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지방 출장을 가셨기에 연락할 수가 없었다. 나는 먼저 정아에게 연락했다.“정아야, 너 어디야?”난 침대에 누워 혼미한 정신으로 물었다.“나 병원에 있어. 아야! 너무 아파! 노성민 너, 이 나쁜 놈아, 나 안 낳을 거야!”정아는 전화는 받았지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녀의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지금 병원에서 출산 준비를 하는 것일까?노성민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옆에서 말했다.“알았어. 알았어. 모두 내 잘못이야.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아프면 날 때려. 자, 여기 내 얼굴!”아직 출산예정일이 아니어서 정아가 아이를 놓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아프던 몸이 갑자기 들떠 정신이 들었다.“정아야, 너 어느 병원이야?”“아... 나... 지영아 너 오지 마. 지금 여기 너무 많은 사람이 날 둘러싸고 있어. 민정이하고 세희한테도 말하지 않았어. 아파 죽을 것 같아 나...”정아는 신음하다가도 진통이 멈추면 빠르게 말했다.“너 요즘 너무 바쁘잖아. 네가 걱정할까 봐 다 낳고 알리려고 했어. 너 큰 선물이나 준비해 둬!”나는 머리가 너무 아파 병원에 가려고 해도 운전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정아는 노씨 집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에워싸고 돌봐주고 있을 것이다.“그래, 나 지금 열 나서 약 먹고 괜찮아지면 바로 갈게!”나는 대답했다.“그래, 그래... 아파! 노성민 왜 네가 낳지 않는 거야!”정아는 또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나는 전화를 끊고 세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출장 중이었다. 민정이에게 전화해도 장유성의 부모님과 식사하고 있다고 했다.다들 중요한 일이라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이우범에게 전화했다.잠시 연결음이 울리더니 전화를 받았다. 나는 힘없이 말했다.“우범 씨, 지금 시간 있어요?”“미안하지만 우범 씨 지금 샤워 중이에요.”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는 깜짝 놀라 바로 화면의 이름을 확인했다. 이우범이 틀림없는데 왜
나는 원래 배인호를 초대해 같이 식사할 생각이 아니었다. 하지만 배인호가 이미 젓가락을 든 이상 나도 말을 다시 삼킬 수밖에 없었다.배인호는 오늘 나를 도우러 온 건 사실이었고 마음을 담아 풍성한 요리까지 시켜주었다.나는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밥을 먹는 데에만 집중했고 최대한 배인호의 존재를 무시하려 했다. 배인호는 식사할 때 말을 별로 안 하는 편이기에 우리는 아주 조용한 분위기에서 밥을 먹었다.절반 정도 먹었는데 배인호의 핸드폰이 “딩동딩동” 울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누군가 그에게 여러 통의 문자를 한 듯싶었다.핸드폰을 확인한 그의 얼굴에서 짜증이 묻어났다. 아마도 서란이거나 기예은일 것이라고 나는 추측했다.“인호 씨, 바쁘면 일 보러 가요.”내가 이 기회를 틈타서 말했다.“바쁜 거 아니야. 먹자.”배인호가 새우를 하나 까서 내 접시에 올려주며 담담하게 말했다.나는 접시에 놓인 새하얀 새우를 보고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지금 나와 그의 사이는 이렇게 핑크빛이 돌 사이가 아니었다.내가 그 새우를 배인호에게 다시 집어 주자 배인호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내가 까준 게 싫어?”나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부정했다.“아니요. 그냥 새우가 별로 안 땡겨서요.”그는 내가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는지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새우를 먹어버렸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배인호의 핸드폰이 다시 울려왔다. 이번에는 전화를 걸어 온 것이었다. 나는 자기도 모르게 그쪽으로 시선이 향했고 “트러블메이커”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트러블메이커, 나는 갑자기 이 호칭이 너무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래서 서란은 절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배인호가 휴대폰을 한번 힐끔 보더니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는 시선을 거두고 조용하게 밥을 먹었다.“내가 정리할게요.”배인호가 테이블을 정리하려 하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몸이 아까보다는 많이 개운해진 걸 보니 열이 내린 듯했다.“내가 할게.”배인호는 내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남은 음
