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 롤스로이스가 달리고 있었다.차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천도준은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이수용은 그에게 생생한 가르침을 주었다.그는 성격도 능력도 빠지지 않았지만, 일 처리에는 지나치게 고려하는 게 많아 조금 소극적이었다.마치 주준용을 상대할 때도 처음부터 이수용이 상대했다면 분명 태산같이 압도적인 기세로 주준용을 철저히 눌러 죽였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거대한 천씨 가문보다 주준용은 보잘것없는 버러지에 불과했다.그리고 그는 주준용에게 거듭 기회를 주었었다.“도련님, 배우셨습니까?”귓가에 이수용의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정신을 차린 천도준은 이수용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이제 알겠습니다.”이수용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도련님의 자질, 성격, 능력은 가문의 그 엘리트들에 비해 조금도 밀리지 않습니다. 다만 어렸을 때의 경험과 환경이 도련님을 속박하고 있지요. 저는 그저 도련님에게 이 속박에서 벗어나면 대부분의 곤경은 간단해진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그렇게 말하며 그는 옆에 있는 존을 가리켰다.“예를 들면 존도, 용병왕으로 있을 당시만 해도 절대로 용병과 도리를 따지지 않았고 이익에 따라 행동하지도 않았죠.”“그들은 그런 게 어울리지 않습니다.”존의 표정은 평온했지만, 두 눈에는 오만함이 드러났다.그건 용병왕 특유의 그만의 오만함이었다.마치 초원 위의 맹수의 왕 같은 눈빛이었다.천도준은 조용히 과거를 되새겼다. 이전까지 그는 일을 행함에 있어 확실히 계략도 있고 단호함도 있었지만, 이수용과 존 같은 패기는 없었다.천씨 가문을 등에 지고 있는 그에게는 그런 패기를 지닐 자격이 있었다.“후~”길게 한숨을 내쉰 천도준이 미소를 지었다.“어르신, 폐를 끼쳤군요.”이수용은 흡족한 미소를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와 동시에.주씨 가문의 빈소는 처참한 꼴이 되어 있었다.장엄하고 비통한 분위기는 진작에 사라지고 남은 게 없었다.구준용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있었고 온몸은 이미
게다가 주준용이 집에 빈소를 설치하고 사람을 보내 정태 건설 회사 아래서 현수막을 걸어 천도준에게 상복을 입으라고 한 일은 이미 구경꾼들이 찍어 올린 영상으로 인터넷에 잔뜩 퍼진 지 오래였다.모른 척하려고 해도 어려웠다.“지분 60%에 목숨 하나라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네.”옆에 있던 청년이 콧대의 안경을 위로 밀며 담담하게 주건희를 쳐다봤다.“난 담배 냄새가 싫어.”주건희는 잠시 멈칫하다 웃으며 말했다.“내 사무실에는 아주 좋은 통풍 시스템이 있어 담배 냄새가 남지는 않을 거야….”청년은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그럼 나, 담배 피우는 걸 싫어해.”주건희는 어이없어하며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껐다.그런 뒤 다시 말을 이었다.“천도준이 준용건설의 지분 60%를 받아들인 데다 지금은 정태까지 손에 쥐고 있으니 이 지역 제일의 건설 회사 오너가 됐네.”그렇게 말한 주건희는 조금 탄식했다.그는 반평생을 일궈내며 차근차근 자신의 건설 회사를 지역 제일로 만들었는데 천도준은?고작 천씨 가문을 등에 업고 푸시를 받자, 그의 반평생 공적을 이겨버렸다.청년은 그런 주건희의 마음을 알겠다는 듯 괴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러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잘 태어나고 줄을 잘 서는 것만 못 하다니까.”미소를 지은 주건희는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다시 정태 건설.천도준을 걱정하고 있던 직원들은 천도준이 돌아온 것을 보자 모두 한시름을 놓았다.언제부터인지 천도준은 대표에서 모든 직원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있었다.천도준은 곧장 사무실로 돌아왔고 따라 들어온 마영석이 평소와는 다른 말투로 말했다.“대표님, 아까 일로 좀 귀찮아질 듯합니다.”“무슨 말이야?”천도준이 물었다.마영석은 휴대폰을 천도준에게 보여주었다.“회사 아래에 현수막이 걸렸던 게 인터넷에 퍼지면서 일이 좀 커졌습니다.휴대폰을 건네받은 천도준은 지역 뉴스와 각종 언론 매체에 조금 전 회사 아래에 현수막이 걸린 사진 또는 동영상을 게시한 것을 발견했다.게다가 기사 제목은 하
