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원 당일 상혁은 커다란 꽃다발을 하연에게 선물했다.“앞으로 매일 건강해.”하연은 꽃을 받아 들고 싱긋 웃었다.“고마워요, 상혁 오빠.”그때 웃는 얼굴로 다가온 하성은 두 사람을 번갈아 훑어보다니 끼어들었다.“하연아, 우리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기나 해? 너 그날 얼마나 위험했는지 모르지? 상혁이 백 교수님 모셔온 덕에 네가 겨우 산 거야. 제대로 감사 표시해.”현승을 언급하자 하성은 그제야 하연의 수술을 마친 뒤부터 현승이 보이지 않다는 걸 알아챘다.“백 교수님은 어디 있어? 왜 안 보여?”“휴가 갔어. 늘 이렇게 신출귀몰하니 신경 쓸 거 없어.”“그래도 저 살려준 생명의 은인인데 나중에 꼭 감사 인사라도 해야겠어요.”“응, 나중에 약속 잡을게.”하연의 진지한 말투에 상혁이 대답했다.곧이어 병실에서 나와 병원을 빠져나가려던 세 사람은 모퉁이를 돌 때 동시에 굳어버렸다.멀지 않은 거리에 서준이 서서히 일어나면서 하연을 바라봤다. 못 본 사이 서준은 많이 초췌해졌지만 두 눈은 여전히 빛이 났다.하성은 서준을 보자마자 욕설을 퍼부으려 했지만 상혁이 이내 막아섰다.“하연아, 우리 먼저 밖에서 기다릴게.”하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두 사람이 떠난 뒤 서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괜찮아?”“아주 좋아. 걱정해 줘서 고마워.”하연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많이 걱정했어.”“왜 아직도 안 돌아가?”“너 보지 못하니 안심이 안 돼서.”“아, 이제 봤으니 그만 돌아가.”“최하연!”서준은 하연을 불러 세우더니 미련이 남은 말투로 말했다.“예전에 내가 누구를 이렇게 중요하게 여길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 그런데 네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 네가 진작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걸 알았어.”“하, 지금 장난해? 애초에 내가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겼을 때는 어디 있다가 이제 와서 이래? 그때도 내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잖아. 그때는 어디 있었는데? 아, 애인과 함께 산부인과에 있었지?”게다가 마침
하연이 나오자 두 사람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타.”상혁의 말에 하연이 올라 타자 차는 곧바로 출발했다.차창 밖을 내다보며 사색에 잠기자 왠지 모르게 점점 슬퍼졌다.왜 안 그렇겠는가?청춘을 바쳐 마음에 두고 있던 사람을 잊는 일인데.인생에 또 얼마나 많은 5년이 있을까?하지만 하연은 이미 모든 걸 내려놓았다. 한때 뜨겁게 사랑해 온몸을 기꺼이 내던졌던 사랑이 이대로 끝난 게 조금 아쉬울 뿐이었다.잠깐 생각에 잠겨 있던 하연은 시선을 거두더니 물었다.“저한테 약 쓴 사람은 누구예요?”그 말에 하성이 헛기침을 했다.“그건 왜 갑자기 물어?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넌 끼어들지 마.”“만나보고 싶어요.”하성과 상혁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상혁이 끝내 입을 열었다.“네 큰오빠가 그 사람들 잡아들였으니 만나고 싶으면 하민한테 물어봐.”하연이 핸드폰을 꺼내 전화하려고 하자 하성이 막았다.“하연아, 왜 그렇게 황소고집이야? 됐어, 바로 그쪽으로 가자.”기사는 하성의 명을 듣고 바로 핸들을 꺾어 목적지로 향했다.D시는 지형이 복잡하고 구릉과 산봉우리가 많아 교통이 국내만큼 편리하지 않다. 때문에 도시를 벗어난 뒤부터는 계속 오솔길을 따라 갔다.그렇게 약 반 시간쯤 달린 뒤 차는 겨우 목적지에 도착했다.그곳은 한적한 마을이었는데 입구에 두 줄로 갈라선 경호원들은 하연을 보자마자 공손하게 인사했다.“아가씨, 어서 오세요.”하연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물었다.“사람은?”“안에 있습니다.”“안내해.”경호원의 안내로 하연 일행은 웬 복도를 가로질러 안으로 들어갔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부터 비명소리와 채찍 소리가 섞여 들렸다.“아가씨, 사람은 안에 있습니다.”문을 열자마자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에 하연은 무의식적으로 코를 막았다. 이윽고 눈에 들어온 건 몇 명의 아시아인이었다.피부가 찢기고 살이 터져 겨우 숨을 붙이고 있던 사람들의 눈은 하연을 보자마자 공포감으로 뒤덮였다.하연은 입가에 냉소를 지으며 채찍질을 멈추라고 명령하고는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우리 입에서 그 어떤 정보도 알려고 하지 마. 천한 목숨 가져가려거든 마음대로 하든가!]하연은 종이를 갈기갈기 찢어버리며 냉소를 지었다.“그래도 입은 무겁네? 너희들이 그런다고 내가 못 찾을 것 같아?”하연의 말에 놈들은 조금도 동여하지 않았다.그때 하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B시 곽대철.”