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은 병원 옥상에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저한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 가요? 민혜경 씨의 유산에 관한 일이라면 전 굳이 할 이야기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민진현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하연을 쳐다보며 말했다.“내가 사람들을 시켜 CCTV를 확인해 보았는데 그 당시 화면이 찍히지 않았더라고. 혜경이가 널 범인이라고 몰면 넌 절대 혐의를 벗어나지 못할 거야.”이 말을 들은 하연은 웃음을 터뜨리더니 비꼬듯이 말했다.“그렇다고 사실이 뒤바뀌진 않습니다.”민진현은 계속해서 말했다.“F국이 최씨 가문의 천하이긴 하지만, 우리 민씨 가문도 B시에서는 만만치 않은 존재야. 그리고 난 싸우는 것보단 화해하는 쪽이 더 내키거든.”하연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어떻게 화해하시려고요?”“2,000억을 배상금으로 주면 오늘 일은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도록 하지.” ‘다짜고짜 2,000억을 내놓으라고 말하다니.’“민 회장님은 보기보다 욕심이 많으시네요. 민씨 가문에 돈이 많이 모자란가 봐요.”하연의 말을 들은 민진현은 오히려 큰소리쳤다.“2,000억이 뭐 별 게라고.”“그러세요?”하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화해는 절대 못합니다. 전 민혜경 씨를 끝까지 고소할 생각이거든요.”하연은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지금 나랑 끝까지 싸우겠다는 건가?”“전 돈을 가지고 일을 해결하고 싶진 않거든요. 민혜경 씨의 아이가 어떻게 유산된 건지는 모두가 알고 있을 겁니다.”“혜경이가 널 범인으로 끝까지 몰면 네가 무슨 수로 혐의를 벗어나겠어?”“민 회장님은 지금 증거가 없다고 믿으시는 것 같은데, 어쩌면 제 손에 증거가 있을 지도 모르잖아요.”하연은 말을 마친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옥상을 떠났다. 민진현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콧방귀를 뀌며 주름진 손으로 소리 없이 지팡이를 잡았다.민진현이 다시 병실에 돌아왔을 때 혜경 한 사람만 병실에 남아 울고 있었다.“할아버지! 최하연 그년을 절대 가만두면 안 돼요!”혜경이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민진현은
일부 네티즌들은 DS그룹의 공식 사이트를 찾아가 댓글을 남기며 고소를 하기도 했다.바로 이때, 민씨 가문은 B시의 유명한 기자들을 초대하여 기자발표회를 열었다.혜경은 기자들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하연의 ‘악행’에 대해 일일이 이야기했다.“민혜경 씨, 지금 하신 말들이 모두 사실인가요? 정말 최씨 가문의 하연 아가씨 때문에 유산을 하신 거예요?”혜경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하연 씨가 절 밀었기 때문에 제가 넘어져 아이를 잃게 된 겁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이번 유산으로 인해 제 건강이 엄청나게 악화되어 앞으로 다신 아이를 가지지 못할지도 모른답니다...”혜경이 눈물을 흘리자 현장의 기자들은 모두 그녀를 동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혜경 씨,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최하연 씨께서 반드시 책임을 지게 될 겁니다.”“법률은 공평한 법이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마지막으로 민진현은 카메라를 보며 힘든 기색을 드러냈다.“저희 가족 모두 이번 유산 때문에 가슴이 아플 따름입니다...”“민 회장님,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인 가요?”“저희는 최하연 씨가 응당한 처벌을 받을 때까지 끝까지 싸울 겁니다.”민진현이 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누구든 실수를 하기 마련이니 최하연 씨한테 기회를 드릴 생각입니다.”민진현은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큰 소리로 말했다.“최하연 씨께서 저희 혜경이한테 사과하신다면 저희도 형사책임은 추궁하지 않겠습니다.”이 말을 네티즌들을 또다시 떠들썩하게 만들었다.[민씨 가문은 정말 도량이 넓네. 이렇게 큰일이 일어났는데 상대가 사과만 한다면 용서해 준다고 말하다니.][민씨 가문 사람들은 정말 착하네.][좀 이상하지 않아? 이렇게 큰일을 사과 하나만으로 용서해 주다니. 난 뭔가 수상한 것 같아.][좀 더 기다리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겠지.]...민씨 가문의 기자발표회를 본 네티즌들은 모두 하연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일은 계속해서 뜨거운 열기를 가지고 있었다.민씨 가문