그냥 이우범과 간단하게 식사하면서 오늘 복잡했던 기분을 좀 달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우범 씨, 여기서 밥 먹어요?”한 여자가 우리의 테이블 곁으로 걸어왔다. 나보다 나이가 어려 보였는데 갸름한 얼굴이 부드러운 아우라를 더 자아내게 했다.이 목소리는 오전에 이우범을 대신해 전화를 받은 그 여자의 목소리 같았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우범을 쳐다보았다.이우범은 먼저 나의 반응을 살피더니 내가 아무런 이상이 없자 시름을 놓는 듯 보였다. 그러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네, 여자 친구랑 밥 먹고 있어요.”여자가 바로 나를 다시 스캔하더니 나를 향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허지영 씨인가 보네요. 너무 미인이시다. 그러니까 우범 씨가 그렇게 좋아하지.”“안녕하세요.”나는 예의상 인사를 건넸다.“안녕하세요. 저는 도시아라고 해요. 오늘 오전에 우범 씨 찾으러 갔다가 전화 온 거 대신 받아줬는데 지영씨 전화였더라고요. 죄송해요. 용서해 주세요.”여자의 눈빛이 가식적이지 않고 진지해 보였다.이렇게 부드럽고 진지한 태도로 사과하자 나도 더 이상 의심하기가 그래서 머리만 끄덕였다.“괜찮아요. 우범 씨가 다 설명해 줬어요. 저는 우범 씨 믿어요.”도시아가 기쁘다는 듯 답했다.“그러면 다행이네요. 오해할까 봐 걱정했어요.”말하면서 그녀는 이우범을 다시 한번 쳐다봤다.그 한 번의 눈길만으로 나는 그녀가 이우범을 향한 감정이 친구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눈빛을 잘 숨겼고 이우범을 향한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는 것처럼 보였다.도시아가 가고 나는 농담조로 물었다.“도시아 씨 우범 씨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아니에요.”이우범이 빠르게 부정했다. 내가 이 화제를 계속하는 게 싫은 듯한 눈치였다.나는 그것을 눈치챘고 머리를 끄덕이고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이번 식사는 기분 좋은 식사는 아니었다. 식사가 끝나고 나는 이우범과 인사하고는 엄마가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간병인이 있어서 내가 그렇
“닥쳐! 진짜 귀찮게 한다!”배인호가 뒤를 보며 짜증을 냈다.냥이가 어깨를 들썩이더니 말했다.“다른 사람한테는 안 그래요. 빙산 씨한테만 그러는 거지.”다시 생각해도 냥이한테 배인호의 전화번호를 준 건 잘한 일이었다. 그녀는 서란 보다 배인호의 마음을 잡을 줄 안다.나는 둘이 서로 티격태격하는 걸 뒤로 한 채 피곤한 몸을 이끌고 거실로 향했고 현관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소파에 바로 뻗어버렸다.핸드폰이 울렸다. 배인호가 걸려 온 전화였고 나는 바로 끊어버렸다.어느샌가 나는 소파에서 잠이 들었고 다시 일어났을 땐 7시가 넘어 있었다. 나는 대충 아침을 챙겨 먹고 회사로 향했다.며칠 뒤 나는 그 매장 업체와의 협력을 위해 출장을 떠난다. 그러니 요 며칠 회사 일을 잘 처리하고 엄마 쪽 문제도 잘 해결해야 한다.차를 운전해 배인호의 집 앞을 지나는데 냥이가 하품하며 그 집에서 나왔다. 그녀는 까만색 청재킷에 청 나팔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기지개를 켜자 잘록한 허리가 드러났다.‘벌써 집에 밤을 보내는 건가? 대단하네.’나는 마음속의 일부 감정을 무시한 채 운전을 계속했다.“허지영 씨, 시시티브이 영상 나왔습니다. 언제 병원으로 한번 와주시죠.”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병원의 연락을 받았다.“점심에 갈게요.”내가 대답했다.점심이 되자 나는 밥도 먹지 않은 채 병원으로 향했다. 곧이어 나는 엄마가 습격당한 날의 시시티브이를 볼 수 있었다.체구가 통통한 남자가 캡과 마스크를 쓴 채 신속하게 엄마의 병실로 들어갔고 2분도 채 되지 않아 다시 나왔다.나는 그가 범인이라고 거의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상에서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대략적인 체형만 보였다.나는 이 영상을 가지고 바로 신고했다.아빠가 돌아오신 후 이 일을 전해 듣고 매우 분노하셨다.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서는 경찰의 조사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아빠, 저 이사 갈래요.”내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왜, 배인호가 귀찮게 하는 거야?”아빠가 바로 물어왔다.나는 머리를 절레절레
순간 나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배인호를 밀쳤다.“할 말 다 했으니까 이제 돌아가요.”“언제 다 했다고 그래?”배인호의 눈은 이우범은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지만, 입은 나의 말에 대답하고 있었다.이우범이 거실 쪽으로 걸어 들어오면서 현관문을 닫았다.크지 않은 거실에 배인호와 이우범이 모이자 좁은 느낌이 들었다.“인호야, 왜 자꾸 내 여자 친구 못살게 구는 거야?”이우범이 차갑게 물었다. 말투에서 화가 느껴졌다.“나는 전처랑 빨리 회복하려고 노력 중일 뿐이야.”배인호의 대답은 너무나 파렴치했다.“하지만 지금은 내 여자 친구야. 넌 이미 지나간 과거고. 남자라면 쿨하게 놓아줄 줄도 알아야지. 이렇게 뒤에서 자꾸 못살게 굴지 말고.”이우범이 얼굴을 굳히고 배인호를 쳐다봤다.“이 말 너한테 질리게 했어. 