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은 잔뜩 격앙된 표정으로 말했지만, 상대인 하연은 그저 가볍게 웃으며 반문했다. “내가 FL그룹의 대표와 친해져 연줄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이 간단한 한마디로 서영의 입을 막아 버렸다. “세계 최고 부자 최씨 명문가 아가씨이자 DS그룹의 현 회장이니...” 서영의 옆에 있던 한 친구가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하긴 저런 신분은 이미 다른 사람들이 오를 수도 없으니까!’ ‘만약 든든한 연줄을 갖고 싶다면, 오히려 최 대표와 친해져야지!’ 가영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지며 보기 흉해졌다. 하연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어서 말했다. “내가 보기에 정말 좋은 연줄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은 따로 있는 것 같네? 다만, 그렇지 못할까 봐 걱정이야!’ 서영이 이번엔 완전히 화가 나 폭발했다. “최하연, 오빠한테 버림받은 여자 주제에 무슨 자격으로 여기서 내게 이러쿵저러쿵이야? 걱정이고 뭐고 내가 손수 그 입을 찢어주마!” 서영이 화를 내며 흥분하는 것을 보고도 하연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지금 하연의 눈에 서영은 마치 펄쩍펄쩍 뛰는 어릿광대와 같았다. “서영아, 그만 입 다물어!” 서준이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 서영에게 호통쳤다. 서영은 서준이 여전히 하연을 두둔할 줄은 생각지 못했고, 순간 마음속이 극도로 불편해졌다. “오빠!” 서준이 눈빛이 서영을 향하자 그녀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서준은 다시 시선을 돌려 하연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보는 하연에게서 거리감이 느껴질 뿐이었다. 서준이 막 무슨 말을 하려 할 때 홀의 불빛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무슨 일이지?” 사람들은 호기심으로 가득 찼고 떠들썩하던 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FL그룹의 오픈 파티에 참석하신 분들을 환영합니다.” 무대 위에 사회자가 등장하자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고 궁금함과 함께 모든 시선이 무대 쪽으로 향했다. “오늘 FL그룹이 여러분의 성원에 힘입어 B시에서 그 시작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서영의 말속에 약간 하연을 약 올리는 듯한 어조가 담겨있었고, 서영은 그렇게 허풍을 떨면서 계속 마음이 찔렸다. 하연은 사회자의 입에서 부상혁이라는 세 글자가 나오는 것을 듣고는 별로 크게 놀라지 않았고, 순간 조진숙이 전화한 일이 떠올랐다. ‘그래 이모가 전화한 게 다 이유가 있었던 거였어!’ 하연은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이해했다는 듯 미소를 짓더니, 술잔을 들고 잔 속의 술을 단숨에 마셨다. 지금 현장에서는 모두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사람들의 기대 속에서 훤칠한 그림자가 무대 위 빛을 향해 한 걸음씩 걸어왔는데 걸음걸이는 매우 절도 있었다. 그가 무대로 걸어올 때 불빛이 그의 몸을 온전히 비추고 나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그의 얼굴을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보라색 정장을 입고 늘씬한 몸매를 드러낸 뚜렷한 이목구비의 한 남자가 남다른 분위기를 풍기며 서있었고 사람들은 그 모습에 절로 감탄의 소리를 질렀다. “어머, 저 남자 몸매 봐! 거기다 얼굴도 잘 생긴 거야?” “완전 내 이상형인데!” “외모도 저렇게 멋있는데 능력도 좋다니, 하늘이 다 줬네, 다 줬어!” “...” 상혁은 무대 아래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아무 표정 없이 조용히 눈으로 사람들 사이를 살폈고, 결국 하연을 발견했다. 두 눈이 마주친 하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많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서영아, 저봐, 부 대표가 너를 보고었어!” 서영은 이 말을 듣고 의아해하며 자신도 모르게 부상혁을 바라보았지만, 상대방은 이미 시선을 거두었다. 서영은 화를 내며 말했다. “제발, 너희들 적당히 좀 해. 난 괜히 여기 사람들에게 주목받고 싶지 않으니까.” “알았어! 치, 소심하기는!” 서영은 멋쩍게 웃었다. 지금 그녀는 이미 여기에 있을 마음이 없어졌고 자신이 한 말이 들통나지 않게 기회를 찾아 몰래 빠져나가고 싶을 뿐이었다. “FL그룹의 오픈 파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부상혁이라고 합니다.”