[인터넷에 발표된 거짓 보도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최하연 씨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누구도 해친 적이 없습니다. DS그룹은 이 일을 경찰에게 맡겨 법대로 처리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거짓말로 여론을 선동한 민씨 가문에 대해서는 법적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인터넷의 여론들은 또다시 뒤집혔다.[그럼 민씨 가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쇼를 했던 거네.][그러게 죄 없는 사람을 왜 모함하고 난리야!][형사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말한 건 딱 봐도 도둑이 제 발 저린 거네!][민씨 가문은 정말 뻔뻔하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네티즌들이 토론하고 있을 때 녹음된 음성이 폭로되었는데 그 안에는 민진현이 병원 옥상에서 하연에게 협박하던 말들이 담겨 있었다.[미쳤어, 어떻게 2,000억을 사기 칠 생각을 한 거지?][배상금으로 2,000억을 요구하다니, 민씨 가문은 정말 미친 거 아니야?][내가 평생 노력을 해도 2,000억은 못 벌 거야.][이건 분명 사기야! 2,000억은커녕 200원도 꿈꾸지 마!]녹음된 내용이 폭로된 후 네티즌들은 모두 민씨 가문을 미친 듯이 욕하기 시작했다. 원래 하연을 나락 가게 만들려다가 지금은 그들 민씨 가문이 나락 가게 생겼다.민진현은 이 소식을 듣자 정신을 잃고 그대로 쓰러졌다.이뿐만이 아니다. 녹음이 폭로된 후 ST그룹의 주식이 지속적으로 하락하기 시작하더니 반 시간 만에 10%나 하락되었다. ST 그룹의 시가는 단번에 몇천억이나 낮아졌다.한 시간 후 주식은 완전히 폭락되었다. 민씨 가문은 모두의 손가락질을 받고 욕설을 듣게 되었다.“그러게 쌤통이야!”예나는 네티즌들의 반응을 보더니 말했다.“민혜경은 이제 임산부가 아니니 더 이상 석방되지 못할 거야. 이제 우리가 제공한 증거에 따르면 적어도 20년은 넘게 선고받을 거야.”하연이 가볍게 응했다.“하긴 그 정도는 선고받아야지!” “그런데 좀 이상한 게 한서준은 지금까지 한 번도 입장을 발표하지 않았어. 민혜경 뱃속의 애가 한서준 애이기도 하잖
“최하연 그년은 왜 이렇게 운이 좋은 거야!”호현욱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는 고작 며칠 사이 B시에서 손꼽히던 회사인 ST그룹이 이렇게 망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게다가 이것들은 모두 하연과 연관이 있었다.“호 이사님, 전 최 사장님이 보통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두 분의 내기는...”호현욱은 비서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호통을 쳤다.“입 다물어! 고작 여자인 주제에 상업계에 발을 붙이려 하다니! 그년이 ST그룹의 계약들을 가로채갔다고 해서 우리한테 위협이 생길 것 같아?”하지만 호현욱은 여전히 표정이 어두웠다. 그는 절대 이번 내기에서 져서는 안 된다.‘두고 봐, 최하연.’...ST그룹은 일주일 만에 파산을 선언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몰래 ST그룹의 남은 틀을 인수하고 대량의 자금을 투자해 보름 만에 새로운 회사인 FL그룹을 만들어냈다.FL그룹은 얼마 지나지 않아 B시에서 굳건히 자리를 잡았다.한동안 FL그룹에 관한 소문들이 B시의 상업계에서 떠돌아다녔다.“FL그룹은 정말 신비로운 것 같아! 배후의 사람이 누구인지는 아직 조금도 밝혀지지 않았어!”“분명 엄청난 사람이 FL그룹 뒤에 숨어 있을 거야!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빨리 일어설 수 있었던 건 그만큼 자금이 많았다는 것을 증명해! 소문으로는 B시의 3분의 1의 업무들이 모두 FL그룹에게 빼앗겼대!”“ST그룹이 사라진 후 B시의 상업계가 다시 정돈될 줄 알았는데 갑자기 FL그룹이 나타나 모든 것을 뒤바꾸었어.”하연과 비서 정기태는 로비를 지나가던 와중에 데스크에서 가십을 떠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들어선 후 하연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최근 FL그룹에 관한 소문이 많나 봐.”“네, 사장님. FL그룹이 엄청 신비로울 뿐만 아니라 실력까지 강해서 모두 FL그룹의 뒤에 숨은 진짜 보스를 알아내고 싶어서 안달이 나있어요.”“쓸만한 정보는 하나도 못 찾았어?”하연은 다소 놀란 눈치였다. 기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저희도
“FL그룹이 3일 후에 파티를 개최할 거랍니다. B시의 유명한 기업들을 모두 초대하였기에 저희도 초대받은 것입니다.”하연은 금색 초대장을 보며 위에 적힌 FL 두 글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최근 B시에서 엄청난 주목을 받아온 FL그룹이 파티를 연다면 틀림없이 매우 떠들썩할 것이다. 어쩌면 이 기회를 틈타 새로운 합작도 따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제시간에 참석할 생각이니 내 일정에 포함시켜.”“네, 사장님.”하연은 곧 핸드폰을 꺼내 예나에게 전화를 걸었다.“예나야, 내가 3일 후에 파티에 참석할 예정인데 내가 입을 만한 예쁜 드레스 하나 골라줘!”[설마 FL그룹의 개업 파티를 말하는 거야?]하연은 눈썹을 찡긋거리며 물었다.“너도 알고 있었어?”[그럼! 3일 뒤 파티를 위해 드레스 제작을 부탁한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거든. 우리 하연이가 입을 건 최고로 예쁜 걸로 준비해 둘 테니 나한테 맡기기만 해! 내가 널 파티에서 가장 빛나는 사람으로 만들어줄게!]“정말 고맙지만 너무 화려하진 않았으면 좋겠어.”[그래, 걱정 마.]...이튿날 하연은 택배 하나를 받았는데 열어보니 보라색 맞춤 드레스였다. 