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연은 다급히 고개를 돌리며 상혁의 눈을 피했다.상혁이 진심을 아주 명확히 말했지만 하연은 여전히 대답을 해줄 수 없었다.순식간에 공기 속에 적막이 흘렀다.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상혁이 손을 뻗어 하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대답 서두를 필요 없어. 잘 생각해. 난 급하지 않아.”하연은 그제야 눈을 들어 상혁을 바라봤다.그 순간 머릿속에 온통 상혁과 그동안 지냈던 모든 장면이 떠올랐다.아마 이 세상에서 상혁보다 더 하연에게 잘해주는 사람을 찾기는 어려울 거다.“상혁 오빠, 저한테 시간을 좀 줄 수 있어요?”“응. 그래.”상혁의 가벼운 대답에 하연은 숨을 돌려 하늘을 바라봤다.하연이 아무리 지난 날의 내려놓으려 해도 마음속 한구석에는 여전히 대학 시절 정의감 넘치던 그 남학생이 남아 있다.하연은 저도 모르게 서준의 얼굴을 떠올렸지만 서준한테서 이제 다시는 예전의 감정을 느낄 수 없다.“최 사장님을 만나야 한다고요. 들어가게 해주세요.”“죄송합니다. 최 사장님은 지금 파티 참석 중이시라 손님을 만나기 어렵습니다.”그 시각, 문 앞에서 경비원이 안으로 들어오려는 안나를 막아섰다.하지만 안나는 안간힘을 쓰며 안으로 들어오려 하며 경비원과 충돌했다.“최 사장님께 드리려고 이 많은 선물을 가져왔는데 제발 들어가게 해주세요.”경비원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최 사장님의 명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그런 권한이 없습니다”안나는 화가 나 발을 동동 굴렀지만 현재로서는 방법이 없었다.그때, 하연과 상혁이 마침 걸어 나왔고, 하연을 본 안나는 눈을 반짝이며 멀리서부터 손을 흔들었다.“최 사장님, 저는 HY 그룹 안나예요. 전에 만난 적 있는데 혹시 기억 나시나요?”안나한테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알 리 없는 하연은 눈살을 찌푸렸다.그때 경비원이 다급히 앞으로 다가와 하연의 의견을 물었다.“최 사장님, 이분이 자꾸만 사장님을 만나고 싶다고 소란을 피웠습니다.”“들어오게 해요.”하연은 손을 휘휘 저으며
안나의 얼굴은 순간 어두워졌지만 이내 설명했다.“예전에는 그랬죠. 하지만 지금은 저와 아무 관계도 아닙니다.”하연이 바보도 아니고, 안나의 태도가 전과 180도 달라진 게 무엇 때문인지 당연히 알고 있다.바로 자신의 진짜 신분을 알았다는 거!하연은 겉웃음을 치며 여전히 차가운 눈으로 안나를 바라봤다.“안나 이사님, 일개 비서가 아무리 간이 배 밖으로 나와도 혼자서 이런 짓을 어떻게 벌여요? 누구의 지시를 받지 않은 이상.”하연의 말에 안나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이내 백지장이 되었다.이윽고 뭐라 설명하려고 입을 뻐끔거릴 때, 하연이 기회도 주지 않고 말했다.“안나 이사님, 이렇게 쓸데없는 짓 할 시간에 일에 신경 쓰세요. 밖에 나와 일하면 실적으로 얘기해야죠.”하연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상혁과 함께 뒤돌아 떠나버렸다.그 뒤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안나는 떠나가는 두 사람을 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심지어 지난날에 대한 후회 때문에 마음이 말이 아니었다.IM 그룹은 DS 와 FL 그룹과 협력하고 난 뒤 짧은 시간 동안 주가가 단번에 십여 퍼센트 급등해 원래 HY에 투자했던 투자자가 하나둘 모두 IM에 모여들었다.그 때문에 원래 HY와 비등비등하던 IM 그룹은 단번에 HY 그룹을 멀리 떨어뜨렸다.그리고 하연은 계약을 체결한 이튿날 곧바로 B시에 돌아왔다.하연이 회사에 도착하자 일찌감치 기다리고 있던 호현욱이 웃는 얼굴로 하연을 반겨주었다.“최 사장님, 오셨습니까?”하연 역시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계약 체결이 끝나 바로 돌아왔어요. 왜요? 저한테 볼일 있나요?”“최 사장님이 작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돼서 특별히 와 본 겁니다. 무사한 걸 보니 마음이 놓이네요.”하연은 눈썹을 치며 올리며 대답했다.“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별문제 없어요. 이렇게 큰 프로젝트를 아직 끝마치지 못했는데 제가 어떻게 쓰러지겠습니까?”하연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문을 열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문을 닫는 순간 얼굴에 드리