정태 건설 빌딩 아래서 벌어졌던 일은 구경꾼들이 인터넷에 찍어 올리며 큰 이슈가 되었다.만약 고작 그정도 뿐이라면 확실히 정태 건설에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하지만 주준용의 별장에서 있었던 일은 아무도 촬영하지 못했다.주준용의 체면을 좋아하는 성격상 절대로 부하들이 이 일을 발설하게 둘 리가 없었다.일단 내일 주준용과 준용 건설의 양도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나면 인터넷의 여론은 설명하지 않아도 스스로 해명이 되었다.게다가 천도준은 지분을 이전했다는 뉴스가 발표되는 순간 정태 건설의 명성은 다시 한번 드높아질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준용 건설은 현지 건설 업계에서 손에 꼽히는 존재였다!그뿐만 아니라 준용 건설은 상장 기업이기도 했다.정태의 손에는 서천구 재개발 프로젝트도 있으니 이렇게 큰 체구의 프로젝트를 추진한다는 것에 준용 건설의 주식을 더 높이기엔 충분했다.그러니 천도준에게 있어서는 일거양득의 상황이었다.당연히 걱정될 것 없었다.다만 천도준은 그 디테일을 마영석에게 전부 설명하지 않았고 마영석을 달랜 뒤 그를 내보냈다.정태 건설 앞에 천도준에게 상복을 입으라고 하는 현수막이 걸렸다는 뉴스가 인터넷에 점점 더 퍼질수록 여론의 방향은 천도준과 정태 건설에 점점 더 불리하게 돌아갔다.반나절 만에 정태 건설 직원들은 인터넷에서 이번 사건에 관한 각종 뉴스를 보고는 하루 종일 불안해했다.천문동 별장 단지.휴대폰으로 현지 뉴스를 보던 이난희는 안색이 안 좋아지더니 미간을 찌푸렸다.휴대폰 화면 속에는 천도준을 타깃으로 한 현수막 사진이었다.천도준의 어머니로서, 이런 광경을 보자 이난희는 가슴이 찢기는 것만 같았다.도준이가 대체 누구를 건드린 걸까??어쩌다 이런 강요를 받게 된 걸까?“여사님, 왜 그러세요?”박유리가 과일 접시를 들고 다가오다 이난희의 기분이 안 좋아 보여 물었다.“도준이에게 문제가 생겼어.”이난희는 한숨을 쉬며 휴대폰을 박유리에게 건네주었다.휴대폰을 들어 확인한 박유리의 작은 얼굴도 어두워졌다.“이 사람들, 천
이수용은 가볍게 수염을 쓸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은 그때와 다르지요. 부인, 도련님께서는 지금 점차 성장해 나가고 있고 나중에는 커다란 나무가 되어 파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보셨습니까?”이난희가 잠시 멈칫했다.두 눈에 빛이 반짝이더니 이내 조금 어두워졌다.거실 안은 바늘 소리도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이수용은 그윽한 눈빛으로 이난희를 보며 조용히 기다렸다.한참이 뒤 거실에 이난희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지난 사람의 인과는 지난 사람이 갚죠. 당시 그 사람이 떠났을 때 그들이 의지할 것 없는 저희를 괴롭혔을 때도 전 참아냈어요.”이난희의 목소리에는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피로와 무력감이 묻어 있었다.“아직은 말하지 않지는 않을래요. 그동안 전 도준이에게 많은 폐를 끼쳤고 도준이는 이제 겨우 좀 홀가분해진 참이에요.”“하아… 부인께서 결정하셨으면 되었습니다.”이수용은 조금 무력한 미소를 지었다.“다만 전 부인의 인내에 멋모르고 기어오르는 사람이 있을까 걱정이 되는 군요. 이제 도련님께서 성장하셨고 어르신도 계시니 그 사람들도 더는 소란을 피우진 못할 겁니다.”……그렇게 고요한 하루가 지났다.이튿날 이른 아침. 햇살이 흩뿌려졌다.새로운 뉴스가 폭탄이 되어 온 도시를 터트렸다.“오늘, 현지의 준용 건설은 정태 건설과 양도 계약을 맺으며 준용 건설의 대표 주준용은 준용 건설의 지분 60%를 정태 건설의 천도준에게 양도한다고 발표했습니다!”그 소식이 전해지자 온 도시가 소란해졌다.소식을 들은 모두가 깜짝 놀랐다.어제만 해도 천도준의 회사 아래에 현수막이 걸렸다는 뉴스가 터져나가고 호사가들은 가장 이른 시일 안에 현수막을 건 사람이 준용 건설이라는 것을 알아냈다.심지어 당시에 정태 건설의 천도준이 망할 거라고 했던 사람도 있었다.그런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물과 기름 같던 관계에서 하룻밤 사이에 지분을 양도하게 될 줄이야?그것도 60%의 지분이었다. 그것은 주준용이 회사를 파는 것이나 다름없었다!의아함과
천도준은 평온하게 발신 표시를 쳐다보고 있었다.통화 거부 버튼을 누른 뒤 그는 다시 오남미의 전화를 차단했다.막 오남미의 모든 연락처를 다 차단하려고 하는 데 아니나 다를까 오남미의 카톡 메시지가 울렸다.“천도준, 마지막으로 얼굴 한 번 봐. 안 그럼 죽어버릴 거야!”그 말에는 짙은 원한과 명확한 협박이 가득했다.그에 천도준은 더욱더 역겨움이 일었다.당시에 그는 오남미에게 다정하기 그지 없었고 ‘호구’라는 말로 이루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다.하지만 결국 어떻게 됐던가?하마터면 호구 잡혀서 자신의 어머니의 목숨마저 잃을 뻔했다.“천도준, 날 죽게 내버려두려는 거야?”“그렇게 다들 날 죽이고 싶은 거야?”“천도준, 아무리 그래도 옛정이 있는데. 내가 아무리 잘못을 했다고 해도 한때는 네 여자였어.”“내가 잘못했어. 내가 사과할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만나주면 안 돼?”카톡으로 오남미의 메시지가 끊임없이 울렸다.화면과 문자 너머로도 오남미의 감정 변화가 생생하게 느껴질 정도였다.“잘못을 인정해? 하…”천도준은 코웃음을 치며 답장을 보냈다.