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하연 그년은 왜 이렇게 운이 좋은 거야!”호현욱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는 고작 며칠 사이 B시에서 손꼽히던 회사인 ST그룹이 이렇게 망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게다가 이것들은 모두 하연과 연관이 있었다.“호 이사님, 전 최 사장님이 보통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두 분의 내기는...”호현욱은 비서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호통을 쳤다.“입 다물어! 고작 여자인 주제에 상업계에 발을 붙이려 하다니! 그년이 ST그룹의 계약들을 가로채갔다고 해서 우리한테 위협이 생길 것 같아?”하지만 호현욱은 여전히 표정이 어두웠다. 그는 절대 이번 내기에서 져서는 안 된다.‘두고 봐, 최하연.’...ST그룹은 일주일 만에 파산을 선언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몰래 ST그룹의 남은 틀을 인수하고 대량의 자금을 투자해 보름 만에 새로운 회사인 FL그룹을 만들어냈다.FL그룹은 얼마 지나지 않아 B시에서 굳건히 자리를 잡았다.한동안 FL그룹에 관한 소문들이 B시의 상업계에서 떠돌아다녔다.“FL그룹은 정말 신비로운 것 같아! 배후의 사람이 누구인지는 아직 조금도 밝혀지지 않았어!”“분명 엄청난 사람이 FL그룹 뒤에 숨어 있을 거야!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빨리 일어설 수 있었던 건 그만큼 자금이 많았다는 것을 증명해! 소문으로는 B시의 3분의 1의 업무들이 모두 FL그룹에게 빼앗겼대!”“ST그룹이 사라진 후 B시의 상업계가 다시 정돈될 줄 알았는데 갑자기 FL그룹이 나타나 모든 것을 뒤바꾸었어.”하연과 비서 정기태는 로비를 지나가던 와중에 데스크에서 가십을 떠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들어선 후 하연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최근 FL그룹에 관한 소문이 많나 봐.”“네, 사장님. FL그룹이 엄청 신비로울 뿐만 아니라 실력까지 강해서 모두 FL그룹의 뒤에 숨은 진짜 보스를 알아내고 싶어서 안달이 나있어요.”“쓸만한 정보는 하나도 못 찾았어?”하연은 다소 놀란 눈치였다. 기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저희도
“FL그룹이 3일 후에 파티를 개최할 거랍니다. B시의 유명한 기업들을 모두 초대하였기에 저희도 초대받은 것입니다.”하연은 금색 초대장을 보며 위에 적힌 FL 두 글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최근 B시에서 엄청난 주목을 받아온 FL그룹이 파티를 연다면 틀림없이 매우 떠들썩할 것이다. 어쩌면 이 기회를 틈타 새로운 합작도 따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제시간에 참석할 생각이니 내 일정에 포함시켜.”“네, 사장님.”하연은 곧 핸드폰을 꺼내 예나에게 전화를 걸었다.“예나야, 내가 3일 후에 파티에 참석할 예정인데 내가 입을 만한 예쁜 드레스 하나 골라줘!”[설마 FL그룹의 개업 파티를 말하는 거야?]하연은 눈썹을 찡긋거리며 물었다.“너도 알고 있었어?”[그럼! 3일 뒤 파티를 위해 드레스 제작을 부탁한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거든. 우리 하연이가 입을 건 최고로 예쁜 걸로 준비해 둘 테니 나한테 맡기기만 해! 내가 널 파티에서 가장 빛나는 사람으로 만들어줄게!]“정말 고맙지만 너무 화려하진 않았으면 좋겠어.”[그래, 걱정 마.]...이튿날 하연은 택배 하나를 받았는데 열어보니 보라색 맞춤 드레스였다. 매우 고급스러운 그 드레스는 단 번에 하연의 마음을 사로잡았다.“사장님, 정말 너무 예쁜 드레스예요! 사장님한테 너무 어울려요!”비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하연은 매우 기뻐하더니 핸드폰을 꺼내 예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예나야, 네가 보낸 드레스 완전 마음에 들어! 네 안목은 갈수록 좋아지고 있나 봐!]하지만 메시지가 발송된 지 불과 1분 만에 예나가 답장을 보내왔다.[뭔 소리야, 네 드레스는 아직 가게에 있어! 내일 파티 전에 가져다줄 생각이었어.]하연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들고 사진 한 장을 찍었다.[이거 네가 보낸 드레스 아니야?][아니야!]하연이가 눈살을 찌푸리며 의심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영상 통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뜻밖에도 조진숙이었다.“이모!”[하연아, 이모가 보낸 드레스 잘 받았어?