매우 고급스러운 그 드레스는 단 번에 하연의 마음을 사로잡았다.“사장님, 정말 너무 예쁜 드레스예요! 사장님한테 너무 어울려요!”비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하연은 매우 기뻐하더니 핸드폰을 꺼내 예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예나야, 네가 보낸 드레스 완전 마음에 들어! 네 안목은 갈수록 좋아지고 있나 봐!]하지만 메시지가 발송된 지 불과 1분 만에 예나가 답장을 보내왔다.[뭔 소리야, 네 드레스는 아직 가게에 있어! 내일 파티 전에 가져다줄 생각이었어.]하연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들고 사진 한 장을 찍었다.[이거 네가 보낸 드레스 아니야?][아니야!]하연이가 눈살을 찌푸리며 의심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영상 통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뜻밖에도 조진숙이었다.“이모!”[하연아, 이모가 보낸 드레스 잘 받았어?
하연은 보라색 맞춤 드레스를 입고 굽이 10센티 넘는 하이힐을 신었다. 그녀의 예쁜 얼굴과 아름다운 몸매는 드레스에 덕분에 더욱 돋보였다.하연은 등장하자마자 모든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저 사람이 최씨 가문의 아가씨인가 봐. 얼굴이 예쁜 데다가 몸매까지 완벽하니 정말 부러워 죽겠네!”“입고 있는 드레스도 너무 예뻐! 하연 씨가 입으니 딱이네!”“한서준은 눈이 멀었나 봐. 저렇게 예쁜 미녀를 놔두고 민혜경과 바람피우다니. 지금쯤 엄청 후회하고 있겠지?”“참, 오늘 한 대표도 온다고 들었는데...”몇 사람은 서로 마주 보고 웃었지만 시선은 멀지 않은 곳에 서있는 서준을 향했다.하연이가 들어선 후부터 서준은 줄곧 그녀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만큼 오늘의 하서가 예뻤던 것이다.“대표님!”서준은 구동후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제가 방금 알아봤는데 아직도 FL그룹의 진짜 보스에 대해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누군가가 F국에서 온 사람이라고 말했었지만 진짜 소식인지는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아무도 BL그룹의 보스를 만나본 적이 없답니다. 오늘 파티에 나타날지 말 지도 확신할 수 없답니다.”서준은 진지한 표정을 보였다. 오늘 파티에 참석한 대다수 사람들은 분명 FL그룹의 보스를 만나기 위해 나타난 것이다.서준은 모든 방법을 사용해 보았으나 상대가 누군지 알아내지 못해 조금 좌절스러웠다.“도대체 우리를 부른 목적이 무엇인지 잘 지켜봐야겠어!”서준은 말을 마친 뒤 또다시 하연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하연은 각 업계의 대표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녀의 표정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이전에 HT그룹에서 비서로 일하던 하연은 이런 술자리에 적지 않게 참가했기에 그들과 친해지는 방법을 알아낼 수 있었다.한 바퀴 둘러본 하연은 이미 많은 명함을 받았다. 그것들은 모두 DS그룹의 업무 확장에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기에 하연은 모두 가방에 넣었다.10센티의 하이힐을 신고 있었던 하연은 발이 너무 아파 멀지 않은 소파를 향해 걸어
“서영 씨, 혹시 FL그룹의 대표와 아는 사이에요?”‘그럼 그동안 줄곧 숨겨왔던 거예요?”“그분이 어떻게 생겼는지 말해봐요. 정말 잘생기셨나요?”서영은 사람들의 굶주린 눈빛을 보자 자신감이 생겨 매우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비록 FL그룹의 대표를 만나본 적 없었지만 이미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었다.‘이 정도 실력이라면 분명 얼굴도 잘생겼을 거야.’그래서 서영은 거짓말을 했다.“사실 그분과 따로 만났었어.”이 말을 들은 졸개들은 모두 깜짝 놀라고 말았다.“서영 씨, 정말 너무 대단하세요!”“한씨 가문의 아가씨는 역시 다르네요. B시에서 그분을 만나본 사람은 아마 서영 씨 한 사람밖에 없을 거예요.”“맞아요, 그럼 그분이 어떤 사람인지 좀 더 자세히 말해주세요.”거짓말을 하기 시작한 서영은 아예 눈 깜짝하지도 않은 채 계속 거짓말을 늘여갔다. “얼굴은 정말 잘생겼어. 하지만 비교적 조용하고 떠벌리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야. 나랑 꽤 친하게 지내고 있으니 좀 이따 오면 소개해 줄게.”뒤쪽 소파에 앉아 있던 하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웃음소리에 서영과 그녀의 졸개들은 모두 고개를 돌렸다.서영은 하연이가 자신을 비웃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기에 두 눈을 부릅뜨며 하연을 노려보았다.“저 사람은 서영 씨 전 형수님 아니에요? 정말 예의가 없으신 분이네요.”“최씨 가문의 아가씨라고 들었는데 정말 매너가 없는 분이시네. 우리 말을 엿듣고 있었다니.”서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최하연, 웃긴 뭘 웃어?”하연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말했다.“미안, 너무 웃겨서 참을 수 없었어.”하연은 또 서연의 옆에 선 여자를 보며 말했다.“나도 그쪽 대화를 듣고 싶진 않았지만 말하는 소리가 너무 커서 들린 걸 어떡해.”“웃기시네, 넌 우리 서영이를 질투하고 있는 거잖아! 서영이는 FL그룹의 대표와 친한 사이거든.”하연은 웃으며 서영을 보며 물었다.“정말이야?”서영은 말을 이미 내뱉은 이상 계속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그럼 정말