하연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당연히 진짜 놀라고 기쁘죠!”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보고 모두가 어리둥절해했다, 사람들은 상혁이 하연을 좋아한다는 것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는데, 그의 눈빛이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바라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의 호기심이 동시에 발동했다. 더욱이 지금 두 사람은 같은 색상의 옷까지 입고 있었다. “설마 진짜 커플은 아니겠죠?” 사람들 사이에서 누가 한마디 했는지 소문의 불씨가 일순간 타올랐다.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서준의 안색이 순식간에 가라앉았고, 두 사람을 향한 그의 눈빛에서 마치 불을 뿜을 것만 같았다. “부 대표님, 전부터 서로 아시던 사이인가요?” 서영의 친구가 무심결에 물었다. 상혁은 하연을 보고 말했다. “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예요.” 이 말이 나오자 주위 사람들이 순식간에 발칵 뒤집혔다. “몇 년 동안 알고 지냈다는 거지?” “그럼 두 사람이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다는 거 아니야?” “그래 어쩐지, 최 대표는 세계 최고 부자인 최씨 명문가 아가씨인데, 함께 자란 남자의 능력이 떨어질 리 없지! 지금 FL그룹이 B시에서 강하게 부상한 것도 당연해!” 옆에서 서영이 이 말을 듣자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 그녀는 방금까지 하연 앞에서 자신과 상혁의 관계가 얼마나 좋은지 큰소리쳤었는데 뜻밖에도 하연이 상혁과 저렇게 가까운 사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지금 서영은 도망치거나 땅 속에라도 기어들어가 숨고 싶을 뿐이다. “하연아, 함께 만날 사람이 있어!” 상혁은 하연을 향해 손을 내밀었고, 하연은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망설였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만약 오빠와 내가 손을 잡는다면, 나중에 밖에서 어떤 헛소문이 어떻게 퍼질지 몰라! 난 상관없지만 오빠에게 피해를 끼치고 싶지는 않아.’ 하연이 망설이는 사이에 상혁은 거절할 기회도 주지 않고 그녀의 손을 잡았고, 그 순간 손바닥에 전해지는 따스함을 느끼고 어리둥절했다. ‘두 사
두 사람이 걸어가 복도 끝에 다다르자 상혁이 말했다. “들어가자. 네가 궁금해하던 답이 이 안에 있어.” 상혁이 문을 살짝 열고 들어갔다. “할아버지, 제가 하연이를 데려왔어요!” 하연은 어리둥절한 채 열린 문 뒤로 시선을 향해 보니 최동신이 조용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할아버지!” 깜짝 놀란 하연이 바로 달려가 최동신의 품에 안겼다. “할아버지, 왜 B시에 오셨으면서 저한테 말도 안 하셨어요?” “내가 너를 깜짝 놀라게 하려고 네 할아버지께 그러자고 했어.” 옆에서 조진숙의 목소리가 들리자 하연은 또다시 놀랐다. “이모! 이모도 오셨어요?” 조진숙은 하연에게 다가가 손을 뻗어 그녀의 코를 살짝 꼬집었다. “내가 안 올 수 있겠어? 이사회에서 네가 호언장담 했다며? 우리 다 들었어!” 하연은 순간 당황했다. “네가 호 이사와 내기를 한 것은 이미 비밀이 아니야. 앞으로 어떻게 할 계획인 거야?” 하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뭐, 열심히 일해서 목표를 달성해야죠!” “좋아! 포기한 건 아니구나? 오히려 꽤 자신 있는 눈치인데? 그럼 됐어! 이렇게 보니 네가 내 젊은 시절의 모습과 좀 닮았어!” 최동신이 바로 하연을 칭찬했다. “그래, 마침 상혁이도 B시에 있으니, 너희 둘이 서로 잘 살펴주면 되겠구나. 사업적으로 무슨 일이 있으면 상혁이와 잘 상의해.” 조진숙이 말했다. 하연은 상혁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상혁 오빠는 앞으로 DL그룹 도련님 신분을 버리고 B시에 와서 FL그룹을 경영하는 거야?”조진숙이 설명했다. “FL그룹은 우리 두 집안이 공동 출자하여 설립한 거고 잠시 상혁이게 경영을 맡긴 거야.” ‘어쩐지.’ 하연은 이전에 FL그룹이라는 이름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두 집안과 연관이 있는 이름이었다. “그럼 앞으로 상혁 오빠가 있으니 제가 B시에서 도움 좀 받을 수 있겠는데요!” 하연이 밝게 웃으며 말하자, 상혁은 그녀를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 하연이 상혁의 팔
“오빠!” 서준이 두 걸음도 채 가지 않았는데, 서영이 도중에 그의 앞을 막았다. 서준의 표정이 차가워지며 짜증을 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서영은 허풍을 떨다 몇몇 친구들에게 온갖 조롱을 당해서 재빨리 서준을 찾아와 떨어진 체면을 회복하려고 했다. 그녀는 서준만이 자신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쨌든 모두가 B시에서 한씨 가문을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빠, FL그룹의 부 대표님과 친해?” 서영이 상현에 대해 언급하자 서준의 눈빛이 약간 차가워졌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난 친하지 않은데, 누군 친한 거 같은데?” 