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연이 웬 남자와 돌아온 걸 본 룸메이트들은 사냥감을 찾은 늑대처럼 득달같이 달려왔다.“방금 그 남자 누구야? 남자 친구? 너무 잘 생겼다!”“그러게. 근육질 몸매인 것 같던데, 너무 남성미 넘치더라.”“남친은 언제 사귀었어? 왜 나는 몰랐지?”“...”룸메이트들이 재잘재잘 질문하자 하연은 다급히 설명했다.“내 남자 친구 아니니까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뭐? 남자 친구가 아니라고? 그럼 이름이 뭔데? 나한테 소개해 줄 수 있어?”끊임없는 질문 세례에 하연은 그제야 상대와 두 번이나 만났는데 아직 이름도 모른다는 걸 알아챘다.“그건, 다음에 물어보면 알려줄게.”그 말에 룸메이트들은 너도나도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에 반해 하연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다음에 만나면 이름, 학원 등등 개인 정보를 제대로 물어봐야지.’그리고 하연이 기대했던 만남은 다음날 바로 이뤄졌다.“하연아, 저 사람 어제 너 데려다줬던 그 남학생 아니야? 왜 교무처로 불려 갔지?”룸메이트의 말에 하연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남자를 뒤따라 교무처로 향했다.이윽고 문에 바싹 기대 안을 확인했더니 안에는 어제 맞은 외국 남학생들이 불쌍한 표정으로 선생님께 일러바치고 있었다.“쌤, 저 아시안 놈이 어제 이유도 없이 우리를 때렸어요.”“학교에서 폭행을 저지르는 건 교칙에 어긋나는 거 아니에요? 저 자식 꼭 벌해주세요.”“아예 퇴학시켜 버리면 더 좋고요.”“...”외국 학생들의 비난에 남자는 귀찮다는 듯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유창한 언어로 툭 내뱉었다.“어제 그것도 많이 봐준 거야. 다음번에 또 만나면 그땐 이빨 다 털어줄게.”“그만!”선생님은 심각한 표정으로 남자의 말을 잘랐다.“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오면 학교도 더 이상 너를 받아줄 수 없어. 이렇게 뉘우치지 않으면 당장 교장 선생님께 말해 학교에서 제명하는 수가 있어.”“마음대로 하세요.”개의치 않는 듯한 남자의 태도에 선생님은 결국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때, 보다
하연은 싱긋 웃었다.“그럴 필요 없어요. 그쪽 정의의 사도잖아요. 어제 그 자식들이 먼저 그렇게 심한 말을 했으니 저였어도 그놈들 곤죽을 만들었을 거예요.”“여자애가 함부로 폭력을 휘두르면 안 되죠. 이런 일은 남자한테 시켜요.”이윽고 남자는 농담 반 진담 반 섞인 말투로 물었다.“그러고 보니 이름이 뭐예요?”“최하연. 여름 하 제비 연이에요.”“음, 기억해 둘게요.”“그러는 그쪽은요? 이름이 뭔데요? 계속 그쪽이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요.”남자는 싱긋 웃으며 의아함 가득한 눈으로 하연을 빤히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내 이름 알고 싶으면 모레 오후 세 시 반 서문에서 봐요. 그때 알려줄게요.”“뭐야!”하연은 불만 투로 중얼거렸지만 남자는 개의치 않고 손을 흔들었다.“모레 세 시 반, 잊지 마요.”하연은 떨떠름해서 입을 꾹 다물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날이 자꾸만 기다려졌다.그래서인지 시간은 무척 늦게 흘러갔다. 2년 같은 이틀이 지나 세 번째 날이 되자 하연은 아침 일찍 치장하고 예쁜 옷을 골라 입고는 오후 1시부터 서문에서 남자를 기다렸다.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 남자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하루, 이틀, 사흘...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기대가 점점 실망으로 변했고, 또 어느덧 2년간의 대학원 과정까지 마쳤지만 기다리는 남자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심지어 앞으로 평생 그 사람을 다시 만나지 못 할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던 2년 뒤, 하연이 졸업하고 F국으로 돌아갈 때 비행기 안에서 또 그 남자를 만났다.양복을 쫙 빼 입고 광택 나는 구두를 신은 남자의 모습은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조각 같은 얼굴에는 더 이상 가볍고 장난기 넘치는 분위기가 아닌 진지하고 무거운 분위기라 저도 모르게 잘못을 뉘우칠 뻔했다.‘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 사람이잖아?’“이봐요, 잠깐만요.”하연은 남자에게 다가가 막아서더니 분노와 서러움이 섞인 말투로 투덜댔다.“2년 전에 왜 약속 안 지켰어요? 제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요?”하연은