서영은 잔뜩 격앙된 표정으로 말했지만, 상대인 하연은 그저 가볍게 웃으며 반문했다. “내가 FL그룹의 대표와 친해져 연줄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이 간단한 한마디로 서영의 입을 막아 버렸다. “세계 최고 부자 최씨 명문가 아가씨이자 DS그룹의 현 회장이니...” 서영의 옆에 있던 한 친구가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하긴 저런 신분은 이미 다른 사람들이 오를 수도 없으니까!’ ‘만약 든든한 연줄을 갖고 싶다면, 오히려 최 대표와 친해져야지!’ 가영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지며 보기 흉해졌다. 하연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어서 말했다. “내가 보기에 정말 좋은 연줄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은 따로 있는 것 같네? 다만, 그렇지 못할까 봐 걱정이야!’ 서영이 이번엔 완전히 화가 나 폭발했다. “최하연, 오빠한테 버림받은 여자 주제에 무슨 자격으로 여기서 내게 이러쿵저러쿵이야? 걱정이고 뭐고 내가 손수 그 입을 찢어주마!” 서영이 화를 내며 흥분하는 것을 보고도 하연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지금 하연의 눈에 서영은 마치 펄쩍펄쩍 뛰는 어릿광대와 같았다. “서영아, 그만 입 다물어!” 서준이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 서영에게 호통쳤다. 서영은 서준이 여전히 하연을 두둔할 줄은 생각지 못했고, 순간 마음속이 극도로 불편해졌다. “오빠!” 서준이 눈빛이 서영을 향하자 그녀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서준은 다시 시선을 돌려 하연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보는 하연에게서 거리감이 느껴질 뿐이었다. 서준이 막 무슨 말을 하려 할 때 홀의 불빛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무슨 일이지?” 사람들은 호기심으로 가득 찼고 떠들썩하던 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FL그룹의 오픈 파티에 참석하신 분들을 환영합니다.” 무대 위에 사회자가 등장하자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고 궁금함과 함께 모든 시선이 무대 쪽으로 향했다. “오늘 FL그룹이 여러분의 성원에 힘입어 B시에서 그 시작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정문 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부동건이 고개를 돌리자, 최하연이 부상혁의 팔을 자연스럽게 끼고 등장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많은 이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잘생긴 남자와 우아한 여자의 조합. 누가 봐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 ‘딱 봐도 좋은 그림이야. 저 둘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길을 끌어...’ “회장님, 부상혁 대표님은 정말 복도 많으십니다. 최씨 가문의 따님과 이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부동건의 표정이 확 풀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묘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부동건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젊은 사람들이 서로 마음이 맞아 좋아하는 걸, 우리 어른들은 그저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줘야 하는 일일 뿐이지요.” “게다가 상대가 최씨 가문의 따님이라니, 정말 금상첨화가 아닙니까.” 부동건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역시 상혁이다. 내 아들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상혁은 오늘 이 자리에서 당당히 아버지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었다. 한편, 송혜선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 얼굴에 띄웠던 미소는 점점 사라져 갔고,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하연에게 향했다. 오늘의 하연은, 나무나 예쁘고... 아니, 그냥 눈이 부실 만큼 찬란했다. 그리고 또렷한 이목구비에 윤기 흐르는 머릿결, 화사하게 피어난 얼굴빛까지. 하연의 행복함이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송혜선의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정다영... 그년, 나를 속였어.’ 그동안 하연 쪽에서 뭔가 반응이 있을 줄 알고 기다려 왔다. 하지만 소식은커녕, 정다영조차 자취를 감췄다. ‘다영이 걔가 하연이에게 약 먹이는 계획이 분명 실패한 거야. 그렇지 않고 선 지금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서 있을 수는 없어.’ 이대로 배가 불러오면, 섣불리 손도 쓸 수 없게 된다. ‘
