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뭐라고 했어요 방금?”남궁은설은 제 귀를 의심하며 물었다.“날 납치한 거라고요? 그니까 날 속였던 거라고요?”“그래, 널 속였어.”서문천명은 태연하게 인정했다.“근데 그건 날 탓할 게 아니라 그렇게까지 눈치가 없는 널 탓해야지. 넌 정말 사람 보는 눈이 없다니까. 내가 몇 마디 했다고 그거에 금방 홀리다니, 너같이 멍청한 애는 처음 봐.”“그니까... 내가 진우 오빠를 오해해서 다치게 한 거라고요?”사실을 알게 된 남궁은설은 밀려오는 죄책감에 두 눈에 눈물을 대롱대롱 매달았다.한없이 착하기만 했던 남궁은설은 사촌오빠가 자신을 속일 거라고는, 가장 좋은 친구라 믿었던 사람이 속일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그러고는 무턱대고 유진우부터 의심했다, 사실이 이런 줄도 모르고.서문천명의 말을 들은 남궁은설은 그제야 자신이 그동안 믿었던 것이 모두 가짜였음을 알아차렸다. 남궁진혁이 그녀를 속인 것이고 친구라 믿었던 서문천명도 거짓말을 한 것이고 오직 유진우만이 진심으로 남궁은설을 도와주고 구해주려 했던 것이다.그런데도 남궁은설은 그 진심을 알아보지 못하고 유진우를 내쫓으려고만 했다.고작 거짓말 몇 마디에 자신을 정말 아끼고 사랑해 준 사람을 상처받게 만들었다. 도대체 그동안 뭘 한 걸까, 어쩜 그렇게 멍청할 수 있었던 걸까...“왜, 왜 나를 속였어요?”남궁은설은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한솔과 유연지 그리고 친구들이라 믿었던 사람들을 돌아보며 물었다.“...”남궁은설의 시선을 느낀 그들은 서둘러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지 못했다.그들도 서문천명이 다들 보는 앞에서 이 사실을 까발릴 줄은 몰랐었기에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했다.“진우 오빠, 미안해요... 내가 미안해요...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남궁은설은 사람들 틈에 섞여 있는 유진우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너무나도 미안했고 사실을 이제야 안 제 자신이 원망스러워 가슴이 아파왔다.남궁은설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을 가장 싫어했는데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되어버
서문천명 곁에는 살인청부업자 고수들이 수두룩했다. 그건 강군 저택의 최강 킬러팀이 와도 쉽게 뚫을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아무리 유진우의 실력이 비범하다고 해도 단번에 이 많은 사람을 처리하기는 쉽지 않았다.“잔말 마시고 당신 딸한테 무슨 일 생기는 걸 원하지 않으면 빨리 와서 도와주세요!”유진우는 재촉하며 말했다.“내가 도와줄게!”도란영이 제일 먼저 반응을 보이며 얼른 달려와서 같이 결박령을 풀었다.결박령은 엄청나게 꽉 묶여 있어서 힘으로는 절대 풀 수 없었다. 그저 한층 한층 풀 수밖에 없었다.“하나…”이때, 서문천명은 잔인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마지막 말소리가 떨어졌다.“당신들이 무기를 내려놓지 않는 이상, 내가 마음이 독하다고 탓하지 마세요!”말을 마치고 바로 손에 든 칼을 남궁은설의 어깨를 향해 내리 휘둘렀다.“멈춰!”남궁보성은 노성을 지르고 몸의 아픔을 꾹 참으며 서문천명 쪽을 향해 덤벼들었다. 하지만 그쪽에 채 다가가기도 전에 이미 금오국의 살인청부업자들한테 가로막혔다.위급한 고비에서 한 개의 은침이 ‘슉!’ 하고 나와서 서문천명의 칼을 정확히 명중하였다.“쟁쟁!”두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서문천명의 칼은 은침을 맞고 손에서 벗어나 공중에서 두 바퀴 돌고 나서 ‘쟁그랑!'하고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바닥에 부딪히면서 불꽃이 튀겼다.“누구야?”서문천명은 놀라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그는 얼른 남궁은설의 몸 뒤로 숨고는 또 자기가 기습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손을 저어 살인청부업자들이 자기 앞을 막게 했다.“서문천명, 오늘이 당신 제삿날이야. 빨리 무릎 꿇고 빌면 시체만큼은 남겨 줄게.”유진우는 느슨해진 결박령을 천천히 풀고는 다시 몸을 은밀하게 숨겼다.‘이런 보물은 참 만나기 힘든 귀한 템인데 앞으로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당신이었군요!”서문천명은 남궁은설의 어깨 옆으로 고개를 반쯤 내밀고 웃으며 말했다.“유 선생님, 남궁 가문에서 여러모로 선생님을 그렇게 괴롭히고