“응.”하연의 대답에 태훈은 칼 하나를 꺼내 택배를 뜯었다. 그랬더니 안에 있던 사진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이에 태훈은 다급히 사진을 모두 주어 하연에게 건넸다.“확인해 보세요.”그 사진을 본 순간 하연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이제야 모든 퍼즐이 맞아떨어지네.”‘이 모든 사건의 배후가 익숙한 사람일 거라고는 생가지도 못했는데.’“민혜경도 연루되어 있다니 일이 재밌어 지네.”하연은 입가에 냉소를 머금었다.“지난번에는 민혜경이 운이 좋아 몇 달 사이에 나왔지만, 이번에는 민혜경뿐만 아니라 이번 일에 가담한 사람들에게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드리면 어떤 책임이 뒤따르는지 알려줘야지.”“최 사장님 이 번 일은 제가 해결하겠습니다.”그 말에 하연은 손을 저었다.“아니야, 이번에는 내가 직접 할 거야.”그 시각, 자기 계획이 탄로 났다는 걸 알 리 없는 혜경은 하연이 D시에서 이미 죽었다고 확신했다.따라서 기분이 좋아진 혜경은 서준에게서 받은 블랙카드를 들고 백화점에서 쇼핑을 즐기며 크고 작은 쇼핑백에 자신을 위한 선물을 이것저것 고르고 나서야 그만뒀다.이윽고 하연이 운영하는 브랜드숍 앞에 멈춰서더니 뒤에 있는 겨호원에게 말했다.“이 가게 다 엎어! 내가 사들여서 싹 리모델링할 테니까. 해외 브랜드 화장품을 사들여 화장품 매장을 꾸릴 거거든.”“그리고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두 명 정도 고용해서 메이크업 서비스도 제공할 거야. 지금 젊은 여자애들은 모두 가꾸는 걸 좋아하니 장사가 잘될 거야.”“...”예나가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 리 없는 혜경은 황홀한 표정으로 자기 미래를 그렸다.그때 예나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물 한 대야를 퍼와 그대로 혜경에게 뿌렸고, ‘아!’ 하는 비명이 들리더니 혜경은 단번에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어 버렸다.이윽고 예나는 혜경이 반응할 새도 없이 싸늘한 목소리로 비아냥거렸다.“대낮부터 꿈꾸고 있다니. 이제 좀 정신이 들어?”혜경은 얼굴에 묻은 물을 모두 닦아냈지만 여전히 처참한
정예나는 이 말을 듣고 얼굴빛이 급격히 변했다.“뭐라고 하셨죠?”예나의 표정이 당황한 것을 보고, 민혜경은 웃음을 터뜨렸다. 굉장히 거만하고 광기 어린 웃음이었다. 마치 이날이 드디어 온 것처럼.“믿기지 않나요? 하지만 사실이에요. 최하연은 D시에서 이미 죽었어요. 곧 이 소식이 당신 귀에도 들어갈 거예요.”그러자 예나는 참지 못하고 완전히 폭발했다. 그리고 빗자루를 집어 들고 혜경을 향해 휘둘렀다. “이 나쁜 년, 추잡하고 더러운 불륜녀, 쓰레기보다 더 쓰레기 같은 년, 내가 여기서 헛소리 못 하게 해 줄게. 내가 널 죽여버리겠어!”혜경은 급히 피하면서도 입을 놀렸다. “하하하, 어디 한번 해봐! 네가 날 욕해도 최하연은 다시 살아나지 않을 거야. 어쩌면 지금쯤 시신도 온전치 않을 걸.”“내가 충고 하나 할게. 하연에게 많은 종이돈을 준비하는 게 좋을 거야. 그러면 저 세상에서 걔가 너를 보호해 줄 거야.”예나는 눈이 붉어지며 혜경의 앞에 다가가 뺨을 세게 때렸다. 하지만 혜경은 아픔을 느끼지 않는 듯 계속 웃음을 터뜨렸고, 옆에 있던 보디가드가 재빨리 예나를 제지했다. 예나는 두 명의 보디가드를 떨쳐낼 수 없어 분통이 터졌고, 결국 보디가드에게 밀려 가게 문 앞에 쓰러졌다.혜경은 잔인한 웃음을 지었고 이내 한쪽 다리를 절뚝이며 허리를 지탱했다. 그러고는 예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와 싸우려면 너희는 아직 멀었어. 다음 생애에서도 최하연은 나의 상대가 되지 못할 거야! 안타깝긴 하다. 하연의 죽음을 직접 보지 못했으니. 하하하!”그 말을 끝으로, 혜경은 주저 없이 돌아서서 떠났다. 그리고 예나는 멍하니 서서 그저 혜경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곧 예나는 정신을 차렸고 즉시 전화기를 꺼내 하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하연은 전화를 받지 않았고, 예나는 순간 절망에 빠졌다. 그러자 두려움에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렸다. “하연아, 제발 전화 좀 받아!”예나는 여러 번 전화를 걸었지만 하연은 받지