이 질문에 송혜선은 눈을 반짝이며 부동건을 바라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젠 나를 당당히 소개해 줄 때가 됐겠지.’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는 부동건의 정식 아내로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회장님, 말씀 좀 해보세요?” 조금은 성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주변의 시선도 하나둘 송혜선과 부동건을 향했다. 모두 속으로는 뻔히 알고 있었다. 부동건이 과연 예전 애인을 진짜로 정실로 앉혔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부동건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숨기거나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담백하게 말했다. “오 회장님, 이 사람은 제 딸의 어머니입니다.” 순간, 송혜선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딸의... 어머니?’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이 살짝 흔들렸다. 금세 넘칠 듯한 와인, 애써 잡고 있는 감정. ‘지금... 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억울함이 툭 하고 솟구쳤다. 심지어 손에 힘이 들어가며 하얗게 질린 손등이 떨렸다. 오병지는 단번에 눈치챘고, 싱긋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고, 대신 가볍게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부 회장님, 여전히 복이 많으시네요.” 부동건은 공손하게 웃으며 송혜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손길엔 무언의 위로가 담겨 있었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저와 이 사람의 결혼식엔 꼭 오셔서 축배 들어주세요.” 그 말에 송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결혼식...?’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이어서 고개를 들며 수줍게 웃었다. “회장님...” 부동건은 말없이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그 행동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 시선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송혜선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던 눈빛이, 지금은 선망과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결국, ‘부동건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송혜선은 온
부지윤의 ‘한 달 잔치’는 그야말로 성대한 수준의 파티였다. 초대받은 인사들만 봐도, 그 위세가 느껴졌다. F국 재계의 실력자들, 정재계의 핵심 인물, 이름만 대면 아는 명문가 자제들이 대거 초청됐고, 심지어 부씨 가문 어른들에게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직접 청첩장을 보냈다. 이 정도면, 사실상 이 아이를 공식적으로 가문에 편입시키겠다는 의지나 다름없었다. 부동건이 이 아이에게 얼마나 애정을 집착하듯 쏟고 있는지, 이날 행사 하나로 증명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부동건은 스스로의 체면과 명예를 걸고, 딸을 세상에 내보이고 있었다. ...잔치 당일, 연회장은 유난히 붐볐다. 샹들리에의 조명이 화사하게 반짝였고, 고급스러움이 풍겨 나는 악단의 선율이 분위기를 감싸고 있었다. 송혜선은 산후조리를 마친 직후였지만, 여전히 그만의 풍채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예전보다 조금 살이 오른 듯했지만, 그 덕에 오히려 분위기가 더 너그러워 보였다. 그녀가 행사장에 들어서자, 평소 자주 어울리던 재벌가 부인들이 앞다투어 다가왔다. “혜선씨는 진짜 복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 고생 끝에 드디어 볕뜰날이 왔네요.” “부 회장님이 이렇게까지 챙기시는 거 보니까, 이제 정말 한 자리 하시겠어요.” “정말 이러다 조만간 ‘겹경사’ 나는 거 아니예요? 우리라도 미리 축하해줘야 하는 거야?” 송혜선은 그 소리에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얄미울 정도로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역시 사람은 자리가 높아야 대접 받는 거야.’ “지윤이는 회장님의 첫 딸이잖아요. 그러니까 귀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회장님이 우리 모녀를 절대 가볍게 보지 않으신다는 건, 여기 있는 분들도 느끼셨을 테고요.” 그 말에 다들 박수까지 치며 웃었다. “이제 우리도 호칭 바꿔야지, 사모님!” 누군가 먼저 그렇게 불렀고, 뒤이어 몇몇이 장난처럼 따라 불렀다. 송혜선은 그 말에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턱을 살짝 들며, 그 호칭이 제법 익숙