서영은 약간 어리둥절해하며, 서준의 시선을 따라 바라보니 사람들 가운데 있는 하연과 상혁이 보였다. 질투의 불길이 순식간에 솟구쳐 올라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최하연, 저 천한 계집, 우리 한씨 가문을 떠난 지 며칠 만에 FL그룹과 함께 하다니 너무 뻔뻔스러워!” “특히 저 부 대표님처럼 출중한 남자가 하연이와 어울리기나 해?”서준은 서영의 질투심을 느꼈는데, 그도 같은 생각이라 그녀의 기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너, 부 대표를 좋아해?” 서영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럼 오빠는 하연이가 저렇게 괜찮은 남자랑 어울린다고 생각해?” 서영은 그저 마음이 답답했다. ‘최하연 저 년은 왜 이렇게 운이 좋은 거야? 어떻게 저렇게 훌륭한 남자들이 모두 저 년 주위를 맴도냐고.’ “오빠, 오빠가 나 좀 도와줘.” 서준은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고는 바로 거절했다. “안돼!” 서영은 약간 서운했다. “오빠, 아직 하연이에게 마음이 있는 거야? 그래서 이렇게 감싸주는 거나고?” “네가 상관할 게 아니야!” “오빠!” 서영은 화를 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오빠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 부상혁, 저 남자는 내가 반드시 차지할 거야!” 서영은 말을 돌리지 않고 아주 직설적으로 했다. 그녀는 자신과 함께 온 친구들이 자신의 진면목을 몰라본다고 여기고 직접 면전에서 본 떼를 보여줘 친구들을
상혁은 하연의 말을 듣는 순간 눈빛이 조금씩 차가워졌고, 그의 손에 든 와인 잔이 떨리면서 그 안의 붉은 와인이 넘실거렸다. 그는 하연이 예전 시어머니와 시누이에게 괴롭힘을 당했던 일을 줄곧 마음에 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부 대표님.” 서영은 상혁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못 느꼈는지 먼저 오른손을 내밀었다. 한참이 지났지만 상혁은 그녀와 악수를 할 생각이 없었다. 서영은 조금 당황했고 어색하게 자신의 손을 다시 거두었다. “부 대표님께서 젊고 유능하셔서 이렇게 이른 시기에 FL그룹의 회장이 되셨군요. 오늘 이렇게 부 대표님을 만나게 돼서 영광입니다. 앞으로 저희 HT그룹이 FL그룹과 협력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어요.” 상혁이 대꾸했지만 얼굴에는 전혀 웃음기가 없었다.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협력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상혁의 이 말은 서영의 체면을 단숨에 구겼다. 주변 사람들은 상혁이 서영을 처음 봤다고 해도 한씨 가문을 이렇게 대할 줄은 몰랐다. 상혁의 반응으로 다들 긴장하여 자신들도 모르게 손에 땀이 흘렀다. 서영도 순간 당황했고 웃음기 있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지더니 서서히 표정이 풀렸다. 서영은 B시에서 남에게 이런 대우를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부 대표님, 무슨 말씀이신가요? 저희 HT그룹과 협력할 생각이 없으시다는 건가요? 저희 한씨 가문이 이 B시에서 어떤 위치인지는 알고 계시죠? 이곳에서 한씨 가문의 미움을 서면 대표님에게 조금도 좋을 게 없어요. 아님 혹시...” 서영은 옆 쪽의 하연을 바라보며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혹시 하연이를 위해 한씨 가문과 척을 져도 상관없다는 건가요?” “서영 씨, 어떻게 일할지는 제가 결정할 문제이니, 서영 씨가 간섭할 권리는 없어요.” 서영은 상혁이 이렇게 하연을 보호할 줄은 몰랐고, 눈빛 가득 질투심이 타올랐다. ‘최하연, 대체 저 년이 뭐가 있어서? 우리에게 쫓겨난 이혼녀 주제에 부 대표의 총애를 받는 거지?’ ‘부상혁,
상혁은 말을 마치고 서영을 놓아주었다. 분한 서영은 여전히 이를 악물고 있는 모습이다. “최하연, 까불지 마! 언젠가는 내가 너를 반드시 B시에서 쫓아내서 네 신세 망치는 것을 지켜볼 테니까.” 하연은 그 말을 듣고 그저 웃기만 했고, 눈을 돌려 멀지 않은 속에 있는 서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 대표님, 서영이가 술을 많이 마셔서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으니 집에다 좀 데려다주세요.” 서준이 어둡고 인상 쓴 얼굴을 하고 성큼성큼 앞으로 다가오더니 서영의 팔을 잡아당겼다. “따라 나와!” “오빠! 내가 하연이를 혼내주고 있는데 왜 그래?” “얼마나 더 창피를 당하려고 그래?” 서준이 말하자 서영은 그제야 주위 사람들의 여러 시선이 느껴졌다. 그녀는 좀 난처한 듯, 방금 자신이 한 일을 생각하더니 얼굴이 갑자기 붉게 상기되었다. 결국 서준에게 억지로 끌려가 연회홀을 떠났다. 서영이 떠난 후, 상혁은 하연을 신경 쓰며 물었다. “어때? 괜찮아?” 하연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말했다. “난 괜찮아요!” “저 여자가 너를 그렇게 괴롭혔어? 지난 3년 동안 넌 도대체 저 집에서 어떤 생활을 했던 거야?” 상혁의 말에는 하연을 걱정하는 애틋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방금 한서영, 저 여자의 행동은 내가 상상한 것 이상이었어.’ ‘대체 전에 하연은 저런 여자와 얼마나 힘들게 살았을까?’ “괜찮아요. 이미 지난 일이에요. 이제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고요.” 상혁은 하연을 꼭 껴안았다. “앞으로 한서영, 저 여자가 다시 너를 건드리면 내가 가만 안 둘 거야.” 하연은 상혁의 말을 듣고 마음이 따뜻해졌다. “고마워요. 상혁 오빠!”상혁은 한숨을 내쉬며 분노했던 눈빛을 가라앉혔고, 빠르게 기분이 바뀌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안 좋은 분위기도 완전히 사라졌다. “천만에. 할아버지께 널 잘 보살피겠다고 약속했어.” 하연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참, 내일 오전에 신형 나노기술공정 투자에 관한 프로젝트 관련해서