“내가 마술 하나 보여줄게.”“뭐라고???”의아해하는 오남미에게 천도준은 느긋하게 ‘3’을 보냈다.이내 ‘2’, 그러다 마지막으로 ‘1’을 보낸 뒤, 답장을 하나 더 보냈다.“내가 사라질 거야.”답장을 보낸 그는 곧바로 오남미를 차단해 버렸다.다른 한 편.오씨 가문.쿵쿵쿵….천도준이 보낸 마지막 메시지를 본 오남미는 넋이 나가버렸다.문밖에서 장수지가 다급하고 거칠게 문을 두드렸다.“오남미, 당장 이 문 열어. 안 그럼, 안 그럼 네 아버지에게 문 부수라고 할 거야!”장수지가 큰소리로 소리를 질렀다.하지만 오남미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천도준의 메시지를 본 그녀는 입력 칸에 타자한 것을 보내려고 했지만 보낼 수가 없었다.천도준이 자신을 차단했다는 것을 그녀는 깨달았다.눈시울이 점점 붉어지더니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오남미의 가녀린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하더니 두 눈으로 천
“오남미, 죽이기 전에 당장 나와, 얼른!”장수지는 소리 높여 포효를 하며 있는 힘껏 방문을 내려쳤다.“됐어, 애 우는 거 못 들었어?”오덕화가 옆에서 그녀를 말렸다.“울어? 뭘 잘했다고 울어?”장수지는 두 눈을 부릅뜨며 눈썹을 거꾸로 세웠다.“그렇게 좋은 천도준을 잃어버려놓고 뭘 잘했다고 울어?”말을 마친 그녀는 등을 돌려 TV를 가리켰다.“저것 봐요, 천도준은 이제 정태 건설의 대표일 뿐만 아니라 준용 건설의 지분까지 60%나 가지고 있다고요. 우리 사위가 저렇게 훌륭한데 다 오남미 저 기집애가 철이 없어서 잃어버린 거잖아요!”TV 속에는 준용 건설이 천도준에게 지분을 양도했다는 뉴스가 재방송되고 있었다.뉴스에서 방송되는 한 글자 한 글자에 장수지는 심장에 피가 떨어지는 것만 같고 후회가 막심했다.만약 당시에 그런 일이 없었다면, 지금 천도준의 돈은 다 자신의 것이었다.반평생을 고생을 했는데 천도준만 있으면 진작에 풍족한 귀부인의 삶을 살 수 있었다.생각을 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장수지는 가슴을 내려치며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불며 난동을 피우기 시작했다.오덕화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렇다고 전부 남미 탓을 할 수는 없지. 당시에 그건 다 남준이 결혼 때문에 그랬던 거잖아?”“고집불통 같으니, 도대체 내 편 들어줄 거야, 말 거예요?”장수지는 악에 받쳐 말했다.“지금 천도준이 얼마나 부자인지 알아요? 준용 부동산은 우리 지역에서 두 번째로 큰 건설 회사에요. 우리 이 단지도 예전에 준용 부동산이 개발한 곳이라고요!”“당신….”오덕화는 화가 치밀었지만 싸워봤자 장수지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아 손을 휘휘 내젓고는 시무룩하게 소파에 주저앉았다.달칵!방문이 열렸다.오남미는 눈물범벅이 돼서는 산발이 된 머리로 걸어 나왔다. 처량하기 그지없는 꼴이었다.고개를 들어 오남미를 본 오덕화는 마음이 아파 표정이 조금 변했다.바닥에 앉아있던 장수지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오남미의 몰골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가락을 들어 오
한참이 지나 먼저 정신을 차린 오덕화는 장수지를 밀쳤다.“당신 좀 봐봐, 애가 당신 등쌀에 못 이겨서 가버렸잖아.”장수지는 안색이 돌변하더니 모르쇠로 일관했다.“나랑 무슨 상관인데요? 애가 저럴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요?”“엄마가 돼서 그 정도 사리 분별도 하지 못해?”오덕화가 씩씩대며 말했다.“왜 나한테 소리를 질러요?”장수지는 인상을 팍 썼다.“그냥 농담 좀 한 걸 가지고. 저렇게 농담을 못 받아들일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요?”오덕화는 기가 차 웃음이 다 나왔다.“애가 웃디?”“당신….”장수지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바로 그때, 누군가가 방문을 열었다.오덕화와 장수지는 기뻐하며 동시에 문 쪽을 쳐다봤다.그러다 오남준인 것을 본 두 부부는 동시에 표정이 어두워졌다.장수지는 한숨을 쉬며 소파에 앉았다.“엄마, 아빠, 무슨 일 있어?”시무룩해 있던 오남준은 들어오자마자 부모님을 보자 기뻐하며 물었다.“네 엄마가 네 누나 결국 쫓아내 버렸어.”오덕화는 씩씩대며 장수지를 흘겨봤다.장수지는 순식간에 버럭 화를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뭘 내가 쫓아내 버렸다는 거예요? 분명 제 발로 나간 거거든요?”오덕화가 막 입을 열려는데 오남준이 마른세수했다..“싸우지 마요. 저 좀 진정하게 해주세요.”오남준이 시무룩해져서는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을 본 장수지는 다급하게 오남준의 곁으로 다가갔다.“남준아, 설아랑은 얘기 어떻게 됐어?”‘설아’라는 두 글자를듣자 오남준은 몸을 부를 떨더니 눈시울을 붉혔다.그러더니 엉엉 울며 장수지를 안았다.“엄마… 설아가 사라졌어. 설아가, 설아가 이 도시를 떠났어요.”쿵!오덕화와 장수지는 마치 우레라도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무슨 일이래? 멀쩡하던 애가 왜 갑자기 떠났대?”오덕화가 다급하게 물었다.하지만 오남준은 아무 말 없이 장수지의 어깨에 기댄 채 엉엉 울었다.장수지도 다급해져 오남준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얼른 말해 봐!”“몰라, 나도 몰라.”
