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저편은 잠시 동안 침묵하고 있었고, 이진은 이 침묵에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그리고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바로 전화를 끊었다.이기태가 이 지경인데도 그녀랑 이런 게임을 한다는 것이 우스웠다.그리고 이쪽 편에서 한참 멍하고 있었던 이기태는 전화가 끊겨버린 것을 알았다.아까 이진의 태도를 생각하면 정말 뺨 한대 맞은 기분이다.“뭐야!”마음속의 분함을 참지 못하고 이기태는 크게 소리쳤다. 이때 마침 이영이가 돌아왔다.“잘 진행되지 않은 것 같은데요.”이영은 팔짱을 끼고 말했다. 그녀의 표정은 분노인지 조롱인지 알 수 없었다.이 말을 듣고 이기태는 이영을 한번 보고 화내며 침대에 앉아 입을 다물었다.두 사람의 침묵은 이렇게 이어졌다.그리고 이기태의 기분이 나아진 다음 이영이가 말을 꺼냈다.“뭐라고 해도 자식인데, 이건 부정할 수 없는 거예요.”“무슨 뜻이야.”이기태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피곤함이 보였다.“제 뜻은 전화로 말이 통하지 않으면 직접 가서 얘기해도 된다는 말이에요. 그렇다고 우리를 쫓기라도 하겠나요.”이영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분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이기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묵인하는 태도이다.두 사람은 GN 그룹의 아는 사람에게 연락하였다.헛걸음하지 않게 이진이 회사에 있을 때 알려달라고 하였다.결국 이틀 뒤 아침 이기태는 그자의 전화를 받았다.“대표님 출근하셨습니다.”이 말을 듣고 이기태는 번쩍 정신을 차리고 이영과 함께 회사로 향했다.문을 나서기 전 이영은 불룩한 가방을 메고 나갔다.GN 그룹 대표 사무실.이진은 오늘 그냥 형식적으로 출근한 척하였다. 아무래도 오래동안 얼굴을 보이지 않았으니 또 날뛰는 자들이 있을 가봐 온 것이다.이렇게 지난주 보고를 보고 있었는데 1시간도 안 지나 프런트에서 소식이 왔다.“누가 왔다고?”이진이 프런트의 소녀를 보고 눈썹을 치켜세우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이 소녀가 습관적으로 이 대표와 이 지배인이라고 그들을 불렀다.비록 요구한
사람이 그 어떤 곤경에 빠지게 되면 무슨 짓이던 할 수 있었다.비록 이진이 보기에 이기태는 매사마다 그 추태의 극지를 보였지만 지금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이영의 손에 놓인 유물들을 보면서 이진은 심장이 찌른 듯한 고통을 느꼈다.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 그녀의 기억은 흐리멍덩하지만 어릴 때 어머니가 그 장신구를 꺼내고 그녀가 혼인 시 줄 것이라고 말한 것이 기억났다.만약 이기태와 이영이가 그 장신구를 꺼내지 않았더라면 이진은 아마 그들의 얘기를 들었을 것이다.그러나 장신구와 그 몇 마디 말이 이진의 심기를 건드린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할 말 다 했나요? 볼 일도 다 봤고?”말하며 이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기태와 이영을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할 말 다 했으면 나가주세요.”“이진!”이진의 말이 이기태의 분노를 돋우어 줬다.오래된 스트레스와 쌓인 분노에 이기태는 앞에 다가가 이진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왜요? 화났어요? 나이도 많은 분이 유치하기는 하네요.”이진은 눈을 깜빡거렸다.원래 담담했던 분위기도 이진의 기세에 눌려 긴장해졌다.“너 잊지 마! 뭐라 해도 난 네 아버지고 넌 내 딸리야!”이진의 기세에 이기태도 겁을 먹고 뒤로 한발 물러섰다. 그러나 입은 계속 놀리고 있었다.이런 도덕적인 납치도 이진의 귀에는 아주 우습게 들렸다. “이보세요. 혈연관계로 모두 것을 해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이진의 물음에 이기태는 입을 우물거리며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만약 정말 그렇다면 이영은 왜 다르죠?”말하며 테이블을 뒤에서 이기태 앞으로 걸어 나왔다.담담한 눈길로 이영을 보고서 계속 말했다.“같은 딸인데 왜 이영은 아버지 곁에서 클 수 있지만 나는 안 되죠?”이진은 큰 소리로 말하지 않았지만 한 글자 한 글자마다 힘을 주어 말했다.“그런 말은 꿈에서나 하세요.”이기태의 말문이 막힌 모습을 보고 이진의 마음도 사실 너무 편한 것은 아니다.뭐라 해도 자기 아버지인데 누가 아버지 사랑을 받고