간단한 다섯 글자에 놈들의 눈동자가 불안한 듯 흔들렸다. 그 반응을 본 하연의 눈은 이내 어두워졌다.“내 추측이 맞나 봐?”“아니야! 우리는 곽대철이랑 아무 사이도 아니야. 당신이 거슬려서 없애버리려 한 것뿐이라고!”말을 못 하는 줄 알았던 놈 하나가 다급히 변명했지만 하연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이제 와서 그런 말이 소용 있을 것 같아?”하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뒤돌아서더니 싸늘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가치 없으면 폐기물과 다를 게 없지. 처리해.”“네, 아가씨.”하연은 말을 마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그제야 놈들은 조급했는지 연신 애원했다.“아가씨, 살려주세요.”“저희가 잘못했습니다.”“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제발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하지만 하연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저 자식들 정말 비겁한 놈들이야. 기회를 줄 때는 그대로 날리더니 무섭긴 무서웠나 봐.”하성이 참지 못하고 투덜거리자 하연이 발걸음을 멈추며 눈살을 찌푸렸다.“제가 곽대철이랑 아무런 접점도 없고 미움을 산 적도 없는데, 왜 제 목숨을 노렸을까요?”그 말에 하성이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이번 일이 복잡해서 형이 조사하고 있어. 며칠 후면 독 결과가 나올 거야.”“네, 제가 B시에 도착하면 처리해야겠어요.”말을 마친 세 사람은 함께 그곳을 떠나 호텔로 돌아왔다.IM 그룹 대표 강시원은 미리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하연을 가장 좋은 방으로 안내했다.광산에서 벌어진 사고 때문에 강시원은 이미 두려움을 겪은 상태다.게다가 하연의 신분이 얼마나 귀한지 체감했으니 특별히
하지만 안나 역시 말을 마치자마자 사무실 안 티브이에서 생방송을 확인했다.그리고 그걸 본 순간 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이... 이럴 리가?”안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최하연이 정말 최씨 가문 공주님이었다고?’‘그렇다면 내가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드린 거잖아!’안나는 당장이라도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그때 안나의 반응을 살피던 주자철이 화난 말투로 말했다.“너희가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봐! DS 그룹과의 협력이 무산된 것 때문에 회사가 몇천억을 손해 봤는지 알아?”안나는 충격에 몸을 비틀거렸다.하지만 현재 안나의 머릿속에는 회사 손실보다 하연에게 저지른 무례가 떠올랐다. 만약 하연이 그걸 빌미로 책임을 묻는다면 안나는 아마 벌레처럼 순식간에 짓밟힐 거다.“주, 주 대표님. 이건 다 지아가 혼자 저지른 짓이에요. 저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요. 이제 지아도 해고 처리됐으니 화 푸세요.”확실히 이제 와서 돌이킬 수 있는 상황도 아닌지라 주자철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됐어. 나가 봐.”안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재빨리 사무실을 빠져나갔다.이윽고 문을 닫기 바쁘게 어디론가 전화했다.“당장 최고급 선물 세트 준비해 줘. 무조건 최고급이어야만 해. 준비해서 나한테 가져와.”전화를 끊은 안나는 회사 일도 제쳐두고 혼자 회사를 빠져나왔다.한편, 계약식이 끝난 뒤 IM 그룹은 최고급 호텔에서 파티를 준비했다.하연과 상혁은 이 호텔에서 가장 귀한 귀빈이기에 모두가 극진히 대접했다.심지어 호텔을 드나드는 D시의 크고 작은 회사 사장들마저 연신 다가와 두 사람에게 술을 권했다.“최 사장님, 어쩜 여성분이 이렇게 남성보다 더 훌륭하게 사업을 해내셨나요? 정말 존경스럽습니다.”“DS 그룹의 프로젝트를 D시에서 진행하는 건 우리 D시의 영광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최 사장님의 능력은 모두가 알고 있으니 앞으로 저희 그룹도 손잡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네요.”“...”하연
