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세요!”유태범이 떠나려 하자 사철수는 마침내 참을 수 없었다. “유 장군, 얘기는 천천히 나누면 됩니다. 왜 이렇게 성급하게 행동하시나요?”“무엇을 더 얘기할 게 있겠습니까? 가장 기본적인 신뢰조차 없는데 이것은 분명히 저를 존중하지 않는 행동입니다.” 유태범은 일부러 화가 난 듯한 표정을 지었다.“유 장군, 잠시 진정해 주세요. 각주께서는 당신을 뵙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시간이 없으셔서 그렇습니다. 가능하시다면 잠시 기다려 주시고 제가 각주께 여쭤보겠습니다. 어떻게 하실지 여쭤볼게요.” 사철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빨리 물어보세요. 저는 그렇게 오래 기다릴 시간이 없습니다.” 유태범은 두 손을 뒤로 포개며 위엄 있게 말했다.“알겠습니다. 강 장군, 잠시만 앉아 계세요. 바로 각주께 여쭤보겠습니다.”사철수는 몇 마디를 진정시키며 옆으로 가서 핸드폰을 꺼내 누구와 통화를 시작했다. 약 2분 정도 이야기를 나눈 뒤 사철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했다. 레스토랑 안에 있던 그의 부하들이 즉시 흩어져 주변을 살폈다. 잠시 후 모든 부하가 돌아와 상황에 이상이 없다는 보고를 했다. 사철수는 몇 마디를 더 한 후 채원진과의 통화를 마쳤다.사철수는 미소를 지으며 유태범 앞에 다가가 말했다. “유 장군, 방금 각주께 보고했는데요. 그쪽 일이 거의 끝나가고 있는데 조금만 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급하시다면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얘기해도 괜찮습니다.” “다른 곳?” 유태범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자연히 저희 호룡각의 서경 비밀기지입니다.” 사철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우리 비밀기지는 고위 인사들만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 각주께서 장군을 초대한 것도 충분한 신뢰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니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말을 들은 유태범은 턱을 만지며 잠시 망설였다. 그는 지금 채원진이 어떤 속셈을 가졌는지 몰랐지만 상대가 절대 순진하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았다.호룡
지금 한 대의 이동하는 비즈니스 차 안에서. 사철수는 검은 천 한 조각을 꺼내어 유태범에게 건넸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유 장군, 길이 멀고 잠시 눈을 감고 쉬어 가시죠.” “무슨 뜻이죠?” 유태범은 얼굴을 미세하게 찡그리며 물었다. “이건 우리의 규칙입니다. 비밀 기지에 외부인이 갈 때는 반드시 눈을 가려야 합니다. 안전을 위해서죠.” 사철수는 차분하게 설명했다. “왜요? 저를 못 믿겠다는 건가요?” 유태범은 일부러 불쾌한 듯 말하며 물었다. “오해하지 마세요. 유 장군, 모두 같은 규칙입니다. 이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사철수의 태도에 변함이 없었다. “그럼 눈 가려요. 마침 피곤했는데 한숨 자도 되겠네요.” 유태범은 귀찮아서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바로 눈을 감았고 몸을 편안하게 놓은 채 잠시 휴식을 취하려 했다. “협조 감사드립니다. 유 장군.” 사철수는 미소를 지으며 직접 눈을 덮어 줬다.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차는 처음엔 순조롭게 달리다 한 시간 정도 지나자 도로가 갑자기 울퉁불퉁해졌다. 차는 끊임없이 흔들리며 사람을 졸리게 만들 정도로 기울었다.“사 장군,우리는 지금 도시를 벗어난 건가요?”유태범이 갑자기 물었다. “네. 맞습니다.”사철수는 숨김없이 대답했다. “안전상 기지는 도시 밖에 자리 잡고 있고 거리가 좀 멀지만 충분히 은밀한 장소입니다.” “호룡각이 생각보다 정말 조심스럽네요.”유태범이 말했다. “조심하는 게 항상 좋은 일이죠. 유 장군, 조금만 더 참으시면 곧 도착합니다.”사철수는 웃으며 말했다. 차는 계속해서 나아갔고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대략 한 시간이 지난 뒤 차가 마침내 멈췄다. 그제야 사철수는 유태범의 눈을 가리고 있던 검은 천을 풀어주었다. 유태범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자신이 깊고 외진 산골짜기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주위를 살펴보니 우뚝 솟은 산들이 마치 숨어있는 거대한 짐승처럼 느껴졌다. 산골