임만만이 탕비실에 가서 커피를 타오자 백윤정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백윤정은 이진이 자기를 협박할 거라곤 생각하지도 못했다.백윤정은 고개를 숙여 손에 든 액세서리를 보더니 마음 같아선 당장 그것을 깨뜨리고 싶었다.그러나 그녀는 그럴 배짱이 없었다.이진이 GN 그룹의 대표이기에 그녀가 마음만 먹는다면 백윤정은 물론 이기태도 충분히 이곳에서 쫓아낼 수 있다.백윤정은 어쩔 수 없이 이를 악물고는 협상을 하기로 했다.백윤정은 얼른 손을 뻗어 자신의 허벅지를 세게 꼬집더니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이진아, 나는…… 정말 우리 사이가 이렇게 나빠질 줄은 몰랐어.”갑자기 느닷없이 눈물을 흘리자 이진은커녕 이기태조차도 멈칫했다.모두 백윤정이 우는 척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백윤정이 두 방울의 눈물을 짜내자 이진을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쳐다보았다.‘사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뻔뻔할 수 있지?’그러자 한쪽에서 지켜보던 이기태마저 바닥에 주저앉으며 울분을 토했다.이진은 가능한 한 그들을 무시하며 커피를 천천히 마셨다.그러나 두 사람은 이진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뻔뻔했다.5분이나 지났는데 그들은 전혀 그만둘 생각이 없어 보였고 심지어 더 큰 소리로 소란을 피웠다.이진은 커피를 다 마셨는데도 그들이 계속 시끄럽게 굴자 이를 악물고는 책상을 세게 내리쳤다.“좀 조용히 하시죠!”이기태와 백윤정은 깜짝 놀라더니 입을 다물었다. 뒤이어 그들은 목적을 달성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서로 마주 보며 피식 웃었다.이때 사무실 안은 매우 조용했는데 이진은 곧 임만만을 보며 말했다.“GN 그룹이 매입한 가게 목록을 가져와.”임만만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2분도 안 되어 문건 하나를 들고 사무실로 돌아왔다.“대표님, 모두 이 안에 있어요.”이진은 서류를 건네받고는 천천히 살펴보았다.이기태와 백윤정은 마음이 근질근질했지만 티를 내지 않은 채 그저 서있기만 했다.이진은 한번 훑어본 후 임만만에게 말했다.“이 두 항목을 이기태 씨에게 넘기도록 해. 차질이
이기태와 백윤정은 GN 그룹을 떠난 후 친척 집으로 돌아갔다.그들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이진이 준 계약서를 꺼내 보았다.빠르게 훑어보니 계약서에 적힌 이름은 이기태가 맞지만 또 하나의 큰 문제가 있었다.“이 두 가게는 모두 교외에 있는 가게 아니야? 전에 자금 회전에 썼던 가게들이잖아.”백윤정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기태를 보았다. ‘그 계집애가 우리에게 고작 이 딴 걸 주다니.’이기태는 다시 한번 훑어보더니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백윤정이 말했듯이 이 두 가게는 위치가 좋지 않아 거의 돈을 벌지 못하는 가게였다.‘가게를 내놓아도 쓸 사람이 없을 건데 이걸로 돈을 어떻게 벌지?’“이 나쁜 계집애!”백윤정은 화가 난 마음에 욕설을 퍼부었다. 그녀는 두 손 모두 주먹을 쥐었는데 목에는 핏줄이 튀어나왔다.“그러게 뭔가 이상하다 했어. 그 계집애가 우리에게 좋은 걸 줄리가 없지!”백윤정은 방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욕설을 퍼부었다.“정말 이씨네 착한 딸이네. 이젠 친아빠마저 가지고 노는 거야?”이기태는 의자에 앉아 책상 위에 놓인 계약서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이기태는 이진의 행동에 화가 나는 것보다 허탈함과 후회가 가득했다.‘처음부터 이진과 싸우지 않았다면 일이 이 지경으로 되진 않았을 텐데.’그가 조금이라도 빨리 알아차렸다면 이런 꼴이 되진 않았을 거다.“됐어, 이미 끝난 일이니 그냥 주는 대로 받자고. 괜히 불평을 제기했다간 이 두 가게마저 빼앗겨 버릴 지도 몰라.”욕을 하고 있던 백윤정은 이기태의 말을 듣자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이라고 생각했다.“당신 뭐라고? 방금 뭐라고 했어?”“우린 더 이상 이진과 싸울 능력이 없어. 계속 싸우려고 덤비면 더 비참해질 수밖에 없을 거야.”이기태는 이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이곳을 떠나려고 했다.비록 좋은 가게는 아니지만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시간을 들여 제대로 꾸려 나간다면 그래도 돈을 어느 정도 벌 수는 있을 거다.그러나 이기태가 방을 나서기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한 후 문이 열리자 이진은 이영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이영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이진은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오늘 차라리 AMC에 있을걸…….’프런트에 도착하자 아니나 다를까 이영이 팔짱을 낀 채 직원과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내가 왜 못 들어가는 데? 난 이씨 가문의 아가씨야. 너 눈이 멀기라도 한 거야?”그 직원은 이영의 말을 듣자 얼굴이 빨개지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영은 그 직원이 대답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는 계속 직원에게 화풀이를 하려고 했다.그러나 그녀는 말을 하기 전에 얼핏 사무실에서 내려온 이진을 보게 되었다.“이영. 넌 그럼 집에서 아가씨 노릇이나 할 것이지 왜 여기까지 와서 소란을 피우는 건데?”이진은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편안한 모습으로 말했다.이때 이진의 편안한 모습과 이영의 조급한 모습은 엄청나게 대비되었다.