지영 씨랑 이혼한다 했을 때도 이미 귀띔했었고.”배인호가 콧방귀를 끼더니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맞아. 그때 귀띔한 것도 나한테서 확답을 얻고 지영이한테 구애하려고 한 거 아니야? 근데, 내가 죽지 않는 한 과거형은 없어. 오히려 너, 나랑 그렇게 오래 좋은 친구로 있었는데 결국엔 나를 이렇게 대하네.”어찌 되었든 간에 이 일에서는 이우범이 논리가 딸렸다.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세상에 여자들이 다 죽었다 해도 자신의 제일 좋은 친구의 전처랑 사귀면 안 되는 거다.이우범의 표정이 갑자기 변했다. 복잡한 눈빛에서 죄책감이 묻어났다. 이우범은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침묵 속에서 그와 눈을 마주쳤다. 사실 난 이미 많은 일들을 내려놓은 터라 만약 이우범이 부담을 못 이겨 헤어지자고 해도 나는 받아들일 수 있었다.두 번의 삶을 살면서 나는 적지 않은 좌절을 겪으면서 이 모든 걸 감내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이 일은 내가 잘못한 거 맞아. 빚진 걸로 할게. 뒤에 기회 되면 꼭 보상할게.”이우범이 이렇게 설명했다.배인호의 표정이 날카롭게 변했다.“빚질 필요 없고 보상할 필요도 없어. 그냥 지영이랑 헤어지면 돼.”“그건 안 돼!
이미 늦은 시간이라 집에 손님이 왔다 해도 돌아갈 필요는 없었다.게다가 이우범은 늘 혼자 밖에서 지내다 주말에만 집에 돌아가곤 했다.나는 나한테 말하기 어려운 일이 발생했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그래요. 비 많이 오는데 운전 조심해요.”나는 펴다 만 이불을 보며 괜찮은 척 말했다.“이불도 안 깔아도 되고 오히려 잘됐네요.”이우범이 눈에 미안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 그가 걸어와 나를 안아주며 말했다.“미안해요. 요즘 일이 너무 많아서 그래요. 다음에 더 많이 같이 있어 줄게요.”나는 아무 말 없이 그의 품에 안겨 머리만 끄덕였다.이우범은 비를 뚫고 차를 운전해 단지를 떠났다. 나는 그를 배웅하지는 않았다. 그저 게스트룸에 펴놓았던 이불을 다시 정리해 먼지가 쌓이지 않게 다시 넣어두었다.사실 이우범이 왜 돌아갔는지는 짐작이 갔다. 아마도 이우범의 부모님이 그가 우리 집에 있음을 알고 집으로 돌아오라고 협박했을 것이다. 이우범이 우리 집에 있다는 건 아마도 배인호가 이우범 부모님에게 얘기했을 것이다.하지만 난 배인호를 탓하진 않았다. 이우범 집안의 반대가 반드시 일어날 일이라면 빨리 부딪치는 게 좋다. 빨리 시작되면 빨리 해결할 수 있으니 말이다.이튿날 아침, 몇 시간 밖에 못 잔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대구로 출장을 떠났다. 동행한 사람은 기사와 비서였다.대구에 도착하자 일단 호텔을 찾아 체크인했다.“이렇게 마주치네요?”체크인을 마쳤는데 서란이 귀신처럼 내 뒤에서 나타났다.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끔 보고는 카드키를 받아 들고 기사랑 비서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서란도 체크인을 마치고 걸어오며 물었다.“지영 언니, 인사했는데 못 들었어요?”“사장님, 엘리베이터 도착했습니다.”비서가 나한테 말했다.나는 머리를 끄덕이고는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 여전히 서란은 무시한 채 말이다.하지만 나는 서란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기에 불가피하게 이 크지 않은 공간에
나는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옆방에서 싸우고 있는 사람이 전남편과 전남편의 현 여자친구니 무슨 상황인지 궁금해서 머리를 내밀고 상황을 살폈다.배인호가 차가운 얼굴로 옆방에서 걸어 나왔다. 구경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쏘아 봤다.나는 동정의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여자는 가끔 막무가내로 나올 때가 있는데 서란이 배인호보다 많이 어리니까 배인호가 양보해야 하는 것도 맞았다.“쾅!”옆방의 문이 닫혔다.“왜 웃어?”불똥이 갑자기 나한테 튀었다. 그는 내 쪽으로 걸어와 캐묻기 시작했다. 정교하고 짙은 눈썹에 냉기가 감돌았다.나는 바로 웃음을 거두고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그냥 갑자기 기분 좋은 일이 생각나서요.”배인호가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무슨 일인데 기분 좋아? 말해 봐. 나도 기분 전환 좀 하게.”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렇게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데 무슨 생각을 해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세희는 아직 샤워 중이었고 복도는 텅 비어있었다. 나와 배인호는 계속 대치 중이었고 아무도 내 편을 들어줄 사람이 없었다.“사실 기분 좋은 일 없어요. 인호 씨가 잘못 본 거예요.”나도 더 이상 연기하지 않았다.“여자 친구 빨리 달래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커플들 싸움도 칼로 물 베기래요. 너무 따지지 마요.”“너랑 무슨 상관이야?”배인호가 갑자기 디스를 해왔다.나랑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인 건 맞았다. 하지만 나를 귀찮게 굴고 있는 것도 배인호였다.나랑 상관없는 일이면 빨리 서류나 처리해야 되겠다고 생각했고 문을 닫으려 했다.배인호가 나를 불러세웠다.“너 근데 여기는 무슨 일이야? 그것도 마침 서란 옆방이네?”“이상해할 거 없잖아요. 걱정하지 마요. 여자 친구 미행하러 온 거 아니니까. 나 서란한테 관심 없어요.”내가 차갑게 대답했다.‘서란의 남자 친구로서 지금 샤인 코스메틱과 우리 회사가 같은 매점 업체를 경쟁하는 걸 모르는 건가?’그렇다면 둘 사이에 문제가 있어 보