진윤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마침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남준은 법을 무시하고, 사람을 죽였어요. 부씨 가문이 이 일에 개입한다면... 여론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감싸려 들면 들수록, 결국은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겠죠.” ‘이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가문의 존망이 걸린 문제야.’ 맞은편 소파에 앉은 상혁은 다리를 꼬고,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눈빛엔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세속의 먼지 따윈 전혀 묻지 않은 사람처럼. 진윤의 말이 끝났지만, 상혁의 표정엔 미동 하나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씨 가문은 항상 법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여왔습니다. 그건 변하지 않습니다, 여사님.” 그는 손짓으로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거기엔 작은 검은색 USB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 안에... 고나희 씨가 남긴 게 있습니다. 여사님께 드리라고 하더군요.” 순간, 진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표정으로, USB를 바라봤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그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희가... 뭔가를 남겼다고...?’ 사고는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딸의 마지막을 함께할 시간조차 없이, 그녀는 세상을 떠났고, 어떤 유언도,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줄 알았다. “나희... 그 애가... 무슨 말을 남겼다는 거예요...” 진윤은 입을 틀어막았다. 눈물은 이미 참을 수 없다는 듯 쏟아지려 하고 있었다. 상혁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사람이 떠난 건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남겨진 마음은, 누군가가 반드시 전해야죠.” 그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거운 공기를 뒤로한 채, 조용히 방을 나섰다. 잠시 후.룸 안에서 낮고, 억눌렀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희야...” 진윤은 USB를 손에 쥐고,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울고 있
진윤은 송혜선이 내민 공백 수표를 내려다보며 손끝까지 떨렸다. 종이 한 장.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그녀의 심장을 조용히 갉아먹었다. ‘돈이란 게... 사람을 어디까지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 건지.’ 그녀는 허탈하게 웃었다. “돈, 참 좋은 거죠. 수많은 집이 그거 하나 때문에 무너지고, 사람 목숨도 스스럼없이 거래되고.” 그녀의 눈빛이 서서히 날카로워졌다. “고경수도 그랬어요. 결국 돈 때문에 스스로 감방에 들어갔고, 지금 당신은 그 돈으로 내 아이의 죽음을 사겠다는 거죠.” 진윤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을 꿰뚫었다. “송 여사님의 눈엔... 돈이면 뭐든 다 해결돼요?” 송혜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진윤은 고개를 들었다. 쭉 뻗은 어깨, 흐트러지지 않은 눈빛으로 조용히 말했다. “근데, 저에게 그딴 건... 아무 의미 없어요.” 테이블 위의 수표는 그녀 눈엔 그저 휴짓조각에 불과한 쓰레기였다. ‘내 아이 이름 위에 적힌 숫자가 많을수록, 그 애는 더 억울해지는 거야.’ 그런 진윤의 단호함에, 송혜선도 이내 표정을 굳혔다. “정말 고집 세시네요, 여사님.”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용히 진윤 쪽으로 다가섰다. 10센티미터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서, 송혜선은 하찮다는 듯이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며 진윤에게 시선을 내리꽂았다. “그 자존심,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 볼까요?” 그 말투엔 이젠 더 이상 숨길 필요 없는 위협이 담겨 있었다. “당신에게는 지금, 아무것도 없어요. 남편은 감옥, 딸은... 하늘에 있어. 그런데도 이렇게 버티겠다고? 부씨 가문이 마음만 먹으면, 당신 같은 사람 하나쯤 사라지게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에요.” 진윤은 순간 움찔했지만, 눈동자는 미동도 없이 그대로 송혜선을 바라봤다. 송혜선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참, 고경수 씨 말인데요. 그 사람, 아직 당신한테 마음 있더라. 감방에서 계속 당신 얘기만 했대요.”