다른 사람을 통해 알게 된 남자의 이름은 한서준이었다.그리고 그 순간부터 그 세 글자는 마치 마법이라도 있는 듯 하연의 마음속에 새겨졌다.그 뒤의 일은 마치 소설 속에나 나올법한 것처럼 우연의 연속이었다.유연한 기회에 하연은 서준의 할머니 강영숙을 구했고, 그 덕에 강영숙은 하연을 제 손자의 부인으로 추천했다.3년 간의 결혼 생활이 마침 영화 필름처럼 머릿속에 언뜻언뜻 지나면서 지금껏 벌어졌던 모든 일이 그때 하연의 잘못된 선택으로부터 야기됐다는 걸 깨우쳐 줬다.하지만 3년이란 시간 동안 하연은 여전히 서준이 왜 저를 기억하지 못하는지 알지 못했다.병상에 누워 있던 하연은 속눈썹을 파르르 떨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코끝을 자극하는 소독수 냄새가 하연을 다시 현실로 잡아끌었다.“하연아, 정신이 들어?”잔뜩 흥분한 상혁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하연은 싱긋 웃었다.“상혁 오빠, 저 무슨 상황이에요?”“너 사흘 동안 혼수 상태에 빠져 있었어. 우리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그래도 이렇게 깨어났으니 망정이지.”하연은 그날 자기가 쓰러지기 전 누군가 제 코와 입을 막았다는 걸 떠올렸다.“누군가 저한테 미약을 썼어요.”그걸 말하고 나니 하연은 덜컥 겁이 났다.때마침 안으로 들어온 하민이 끼어들었다.“걱정하지 마. 너 그렇게 만든 사람 이미 잡았으니까. 하지만 이번 일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야.”하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의아한 듯 물었다.“대체 누구예요? 혹시 HY 그룹 쪽 사람이에요?”하민은 고개를 저었다.“HY 그룹은 이럴 배짱이 없어.”‘그럼 대체 누구지?’그 사이, 하민과 상혁이 눈빛을 교환했다.이 일로 하연을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말했다.“누구든 넌 상관하지 말고 우리한테 맡겨. 넌 지금 휴식이 필요해, 몸 잘 추스르고 회복하는 데만 전념해. 나머지는 걱정하지 마.”“하지만...”하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혁이 하연의 손을 잡았다.“건강이 제일 중요해. 다른 건 나중에 생각하자.”“
퇴원 당일 상혁은 커다란 꽃다발을 하연에게 선물했다.“앞으로 매일 건강해.”하연은 꽃을 받아 들고 싱긋 웃었다.“고마워요, 상혁 오빠.”그때 웃는 얼굴로 다가온 하성은 두 사람을 번갈아 훑어보다니 끼어들었다.“하연아, 우리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기나 해? 너 그날 얼마나 위험했는지 모르지? 상혁이 백 교수님 모셔온 덕에 네가 겨우 산 거야. 제대로 감사 표시해.”현승을 언급하자 하성은 그제야 하연의 수술을 마친 뒤부터 현승이 보이지 않다는 걸 알아챘다.“백 교수님은 어디 있어? 왜 안 보여?”“휴가 갔어. 늘 이렇게 신출귀몰하니 신경 쓸 거 없어.”“그래도 저 살려준 생명의 은인인데 나중에 꼭 감사 인사라도 해야겠어요.”“응, 나중에 약속 잡을게.”하연의 진지한 말투에 상혁이 대답했다.곧이어 병실에서 나와 병원을 빠져나가려던 세 사람은 모퉁이를 돌 때 동시에 굳어버렸다.멀지 않은 거리에 서준이 서서히 일어나면서 하연을 바라봤다. 못 본 사이 서준은 많이 초췌해졌지만 두 눈은 여전히 빛이 났다.하성은 서준을 보자마자 욕설을 퍼부으려 했지만 상혁이 이내 막아섰다.“하연아, 우리 먼저 밖에서 기다릴게.”하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두 사람이 떠난 뒤 서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괜찮아?”“아주 좋아. 걱정해 줘서 고마워.”하연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많이 걱정했어.”“왜 아직도 안 돌아가?”“너 보지 못하니 안심이 안 돼서.”“아, 이제 봤으니 그만 돌아가.”“최하연!”서준은 하연을 불러 세우더니 미련이 남은 말투로 말했다.“예전에 내가 누구를 이렇게 중요하게 여길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 그런데 네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 네가 진작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걸 알았어.”“하, 지금 장난해? 애초에 내가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겼을 때는 어디 있다가 이제 와서 이래? 그때도 내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잖아. 그때는 어디 있었는데? 아, 애인과 함께 산부인과에 있었지?”게다가 마침
하연이 나오자 두 사람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타.”상혁의 말에 하연이 올라 타자 차는 곧바로 출발했다.차창 밖을 내다보며 사색에 잠기자 왠지 모르게 점점 슬퍼졌다.왜 안 그렇겠는가?청춘을 바쳐 마음에 두고 있던 사람을 잊는 일인데.인생에 또 얼마나 많은 5년이 있을까?하지만 하연은 이미 모든 걸 내려놓았다. 한때 뜨겁게 사랑해 온몸을 기꺼이 내던졌던 사랑이 이대로 끝난 게 조금 아쉬울 뿐이었다.잠깐 생각에 잠겨 있던 하연은 시선을 거두더니 물었다.“저한테 약 쓴 사람은 누구예요?”그 말에 하성이 헛기침을 했다.“그건 왜 갑자기 물어?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넌 끼어들지 마.”“만나보고 싶어요.”하성과 상혁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상혁이 끝내 입을 열었다.“네 큰오빠가 그 사람들 잡아들였으니 만나고 싶으면 하민한테 물어봐.”하연이 핸드폰을 꺼내 전화하려고 하자 하성이 막았다.