하연은 보라색 맞춤 드레스를 입고 굽이 10센티 넘는 하이힐을 신었다. 그녀의 예쁜 얼굴과 아름다운 몸매는 드레스에 덕분에 더욱 돋보였다.하연은 등장하자마자 모든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저 사람이 최씨 가문의 아가씨인가 봐. 얼굴이 예쁜 데다가 몸매까지 완벽하니 정말 부러워 죽겠네!”“입고 있는 드레스도 너무 예뻐! 하연 씨가 입으니 딱이네!”“한서준은 눈이 멀었나 봐. 저렇게 예쁜 미녀를 놔두고 민혜경과 바람피우다니. 지금쯤 엄청 후회하고 있겠지?”“참, 오늘 한 대표도 온다고 들었는데...”몇 사람은 서로 마주 보고 웃었지만 시선은 멀지 않은 곳에 서있는 서준을 향했다.하연이가 들어선 후부터 서준은 줄곧 그녀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만큼 오늘의 하서가 예뻤던 것이다.“대표님!”서준은 구동후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제가 방금 알아봤는데 아직도 FL그룹의 진짜 보스에 대해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누군가가 F국에서 온 사람이라고 말했었지만 진짜 소식인지는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아무도 BL그룹의 보스를 만나본 적이 없답니다. 오늘 파티에 나타날지 말 지도 확신할 수 없답니다.”서준은 진지한 표정을 보였다. 오늘 파티에 참석한 대다수 사람들은 분명 FL그룹의 보스를 만나기 위해 나타난 것이다.서준은 모든 방법을 사용해 보았으나 상대가 누군지 알아내지 못해 조금 좌절스러웠다.“도대체 우리를 부른 목적이 무엇인지 잘 지켜봐야겠어!”서준은 말을 마친 뒤 또다시 하연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하연은 각 업계의 대표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녀의 표정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이전에 HT그룹에서 비서로 일하던 하연은 이런 술자리에 적지 않게 참가했기에 그들과 친해지는 방법을 알아낼 수 있었다.한 바퀴 둘러본 하연은 이미 많은 명함을 받았다. 그것들은 모두 DS그룹의 업무 확장에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기에 하연은 모두 가방에 넣었다.10센티의 하이힐을 신고 있었던 하연은 발이 너무 아파 멀지 않은 소파를 향해 걸어
“서영 씨, 혹시 FL그룹의 대표와 아는 사이에요?”‘그럼 그동안 줄곧 숨겨왔던 거예요?”“그분이 어떻게 생겼는지 말해봐요. 정말 잘생기셨나요?”서영은 사람들의 굶주린 눈빛을 보자 자신감이 생겨 매우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비록 FL그룹의 대표를 만나본 적 없었지만 이미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었다.‘이 정도 실력이라면 분명 얼굴도 잘생겼을 거야.’그래서 서영은 거짓말을 했다.“사실 그분과 따로 만났었어.”이 말을 들은 졸개들은 모두 깜짝 놀라고 말았다.“서영 씨, 정말 너무 대단하세요!”“한씨 가문의 아가씨는 역시 다르네요. B시에서 그분을 만나본 사람은 아마 서영 씨 한 사람밖에 없을 거예요.”“맞아요, 그럼 그분이 어떤 사람인지 좀 더 자세히 말해주세요.”거짓말을 하기 시작한 서영은 아예 눈 깜짝하지도 않은 채 계속 거짓말을 늘여갔다. “얼굴은 정말 잘생겼어. 하지만 비교적 조용하고 떠벌리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야. 나랑 꽤 친하게 지내고 있으니 좀 이따 오면 소개해 줄게.”뒤쪽 소파에 앉아 있던 하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웃음소리에 서영과 그녀의 졸개들은 모두 고개를 돌렸다.서영은 하연이가 자신을 비웃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기에 두 눈을 부릅뜨며 하연을 노려보았다.“저 사람은 서영 씨 전 형수님 아니에요? 정말 예의가 없으신 분이네요.”“최씨 가문의 아가씨라고 들었는데 정말 매너가 없는 분이시네. 우리 말을 엿듣고 있었다니.”서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최하연, 웃긴 뭘 웃어?”하연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말했다.“미안, 너무 웃겨서 참을 수 없었어.”하연은 또 서연의 옆에 선 여자를 보며 말했다.“나도 그쪽 대화를 듣고 싶진 않았지만 말하는 소리가 너무 커서 들린 걸 어떡해.”“웃기시네, 넌 우리 서영이를 질투하고 있는 거잖아! 서영이는 FL그룹의 대표와 친한 사이거든.”하연은 웃으며 서영을 보며 물었다.“정말이야?”서영은 말을 이미 내뱉은 이상 계속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그럼 정말