이 방어는 정말 상상을 초월했다. 성벽을 넘어선 후 유태범 앞에 펼쳐진 또 다른 세계는 완전히 새로운 풍경이었다. 규모에서 볼 때 성벽 뒤의 이 기지는 마치 작은 도시 같았다. 곳곳에 다양한 건물들이 질서 있게 늘어서 있었다. 군사 기지, 훈련장, 실험장, 군수 창고, 벙커, 군용 공항 등 각각의 시설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그 사이에 민간 용도로 사용되는 시설도 섞여 있었다. 유태범은 대강 한 눈으로 보면서 이 기지의 규모와 면적을 바탕으로 추정해 보았다. 이 군사 기지는 최소 5만에서 10만 명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방대했다. 후방 지원 인력을 제외하더라도 여전히 매우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처럼 많은 병력을 가지고 있다면 짧은 시간 안에 하나의 도시를 함락시키는 것도 전혀 불가능하지 않았다. 그 순간 아무리 수많은 풍파를 겪었던 유태범도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화룡각은 너무나도 깊이 숨어 있었고 표면에는 티가 나지 않았으나 이미 엄청난 군사력을 쌓아두고 있었다. 그리고 서경의 밀정들조차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로. 그는 갑자기 자신이 내린 선택에 대해 후회를 느꼈다. 만약 기지 안에서 채원진을 독살했다면 과연 그는 살아날 수 있었을까? 그건 명백히 불가능한 일이었다.“유 장군, 이쪽입니다.” 사철수는 유태범의 생각을 끊으며 그를 군사 기지의 중심에 위치한 지휘실로 이끌었다. 거의 아무도 모른다. 이 지휘실 아래 깊은 지하에는 핵 방어 대피소가 건설되어 있다는 사실을. 현재 지휘실 안에서는 가면을 쓴 채원진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화면 앞에서는 예전 버전의 드라마가 상영되고 있었다. 그리고 채원진은 이를 흥미진진하게 눈을 떼지 않고 보고 있었다. “똑똑.”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채원진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철컥.” 지휘실의 문이 열리자 사철수와 유태범이 차례대로 들어왔다. “유 장군, 또 만났군요.”
“죽은 척하며 속이기?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요?” 채원진은 눈썹을 올리며 의아해했다. “저도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을 수 없었을 겁니다.” 유태범은 고개를 흔들며 안타까운 듯 말했다. “결국 우리는 한 수 비운 거죠. 유만수가 오히려 우리에게 함정을 놓고 우리가 그의 손에 놀아났습니다. 지금 제 부하들은 모두 제어 당했고 이제 반전이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채 각주께 도움을 청하러 왔습니다.” “잠깐만요. 제가 머릿속으로 정리 좀 해볼게요.” 채원진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의 계획은 실패했고 유만수는 살아있으며 당신이 모은 모든 병력은 모두 포로가 되었고 지금 당신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맞나요?” “네. 거의 그런 셈입니다.” 유태범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유 장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만약 계획이 실패하고 당신의 부하들이 전멸했다면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거죠?” 채원진은 반문했다. “실은 저는 항복을 가장해서 그들을 속였고 그 틈을 타서 빠져나왔습니다.” 유태범은 고백했다. “항복? 어떻게 그랬나요?” 채원진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말씀드리기 전에 혹시 채 각주께서 불쾌해하시면 안 됩니다.”유태범은 잠시 말을 정리한 뒤에 이어서 말했다. “사실 저는 채 각주를 미끼로 삼아서 유만수에게 항복한 척하고 그들에게 제가 채 각주를 잡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했어요. 그들은 복수를 갈망했기 때문에 저를 풀어주었고 저를 이용해 채 각주를 끌어내려고 했습니다.” “그래요?” 채원진은 담담하게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래서 저와 만난 것은 함정이었나요? 유만수가 꾸민 계략이었다는 거군요?”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그러나 저는 서경 왕부의 세력이 이미 사라졌다고 판단했고 호룡각에 합류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그들을 완전히 속여서 자신들의 계략에 휘말리지 않도록 했고 중요한 정보를 하나도 누설하지 않았습니다.” 유태범은 확신