“그저...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을 뿐이에요. 여사님. 같은 여자로서, 제 처지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해해주시리라 믿어요.” 진윤은 피식, 코웃음을 쳤다. 커피잔을 천천히 들어올리더니,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천천히 한 모금 머금었다. “이해? 아니요. 전 그런 거 몰라요.” 단칼처럼 냉정하게 잘라버린 말이었다. 그 한 마디에 송혜선의 입술이 경직되며 굳어버렸다. ‘이런, 내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아...’ 하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송혜선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진윤의 손등을 잡았다. “여사님... 따님 일에 대해서는, 정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윤이 빠르게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이내 터져나온 감정. “사과? 한 아이가 죽었는데, 고작 한 마디 사과로 끝내겠다고요?” “아니면... 송 여사님의 눈엔 제 딸 목숨이 그깟 아무렇게나 다뤄도 되는 값싼 거였어요?” 그 목소리는 카페 전체를 울릴 만큼 컸고, 송혜선은 순간 움찔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진윤의 눈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여사님. 흥분하지 마세요... 결국... 이 모든 건 우리 부씨 집안이... 정말 죄송합니다.” 진윤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웃음 속에서,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결국 끌어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웃으면서 울었다. 그 모습은 너무 아프고, 너무 무너져 있었다. 진윤은 눈물을 닦으려 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송혜선은 주섬주섬 가방에서 티슈를 꺼내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하지만 진윤은 그것조차 거부했다. “됐어요. 그런 거, 필요 없으니까.” “송 여사님, 솔직히 말해봐요 오늘 여기서 만나자고 한 것도 당신 아들 부남준이 꼬투리 잡혀서, 지금 당장 날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니까 이렇게 만나자고 한 거잖아요.”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 애 죽고, 그동안 단 한 번이라도 날
“닥쳐!!” 송혜선이 낮게 내뱉었다. “그 비밀, 평생 당신 뱃속에 묻어둬.”“아니면... 다시는 당신 딸 얼굴 못 볼 줄 알아.” 조봉규는 그제야 자신이 입을 잘못 놀렸다는 걸 깨달았다. 급히 손바닥으로 자기 입을 철썩 때리며 말했다. “화내지 마, 혜선아. 나도 그냥... 기분 좋아서, 그만...” “앞으로 이 집에서 그 얘긴 두 번 다시 꺼내지 않을게. 약속해.” 조봉규의 간절한 다짐에도, 송혜선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를 한번 쏘아봤다. 곧이어, 목소리를 낮추며 화제를 돌렸다. “부동건, 딸한테 명분은 준다더니, 정작 혼인신고 얘긴 입도 안 뗐어. ‘이러다 또 마음 변하는 거 아니야?’” 그녀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안 돼. 남준이 일은 어떻게 해서라도 반드시 준비해야 해.’ 그 말엔 조봉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알아봤는데, 유가족 쪽에서 합의서만 받아낼 수 있으면, 그 사건도 다시 볼 여지가 있대.” 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진짜야?” “응. 듣자 하니까 고경수 와이프, 진윤... 아직 F국에 있다더라. 기회만 되면 한번 만나봐. 그쪽에서 합의서를 써주기만 하면, 다시 기회는 생길 거야.” “근데 지금 당신 산후조리 중이잖아. 몸이 먼저야.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하지만 혜선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남준이가 내 인생의 마지막 희망이야. 기회가 있다면... 어떤 수라도 써야 해.’ 며칠 후, 송혜선은 드디어 고경수의 아내 진윤과 연락이 닿았다. 하지만 의외로, 진윤은 단 한 마디 망설임 없이 만남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평일 오전, 한산한 분위기의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진 실내엔 손님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고, 송혜선은 긴 트렌치코트에 머리까지 스카프로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 밖에서는 누구도 그녀를 쉽게 알아볼 수 없게끔. 카페 입구에 들어선 그녀는 안쪽을 빠르게 훑었다. 한눈에 알아봤다. 구석 창가에 앉은, 수척한 얼굴의