“내가 왜 여기까지 찾아왔겠어? GN 그룹은 이씨 가문의 것이야. 근데 이씨 가문도 아닌 네가 무슨 자격으로 이곳에 있는 거야?”“내가 GN 그룹을 인수했을 때 너도 현장에 있었잖아? 왜 이제 와서 난리인데?”이진은 콧방귀를 뀌며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네가 이씨라고 해서 회사도 네 것인 줄 아나 봐? 이 회사는 내가 인수했으니까 너랑은 이젠 상관없는 곳이야.”“어차피 너도 이씨잖아. 그러니까 회사도 여전히 우리 회사야.”이영의 말을 듣자 이진의 뒤에 서 있던 임만만조차도 참지 못하고 웃기 시작했다.한편 이진은 동정심이 섞인 눈빛으로 이영을 바라보며 말했다.“이영아, 미안. 난 너랑은 한 식구 아니야.”이영이 계속 따지려고 하자 이진은 마지막 인내심으로 말했다.“내가 경고하는데 계속 떠들어댄다면 방금 줬던 두 가게도 모두 회수할 거야.”욕설을 퍼부으려던 이영은 가게를 회수한다는 말을 듣자 바로 입을 다물었다.그녀가 가만있는 틈을 타 이진은 입구의 경호원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이 경호원들은 모두 이진이 새로 고용한 사람들이다.이진은 자
“대표님, 이걸…….”한쪽에 앉아 컴퓨터를 조종하던 경호원이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는데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렀다.이진이 분명히 이영을 들이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는데 이영이 대놓고 옆문으로 들어오자 경호원은 무서워 죽을 지경이었다.이진은 팔짱을 낀 채 CCTV로 잘난 체하며 들어오는 이영을 보고 있었다.사실 이영 덕분에 회사 내부에 자기 편이 아닌 사람을 찾아낼 수 있어 이진은 내심 고맙기도 했다.“만만아.”임만만은 이진의 곁에 서있었는데 이진이 자기를 부르자 얼른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유 과장의 서류를 정리해서 오늘 인사부에게 알리도록 해. 내일부터 유 과장은 출근하러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네.”임만만은 재빨리 대답하고는 몸을 돌려 인사부로 갔다.옆에 있던 경호원은 너무 놀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한편 이영은 유 과장을 따라 로비에 들어섰는데 유 과장이 갑자기 인사부로 호출을 받게 되었다.갑작스러운 호출에 유 과장은 당황스러웠지만 이영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유 과장이 떠난 후 이영은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를 타고 대표 사무실로 가려고 했다.이때 마침 이진이 로비 옆에 있던 보안실에서 걸어 나왔다.“또 볼일 있어?”이영은 이진이 왜 보안실에서 나온 건지, 왜 갑자기 태도가 달라진 건지 알 수 없어 어리둥절했다.그러나 이게 기회인 것은 확실하기에 이영은 얼른 입을 열었다.“물론 있지! 방금 그 얘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이진 너…….”이영이 한참 화를 내며 말하려 하자 이진이 입을 열었다.“할 말이 있다면 사무실에 가서 얘기해. 더 이상 여기서 소란 피우지 말고.”이진은 말을 마친 후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로 향했다.이영은 이진의 말을 듣자 내심 기뻐했다.‘역시 이렇게 나오면 이진이 타협할 줄 알았어.’이영은 이진을 따라 엘리베이터에 오른 후 대표 사무실로 들어갔다.이영은 이진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소파 위에 털썩 앉아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다.“이진아, 그래도…….”이영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이진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려오자 이영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이때 임만만이 경호원 두 명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왔다.이 두 경호원은 바로 방금 이영을 쫓아냈던 그 두 사람이다.“이 아가씨를 내보내.”이진은 말을 하며 책상을 돌아 의자에 편히 앉았다.그리고 두 경호원은 임만만의 눈빛을 보고는 바로 행동을 개시했다.그들은 이영이 아무리 발버둥 치고 반항해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이때 엘리베이터에서 로비에 이르기까지 이영의 고함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데스크에 도착하자 이영은 얼굴을 붉히며 입을 열었다.“이거 놔! 나 혼자 걸을 거야!”두 경호원은 그녀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문을 나서고는 서로 마주 본 뒤 이영을 밖으로 던졌다.GN 빌딩은 도심 번화가에 있어서 출퇴근 시간이 아니어도 사람이 엄청 많았다.이영이 갑자기 GN 빌딩 안에서 내던져지자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쳐다보았다.그 사람들은 이영을 곁눈질하고는 낮은 소리로 의논하기 시작했다.평생 이런 일을 당해 본 적이 없는 이영은 땅에서 일어나 이를 악물었다.