서영은 잔뜩 격앙된 표정으로 말했지만, 상대인 하연은 그저 가볍게 웃으며 반문했다. “내가 FL그룹의 대표와 친해져 연줄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이 간단한 한마디로 서영의 입을 막아 버렸다. “세계 최고 부자 최씨 명문가 아가씨이자 DS그룹의 현 회장이니...” 서영의 옆에 있던 한 친구가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하긴 저런 신분은 이미 다른 사람들이 오를 수도 없으니까!’ ‘만약 든든한 연줄을 갖고 싶다면, 오히려 최 대표와 친해져야지!’ 가영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지며 보기 흉해졌다. 하연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어서 말했다. “내가 보기에 정말 좋은 연줄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은 따로 있는 것 같네? 다만, 그렇지 못할까 봐 걱정이야!’ 서영이 이번엔 완전히 화가 나 폭발했다. “최하연, 오빠한테 버림받은 여자 주제에 무슨 자격으로 여기서 내게 이러쿵저러쿵이야? 걱정이고 뭐고 내가 손수 그 입을 찢어주마!” 서영이 화를 내며 흥분하는 것을 보고도 하연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지금 하연의 눈에 서영은 마치 펄쩍펄쩍 뛰는 어릿광대와 같았다. “서영아, 그만 입 다물어!” 서준이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 서영에게 호통쳤다. 서영은 서준이 여전히 하연을 두둔할 줄은 생각지 못했고, 순간 마음속이 극도로 불편해졌다. “오빠!” 서준이 눈빛이 서영을 향하자 그녀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서준은 다시 시선을 돌려 하연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보는 하연에게서 거리감이 느껴질 뿐이었다. 서준이 막 무슨 말을 하려 할 때 홀의 불빛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무슨 일이지?” 사람들은 호기심으로 가득 찼고 떠들썩하던 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FL그룹의 오픈 파티에 참석하신 분들을 환영합니다.” 무대 위에 사회자가 등장하자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고 궁금함과 함께 모든 시선이 무대 쪽으로 향했다. “오늘 FL그룹이 여러분의 성원에 힘입어 B시에서 그 시작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서영의 말속에 약간 하연을 약 올리는 듯한 어조가 담겨있었고, 서영은 그렇게 허풍을 떨면서 계속 마음이 찔렸다. 하연은 사회자의 입에서 부상혁이라는 세 글자가 나오는 것을 듣고는 별로 크게 놀라지 않았고, 순간 조진숙이 전화한 일이 떠올랐다. ‘그래 이모가 전화한 게 다 이유가 있었던 거였어!’ 하연은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이해했다는 듯 미소를 짓더니, 술잔을 들고 잔 속의 술을 단숨에 마셨다. 지금 현장에서는 모두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사람들의 기대 속에서 훤칠한 그림자가 무대 위 빛을 향해 한 걸음씩 걸어왔는데 걸음걸이는 매우 절도 있었다. 그가 무대로 걸어올 때 불빛이 그의 몸을 온전히 비추고 나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그의 얼굴을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보라색 정장을 입고 늘씬한 몸매를 드러낸 뚜렷한 이목구비의 한 남자가 남다른 분위기를 풍기며 서있었고 사람들은 그 모습에 절로 감탄의 소리를 질렀다. “어머, 저 남자 몸매 봐! 거기다 얼굴도 잘 생긴 거야?” “완전 내 이상형인데!” “외모도 저렇게 멋있는데 능력도 좋다니, 하늘이 다 줬네, 다 줬어!” “...” 상혁은 무대 아래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아무 표정 없이 조용히 눈으로 사람들 사이를 살폈고, 결국 하연을 발견했다. 두 눈이 마주친 하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많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서영아, 저봐, 부 대표가 너를 보고었어!” 서영은 이 말을 듣고 의아해하며 자신도 모르게 부상혁을 바라보았지만, 상대방은 이미 시선을 거두었다. 서영은 화를 내며 말했다. “제발, 너희들 적당히 좀 해. 난 괜히 여기 사람들에게 주목받고 싶지 않으니까.” “알았어! 치, 소심하기는!” 서영은 멋쩍게 웃었다. 지금 그녀는 이미 여기에 있을 마음이 없어졌고 자신이 한 말이 들통나지 않게 기회를 찾아 몰래 빠져나가고 싶을 뿐이었다. “FL그룹의 오픈 파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부상혁이라고 합니다.”