조봉규의 말은 하나하나 송혜선의 마음을 쳤다. “정 안 되면, 우리도 그냥 확 뒤엎어. 어차피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이잖아. 신발 신은 놈들이야 겁낼 게 많겠지만, 우린 맨발이야.”‘맞아... 지금이라도 안 붙잡으면, 우린 끝장이야.’송혜선의 눈빛이 점점 확고해졌다. 그렇게 마음을 굳힌 채로, 그녀는 곧장 부동건을 찾아갔다.하지만 부동건은 송혜선의 말에 귀를 기울일 틈조차 없었다. 부남준의 사건이 악화로 치닫고 있었다. 갓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결정적 증거들이 줄줄이 쏟아지고 있었고, 경찰 쪽 수사도 속도를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건... 덮을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법 앞에선 아무리 부동건이라도 무력하군.’무거운 책임감과 죄책감이 부동건의 어깨를 짓눌렀다. ‘자식 교육을 제대로 못한 죄, 그건 부모의 몫이야...’그저 무기력하게,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 송혜선의 말은 부동건의 귀에 닿지도 않았다.그는 오히려 조용히 갓 인큐베이터에서 나온 막내딸을 품에 안았다. 부드러운 솜털이 보일 정도로 작고 여린 얼굴. 손가락 하나만 잡혀도 녹아버릴 듯한 느낌이었다.‘이 아이는... 내 마지막 기적일지도 몰라.’부동건은 딸을 안고 있을 때만큼은 세상의 복잡한 모든 것이 잠시 잊히는 듯했다. 그리고 눈가가 부드러워졌다.“딸아, 네 엄마랑 진짜 많이 닮았네. 크면 예쁘겠다... 아주.”그는 미소를 머금으며 속삭였다.“지윤이라고 이름 지었어. 복 많은 아이라고 하더라. 부씨 가문 첫 딸, 제대로 키울 거야. 우리 지윤이는, 아빠의 제일 소중한 딸이 될 거야.”‘그래... 남준이는 못 지켜도, 이 아이만큼은...’부동건의 얼굴은 어느새 기쁨으로 가득했다.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송혜선의 속은 서늘했다.‘정작 내가 말하려던 건, 이게 아닌데...’그녀는 조용히 손을 뻗어 아이를 부동건의 품에서 안아올렸다.“조심해요, 아직 작아서... 그렇게 막 들면 안 돼요.”부동건은 걱정스러운 말투로 송혜선을 바라보며 말했다.“이
부동건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밝은색으로 혈기가 도는가 싶더니 이내 새파랗게 질리더니, 순식간에 붉어졌다.‘이게 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가...’조진숙은 그런 부동건의 반응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차갑고 단호한 말투로 말을 던지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섰다.“당신 입으로 한 말, 잊지 마.”철컥-곧이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조진숙은 완전히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남겨진 부동건은 깊은숨을 내쉬었다.‘딱 한 발, 그 한 걸음이 이렇게까지 망가뜨릴 줄은 몰랐네...’하지만 그는 여전히 조진숙의 마지막 말이 담고 있던 진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평소처럼, 그저 ‘조심하라는 경고’ 정도로 여긴 것이다.그 후 부동건은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형사 전문 변호사를 찾았고, 부남준의 사건을 맡겼다. 그것뿐, 그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소식을 들은 송혜선은 더 이상 산후조리고 뭐고 할 틈이 없었다. 벌떡 몸을 일으키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외쳤다.“남준이는 부동건 당신 아들이란 말이야. 그런데도 이 상황에서 이 사람이 저렇게 손 놓고 있는다고?”그녀에게 있어 부동건은 F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재벌이었다. 사람 하나 죽었든, 법을 어겼든, 그 모든 걸 덮는 것쯤은 그에게 있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그 정도 힘도 못 쓰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내가 그 옆에 왜 있었겠어?’그런데도 부동건은 변호사 하나 붙인 걸로 끝이라니. 송혜선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안 돼. 내가 직접 가서 말해야겠어.”그녀가 일어나려는 순간, 조봉규가 급히 다가와 그녀를 막아섰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어조로 송혜선을 다독였다.“혜선아, 지금은 당신 몸이 먼저야. 다른 건 잠시 내려놔.”하지만 송혜선은 남자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남준이 내 아들이야. 내가 안 나서면 누가 나서? 그 애랑 나, 이 지경이 되도록 얼마나 참고 견뎠는지 몰라? 이제 와서 그냥 두라고?”송혜선은 황급히 신발을 신고, 나갈 채비를 했다. 그 옆에서 어쩔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