눈 깜짝할 사이,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모자가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에 오덕화도 털썩 소파에 주저앉았다. 머리가 다 아파졌다.…….밤이 깊어지고, 갑작스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번개가 내리치기 시작했다.갑작스러운 비에 거리의 수많은 사람들은 허둥지둥 머리를 감싸안고 달리기 시작했다.오직 한 사람만이 쏟아지는 폭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비를 맞으며 넋이 나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집을 떠나자 오남미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그녀는 마치 본체를 잃은 혼처럼 이 도시를 헤맸다. 힘들면 앉아서 쉬고 다 쉬었다 싶으면 다시 끊임없는 걸음을 이어갔다.휴대폰도 전원을 꺼버렸다.마음이 완전히 식어버렸다.부모님의 반응에 그녀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집?우습기도 하지!그런 곳이 어떻게 집일 수가 있단 말인가?눈물은 진작에 다 말랐고 두 눈도 퉁퉁 부었다.폭우가 온몸을 적셨고 젖은 머리카락은 어깨에 착 붙어 가련하기 그지없었다.정체 없이 걸음을 옮기던 오남미는 정신마저 혼란스러웠다.저도 모르는 사이 길가에 선 그녀는 이제 횡단보도를 건너려 했다.횡단보도가 초록 불인지 빨간불인지, 그녀는 보이지 않는 듯 횡단보도에 발을 들여 천천히 건너편으로 향했다.그녀가 횡단보도 중간에 외치했을 때, 다급한 경적 소리가 울렸다.끼익….브레이크 소리가 귀를 찔렀다.오남미의 가녀린 몸이 움찔하더니 순간 정신을 차렸다.고개를 돌린 그녀는 안색이 돌변하더니 동공이 확장됐다.강렬한 빛에 눈을 가늘게 떴지만 차 한 대가 그녀를 향해 빠르게 질주하고 있는 것만은 똑똑히 보였다.“꺄악!”죽음이 임박하자 그녀는 두려움에 비명을 질렀다.몸이 휘청이더니 그래도 물웅덩이에 털썩 주저앉았다.이렇게 죽는 걸까?그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강한 빛이 가까이 다가오자 오남미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다행스럽게도 그 차는 오남미와 고작 30cm도 떨어지지 않았을 때 드디어 멈추었다.멈춘 자동차를 보자
이은화는 분노했다. “그럼 우리 청하가 중간에 껴서 난처해하는 모습을 눈 뜨고 보고만 있겠단 말이에요? 아빠라는 사람이, 어떻게 이 중요한 순간에 딸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어요?”“알았어.”고덕화는 한숨을 푹 쉬었다. 어쨌든 동의한 셈이다. “그저 여기에서 며칠 더 묵었을 뿐이야. 천씨 가문쪽과의 협의를 또 지체해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 돼.”고덕화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천씨 가문의 여세를 몰아 당신이 한 단계 더 높은 성과를 올리려고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어요. 저도 그 생각에 동의하고요. 게다가 당신을 응원해요.”이은화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여보, 우리에겐 자식이라고는 청하 한 사람 밖에 없어요. 당신이 이미 이룬 성공은 다른 사람들이 간절히 원하고, 또 원하는 것이예요. 돈은 필요한 만큼만 있으면 돼요. 청하의 행복이야말로 지금 우리의 가장 큰 목표예요.”“하지만…”고덕화는 여전히 변명하고 싶었다.“저는 저희의 잘못된 생각으로 청하가 좋은 인연을 놓치지는 걸 원하지 않아요. 천씨 가문을 떠나서, 천도준은 이미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고요. 만약 청하가 우리 때문에 헤어지면 아버지라는 사람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겠어요?”이은화의 목소리가 점점 더 높아졌다.“당신 설마 우리 청하가 석유 재벌이나 실리콘 밸리의 거물들의 자식들을 마음에 들어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고덕화는 잠시 멈칫하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바로 명쾌하게 말했다.“그럼 이렇게 하지. 모레 여전히 이곳에서 파티를 열어 천도준에게 사과를 하는 거야. 진정한 의미에서의 상견례를 갖는 거지.”“좋아요. 이래야 좋은 아버지죠.”이은화는 부드럽게 웃었다. ……고덕화와 정강수가 회관 주차장으로 달려갔을 때, 천도준은 이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저 멀리에서 롤스로이스 한 대가 회관 밖으로 나가는 것이 보였다. 고덕화는 미간을 찌푸렸다. 정강수가 다급히 경호원에게 물어보니, 경호원은 천도준이 착잡한 표정으로 차량에 올라탔