“아니에요, 괜찮아요, 임 비서님. 이따가 누가 절 데리러 올 거예요.” “그럼 문 앞까지 제가 배웅하겠습니다.” 하연이 거절할 틈을 주지 않고 임서희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하연은 고개를 약간 끄덕이고 하이힐 소리를 내며 입구로 향했다. 입구 앞에서 상혁은 몇몇 FL그룹 파트너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는데, 눈길을 슬쩍 돌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다가오는 하연을 발견했다. “그럼 류 대표님, 신형 나노기술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내일 대표님 회사에 가서 자세히 논의하시죠.” “좋습니다, 부 대표님. 언제든지 기다리겠습니다.” 파트너를 떠나보낸 후, 상혁은 천천히 하연 앞으로 걸어갔다. 상혁은 하연의 어깨가 드러나있는 것을 보고 바로 자신의 외투를 벗었다. “밖이 추워!” 상혁은 말과 함께 자신의 외투를 하연의 어깨에 걸쳤다. 뒤에 있던 서희는 이 모습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상혁이 하연을 대하는 태도를 보고 약간 놀라워했다. ‘역시 예전에 대표님에게서 볼 수 없었던 모습이야.’ “내 운전기사가 왔어요!” 하연은 익숙한 차량 번호를 보며 말했다. “상혁 오빠, 그럼 내일 봐요.” 상혁은 알겠다며 대답하고 하연을 차에 태운 후 손을 흔들었다. 운전기사가 차를 운전해 출발했고 하연을 태운 그 차가 사라지자 끝까지 보고 있던 상혁이 비로소 눈길을 돌렸다.... 다음날 아침 일찍 상혁이 보낸 운전기사가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피스룩에 깔끔한 메이크업을 더해 세련미를 뽐내는 하연이 차에 타자 운전기사가 서류뭉치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최 대표님, 이걸 부 대표님께서 전해주라고 하셨습니다.” 하연은 받아서 서류를 넘겨보니 모두 신형 나노기술 프로젝트에 대한 자료들이었다. 그녀의 눈에 자기도 모르게 희색이 돌았다. “고마워요. 부 대표님께서 정말 세세하게 배려해 주시네요.” 운전기사는 시동을 걸고 천천히 출발했고 하연은 그 틈을 타서 손에 든 자료를 뒤적였다. 오늘 그들과 협업에 대해 논의할 회사는 외자 기업이자 B시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정문 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부동건이 고개를 돌리자, 최하연이 부상혁의 팔을 자연스럽게 끼고 등장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많은 이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잘생긴 남자와 우아한 여자의 조합. 누가 봐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 ‘딱 봐도 좋은 그림이야. 저 둘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길을 끌어...’ “회장님, 부상혁 대표님은 정말 복도 많으십니다. 최씨 가문의 따님과 이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부동건의 표정이 확 풀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묘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부동건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젊은 사람들이 서로 마음이 맞아 좋아하는 걸, 우리 어른들은 그저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줘야 하는 일일 뿐이지요.” “게다가 상대가 최씨 가문의 따님이라니, 정말 금상첨화가 아닙니까.” 부동건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역시 상혁이다. 내 아들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상혁은 오늘 이 자리에서 당당히 아버지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었다. 한편, 송혜선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 얼굴에 띄웠던 미소는 점점 사라져 갔고,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하연에게 향했다. 오늘의 하연은, 나무나 예쁘고... 아니, 그냥 눈이 부실 만큼 찬란했다. 그리고 또렷한 이목구비에 윤기 흐르는 머릿결, 화사하게 피어난 얼굴빛까지. 하연의 행복함이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송혜선의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정다영... 그년, 나를 속였어.’ 그동안 하연 쪽에서 뭔가 반응이 있을 줄 알고 기다려 왔다. 하지만 소식은커녕, 정다영조차 자취를 감췄다. ‘다영이 걔가 하연이에게 약 먹이는 계획이 분명 실패한 거야. 그렇지 않고 선 지금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서 있을 수는 없어.’ 이대로 배가 불러오면, 섣불리 손도 쓸 수 없게 된다. ‘