정예나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정말 점점 더 건방지네.”그러자 최하연은 예나를 달래며 말했다. “적이 방심하면 망하기 마련이야. 나도 걔와의 문제를 해결할 때가 됐어.”전화를 끊고 나서, 정태훈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사장님, 곽대철 씨와 연락이 되었습니다. 내일 저녁 8시에 드래곤 펜션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하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시간에 도착할 거라고 전해줘.”이에 태훈이 되물었다. “F 국 본부에 알려야 할까요? 인력을 배치할까요?”“그럴 필요 없어. 우리 지역의 보안 인력을 데려가면 충분해. 여기는 법치 사회이고, 상대도 무모한 짓을 하지 않을 거야.”“알겠습니다, 사장님.”태훈이 나간 후, 하연은 창밖을 바라보며 이 도시의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책상을 두드리며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다음 날, 저녁 7시.훈련된 보디가드들이 DS그룹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하연은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서 회의에 참석했다. 개조된 검은색 자동차는 도로를 따라 달려 드래곤 펜션에 도착했다.“사장님, 도착했습니다.”하연은 검은색 작업복을 입고 있었고 차에서 내려 냉철한 표정으로 펜션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입구에 도착하자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연 아가씨, 정말 용감하시네요. 혼자서 오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하연은 고개를 들어 40대 중반의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건장한 피조물에 중년으로 보였다. “곽대철 씨, 소문으로 익히 들었습니다.”하연은 걸음을 멈추고 대철 옆에 앉아 있는 남자를 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유심히 살펴보는 것을 느꼈다. 하연은 그 남자를 알아봤는데 바로 사진 속 민혜경과 함께 있던 남자, 심영수였다. 영수는 눈빛이 어두워지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하연 아가씨, 앉으세요!” 대철은 하연을 자리에 앉히며, 곧바로 사람들에게 차를 내오라고 지시했다.“가만히 서 있지 말고, 아라비카 원두를 간 커피를 하연 아가씨에게 타 드려.”하지만 하연은 그 말을 무시하며, 대철 앞에 있는
이 일에 대해 곽대철은 알지 못했기에 의아해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죠?”그러자 최하연은 가식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이쯤 하시면 됐는데, 곽대철 씨는 왜 모르는 척하시죠?”이에 대철의 얼굴이 즉시 어두워졌고 옆에 있는 심영수에게 말했다. “영수, 무슨 일이야? 하영 아가씨를 어떻게 건드렸는지 솔직히 말하지?”이 말을 들은 영수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고, 곧 대철의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속삭이자 대철은 그 말을 듣고는 갑자기 탁자를 쳤다. “이런 멍청한 놈!”영수는 깜짝 놀라며 대철을 진정시키려 했다.“형님, 화내지 마세요. 제가 그땐 순간적으로 충동을 아니 충동적이었습니다.”대철은 마음속의 분노를 억누르며, 하연 앞에서는 화를 내지 않았다. 심영수는 대철과 오랜 시간 함께해온 오른팔이었다. 그랬기에 지금 하연 때문에 영수를 처벌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애써 웃으며 말했다. “하연 아가씨, 무슨 오해가 있지 않을까요?”그러자 하연은 대강 상황을 짐작하고 말했다. “곽대철 씨, 저는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어요. 그런데 오해라고요?”대철은 하연의 신분을 알고 있었고 대철은 B시에서 어느 정도 세력을 가졌지만, 하연과 정면으로 맞설 용기는 없었다. 그래서 화해를 시도하며 직접 커피 한 잔을 따라 하연에게 건넸다. “하연 아가씨, 저희 부하가 결례를 범했습니다. 사과의 의미로 이 커피를 제 사과로 받아 주시고 화해하면 안 될까요?”그러자 하연은 냉소하며 손을 뻗어 커피잔을 쳤고 잔이 땅바닥으로 떨어져 깨졌다. 이에 영수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 “당신! 이렇게 무례하게 굴면 형님도 더는 사과하지 않을 거야. 도대체 뭘 원하길래 이러는 거야?”영수의 말에 하연은 눈을 들어 영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원하는 건 쉬워요. 심영수 씨 목숨을 원하거든요.”짧은 말 속에 담긴 위압감에 모두가 떨었다. 그들은 한 여자가 이렇게 강력한 기운을 뿜어낼 줄 몰랐다. 몇 초 후, 영수는 비웃으며 말했다. “내 목숨을 원한다고?