하연은 다급히 고개를 돌리며 상혁의 눈을 피했다.상혁이 진심을 아주 명확히 말했지만 하연은 여전히 대답을 해줄 수 없었다.순식간에 공기 속에 적막이 흘렀다.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상혁이 손을 뻗어 하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대답 서두를 필요 없어. 잘 생각해. 난 급하지 않아.”하연은 그제야 눈을 들어 상혁을 바라봤다.그 순간 머릿속에 온통 상혁과 그동안 지냈던 모든 장면이 떠올랐다.아마 이 세상에서 상혁보다 더 하연에게 잘해주는 사람을 찾기는 어려울 거다.“상혁 오빠, 저한테 시간을 좀 줄 수 있어요?”“응. 그래.”상혁의 가벼운 대답에 하연은 숨을 돌려 하늘을 바라봤다.하연이 아무리 지난 날의 내려놓으려 해도 마음속 한구석에는 여전히 대학 시절 정의감 넘치던 그 남학생이 남아 있다.하연은 저도 모르게 서준의 얼굴을 떠올렸지만 서준한테서 이제 다시는 예전의 감정을 느낄 수 없다.“최 사장님을 만나야 한다고요. 들어가게 해주세요.”“죄송합니다. 최 사장님은 지금 파티 참석 중이시라 손님을 만나기 어렵습니다.”그 시각, 문 앞에서 경비원이 안으로 들어오려는 안나를 막아섰다.하지만 안나는 안간힘을 쓰며 안으로 들어오려 하며 경비원과 충돌했다.“최 사장님께 드리려고 이 많은 선물을 가져왔는데 제발 들어가게 해주세요.”경비원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최 사장님의 명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그런 권한이 없습니다”안나는 화가 나 발을 동동 굴렀지만 현재로서는 방법이 없었다.그때, 하연과 상혁이 마침 걸어 나왔고, 하연을 본 안나는 눈을 반짝이며 멀리서부터 손을 흔들었다.“최 사장님, 저는 HY 그룹 안나예요. 전에 만난 적 있는데 혹시 기억 나시나요?”안나한테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알 리 없는 하연은 눈살을 찌푸렸다.그때 경비원이 다급히 앞으로 다가와 하연의 의견을 물었다.“최 사장님, 이분이 자꾸만 사장님을 만나고 싶다고 소란을 피웠습니다.”“들어오게 해요.”하연은 손을 휘휘 저으며
안나의 얼굴은 순간 어두워졌지만 이내 설명했다.“예전에는 그랬죠. 하지만 지금은 저와 아무 관계도 아닙니다.”하연이 바보도 아니고, 안나의 태도가 전과 180도 달라진 게 무엇 때문인지 당연히 알고 있다.바로 자신의 진짜 신분을 알았다는 거!하연은 겉웃음을 치며 여전히 차가운 눈으로 안나를 바라봤다.“안나 이사님, 일개 비서가 아무리 간이 배 밖으로 나와도 혼자서 이런 짓을 어떻게 벌여요? 누구의 지시를 받지 않은 이상.”하연의 말에 안나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이내 백지장이 되었다.이윽고 뭐라 설명하려고 입을 뻐끔거릴 때, 하연이 기회도 주지 않고 말했다.“안나 이사님, 이렇게 쓸데없는 짓 할 시간에 일에 신경 쓰세요. 밖에 나와 일하면 실적으로 얘기해야죠.”하연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상혁과 함께 뒤돌아 떠나버렸다.그 뒤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안나는 떠나가는 두 사람을 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심지어 지난날에 대한 후회 때문에 마음이 말이 아니었다.IM 그룹은 DS 와 FL 그룹과 협력하고 난 뒤 짧은 시간 동안 주가가 단번에 십여 퍼센트 급등해 원래 HY에 투자했던 투자자가 하나둘 모두 IM에 모여들었다.그 때문에 원래 HY와 비등비등하던 IM 그룹은 단번에 HY 그룹을 멀리 떨어뜨렸다.그리고 하연은 계약을 체결한 이튿날 곧바로 B시에 돌아왔다.하연이 회사에 도착하자 일찌감치 기다리고 있던 호현욱이 웃는 얼굴로 하연을 반겨주었다.“최 사장님, 오셨습니까?”하연 역시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계약 체결이 끝나 바로 돌아왔어요. 왜요? 저한테 볼일 있나요?”“최 사장님이 작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돼서 특별히 와 본 겁니다. 무사한 걸 보니 마음이 놓이네요.”하연은 눈썹을 치며 올리며 대답했다.“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별문제 없어요. 이렇게 큰 프로젝트를 아직 끝마치지 못했는데 제가 어떻게 쓰러지겠습니까?”하연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문을 열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문을 닫는 순간 얼굴에 드리
“응.”하연의 대답에 태훈은 칼 하나를 꺼내 택배를 뜯었다. 그랬더니 안에 있던 사진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이에 태훈은 다급히 사진을 모두 주어 하연에게 건넸다.“확인해 보세요.”그 사진을 본 순간 하연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이제야 모든 퍼즐이 맞아떨어지네.”‘이 모든 사건의 배후가 익숙한 사람일 거라고는 생가지도 못했는데.’“민혜경도 연루되어 있다니 일이 재밌어 지네.”하연은 입가에 냉소를 머금었다.“지난번에는 민혜경이 운이 좋아 몇 달 사이에 나왔지만, 이번에는 민혜경뿐만 아니라 이번 일에 가담한 사람들에게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드리면 어떤 책임이 뒤따르는지 알려줘야지.”“최 사장님 이 번 일은 제가 해결하겠습니다.”그 말에 하연은 손을 저었다.“아니야, 이번에는 내가 직접 할 거야.”그 시각, 자기 계획이 탄로 났다는 걸 알 리 없는 혜경은 하연이 D시에서 이미 죽었다고 확신했다.따라서 기분이 좋아진 혜경은 서준에게서 받은 블랙카드를 들고 백화점에서 쇼핑을 즐기며 크고 작은 쇼핑백에 자신을 위한 선물을 이것저것 고르고 나서야 그만뒀다.이윽고 하연이 운영하는 브랜드숍 앞에 멈춰서더니 뒤에 있는 겨호원에게 말했다.“이 가게 다 엎어! 내가 사들여서 싹 리모델링할 테니까. 