머리가 터진 서문천명을 보고 현장은 갑자기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남궁보성의 고함소리가 뚝 그쳤다.유연지, 한솔 등 일행도 이 광경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모든 것이 너무 순식간에 일어나 그들은 반응할 겨를조차 없었다.서문천명은 인질을 방패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살인청부업자의 보호도 있었다.이런 상황에서 유진우가 한방에 서문천명을 필살했다는 게 정말 소스라치게 믿어지지 않았다!“쿵!”서문천명의 머리 없는 시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우진우는 어안이 벙벙한 남궁은설의 어깨를 잡고 그녀를 포위에서 남궁 가문의 진영 쪽으로 던졌다. 이로써 위기를 모면한 셈이었다.“천명아!”서문명오는 손자의 시체를 보고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순간 노발대발하며 말했다.“이런 개자식! 네가 감히 내 손자를 죽여? 난 너를 갈기갈기 찢어놓을 거야! 죽여라! 반드시 저놈을 죽여라!”서문명오의 명령과 함께 수많은 살인청부업자 고수가 벌 떼처럼 몰려들었다.각종 암기, 독이든 표창, 그리고 손에 든 검들이 다 끊임없이 뿜어져 나왔다.바글바글한 무기들은 마치 폭풍우의 빗방울처럼 하늘에서 급작스럽게 쏟아져 내려 사람들에게 반응할 시간도 안 주었다.그리고 암기들이 분사되는 동시에 살인청부업자들도 각자 자기의 수단들을 드러냈다. 어떤 이들은 높이 뛰어올라 철사 망을 냅다 뿌렸고 어떤 이들은 땅 아래서 튀어 올라오며 습격을 발동했다.순식간에, 유진우는 마치 뭇사람들의 비난 대상으로 된 것처럼 천지사방으로부터 포위공격을 당했다.“다들 얼른 가서 저 사람을 지원해! 금오국의 살인청부업자들을 다 죽여!”남궁을용은 바로 명령을 내렸다.장군 저택에서 정성껏 기른 킬러 팀은 바로 뒤질세라 분분히 적들에게 돌격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쪽은 다시금 혼전이 폭발하였다.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아까랑 완전히 달랐다.장군 저택의 킬러팀은 원래 실력이 뛰어난 데다가 유진우의 도움이 있으니 더 호랑이에게 날개를 단 격이었다. 잠깐의 틈이 지나, 그들은 금오국의 살인청
이 말을 하면서 덥석 남궁은설의 손목을 잡고 강제적으로, 밖으로 끌고 갔다.“싫어요! 나 안 가요! 놔주세요!”남궁은설은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그녀는 이미 유진우에게 빚을 한 번 졌는데 이렇게 또 한 번 빚을 지고 싶지 않았다.안 그럼 남궁은설은 평생 마음 편히 지낼 수 없었다.“은설아. 네 아버지 말이 맞아. 시간이 긴박하니 일단 빨리 가자!”“그래, 은설아! 지금 사람 목숨이 달렸는데 그만 고집을 부려.”“유진우가 죽으면 죽었지, 우리만 목숨을 부지하면 되잖아. 그리고 장군 저택을 위해 희생하면 그건 그 사람 평생의 영광이 될 거야!”이때, 한솔과 유연지 등 사람들은 분분히 남궁은설을 설득했다.만약 유진우의 목숨으로 이 사람들의 안전을 맞바꾼다면 그런 어마어마하게 버는 장사였다.“가려면 당신들이나 가세요. 저는 절대로 안 갈 거예요!”남궁은설은 전혀 권고를 듣지 않았다.“이런 뻔뻔한 년!”남궁보성은 화가 난 나머지 딸의 뺨을 내리치며 욕했다.“지금 네가 떼를 쓸 때가 아니야! 오늘은 반드시 내 말을 들어야 해! 여봐라! 얘를 끌고 가!”남궁은설은 뺨을 맞고 얼떨떨해서 얼굴을 감싸 쥔 채 어찌할 바를 몰랐다.한솔과 유연지는 서로를 한번 바라보고는 동시에 남궁은설의 팔을 잡고 그녀를 질질 끌며 밖으로 나갔다.이 시각, 폐허 위에서 쌍방 세력은 아직도 싸우고 있었다. 양쪽 모두 병마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시체는 하나하나 쓰러졌고 전황은 매우 처참했다.“다 비켜! 너희는 저 사람의 상대가 아니야. 내가 저자를 상대할게!”장군 저택의 킬러 팀 사람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서문명오에게 들이받는 것을 보고 유진우는 조금 마음이 아파서 급히 소리 내 그들을 제지했다.장군 저택의 사람들은 비록 다들 본투비 레벨 고수였지만 상대편의 무도 마스터인 서문명오에게는 그래도 아무런 저항력이 없었다.하지만 양쪽 사람들이 섞여 난투극을 벌이다 보니, 실수로 무고한 사람들을 해칠까 봐 유진우도 제대로 실력을 다 발휘할 수 없었다.그래서 차라리
“슝!”창공보검은 한 줄기의 검은 번개가 되어 서문명오의 가슴을 꿰뚫고 바로 유진우의 손에 돌아왔다.피는 검날을 따라 천천히 흘러내려서 칼끝에 모인 후 한 방울 한 방울 바닥에 떨어지면서 송이송이 핏방울을 튀겼다.“쿵!”서문명오의 몸이 휘청거리더니 곧바로 하늘에서 뚝 떨어지며 두 무릎이 세게 바닥에 부딪혔다.무릎을 꿇고 있는 자세로 그 자리에 굳어졌다.현장은 갑자기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모든 소리는 전부 사라지고 사방에서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렸다.장군 저택의 사람이든, 아니면 많은 하객이든, 아니면 금오국의 살인청부업자들이든, 이 시각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모든 사람의 얼굴에는 다 충격이 쓰여있었다.그들은 금오국의 검성이자 실력이 뛰어난 서문명오가 이렇게 유진우의 검 한방에 가슴을 꿰뚫게 될 줄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전체 과정에서 아무런 징후도 보이지 않아 모두가 반응하지 못했다.그들은 그저 한 줄기의 검은 번개가 스치는 것을 보았고 그다음 장면이 바로 위풍당당한 서문명오가 꿇고 있는 것이었다.“어...”