“하연 아가씨, 어떻게 하실 건가요?”최하연은 곽대철의 의도를 대략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분명히 말했다. “곽대철 씨, 체스는 체스고, 문제는 문제입니다. 설명이 필요합니다.”대철은 모든 체스 말을 제자리에 놓기 시작했고 체스 말을 움직이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체스 한판으로 결정합시다. 만약 하연 아가씨가 이기면, 영수를 데려가세요. 제가 막는 일은 없을 겁니다.”“하지만 하연 아가씨가 지면, 우리 사이의 원한은 이로써 끝나는 겁니다. 과거의 일은 모두 잊어야 합니다.”체스판은 도박판 같다는 말이 대체로 이런 의미였다. 심영수는 대철의 말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마 대철이 자신을 보호하려 한다는 것으로 알아들었다. 왜냐하면 체스를 둔다고 하면 대철의 실력은 B시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실력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하연이 영수와 체스를 둔다면, 이길 가능성이 없었다.“어떻게 하실 건가요? 최 사장님, 도전할 용기가 있나요?” 영수는 조롱하며 말했다. 하연이 이 도전에 응하기만 한다면, 반드시 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하연은 살짝 고개를 젓자 대철은 하연이 겁먹은 줄 알고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하연이 곧 말했다. “그러기엔 이 판이 너무 작아요.”하연의 말에 대철은 흥미를 느꼈다.“하하하. 하연 아가씨, 이보다 더 큰 내기가 있나요?”그러자 하연은 진지하게 말했다. “이 자리에 오래 계셨죠? 이제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넘겨주는 게 어떨까요?”이에 영수는 불같이 화를 냈다. “그게 무슨 뜻이야! 감히 우리 형님을 건드리려는 거야? 우리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아?”하지만 하연은 영수의 말을 무시하고 대철을 바라보았다. “만약 곽대철 씨가 진다면, 이 작은 조직의 리더를 바꿔야죠. 안 그래요?”대철은 진지한 얼굴로 하연의 말을 고려했다. 그리고 하연이 진지하게 말하자 승리에 대한 자신감이 다시 생겼다.“하연 아가씨, 만약 당신이 이긴다면, 제가 제 자리를 당신에게 넘겨 리더로 인정하겠습니다.”“또한, 하연 아
옆에 있던 심영수가 조용히 말했다. “형님, 잠시 쉬었다 하시는 게 어떨까요?”하지만 곽대철은 손짓으로 영수를 막으며 말했다. “관전하는 사람은 말하지 않는 법이야, 이 규칙도 모르나?”이에 영수는 바로 침묵하며, 시선을 최하연에게로 돌렸다. 하연은 내내 평온하게 체스판을 바라보며, 얼굴에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비록 이번 체스 게임이 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지만,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이에 영수는 속으로 냉소하며 생각했다. ‘계속 잘난 척해봐라, 얼마나 버티는지 보자.'“안 돼, 안 돼, 왜 내 캐논을 먹으려고 해.” 대철은 급히 말을 끊으며 말했다. “내가 이 수를 잘못 두었네요. 이 수를 철회할 수 있습니까?”대철은 자기 말을 원래대로 되돌리며 말했다. “영수가 제 사고를 어지럽히는 바람에 생각이 흐려졌습니다. 하연 아가씨, 한 수 되돌릴 수 있겠습니까?”하연은 말없이 대철을 바라보았고, 표정으로 대철에게 되묻고 있었다. ‘그게 되겠습니까?’표정으로 거절하는 하연에 대철은 낯빛이 어두워졌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좋아요, 먹히면 먹히는 거죠!”대철은 자기 말을 체스판에서 빼내었다. 원래 팽팽했던 체스판에서 하연이 분명히 우세를 점하게 되었고 대철의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토록 강한 상대는 처음이었고 하연의 실력은 예상 밖이었다.대철은 더욱 신중 해졌고, 체스 경기는 한 시간 이상 계속되었지만, 승부를 가릴 수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인내심이 뛰어났다.“하연 아가씨, 아가씨는 제가 존경하는 첫 사람입니다. 저랑 이렇게 오래 체스를 둘 수 있다니.”대철은 체스를 20년 넘게 연구해 왔다고 대철과 체스를 둔 사람 중에 30수를 넘긴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하연의 체스 실력은 완전히 압도했다.“과찬입니다. 저도 어릴 때 할아버지께 배운 것이 전부입니다. 평소에는 잘 두지 않거든요.”대철은 속에서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하연 아가씨, 너무 겸손하시군요.”그리고 하연은 마지막 말을 움직이며