이때 한 명의 호룡각 밀정이 갑작스레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채원진이 담담히 물었다. “각주님, 외부에서 서경 왕부 쪽으로 보이는 첩자 둘을 붙잡았습니다. 처분은 어떻게 할까요?” 호룡각 밀정이 고개 숙여 물었다. “첩자라...” 채원진이 미묘한 미소를 띠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곁에 있던 유태범을 흘끗 본 뒤 가볍게 명령을 내렸다. “그들을 안으로 끌고 와라. 내가 직접 심문하지.” “네.” 호룡각 밀정은 고개를 숙여 명령을 받아들인 뒤 문밖으로 손짓했다. 곧이어 두 명의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온몸이 결박된 채 끌려 들어왔다. 그들의 입에 붙어 있던 테이프가 벗겨지자마자 그중 한 명이 격노한 목소리로 외쳤다. “유태범, 이 배신자 새끼야! 네놈이 감히 우리를 배신하다니 천벌을 받을 거다.” “입을 쳐라.” 채원진이 차갑게 두 글자를 내뱉었다. “네.” 밀정이 앞으로 나아가 첩자의 뺨을 좌우로 무자비하게 내려쳤다. 연거푸 내려친 손길에 그 첩자는 입과 코에서 피를 쏟으며 비틀거렸다. 몇 차례 더 맞은 뒤에는 치아가 반쯤 부러진 채 흐느적댔다. “이제부터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라. 거짓말을 한다면 네 목숨은 여기까지다.” 채원진이 높직한 목소리로 첩자들에게 냉랭하게 물었다. “너희들은 정말 서경 왕부에서 온 것이냐?” “퉤.” 얼굴이 부어오른 채로 고통에 몸부림치던 검은 옷의 사내가 갑자기 채원진을 향해 피 섞인 침을 뱉었다. “죽이려면 죽여라. 내 입에서 뭔가 알아내겠다고? 그건 꿈도 꾸지 마.” “좋다. 그 소원 내가 들어주지.” 채원진은 더 이상 말을 낭비할 생각 없이 한 손을 뻗었다. 다음 순간 그의 손바닥이 검은 옷 사내의 머리를 내리치자 머리는 그대로 진흙 덩이처럼 으스러지고 말았다. 그 잔혹한 살수 방식에 유태범조차 깜짝 놀라 눈이 커졌다. 채원진은 슬쩍 손을 털며 차갑게 고개를 돌렸다. “이번엔 네 차례다. 말할 건가 말하지 않
“채 각주, 첩자에 관련된 일은 저도 전혀 몰랐습니다.”유태범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이틀 동안 발생한 모든 일에 대해 솔직하게 말씀드렸는데 만약 제가 일말의 거짓이라도 했다면 기꺼이 천벌을 받을게요.”“허허허, 단지 농담한 거니까 유 장군은 너무 긴장할 필요 없어요.”채원진은 유태범의 어깨를 다독여주며 미소를 지었다.“유 장군의 말은 저야 당연히 믿죠. 저 두 첩자는 아마 유만수 쪽에서 보낸 사람들일 것이고 혹시나 유 장군이 도망갈까 봐 몰래 미행한 것 같습니다.”“워낙 음흉하고 교활한 사람이라 무슨 짓이든 할 사람이죠. 다행히 채 각주께서 제때 발견하신 덕분에 기지가 노출되는 걸 막을 수 있었습니다.”유태범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첩자가 얼마나 많은 정보들을 알아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기지의 위치는 이미 서경왕부에 알려졌을 가능성이 큽니다.”“그러면 어떡하죠? 미리 철수하는 게 나을까요?”유태범이 깜짝 놀라 물었다.“철수요?”채원진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당황할 필요 없습니다. 기지 위치가 알려졌다 해도 구체적으로 기지 안에 얼마나 많은 병력이 있고 화력이 얼마나 강력한지는 아직 모를 겁니다.”“유 장군, 솔직히 말해서 우리 기지의 방어 능력으로는 서경에서 가장 강력하다는 흑용군이라고 해도 10만 이상의 병사를 데리고 와야 맞서 싸울 맛이 있을 텐데 문제는 이만큼의 병사를 동원하게 되면 분명 저한테 들킨다는 점입니다. 사실 지금의 상황은 오히려 유만수가 매우 난감할 겁니다. 우리 기지 내부의 상황을 모르기 때문에 쉽사리 병사들을 풀지 못하거든요. 적은 인원의 병사로 우리 기지로 공격해 온다 해도 그건 자살골이나 마찬가지고 병사만 축을 낸 셈이 되는 거죠. 그러나 만약 대규모로 군대를 이동한다면 이것 또한 저한테 발각되기 쉬워서 바로 철수해야 할 겁니다.”“다시 말해서 맞서 싸우든, 철수시키든 모두 제 선택에 달려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면 유만수는 이제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없거든요. 이길 수
채원진의 주문에 부하들은 빠르게 음식들을 가져왔고 그렇게 두 사람의 즐거운 식사를 즐겼다....이때, 어느 산골짜기의 평범한 농가 주택 안.유진우와 유천우는 차를 마시며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유태범이 끌려간 뒤로 그들은 줄곧 몰래 추적하다가 여기 흑초산까지 오게 되었다.흑초산은 매우 크고 넓을 뿐만 아니라 마침 국경 변두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그 절반의 면적은 서경 지역 내에 속해 있었고 나머지 절반의 면적은 적의 영토에 있었다.최근 몇 년 동안 두 나라는 비교적 평화로웠고 가끔 밀정 간의 마찰이 있을 뿐 뚜렷한 충돌은 없었다.또한 흑초산은 지리적 위치가 특수하여 산을 의지해 살아가는 소수의 농민을 제외하고는 거의 외부인이 찾아오지 않았다.“형, 이미 시간도 반나절이 지났고 작은아버지의 위치추적 신호도 사라졌는데 밀정마저 아무런 소식이 없는 걸 보면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요?”유천우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조금 더 기다려보자.”유진우는 그러다가 다시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삼촌은 이미 우리 독에 중독되어서 감히 배신하지 못할 거야. 그것 때문에 위치추적기도 신호를 잃었을 것이고. 