해외 브랜드 화장품을 사들여 화장품 매장을 꾸릴 거거든.”“그리고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두 명 정도 고용해서 메이크업 서비스도 제공할 거야. 지금 젊은 여자애들은 모두 가꾸는 걸 좋아하니 장사가 잘될 거야.”“...”예나가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 리 없는 혜경은 황홀한 표정으로 자기 미래를 그렸다.그때 예나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물 한 대야를 퍼와 그대로 혜경에게 뿌렸고, ‘아!’ 하는 비명이 들리더니 혜경은 단번에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어 버렸다.이윽고 예나는 혜경이 반응할 새도 없이 싸늘한 목소리로 비아냥거렸다.“대낮부터 꿈꾸고 있다니. 이제 좀 정신이 들어?”혜경은 얼굴에 묻은 물을 모두 닦아냈지만 여전히 처참한
정예나는 이 말을 듣고 얼굴빛이 급격히 변했다.“뭐라고 하셨죠?”예나의 표정이 당황한 것을 보고, 민혜경은 웃음을 터뜨렸다. 굉장히 거만하고 광기 어린 웃음이었다. 마치 이날이 드디어 온 것처럼.“믿기지 않나요? 하지만 사실이에요. 최하연은 D시에서 이미 죽었어요. 곧 이 소식이 당신 귀에도 들어갈 거예요.”그러자 예나는 참지 못하고 완전히 폭발했다. 그리고 빗자루를 집어 들고 혜경을 향해 휘둘렀다. “이 나쁜 년, 추잡하고 더러운 불륜녀, 쓰레기보다 더 쓰레기 같은 년, 내가 여기서 헛소리 못 하게 해 줄게. 내가 널 죽여버리겠어!”혜경은 급히 피하면서도 입을 놀렸다. “하하하, 어디 한번 해봐! 네가 날 욕해도 최하연은 다시 살아나지 않을 거야. 어쩌면 지금쯤 시신도 온전치 않을 걸.”“내가 충고 하나 할게. 하연에게 많은 종이돈을 준비하는 게 좋을 거야. 그러면 저 세상에서 걔가 너를 보호해 줄 거야.”예나는 눈이 붉어지며 혜경의 앞에 다가가 뺨을 세게 때렸다. 하지만 혜경은 아픔을 느끼지 않는 듯 계속 웃음을 터뜨렸고, 옆에 있던 보디가드가 재빨리 예나를 제지했다. 예나는 두 명의 보디가드를 떨쳐낼 수 없어 분통이 터졌고, 결국 보디가드에게 밀려 가게 문 앞에 쓰러졌다.혜경은 잔인한 웃음을 지었고 이내 한쪽 다리를 절뚝이며 허리를 지탱했다. 그러고는 예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와 싸우려면 너희는 아직 멀었어. 다음 생애에서도 최하연은 나의 상대가 되지 못할 거야! 안타깝긴 하다. 하연의 죽음을 직접 보지 못했으니. 하하하!”그 말을 끝으로, 혜경은 주저 없이 돌아서서 떠났다. 그리고 예나는 멍하니 서서 그저 혜경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곧 예나는 정신을 차렸고 즉시 전화기를 꺼내 하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하연은 전화를 받지 않았고, 예나는 순간 절망에 빠졌다. 그러자 두려움에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렸다. “하연아, 제발 전화 좀 받아!”예나는 여러 번 전화를 걸었지만 하연은 받지
고개를 돌려 반짝이는 눈빛으로 하연이 상혁을 바라보았다. “여긴 어디예요?” 상혁은 여자의 시선을 따라 앞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때 버려졌던 작은 섬인데. 나중에 내가 사들였어.” 그는 자연스럽게 하연의 손을 잡으며 손가락을 맞물렸다. “어때? 마음에 들어?” 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네, 좋아요!” ‘좋다니 다행이야. 오랜 시간 공들여 준비한 보람이 있었네.’이 순간을 상혁이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그는 하연의 손을 살짝 당기며 말했다. “일단 우리 아침부터 먹자. 그리고 이따가 바닷가에 데려가 줄게.” “좋아요.” 이 섬은 남태평양 깊숙한 곳에 자리한 작은 외딴섬이었다. 한때는 몇 년 동안 방치되어 잡초가 무성하고 황폐했지만, 우연한 기회에 상혁이 이곳을 매입해 전문가에게 맡겼다. 불과 2년 만에 섬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집도 짓고, 길도 만들고, 섬 전체가 아름답게 정돈되었다. 한낮이 되자 햇살이 섬을 따스하게 감쌌다. 하연과 상혁은 손을 잡고 깔끔하게 정돈된 자갈길을 따라 걸었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따뜻했다. 바람이 불어오자 하연의 원피스 자락이 살짝 날렸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멀리 두었다. 눈앞에는 하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고, 곱디고운 모래가 햇빛 아래 반짝이고 있었다. “저기 봐요! 야자수가 있어요!” 하연은 설레는 듯 조심스레 뛰어나갔다. 상혁은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그녀가 가는 곳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푸른 하늘 아래, 키가 큰 야자수들이 가지런히 줄지어 서 있었다. 커다란 잎사귀들이 바닷바람을 타고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마치 오랜 세월을 품고 바다의 이야기를 속삭이는 것 같았다. 하연은 신발을 벗고 모래 위에 발을 내디뎠다. 발끝을 감싸는 모래가 부드럽고도 간질거려, 묘한 전율이 발끝에서부터