하연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당연히 진짜 놀라고 기쁘죠!”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보고 모두가 어리둥절해했다, 사람들은 상혁이 하연을 좋아한다는 것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는데, 그의 눈빛이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바라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의 호기심이 동시에 발동했다. 더욱이 지금 두 사람은 같은 색상의 옷까지 입고 있었다. “설마 진짜 커플은 아니겠죠?” 사람들 사이에서 누가 한마디 했는지 소문의 불씨가 일순간 타올랐다.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서준의 안색이 순식간에 가라앉았고, 두 사람을 향한 그의 눈빛에서 마치 불을 뿜을 것만 같았다. “부 대표님, 전부터 서로 아시던 사이인가요?” 서영의 친구가 무심결에 물었다. 상혁은 하연을 보고 말했다. “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예요.” 이 말이 나오자 주위 사람들이 순식간에 발칵 뒤집혔다. “몇 년 동안 알고 지냈다는 거지?” “그럼 두 사람이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다는 거 아니야?” “그래 어쩐지, 최 대표는 세계 최고 부자인 최씨 명문가 아가씨인데, 함께 자란 남자의 능력이 떨어질 리 없지! 지금 FL그룹이 B시에서 강하게 부상한 것도 당연해!” 옆에서 서영이 이 말을 듣자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 그녀는 방금까지 하연 앞에서 자신과 상혁의 관계가 얼마나 좋은지 큰소리쳤었는데 뜻밖에도 하연이 상혁과 저렇게 가까운 사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지금 서영은 도망치거나 땅 속에라도 기어들어가 숨고 싶을 뿐이다. “하연아, 함께 만날 사람이 있어!” 상혁은 하연을 향해 손을 내밀었고, 하연은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망설였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만약 오빠와 내가 손을 잡는다면, 나중에 밖에서 어떤 헛소문이 어떻게 퍼질지 몰라! 난 상관없지만 오빠에게 피해를 끼치고 싶지는 않아.’ 하연이 망설이는 사이에 상혁은 거절할 기회도 주지 않고 그녀의 손을 잡았고, 그 순간 손바닥에 전해지는 따스함을 느끼고 어리둥절했다. ‘두 사
두 사람이 걸어가 복도 끝에 다다르자 상혁이 말했다. “들어가자. 네가 궁금해하던 답이 이 안에 있어.” 상혁이 문을 살짝 열고 들어갔다. “할아버지, 제가 하연이를 데려왔어요!” 하연은 어리둥절한 채 열린 문 뒤로 시선을 향해 보니 최동신이 조용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할아버지!” 깜짝 놀란 하연이 바로 달려가 최동신의 품에 안겼다. “할아버지, 왜 B시에 오셨으면서 저한테 말도 안 하셨어요?” “내가 너를 깜짝 놀라게 하려고 네 할아버지께 그러자고 했어.” 옆에서 조진숙의 목소리가 들리자 하연은 또다시 놀랐다. “이모! 이모도 오셨어요?” 조진숙은 하연에게 다가가 손을 뻗어 그녀의 코를 살짝 꼬집었다. “내가 안 올 수 있겠어? 이사회에서 네가 호언장담 했다며? 우리 다 들었어!” 하연은 순간 당황했다. “네가 호 이사와 내기를 한 것은 이미 비밀이 아니야. 앞으로 어떻게 할 계획인 거야?” 하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뭐, 열심히 일해서 목표를 달성해야죠!” “좋아! 포기한 건 아니구나? 오히려 꽤 자신 있는 눈치인데? 그럼 됐어! 이렇게 보니 네가 내 젊은 시절의 모습과 좀 닮았어!” 최동신이 바로 하연을 칭찬했다. “그래, 마침 상혁이도 B시에 있으니, 너희 둘이 서로 잘 살펴주면 되겠구나. 사업적으로 무슨 일이 있으면 상혁이와 잘 상의해.” 조진숙이 말했다. 하연은 상혁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상혁 오빠는 앞으로 DL그룹 도련님 신분을 버리고 B시에 와서 FL그룹을 경영하는 거야?”조진숙이 설명했다. “FL그룹은 우리 두 집안이 공동 출자하여 설립한 거고 잠시 상혁이게 경영을 맡긴 거야.” ‘어쩐지.’ 하연은 이전에 FL그룹이라는 이름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두 집안과 연관이 있는 이름이었다. “그럼 앞으로 상혁 오빠가 있으니 제가 B시에서 도움 좀 받을 수 있겠는데요!” 하연이 밝게 웃으며 말하자, 상혁은 그녀를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 하연이 상혁의 팔
하연은 파티 장소를 한 고급 프라이빗 클럽으로 정했다. 회원제로 운영되는 곳이라,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재력가나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밤이 깊어지자, 화려한 조명이 반짝이는 공간에서 단순한 싱글파티라기보다는 절친들끼리의 조촐한 모임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었다.고급스러운 좌석에 앉아 몇 잔 가볍게 마시던 중, 하연은 임신 중이라 과일 주스를 마시고 있었다.그때, 예나가 다가와 감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너도 결국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됐구나. 네 상혁 오빠랑 드디어 정식으로 부부가 되다니, 정말 부럽다.”그녀는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덧붙였다.“반면에 나는 아직도 싱글이야.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혼자라니, 가끔은 나도 좀 서글프다.”