이 질문에 송혜선은 눈을 반짝이며 부동건을 바라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젠 나를 당당히 소개해 줄 때가 됐겠지.’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는 부동건의 정식 아내로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회장님, 말씀 좀 해보세요?” 조금은 성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주변의 시선도 하나둘 송혜선과 부동건을 향했다. 모두 속으로는 뻔히 알고 있었다. 부동건이 과연 예전 애인을 진짜로 정실로 앉혔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부동건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숨기거나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담백하게 말했다. “오 회장님, 이 사람은 제 딸의 어머니입니다.” 순간, 송혜선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딸의... 어머니?’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이 살짝 흔들렸다. 금세 넘칠 듯한 와인, 애써 잡고 있는 감정. ‘지금... 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억울함이 툭 하고 솟구쳤다. 심지어 손에 힘이 들어가며 하얗게 질린 손등이 떨렸다. 오병지는 단번에 눈치챘고, 싱긋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고, 대신 가볍게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부 회장님, 여전히 복이 많으시네요.” 부동건은 공손하게 웃으며 송혜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손길엔 무언의 위로가 담겨 있었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저와 이 사람의 결혼식엔 꼭 오셔서 축배 들어주세요.” 그 말에 송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결혼식...?’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이어서 고개를 들며 수줍게 웃었다. “회장님...” 부동건은 말없이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그 행동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 시선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송혜선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던 눈빛이, 지금은 선망과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결국, ‘부동건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송혜선은 온
부지윤의 ‘한 달 잔치’는 그야말로 성대한 수준의 파티였다. 초대받은 인사들만 봐도, 그 위세가 느껴졌다. F국 재계의 실력자들, 정재계의 핵심 인물, 이름만 대면 아는 명문가 자제들이 대거 초청됐고, 심지어 부씨 가문 어른들에게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직접 청첩장을 보냈다. 이 정도면, 사실상 이 아이를 공식적으로 가문에 편입시키겠다는 의지나 다름없었다. 부동건이 이 아이에게 얼마나 애정을 집착하듯 쏟고 있는지, 이날 행사 하나로 증명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부동건은 스스로의 체면과 명예를 걸고, 딸을 세상에 내보이고 있었다. ...잔치 당일, 연회장은 유난히 붐볐다. 샹들리에의 조명이 화사하게 반짝였고, 고급스러움이 풍겨 나는 악단의 선율이 분위기를 감싸고 있었다. 송혜선은 산후조리를 마친 직후였지만, 여전히 그만의 풍채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예전보다 조금 살이 오른 듯했지만, 그 덕에 오히려 분위기가 더 너그러워 보였다. 그녀가 행사장에 들어서자, 평소 자주 어울리던 재벌가 부인들이 앞다투어 다가왔다. “혜선씨는 진짜 복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 고생 끝에 드디어 볕뜰날이 왔네요.” “부 회장님이 이렇게까지 챙기시는 거 보니까, 이제 정말 한 자리 하시겠어요.” “정말 이러다 조만간 ‘겹경사’ 나는 거 아니예요? 우리라도 미리 축하해줘야 하는 거야?” 송혜선은 그 소리에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얄미울 정도로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역시 사람은 자리가 높아야 대접 받는 거야.’ “지윤이는 회장님의 첫 딸이잖아요. 그러니까 귀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회장님이 우리 모녀를 절대 가볍게 보지 않으신다는 건, 여기 있는 분들도 느끼셨을 테고요.” 그 말에 다들 박수까지 치며 웃었다. “이제 우리도 호칭 바꿔야지, 사모님!” 누군가 먼저 그렇게 불렀고, 뒤이어 몇몇이 장난처럼 따라 불렀다. 송혜선은 그 말에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턱을 살짝 들며, 그 호칭이 제법 익숙