가정부는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연신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다영은 손에 힘을 주며 눈빛을 날카롭게 번뜩였다. “정말이야?” 가정부는 몸을 잔뜩 웅크리며 떨었다. “정말 없습니다. 다만...” “다만 뭐?” 가정부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가 결국 떨리는 손으로 오늘 아침 신문을 내밀었다. “아가씨, 아가씨가 직접 보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다영이 반응하기도 전에, 가정부는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다영은 신문을 펼쳤고, 눈앞에 펼쳐진 것은 부남준의 충격적인 스캔들이었다. 각종 유명 유흥지에서 여성들과 어울리는 사진들, 도저히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장면들이 페이지를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게 말이 돼? 남준 씨가 나한테 이럴 리가 없어.’ “이건 거짓말이야!” 신문을 쥐고 있는 다영의 손의 힘에 의해 손이 하얗게 질려 갔다. 그녀는 결국 신문을 찢어버렸다. 그때, 송혜선이 아래층에서 천천히 내려오며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일이야?” 다영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송혜선에게 달려가 팔을 붙잡았다. “어머님, 남준 씨가 어떻게 저한테 이럴 수 있어요?” ‘이럴 수가 없어!’ 송혜선은 미간을 좁히며 한숨을 쉬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다영은 바닥에 떨어진 신문을 집어 송혜선에게 내밀었다. 송혜선은 대충 훑어보더니, 피식 웃음을 흘렸다. 부남준의 사생활에 대해서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애초에 회사 권력을 잡기 위해 정지철의 힘을 빌리지 않았더라면, 송혜선은 감히 정다영을 건드릴 일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 정지철은 구속됐고, 정씨 가문도 몰락했으니, 다영에게 아직 이용 가치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지 않았다면, 송혜선은 진작에 다영을 내쫓았을 것이다. 다영에게 이렇게 함부로 행동하지 못했을 것이다.“이런 신문 기사 하나에 휘둘리지 마라, 다영아.” 송혜선은 태연하게 다영의 손을 두드리며 말했다. “넌 남준이의 약혼녀야. 네가 남준이를 의심하면
상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묻지 않고, 조용히 하연을 품에 안았다. “아직 저녁 안 먹었지? 네가 좋아하는 요리들 준비해뒀어.” 하연은 눈을 들어 남자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정말 맛있는 저녁이 되겠네.” 상혁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코끝을 톡 하고 건드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우리 하연이, 여전히 먹을 것 앞에서는 못 참는구나.” 식탁 위에는 하연이 좋아하는 요리들이 정성스레 차려져 있었다. 마늘 버터 가리비, 새우찜, 전복찜, 킹크랩, 탕수육까지. 하연은 만족스럽게 식사를 즐겼고, 상혁은 그녀 옆에서 직접 새우를 까서 접시에 올려주었다. “부 대표님의 또 다른 재능이 새우 까기였나 봐요?” 하연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상혁은 마지막 한 마리를 까서 그녀 앞에 내밀며 미소 지었다. “너만을 위한 서비스야.” “그럼 나는 정말 행운아네요.” 하연은 미소를 지으며 새우를 한입에 넣었다. 그때, 테이블 위의 휴대폰이 깜빡였다. 원신민이 보낸 메시지였다. [부 대표님, 그 사진들 보낸 사람이 정다영 씨였습니다.]상혁은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으려 손수건으로 손을 닦고 나서야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메시지를 확인한 남자의 눈빛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이건 예상 밖이군.’ 그러나 그는 곧 차분하게 타이핑을 시작했다. [남준이는 요즘 뭐 하고 다니지?]원신민의 답장은 빠르게 도착했다. [부남준 상무님은 최근 여러 장소를 돌아다니며, 여성들과 어울리고 있습니다.]상혁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진 확보 가능해?][어렵지 않습니다.][서여은 편집장 요즘 기사거리가 부족하다던데, 도와줘야겠어.] 메시지를 받은 원신민은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부 대표님, 한 방에 끝내버리는구나.’ [알겠습니다, 대표님.]상혁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하연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아직 할 일이 남아있었어요?” “작은 일 좀 정리했어.” 그는