“인호 씨, 아까 서란 만났어요.”나는 배인호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배인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활짝 웃던 냥이도 웃음을 거두었다. 냥이는 전처인 나보다 서란을 더 꺼리는 것 같았다.“나 이번에 대구에 출장 온 거 원앤 그룹이랑 협력하려고 온 거예요. 오기 전까지 원앤그룹 사람들 태도도 좋고 다 좋았는데 지금 안 만나주려 해요. 오히려 서란과 더 즐겁게 얘기하더라고요. 당신이랑 아무런 관련 없다고 하지 마요.”내가 직설적으로 말했다.배인호는 표정이 변하지 않았지만, 냥이의 눈이 살짝 커졌다. 조금 놀란 듯 보였다. 나는 냥이의 반응을 개의치 않고 배인호의 대답을 기다렸다.“나쁜 일이면 다 내가 한 거야? 넌 도대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배인호가 화가 난 나머지 웃음을 터트렸고 나를 보는 눈빛도 더 날카로워졌다.“화낼 거 없어요. 내가 잘못 말한 거면 미안해요.”배인호의 표정으로 나는 그가 거짓말을 한 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서란은 그저 배인호로 나를 자극해서 내 부담을 키워줄 심산이었다.이렇게 말하고는 차에 오르려는데 배인호가 나를 불러세웠다.“급하게 갈 거 없어. 내가 의심되면 나랑 더 말해보면 되잖아.”냥이가 나랑 배인호를 번갈아 쳐다봤다. 마치 우리를 연구하고 고민하려는 것 같았다. 순간 냥이가 손을 뻗어 배인호를 잡았다.“왜 그렇게 무섭게 굴어요? 전에 못되게 굴었으니 의심받는 건 정상이잖아요!”배인호는 지금 짜증이 많이 나 있었고 냥이의 손을 뿌리치며 귀찮다는 듯 말했다.“너랑 무슨 상관이야! 끼어들지 마!”냥이가 멈칫하더니 난처한 기색을 드러냈다. 냥이는 시원시원한 성격이라 잘 난처해하지는 않았다. 전에 배인호와 잘 지내고 있었으니, 배인호한테 조금은 다른 존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냥이는 빠르게 표정을 정리하고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지영 언니, 언니랑 같이 디스하려고 했는데 이분 너무 사나워서 어쩔 수 없네요!”나는 냥이를 향해 웃어 보였다.“괜찮아. 고마워.”배인호가 냥이를
허지영은 이우범이 진심으로 배인호에게 말하는 것을 들어서야 마음 깊이 있던 궁금증이 드디어 풀렸다.그녀는 이것이 배인호와 이우범이 화해하는 발판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역시 배인호의 얼굴은 점점 더 편안해져 갔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던 뒤 배인호도 말했다.“그래, 우리도 영원한 친구야.” 그는 말을 끝낸 후에 허지영을 바라보았다. 허지영은 그의 행동이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인호는 이 순간이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손에 넣고 우정도 되찾은 진정한 승리자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전화를 끊은 후, 배인호는 두 팔을 벌렸고 허지영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품에 안겼다. 그들은 서로를 꽉 껴안았다. 빈이가 로아와 승현을 데리고 이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아빠한테 책 좀 읽어달라고 해줘요~”로아가 낮은 목소리로 빈이를 재촉하였다.세 사람은 잠을 오지 않아서 내려가 배인호더러 그들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려고 했다.그런데 세 사람은 내려오자마자 아빠와 엄마가 행복하게 안고 있는 것을 보자 조금은 부끄러워졌다.로아와 승현 두 아이는 너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 없었고 빈이는 어른이 다 되였기 때문에 괜찮았다.“유니콘, 유니콘!”승현는 유니콘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배인호가 유니콘의 이야기를 승현에게 들려준 후부터 승현은 노래를 들을 때도《유니콘》만 듣고 싶어 했다.두 어린이는 빈이를 양쪽에서 감쌌고 포동포동한 손으로 그의 소매를 잡으며 기대로 가득 찬 큰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로아와 승현은 나이는 어리지만 똑똑해서 아빠와 엄마가 포옹하고 있을 때는 방해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그들보다 많은 빈이는 방해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빈이가 주저하고 있을 때 로아의 간절한 눈빛에 빈이는 말했다.“내가 너희들에게 책을 읽어주면 어때?”“형은 못 해! 못 해!”승현이가 거절했다. 왜냐하면 형한테 유니콘을 불러달라 했을 때 음정이 하나도 맞지 않아서였다.로아도 그렇