서문명오는 고개를 숙인 채, 얼굴에는 온통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이 순간 그의 가슴에는 아주 커다란, 피가 흐르고 있는 구멍이 생겼다.그는 심지어 이 구멍으로 뒤에 있는 물건들, 그리고 남궁을용의 경악에 찬 늙은 얼굴이 보였다.이 시각은 조금 이상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어떻게? 어떻게 네가... 날 다치게 할 수 있어?”서문명오는 힘겹게 고개를 들며 몹시 잠긴 목소리로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남궁을용은 온몸에 중상을 입고 더 이상 전투력이 없었다. 정상적으로 말하면, 이 자리에서 서문명오가 제일 무적인 존재여야 했다.하지만 그는 이런 변고가 생길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왜일까? 그건 내려가서 염라대왕한테 물어봐...”유진우는 조금의 군말도 하지 않고 앞으로 다가가서 검을 휘둘러 서문명오의 머리를 베어버렸다.쿵!서문명오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질 때야 사람들은 꿈에서 깬 것처럼 전례 없는 센세
심지어 각 공식 기관까지 정중하게 그를 대해야 했다.과장하지 않고 말하면, 유진우의 나이와 그가 보여준 실력에 의하면 훗날 그는 충분히 노 장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이처럼 운명을 타고난 사람은 그들이 평생 우러러봐야 할 존재였다.하지만 제일 큰 문제는 지금 그들은 전에 이미 유진우에 대해 각종의 경멸을 보였으며 심지어 그에게 폭언까지 퍼부었다.만약 상대방이 복수를 한다고 하면 그 결과는 정말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여기까지 생각하니, 한솔, 유연지 등 일행은 그저 소름이 돋고 간담이 서늘했다.무서움을 느끼는 동시에 그들은 몹시 후회스러웠다.한편으로는 유진우의 미움을 산 것을 후회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의 어리석음에, 사람을 보는 눈이 없어 제때 보물을 발견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만약 미리 유진우랑 친분을 다졌으면 앞으로 출세하는 건 정말 쉬운 죽 먹기였을지도 모른다.“참 이 녀석도, 이렇게 잘 감추고 있다니. 나도 한동안 알아차리지 못했네.”깜짝 놀란 것도 잠시, 남궁을용은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비록 장군 저택의 기본기가 탄탄하다고 하지만 이런 연쇄 공격은 이겨내기 힘들었다.유진우가 형세를 뒤바꿔서 다행이지, 아니면 오늘 장군 저택은 피바다가 되었을지도 모른다.“이겼다... 진우 오빠가 이겼다! 도망가지 않아도 된다!”남궁은설은 환호하며 깡충깡충 뛰었다. 그리고 기쁨에 겨운 눈물을 흘렸다.남궁보성의 얼굴색은 조금 복잡했다. 기뻐해야 할지 걱정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장군 저택이 이번 고비를 넘긴 것은 확실히 기뻐할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유진우의 표현이 너무 이상할 정도로 훌륭했다. 거기에다 쌍방은 서로 모순이 있었다.그래서 남궁보성은 지금 어떻게 유진우를 상대해야 할지 몰랐다.“금오국의 잔당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죽여야 해요!”유진우는 서문명오를 참살한 것에 멈추지 않았다. 창공보검을 휘두르고 또 장군 저택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금오국의 살인청부업자들을 해결하기에 나섰다.서문명오가 없어지자, 이 살
남궁을용의 이 말은 당연히 의도가 있었다.한편으로는, 문무를 겸비하고 앞날이 창창하며 인품과 성격까지 좋은 유진우를 진심으로 좋아하기 때문이다.이런 유능한 청년은 용국 전체에서도 손꼽힐 정도이다.그가 손녀사위가 된다면 장군 저택은 앞으로 보장이 생길 것이다.다른 한편으로는, 손녀 남궁은설을 위한 것이다.이 아이는 마음씨가 착하고 순진해 다른 사람에게 쉽게 속기 때문에 믿고 의지할 만한 든든한 보호자가 필요하다.의심할 바 없이 유진우는 최선의 선택이다.남자는 유능하고 여자는 미모가 뛰어나니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 할 수 있다.이때 남궁은설은 말없이 조용히 뒤에 서 있었다.그녀의 예쁜 얼굴은 수줍음과 기대감으로 발그스름해졌다.그녀는 유진우의 입에서 자신이 원하는 답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저를 아끼는 장군님 마음은 감사합니다만, 일개 평민인 제가 어찌 은설 씨를 넘볼 수 있겠습니까?”유진우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완곡하게 거절했다.“이 사람아, 내가 자네 신분을 몰라? 그런 서먹서먹한 말은 그만해. 한마디만 물을게. 자네 우리 은설한테 호감이 있어 없어?”남궁을용이 또 한번 캐물었다.“장군님, 저와 은설 씨는 그냥 친구일 뿐입니다.”유진우가 단호하게 대답했다.“그냥 친구?”이 말을 들은 남궁을용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이 말이 왜 이렇게 귀에 거슬리지?전에는 여동생으로 여기지 않았는가? 왜 갑자기 거리를 두지?‘그냥 친구’라는 말을 듣고 남궁은설도 표정이 굳어지고 눈에 실망한 기색이 가득했다.“진우 씨, 좀 더 생각해 볼래?”남궁을용은 좀 달갑지 않은 듯했다.손녀의 행복을 쟁취하기 위해 체면이고 뭐고 다 버린 셈이다.“장군님, 억지로 하는 일은 결과가 좋지 않으니 그만하시죠.”유진우는 단호한 눈빛으로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었다.“어휴... 됐어. 젊은이들 일에 참견하지 않을게.”설득이 통하지 않자 남궁을용은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장군님, 여기 제가 할 일은 없는 것 같으니 먼저 가보겠습니다.”유진우는 공