하연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이현의 말이 그동안 떠돌던 소문을 확인해 주는 듯했다. “갑자기 왜 그런 결정을 내렸어요?” 이현은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머금고, 감회가 어린 듯 말했다. “예전엔 내가 사업에서도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결국 나 자신을 과대평가했던 거죠.” 그는 눈을 들어 하연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말하는 게 나로서는 최선의 선택이겠지.’ 그가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듯한 이 말들 속에는,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체면을 지키면서도 이별의 뜻이 담겨 있는 방식이었다. 이현은 한때 상혁과 정면 승부를 벌이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하연을 자신의 곁으로 다시 두고 싶었다. 하지만 운명은 이현과 하연을 번번이 엇갈리게 만들었고, 끝없이 스쳐 지나가게 했다. 이현의 모든 집착과 미련은, 하연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마치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게 하연이 선택한 행복이라면, 이현은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건 조용히 축복해주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애초에 이 길을 선택하지 않는 게 나았을지도 몰라요. 차라리 계속 가게 운영하는 게 더 어울렸을 텐데...” “그래도 다행이죠. 너무 늦기 전에 깨달았으니까. 이제라도 진짜 의미 있는 일을 찾아야겠어요.” 하연은 조용히 남자의 말을 들으며, 친구로서 진심을 담아 말했다. “어쩌면 새로운 곳에서 당신만의 행복을 찾을 수도 있을 거예요.” 이현은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아요.” 그 순간, 오랫동안 이현의 마음속에 얹혀 있던 무거운 돌덩이가 스르르 사라지는 기분이들었다. 심지어 그 한때의 집착과 미련도 함께 흩어져 갔다. 그는 가볍게 몸을 돌려 준비해 온 선물 상자를 꺼내며 말했다. “새해가 지나면 하연 씨 약혼식이 있을 테니, 나는 참석하지 않겠지만, 이 약혼 선물만큼은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약혼 선물’이라는 말이 하연의 귀에 맴돌았다. 이것이 하연이 이현과 함께 들려온 남
“하연이, 집에서 지내는 게 더 편할 거예요. 저는 상관없습니다.” “너는 항상 우리 하연이만 생각하는구나.” 최동신은 농담 섞인 말투였지만, 어딘가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그래.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긴 하지. 집안 가정부들은 어릴 때부터 하연이를 봐왔으니, 생활 습관을 잘 알고 있고 이곳이 하연이가 편하긴 할 거야.” “아침부터 나갔다던데, 너랑 같이 있던 게 아니었어? 그럼 얘가 어디 간 거지?” 최동신은 가정부를 불러 말했다. “하연 아가씨한테 전화 좀 걸어보게.” “어르신, 이미 전화드렸는데 받지 않으십니다.” 최동신은 미간을 좁혔다. “무음으로 해놔서 못 들었나...” 하지만 최동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혁의 주머니에서 진동음이 울렸다. 문자 메시지였다. 상혁은 화면을 열어 확인하는 순간, 눈빛이 짙어졌다. 최동신은 미묘한 변화를 감지했다. “상혁아,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야?” 상혁은 잠시 멈칫했지만, 다시금 평정을 찾고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업무 관련한 일이라서요.” 최동신은 배려 깊게 말했다. “일이 우선이지. 얼른 가봐라.” 최씨 가문의 본가를 나서며, 상혁은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봤다. 문자 메시지 하단에 찍힌 ‘TW카페’ 네 글자가 유독 선명했다. ...평일 오전의 TW 카페는 한산했다. 한 시간 전. 다시 ‘한명준’이 된 손이현은 급히 카페로 향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창가 소파에 앉아 있는 하연이 눈에 들어왔다. 햇살이 유리창을 통해 여자에게 내려앉아,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함을 자아냈다. 이현의 발걸음도 순간 멈췄다. 그는 한동안 하연을 바라보며 흐트러진 숨을 고르던 중, 직원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손님, 몇 분이세요?” 이현은 가볍게 손짓했다. “약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곧장 하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다리게 했나요?” 하연은 시선을 들어 평온한 표정으로
