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그럼 먼저 갈게.""내가 데려다줄게."온하랑은 병실에 들어가면서 부승민에게 물었다."문 좀 열어둘까?""그래. 금방 갈게.""음."온하랑은 침대에서 잠을 청하려 했지만 이미 잠이 없어 뒤척였다.할아버지의 병세를 생각하자 그녀는 마음속으로 비통함을 금할 수 없었다.그리고 할아버지가 부승민에게 부탁한 일도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의 죽음을 위해 부승민과 친하게 지낼 기회를 주었다.그녀가 어찌 할아버지를 이렇게 대할 수 있겠는가.만약 반대로 부승민과 헤어졌다면 할아버지가 죽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녀는 부승민과 관계를 끊는 데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만약은 없다.세상의 일을 다 처리하기는 어렵다.복도에서 희미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와 온하랑의 병실 앞에 멈추었다.부승민은 가볍게 문을 열고 병상 쪽으로 가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 안 잤어?""아니, 잠 안 와."부승민은 병실의 독립된 화장실을 빌려 간단히 씻고 외투를 벗은 후 이불을 들추고 침대로 들어갔다. "자자.""음."그들은 묵묵히 할아버지의 말을 꺼내지 않았다.온하랑도 눈을 감고 어느새 잠이 들었다.날이 밝아올 무렵, 온하랑은 한바탕 휴대전화 벨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다.그녀는 손을 내밀었다가 다시 움츠렸다.그것은 그녀의 휴대전화 벨소리가 아니었다.부승민은 침대 옆 탁자 위의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이불을 들추고 침대에서 내려왔다.부승민이 전화를 받으러 나간 줄 알았던 온하랑은 그가 창문 앞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며 전화하는 것을 보았다."응, 서윤아.""승민아, 나 악몽 꿨어. 나 좀 보러 와줄래?""오늘은 안 돼. 할아버지가 편찮으셔서 병원에서 같이 있어야 해.""응? 할아버지가 아프신데 심각해? 내가 한번 가봐도 될까?"부승민은 침묵을 지키며 침대 위의 온하랑의 눈빛을 보았다.온하랑은 서둘러 시선을 돌려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분명히 부승민에게 들켰다.부승민은 마이크를 막고 온하랑에게 물었다. "서윤이 할아버지를 보러 오고 싶
아침 식사 후 벌써 한 시간이 지났다.온하랑은 할아버지가 이미 깨어났음을 짐작하고 부승민과 함께 다시 병실로 갔다.이때 병실에는 부승민의 둘째 숙모와 조금 먼 사촌인 고모 두 사람이 더 있었다.구석에 선물 상자가 좀 있었는데 분명히 방문객들이 왔었던 것 같았다."아, 승민이랑 하랑 씨가 왔네요.""둘째 숙모님, 고모님." 온하랑은 그녀들과 인사를 나누었다.눈앞의 상황을 보니 할아버지는 아직 깨지 않았다."할머니 곁에 가서 앉아 있어." 부승민이 온하랑에게 말했다.중간에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걸상이 두 개 있었는데 그는 온하랑이 잘 보이지 않을까 봐 일부러 온하랑을 부축하고 걸어가서 할머니 곁의 소파에 앉혔다."어린 부부 사이가 참 좋네." 이 장면을 본 둘째 숙모는 웃으며 놀렸다.둘째 숙모도 부승민과 추서윤의 뉴스를 본 적이 있다.하지만 그녀는 마음속에 두지 않았다. 남자는 다 그렇지 않은가. 밖에서 놀아도 집에 다시 돌아가기 마련이다."그러게 말이예요. 승민이와 하랑 씨는 내가 봤던 중 가장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고모도 얼굴에 미소를 띠고 아첨을 하고 있었다.그녀는 부씨 집안과의 관계가 좀 멀었다. 온 가족이 부씨 집안의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오는 약간의 장사로 살아가길 바라고 있는데, 어르신이 아프셔서 병원에 바로 달려와 성의를 표하여 할아버지와 부승민의 앞에 얼굴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다.부승민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고모와 인사를 나눴다. "고모부는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최근에 또 조그만 공장을 운영한다고 들었는데..."고모는 부승민이 불쾌해하지 않자 적극적으로 말했고 얼굴이 빨개져서 얼른 대답했다."그래, 가방 쪽으로 사업을 좀 확장하려고 하는 거야..."부승민이 몇 마디 말을 이어가자 고모는 매우 기뻐했다.어디까지 얘기했는지 모르지만 화제는 또 갈라졌다.고모의 시선은 온하랑과 부승민을 돌아보며 말했다."승민이는 올해 곧 서른이지, 하랑 씨는 나이도 적지 않은데 언제 아이를 가질 생각이야?"말을 마