“어이구...”남궁을용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훌륭한 사람일수록 자존심이 강해서 돌이키기 어려워. 네가 이미 친구 사이에서 선택을 했으니 너를 탓하지 않을 수는 있겠지만 절대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거야.”“아! 그럼 어떡하죠?”남궁은설은 좀 당황했다.“순리에 따라야지.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게 잊힐 거야. 어쩌면 나중에 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지.”남궁을용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엎지른 물은 다시 담지 못한다는 걸 그는 알고 있다.일단 관계에 금이 생기면 아무리 메워도 그 금은 사라지지 않는다....장군 저택을 떠난 후 유진우는 차를 몰고 풍우산장으로 돌아갔다.산장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장 영감이 당황한 기색으로 뛰어나오면서 소리쳤다.“보스, 큰일 났어요! 큰일 났어요!”“네?”유진우는 즉시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일인데 그렇게 긴장해요? 자세히 말해보세요.”“홍연 전쟁 여제가 왔습니다.”얼굴이 땀투성이가 된 장 영감이 말했다.“뭐가 그리 호들갑이에요? 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놀랄 일이에요?”유진우가 눈을 흘겼다.그래도 큰 풍랑을 겪은 사람인데, 왜 이런 사소한 일에도 허겁지겁하는지?진짜 못났네!“그리고... 그리고...”“그리고 뭐요? 한꺼번에 말해요. 세상 물정을 모르는 촌놈처럼 굴지 말고. 창피하게!”“홍연 전쟁 여제뿐이 아니라 조선미 아가씨도 있어요. 두 분이 이미 만났어요.”유진우가 경멸에 찬 눈길을 보내자 장 영감이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네?”유진우는 깜짝 놀라며 갑자기 허둥댔다.“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요?”“지금 말씀드리고 있잖아요?”장 영감이 얄궂은 표정을 지었다.‘아까는 센 척하지 않았어? 창피한 게 누구지?’“어떻게 된 거예요? 둘이 싸우지는 않았어요?”유진우가 급히 캐물었다.조홍연의 성격을 그는 잘 알고 있다. 걸핏하면 무력을 쓰고, 아무도 막을 수 없다.“싸우지는 않았는데, 좀 섬뜩해요.”장 영감이 생각만 해도 무섭다는 듯 목을 움츠렸
“사철수 씨, 아직도 멍하니 서서 뭐 하는 거예요? 사진이라도 찍어줘요? 빨리 보물 지도를 찾아내세요.”불만으로 꼴 독 찼던 유태범은 못마땅한 얼굴로 사철수에게 화풀이했다.“알겠어요. 서두를게요.”유태범의 말에 사철수는 즉시 합금으로 되어 있는 대문 앞으로 다가가 채원진의 부러진 손을 들어 중간 부분에 있는 감응 위치를 살짝 눌렀다.띵 하는 소리와 함께 두터운 대문이 천천히 안쪽으로 열리자, 금속으로 만든 금고가 드러났다.금고는 약 33제곱미터 정도의 크기였고 한가운데에는 골드바가 사람의 키보다 더 높게 쌓여 있었다.골드바 외에도 그 주변에는 다양하면서도 진기한 보물들이 빽빽하게 배치되어 있었는데 하나같이 비싸고 귀중한 물건들이었다.“이곳은 채원진의 개인 금고예요. 채원진은 마음에 드는 모든 물건을 전부 이곳에 수집했어요.”사철수가 설명했다.“보물들이 어마어마하네요.”유천우는 사방을 둘러보며 감탄했다.“이것들을 전부 가지고 나가면 성을 하나 사고도 남겠네요.”“이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호룡각의 다른 세 보물 창고에 비하면 눈앞에 있는 것들은 새 발의 피죠.”사철수가 설명했다.“정말이에요?”유천우는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당신 말대로라면 호룡각의 보물을 전부 모으면 산더미가 되겠는데요?”“제가 직접 본건 아니지만 수십 년 동안 쌓아왔으니, 산더미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거예요.”사철수는 진지하게 말했다.“좋아요. 아주 좋아요! 빨리 모든 보물을 긁어모으고 싶네요.”유천우는 정신이 번쩍 들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보물 지도는 도대체 어디 있는 거예요?”유태범은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여기 있어요.”사철수는 맨 안쪽 선반으로 가서 위에 놓여있는 정교한 박달나무 상자를 꺼내 조심스럽게 유진우에게 건넸다.유진우가 열어보니 안에는 양피지 3장이 들어있었다. 모든 양피지에는 상세한 지도가 그려져 있었고 지도 중앙에는 보물 창고의 위치가 금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보물 지도가 진짜라면, 지도에 그려져 있는