지금 그녀는 너무 창피해 몸에서 전해온 통증은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그녀는 빠르게 차로 달려가 엑셀을 밟고 집으로 돌아갔다.백윤정은 모든 희망을 이영에게 걸었는데 이영이 집으로 들어선 후의 표정을 보더니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두 사람은 서로 껴안은 채 계속 입을 놀리며 이진을 욕했다.그녀들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젠 정말 방법이 없었다.이영은 기분이 안 좋아 일찍 자신의 객실로 돌아갔다.그러나 저녁 8시쯤 되었을 때 이영은 베란다에 앉아 와인을 마시다가 갑자기 볼이 가려워지는 것을 느꼈다.이영은 그저 밤공기 중에 먼지가 흩날리거나 알코올 알레르기라도 생긴 줄 알았다.그러나 두 번 긁자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가려워졌다.그녀 손에 든 술잔은 그대로 엎어졌고 곧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이영은 두 손으로 얼굴을 긁었는데 전혀 멈출 수 없었다. 심지어 얼굴에는
이진은 제대로 멈춰 서지 못해 갑자기 들어온 윤이건과 정면으로 부딪쳤다.“어떻게 오셨어요?”이진은 눈살을 찌푸렸는데 손에 든 약병 안의 가루가 조금 밖으로 새고 말았다.“데리러 왔어.”윤이건이 자연스럽게 말하자 이진은 오히려 어색해 입을 움직였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윤이건은 방금 그 가루에 인해 자기도 모르게 가볍게 기침을 했다. 고개를 숙이고 보니 그저 약병이라 별로 신경 쓰진 않았다.“무슨 약이야?”“좋은 물건은 아니에요.”이진은 가볍게 입을 열고는 자세히 설명하진 않았는데 딱히 알리고 싶진 않았다.이진은 윤이건을 스쳐지나 비상구로 가서 약병을 큰 쓰레기통에 버렸다.그리고 사무실로 되돌아가 물건을 간단히 정리한 후 윤이건과 함께 별장으로 돌아갔다.윤이건은 이진이 경력 있는 의사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저 이상한 가루는 분명 이진이 혼자서 만들어 낸 거겠지.’윤이건은 조금 궁금하긴 했지만 결국 물어보진 않았다.이튿날, 윤이건은 협력했던 회사에서 축제를 열기로 해 어쩔 수 없이 참석해야 했다.소문이라는 것은 참으로 빨리 돌기도 했다.저녁에 별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운전하고 있던 이 비서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대표님, 이영 씨에 관한 소문들을 아시나요?”“넌 또 어디에서 그런 가십거리들을 알아낸 거야?”뒷좌석에 앉아 있던 윤이건은 눈을 지그시 떴는데 담담한 말투는 마치 엄청 피곤해 보였다.윤이건의 말을 듣자 이 비서는 얼굴이 갑자기 붉어지더니 가볍게 기침을 했다.“대표님, 이 일은 제가 일부러 알아본 것이 아니라 어쩌다가 듣게 된 거예요.”하지만 윤이건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윤이건은 이씨 가문을 통틀어 오직 자신의 별장에 있는 이진한테만 관심이 있었다.나머지 사람들이 어떤 일이 생긴다고 해도 그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차를 몰던 이 비서는 윤이건이 여전히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이를 악물고는 큰 소식을 전했다.“대표님, 이번 일은 이진 씨와 연관 있는 일이에요.” 이 비서가 말을 마치자 아니
결혼식 날짜는 8월 초로 정해졌으며, 국내와 해외에서 각각 한 차례씩 진행될 예정이다.웨딩드레스 가게에서 청혼한 이건의 이야기는 곧 널리 퍼지게 되었다. 오늘날까지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인터넷에 널리 퍼지고 있었다.이건이 바라던 대로, 전 세계의 사람들은 이진이 윤이건의 아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두 사람의 결혼식은 더욱 화려하고 시끌벅적했다.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두 사람은 친한 지인들 외에 회사 직원들만 초대했다.윤이건의 가족들은 보기 드물게 모두 현장에 참석했지만, 이진 쪽은 텅 비어 있었다.한편 이씨 가문은 여전히 다툼이 지속되고 있었다.“이것 봐! 내가 애초에 뭐라 그랬어? 이진 그년이 양심 없는 년이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이제 알겠지? 그년은 결혼식처럼 중요한 날조차 아버지인 당신을 부르지 않았어. 이기태, 정말 당신이 뭐라도 되는 줄 알아?”백윤정은 노발대발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녀에게는 예전의 자애로운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앞으로 달려들어 이기태를 때리려고 들었다.이기태는 화가 난 마음에 백윤정을 밀어냈다.“좀 저리 꺼져!”‘그래봤자 이진이는 내 친 딸인데, 지금 일이 이 지경이 된 건 모두 백윤정 때문이잖아. 백윤정이 중간에서 이간질을 하지 않았다면, 내가 이진이를 그렇게 대했겠어? 백윤정이 자꾸 끼어들어 모순을 만들어내지 않았다면, 이진도 날 이렇게까지 미워하진 않았을 거야.’물론 이기태의 눈에는 그저 이익밖에 없다. 그가 후회하는 건 오직 이진을 통해 이건의 도움을 받지 못한 것뿐이다.지금의 이기태는 백윤정과 사이가 완전히 틀어지고 말았다. 두 사람은 매일 싸우기 바빴다.이기태는 결혼식이 끝날 때가 되자 뻔뻔스럽게 이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이진아.”“이기태 씨, 전에 제가 전화를 끊을 때 했던 말을 잊으신 거예요?”이기태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진의 차가운 목소리가 전화 너머 들려왔다. 그는 등골이 서늘해지더니 그제야 기억난 듯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이진, 너!”