“지금 정규인은 어디에 있나?” “제가 확인한 바로는, 아직 동남아에 있습니다.” 상혁은 외투를 집어 들고 일어섰다. “현장에 가보자.” 나가기 전에 상혁은 다시 침실로 발길을 돌렸다. 하연은 그네 의자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뒤에서 하연의 긴 머리를 정리해주며 말했다. “DL그룹 내부에 문제가 생겨서 처리해야 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기다려줄래?” 하연은 상혁의 눈 속에 아직 남아 있는 욕망을 알아차렸다. “기다릴게.” 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빠르게 나갔다. 상혁이 탄 검은 차가 빠르게 출발했고,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되어 있던 차가 상혁이 떠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뒷좌석에 있던 남자는 긴장을 풀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잘했어.” 옆에 있던 여자는 몸을 떨며 좌석에서 미끄러져 반쯤 무릎을 꿇은 자세로 말했다. “상무님, 정규인의 아내가 진작부터 자기 남편과 고경수의 딸에 대한 불륜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경찰이 정규인의 아내를 의심하지 않을까요?” 부남준은 그녀를 흘끗 보고 냉소적으로 말했다. “정규인의 아내는 오늘 밤 밖에서 돈 쓰느라 많이 돌아다녔어. 인증과 물증이 다 있지. 이번 사고는 단순한 사고일 뿐이지, 인위적인 것이 아니야.” “황연지.” 남준은 몸을 앞으로 기울여 연지의 턱을 들어 올렸다. “부상혁에게도 그렇게 말해.” 연지는 약간의 공포를 담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미 재무 보고서를 받았어요. 아마 저를 의심할지도 몰라요.” “네가 부상혁에게 충성을 다 바치는데, 왜 너를 의심하겠어?” 남준은 흥미로운 듯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날 최하연을 다치게 한 건 정말 잘했어.” 그날 그 일은 바로 남준이 직접 지시한 것이었다. 연지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 사람... 이미 저를 의심하고 있어요. 평소라면 제가 그런 행동을 할 리가 없다는 걸 알 거예요. 게다가, 그 사건은 그 사람과 하연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잖아요?
알고 보니 하연이가 졸업하던 그 해부터 상혁은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오늘까지 ‘여주인’의 도착을 기다렸던 것이다. 상혁은 하연에게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마셔, 그리고 자. 진정 효과가 있는 와인이야.” 오늘 상형이가 고른 와인은 안정을 돕는 효능이 있는 와인이었다. 하연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도 내 수면 패턴을 기억하고 있다니, 놀랍네요. 나는 당신을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는데, 주슬기는 당신을 위해 꿀물까지 챙겨주더군요.” 상혁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 안 마셨잖아.” 이 대답에 만족한 하연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위 안 좋은 거 알면서도 그렇게 술을 마셨어요? 나 화나게 하려고 일부러 그런 거죠?” “맞아.” 상혁이 솔직히 인정했다. “널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넌 신경도 안 쓰잖아.” “누가 신경 안 쓴다고 그래? 나 이렇게 와 있잖아...”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상혁은 하연을 품에 안아버렸다. “손이현이 바로 한명준이라는 걸 너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는, 네가 한명준과 함께 떠날까 봐 두려웠어.”그 짧은 한마디가 지금까지의 모든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하연은 그의 품에 단단히 안겨 있으며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렇게 나를 믿지 못했어요?”“아니, 나 자신을 믿지 못한 거야.”하연은 잠시 놀라움에 눈을 크게 떴다.‘내가 봐도 상혁 오빠는 거의 완벽한 사람인데, 오히려 자신을 믿지 못했다니...’상혁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네 앞에 서면, 난 자신감이 없어.”그 말을 듣고 하연은 몸을 비틀어 빠져나가려 했지만, 상혁은 오히려 더 단단히 그녀를 끌어안았다.“하지만 요즘 난 다시 우리 하연이 앞에서 자신감을 되찾았어.”하연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멈춰 섰다. 그 말의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 이번에 자신이 상혁에게 먼저 다가갔고, 솔직한 마음을 전했으며, 상혁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 모습까지 모두 보여주었으니까.“하지만 그럴수록 더 두려워졌어