진윤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마침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남준은 법을 무시하고, 사람을 죽였어요. 부씨 가문이 이 일에 개입한다면... 여론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감싸려 들면 들수록, 결국은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겠죠.” ‘이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가문의 존망이 걸린 문제야.’ 맞은편 소파에 앉은 상혁은 다리를 꼬고,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눈빛엔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세속의 먼지 따윈 전혀 묻지 않은 사람처럼. 진윤의 말이 끝났지만, 상혁의 표정엔 미동 하나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씨 가문은 항상 법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여왔습니다. 그건 변하지 않습니다, 여사님.” 그는 손짓으로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거기엔 작은 검은색 USB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 안에... 고나희 씨가 남긴 게 있습니다. 여사님께 드리라고 하더군요.” 순간, 진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표정으로, USB를 바라봤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그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희가... 뭔가를 남겼다고...?’ 사고는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딸의 마지막을 함께할 시간조차 없이, 그녀는 세상을 떠났고, 어떤 유언도,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줄 알았다. “나희... 그 애가... 무슨 말을 남겼다는 거예요...” 진윤은 입을 틀어막았다. 눈물은 이미 참을 수 없다는 듯 쏟아지려 하고 있었다. 상혁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사람이 떠난 건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남겨진 마음은, 누군가가 반드시 전해야죠.” 그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거운 공기를 뒤로한 채, 조용히 방을 나섰다. 잠시 후.룸 안에서 낮고, 억눌렀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희야...” 진윤은 USB를 손에 쥐고,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울고 있
진윤은 송혜선이 내민 공백 수표를 내려다보며 손끝까지 떨렸다. 종이 한 장.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그녀의 심장을 조용히 갉아먹었다. ‘돈이란 게... 사람을 어디까지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 건지.’ 그녀는 허탈하게 웃었다. “돈, 참 좋은 거죠. 수많은 집이 그거 하나 때문에 무너지고, 사람 목숨도 스스럼없이 거래되고.” 그녀의 눈빛이 서서히 날카로워졌다. “고경수도 그랬어요. 결국 돈 때문에 스스로 감방에 들어갔고, 지금 당신은 그 돈으로 내 아이의 죽음을 사겠다는 거죠.” 진윤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을 꿰뚫었다. “송 여사님의 눈엔... 돈이면 뭐든 다 해결돼요?” 송혜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진윤은 고개를 들었다. 쭉 뻗은 어깨, 흐트러지지 않은 눈빛으로 조용히 말했다. “근데, 저에게 그딴 건... 아무 의미 없어요.” 테이블 위의 수표는 그녀 눈엔 그저 휴짓조각에 불과한 쓰레기였다. ‘내 아이 이름 위에 적힌 숫자가 많을수록, 그 애는 더 억울해지는 거야.’ 그런 진윤의 단호함에, 송혜선도 이내 표정을 굳혔다. “정말 고집 세시네요, 여사님.”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용히 진윤 쪽으로 다가섰다. 10센티미터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서, 송혜선은 하찮다는 듯이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며 진윤에게 시선을 내리꽂았다. “그 자존심,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 볼까요?” 그 말투엔 이젠 더 이상 숨길 필요 없는 위협이 담겨 있었다. “당신에게는 지금, 아무것도 없어요. 남편은 감옥, 딸은... 하늘에 있어. 그런데도 이렇게 버티겠다고? 부씨 가문이 마음만 먹으면, 당신 같은 사람 하나쯤 사라지게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에요.” 진윤은 순간 움찔했지만, 눈동자는 미동도 없이 그대로 송혜선을 바라봤다. 송혜선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참, 고경수 씨 말인데요. 그 사람, 아직 당신한테 마음 있더라. 감방에서 계속 당신 얘기만 했대요.”