“하연아, 왜 그렇게 황소고집이야? 됐어, 바로 그쪽으로 가자.”기사는 하성의 명을 듣고 바로 핸들을 꺾어 목적지로 향했다.D시는 지형이 복잡하고 구릉과 산봉우리가 많아 교통이 국내만큼 편리하지 않다. 때문에 도시를 벗어난 뒤부터는 계속 오솔길을 따라 갔다.그렇게 약 반 시간쯤 달린 뒤 차는 겨우 목적지에 도착했다.그곳은 한적한 마을이었는데 입구에 두 줄로 갈라선 경호원들은 하연을 보자마자 공손하게 인사했다.“아가씨, 어서 오세요.”하연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물었다.“사람은?”“안에 있습니다.”“안내해.”경호원의 안내로 하연 일행은 웬 복도를 가로질러 안으로 들어갔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부터 비명소리와 채찍 소리가 섞여 들렸다.“아가씨, 사람은 안에 있습니다.”문을 열자마자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에 하연은 무의식적으로 코를 막았다. 이윽고 눈에 들어온 건 몇 명의 아시아인이었다.피부가 찢기고 살이 터져 겨우 숨을 붙이고 있던 사람들의 눈은 하연을 보자마자 공포감으로 뒤덮였다.하연은 입가에 냉소를 지으며 채찍질을 멈추라고 명령하고는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우리 입에서 그 어떤 정보도 알려고 하지 마. 천한 목숨 가져가려거든 마음대로 하든가!]하연은 종이를 갈기갈기 찢어버리며 냉소를 지었다.“그래도 입은 무겁네? 너희들이 그런다고 내가 못 찾을 것 같아?”하연의 말에 놈들은 조금도 동여하지 않았다.그때 하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B시 곽대철.”간단한 다섯 글자에 놈들의 눈동자가 불안한 듯 흔들렸다. 그 반응을 본 하연의 눈은 이내 어두워졌다.“내 추측이 맞나 봐?”“아니야! 우리는 곽대철이랑 아무 사이도 아니야. 당신이 거슬려서 없애버리려 한 것뿐이라고!”말을 못 하는 줄 알았던 놈 하나가 다급히 변명했지만 하연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이제 와서 그런 말이 소용 있을 것 같아?”하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뒤돌아서더니 싸늘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가치 없으면 폐기물과 다를 게 없지. 처리해.”“네, 아가씨.”하연은 말을 마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그제야 놈들은 조급했는지 연신 애원했다.“아가씨, 살려주세요.”“저희가 잘못했습니다.”“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제발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하지만 하연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저 자식들 정말 비겁한 놈들이야. 기회를 줄 때는 그대로 날리더니 무섭긴 무서웠나 봐.”하성이 참지 못하고 투덜거리자 하연이 발걸음을 멈추며 눈살을 찌푸렸다.“제가 곽대철이랑 아무런 접점도 없고 미움을 산 적도 없는데, 왜 제 목숨을 노렸을까요?”그 말에 하성이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이번 일이 복잡해서 형이 조사하고 있어. 며칠 후면 독 결과가 나올 거야.”“네, 제가 B시에 도착하면 처리해야겠어요.”말을 마친 세 사람은 함께 그곳을 떠나 호텔로 돌아왔다.IM 그룹 대표 강시원은 미리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하연을 가장 좋은 방으로 안내했다.광산에서 벌어진 사고 때문에 강시원은 이미 두려움을 겪은 상태다.게다가 하연의 신분이 얼마나 귀한지 체감했으니 특별히
하지만 안나 역시 말을 마치자마자 사무실 안 티브이에서 생방송을 확인했다.그리고 그걸 본 순간 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이... 이럴 리가?”안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최하연이 정말 최씨 가문 공주님이었다고?’‘그렇다면 내가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드린 거잖아!’안나는 당장이라도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그때 안나의 반응을 살피던 주자철이 화난 말투로 말했다.“너희가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봐! DS 그룹과의 협력이 무산된 것 때문에 회사가 몇천억을 손해 봤는지 알아?”안나는 충격에 몸을 비틀거렸다.하지만 현재 안나의 머릿속에는 회사 손실보다 하연에게 저지른 무례가 떠올랐다. 만약 하연이 그걸 빌미로 책임을 묻는다면 안나는 아마 벌레처럼 순식간에 짓밟힐 거다.“주, 주 대표님. 이건 다 지아가 혼자 저지른 짓이에요. 저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요. 이제 지아도 해고 처리됐으니 화 푸세요.”확실히 이제 와서 돌이킬 수 있는 상황도 아닌지라 주자철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됐어. 나가 봐.”안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재빨리 사무실을 빠져나갔다.이윽고 문을 닫기 바쁘게 어디론가 전화했다.“당장 최고급 선물 세트 준비해 줘. 