그 말에 정강수는 몸을 움찔거렸다. 그의 표정은 어딘가 복잡해보였다.정강수는 국화의 대가였다. 그는 도도하고 자신의 존엄을 중요시 여기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외국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그에게서 사과라는 단어를 좀처럼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하물며 자신보다 나이가 한참 어린 사람한테 사과하라니?그저 멍하니 서 있는 정강수를 보고, 유 원장은 화가 났다.“너, 나랑 박씨 어르신을 믿어, 못 믿어?”박씨 어르신도 한숨을 쉬었다.“가, 어서 사과 해. 체면이 깎이는 것도 아닌데 뭐.”천씨 가문 가주의 친아들, 그것도 천씨 가문 가주가 아들을 위해 이미연에게 협박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천도준이 정강수의 사과를 받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순간, 정강수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유 원장이 혼자 이러는 거면 무시해도 되겠지만, 박씨 어르신까지 이러니 그들의 말을 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그가 아무리 어리석다고 해도 일이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정강수는 한숨을 쉰 후, 천천히 밖으로 걸어갔다.“엄마, 아빠. 제가 도준이를 잡으러 갈게요.”고청하는 감격에 겨워 밖으로 뛰쳐나갔다.오해가 풀렸다. 이건 그녀에게 있어서 정말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여자로서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부모님의 마음에 드는 것을 싫어할 사람이 어디있겠는가?정강수의 발걸음도 덩달아 빨라졌다.안채 안은 여전히 조용했다. 고덕화와 이은화는 아직도 무슨 상황인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오늘 밤, 모든 일이 너무 순식간에 지나갔다.기쁨에서 분노로, 다시 공포로 변했다. 두 사람은 그저 오랜 친구들을 불러 딸이 사랑하는 남자가 믿을만한 남자인지 보려고 했는데, 이렇게 큰 오해가 생길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조금 전 천도준에게 했던 말과 행동을 생각하면, 두 사람은 얼굴이 뜨거워졌다.고덕화는 박씨 어르신과 유 원장을 흘겨보았다.“오래 알고 지낸 친구인데, 어떻게 두 사람은 아직도 나를 속일 수가 있지
정강수는 눈을 부릅뜨고 분노했다.그들은 모두 오래된 절친한 친구고, 각자 분야에서 뛰어난 전문가들이어서 만약 진짜로 싸운다면 누구 하나 쉽게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유 원장은 얼굴을 붉히며 욕설을 퍼부었다.“넌 정말 양심도 없는 놈이야. 내가 너랑 싸우는 것을 두려워할 것 같아? 너한테 맞으면 난 내가 직접 치료하면 되는데, 넌 누가 치료해 줄 수 있을 것 같아? 난 절대 치료 못 시켜줘.”“너……”정강수는 얼굴을 붉혔다. 고덕화는 아직도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해했다.같은 편들끼리 왜 갑자기 싸움을 벌이는 거지? 그때, 박씨 어르신이 한 발짝 앞으로 나와 유 원장과 똑같이 어이가 없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정강수를 바라보았다.“강수야. 이번 일은 네가 경솔했어. 유 원장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어.”“너 까지 왜……”정강수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하지만 이내 뭔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세 사람 중, 박씨 어르신이 제일 진중하고 침착한 편이었다. 아니었으면 높은 지위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두 사람 대체 왜 그래? 무슨 일이야?”고덕화가 다급히 물었다.이은화와 고덕화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박씨 어르신과 유 원장을 번갈아 쳐다보았다.유 원장은 성격이 급한 나머지 발을 동동 구르며 를 가리키며 정강수에게 소리를 질렀다.“다시 한번 저 그림을 자세히 봐봐. 그래도 천도준이 선물한 그림이 가짜라고 한다면 오늘 너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그 말에 정강수는 마치 날벼락을 맞은 듯 정신이 멍해졌다.박씨 어르신과 유 원장은 천도준을 대신해 억울함을 호소했다.‘내가 진짜 잘 못 본 걸까?’정강수는 다시 를 들고 신중하게 테이블 위에 펼쳐놓았다.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돋보기를 꺼내 자세히 살펴보았다.아까와 비교하면, 정강수는 확실히 침착했다.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어찌나 조용한지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조차 들릴 것 같았다. 고덕화 일행은 막막했다. 하지만 박씨 어르신과 유 원장은 부끄럽기도 하고, 어딘