아니면 호룡각이 흑초산 안에 있는데 차단기를 너무 많이 설치해서 연락이 안 될 수도 있어.”“똑똑똑.”이때, 누군가가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유천우는 재빨리 몸을 일으키고 문을 열었는데 문 앞에서는 왕부 쪽의 관리자급 밀정인 한창수가 서 있었다.“어때? 뭐라도 알아낸 게 있어?”유천우가 다급히 물었다.“제가 방금 3번과 4번지의 은신처에 갔는데 현장에서 싸움했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제 추측이 맞다면 분명 두 사람은 그쪽 사람들에게 잡혀간 것 같습니다.”한창수가 답했다.“잡혀갔다고? 그게 가능해? 설마 작은아버지가 우리를 배신하고 몽땅 말해줬나?”유천우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리자 유진우가 한껏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삼촌은 분명 우리가 밀정을 붙였단 사실을 모를거야. 설령 알아챘다고 해도 구체적으로 어떻게 따라다니는지 몰랐을 것
늦은 밤, 서경왕부.“쿨럭, 쿨럭...”유만수가 침대 끝에 앉아 온몸을 떨며 기침했고 바닥은 그의 피로 흥건했다.“여보, 여기 약이요.”유만수의 기침 소리에 이의진은 재빨리 약을 갖고 방 안으로 달려왔다.그리고 한껏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의 등을 두드려주었다.얼마간 시간이 지나 유만수의 기침이 마침내 멈췄고 백지장처럼 창백한 그의 얼굴은 어느새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빨리 약 드세요.”이의진은 약 그릇을 그에게 넘겼다.“너무 써서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나.”유만수는 얼굴을 찡그리며 약그릇을 밀어냈다.“쓴 약이니까 몸에 좋죠. 빨리 마셔요.”이의진은 다정한 목소리로 그를 달랬다.“곧 죽을 사람인데 마시든 안 마시든 아무 소용이 없어.”유만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무슨 헛소리에요! 당신은 반드시 오래 살 수 있어요!”“그래, 그래. 오래 살게.”이의진의 단호한 얼굴에 유만수는 자기도 모르게 싱긋 미소를 짓다가 다시 약을 바라보더니 이를 악물고 한꺼번에 들이켰다.천군만마를 마주해도 얼굴색이 변하지 않던 유만수가 약 한 그릇에 얼굴 전체가 일그러졌다.그리고 입에 사탕 한 알을 물어서야 비로소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좀 괜찮아요?”이의진은 수건으로 유만수 이마의 땀을 정성스레 닦아줬다.“응. 많이 좋아졌어.”유만수가 그녀를 향해 활짝 웃었다.모두 귀한 약재지만 시간도 많이 흘렀고 약효도 떨어져 이 쇠퇴해진 몸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아무도 몰랐다.“여보, 전에 다친 상처도 아직 완전히 회복된 게 아닌데 일찍 쉬는 게 좋을 것 같아요.”“잠이 안 와.”이의진의 당부에 유만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아, 맞다. 진우랑 천우 쪽은 지금 어떤 상황인지 모르겠네?”“잘 안됐나 봐요.”이의진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채원진, 그 교활한 인간이 계속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접선 장소도 호룡각 기밀기지로 옮겼대요. 특히 유태범이 흑초산에 들어간 뒤로는 아예 사라져서 행방이 묘연해졌어요
“아니에요?”유장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용호산은 여태껏 무림인의 세계에서 일어난 일에 무관심했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무림대회를 개최한다는 건 다른 의도가 있는 게 분명해.”서태양이 말했다.인재를 선발해 위상을 높이려고 진무사가 나섰다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었다.하지만 용호산은 전혀 관계가 없지 않은가?“그럼 무슨 의도인데요?”유장미가 되물었다.“내가 어떻게 알아? 나도 궁금하거든?”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는 서태양은 어깨를 으쓱했다.“보혁 씨는 내막에 훤하니까 화두를 꺼낸 거겠죠?”유이슬이 시선을 돌렸다.“내막까지는 아니지만 주워들은 소식이 몇 가지 있긴 해요.”염보혁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제가 알기로는 용호산 뒷산의 금지구역에 최근 신비로운 보물이 나타났는데 향후 100년 동안 무림인들의 흥망성쇠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나라의 운명과도 관련이 있다고 해요.”“무슨 보물이 그렇게 대단해요?”유장미가 깜짝 놀랐다.유이슬과 서태양도 예상치 못한 듯 충격을 금치 못했다.무림인들의 흥망성쇠와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만약 제 추측이 맞는다면 용원의 기와 관련된 보물일 거예요.”염보혁이 목소리를 낮추었다.순간, 유진우는 눈썹을 추켜세웠지만 이내 포커페이스로 돌아왔다.“용원의 기? 그게 뭔데요?”