무조건 최고급이어야만 해. 준비해서 나한테 가져와.”전화를 끊은 안나는 회사 일도 제쳐두고 혼자 회사를 빠져나왔다.한편, 계약식이 끝난 뒤 IM 그룹은 최고급 호텔에서 파티를 준비했다.하연과 상혁은 이 호텔에서 가장 귀한 귀빈이기에 모두가 극진히 대접했다.심지어 호텔을 드나드는 D시의 크고 작은 회사 사장들마저 연신 다가와 두 사람에게 술을 권했다.“최 사장님, 어쩜 여성분이 이렇게 남성보다 더 훌륭하게 사업을 해내셨나요? 정말 존경스럽습니다.”“DS 그룹의 프로젝트를 D시에서 진행하는 건 우리 D시의 영광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최 사장님의 능력은 모두가 알고 있으니 앞으로 저희 그룹도 손잡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네요.”“...”하연
하연은 다급히 고개를 돌리며 상혁의 눈을 피했다.상혁이 진심을 아주 명확히 말했지만 하연은 여전히 대답을 해줄 수 없었다.순식간에 공기 속에 적막이 흘렀다.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상혁이 손을 뻗어 하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대답 서두를 필요 없어. 잘 생각해. 난 급하지 않아.”하연은 그제야 눈을 들어 상혁을 바라봤다.그 순간 머릿속에 온통 상혁과 그동안 지냈던 모든 장면이 떠올랐다.아마 이 세상에서 상혁보다 더 하연에게 잘해주는 사람을 찾기는 어려울 거다.“상혁 오빠, 저한테 시간을 좀 줄 수 있어요?”“응. 그래.”상혁의 가벼운 대답에 하연은 숨을 돌려 하늘을 바라봤다.하연이 아무리 지난 날의 내려놓으려 해도 마음속 한구석에는 여전히 대학 시절 정의감 넘치던 그 남학생이 남아 있다.하연은 저도 모르게 서준의 얼굴을 떠올렸지만 서준한테서 이제 다시는 예전의 감정을 느낄 수 없다.“최 사장님을 만나야 한다고요. 들어가게 해주세요.”“죄송합니다. 최 사장님은 지금 파티 참석 중이시라 손님을 만나기 어렵습니다.”그 시각, 문 앞에서 경비원이 안으로 들어오려는 안나를 막아섰다.하지만 안나는 안간힘을 쓰며 안으로 들어오려 하며 경비원과 충돌했다.“최 사장님께 드리려고 이 많은 선물을 가져왔는데 제발 들어가게 해주세요.”경비원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최 사장님의 명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그런 권한이 없습니다”안나는 화가 나 발을 동동 굴렀지만 현재로서는 방법이 없었다.그때, 하연과 상혁이 마침 걸어 나왔고, 하연을 본 안나는 눈을 반짝이며 멀리서부터 손을 흔들었다.“최 사장님, 저는 HY 그룹 안나예요. 전에 만난 적 있는데 혹시 기억 나시나요?”안나한테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알 리 없는 하연은 눈살을 찌푸렸다.그때 경비원이 다급히 앞으로 다가와 하연의 의견을 물었다.“최 사장님, 이분이 자꾸만 사장님을 만나고 싶다고 소란을 피웠습니다.”“들어오게 해요.”하연은 손을 휘휘 저으며
최하성은 오늘 검정색 정장을 입고 등장했다. 그의 차가운 분위기와 단정한 모습은 단번에 모든 직원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최 대표님!”하성을 마주친 직원들은 공손하게 인사했다. 하성은 살짝 고개를 끄덕일 뿐, 시선을 주지 않고 빠르게 행사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오늘 저녁 만찬은 매우 풍성했다. 동서양의 요리가 조화를 이루며 대부분 직원들의 입맛과 식습관을 세심하게 고려한 모습이었다. 준비에 꽤 공을 들인 것이 분명했고, 결과적으로 반응도 좋았다. 연말 만찬이 시작되기 전, 하성은 DS그룹의 대표이사로서 무대에 올라 인사말을 했다. 하성은 차분한 걸음으로 무대에 오르며, 그의 존재감은 단번에 분위기를 압도했다. 그가 화려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단 몇 마디 간결한 말로도, 관중석에서는 뜨거운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번 연말 행사는 생중계되고 있었으며, 하성이 등장하자마자 팬들과 네티즌들이 빠르게 몰려들었다.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시청자 수가 십만 명을 돌파했다. [최하성 씨, 오랜만이에요! 보고 싶었어요!][연예계에 최하성이 없으니 허전한 기분이에요. 최하성 씨, 돌아와 주세요!][다들 동감! 언제쯤 복귀할 수 있는 거죠?][복귀 요청 99%!!][...] 팬들의 댓글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하성의 인기는 생중계 플랫폼 순위에서도 단연코 1위를 차지했다. 무대 아래에서 생중계를 담당하던 진행자는 이 뜨거운 열기를 놓치지 않고 하성에게 다가갔다. “최 대표님, 생중계 채팅창에 팬들이 사장님의 새해 계획에 대해 굉장히 궁금해하고 있어요. 오늘 이 특별한 밤에 팬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될까요?” 하성은 미소를 머금으며 카메라를 응시했다. 그 순간, 생중계 채팅창은 순식간에 폭발했다. 선물 아이콘이 화면을 뒤덮었고, 댓글은 끊임없이 새로 고침 되었다. “안녕하세요, 하성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저와 DS그룹을 응원해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도 DL 그룹