그의 한 마디에 방은 순식간에 시간이 멈춘 듯 조용해졌다. 박씨 어르신과 유 원장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느새 두 사람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하지만 정강수는 오히려 거만한 표정으로 천도준을 아니꼽게 바라보고 있었다.순간, 고청하는 눈앞이 컴컴해지는 것 같았다. 그녀의 갸냘픈 몸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려왔다.부모님은 불같이 화를 낸다. 처음 부모님을 소개시켜드리는 자리는 이렇게 완전히 망해버렸다.그럼 앞으로 두 사람의 사이는 어떻게 되는 걸까?고청하는 힘겹게 천천히 입을 열었다.“도준아……”그녀가 막 말을 내뱉은 순간, 천도준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미소는 봄바람처럼 따뜻했다.당백호의 는 이수용이 그에게 준 것이다. 그는 이수용이 고작 그림 한 점으로 수작을 부렸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박씨 어르신에게 주는 선물이라 해도 절대 가짜일 리가 없었다.그의 기분을 상하게 한 건 바로 정강수의 독단적인 태도였다. 그는 그림을 단 한 번만 보고 가짜라고 판단했다. 그건 아무리 전문가여도 너무 독단적이었다.그의 이런 독단적인 행동 때문에 기쁨과 환희가 차 넘쳐야 할 자리는 순식간에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고청하의 목소리를 듣고, 천도준은 웃으며 말했다.“청하야, 난 괜찮아. 난 이만 나가볼게.”이미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그가 계속 여기에 있는다면 고청하만 중간에서 곤란해질 뿐이었다.고청하는 그가 가장 힘들었을 시기에 그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는 어렵게 얻은 이 진실된 감정을 각별히 소중하게 여겼다.하지만 지금, 난처해하는 고청하를 보고 있자니 천도준은 마음이 아파왔다.말을 마친 천도준은 얼굴에 미소를 띄고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도준아……”고청하는 그를 잡으려고 했다.하지만 고덕화가 그녀를 붙잡았다.“청하야. 아직도 모르겠어?”“아빠…… 아빠는 제가 무엇을 이해하기를 바라세요?”고청하는 눈물을 흘리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청하야, 천도준은 이 도시에서 젊은 인재라고
쿵.그의 한 마디에 방 안의 몇 몇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 어리둥절해했다.모두가 돈이 부족하지는 않지만, 이런 소장품에 대해서는 모두 관심이 없었다. 때문에 서화 면에서는 정강수처럼 조예가 깊은 사람은 없었다.한 폭의 그림이 거의 50억에 달한다니…… 그게 사실이라면 이 선물은 아주 귀한 것이었다.그 말에 천도준도 깜짝 놀랐다. 이수용은 너무 손이 컸었다. 다른 사람에게 주는 선물로 50억을 쓰다니?잠시 후, 천도준은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아저씨, 저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분들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50억 정도는 내놓을 수 있습니다.”“어린 나이에 말은 잘하네?”정강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점잖은 그의 얼굴에 흉악한 분노가 일었다. 고청하는 눈을 반짝였다. 천도준의 몸값을 생각했을 때, 50억 정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그녀가 막 뭐라고 해명하려고 할 때, 정강수는 갑자기 냉소를 지으며 천도준에게 말을 걸었다.“방금 잘 못 들었어? 내가 말한 건 3년 전 시가야.”“잘 들었습니다.”천도준은 평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49억 2천 8백만원. 구체적인 가격을 어떻게 알았냐고?”정강수는 차가운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당시 이 그림이 경매에 팔렸을 때, 내가 그 경매 현장에 있었지. 이 그림은 당시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한 신비로운 구매자 손에 들어갔어. 게다가 이 그림은 3년 전에 사간 이후로 한 번도 세간에 나타난 적이 없었지. 나이가 많이 어린 것 같은데, 설마 당신이 그때 그 그림을 산 사람이라고 하진 않겠지?”그 말에 고청하는 몸을 움찔했다. 그녀의 두 눈은 순식간에 휘둥그레졌다.3년 전이면 천도준과 오남미가 결혼하던 해다.그때의 천도준이 어떻게 50억 짜리 그림을 살 수 있었을까?‘설마…… 진짜 가짜란 말이야?’순간, 고청하의 눈앞은 순식간에 캄캄해졌다. 그녀의 마음은 순식간에 텅 빈 듯 공허해졌다.고덕화의 표정도 점점 굳어졌다.그는 정강수의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국화의 대가이고, 이 방면에