“보물 지도는 어디 있나요?”유진우가 추궁했다.“채원진의 지하 밀실에 있어요. 내가 직접 세자 전하를 모시지요.”사철수가 말했다.“지하 밀실?”유천우는 실눈을 뜨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혹시 속으로 다른 꿍꿍이를 꾸미는 건 아니죠? 나중에 나를 악랄하다고 탓하기 싫으면 그런 생각은 빨리 접는 게 좋을 거예요.”밀실 같은 건물에는 함정과 암기가 많이 설치되어 있는데 유천우는 사철수가 다른 속셈이 있는 건 아닐까 걱정스러웠다.“저는 이미 독 안에 든 쥐가 아닙니까. 절대 그럴 일 없습니다.”사철수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앞서서 안내하세요.”유진우가 두 근위병에게 눈치를 주자 근위병 두 명이 와서 사철수를 일으켜 세웠다.“잠깐만요. 밀실에 있는 보물 상자를 열려면 채원진의 손이 필요해요.”사철수가 갑자기 말했다.“그건 쉽죠.”유천우는 즉시 칼을 빼 들어 채원진의 오른손을 잘라 사철수에게 건네며 말했다.“자. 선물이에요.”사철수는 징그러웠지만 아무 말도 못 하고 채원진의 손을 받아 들고 앞장섰다.유진우와 몇몇 사람은 사철수를 따라 기지로 들어갔고 마침내 지휘실 입구까지 도착했다.사철수는 문을 열고 벽 쪽으로 다가간 다음 벽에 걸려 있는 그림 하나를 떼어냈다.그림 뒤에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전혀 알아차리기 어려운 하나의 버튼이 있었다.사철수가 손을 내밀어 버튼을 누르자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벽 전체가 갑자기 양쪽으로 열리더니 안에 있던 엘리베이터가 드러났다.사철수가 유진우를 포함한 몇 명을 데리고 엘리베이터로 올라탄 뒤 스위치를 누르자 문이 닫히더니 천천히 지하로 내려갔다.반 시간 남짓 지나자 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췄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유진우와 몇 명 사람들의 눈에는 넓고 호화로운 지하 밀실이 들어왔다.말이 밀실이지 사실 호화 저택에 가까웠다. 안에는 없는 것 없이 다양한 생활 시설이 모두 갖춰져 있었고, 많은 물과 식량도 수집되어 있었는데 수십 년 동안 혼자 생활하기에는 충분한 수량이었다.“핵 방지
“유진우?”무릎을 꿇은 채 냉정한 표정을 한 유진우를 바라보는 사철수의 얼굴은 매우 복잡해 보였다. 놀라움과 기쁨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미안함과 죄책감이 더욱 컸다.흑용군이 매복되어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사철수는 이미 호룡각의 대세가 기울었음을 알아차렸다.아니나 다를까 호룡각의 기지는 파괴되었고 채원진은 목숨을 잃었으며 사철수는 유진우한테 체포되었다. 하지만 사철수는 어쩌면 이게 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비록 사철수가 호룡각의 사람이긴 했지만, 서경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고 서경은 이미 사철수한테는 고향 같은 곳이었고 주변에 가족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아주 많았다.사철수가 저질렀던 많은 일들은 어쩔 수 없이 억지로 했던 거라 마음이 늘 불편했었다.오늘,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도 모두 사철수의 업보였고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이였다.“아저씨,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죠? 채원진이 패했으니, 당신도 패한 것과 마찬가지예요. 이제 와서 더 할말이 남았나요?”유진우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이기면 영웅이고 지면 도적이 되는 법이지요. 세자 전하께서 죽이시든 벌을 주든 저는 다 괜찮습니다. 다만 무고한 사람에게 해를 가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사철수는 간절한 마음으로 간청했다.“당신이 지금 나한테 그런 조건을 내세울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세요?”유진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세자 전하, 죄인인 저는 죽어도 마땅합니다. 하지만 제 아내와 딸은 죄가 없지 않습니까? 그들은 용서해 주십시오.”사철수는 허리를 굽혀 땅바닥에 머리를 세게 박으며 유진우에게 절을 올렸다.“당신 말대로 그들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죠. 하지만 못난 남편과 아비 때문에 그들도 죄인이 된 겁니다. 설마 당신은 어리석게도 그렇게 큰 죄를 지어 놓고 가족은 아무 일 없이 무사할 거로 생각한 겁니까?”유진우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세자 전하, 공을 세우는 거로 저의 죄를 보상하면 안 될까요? 세자 전하께서 소가 되라면 소가 될 것이고 말이 되라면 말이 될 것입니다.