보통 사람이라면 분명 시언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졌을 것이다.하지만 이진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이진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그의 말을 듣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한마디 내뱉었다.“제가 사랑하는 남자는 윤이건 씨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어요.”시언은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그리고 힘겹게 한 마디 물었다.“제가 몇 년 더 빨리 나타났다면.”“그래도 결과는 똑같아요.”이진은 그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말을 마친 뒤, 이진은 더 이상 시언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이건을 향해 걸어갔다.애초에 이진은 시우가 이 연회를 통해 정희와의 결혼 소식을 발표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이진은 마침내 시우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몸과 마음이 피곤했던 이진은 이건의 가슴에 기대어 말했다.“이건 씨, 저 해외여행 가고 싶어요.”“해외여행?”이건은 원래 뭔가를 계획하고 있었기에, 얼마 후 이진을 데리고 출국할 생각이었다.이진이 먼저 제기한 이상, 이건도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는 활짝 웃으며 이진을 껴안고 말했다.“그래, 자기가 가고 싶은 곳이라면 어디든 좋아.”이를 위해 이건은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고 모든 일들 미뤘다. 하지만 이건의 원래 계획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남았다.YS그룹에는 이건이 직접 처리해야 될 큰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이건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이진을 데리고 해외로 여행을 간 것이다.이 소식을 전해 들은 YS그룹의 고위층들은 미치기 직전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건에게 전화를 걸어 돌아와 달라고 부탁을 했다. 어쨌든 프로젝트는 끝내고 가야지.하지만 이건의 대답은 그저 한마디뿐이었다. 결혼식을 마친 후.결혼식을 마친 후, 이건은 분명 이진과의 아이를 돌보는 데 집중할 것이다.그러기에 앞으로 일에 전념하는 시간은 점점 적어질 게 뻔했다.옆에 있던 이진은 한쪽에 놓인 핸드폰이 끊임없이 울리는 것을 보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내가 너무 충동적인 건 아니겠지? 이건 씨는 날
이진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내가 남학생을 꼬드겼다는 건 무슨 말이야? 아예 기억조차 나지 않는 데다가, 시우 씨의 동생인 건 아예 모르던 일이야. 도대체 이 일이 나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야?’이진은 화를 내며 이건을 노려보았다.“제가 언제 그런 행동을 했다고 그래요. 전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기억이 안 나거든요.”“정말이야?”이건은 일부러 장난친 거다. 사실 메시지를 보고 불쾌한 기분이 조금 들었는데, 이진의 반응은 그를 매우 기쁘게 했다.이건은 입술을 오므리며 말했다.“그렇다면 자기 마음속에는 나밖에 없다는 거지?”‘그럼 더 이상 시간 낭비하지 않아도 되겠네. 시우 이놈은 겁도 없네, 감히 내 아내더러 자기 사촌 동생을 위로해달라는 거야?’이건은 차갑게 웃으며 이진의 핸드폰을 가지고 시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시우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진 씨, 제가 보낸 메시지를 보셨나요? 저도 어쩔 수 없어서 연락을 드린 거예요. 이 녀석이 술에 취해 밤새 이진 씨의 이름을 부르더니,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또.”“또 뭐 했는데?”이건은 그의 말을 끊은 뒤 질투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네 사촌 동생이 대단한 사랑꾼인가 봐.”‘윤이건?’전화 너머의 시우는 하마터면 심장이 터질 뻔했다.“이건아, 이진 씨 핸드폰이 왜 네 손에 있는 거야? 난.”“나랑 이진이가 부부인 걸 잊은 거야?”이건은 더 이상 시간 낭비하기 싫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내 아내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는,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그럼 내 아내를 좋아하는 사람마다 직접 가서 위로해 줘야 되는 거야? 내가 동의할지 말지는 둘째 치고, 이진이 정말 간다고 해도 네 동생이 괜찮아질 리는 없어.”마침 뭔가 생각난 이건은 잠시 망설이더니 협박하듯이 말했다.“술에서 깨면 네 동생한테 전해. 어제 같은 일이 또다시 일어나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이건은 다른 남자들이 자신의 아내에게 들러붙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이