그의 한 마디에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고덕화의 표정도 순식간에 굳어졌다. 고청하 어머니의 표정도 오싹하기 그지 없었다.박씨 어르신과 유 원장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아저씨, 도준이는 가짜 그림을 선물할 사람이 아니에요.”고청하는 다급히 해명했다.이건 천도준이 그녀의 부모님을 처음 만나는 자리다. 그녀의 가세로 보아, 고청하의 부모님은 천도준이 준 선물의 가치를 절대 따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선물이 가짜라면 그건 의미가 달라진다.이건 가식적이고 무례한 일이 아닌가?“그래, 맞아. 한 번 더 자세히 봐. 함부로 말하지 말고.”유 원장도 고청하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는 천도준의 진짜 정체를 알고 있었다. 천도준 같은 사람이 어떻게 가짜를 구입할 수 있단 말인가? 반드시 정강수가 잘못 본게 틀림없었다.“그래, 아까 그저 얼핏 봤잖아. 네가 잘못본 게 틀림없을 거야.”박씨 어르신이 말했다.“뭐?”정강수는 박씨 어르신을 노려보았다.그는 국화의 대가이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의 그림 한 점은 수백억원에 달하는 가치가 있었다.그는 수십 년 동안 서화에 빠져있었고 직접 본 서화는 부지기수였다.당백호의 는 정강수가 한 눈에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당신……”박씨 어르신은 무의식적으로 천도준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정강수를 향해 말했다. “이 당나귀 같은 놈아. 오늘은 청하가 남자친구를 데리고 인사를 하러 온 날인데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거야?”천씨 가문 가주의 친아들이 어떻게 가짜 그림을 선물할 수 있겠는가? 무슨 말도 안 되는 농담을…… 만약 이번 일로 천도준이 대노한다면 천씨 가문의 명령하나 만으로 정강수는 그동안의 명성을 전부 내려놓아야 할지도 모른다.“왜 나를 탓하는 거야?”정강수는 매섭게 쏘아붙였다.“난 저 녀석이 여자친구 부모님에게 선물로 가짜 그림을 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야. 보잘것 없는 선물이라도 정은 깊다는 말도 있는데 값비싼 선물을 주지 못해
“걱정하지 마. 이따가 확실하게 단련시켜 줄 테니까.”박씨 어르신은 워낙 권위가 높은 사람인지라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옆에 있던 유 원장과 정강수도 고개를 끄덕였다.“걱정마시게나. 우린 오랜 벗이잖아. 우리를 초대했으니까 우리도 자네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걸세.”“도대체 어느 잘난 놈이 청하 마음을 사로잡은 건지 똑똑히 봐둬야겠어.”고덕화는 활짝 웃었다. 그러면서 함께 주먹을 맞잡았다.바로 그때, 고청하는 잔뜩 민망해하는 천도준의 팔짱을 끼고 안으로 들어왔다.천도준을 보자마자 박씨 어르신과 유 원장은 동시에 아연실색했다. 그들은 깜짝 놀라 순식간에 동공이 움츠러들었다. ‘저…… 저 사람이 고덕화의 예비 사위라고? 세상에.’박씨 어르신과 유 원장도 권세도 높고 지위도 높은 사람들이었지만, 천도준을 보자마자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거센 파도가 일었다.이렇게 큰 인물을 감히 누가 누구를 테스트하고, 누가 누구를 단련시킨단 말인가?박씨 어르신은 천도준의 신분을 알고 있었다.이율 병원 원장인 유 원장은 천도준의 어머니가 그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때, 그는 천도준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장 의사를 통해 천도준에 관한 일을 들은 적이 있었다.“저 사람이 바로 네가 말한, 우리더러 잘 테스트해봐라던 그 사람이야?”유 원장이 말했다.옆에 있던 박씨 어르신은 의아한 표정으로 유 원장을 쳐다보았다. 그는 유 원장이 천도준의 신분을 알고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달았다.사실, 천도준은 방에 들어온 후에도 여전히 어리둥절했다. 오늘 밤 고청하의 부모님을 만난 다는 사실도 미처 몰랐었는데 뜻밖에도 이렇게 많은 거물급 인물들이 함께 있을 줄이야.박씨 어르신뿐만 아니라 유 원장도 있었다.그의 어머니가 이율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 어머니를 돌봐느라 병원에 자주 들르곤 했다. 그럴 때에 유 원장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오직 그 점잖은 얼굴을 한 사람과만 초면이었다. 하지만 그는 박씨 어르신, 유 원장과 함께 자리하고 있는 걸 보면 그 또한 만만한 인