유장미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용맥의 정수이기도 하죠.”유이슬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며칠 전 호룡각이 와해하면서 지하 용맥이 다섯 개의 용원의 기로 변해 세상에 뿔뿔이 흩어졌어. 소문에 의하면 용원의 기를 얻는 자는 천하무적이 되어 승승장구한다고 해.”호룡각이 무너지고 용맥이 파괴된 일이 워낙 큰 이슈였기에 자연스럽게 그녀의 귀에도 흘러 들어갔다.“진짜요? 그렇게 대단한 물건이 있어요?”유장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고서에서 관련된 기록을 본 적이 있는데 용원의 기를 얻은 자들은 세상을 주름잡는 수장이거나 천하를 다스리는 왕이었어.”유이슬이 한마디 보탰다.“맞아요.”염보혁이 대
유진우는 옆에 있는 염보혁을 흘깃 쳐다보았고, 속으로 상대방이 아무리 예뻐도 남자를 좋아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쿨럭!”염보혁은 사레가 들린 나머지 연신 기침하며 쓴웃음을 지었다.“이슬 씨, 지금 절 칭찬하는 건지 비꼬는 건지 모르겠네요.”“당연히 칭찬하는 거죠. 그런 얼굴을 보고도 어떤 남자가 마음이 흔들리지 않겠어요?”유이슬이 정색하며 말했다.“네?”염보혁은 말문이 막혔다.설령 사실일지언정 어찌 면전에서 대놓고 말할 수 있지?왠지 모르게 기분이 이상했다.“정 믿기 어려우면 태양한테 물어봐요.”유이슬이 문득 말했다.한편, 서태양은 염보혁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이름이 언급되는 순간 흠칫 놀라더니 서둘러 시선을 돌렸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은 도둑이 제 발 저린 듯싶었다.“제가요?”서태양은 난감한 얼굴로 대답했다.“선배, 장난하지 마세요. 저랑 무슨 상관이죠?”“뭔가 냄새가 나는데요?”유장미가 눈썹을 까딱하더니 눈알을 굴리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설마 보혁 씨한테 진짜 반한 건 아니죠?”“이... 계집애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서태양이 펄쩍 뛰면서 얼굴이 벌게진 채 고래고래 외쳤다.“남자끼리 엮일 리가 없잖아.”“침착해요. 단지 농담했을 뿐이에요.”유장미가 키득거리며 말했다.“게다가 남남 커플이 진짜 사랑이죠. 어차피 안 될 건 없잖아요. 만약 사귈 생각이 있다면 진심으로 축복해줄게요. 하하하!”“입만 열면 헛소리 하네.”서태양은 짐짓 화가 난 듯 혼내려는 액션을 취했다.유장미는 잽싸게 유이슬의 등 뒤로 숨어 웃음을 터뜨렸다.갑자기 산으로 흘러가는 대화에 당사자인 염보혁은 말문을 잃었다.더욱이 유장미와 투닥거리는 와중에도 그를 흘끔거리는 서태양 때문에 어이가 없었다.단순히 농담으로 치부할 수 있었지만 몰래 훔쳐보는 탓에 괜히 기분이 세했다.“진우 씨, 이슬 씨, 다들 용호산은 처음이죠? 제가 구경 좀 시켜드릴까요? 주변에 뭐 있는지 소개해줄게요.”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염
술이 몇 잔 오가자 서서히 편하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이슬 씨, 방금 검종의 제자라고 하시던데 무림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용호산에 오른 건가요?”염보혁이 넌지시 물었다.“그런 셈이죠.”유이슬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성격이 무심한 편이라 말주변이 딱히 없었다.“사실 저희는 스승님의 명을 받고 찾아왔어요.”상대적으로 외향적인 유장미가 웃으며 말을 보탰다.“노천사가 용호산에서 무림대회를 개최한다는 소식에 세상이 발칵 뒤집혔거든요. 검종 뿐만 아니라 천하회, 주술교를 포함한 파벌에서 최정예 제자들을 파견해 출전할 예정이에요.”“그럼 검종에서는 세 분이 참석하는 건가요?”염보혁이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아니요.”유장미가 고개를 저었다.“저희는 단지 구경하러 왔을 뿐, 경기에 참여하는 선수는 따로 있어요.”그녀와 서태양은 선천 후기에 속했고, 유이슬은 실력이 뛰어나긴 했으나 반보 마스터에 불과했다.어찌 됐든 천교에 비하면 열세에 처하는지라 검종을 대표해서 출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따로 있다니? 설마 홍군림이에요?”염보혁의 눈썹이 까닥했다.“그건 저도 잘 몰라요.”유장미가 생긋 웃었다.“워낙 제멋대로에 신출귀몰하는 사람이라 이번 무림대회에 참가할지 아무도 몰라요. 만약 홍 선배가 진짜 출전한다면 우승은 우리 검종이 차지할 거예요.”홍군림은 천교 랭킹의 1위에 올랐을뿐더러 어린 나이에 경천 랭킹에 진입한 검종의 천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다만 성격이 까칠하고 독불장군이라 종주를 제외하고 아무도 안중에 두지 않았다.“장미야, 그건 네 생각이고.”이때 유이슬이 입을 열었다.“홍 선배가 실력이 뛰어나고 검종의 천재로서 일반 무사들이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존재인 건 사실이지만 너도 알다시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능력자가 한 명 더 있잖아.”“누구요?”유장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유장혁.”유이슬이 무덤덤하게 말했다.“그 사람이 홍 선배보다 실력이 더 뛰어나요?”유장미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막상막하야. 천교