‘윤이건? 윤이건이 어떻게?’시언은 도저히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그와 시우는 사촌 형제이기에, 이건과 시우가 친한 친구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소문에 의하면 이건은 이미 결혼했고 사랑하는 아내가 있다.‘설마.’시언은 갑자기 깊은 생각에 잠겼다.이건과 이진이 어떤 사이든, 이진이 이건을 얼마나 의지하든, 그는 자신이 이진을 좋아한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시언은 몸 옆에 늘어진 손을 꽉 주먹 쥐었다. 이때 정신을 차린 그는 앞으로 나아가, 이건의 앞길을 막고 환한 미소를 선보였다.“윤 대표님, 전 민시언입니다. 시우 형의 사촌 동생이에요. 시우 형한테서 얘기 많이 들었는데, 이렇게 만나 뵙게 되니 너무 영광입니다. 혹시 이진 씨랑은.”“이건 씨, 나 돌아가고 싶어요.”시언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이진은 취기를 못 이겨 남자의 가슴에 얼굴을 가볍게 문질렀다.이건의 차가운 표정은 순식간에 눈 녹듯이 녹아내렸다.이건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몸을 숙여 이진을 안았다. 그리고 시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이진을 조수석에 태웠다. 세심하게 안전벨트를 맨 후 무심코 뒤쪽을 스쳐보자, 시언은 방금 자세를 유지한 채 제 자리에 서 있었다.“이건 씨, 얼른 돌아가요.”이진은 아직도 이건에게 바짝 달라붙어 있었다.이건은 시선을 돌려 이진의 희고 정교한 얼굴을 보자 계획이 하나 떠올랐다.‘그동안 결혼식 하나 제대로 치르지 못했는데, 반드시 전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결혼식을 선물해 줄게.’이건이 직접 이진을 데려간 것을 목격한 시언은, 정신을 잃은 듯이 축 처진 채로 시우의 아파트를 찾았다. “민시언?”시우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시언을 보자 조금 놀란 듯했다.“네가 이곳엔 왜 온 거야?”시언은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형, 술 한잔하실 래요?”두 사람은 오랜만에 만났기에 술 한잔하는 것쯤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하지만 시우는 정희와 함께 임신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최근 술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다.시언의 상
하룻밤 푹 자고 난 뒤, 다음날 아침 이진은 호텔에서 출발해 학교로 갔다.서현도 마찬가지로 이번 만남을 무척 중시하였다. 그녀는 이진을 만나기 위해 일부러 수업을 오후로 미뤘다.카페에 앉은 서현은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더니 웃으며 말했다.“이 대표님, 제가 오만해 보이긴 해도, 평범한 작가들과 비슷한 꿈을 꾸고 있거든요. 제가 쓴 시나리오를 대중들에게 알려, 널리 선보이는 게 제 꿈이에요. 하지만 제가 글을 쓸 때에는 저만의 요구가 있기에, 미리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요.”서현의 요구는 별로 지나치진 않았다. 그저 세훈이 제기했던 요구처럼 원칙적인 문제에 관한 것들이다. 이 방면의 문제는 서현이 말하지 않아도 이진이 끼어들지 않을 것이다.이진이 바로 동의하자 서현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이진의 시원시원한 성격은 전에 그녀를 찾아온 사람들과 사뭇 달랐다.서현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어제 너무 지나친 행동을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야. 안 그러면 이진 씨처럼 훌륭하신 분을 놓치게 되었을 지도 몰라.’ 세부사항을 토론한 후, 이진은 세훈과 서현을 데리고 원작자를 찾아가 판권을 따냈다.그 후 배우의 캐스팅으로부터 촬영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엄청나게 심혈을 기울였다. 배우들의 캐릭터 소화는 물론, 배우들 사이의 호흡은 날이 갈수록 좋아졌다.몇 달 후, 영화는 이건의 도움으로 성공적으로 상영되었다.의 원작 팬이 워낙 많았고, 호기심으로 본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그러나 영화관을 나설 때 모두 영화 속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정도로 영화에 푹 빠져 있었다.개봉 첫날, 전국의 영화관 티켓은 모두 매진되었다.심지어 대부분 영화관에서는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영화를 예정했던 시간보다 더 오랫동안 상영하였다.개봉한지 한 달이 되었을 때, 는 수십 년간 1위를 차지했던 영화를 뛰어넘기도 했다.이 영화의 촬영 제작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도 엄청난 인지도를 가지게 되었다.그들은 마치 다크호스처럼 갑자기 대중들의 시선 속에 나