여은은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으며 장난스럽게 받아쳤다.“네가 서글픈 게 아니라, 애초에 연애할 마음이 없는 거겠지.”“내가 들었는데, 요즘 너네 가게에 어떤 남자가 매일같이 찾아온다며? 혹시 마음이 좀 움직인 거 아냐?”예나는 당황하며 급히 말을 잘랐다.“그럴 리가! 그냥 친한 친구일 뿐이야.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절대 아니야.”여은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키득거렸다.“진짜? 근데 왜 이렇게 부정하는데?”예나는 반박하려다 결국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 애 나보다 어리잖아. 그리고... 나 연하남이 별로야.”절친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하연은 흥미가 동했다.‘뭔가 재미있는 얘기가 나올 것 같은데?’“연하남? 이거 뭔가 숨겨진 이야기 있는 거 아니야?”여은은 재빠르게 하연에게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너 F국에 있어서 몰랐지? 이 둘, B시에서 꽤 핫했어.”그리고는 짧게 요점을 정리해서 들려주었다.“03년생 남자야. 올해 딱 스물두 살! 나이에 비해 성숙하더라구. 우리 예나, 아주 귀여운 연하남한테 꽂혔나 봐.”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예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헛소리하지 마!”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눈빛에
다영은 온몸이 떨렸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간절하게 답했다.“정말 아무것도 듣지 않았어요...”“정말이요?”남준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다영은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질 듯했지만, 입술을 꽉 악물고 끝까지 버텼다.“정말이에요.”남준은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아까의 위압적인 분위기가 사라지며,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리고는 큰 손으로 여자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마치 겁에 질린 새끼 고양이를 달래듯 말했다.“긴장할 필요 없어요. 그냥 가볍게 물어본 거예요.”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영은 몸은 여전히 뻣뻣하게 긴장한 채로 있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남준을 살폈다.남자가 예전과 다를 바 없이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자, 그녀는 간신히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큰일 날 뻔했어...’“그리고 남준 씨, 원래라면 설날연휴에는 나랑 같이 어머님께 인사드리러 가야 하는데...”그러자 남준은 흔쾌히 수락했다.“네... 당연히 그래야죠. 우리는 곧 부부가 될 사이잖아요. 원래 부부는 한몸이잖아요.”남준은 자연스럽게 말하며 그녀를 바라봤다.다영이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남준의 대답에 다영은 순간 놀란 듯 그를 다시 바라봤다.“남준 씨... 아직도 저랑 결혼할 생각이세요?”남준은 그녀를 당연하다는 듯 품에 끌어안았다.그리고는 여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나지막이 말했다.“당연하죠. 제가 당신을 두고 다른 사람을 선택할 것 같아요?”그 확고한 대답에 정다영은 가슴이 벅차올랐다.“난 그냥...”“그냥 뭐요?”남준이 여자의 말을 끊었다.“혹시 파혼이라도 할까 봐요?”“네.”다영은 작게 하고 끄덕였다.그러자 남준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럴 일 없어요.”그 말에 다영의 눈가가 붉어졌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남자의 품에 파고들었다.그리고 남준을 꼭 끌어안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역시... 남준 씨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아요.”남준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웃었다.남자의 손이 다영의 귀 옆
허징인이 상혁을 찾았다는 소식은 남준에게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두 사람이 만나지는 않은 것 같아. 물론 앞으로도 절대 마주할 일이 없을 테니까 별문제는 생기지 않을 거야.’남준은 마음을 다잡았지만, 속내에서는 의문이 피어올랐다.‘내가 오래 지켜본 부상혁이라면, 이유 없이 움직일 리가 없는데...’하지만 상혁이 허징인을 언급했다는 것 자체가 심상치 않았다.남준은 조용히 시선을 들어 상혁을 바라보았다. 상혁은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을 뿐인데, 그 자체로 압도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왕좌에 앉은 자처럼, 이 남자의 존재만으로도 숨이 막힐 듯한 위압감이 느껴졌다.‘혹시... 무언가 알고 있는 건가?’의심이 한 번 피어나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간다. 그러나 남준이가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급히 뛰어 들어온 부하가 숨을 헐떡이며 보고했다.