“어머님, 정말로 부 회장님과 결혼하세요?” 이 얘기는 다영에게 있어 꽤 충격적이었다. 세간에서는 송혜선과 부동건의 관계를 두고 여러 말이 떠돌았고, 그중 가장 많이 들려온 것은 송혜선이 ‘첩’이라는 점이었다. 한때 정지철 부인도 이 사실을 꽤 꺼려했던 터라, 다영은 송혜선이 이렇게 대놓고 정식으로 자리 잡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언제 결혼 승낙을 받으신 거예요?” 송혜선은 이미 불룩해진 배를 가볍게 쓸며, 깊은 눈빛 속에 숨겨진 야망을 드러냈다. “부회장님께서 말씀하시길, 새해도 지나고 이제 곧 아이가 태어날 테니 우리 모자에게 반드시 정당한 신분을 보장해 주시겠다고 하셨어.” “그러니... 다영아, 우리 남준이를 믿어야 해. 지금은 잠시 밀려난 상황이지만,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잖니?” 다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더욱 굳게 다졌다. “어머님, 걱정 마세요. 저는 언제나 남준 씨를 도울 거예요.” 송혜선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더욱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그래야지. 남준이도 절대 너를 저버리지 않을 거야.” 그러다 두 사람이 화제를 돌리며 덧붙였다. “지금 부 회장님이 부상혁을 중시하며 DL그룹의 운영을 맡긴 데는 이유가 있어. 결국은 부씨 가문의 장손이라는 명분 때문이지.” “하지만, 임신 초기에는 변수가 많아. 무슨 사고라도 생기면, 어떻게 되겠니?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잖니?” “만약 그 아이가 사라지면, 부상혁 쪽의 지렛대도 없어진 셈이니 남준이한테 분명 유리한 상황이 될 거야. 그렇지 않겠니?” “...” 다영은 멍하니 한참 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어머님, 그게 무슨 뜻이에요?” 송혜선은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조그마한 흰색 약병을 다영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 약은 무색무취야. 일반인이 먹으면 아무 이상이 없지만, 임신한 사람이 먹으면 삼 일 안에 유산이 돼.” 다영의 손이 떨리며 본능적으로 병을 놓치듯 뺐다. “어머님,
“정다영 씨의 상상력은 참 풍부하시네요.” 상혁은 입꼬리를 비틀며 약간의 비웃음을 섞어 말했다. “세상을 잘 모르는 아가씨다운 모습이라 참 순진하긴 한데, 이런 험한 세상에선 지나치게 순진한 건 별로 좋지 않아요.” 더는 말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듯, 상혁은 뒤돌아 떠났다. 다영은 마치 머릿속이 폭발이라도 한 듯, 귓가에서 찡하는 이명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럴 리 없어요, 남준 씨는 그럴 리 없어요!” 그녀는 낮게 중얼거리며 자신을 설득하려 애쓰며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이미 수없이 눌렀던 번호를 다급히 눌렀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건 여전히 차갑고 무미건조한 여성의 자동응답 소리뿐이었다. “안 돼!” 다영은 절망하며 비명을 지르고는 갑작스레 밖으로 뛰쳐나갔다. 깊은 겨울밤, 바람은 더욱 매섭게 몰아치고 있었다. ...창밖의 거센 바람에 창문이 덜컹이며 울렸다. 병원의 VVIP 병실 안. 다영은 온몸을 떨며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초점 잃은 눈동자는 텅 빈 듯했고, 난방이 틀어져 있어도 그녀를 감싼 차가운 공기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다영아, 이렇게 늦은 밤에 무슨 일이야?” 송혜선은 평소와 같은 말투로 물었고, 전혀 이상한 기색은 비추지 않았다. 실은 송혜선도 이미 알고 있었다. 정지철이 이제는 구속되고 정씨 가문이 더 이상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다영의 마음에는 여전히 남준의 존재가 얽매여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다영에게서 더 많은 가치를 끌어낼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송혜선 또한 명확이 알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스치자, 송혜선은 표정을 가다듬고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넸다. “자, 물 한 잔 마시고 몸 좀 녹여.” 다영은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린 듯, 송혜선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간절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님, 남준 씨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세요, 제발요!” 송혜선은 한숨을 쉬며 어쩔 수 없다