죽림 정원.웃음 소리가 본연의 고즈넉함을 깨뜨렸다. 고청하는 의자에 앉아 자신의 아버지와 그의 몇 몇 오랜 벗이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안절부절못하며 지켜봤다.한 쪽의 대원들 외에, 국화의 대가, 의학의 권위자 등등이 한자리에 모여있었다. 이 사람들은 국내에서 명성이 자자할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위상이 높았다. 이 사람들은 모두 고청하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들이었다. 이따가 천도준이 오면, 어떤 광경이 펼쳐질까? “자네, 오랫동안 보지 못했는데, 못 본 새에 이율 병원 원장으로 국제적으로 유명하더군.”중년 남자는 활짝 웃으며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 남자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외국의 의학 잡지에 자네가 자주 등장하더군.”“하하하. 그만 칭찬하게나. 이게 다 검은 머리가 희도록 밤 새서 노력한 결과물이니……”유 원장이 웃으며 말했다.“국제적으로 명성이 높은 걸로 따지면 정강수가 제일 자격이 있지.”그 말에 점잖은 외모에 안경을 쓴 또 다른 중년 남자가 말을 이어갔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야. 국제적으로 유명하다니? 정말 국제적으로 명성을 떨친 건 내가 아니라 고씨 지. 석유 재벌과 실리콘밸리의 가물들과 어울려 놀잖아.”“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내가 이번에 너희를 부른 건, 중요한 일이 있어서야.”“바로 사윗감을 테스트 하는 거지.”박씨 어르신이 진지하게 말했다.이 말에 유 원장과 정강수는 동시에 흥미를 느꼈다. 그들은 앞다투어 고덕화의 예비 사위가 누구인지 물었다.고덕화는 말없이 웃으며 나중에 소개하겠다고 말했다.“생각지도 못했어. 덕화가 이 도시에서 가문을 일으켰는데 사위도 이 도시에서 찾고, 어느 집 재주가 뛰어난 놈이 우리 조카딸을 그렇게 오매불망 기다리게 한 거야?”유 원장은 참지 못하고 한 마디했다.“기다려보면 알아.”고덕화는 살짝 웃었다. 그러면서 고청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마침 사람들도 다 모였으니 이 녀석들이 나를 도와 그 녀석이 진짜 합격된 놈인지 아닌지 테스트할거야.”고청하는 두 손을 맞잡
세 개의 분양 아파트 실시간 데이터는 꾸준히 잘 유지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일주일 정도면 이번에 나온 매물들을 다 팔 수 있을 것 같았다.이건 그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결과였다.그는 큰 주목을 받지 않는 선에서 가장 빠른 이익화를 실현하려고 했다.오후 5시, 천도준은 마영석에게 오늘 밤 축하연을 마련하라고 했다.하지만 그의 테이블로 배달된 초대장 하나가 그의 계획을 완전히 허사로 만들었다.초대장에 적힌 글자를 보고, 천도준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는 기뻐하면서 조금 놀란 것 같았다.초대장에는 사인회관이라는 장소가 적혀 있었다.사인회관의 초대장이다. 입문 자격을 갖췄다는 뜻이었다.“누가 보낸 거지?”그는 울프를 바라보았다.하지만 울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떤 젊은 사람이야. 그저 초대장만 건네주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가버렸어.”천도준은 엉겁결에 웃음을 터뜨렸다.이 초대장은 진짜 초대장이 맞았다. 사인회관의 명성이 워낙 강하다보니 아무도 감히 이 초대장을 위조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초대장에는 주인의 이름이 빠져있었다.‘혹시 박씨 어르신인가?’천도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박씨 어르신의 신분으로 이 초대장을 보낸다면 자신의 이름을 빼먹지 않을 것이다.“축하연은 오늘 너희끼리 해야겠어. 나는 약속 장소로 가봐야 해.”그는 초대장을 흔들며 마영석에게 말을 걸었다.만약 정말 박씨 어르신이 보낸 초대장이라면 상대방의 체면을 구길 수 없었다.간단한 초대장 한 장이라고는 하지만, 주건희, 주준용같은 사람들에게는 아주 귀한 물건이었다.지금 상대방이 직접 그의 손에 가져다줬는데 그가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면 그건 멍청한 거나 다름이 없었다.깊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사인회관은 여전히 독특한 신비로움과 장엄함을 자랑했다.작은 뜰.환한 등불이 비추고,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초대장이 없으면 함부로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진정한 사인회관의 단골손님만이, 전체 사인회관에서 이 대나무 숲의 작은 뜰에 출입할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