허지영은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그녀가 오랫동안 사치하게 그리던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일을 겪은 후에야 이룰 수 있었다.그녀의 눈시울도 붉어졌고 마침내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요.”사람들은 열렬한 박수를 터뜨렸다. 모두 이 부부의 재결합을 기뻐했지만 아무도 인파 뒤에서 한 남자가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는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배인호가 반지를 허지영의 손가락에 끼우는 것을 보고 나서야 묵묵히 자리를 떠났다.그는 저택을 떠나 차에 올랐고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으며 차갑고 마른 얼굴을 드러냈다.이우범은 원래 해외에 있어야 했지만 참지 못하고 결국 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오늘의 입장권도 박준이 그를 위해 비밀리로 얻어 주었다.이제 허지영이 행복을 찾았음을 직접 보았으니 이우범은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다.이우범이 막 차를 몰고 떠나려고 할 때, 박준이 어느새 따라 나와 차 앞에 막아 섰다.“이우범, 왜 벌써 가려고?”다른 사람들은 이우범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박준은 그가 올때부터 알아 보았다.박준은 이우범이 아직 허지영을 놓지 못했고 분명히 그녀의 결혼식에 몰래 참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넌 왜 나왔어?”이우범은 박준을 보고 조금 놀랐다.“내가 안 나오면, 너는 이렇게 가버릴 거잖아. 배인호는 안 보면 그만이지, 나와 노성민도 안 볼 거니?”박준은 화가 내면서 말했다.박준은 이우범이 지난 몇 년 동안 항상 해외에 머무르고 있어 국내 친구들과의 연락이 매우 뜸했고 이번에 어쩌다 한 번 돌아왔는데 그들과 밥 먹고 술 한 잔 안 하고 허지영만 보러 온 거에 서운해했다.“나 공항에 가봐야 해.”이우범은 약간의 미안함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우범은 하루도 여기서 보낼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저녁에 같이 밥 먹고 가. 지금 떠나면 너랑 나 친구로 끝이야. 알겠어?”박준은 협박하듯 말했다.이우범은 어쩔 줄 몰
박정아의 말에 허지영, 오세희, 이민정은 적극 찬성했다.다른 사람과 또 식을 올린다면 쪽팔리겠지만 같은 사람과 두번 식을 올리는 건 무엇을 설명할까? 그들이야 말로 찐 사랑인 것이다.——두 달 뒤.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은 준비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결혼식의 사치와 호화로움은 무수한 감탄과 부러움을 불러일으켰다. 허지영은 천만 원 가치의 수제 웨딩드레스를 입었을때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허지영은 처음 배인호한테 시집갈 때를 떠올렸다.그때 허지영은 자기가 직접 고른 웨딩드레스를 입었고 지금 사치스로운 드레스와 비교도 안 됐다. 그때의 배인호는 결혼식은 하나의 미션 수행처럼 모든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그 후 몇 년이 지나고 그들은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허지영은 웨딩 드레스 위에 박힌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가볍게 만졌고 그 순간 그녀는 찬란한 태양빛 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박정아를 포함한 친한 친구들은 연속 감탄했다.박정아는 허지영 주위를 돌면서 기쁨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 “영아, 정말 예쁘다. 몇 년 동안 방황하더니 결국 네가 원하는 행복을 얻게 되었네.”“맞아, 나도 너의 용기에 감탄해. 다행히 배인호도 정말로 많이 변한 거 같애.”오세희도 연속 감탄했다. 이민정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개과천선했으니 앞으로도 쭉 그럴 거야. 너를 또 상처 입힐 일이 있으면 우리 몇 명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이때, 허지영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다가왔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딸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허지영은 그들이 가장 아끼는 보물같은 존재였고 그녀는 감정적인 고통을 겪은 후에야 재혼이라는 결정을 내렀다. 처음에 부모님은 반대했지만 지금 받아들이기까지 수많은 과정이 있었다.하지만 이 순간, 허지영이 행복해 보이자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아빠, 엄마.”허지영은 부모님이 오자 이상하게 코가 찡해진 듯했다. 아마도 그들의 힘든 모습을 보다가 이렇게 뿌듯해하는 모습을