이진은 말을 마친 후 정희를 데리고 성큼성큼 떠났다.“이진아, 넌 저분이 동의할 거라고 확신하는 거야?”한참을 걸은 뒤 정희가 호기심에 물었다.이진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서현이 딱 봐도 설득하기 어려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재능이 있는 작가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데, 굳이 모욕을 당하면서 저 여자를 선택할 필요는 없잖아.’정희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내가 연예계에 아는 사람이 꽤나 있는데, 그냥 이서현 말고 다른 작가 소개해 줄까?”“아직은 필요 없어.”이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아마 날 거절하지 않을 거야.”이진이 거절한 이상 정희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정희가 포기한 채 택시를 잡으려던 찰나, 앞에서 엄청난 비주얼을 가진 키 큰 남학생이 두 사람에게 달려왔다.“예쁜 누나들, 어디 가시려는 거예요?”두 사람을 향해 한 말이지만, 남학생은 줄곧 이진을 훔쳐보고 있었다.이 모습을 지켜보던 정희는 몰래 웃음을 터뜨렸다.“왜요? 학생, 지금 대시하는 거예요?”생각이 들통난 남학생은 부인하기는커녕 겸연쩍은 듯 손을 들어 뒤통수를 긁었다. 그리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누나들은 저희 학교 학생이 아닌 것 같네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연락처라도 주시면 안 될까요?”“두 사람 연락처를 모두 받아 가시려는 거예요? 생각보다 욕심이 많으시네요.”정희는 눈썹을 찡긋거리며 장난을 쳤다.그러자 남학생은 볼이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용기를 내어 이진에게 핸드폰을 건넸다.“누나, 전화번호 주시면 안 될까요? 절대로 귀찮게 굴진 않을 게요!”‘지금 충분히 귀찮은 것 같은데.’이진은 눈썹을 찌푸리더니 깔끔하게 거절했다.“죄송하지만, 안될 것 같네요.”난생처음 대시를 시도해 본 남학생은, 자신이 이렇게 무자비하게 거절당할 줄은 몰랐다. 남학생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실망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옆에 있던 정희는 차마 이대로 지나치기 힘들어, 가방에서 이진의 명함을 한 장 꺼내 남학생의 손에 쥐여 주었다.“연락처는
이진은 자신의 가장 진실된 생각을 전한 것은 물론, 판권을 반드시 따내려는 결심으로 원작자를 두 번이나 찾아갔다. 결국 원작자는 그녀에게 한 번 만날 기회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진은 이번 기회를 제대로 이용하기 위해, 전에 조사한 자료들을 들고 사람을 찾으러 대학으로 향했다.그녀 스스로 배역을 연구하는 것은 턱없이 부족했기에, 이진은 전문적인 작가를 찾아야 했다. 현재 대학교 교수인 이서현이 가장 좋은 선택지였다.출발하기 전에 이진은 특별히 학교의 포털 사이트를 통해, 서현의 수업시간표를 찾았다. 그리고 교장에게 부탁하여 수업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이진의 신분을 알게 된 교장은, 단번에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두 손 두 발 들어 환영했다.한편 이 일을 알게 된 정희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애초에 이진이 연예계에 투자할 의향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평소에 경제 뉴스밖에 안 보던 이진이 정말 영화를 찍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진심이었던 거야? 왜 갑자기 영화를 찍으려는 거지?’정희는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이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이진아, 네가 의 판권을 따내 영화로 제작한다고 들었는데, 정말 사실이야?”“내가 언제 거짓말한 적 있어?”비행기 탑승 시간이 10분밖에 남지 않았기에, 이진은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끊었다.“나중에 다시 얘기해, 지금.”“너 지금 공항이야?”눈치 빠른 정희는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침 한가하던 정희는 이진을 따라 서현을 찾으러 갈 생각이었다.‘우리 이진이가 갑자기 영화를 찍다니, 어떻게 된 일인지 내 눈으로 확인해 봐야겠어.’정희는 결정을 내린 듯이 말했다.“이진아, 좀만 기다려 금방 갈게!”정희는 줄곧 생각나는 대로 움직이는 성격이라, 이진은 핸드폰을 거두고 방금 정희의 말을 신경 쓰지 않았다.비행기는 한 시간도 안 되어 착륙했다.이진은 택시를 타고 바로 학교로 향했다. 그리고 사전에 알아보았던 수업시간표를 따라 강의실을 찾았다. 분명 수업이 시작되기까지 시간
