 송혜선도 이내 표정을 굳혔다. “정말 고집 세시네요, 여사님.”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용히 진윤 쪽으로 다가섰다. 10센티미터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서, 송혜선은 하찮다는 듯이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며 진윤에게 시선을 내리꽂았다. “그 자존심,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 볼까요?” 그 말투엔 이젠 더 이상 숨길 필요 없는 위협이 담겨 있었다. “당신에게는 지금, 아무것도 없어요. 남편은 감옥, 딸은... 하늘에 있어. 그런데도 이렇게 버티겠다고? 부씨 가문이 마음만 먹으면, 당신 같은 사람 하나쯤 사라지게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에요.” 진윤은 순간 움찔했지만, 눈동자는 미동도 없이 그대로 송혜선을 바라봤다. 송혜선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참, 고경수 씨 말인데요. 그 사람, 아직 당신한테 마음 있더라. 감방에서 계속 당신 얘기만 했대요.”
“그저...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을 뿐이에요. 여사님. 같은 여자로서, 제 처지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해해주시리라 믿어요.” 진윤은 피식, 코웃음을 쳤다. 커피잔을 천천히 들어올리더니,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천천히 한 모금 머금었다. “이해? 아니요. 전 그런 거 몰라요.” 단칼처럼 냉정하게 잘라버린 말이었다. 그 한 마디에 송혜선의 입술이 경직되며 굳어버렸다. ‘이런, 내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아...’ 하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송혜선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진윤의 손등을 잡았다. “여사님... 따님 일에 대해서는, 정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윤이 빠르게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이내 터져나온 감정. “사과? 한 아이가 죽었는데, 고작 한 마디 사과로 끝내겠다고요?” “아니면... 송 여사님의 눈엔 제 딸 목숨이 그깟 아무렇게나 다뤄도 되는 값싼 거였어요?” 그 목소리는 카페 전체를 울릴 만큼 컸고, 송혜선은 순간 움찔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진윤의 눈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여사님. 흥분하지 마세요... 결국... 이 모든 건 우리 부씨 집안이... 정말 죄송합니다.” 진윤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웃음 속에서,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결국 끌어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웃으면서 울었다. 그 모습은 너무 아프고, 너무 무너져 있었다. 진윤은 눈물을 닦으려 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송혜선은 주섬주섬 가방에서 티슈를 꺼내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하지만 진윤은 그것조차 거부했다. “됐어요. 그런 거, 필요 없으니까.” “송 여사님, 솔직히 말해봐요 오늘 여기서 만나자고 한 것도 당신 아들 부남준이 꼬투리 잡혀서, 지금 당장 날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니까 이렇게 만나자고 한 거잖아요.”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 애 죽고, 그동안 단 한 번이라도 날
“닥쳐!!” 송혜선이 낮게 내뱉었다. “그 비밀, 평생 당신 뱃속에 묻어둬.”“아니면... 다시는 당신 딸 얼굴 못 볼 줄 알아.” 조봉규는 그제야 자신이 입을 잘못 놀렸다는 걸 깨달았다. 급히 손바닥으로 자기 입을 철썩 때리며 말했다. “화내지 마, 혜선아. 나도 그냥... 기분 좋아서, 그만...” “앞으로 이 집에서 그 얘긴 두 번 다시 꺼내지 않을게. 약속해.” 조봉규의 간절한 다짐에도, 송혜선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를 한번 쏘아봤다. 곧이어, 목소리를 낮추며 화제를 돌렸다. “부동건, 딸한테 명분은 준다더니, 정작 혼인신고 얘긴 입도 안 뗐어. ‘이러다 또 마음 변하는 거 아니야?’” 그녀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안 돼. 남준이 일은 어떻게 해서라도 반드시 준비해야 해.’ 그 말엔 조봉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알아봤는데, 유가족 쪽에서 합의서만 받아낼 수 있으면, 그 사건도 다시 볼 여지가 있대.” 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진짜야?” “응. 듣자 하니까 고경수 와이프, 진윤... 아직 F국에 있다더라. 기회만 되면 한번 만나봐. 그쪽에서 합의서를 써주기만 하면, 다시 기회는 생길 거야.” “근데 지금 당신 산후조리 중이잖아. 몸이 먼저야.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하지만 혜선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남준이가 내 인생의 마지막 희망이야. 기회가 있다면... 어떤 수라도 써야 해.’ 며칠 후, 송혜선은 드디어 고경수의 아내 진윤과 연락이 닿았다. 하지만 의외로, 진윤은 단 한 마디 망설임 없이 만남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평일 오전, 한산한 분위기의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진 실내엔 손님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고, 송혜선은 긴 트렌치코트에 머리까지 스카프로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 밖에서는 누구도 그녀를 쉽게 알아볼 수 없게끔. 카페 입구에 들어선 그녀는 안쪽을 빠르게 훑었다. 한눈에 알아봤다. 구석 창가에 앉은, 수척한 얼굴의