허지영은 배인호와 다른 여자의 스캔들을 폭로한 댓글을 보니 마음이 철렁 거렸다. 허지영은 일어서서 배인호와 아버지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바둑을 두고 있었고 경기는 아주 치열했다. 허지영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배인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허지영도 따라서 웃었다. 허지영은 스캔들에 대해 바로 묻지 않고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 조용히 두 사람이 바둑을 두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핸드폰 화면에는 배인호와 한 여자 연예인 간의 스캔들이 적힌 댓글이 고스란히 써져 있었다. 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와 바둑 한 판을 두고 난 뒤, 눈길은 자연스럽게 허지영의 핸드폰이 자기의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을 보았고 화면이 꺼지려 하면 허지영이 화면을 다시 켜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화면에 적힌 그 말은 무슨 뜻이지?’배인호는 허지영의 휴대전화를 가져와 댓글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순간, 바둑을 계속 두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그와 허지영의 재혼을 많은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았으며 이미 준비 중인 결혼식도 성사되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이 가득하였다.‘결혼식이 엄청 화려해서 준비시간이 조금 오래 걸린 것 뿐인데 이게 무슨... 그리고 나와 한 여자 연예인이 하룻밤을 같이 보낸 스캔들이라고?’그날 밤에는 최소 일곱-여덟 명의 사람이 있었고 남자 여자 다 있었다. 주로 투자에 관한 이야기하다가 여자들이 떠나고 남은 몇 명의 남자들이 룸에서 잠을 잔 것이다. ‘언론은 이렇게 근거 없이 아무렇게나 사건의 앞뒤도 맞지 않는 헛소리를 늘어놓다니...’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좀 이따 다시 바둑을 둬도 괜찮을까요? 지금 급하게 좀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허지영의 아버지는 자초지종을 모르고 배인호의 말에 급한 일이겠거니 생각하고 동의했다. 그러고 나서 허지영의 아버지는 허지영의 어머니를 도와주러 주방으로 향했다.허지영의 아버지가 나가자마자 배인호는 바로 허지영의 손을 붙잡았다.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
거절당한 후, 배인호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마치 모든 욕망을 내뱉으려는 듯했다.허지영은 이불을 감싸안고, 배인호와 사이에 안전한 구역을 만든 다음, 다시 잠을 이루려 했다.“여보, 벌써 자정이 넘었어.”겨우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약간 쉰 듯한 배인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허지영이 방금 잠에서 깨어나려는 찰나, 어느새 안전 구역을 넘어온 손이 허지영을 강하게 끌어당겨, 뜨거운 품에 꼭 안았다.“뭐 하는 거예요? 배인호 씨, 당신...”허지영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입술이 막혔다. 겨우 의식을 회복했지만 뜨거운 키스 때문에 다시 정신이 흐릿해졌다. 허지영은 저항을 포기했다. 오늘 밤은 편하게 지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허지영은 온몸이 녹아내린 듯한 느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주변을 돌아보자 배인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샤워를 한 후, 허지영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배인호를 발견했다.그리고 노성민과 박성아는 언제 왔는지 모르게 도착해, 세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 시간에 노 씨 집에 세 아이는 허지영의 세 아이와 노는 중이어서, 거실은 매우 활기찼다.박성아가 머리를 들어 계단에서 내려오는 허지영을 보고 말했다. “아이고, 지영아, 너 드디어 내려왔네. 재결합해서 기쁜 건 알겠지만, 몸조심해야 해!”허지영은 박성아를 쏘아보며, 얼굴에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깃을 조금 더 높이 당겼다. 그렇지 않으면 어젯밤 남은 흔적이 들킬 수 있다.그들은 다 같이 식사했다. 식사 도중, 박성아가 민설아의 일을 언급했다. “그래, 민설아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매우 뛰어난 변호사를 고용했어. 이 여자 정말 죽을 쑤고 있어, 지금도 판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자신이 감옥에 안 가고 바로 무죄로 풀려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민설아의 이름을 듣고, 허지영은 본능적으로 배인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배인호는 로아와 승현, 두 아이에게 옥수수알을 까주는 데 집중하고 있어, 박성아의 말은 아예 듣