“상무님, 교도소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남준은 정다영의 집에 인사를 가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 옷깃을 정리하던 손이 멈춰 섰고, 표정이 굳어졌다.“무슨 일인데 그래?”부하는 다급한 얼굴로 모든 걸 털어놓았다.“정규인이 교도소에서 난동을 부렸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변호사를 불러서 항소재판을 열겠다고 난리를 치고 있습니다.”남준의 표정이 급격히 변했다. 순식간에 부하의 멱살을 움켜쥐며 낮은 목소리로 윽박질렀다.“잘 갇혀 있던 놈이 왜 갑자기 그러는 건데?”부하는 당황하여 중얼거렸다.“혹시... 어쩌면 허징인과 그 아들...”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준이 단칼에 잘라버렸다.“말도 안 돼. 이 일은 우리 쪽만 알고 있어. 교도소 안에 있는 정규인이 대체 어떻게 알겠어?”부하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맞습니다. 우리 쪽에서 철저히 감시하고 있습니다. 그가 외부와 접촉할 방법은 없습니다.”그러나 의구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정규인,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남준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멱살을 놓았다.‘이상한 일이 벌어지면 반드시
하미주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다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뭔가 수상했는데,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얼굴의 표정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졌다. 어떤 상황이든, 그녀가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 딸이 후회하지 않는 길을 가는 것. “다영아, 너는 마음이 너무 순진해. 제발, 누군가에게 이용당하는 일만은 없었으면 좋겠구나.” 그러나 다영은 마치 그 말이 기분 나쁘다는 듯, 휙 손을 뿌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엄마, 그런 말씀 이제 그만하세요.” 다영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내 선택을 믿어요. 그리고 엄마도 나를 응원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만약 아직도 의심이 된다면, 내일 남준 씨가 오면 직접 물어보세요.” 하미주가 무슨 말을 더 하기 전에, 다영은 그대로 돌아서서 방을 나가버렸다. 딸이 사라진 자리에서, 하미주는 그저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설날 다음 날.아침부터 집사는 현관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곧장 앞으로 다가가 공손히 인사했다. “부 대표님.” 상혁은 무심하게 손목을 들어 올려, 소매 끝을 단정히 정리했다. 우아하면서도 여유로운 움직임.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목소리. “어제 맡긴 일, 확인했나요?” 집사는 목소리를 낮추며 조용히 보고했다. “후원 CCTV를 확인한 결과, 어젯밤 그곳에 있던 사람은 남준 도련님이었습니다.” 상혁의 손이 멈추지 않았다. 그저 차분하게 마지막 단추를 여미고, 시계를 찬 후 말했다. “알았어요. 나가봐요.” 집사가 조용히 퇴장하자, 상혁은 변함없는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이미 남준이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형,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상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답했다.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서로 마주 앉아 있었지만, 그 사이에 감도는 공기는 묘한 정적으로 가득 차 있었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서둘러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정신을 바짝 차리며 정다영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엄마, 남준 씨가 아마 많이 바쁜가 봐요. 일 끝나면 꼭 세배하러 올 거예요.” 하지만 하미주는 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은 눈이 멀지 않은 이상, 최근의 분위기를 못 느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요즘 들어 사람들의 태도가 어떻게 변하는지 똑똑히 보고 있었다.지금 자신마저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힘이 빠진다면, 언제든 등을 돌릴 준비가 되어 있는 게 세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애초에 하미주는 딸과 남준의 결혼 자체를 반대한 사람이었다. 하미주가 보기엔, 아무리 돈이 많고, 외형적으로 그럴듯해 보여도, 남준은 결국 ‘첩’의 자식이었다. 그런 가정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자랐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다영은 기어코 남준을 붙잡겠다고 난리였다. 그것도 마치, 그 남자가 아니면 죽기라도 할 것처럼. 결국 정지철이 남준을 높게 평가하자, 하미주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거였다. 