바로 이때 조무진이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조무진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눈길을 돌리자 완전 무장을 한 군부가 보였는데 족히 수만 명은 되는 것 같았다.검은 갑옷을 입고 긴 칼을 허리에 찬 병사들은 기세가 매우 위풍당당했다.얼핏 보면 마치 강철로 되어 있는 호수 같았는데 멀리서부터 강한 압박감을 주는 이 부대는 바로 서경의 최강 정예 부대 흑용군이었다.“보아하니 사철수는 이미 체포된 것 같네요.”이청성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이 흥용군의 리더는 바로 유천우였다.당시 유천우는 명령에 따라 천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포위망을 뚫고 들어가 호룡각의 정예 부대를 미리 파놓은 함정에 빠지게 만든 뒤 절대적인 병력 우세로 오천여 명의 적을 죽이고 나머지는 모두 포로로 체포했다.쿵 쿵 쿵!수만 명의 흑용군이 가까워질수록 그 압박감은 점점 더 강해졌다. 성벽 위에 있던 백호군들도 겁에 질려 얼굴이 창백해졌다.소문에 의하면 흑용군은 용국의 최강 군부로서 창시 이래 백전백승을 이뤘고 여러 차례 뛰어난 공을 세웠으며 어떠한 군부도 흑용군과 정면으로 맞서 싸울 수 없다고 했다.이렇게 직접 눈으로 보니 그 소문은 거짓이 아닌듯했다. 흑용군의 강렬함과 살벌함은 충분히 다른 군부를 경시할 만했다.“형! 임무를 완성했어요. 호룡각의 남은 사람은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 잡아들였어요.”유천우가 먼저 앞으로 다가와 보고했다.“잘했어.”유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이쪽은 어떻게 됐어요? 채원진은 죽었어요?”유천우는 여기저기 둘러보며 말했다.“머리가 잘렸는데 살아있을 리가 없잖아?”조무진은 발로 채원진의 머리를 슬쩍 건드리며 말했다.채원진의 머리는 축구공처럼 땅바닥에서 굴러 유천우의 발밑에 멈추었다.“뭐야! 이렇게 못생겼다고? 어쩐지 맨날 가면을 쓰고 다니더라니.”유천우는 바닥에 침을 뱉었다. 자신의 아버지를 암살하고 서경을 해친 놈을 미워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채원진은 이미 죽었고 밑에 있던 정예들은 모두 체포되었으니, 호룡각은 이제 완전히 멸망한 셈이에요.
채원진은 죽고 호룡각 기지는 함락되었다. 이로써 호룡각은 조직 전체가 완전히 멸망했고 남은 사람이라고는 흩어져 있는 병사들뿐이라 크게 위험이 되지는 않았다.하지만 유진우는 방심하지 않고 호룡각이 관련된 모든 사람은 전부 체포하라고 명을 내렸다. 만약 그들이 자진해서 항복한다면 죽음을 면할 수 있지만 끝까지 저항한다면 남은길은 죽음뿐이었다.“형, 드디어 이 재앙 같았던 놈을 처리했네. 축하해!”조무진은 앞으로 걸어가 채원진의 시신을 발로 차 완전히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미소를 지었다.“다 네 덕분이야. 네가 20만 명의 백호군을 데리고 채원진의 퇴로를 끊어놓지 않았다면 채원진은 또 다른 기회를 찾아 연명했을지도 몰라.”유진우가 말했다. 그는 채원진을 죽이기 위해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고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 걸었다. 결국 채원진은 죽었고 그는 승리했다.“난 별로 한 게 없어. 고마워할 거면 공주마마께 고마워해야지.”조무진은 고개를 돌려 뒤에 서있는 이청성을 보며 미소를 짓고 말했다.“공주마마께서 형을 돕는다고 엄청 바쁘셨어. 한순간도 긴장을 놓지 않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독촉하느라 발등에 불이 붙을 뻔했다니까.”“조무진 씨! 지금 무슨 말 하는 거예요?”이청성은 앞으로 걸어 나오며 퉁명스러운 말투로 말했다.“별거 아니에요. 공주마마께서 학식과 도리가 깊고 외모와 지혜가 뛰어나다고 칭찬하고 있었어요.”조무진은 아첨하며 웃음을 지었다.“흥! 말은 번지르르하게 잘하네요.”이청성은 조무진을 흘겨보며 말했다.“공주마마, 감사합니다.”유진우는 공수하며 말했다.“뭘 그렇게 예의를 갖춰요? 도와주기로 했으니까, 끝까지 도와줬을 뿐이에요.”이청성은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게다가 채원진은 우리 공공의 적이잖아요. 유진우 씨뿐만 아니라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해요. 전체적으로 보면 백성을 위해 나쁜 놈을 제거 한 거죠.”“공주마마의 대의가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유진우가 웃으며 말했다.“이 얘기는 그만하죠. 비록 채원진이 죽었다고 하