허지영은 병원으로 옮겨진 후 응급처치를 했다.허지영의 부모님은 거듭 의사에게 수술의 가능 여부 혹은 새로운 치료 방법으로 딸의 이 짧은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는지 묻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이 얻은 대답은 모두 절망적인 것이었다.병상 앞에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부모님은 마치 하룻밤 사이에 10살이나 더 늙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병상에 누워있는 딸을 보며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졌다.“영아, 우리 놀라게 하지 말아줘. 빨리 깨어나, 강하게 버텨줘..”“우리는 다 널 응원할 거야. 네가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라고 했잖아... 버텨줘. 우리 같이 여행 가자. 응?”“넌 삼촌과 이모의 유일한 희망이야, 그들을 위해서라도 버텨야 해!”“영아, 우리 딸... 흑흑흑...”온갖 소리가 허지영의 귀에 들어왔다. 허지영은 몸에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이 느껴졌고, 눈앞은 어렴풋한 빛에 휩싸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부모님의 얼굴과 친구들이 슬퍼하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몹시 의외인 것은 이우범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가장자리에 서있었지만, 키가 커서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이우범이 왜 여기에 있지?’허지영은 입을 벌려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고 온몸이 아프기만 하였다.“영아, 너 어떻게 우리를 버리고 떠날 수가 있어... 나랑 네 아빠는 어쩌고...” 어머니는 허지영이 깨어났지만 기뻐하기는커녕 더욱 슬프게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기 딸에게서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부모님은 허지영이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전혀 모른다.“아빠, 엄마, 제가 불효자예요... 미안해요... 다음 생이 있다면 제가 그때 효도할게요...”허지영은 허약하게 몇 마디 하려고 노력했지만, 부모님을 더 슬프게 할 뿐이였다.극심한 슬픔에 부모님은 뒤돌아 병실을 나왔다. 자기 딸에게 이토록 처참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박정아는 바로 앞장서서 허지영의 손을 꼭 잡았다.“영아, 너도 날 꼭 기억해야 해.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나를 찾아줘.
허지영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는 타고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가문에 서로 사랑하는 부모님, 좋은 성적,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랑 결혼까지 했다. 그러나 서른도 안 되는 나이에 가정이 풍비박산나고 삶의 끝에 이르렀다.허지영은 부모님이 자신의 눈앞에서 눈물범벅이 된 모습을 지켜보고는 마음이 아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를 속일 수가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배인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배인호는 내가 유방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면 보러 올까? 마음이 약해질까?’‘왜 지금 이때까지도 나는 그 잔인한 남자를 그리워하는 걸까?’허지영은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재 상태에서는 수술할 필요도 없고 방사선 치료와 안전하고 보수적인 치료 외에는 손쓸 방법이 없었다.허지영은 어떻게든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가고 나서 가장 먼저 배인호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늘 그렇듯 또다시 거절당했다.허지영은 다시 배인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유방암 걸렸는데 말기래요. 당신이랑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이번에는 배인호가 답장을 했다.“병 걸렸으면 제대로 치료받아. 나는 의사가 아니야. 널 치료 해줄 수 없어.”이토록 차갑고 매정한 답장을 보면서 허지영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배인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왜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배인호는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걸까?“영아, 더 이상 배인호 생각은 안 하면 안될까?” 박정아와 친구들이 토끼처럼 눈이 붉어져서 허지영의 집으로 찾아왔다.“우리랑 여행 가자. 우리랑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풍경도 맘껏 즐기면서 몇몇 쓰레기 같은 사람들은 깔끔하게 잊는 거야. 더는 그 쓰레기들에게 상처받지마. 응? ”허지영의 병을 알게 된 이후로 허지영의 부모를 제외하고 가장 슬퍼했던 건 박정아와 3명의 친구들이였다. 거의 매일 슬픔에 잠겨 허지영의 만날 때마다 울음을 참지 못했다.친구들은 더이상 허지영이 고통받는 걸 지켜보기 싫어했다. 그들은 허지영의 좋은 친