상혁은 조용히 그 자리에 서서 하연의 눈물 어린 고백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 하연의 모든 억울함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당신이나 한명준이나 다 똑같아요!! 나를 이토록 오랫동안 속였어요!! 보호한다는 명분이었지만, 그 속에 숨겨진 의도는 내가 다 알고 있었어요.” 하연이 한 걸음 더 다가가자, 상혁의 몸에서 진한 술향이 풍겼다. “하지만, 모든 게 밝혀진 후에도, 난 당신을 원망하지 않았어요. 당신이 나를 위해 그랬다는 걸 알아요. 당신이 날 사랑했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당신이 나를 떠나는 거죠?” 하연은 울기 시작했다. 그 눈빛은 마치 길을 잃은 아이처럼 혼란스럽고 불안했다. 최근의 갈등은 하연의 모든 안정감을 무너뜨렸다. 한때 하연은 상혁이 영원히 자신 곁에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확신이 무너졌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누구도 한 사람만을 영원히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조차도... 하연도 상혁이 좋은 남자라고 생각하며 문제는 자신에게 있었을 거라고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경계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고, 다른 남자에게도 마음 한구석에 남겨진 미련이 있었다. 그녀의 눈물은 끊임없이 흐르고, 상혁은 그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다시는 내 앞에서 울지 마.” 하연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남자에게 있어서, 사랑할 때 가장 강력한 무기가 여자의 눈물이었는데, 이제는 내 눈물조차도 통하지 않는 건가...?’ “오늘 저녁은 우연이었어. 주슬기가 나와 할 일이 있어서 만난 거지, 약속한 게 아니었어.” 상혁은 먼저 해명했다. 하연의 마음은 다시 조금 안도했다. “하지만 주슬기과 당신은...” “그럼 너랑 한명준은 또 무슨 사이인데?” 상혁은 하연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눈물을 많이 흘린 탓에 하연의 얼굴은 한층 더 차가워져 있었다.“양 국장님께서 같이 식사하자고 하셔서 간 것뿐이에요. 데이트는
“우리는 이제 가야 해요.” 하연은 이현에게 말했다. 그는 취기가 오른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하연아, 네가 춤추는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어. 그해에 너 혼자 춤출 때, 나는 현장에 있었어. 그때 너를 알지 못한 것이 정말 아쉈어.” 하연은 그가 말하는 순간을 기억해 냈다. 학교 축제 때, 하연은 독무를 했고, 무대 위에서 춤을 췄던 그 장면이었다. 이때, 하연의 등 뒤에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하연은 몸을 숙여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야 해요.” 이현의 손이 하연의 손가락을 잡았다. “우리 같이 가자.” 하연은 머리가 더욱더 아파지며 갑자기 테이블 위에 있던 꿀물을 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래요.” 더 이상 얽히지 않기 위해, 양국성은 안도한 듯 하연과 함께 이현을 부축하여 방을 나섰다. 문을 나서는 그 순간, 안에서 유리잔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쨍그랑’하고 잔이 깨지는 소리가 방 안에 퍼졌다. 양국성은 하연과 이현이 같은 차를 타지 않았고, 하연은 이현을 부축해 차에 태운 후, 몸을 숙여 그의 안전벨트를 매주었다. 그녀는 운전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하며 말했다. “조심해서 집에 돌아가요.” “하연 씨.” 이현은 하연의 손이 다시 잡혔다. 하연은 눈을 들어 보았는데, 이현의 눈은 맑았다. “당신이 취하지 않았군요.” “마지막에 부상혁이 저에게 질문을 하나 했어요.” 하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현을 응시했다. “부상혁이 저에게 물어본 것, 바로 예전에 제가 하연 씨를 지키지 못했는데, 이제는 할 수 있겠냐고...” 하연의 손이 순간 떨렸다. 자기 손을 당겨 빼내고 돌아서려 했지만, 다시 이현의 손에 잡혔다. “저는 할 수 있다고 말했어요. 저는 이제 능력이 있어요!! 예전처럼 우물쭈물하는 한명준이 아니에요!! 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라도 하연 씨와 함께하고 싶어요!!” 이런 말을 하는 이현을 바라보는 하연의 마음도 무척 복잡했다. “부상혁 씨는 뭐라고 했어요?”