반면 채원진은 피를 토하며 그 자리에서 십여 미터나 날아가 끊임없이 피를 토했다. 팔 전체가 파열되었고 용담적염창도 튕겨 나갔으며 온몸이 너덜너덜해진 채 바닥에 누워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도련님, 괜찮으십니까?”홍복홍은 재빨리 달려가 떨고 있는 유진우를 부축했다.“괜찮아요.”유진우는 몸에 기혈이 들끓고 팔이 저리고 검도 제대로 잡지 못할 것 같았다.비록 채원진이 중상을 입기는 했지만 방금 전력으로 내뿜은 일격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힘이었고 결국 유진우도 피를 토하고 말았다.채원진의 몸에 있는 멸신독이 퍼지지 않았다면 오늘 그를 제압하지 못했을 것이다.“왜? 이럴 수 없어. 절대 이럴 수는 없어...”땅에 엎드려 맥 빠진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는 채원진의 두 손은 긴 손가락 자국을 남긴 채 땅바닥에 푹 꺼져 있었다.안 그래도 흉측하던 얼굴이 더욱 흉측해 보였다.“남길 유언이라도 있나?”유진우는 창궁검을 손에 들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 채원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한 세대의 효웅이었던 채원진은 마치 죽음을 앞둔 늙은 개처럼 낭패와 처참함 그리고 빨리 죽기 위해 발악하는 듯한 모습도 보이는 것 같았다.“유진우! 이 비열한 새끼야! 네가 이런 모함을 꾸미지 않았다면 내가 패할 가능성은 절대 없었고 이 지경까지 되지도 않았을 거야. 인정 못 해. 죽어도 인정 못 해!”채원진은 미친 사람처럼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그의 상대는 용국의 지존인 서경 왕 유만수처럼 천하를 뒤흔든 거물이었는데, 젖비린내 나는 아이들 몇 명에게 패했다는 사실을 채원진은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비열?”유진우는 콧방귀를 뀌고 말을 이었다.“이런 단어가 네 입에서 나오니까 정말 어이없구나. 사람을 시켜서 내 아버지를 암살하고 이간질로 삼촌을 유혹하여 반역을 도모해 서경을 혼란에 빠뜨리고. 네가 했던 일 중에 어느 하나 비열하지 않은 일이 없어. 죽을 때가 되니 이제 와서 도리를 따지는 거야? 쪽팔리지도 않아? 그리고 네가 인정하든 못하든 난
“채원진, 나라와 백성을 해친 네 죄가 극악무도하니 인제 그만 포기하고 꼼짝 말거라. 반항한다면 사살할 것이다.”이청성은 손에 황권을 상징하는 금색 영패를 쥔 채 차가우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이청성이 이번에 유진우를 따라 서경에 온 이유는 바로 호룡각에 남아있는 잔당을 대처하기 위해서였고 여러 가지 경우를 대비해 많은 준비를 해두었다.병력을 이동하라는 칙령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이성민이 직접 내린 거였고 그 덕분에 20만 명의 백호군을 움직여 이번 작전에 성공할 수 있었다.“왜? 왜 이런 일이 생긴 거지?”이청성을 본 채원진은 절망하는 얼굴로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고 그의 입과 코에서는 검붉은 피가 더욱 많이 흘러내렸다.“채원진, 넌 이제 끝났어. 판을 뒤집을 가능성은 절대 없으니 그만 포기해. 오늘이 지나면 호룡각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어둠 속에 숨어 살던 추악한 놈들은 자기가 했던 행동에 책임지고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유진우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아니야! 난 아직 패한 거 아니야! 절대 그럴 수 없어!”채원진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내가 이 자리까지 어떻게 올라왔는데? 이제 겨우 천하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는데 너희 같은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들 때문에 무너질 거 같아?”오랜 세월을 참고 견뎌 호룡각의 각주가 된 채원진은 이제 곧 막강한 권세를 누릴 줄 알았는데, 겨우 며칠도 안 돼 큰 타격을 입고 궁지까지 내몰리고 말았다.채원진은 단념할 수 없었다. 이렇게 어린 녀석들을 감당하지 못해 실패하고 죽는다는 게 달통 되지 않았다.“채원진, 아직도 모르겠어?”조무진은 담담하게 말했다.“용맥이 잘려서 사라질 때부터 호룡각 말살은 시작된 거야. 그때 너희들은 이미 대세와 기운을 잃었어. 만약 너희들이 어둠 속에 숨어서 연명한다면 몇 년 더 살 수는 있겠지만 그런 탐욕은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러니까 서경왕부를 건드릴 생각은 하지 말았어야지. 그 결정을 내리는 순간부터 넌 이미