“이게 뭐야?” 송혜선은 무심한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얼굴에는 별다른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시선만큼은 솔직했다. 하지만 사진 속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그녀의 눈빛이 확연히 달라지면서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사진을 낚아채고 하나하나 넘겨봤다. 사진마다 담긴 장면이 송혜선을 점점 흥분하게 만들었다. ‘흥, 최씨 가문의 귀한 딸이 두 남자를 동시에 만나고 있다니, 이거 재미있어지겠는데?’ 사진 속 남자는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고고한 분위기, 남다른 기품까지...비록 사진에는 전부 뒷모습만 담겨 있었지만, 남자가 결코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송혜선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모든 사진을 훑어본 뒤 나지막이 말했다. “이 정도는 그냥 친한 남녀 사이에서 있을 수 있는 일 아닐까? 선을 넘은 정황은 없잖아. 겉보기엔 별 문제 없어 보이는데?” 하지만 정다영의 생각은 달랐다. 이미 그녀는 오래전부터 하연의 일거수일투족을 사설 탐정을 통해 추적해왔다. 그리고 사진 속 ‘한명준’이라는 남자와 하연 이 둘 사이에는 단순한 친분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어머님, 이 남자가 누군지 아세요?” 다영의 목소리는 은근한 흥분을 담고 있었다. “바로 B시 한씨 가문의 사람이란다.” “B시 한씨 가문?” 송혜선은 순간적으로 하연의 전 남편이 한씨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하지만 자신이 분명 들은 바에 따르면 한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상태였다. “최하연의 전남편은 감옥에 간 걸로 아는데, 또 다른 한씨 가문 사람이 나타났다는 거예요?” “하여튼 복잡한 사연이 많았어. 한두 마디로 설명하기 어렵단다.” 다영은 하연과 ‘한명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는 몰랐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건, 이 일을 이용하는 것이었으니까.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죠. 중요한 건, 우리가 부상혁에게 무엇을 보여주느냐는 겁니다.” ‘남자
배가 항구에 서서히 가까워질 때, 허징인은 저 멀리 보이는 부두를 응시하면서 머릿속에서 끔찍했던 기억들이 마치 영화처럼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날의 비명, 피 냄새, 그리고 민찬의 얼굴...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고 싶지 않았는데...’ 그녀는 참았던 감정이 북받쳐 오른 듯 숨을 깊게 들이쉬며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난간을 꽉 잡은 여자의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하얀 손등에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허징인의 떨리는 손끝은 마음속 분노와 슬픔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때, 상혁이 조용히 허징인 곁에 다가왔다. 남자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바닷바람에 섞여 들려왔다. “배에서 내리면, 제 부하들이 안전한 곳으로 허징인 씨를 모실 겁니다. 모든 게 끝날 때까지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마세요.” 허징인은 거센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여자의 차가운 눈빛과 함께 낮고 냉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부 대표님, 하나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한겨울의 서리처럼 차가웠다. “제 남편이 부남준 밑에서 오랜 시간 일을 했어요. 물론, 제 남편도 깨끗한 사람은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저와 민찬이를 지키기 위해 부남준의 죄를 대신 뒤집어쓴 적도 많았어요.” 잠시 말을 멈춘 허징인은 숨을 고르며 상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 제 남편은 민찬이의 죽음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동안 자신과 부남준 사이에 있었던 모든 부정한 거래를 실토할 겁니다.” 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부 대표님께서 제 남편에게 이 소식을 전할 방법을 찾아주시길 바랍니다.” 허징인의 목적은 단순했다. ‘정규인을 이용해 부남준을 무너뜨릴 단서를 만들어야 해. 