며칠 사이, 정다영은 차갑게 닫힌 문을 수없이 마주했다. 한때 주변 사람들이 다영을 떠받들며 찬란한 별처럼 여겼지만, 이제 집안의 사건이 터지자 사람들은 그녀를 피하려고만 했다. 마치 다영에게 다가가기만 해도 불행이 전염될 것처럼... 그렇게 다영은 세상의 차가운 이면과 인간관계의 허망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자연스레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바꾸었다. “송 여사와 남준이는 요즘 집에 없는 걸로 아는데, 정 다영 씨는 왜 여기에 있는 거죠?” 상혁은 평범한 어조로 물었지만, 그 말은 다영을 잠시 멈칫하게 했다. 그녀는 곧바로 대답했다. “남준 씨가 곧 돌아온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상혁은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그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날이 추우니 안에서 기다려요.” 말을 마친 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남겨진 건 남자의 차가운 뒷모습뿐이었다. 다영은 상혁을 따라가며 급히 소리쳤다. “부 대표님, 잠깐만요...” 상혁이 발걸음을 멈췄다. “무슨 할 말이라도?” 다영은 망설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며칠 동안 그녀가 이리저리 뛰어다닌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버지를 이 난관에서 구해내기 위해서... 그리고 지금, 아버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눈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제 아버지와 관련된 일입니다.” 상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건 검찰 소관이에요. 전문 변호팀을 고용하면 사건의 진행 상황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을 거예요.” 다영은 초조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부 대표님, 이건 분명 오해입니다. 제 아버지는 회사에 평생을 바친 분입니다. 아버지는 공문서를 위조하거나 계약서를 조작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녀는 자기 아버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즉, 정지철은 딸을 희생하더라도 자신의 미래를 망칠 행동은 절대 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분명히 이번 일에는 뭔가 숨겨진 진실
최씨 가문 본가 후원에 있는 온실에서는 조용히 바둑알이 내려놓아는 소리가 들렸다. 상혁과 최동신은 마주 앉아 바둑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상혁아, 지금 이 바둑판은 승부가 거의 결정 난 것 같은데!” 바둑판 위에서 흑과 백이 치열하게 맞서며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최동신은 한 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자네의 백돌이 반 집 차이로 우위를 점하고 있어. 대단해! 예전보다 실력이 많이 늘었어.” 상혁은 겸손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할아버지 기백이 여전히 넘치시니 제가 아직 배울 점이 많습니다.” 최동신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탄식했다. “늙었지. 이제는 예전 같지 않다.” 그러나 그는 곧 말을 돌려 흑돌을 손에 들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부터 자네도 조심해야겠어.” 최동신은 그 말을 하며 흑돌을 바둑판 위에 툭 하고 내려놓았다. 그 돌이 놓인 자리로 인해 한순간 바둑판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바둑판 위에 집중되었다. 상혁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손을 멈췄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우위를 점하고 있던 상황이 단 한 수로 인해 역전이 된 것이다. “할아버지의 바둑 실력은 늘 감탄할 따름입니다. 제가 이 점을 간과하고 놓치고 있었네요.” 상혁은 차분하게 패배를 인정하며 판세를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최동신은 손에 들고 있던 바둑알을 다시 주우며 훈계하듯 말했다. “그렇지. 이길 수 있는 상황도 한 수의 실수로 모두 망쳐버릴 수 있는 법이다.” 상혁은 최동신의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 최동신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들리는 말에 DL그룹의 실질적인 권한은 이제 자네가 잡았고, 자네 동생은 동남아 지사로 발령이 났다고 들었네.” “겉으로 보기엔 좋은 상황 같아 보이지만, 상혁이, 네가 한 수라도 실수하는 날엔 모든 걸 망칠 수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이 말은 단순한 충고 이상의 뜻을 담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남준은 무심코 말을 뱉었다. 그의 음성엔 조급함이 묻어 있었다. 