배인호는 식탁 위의 아침밥을 흘깃 보고선 한마디 대답도 없이 넥타이를 묶으며 거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허지영은 뒤따라가 한 번 더 묻고 싶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배인호가 차에 올라타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모습뿐이었다.허지영은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배인호는 크나큰 빙산이고 허지영은 작디작은 불씨였다. 허지영은 자신의 불씨로 빙산을 녹이려고 하였지만, 결국 그 작은 불씨는 빙산에 의해 꺼져버렸다.“허지영, 우리 이혼하자.”배인호는 어느날 드디어 허지영에게 처음으로 이혼을 얘기했다.허지영은 배인호가 간만에 집에 돌아왔다는 기쁨에 사로잡혀있었다. 허지영은 자신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옷을 입고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지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혼합의서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배씨 그룹 지분의 3%면 충분해?”“이혼이요?”허지영은 마치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배인호가 갑자기 이혼을 꺼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둘은 결혼 이후 함께 지낸 시간은 적었지만, 허지영은 결코 배인호의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고 절대적인 자유를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모자라는가?허지영은 그 수많은 스캔들을 꿋꿋이 참아오면서 작은 꼼수를 부리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려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배인호는 이혼을 원하는 걸까.“맞아. 난 널 전혀 사랑하지 않아. 난 지금 지키고 싶은 여자가 생겼어.”배인호는 이 말을 할 때 차갑기 그지없었다. 마치 배인호와 5년 동안이나 결혼 생활을 해온 허지영이 생명이 없는 장난감일 뿐이며 그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며 아픔도 슬픔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허지영의 목소리를 떨면서 말했다.“누굴 사랑하게 된 건데요? 누구예요?”하지만 배인호가 허지영에게 이런 일들을 얘기해줄 리가 없었다. 그는 차갑게 소매를 털며 말했다.“이혼 합의서 잘 살펴보고 괜찮은 것 같으면 사인해. 별로라면 나한테 연락해. 다시 얘기하자.”허지영이 말도 꺼내기 전에 배인호는
“인호 씨.”허지영은 먼저 배인호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것은 상대방의 서늘하기에 그지없는 눈빛뿐이었다.그 순간 허지영은 그녀가 새신부가 아니라 철천지원수인 것만 같았다.허지영은 그 눈빛에 놀라 흠칫했다. 아마 배인호의 어머님이 때마침 나타나지 않았다면 계속 계단에 서서 멍만 때렸을 것이다.“지영아, 내려와서 아침밥 먹어야지.”배인호의 어머님이 인사를 건넸다.그제야 허지영은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식당으로 걸어갔다.배인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허지영의 존재를 무시했고, 밤새 잠을 자지 않은 듯 턱에는 푸릇푸릇한 수염이 자랐고 눈은 약간 충혈되어 매우 피곤하고 짜증이 난 것같은 모습이었다.하지만 허지영은 감히 더 물어볼 수 없었고 물어보아도 대답도 안 해줄 것을 알고 있었다.그날부터 허지영은 배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었고 철저한 장식품이 되었다. 배인호는 심지어 결혼전 보다도 더 차갑게 굴었으며 종종 집에 오지 않았다.허지영은 신혼집 인테리어에 모든 심혈을 기울였고 청담동이라는 곳에 있는 별장이 바로 그녀와 배인호의 신혼집이었다. 기초 공사는 거의 끝마쳤지만 가구와 같은 인테리어도 천천히 골라야 했다.허지영은 6개월이라는 시간을 들여 청담동 별장을 꿈의 신혼집 모습으로 장식해 놓았다. 그녀는 배인호가 돌아오리라 생각했지만, 이 아름다운 집은 결국 그녀의 외로운 결혼의 무덤이 되어버렸다.“결혼한 지 얼마 됐다고 벌써 5명이나 스캔들이 생겨? 영아, 너 진짜 잘 참는다!”박정아의 전화 10통 중 9통은 배인호의 뒷담화였다.“그거 다 보여주기식일 거야.”허지영은 사실 배인호가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마치 자기의 가련한 자존감을 지키려는 듯 배인호의 편을 들어주었다.인정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아서 허지영은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하루 또 하루, 한 해 또 한 해가 지나면서 허지영은 혼자 청담동에서 망부석이 된 것만 같았다. 마치 웃음거리인 것처럼 다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점점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