그래서 약혼까지는 허락했는데 예전엔 그럭저럭 신경을 써주던 남준이, 이제는 대놓고 얼굴도 안 비췄다. 하미주는 아주 불만이 많았다.‘명절에 처가집 한 번 들를 생각도 없는 사위가 과연 제대로 가정을 꾸릴 생각이 있을까? 말 다 했지.' 이렇게 생각하자 그녀는 딸의 손을 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다영아, 엄마가 하는 말 기분 나빠하지 말고 잘 들어. 이제 네 아버지가 그런 상황이니, 우리 집도 예전 같지 않아.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도 너도 잘 알고 있지?” 다영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는 당연히 알았다. 아니,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은 더욱 필사적으로 버텨야 한다고 결심했다. 이 기회에 확실히 자리 잡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건 시간 문제일 테니까. “엄마, 집안 사정이랑 내 결혼은 상관없는 일이에요.” 하미주는 깊은 한숨을 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
상혁은 풍등을 들고 하연과 함께 마당으로 나왔다. 타이밍 좋게 하인이 라이터를 건네주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멀지 않은 곳에서 부남준이 조용히 고개를 내밀었다. 몰래 지켜보던 그는,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풍등을 펼치는 모습을 바라봤다. 상혁이 직접 가운데 심지에 불을 붙였다. 뜨거운 열기가 천천히 풍등을 부풀게 만들었고, 풍등은 두 사람 앞에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연아, 빨리 소원 빌어!” 하연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간절히 소원을 빌었다. 상혁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또 다른 소원을 빌었다. ‘언제나 우리 둘이 해마다, 해마다, 서로를 마주할 수 있기를.' “다 됐어요.” 하연이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 눈빛에는 반짝이는 빛이 서려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서서히 손을 놓았다. 풍등은 하늘을 향해 천천히 날아올랐고, 점점 멀어지더니 마침내 한 점이 되어 사라졌다. “어떤 소원 빌었어?” 상혁이 손끝으로 하연의 귓불을 살짝 어루만지며 물었다. 하연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깜빡이며 말했다. “소원은 말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대요.” “그래? 그럼, 네 소원이 꼭 이루어지길 바랄게.” 두 사람은 다시 눈을 마주쳤다. 상혁의 숨소리가 깊어졌다. 그는 하연의 턱을 살며시 잡고,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을 맞췄다. 조심스러웠던 키스는 점점 더 깊어져 갔다. 하연은 숨이 가빠졌다. 상혁을 밀어보려 했지만, 오히려 더 깊이 끌어안겼다. 여자의 허리는 유연하게 휘어졌고, 상혁의 등은 팽팽한 활처럼 긴장됐다. 결국, 하연도 상혁의 목을 감싸 안고, 키스에 응답했다. 그러나 그 순간, 불청객 같은 전화벨 소리가 분위기를 깨뜨렸다. 하연은 화들짝 놀라며, 급하게 상혁을 밀어냈다.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익은 사과처럼 새빨개졌다. “전화 울리는데요?” 하연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져 있었다. 묘하게 사람을 간지럽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상혁은
다른 곳에서 있던 조봉규가 소란이 일자마자 급히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송혜선에게 다가가며 다급히 말했다. “설날인데, 뭐하러 이렇게 화를 내...” 조봉규가 입을 여는 순간, 남준의 온몸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남준의 시선이 날카롭게 쏘아붙었고, 조봉규는 본능적으로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애써 태연한 척하며 한 발 다가섰다. 송혜선의 팔을 조심스레 부축하며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건강이 우선입니다.” ‘건강?’남준은 손에 쥔 염주를 힘껏 움켜쥐었다. 힘이 들어간 손등에는 핏대가 서고, 눈빛은 살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시선은 서로 닿아 있는 두 사람의 손목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입가에 엷은 조소가 떠올랐다. “조 선생님, 참으로 열정적인 분이시군요. 설날에도 근무 태세를 유지하시다니.” 조봉규는 눈치가 빠른 인물이었다. 당연히 그의 말 속에 담긴 조롱을 알아챘다. 그러나 겉으로는 한껏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머리를 숙였다. “별말씀을요. 환자의 곁을 지키는 게 제 본분입니다.” 남준은 가만히 조봉규를 노려보다가, 짧고 날 선 경고를 던졌다. “그렇다면 본분에만 충실하시죠. 여긴 부씨 가문의 본가이니까.”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남준아!” 송혜선이 다급히 나섰다. 남준을 나무라는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조봉규를 감싸려는 의도가 분명히 깔려 있었다. 남준의 눈빛은 더욱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송혜선은 오히려 기세를 올려 쏟아내듯 말했다. “네가 좀 더 나서서 잘했더라면, 부상혁한테 밀릴 일도 없었어! 내가 왜 조진숙한테 설날마다 굽신거려야 하냐고?” “지금, 어머니는 나를 원망하시는 겁니까?”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남준의 손에서 염주의 한 알이 ‘탁' 하고 부서졌다. “남준아!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송혜선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염주는 영적인 기운이 깃든 물건이야. 함부로 부수면 불길한 일이 생길