남준은 방 안을 계속해서 왔다 갔다 하며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연말 이후로 예정되어 있지 않았나? 어떻게 앞당겨진 거지?” 연지는 침착하게 보고했다. “들리는 말로는 이번 사건이 중대한 만큼 생각보다 빠르게 처리되면서 연말 전에 재판이 열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남준은 발걸음을 멈추고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부상혁이 나를 궁지로 몰아넣고, 정규인의 입을 열어 내 약점을 찾아내려는 것이겠지.” 그는 잠시 멈칫하다가,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하지만 부상혁도 모르는 게 있지. 정규인의 입은 결코 열리지 않을 거란 사실을 말이야.” 연지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상무님, 그 말은 혹시...” 그러나 그녀의 말은 남준의 강렬한 눈빛으로 끊겼다. 서로의 눈이 마주친 순간, 연지는 남준의 의도를 즉각 이해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 정규인의 사건은 법원에서 열렸고, 법정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경찰들이 구치소에서 정규인을 호송해 나오자, 멀리서 그의 초췌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정규인의 기운 없는 모습에서 예전의 당당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법정 방청석을 둘러보다가, 맨 끝자락에서 누군가를 발견했다. 순간, 정규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는 갑작스럽게 방청석을 향해 달려들며 미친 듯이 외쳤다. “여기 왜 왔어! 당장 나가! 나가란 말이야!” 경찰들이 급히 정규인을 제지하려 했으나, 그의 필사적인 몸부림에 저지당했다. “진정해!” 경찰은 엄중히 경고했지만, 그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그러다 결국, 경찰봉이 그의 등을 강하게 내려쳤다. 퍽! 정규인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고, 그의 몸은 앞으로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방청석의 허징인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
“이모...” 하연은 조진숙을 꽉 끌어안으며 말문이 막혔다. 지금은 어떤 말도 조진숙에게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되든 간에, 이모 곁엔 항상 저희가 있어요.” 조진숙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하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고맙다.” ... 한적한 교외에 위치한 독채 빌라. 고급스러운 소형 승용차 한 대가 천천히 차고로 들어섰다. 황연지는 휴대폰으로 위치를 확인한 뒤,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빌라는 꽤 외진 곳에 있었고, 오랜 기간 비어 있었던 듯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연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상무님? 계신가요?”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텅 빈 집안의 메아리뿐이었다. 연지는 2층으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용기를 냈다. 계단 끝에 닫혀 있는 문 하나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상무님, 안에 계신가요?” 그녀는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잠시 망설이던 연지는 문을 조심스레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코를 찌르는 강렬한 술 냄새가 그녀를 덮쳤다. 연지는 본능적으로 코를 막고 안으로 더 들어갔는데, 방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낯익은 실루엣을 발견했다. “상무님?” 이사회 이후 부남준은 자취를 감췄고, 외부에서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없단다. 그렇게 된 지가 삼 일째였다. 연지는 재빨리 그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상무님, 괜찮으세요?” 남준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비록 지금의 그는 어딘가 지쳐 보였지만, 그 매서운 매의 눈은 여전히 날카로운 빛을 띄고 있었다. 그는 황연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입가에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너였구나?” 연지는 아침에 급히 소식을 듣고 서둘러 이곳으로 달려왔다. “상무님, 사라지신 며칠 동안 정다영 씨가 상무님을 계속 찾고 있었습니다.” 정다영은 남준을 찾기 위해 거의 미쳐버린 상태였고, 부남준을 찾을 수 있는 곳은 모조리 뒤지고 있었다.