“무슨 헛소리야! 호룡각의 사람이 아니면, 서경왕부의 사람이라도 된다는 거야?”채원진은 눈이 시뻘게져 소리쳤다.“맞아. 내 사람들이야.”유진우는 솔직하게 대답했다.“네가 부대를 이끌고 우리를 매복시키려 할 때 내 병마들은 그 허점을 틈타 이미 너의 기지를 점령했어. 그러니까 이제 이곳은 내 소유야.”“유장혁! 그런 헛소리를 내가 믿을 거 같아?”채원진은 험악한 얼굴로 소리쳤다.“아무리 내가 많은 정예병들을 데리고 나갔다고 하지만, 기지 내에 적어도 3만 명의 병마가 있었고 각종 방어 조치까지 더해져 10만 명 이상의 병력이 없다면 감히 공격도 못해. 서경의 흑용군은 모두 내 감시하에 있었는데 만약 10만 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했다면 내가 몰랐을 리가 없잖아.”“누가 그래? 내가 흑용군을 호출했다고?”유진우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네가 생각하는 걸 나라고 생각 못 할 것 같아? 너의 잔당들을 토벌하기 위해 이번에 특별히 지원군들을 불렀지.”어젯밤, 유천우한테 최대한 빠른 속도로 서신을 전하게 한 이유가 바로 구원병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구원병이 제때 도착해 유진우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될 수 있었다.“지원병? 무슨 지원병?”채원진은 왠지 불안한 마음에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서경과 가장 가까운 부대는 서남 지역에 있는 백호군이고, 백호군의 사령관은 전쟁의 신 조무진이야. 그런데 공교롭게도 조무진은 나와 아주 친한 사이라 도움을 좀 받았지.”유진우의 담담한 대답에 채원진은 못 믿겠다는 듯 미친 듯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백호군? 조무진? 그럴 리가 없어. 헛소리 하지 마!”“못 믿겠으면 뒤돌아봐.”유진우는 설명 대신 채원진의 뒤를 보며 턱을 치켜들었다.뭔가를 느낀 듯한 채원진이 뒤를 돌아보니 성벽의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은색 갑옷을 입은 준수한 외모의 한 젊은 남자가 정예 장병들과 함께 당당하게 걸어 나왔다. 젊은 남자는 다름 아닌 전쟁의 신 조무진이었다.“채원진, 어때? 이제 현실이 좀 받아들여져
“거의 거의 다 왔어. 곧 도착이야.”채원진은 정혈을 끌어 연소시키며 겨우 도망쳤다. 도중에 끊임없이 피를 토했지만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었다.한바탕 전력 질주 끝에 드디어 채원진의 눈에는 기지 앞의 높은 성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 성벽만 넘으면 그는 안전할 수 있었다.채원진은 기지 안에 많은 영단 묘약이 있으니, 그의 독을 치료할 약이 기필코 있을 거로 생각하며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성문을 열어라! 어서 빨리 성문을 열어!”성벽 지하까지 돌진한 채원진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고 비틀거리며 제대로 서지도 못했다. 얼굴은 짙은 보라색으로 변해있었고 입과 코에서는 여전히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슝 슝 슝.채원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성벽 위에서 갑자기 팔뚝 굵기의 쇠뇌가 몇 대 발사되었는데 10만여 근의 힘을 숨기고 있는 쇠뇌의 위력은 실로 어마어마했다.놀란 채원진은 재빨리 몸을 피했다.팡 팡 팡.몇 대의 쇠뇌는 채원진의 눈앞에 떨어지며 엄청난 위력과 함께 뒤쪽 끝을 조금 남긴 채 반이 넘게 땅바닥 깊이 박혀 들어가며 굉음을 냈다.“야! 너희들 미쳤어? 나 호룡각의 객주야! 눈 똑바로 뜨고 잘 봐!”채원진이 성벽을 향해 소리를 질렀지만, 성벽 위에 있던 병사들은 오히려 듣는 척도 하지 않고 무기를 들어 채원진에게 겨누었다.각종 중화력 무기도 가동되었고 수많은 포구와 총구가 동시에 성벽 아래에 있는 채원진을 겨누었다.누군가의 명령이 내려지기만 하면 채원진은 그 자리에서 산산조각이 날 수도 있었다.“눈은 멋으로 붙이고 다니는 거야? 나도 못 알아봐? 당장 성문을 열어! 안 그러면 전부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화가 치밀어 오른 채원진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되려 집 문 앞에서 막힐 줄이야.‘이 녀석들, 도대체 무슨 수작인 거야?’채원진이 어리둥절해하고 있는데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채원진, 너한테 남은 건 죽음뿐이야.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면 고통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