조봉규의 말은 하나하나 송혜선의 마음을 쳤다. “정 안 되면, 우리도 그냥 확 뒤엎어. 어차피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이잖아. 신발 신은 놈들이야 겁낼 게 많겠지만, 우린 맨발이야.”‘맞아... 지금이라도 안 붙잡으면, 우린 끝장이야.’송혜선의 눈빛이 점점 확고해졌다. 그렇게 마음을 굳힌 채로, 그녀는 곧장 부동건을 찾아갔다.하지만 부동건은 송혜선의 말에 귀를 기울일 틈조차 없었다. 부남준의 사건이 악화로 치닫고 있었다. 갓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결정적 증거들이 줄줄이 쏟아지고 있었고, 경찰 쪽 수사도 속도를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건... 덮을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법 앞에선 아무리 부동건이라도 무력하군.’무거운 책임감과 죄책감이 부동건의 어깨를 짓눌렀다. ‘자식 교육을 제대로 못한 죄, 그건 부모의 몫이야...’그저 무기력하게,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 송혜선의 말은 부동건의 귀에 닿지도 않았다.그는 오히려 조용히 갓 인큐베이터에서 나온 막내딸을 품에 안았다. 부드러운 솜털이 보일 정도로 작고 여린 얼굴. 손가락 하나만 잡혀도 녹아버릴 듯한 느낌이었다.‘이 아이는... 내 마지막 기적일지도 몰라.’부동건은 딸을 안고 있을 때만큼은 세상의 복잡한 모든 것이 잠시 잊히는 듯했다. 그리고 눈가가 부드러워졌다.“딸아, 네 엄마랑 진짜 많이 닮았네. 크면 예쁘겠다... 아주.”그는 미소를 머금으며 속삭였다.“지윤이라고 이름 지었어. 복 많은 아이라고 하더라. 부씨 가문 첫 딸, 제대로 키울 거야. 우리 지윤이는, 아빠의 제일 소중한 딸이 될 거야.”‘그래... 남준이는 못 지켜도, 이 아이만큼은...’부동건의 얼굴은 어느새 기쁨으로 가득했다.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송혜선의 속은 서늘했다.‘정작 내가 말하려던 건, 이게 아닌데...’그녀는 조용히 손을 뻗어 아이를 부동건의 품에서 안아올렸다.“조심해요, 아직 작아서... 그렇게 막 들면 안 돼요.”부동건은 걱정스러운 말투로 송혜선을 바라보며 말했다.“이
부동건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밝은색으로 혈기가 도는가 싶더니 이내 새파랗게 질리더니, 순식간에 붉어졌다.‘이게 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가...’조진숙은 그런 부동건의 반응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차갑고 단호한 말투로 말을 던지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섰다.“당신 입으로 한 말, 잊지 마.”철컥-곧이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조진숙은 완전히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남겨진 부동건은 깊은숨을 내쉬었다.‘딱 한 발, 그 한 걸음이 이렇게까지 망가뜨릴 줄은 몰랐네...’하지만 그는 여전히 조진숙의 마지막 말이 담고 있던 진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평소처럼, 그저 ‘조심하라는 경고’ 정도로 여긴 것이다.그 후 부동건은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형사 전문 변호사를 찾았고, 부남준의 사건을 맡겼다. 그것뿐, 그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소식을 들은 송혜선은 더 이상 산후조리고 뭐고 할 틈이 없었다. 벌떡 몸을 일으키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외쳤다.“남준이는 부동건 당신 아들이란 말이야. 그런데도 이 상황에서 이 사람이 저렇게 손 놓고 있는다고?”그녀에게 있어 부동건은 F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재벌이었다. 사람 하나 죽었든, 법을 어겼든, 그 모든 걸 덮는 것쯤은 그에게 있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그 정도 힘도 못 쓰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내가 그 옆에 왜 있었겠어?’그런데도 부동건은 변호사 하나 붙인 걸로 끝이라니. 송혜선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안 돼. 내가 직접 가서 말해야겠어.”그녀가 일어나려는 순간, 조봉규가 급히 다가와 그녀를 막아섰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어조로 송혜선을 다독였다.“혜선아, 지금은 당신 몸이 먼저야. 다른 건 잠시 내려놔.”하지만 송혜선은 남자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남준이 내 아들이야. 내가 안 나서면 누가 나서? 그 애랑 나, 이 지경이 되도록 얼마나 참고 견뎠는지 몰라? 이제 와서 그냥 두라고?”송혜선은 황급히 신발을 신고, 나갈 채비를 했다. 그 옆에서 어쩔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