“네?”염보혁의 한 마디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넋을 잃었다.특히 잘 보이기 급급했던 서태양은 굳은 얼굴로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허공에 손을 들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이럴 수가?방금 목숨 걸고 구하려던 사람이 남자였다니?“남자...? 농담이죠?”붉은 옷 소녀가 염보혁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경국지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미인이 대체 어디를 봐서 남자란 말인가?푸른 옷 여인은 입만 벙긋했을 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흡혈파 망나니들이 여자가 아닌 남자한테 집적거렸다니?취향 한번 독특했다.“아니요. 진짜 남자예요.”염보혁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밖에 나가면 여자로 오해받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하지만 아무리 봐도...”붉은 옷 소녀가 말을 아꼈다.“외모 때문에 어쩔 수 없어요.”염보혁이 어깨를 으쓱하며 해탈한 듯 말했다.“아쉽네요.”붉은 옷 소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본인이 이렇게 예쁜 얼굴을 가졌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선배? 왜 그래요? 괜찮아요?”그녀는 아직도 넋을 잃은 서태양을 발견하고 손을 뻗어 어깨를 툭 쳤다.“응? 아, 괜찮아. 단지 조금 놀랐을 뿐이야.”서태양은 꿈에서 깨어난 듯 금세 정신을 차렸다.다만 눈빛만큼은 남자한테서 떠나지 않았다.이렇게 요염한 얼굴이 사내란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그야말로 재능 낭비이지 않은가?“저는 염보혁입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염보혁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유이슬이에요.”푸른 옷 여인이 대답했다.“저는 유장미라고 해요.”붉은 옷 소녀가 활짝 웃었다.비록 남자이지만 미모에 저절로 눈이 갔다.“서태양입니다.”서태양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방금 일어난 일에 대해 찝찝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다 같이 술이나 한잔 하시죠?”염보혁은 손을 내밀더니 소개를 이어갔다.“이쪽은 유진우 씨, 그리고 두 분은 호위무사인...”“춘화와 추월이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수염 난 사내의 몸에 피투성이 상처가 생겼다.눈 깜짝할 사이에 연신 검에 찔린 탓에 저항할 힘조차 없었다.비록 수염 난 사내가 힘은 더 셌지만 기교에서는 한참 못 미쳤다.여자의 화려한 검술은 감탄을 자아냈고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다.“악!”수염 난 사내가 처참한 비명을 질렀다.사지가 부러진 채 바닥에 널브러진 모습은 마치 좀비를 연상케 했다.온몸은 피가 흥건했고 상처로 가득했다. 비록 목숨에 지장은 없지만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다.“형님!”패배한 우두머리를 보자 흡혈파 제자들이 충격과 분노를 금치 못했다.항상 위풍당당하고 기세등등했던 수장이 이런 몰골을 보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젠장! 감히 우리 형님을 다치게 해? 죽고 싶어 환장했어?”“저년을 없애버려!”흡혈파 제자들이 고래고래 외치며 검을 빼 들고 무시무시한 기세로 여자를 덮쳤다.“무용지물이야.”푸른 옷 여인은 콧방귀를 뀌더니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사람들 틈으로 뛰어들었다.얼마 안 되어 흡혈파 제자들은 하나같이 처참한 비명과 함께 바닥에 나뒹굴었다.팔이나 다리가 부러진 채 선혈이 낭자했다.“역시 대단하세요!”눈앞의 광경에 붉은 옷 소녀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망나니 따위가 감히 검종에게 대들다니? 제 주제도 모르고 말이야.”서태양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뭐... 뭐라고? 너희들이 검종 제자였어?”흡혈파 제자들은 안색이 돌변하더니 두려운 기색이 역력했다.검종은 무림인들의 세계에서 3대 문파 중 하나로 천하회와 주술교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비록 제자들이 많지 않았지만 뛰어난 인재들밖에 없다.특히 검종의 홍군림은 어린 나이에 천교 랭킹 1위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경천 랭킹에 진입하여 세계 10위의 강자가 되었다.경천 랭킹 10위권에 검종 제자가 무려 2명이나 있는데 압도적인 실력으로 3대 파벌의 수장 자리를 거머쥐었다.여기서 검종의 제자들을 만나게 될 줄은 예상치도 못했다.이럴 줄 알았더라면 애초에 무모한 짓을 벌이지 않았을 텐데.“이제야