부동건의 말은 송혜선을 전적인 신뢰를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면, 과연 부동건은 스스로를 어떻게 납득할까?’ ‘결국 속아서 살아온 날이 우스운 바보일 뿐...’ 조진숙은 아무 말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애틋한 사랑인데,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 서류들, 가져가.” “나 다른 뜻은 없어.” 부동건은 조진숙의 단호한 태도에 살짝 주춤했지만, 곧장 다시 설득을 시도했다. “네가 아직 날 원망하고 있다는 거 알아. 그동안... 혹시 네가...” “착각하지 마.” 조진숙은 부동건의 말을 끊었다. 더 이상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부동건은 한 발 더 다가섰다. “하지만 네가 이걸 받지 않는다면, 결국 날 아직도 원망하고 있다는 뜻 아니야?” 조진숙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가슴 깊숙이 가라앉은 감정이 불쑥 떠오르는 듯했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감정을 정리한 뒤,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부동건은 말없이 서류를 정리하더니, 숙련된 손놀림으로 만년필을 열어 조진숙 앞에 내밀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대답이었다. “후회할 거였으면, 애초에 여기 오지도 않았어.” 이번엔 조진숙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펜을 들어, 서류 맨 아래에 단호한 필체로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부디 이 선택을 후회하는 날이 오지 않길 바라.” 부동건은 서류를 덮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마음속에 짓눌려 있던 무언가가 비로소 내려앉는 듯했다. 그는 문득 나직이 말했다. “이제야... 후회한들, 이제 돌아갈 길도 없어.” 조진숙은 그 말에 가슴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끝내 시선을 돌렸다. 담담한 표정 속에 모든 감정을 삼키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 “이건... 다 정해진 운명이야.” ‘운명의 장난...’ ‘어쩔 수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제 뜻대로 하게 해주십시오.” 부동건의 태도가 단호했다. 이를 지켜보던 부해철이 더 이상의 말은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미 네가 마음을 정했다면, 내가 더 이상 뭐라 할 수도 없지. 다만, 앞으로 그 여자를 내 앞에 데려오지는 마라. 네가 어떻게 살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 “그리고...” 부동건이 무슨 말을 더 하려 했지만, 부해철은 손을 휘저으며 등을 돌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뒷모습만이 남았다. ‘그렇게까지 반대할 줄은 몰랐네...’ 부동건은 묘한 기분으로 그 자리에 멈춰섰다. ...설날 온 나라가 한 해의 끝을 보내고,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 예전에는 늘 조진숙과 상혁 모자가 함께 보내던 명절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달랐다.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의 본가가 가까운 데다, 명절이 지나면 하연과 상혁의 약혼식이 있을 예정이었다.그래서 조진숙이 제안했고, 양가 가족들이 함께 부씨 가문에서 설날 저녁을 보내기로 했다. 그 덕분에 조진숙은 하루 종일 분주하게 준비에 매진했다. 그러나 제사가 끝나자마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진숙아, 새해 복 많이 받아.” 부동건이 어색한 미소를 띠며 낮은 자세로 인사를 건넸다. 평소 같았으면 송혜선과 함께 명절을 보낼 사람이, 오늘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조진숙에게는 뜻밖이었다.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여긴 웬일이죠?” “잠깐 들렀어, 당신한테 할 말도 있고 해서.” 조진숙은 그의 시선을 따라 문득 집안 분위기를 둘러보았다. 송혜선이 이곳에 들어온 이후, 부씨 가문 본가는 한 지붕 아래에서도 철저하게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있었다.그 경계는 뚜렷했고, 불필요한 마주침은 없었다. 부동건이 송혜선과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이후, 둘은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만약 이번 일이 없었다면, 조진숙 역시 이미 오래전에 이 집을 떠났을 터였다. “들어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