하연은 고집스럽게 말했다. “국내든 해외든, 저도 차를 좋아하지 않아요. 너무 쓰잖아요.” 상혁은 시선을 이현에게 옮기며 담담하게 말했다. “여기서는 제가 주인이라, 한 상무님께 차를 대접하는 건 좀 그렇죠.”그는 슬기에게 술 한 잔을 따라주라는 신호를 보내며 말했다. “제가 먼저 한 상무님께 한 잔 올립니다.”독한 술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지만, 상혁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하연은 손에 힘을 주어 옷자락을 꽉 쥐었고, 마음속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그렇다면 저도 주인 중 한 사람인 셈이니, 비록 처음 만난 건 아니지만, 한 상무님과 최 사장님이 함께 있는 걸 보는 건 처음이니까 저도 한잔 해야겠군요.” 슬기는 예의 바르게 웃으며 말했지만, 그녀가 상혁 옆에 있는 모습은 마치 오랜 부부처럼 자연스러웠다. 이현은 슬기의 말을 듣고 나서 기분이 좋아지며 또 잔을 받아들이고, 결국 두 잔을 기꺼이 마셨다. 그러나 슬기는 계속해서 말했다. “최 사장님은 차도 술도 안 마시나요?” “하연이는 안 마십니다.” 이현은 하연을 보호하듯 그녀를 뒤로 숨기며 말했다. “제가 대신 마시죠.” 결국 그는 총 네 잔을 마셨다. 하연은 분명 보았다. 상혁이 무심히 탁자에 올려놓은 손등에 핏줄이 선명하게 부풀어 올랐고, 그건 상혁이 점점 위험해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것은 그가 곧 자신의 감정에 따라 충동적으로 행동할 전조였다. “훌륭한 주량이군요. 이렇게 된 이상, 한 상무님과 기회가 닿으면 한 번 취하도록 달려보겠네요.” 상혁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술병을 집어 들고 병뚜껑을 따며 말했다. “몇 년 전에는 한 상무님과 직접 대면할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에서야 기회를 잡았으니, 이것도 인연이겠죠.” 이현은 상혁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았다. 그것은 오랜 세월 쌓인 불만과 질투였다. 단순히 이현의 신분이 아닌, 하연의 마음을 흔들었던 ‘한명준’의 존재에 대한 것이었다. 하연을 어릴 때부터 지켜온 상
슬기는 몇 가지 요리를 더 주문하고는 웃으며 고개를 들어 말했다. “또 만났네요, 최 사장님.” 하연은 너무나 어색해서 순간 뒤로 물러서고 싶었다. ‘이 두 사람이 저녁을 같이 먹고 있어?!’ 상혁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술을 따라 잔을 들어 올리며 이현에게 권했다. “한 상무님, 한잔하시죠.” 이현은 여유로운 태도로 하연에게 말했다. “부 대표님께서 이렇게 성의를 보이시는데, 시간도 아직 여유롭고, 함께 하시죠.” 하연은 도망칠 길이 없었다. “지난번 만남은 소울 칵테일에서였죠. 그때 이후로 참 오랜만이네요. 그 가게 주인이 이제 한 회사의 상무님으로 변신하셨다니.” 상혁은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이현에게 술잔을 건넸다. “그때 부 대표님의 배려 덕분에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습니다.” 이현은 잔을 들어 올리며 상혁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이 술잔, 그때의 감사함을 표하는 겁니다.” “잠깐!! 술을 마시면 안 돼요!!” 하연은 상혁이 잔을 드는 순간 본능적으로 외쳤다. 순간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하연에게 쏠렸다. “제 말은...” 하연은 사람들 앞에서 어쩔 수 없이 해명했다. “비서가 일찍 퇴근했다고 하니까... 직접 운전해야 하니 술은 피하는 게 좋겠어요.”이현은 하연의 이 말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며 은근히 기뻐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부대표님께서도 저를 너무 어렵게 하시진 않을 거라 믿습니다.”상혁은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차가운 기운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잔에 든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최 사장님께서 한 상무님을 정말 많이 신경 쓰시나 봐요. 오늘 뉴스도 봤는데, 두 분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며 함께 걸어가는 모습이 참 낭만적이고,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시더라고요.”슬기는 미소를 지으며 한 마디를 더했다.“이 잔은 제가 최 사장님께 바칩니다.”하연은 슬기를 무시하고 오직 상혁만을 바라봤다. 상혁
상혁의 눈 속에 ‘짙게 깔린 먹구름’은 더욱 깊어졌다. 그는 몸을 뒤로 기대면서 슬기가 내민 후추가 들어가 있는 국을 건드리지 않았다. 의사가 당부했듯이, 그의 위장은 매운 음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특히 후추 같은 자극적인 음식은 더더욱 피해야 했다.이미 30분이 지나갔지만, 옆 방에서는 아직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상혁은 셔츠의 단추를 하나 더 풀었다.옆 방에서는, 양국성은 무언가를 눈치챈 듯,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방 안에는 하연과 이현, 두 사람만이 남았는데,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하연은 자리에 앉아 말을 들은 뒤, 오랜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저도 이미 한명준 씨에 대해 조사했어요. 전에 한명준 씨가 팀 내에서 누군가의 모함을 받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조금 전 말한 그 내용은 잘 알고 있었어요.”이현도 놀라지 않은 채 말했다. “하연 씨, 여전히 저를 신경 쓰고 있잖아요.”그의 직설적인 말에 하연은 당황했다. “전 그저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한명준 씨와 전혀 상관없었어요.”“B시에서 재판이 열리던 날, 저는 한서준을 만나러 갔어요. 