“윽!”서태양은 이를 악물고 이마에 핏줄이 튀어나온 채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이내 양손으로 검을 쥐고 온 힘을 다해 어깨를 짓누른 흡혈검을 떼어내려고 했다.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상대방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오히려 힘이 점점 더 가해졌고 무릎이 닿은 바닥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고작 이런 실력으로 감히 우리 흡혈파한테 덤비다니? 제 주제도 모르고 말이야.”수염 난 사내가 냉소를 지었다.“형님! 멋져요.”“역시 대단하세요.”부하들이 질세라 감탄했다.북쪽에서 흡혈파라고 하면 꽤 이름 있는 큰 파벌인지라 애송이 같은 놈이 도발할 만한 게 아니었다.“감히 내 앞에서 영웅 행세해? 넌 오늘 인생에서 가장 잘못된 결정을 내린 거야. 교훈 삼아 사지를 부러뜨려줄게!”수염 난 사내가 비열한 미소를 짓더니 흡혈검을 들어 올려 서태양의 손목을 향해 휘둘렀다.챙!검이 닿기 직전 청색 보검이 불쑥 나타나 허공에서 공격을 막아냈다.“응?”수염 난 사내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푸른 옷 여인이 보검을 들고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선배?”서태양의 표정이 밝아지더니 그제야 한숨 돌렸다.조금만 늦었더라도 오른손을 잃어버렸을 텐데 그나마 선배가 제때 도움을 줘서 천만다행이었다.“괜히 참견하지 마.”수염 난 사내가 음흉하게 웃었다.“우리 후배한테 손을 대는 순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여자가 싸늘하게 말했다.“맞아! 너희들 같은 망나니는 벌을 받아 마땅하지.”이때, 붉은 옷 소녀가 검을 빼 들고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언니, 제가 도와줄게요.”“아니야. 넌 태양이랑 지켜보고 있어. 이런 놈들은 나 혼자서도 충분하니까.”푸른 옷 여인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지?”수염 난 사내가 히죽 웃었다.“그런 왜소한 몸으로 오빠의 검을 어찌 막으려고? 차라리 무기는 내려놓고 침대에서 겨뤄보는 건 어때?”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부하들이 폭소를 터뜨렸다.곧이어 음흉한 시선으로 여자를 훑으며 멋대로 평가하
서태양이 움직이자 수염 난 사내의 뒤에서 덩치가 산만 한 남자 두 명이 튀어나왔다.두 사람은 무기로 길쭉한 검을 들고 있었다.몸체는 강한 피비린내와 함께 은은한 살기가 감돌았다. 이는 칼날이 오랫동안 선혈에 노출된 결과였다.무림인들의 세계에서는 흡혈검이라고 불렀다.다만 아쉽게도 그들이 지닌 검은 아직 미성숙 단계였고 기세가 한창 부족했다.챙! 챙!서태양이 먼저 검을 빼 들고 혼자서 두 명의 사내와 대결을 벌였다.그들은 기세등등하게 맞서 싸웠지만 힘만 강했을 뿐 행동이 굼뜬 편이었다.공격할 때마다 동작이 다소 어설펐다.반면, 서태양은 누가 봐도 고수의 가르침을 받았고 실전 경험도 풍부했다.스피드, 힘, 기술 등 모든 면에서 높은 수준에 도달했으며 어느 하나 뒤처진 데 없었다.세 사람이 공격을 주고받는 순간 실력 차이가 현저했고, 서태양은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사내를 쓰러뜨렸다.그리고 응징할 겸 각자의 다리에 검을 관통했다.“흥! 고작 이런 실력으로 우쭐거려? 제 주제도 모르고.”서태양은 장검을 비스듬히 겨누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죽기 싫으면 당장 꺼져.”“좋아! 잘했어!”승리를 거머쥔 서태양을 보자 구경하던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비록 나서서 싸울 용기는 없었지만 응원의 박수를 보내는 것쯤은 충분히 가능했다.“그래도 실력은 꽤 있나 보네? 어쩐지 참견하더라니.”수염 난 사내가 눈을 가늘게 뜬 채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천천히 뽑아 들고 음침한 목소리로 협박했다.“하지만 오늘 임자를 만났지. 흡혈파를 마주친 이상 살아남을 방법은 없어.”“흡혈파는 무슨, 들어보지도 못했구먼.”서태양의 표정은 기고만장했다.“하! 괜찮아. 네 피를 전부 흡수하고 나면 우리가 왜 흡혈파라고 불리는지 알 거야.”수염 난 사내가 이죽거리더니 두말없이 공격을 개시했다.그가 발을 내딛자마자 맹렬한 기세가 솟구쳤고, 손에 든 흡혈검은 핏빛을 뿜어내며 곧장 서태양을 덮쳤다.앞서 상대했던 부하들과 달리 수염 난 사내의 흡혈검은 살기로 가득했다