“그저...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을 뿐이에요. 여사님. 같은 여자로서, 제 처지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해해주시리라 믿어요.” 진윤은 피식, 코웃음을 쳤다. 커피잔을 천천히 들어올리더니,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천천히 한 모금 머금었다. “이해? 아니요. 전 그런 거 몰라요.” 단칼처럼 냉정하게 잘라버린 말이었다. 그 한 마디에 송혜선의 입술이 경직되며 굳어버렸다. ‘이런, 내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아...’ 하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송혜선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진윤의 손등을 잡았다. “여사님... 따님 일에 대해서는, 정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윤이 빠르게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이내 터져나온 감정. “사과? 한 아이가 죽었는데, 고작 한 마디 사과로 끝내겠다고요?” “아니면... 송 여사님의 눈엔 제 딸 목숨이 그깟 아무렇게나 다뤄도 되는 값싼 거였어요?” 그 목소리는 카페 전체를 울릴 만큼 컸고, 송혜선은 순간 움찔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진윤의 눈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여사님. 흥분하지 마세요... 결국... 이 모든 건 우리 부씨 집안이... 정말 죄송합니다.” 진윤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웃음 속에서,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결국 끌어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웃으면서 울었다. 그 모습은 너무 아프고, 너무 무너져 있었다. 진윤은 눈물을 닦으려 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송혜선은 주섬주섬 가방에서 티슈를 꺼내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하지만 진윤은 그것조차 거부했다. “됐어요. 그런 거, 필요 없으니까.” “송 여사님, 솔직히 말해봐요 오늘 여기서 만나자고 한 것도 당신 아들 부남준이 꼬투리 잡혀서, 지금 당장 날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니까 이렇게 만나자고 한 거잖아요.”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 애 죽고, 그동안 단 한 번이라도 날
“닥쳐!!” 송혜선이 낮게 내뱉었다. “그 비밀, 평생 당신 뱃속에 묻어둬.”“아니면... 다시는 당신 딸 얼굴 못 볼 줄 알아.” 조봉규는 그제야 자신이 입을 잘못 놀렸다는 걸 깨달았다. 급히 손바닥으로 자기 입을 철썩 때리며 말했다. “화내지 마, 혜선아. 나도 그냥... 기분 좋아서, 그만...” “앞으로 이 집에서 그 얘긴 두 번 다시 꺼내지 않을게. 약속해.” 조봉규의 간절한 다짐에도, 송혜선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를 한번 쏘아봤다. 곧이어, 목소리를 낮추며 화제를 돌렸다. “부동건, 딸한테 명분은 준다더니, 정작 혼인신고 얘긴 입도 안 뗐어. ‘이러다 또 마음 변하는 거 아니야?’” 그녀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안 돼. 남준이 일은 어떻게 해서라도 반드시 준비해야 해.’ 그 말엔 조봉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알아봤는데, 유가족 쪽에서 합의서만 받아낼 수 있으면, 그 사건도 다시 볼 여지가 있대.” 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진짜야?” “응. 듣자 하니까 고경수 와이프, 진윤... 아직 F국에 있다더라. 기회만 되면 한번 만나봐. 그쪽에서 합의서를 써주기만 하면, 다시 기회는 생길 거야.” “근데 지금 당신 산후조리 중이잖아. 몸이 먼저야.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하지만 혜선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남준이가 내 인생의 마지막 희망이야. 기회가 있다면... 어떤 수라도 써야 해.’ 며칠 후, 송혜선은 드디어 고경수의 아내 진윤과 연락이 닿았다. 하지만 의외로, 진윤은 단 한 마디 망설임 없이 만남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평일 오전, 한산한 분위기의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진 실내엔 손님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고, 송혜선은 긴 트렌치코트에 머리까지 스카프로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 밖에서는 누구도 그녀를 쉽게 알아볼 수 없게끔. 카페 입구에 들어선 그녀는 안쪽을 빠르게 훑었다. 한눈에 알아봤다. 구석 창가에 앉은, 수척한 얼굴의