저녁에 하연과 상혁은 음악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자마자 집 안의 불이 자동으로 켜졌다. “돌아왔니?” 하연과 상혁은 동시에 고개를 들어 소파에 홀로 앉아 있는 조진숙을 보았다. 지금의 조진숙은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어머니, 집에 계셨네요?” 조진숙은 자리에서 일어나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희 기다리고 있었어.” 하연은 활짝 웃으며 조진숙에게 다가가 옆자리에 앉았다. “이 늦은 시간까지 기다린 거예요? 일찍 주무시지 그러셨어요.” 하연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조진숙은 손을 들어 하연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너희가 안 들어오면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 하연은 그녀의 팔짱을 끼며 더 애교를 부렸다. “이모가 이렇게 저희를 걱정해주니까, 너무 좋아요!” 조진숙은 하연의 손등을 살짝 두드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사실 오늘은 너희에게 할 말이 있어서 기다린 거야.” 상혁은 소파의 다른 쪽에 앉아 조진숙의 말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하연과 눈빛을 교환한 상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하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모, 무슨 일 있으신 거예요?” 조진숙은 살짝 고개를 저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아무 일도 아니야. 그냥 네 동건이 삼촌이 송혜선과 결혼하기로 했다는 것뿐이야.” 이 말은 마치 고요한 연못에 큰 돌멩이를 던진 것처럼 분위기를 흔들었다. 상혁은 무의식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조진숙이 그를 불러 세웠다. “상혁아, 흥분하지 마라.” 상혁은 걸음을 멈추고 눈빛을 깊게 내리깔았다. “가서 직접 얘기를 해봐야겠어요.” “그럴 필요 없어.” 조진숙이 단호히 말하며 표정은 여전히 여유로웠고, 마치 이번 일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듯했다. “아들아, 이제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란다. 남녀가 서로 좋아해서 함께 사는 건 그저 대수롭지 않은 일일수도 있다. 하지만 결혼은 그런 장난스러운 일은 아니잖아. 네 아버지도
“이 말은...?” “회장님, 저랑 결혼해주실 수 있어요?” ... 카페에서. 부동건은 카페에서 오래 시간 조진숙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진숙이 마침내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부동건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가방을 받으려 손을 내밀었지만, 조진숙은 능숙하게 피해버렸다. “말해봐. 이렇게 급하게 나를 부른 이유가 뭐죠?” 부동건은 조진숙의 물음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짓으로 직원을 불렀다. “블루마운틴 한 잔, 반 설탕으로.” 조진숙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비꼬는 듯한 말투로 답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내 취향을 기억하다니 의외네요.” 부동건은 약간의 미안함을 느끼며 변명하듯 말했다. “그래도 한때 부부였잖아, 결국엔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거지.” 조진숙은 무심한 태도로 대꾸했다. “‘잘못했다’라는 말은 이미 너무 많이 들었어. 다른 표현은 없어?” “알겠어.” 부동건은 커피를 젓는 스푼을 천천히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회사는 이미 상혁이한테 넘겼어.” “응, 들었어.”조진숙은 가볍게 대답했고, 목소리는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무미건조한 톤이었다. “상혁이는 신중하고 믿음직스러워. 회사를 맡기기에 더없이 적합한 사람이야. 앞으로 상혁이하고 하연이는 그 얘들 둘은 함께 안정된 삶을 살게 될 거야.” “너도 알다시피, 하연이는 말 안 해도 좋은 아이라는 걸 당신도 알잖아. 하연이가 상혁이 곁에 있는 한, 상혁이는 하연이로 인해 고통받는 일은 없을 거야.” 조진숙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듯했다. “오늘 나를 부른 이유가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불렀어?” “아니야.” 부동건은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혼 후 두 사람이 이렇게 함께 앉아 대화하는 시간은 정말로 드물었다. 부동건은 오늘따라 조진숙을 천천히, 자세히 바라보았다. 세월은 참으로 잔인한 것이었다. 수많은 세월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