아름다운 얼굴은 쉽게 화를 부르는 법이다.염보혁은 남자였지만 여자보다도 더 아름다운 요염한 얼굴을 지녔다.길을 나서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도리가 없었고 지금처럼 깡패 무리와 마주할 때면 번번이 시비에 휘말리기 일쑤였다.유진우는 모른 척하며 조용히 술잔을 기울였다.“어이, 이쁜이. 저런 나약한 놈이랑 술 마셔서 뭐 하겠어? 차라리 우리랑 한잔하지, 아주 즐겁게 해줄 테니 말이야!”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사내가 염보혁의 턱을 손가락으로 건드리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이 손 치우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후회하게 될 테니까.”염보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어여쁜 외모 탓에 남녀를 불문하고 다가오는 사람이 많았지만 이처럼 대놓고 희롱하는 경우는 드물었다.“오, 이쁜이가 화를 내네?”수염 난 사내는 턱을 문지르며 비웃었다.“솔직히 말해서 화난 얼굴이 더 매력적인데?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더욱 감탄스럽군.”그의 말에 뒤따르던 무리들이 일제히 폭소를 터뜨렸다.유진우는 피식 웃으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눈앞의 이 사내는 제법 능숙하게 수작을 부렸다.염보혁이 남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셋을 센다. 그 안에 사라지지 않으면 내가 직접 손봐주지.”염보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손 본다고? 하하하!”수염 난 사내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이거 제법 앙칼진데?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위층으로 올라가서 천천히 우리를 손 봐줘, 어때?”“맞아, 맞아! 방도 넉넉하니 차례대로 너랑 놀아줄 수 있다고!”그의 동료들도 시시덕거리며 말을 보탰다.“셋.”염보혁은 더 이상 말을 섞을 필요도 없다는 듯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이쁜이, 괜히 버티지 말고 그냥 올라가자. 내가 아주 다정하게 대해줄 테니 말이야.”수염 난 사내는 입을 커다랗게 벌려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낄낄댔다.“둘.”염보혁은 여전히 냉랭한 표정을 유지했다.“싫다면 어쩔 수 없지. 내가 직접 안아 올라가는 수밖에.”그가 손을
유진우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혁 씨가 이렇게까지 많은 걸 알고 있을 줄은 몰랐군요. 제 생각엔 장일청과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는 것 같은데요.”용호산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염보혁이 이렇게나 많이 알고 있다니, 이건 그가 평범한 인물이 아님을 증명하는 셈이었다.“진우 씨께서 과찬해 주시는군요. 저는 그저 사람들 사이에 끼어 듣는 걸 좋아해서 호기심에 이런저런 소문을 알아본 것뿐입니다. 사실 별다른 능력은 없어요.”염보혁은 겸손하게 웃으며 덧붙였다.“하지만 만약 진우 씨께서 무림대회에 참가하신다면 전 온 힘을 다해 진우 씨가 우승할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보혁 씨,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군요.”유진우는 담담하게 말했다.“전 그저 세상 구경이나 해볼 겸 참가하는 것뿐입니다. 우승 같은 건 감히 꿈도 꾸지 않아요. 애초에 제 실력으로 어떻게 그 내로라하는 강자들과 겨룰 수 있겠습니까?”“진우 씨는 너무 겸손하시군요. 저는 사람을 보는 눈이 정확합니다.”염보혁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진우 씨는 외모도 준수하고 기품 또한 비범하시죠. 멀리서 봐도 강렬한 기세가 느껴졌습니다. 비록 진우 씨의 신분은 알 수 없지만 이것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진우 씨는 절대 범상한 인물이 아닙니다!”“보혁 씨께서 저를 이렇게까지 칭찬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유진우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저는 평범한 출신에 보잘것없는 실력을 갖췄을 뿐입니다. 아마 실망할 겁니다.”“하하, 괜찮습니다. 커다란 황금 잉어가 어찌 작은 연못에서만 머물겠습니까? 바람과 구름을 만나면 반드시 용이 되어 날아오를 것입니다. 지금 진우 씨의 명성이 미미할지라도 저는 믿습니다. 언젠가 반드시 하늘 높이 날아오를 날이 올 거라고!”염보혁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 그 눈빛은 절대적인 믿음을 담고 있는 듯했다.유진우는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이 사람, 도대체 뭐지? 분명 오늘 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