이진은 별장을 나선 뒤 홀로 국장의 집으로 향했다.공교롭게도 여태껏 이진을 만나보고 싶어 하던 가정의도 국장의 집에 있었다.하지만 연이은 실패로 가정의도 이진의 성격을 알 수 있었다.이진은 엄청 겸손한 데다가 이건의 아내다. 그녀가 어떤 신분이든 간에, 외부에 자신의 실력을 알릴 생각이 없다면, 가정의도 더 이상 묻진 않을 것이다.두 사람은 자리에 앉은 후, 국장의 건강에 대해 자세히 토론하기 시작했다.옆에 있던 국장은 조용히 듣고 있다가, 때때로 몇 마디 맞장구를 치자 분위기는 매우 화기애애했다.이진은 경계심을 내려놓고 많은 의견을 제기하였다. 국장은 모든 의견들을 자세히 기록하였다.모든 이야기를 마친 후, 국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눈물을 글썽였다.“모두 이진 씨 덕분이에요. 이진 씨가 아니었다면 이 늙은이가 고질병 때문에 죽을 때까지 고생했을 거예요. 어쩌면 어느 날 갑자기.”“국장님, 곧 괜찮아질 테니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이진은 국장의 말을 얼른 끊은 뒤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게다가 할아버지의 친구분이시니, 제가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이에요. 전엔 제가 생각이 짧은 데다가 일 때문에 바쁘다 보니, 줄곧 시간을 내지 못했는데 너무 탓하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어요.”“탓하다니, 그럴 리가 있겠는가.”‘나한테 이렇게 큰 도움을 줬는데, 고마워하기도 모자랄 판에 탓할 리가 있겠어?’마을의 개발 프로젝트는 정상적으로 진행되었다.이진도 마찬가지로 세훈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이 대표님, 제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워낙 조건이 후해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더라고요.”진심 어린 이야기를 마친 후, 세훈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어갔다.“하지만 저한테 특별한 요구가 하나 있는데, 이 대표님께서 허락해 주셨으면 좋겠어요.”“어떤 요구죠?”이진은 호기심에 눈썹을 찡긋거렸다.세훈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이 대표님께서 절 좋게 봐주시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영화가 방영되었을 때 괜한 추측들이 떠돌아다니는 것을 방
오 감독은 전략을 바꾸기로 결정 내렸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진에게 사과하기로 한 것이다.이진은 전에 말했던 대로 마음에 들었던 감독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작품마저 몇 개 없는 신인 감독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오 감독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나처럼 유명한 감독을 마다하고 신인 감독과 합작한다는 거야? 내가 그동안 받은 상이 얼마인데! 이진 그년은 분명 사람 보는 눈이 삐뚤어진 거야! 신인 감독 주제에 얼마나 잘 찍을지 똑똑히 지켜봐야겠어.’오 감독은 불만이 가득했으나 자신의 앞날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이진에게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모두 이진이 예상했던 대로다. 전화를 받은 순간, 이진은 만만에게 눈빛을 보내 모 플랫폼에서 생방송을 시작했다.이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던 오 감독은, 애써 웃으며 이진의 용서를 구하는 척했다.“이진 씨, 전엔 제가 너무 무례한 행동을 보였던 것 같네요. 의 촬영을 양세훈한테 맡길 생각인 거죠? 제가 양 감독을 소개해 줄 테니, 실시간 검색어의 글들을 내려 주시면.”“글을 내려달라고요?”이진은 오 감독이 뜻밖의 비장 카드라도 쥐고 있는 줄 알았다. 그가 이 정도로 파렴치한 인간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지금 말 같지 않은 조건으로 나와 협상하려는 거야?’이진은 마음속으로 차갑게 비웃고는 비꼬듯이 입을 열었다.“오 감독님, 본인이 지금 어떤 처지인지 잊으신 거예요? 지금 저한테 조건을 제기할 것이 아니라 사과를 하셔야죠. 제가 양세훈 감독님을 선택한 건 사실이지만, 제 방식대로 촬영에 참여하도록 설득시킬 것이니, 당신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어요.” “당신, 좋은 말로 할 때 그냥 넘어가지 그래?”오 감독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모욕을 당했기에, 이대로 참고 있을 수 없었다. 결국 위선적인 모습을 집어치우더니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내가 굽신거려주니까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네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모두 윤이건 덕분이라는걸, 내가 모를 줄 알아? 아마 윤 대표한테 들러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