그때의 상황에 관해 묻자, 한서준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어요. 하연 씨는 그날, 학교에서 저를 만나지 못한 것에 화가 나서 B시까지 찾아왔고, 마침 저와 비슷하게 생긴 한서준을 보고 저라고 착각했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수년 동안 한서준에게 저라고 믿으며 굽신거리며 살아왔다는 거였어요.”이 이야기를 할 때, 한서준은 분노에 찬 눈으로 피가 맺히듯 붉어진 눈을 하고 난간을 붙들고 고함을 질렀다.“이 말을 듣고 네가 만족했냐? 기뻤냐?”이현은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몇 년 동안, 하연 씨 마음속에 정말 저에 대한 사랑은 없었던 거예요?”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하연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녀는 한서준을 사랑하지 않았고, 한서준에게 느낀 감정은 단지, 그를 옛날의 한명준으로 착각했기 때문이었다.서빙하는 직원은 방 안의 이상한 분위기를 모
하연이 예상했던 답과 똑같았다.하연은 입술을 꾹 누르고 일어나 문을 열었다.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그러니까, 하연 씨는 진작부터 제 정체를 알고 있었던 거죠? 그 사실을 뒤늦게 안 게 아니고요.”“저는 왕씨 가문의 삶이 싫어해요.” “그런데 이제는 왕씨 가문으로 돌아갔잖아요.” 하연은 몸을 옆으로 돌려 정확하게 지적했다.이현은 자리에 앉아 술기운에 머리가 띵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문 밖을 보았다. 남녀 한 쌍이 지나가는 게 보였고, 남자의 시선이 잠시 이현에게 떨어졌다가 이내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그 남자는 바로 부상혁이었다.이현은 시선을 거두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제가 한명준으로 돌아가려면 왕씨 가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어요.” “하연 씨, 지금 저에게 원망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지만, 괜찮아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연 앞에 서서 아슬아슬한 거리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부씨 가문의 부남준이 권력을 잡으려는 걸 들었어요. 누가 끝까지 웃을지 아직 몰라요. 하연 씨도 신중하게 선택했으면 좋겠어요.”“부 대표님, 이쪽입니다.” 반대편에서 주슬기가 웃으며 손짓했다.그 순간, 들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상혁이 본 것은 바로 하연과 ‘한명준’의 다정한 모습이었다.하연은 즉시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창가 쪽으로 가서 가방을 집어 들었다. “한 상무님, 제가 먼저 가야 할 것 같아요. 한 상무님은 정말 마음이 있다면 양 국장님에게 말씀을 좀 잘 드리세요. 한 상무님의 능력이라면 문제없이 처리할 수 있을 거예요.”“제가 그때 일부러 우리 약속했던 장소에 안 나온 게 아니에요. 누군가의 모함을 당한 거였어요.” 이현은 하연의 퇴장을 막으려는 듯 무겁게 말을 꺼냈다.하연의 등이 순간 경직되었다.“뭐라고요?” ...아무리 고급스러운 여자라도, 아름다운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 하는 마음은 참을 수 없었다.슬기는 수사 해당화 아래에서 사진을 몇 장 찍은 후,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제가
전용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해 문이 천천히 열리자마자 주슬기가 눈에 들어왔다.“부 대표님.” 슬기는 공손하게 인사하며 미소를 띠고 다가갔다. “우연히 지나가는 길에 들러봤는데, 이렇게 마주치다니 운이 좋네요.”상혁은 코트를 들고 약간 무심한 태도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나요?”“원래는 없었는데요... 지금은 저녁 식사나 함께할까 해서요. 몇 가지 상의할 일이 있거든요.” 슬기는 재빠르게 대답하면서도 적절한 거리를 유지했다.상혁은 본능적으로 거절하려다가 잠시 생각한 뒤, 뜻밖에도 승낙했다.“좋아요, 장소는 제가 정하죠.”슬기는 의아했지만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네, 좋아요.”곧 원신민이 급하게 와서 상혁의 지시를 받았다. “오늘 당장 시내에서 가장 큰 식당에 방을 예약해.”그곳의 방은 최소한 3일 전에 예약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기에, 원신민은 바쁘게 움직였다. 슬기는 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의할 게 큰일은 아닌데, 이렇게 정식으로 예약할 필요는 없을 텐데요.”상혁은 태연하게 말했다. “업무 관련된 일이라면 허술하게 할 수 없죠.”상혁은 대수롭지 않게 밖으로 나갔고, 그가 탄 엘리베이터와는 다른 엘리베이터가 마침 내려오고 있었다.“부 대표님의 비서가 낯이 익어요. 어디서 본 적 있죠?” 슬기가 호기심을 보였다.이 업계에서, 특히 이사급의 비서라면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닐 것이다. 원신민은 과거에 이씨 가문의 장남을 도와주면서 정계와 조직폭력배 쪽 모두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방을 예약하는 것은 그에게 쉬운 일이었다.그 식당의 매니저가 직접 나와 원신민을 맞이했다. “원 비서님, 이렇게 갑자기 방문해 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방을 예약하신다고요? 1층과 2층은 이미 만석이지만, 최상층에 있는 방은 아직 비어있습니다. 그곳을 부 대표님께 해 드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원신민은 상혁이 슬기와의 식사에 그렇게 화려한 공간이 필요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손으로 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