민찬이의 억울한 죽음을, 그리고 수많은 희생자들의 한을 풀기 위해!’ 상혁은 잠시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이윽고, 그의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상혁의 원래 무심하던 표정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주 작은 변화였지만, 그가 감정적으로 흔들렸다는 건 분명했다. 상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담배 한 갑을 꺼내 들었다. 남자의 길고 날렵한 손가락이 담배 한 개비를 집어 들고는 정확히 입술 끝에 물었다. 그다음엔 상혁은 침착하게 라이터를 켜고 담배를 태우기 시작했다. 그는 담배를 깊이 들이마신 뒤, 한순간 숨을 멈췄다가 연기를 천천히 내뱉었다. 연기 사이로 보이는 남자의 눈빛은 이전보다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이 판이 점점 흥미로워지고 있어.’ 그러나 허징인은 자신의 분노에 사로잡혀, 상혁의 변화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차가운 웃음을 터뜨렸다. “부남준은 제가 가진 증거를 빼앗으면 모든 게 끝날 줄 알았겠죠. 그래서 절 죽이고 모든 걸 덮으려 했던 거고요. 정말 어리석은 꿈을 꾼 거죠.” 허징인의 목소리는 점점 격앙되었다. 감정이 폭발하면서 그녀는 마치 스스로를 증명하려는 듯 말을 쏟아냈다. “부남준도 설마 이런 상황까지는 생각 못 했겠죠. 제가 이런 처지에 놓일 거라고는 꿈에도 예상 못 했을 거예요. 하지만 증거를 손에 넣는 순간부터 전 모든 걸 철저히 준비해 뒀어요. 단 한 치의 빈틈도 없도록 말이에요.” 상혁은 담배를 쥔 손을 잠시 멈추고, 허징인을 바라봤다. 남자의 눈빛엔 전에 없던 흥미와 약간의 감탄이 섞여 있었다. “허징인 씨, 오늘 정말 날 실망시키지 않는군요.” 허징인은 상혁의 반응에 반응하지 않았고, 대신 스스로를 비웃듯 쓴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처음엔 그저 제 아들과 평범하게 살고 싶었어요. 그 사람이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둔다면, 제가 가진 증거는 영원히 세상에서 사라졌을 겁니다.” 그녀는 한순간 말을 멈췄다. 그리고 다음 순간, 허징인의 눈이 새빨갛게 충혈되며,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폭발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에요. 그놈이 제 아들을... 민찬이를 죽였어요! 제 손으로 지켜야 했던
금발 남자의 얼굴엔 잔인한 기색이 스쳤다. 허징인과 민찬에게 단 한 줌의 자비도 보이지 않았다. “저년의 입과 코를 꽁꽁 막아. 빈틈 하나도 남기지 말고.” 허징인은 절망에 빠진 눈으로 민찬을 바라보았다. ‘내 아들... 우리 민찬이...!’ 울부짖는 어린 민찬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가운데, 그녀는 거대한 배의 20미터 높이의 갑판에서 차갑고 무자비하게 바다로 내던져졌다. 얼음처럼 차가운 바닷물이 온몸을 감싸고, 숨을 쉴 수 없는 답답함이 허징인을 집어삼켰다. 순식간에 의식은 멀어지고, 그녀의 몸은 깊고 어두운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여기서 이렇게 끝나는 건가...?’ 그러나 의식이 다시 돌아왔을 때, 허징인은 머리가 지끈거리고 무겁게 아파왔다. ‘아... 여긴 어디지?’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머리를 눌러본 뒤에야, 그녀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낯선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나는 바다에 던져졌는데... 대체 여긴 어디지?’ 그리고 그녀의 뇌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이름, 민찬. ‘민찬? 설마... 설마 내 아들...!’ 그 순간, 절망감이 몰려오며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나왔다. 갑자기, 문이 거칠게 열렸다. 허징인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뒷걸음질쳤다. ‘누구야? 또다시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너무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녀의 입술이 떨렸다. “부상혁 대표님...?” 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허징인 씨, 오랜만이네요.” 상혁 곁에 있던 원신민은 눈치를 보며 조용히 방을 나가고, 문을 닫았다. 허징인은 불신과 놀라움으로 가득 찬 표정으로 상혁을 바라보았다. “부 대표님, 어떻게... 어떻게 여기에...?” 여자의 목소리는 떨리고, 대답을 기다리며 불안감이 가득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지만, 허징인은 곧 머리를 굴렸다. ‘설마... 나를 구한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