조봉규의 말은 하나하나 송혜선의 마음을 쳤다. “정 안 되면, 우리도 그냥 확 뒤엎어. 어차피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이잖아. 신발 신은 놈들이야 겁낼 게 많겠지만, 우린 맨발이야.”‘맞아... 지금이라도 안 붙잡으면, 우린 끝장이야.’송혜선의 눈빛이 점점 확고해졌다. 그렇게 마음을 굳힌 채로, 그녀는 곧장 부동건을 찾아갔다.하지만 부동건은 송혜선의 말에 귀를 기울일 틈조차 없었다. 부남준의 사건이 악화로 치닫고 있었다. 갓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결정적 증거들이 줄줄이 쏟아지고 있었고, 경찰 쪽 수사도 속도를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건... 덮을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법 앞에선 아무리 부동건이라도 무력하군.’무거운 책임감과 죄책감이 부동건의 어깨를 짓눌렀다. ‘자식 교육을 제대로 못한 죄, 그건 부모의 몫이야...’그저 무기력하게,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 송혜선의 말은 부동건의 귀에 닿지도 않았다.그는 오히려 조용히 갓 인큐베이터에서 나온 막내딸을 품에 안았다. 부드러운 솜털이 보일 정도로 작고 여린 얼굴. 손가락 하나만 잡혀도 녹아버릴 듯한 느낌이었다.‘이 아이는... 내 마지막 기적일지도 몰라.’부동건은 딸을 안고 있을 때만큼은 세상의 복잡한 모든 것이 잠시 잊히는 듯했다. 그리고 눈가가 부드러워졌다.“딸아, 네 엄마랑 진짜 많이 닮았네. 크면 예쁘겠다... 아주.”그는 미소를 머금으며 속삭였다.“지윤이라고 이름 지었어. 복 많은 아이라고 하더라. 부씨 가문 첫 딸, 제대로 키울 거야. 우리 지윤이는, 아빠의 제일 소중한 딸이 될 거야.”‘그래... 남준이는 못 지켜도, 이 아이만큼은...’부동건의 얼굴은 어느새 기쁨으로 가득했다.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송혜선의 속은 서늘했다.‘정작 내가 말하려던 건, 이게 아닌데...’그녀는 조용히 손을 뻗어 아이를 부동건의 품에서 안아올렸다.“조심해요, 아직 작아서... 그렇게 막 들면 안 돼요.”부동건은 걱정스러운 말투로 송혜선을 바라보며 말했다.“이
부동건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밝은색으로 혈기가 도는가 싶더니 이내 새파랗게 질리더니, 순식간에 붉어졌다.‘이게 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가...’조진숙은 그런 부동건의 반응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차갑고 단호한 말투로 말을 던지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섰다.“당신 입으로 한 말, 잊지 마.”철컥-곧이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조진숙은 완전히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남겨진 부동건은 깊은숨을 내쉬었다.‘딱 한 발, 그 한 걸음이 이렇게까지 망가뜨릴 줄은 몰랐네...’하지만 그는 여전히 조진숙의 마지막 말이 담고 있던 진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평소처럼, 그저 ‘조심하라는 경고’ 정도로 여긴 것이다.그 후 부동건은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형사 전문 변호사를 찾았고, 부남준의 사건을 맡겼다. 그것뿐, 그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소식을 들은 송혜선은 더 이상 산후조리고 뭐고 할 틈이 없었다. 벌떡 몸을 일으키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외쳤다.“남준이는 부동건 당신 아들이란 말이야. 그런데도 이 상황에서 이 사람이 저렇게 손 놓고 있는다고?”그녀에게 있어 부동건은 F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재벌이었다. 사람 하나 죽었든, 법을 어겼든, 그 모든 걸 덮는 것쯤은 그에게 있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그 정도 힘도 못 쓰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내가 그 옆에 왜 있었겠어?’그런데도 부동건은 변호사 하나 붙인 걸로 끝이라니. 송혜선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안 돼. 내가 직접 가서 말해야겠어.”그녀가 일어나려는 순간, 조봉규가 급히 다가와 그녀를 막아섰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어조로 송혜선을 다독였다.“혜선아, 지금은 당신 몸이 먼저야. 다른 건 잠시 내려놔.”하지만 송혜선은 남자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남준이 내 아들이야. 내가 안 나서면 누가 나서? 그 애랑 나, 이 지경이 되도록 얼마나 참고 견뎠는지 몰라? 이제 와서 그냥 두라고?”송혜선은 황급히 신발을 신고, 나갈 채비를 했다. 그 옆에서 어쩔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