부승민은 온하랑이 웃는 모습을 보고 있다가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는온하랑의 곁에 다가가 앉았다."천천히 먹어."온하랑은 손에 쥐고 있던 포크를 멈추고 부승민을 올려다보았다.“오빠도 먹어봐."묻고 나니 온하랑은 문득 부승민이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생각났다."응." 부승민은 온하랑의 두 눈을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온하랑은 멈칫하다 정신을 차리고 케이크를 한점 집어 부승민의 입에 넣어주었다.부승민은 냉큼 받아먹었다.할머니는 두 사람의 깨 볶는 모습을 보고 얼굴에 미소를 띠며 농담을 하셨다. "승민아, 이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선물도 사오지 않았어? 우리 두 늙은이는 다 잊은거니?""선물도 없는 건 둘째치고, 승민이는 케이크를 싫어해서 먹으라고 해도 안 먹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아주…"할아버지는 두 사람을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으셨다.할머니는 흐뭇해서 입을 다물지 못하셨다. "승민이가 하랑이를 이리도 좋아하니 어쩌면 우리 증손자를 볼 날도 멀지 않은것 같네."두 사람의 말에 온하랑은 볼이 빨개졌다.할아버지의 병이 위독해지신 후, 부승민은 며칠 동안 온하랑과 병실에서 지내며 아침저녁으로 같이 자고 있으니, 마치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았다.추서윤이 없었으면 이혼 합의서를 쓸일도 없었다.그들은 보기에는 그저 평범하고 화목한 부부였다.부승민은 온하랑의 홍조를 띤 얼굴을 보며 생긋 웃었다."그만 하세요, 두 분 때문에 하랑이가 부끄러워 하잖아요. 하랑이가 시집을 온 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단 음식을 이렇게 좋아해요."할아버지가 웃으시며 말씀하셨다."마음이 힘드니까 달콤한 게 당기는 거고, 이런 식으로 계속 먹다보니 습관이 되어 버린 거겠지.”"할아버지, 그만 좀 놀리세요."온하랑은 남은 케이크 한점을 마저 먹고 포장지를 쓰레기통에 던지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갑자기 발에 뭐가 걸려 앞으로 고꾸라졌다.부승민은 재빠르게 달려가 그녀의 허리를 잡았다.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온하랑은 부
증거 앞에서 송 모씨와 이 모씨는 계획된 범죄란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경찰은 이들을 형사 소송하기로 했지만 피해가 크진 않아 형량이 무겁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온하랑은 의문이 들었다."그들은 어떻게 제 차 번호와 위치를 알았을까요?""송 모씨는 S자동차 서비스 센터의 수리공인데 하랑 씨가 그 곳에서 차를 수리한 적이 있다고 진술했어요. 이 모 씨은 미행을 상습적으로 한 놈인데, 그 친구한테서 하랑 씨 행적을 알아냈더라고요.""네, 알겠습니다.""송 모씨와 이 모씨 가족분들이 하랑 씨를 만나 선처를 구하고 싶어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안 만날게요. 저는 어떠한 배상도 필요 없고 가중처벌을 위해 집중해주세요.""네.""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무슨 소식이 있으면 알려주세요."전화를 끊은 부승민은 온하랑을 보고 말했다. "이 일은 계성진 보고 지속 주시하게 말해둘게. 그놈들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계성진은 부 씨 법무부에서 특채 변호사로, 강남 시에서 제일 잘 나가고 맡은 사건은 거의 패한 적이 없는 거로 명성이 자자했다."고마워.""뭘."레스토랑은 화려하고 예쁘게 꾸며져 있었고 홀에는 피아노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두 사람은 안쪽 테이블 자리에 앉았다. 웨이터는 그들에게 메뉴판을 하나씩 건넸다.부승민은 메뉴판을 펼쳐 처음부터 하나하나 소리 내어 읽었다. 그러자 온하랑은 그의 말을 끊었다. "저녁에 그렇게 많이 시키면 다 못 먹지 않을까?""나 지금 너 들으라고 읽어주는 거야."부승민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네 눈은, 지금 잘 보여?"온하랑은 그제야 의도를 알아차리고 그를 향해 환히 웃으며 말했다."내가 앞이 안보이는 것도 아니고, 다만 희미할 뿐이지 글씨는 다 잘 보여."그 틈을 타 웨이터는 메뉴 소개에 나섰다."손님, 이건 커플 세트인데. 가성비가 좋아서 저희 가게에서 아주 인기가 많아요. 두 분도 한번 드셔보세요."온하랑은 고민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이거로 하자."
온하랑이 댄스 플로어에서 눈을 못 떼는 모습을 보자 부승민의 얼굴에는 절로 미소가 흘러나왔다."춤추고 싶어?"온하랑은 부끄럽게 웃었다."나 잘 못 춰.""내가 가르쳐 줄게."온하랑은 두 눈이 번쩍 뜨였다.부승민은 온하랑를 마주하고 서서 허리를 굽히고는 손바닥을 내밀었고 온하랑은 살며시 손을 내밀었다.부승민은 온하랑의 손을 잡고 천천히 댄스 플로어로 걸어가며 매혹적인 미소를 띠었다. "내 어깨에 네 손을 얹고 내 발걸음을 천천히 따라오면서 리듬에 몸을 맡기면 돼."잔잔한 음악에 맞춰 그들은 천천히 스텝을 밟았다.부승민은 온하랑한테 바싹 기대 그녀의 귓가에 대고 박자를 세었다.부승민의 뜨거운 숨결이 귓가에서 느껴지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온하랑은 삐걱거리다가 부승민의 스탭을 겨우 따라가다가 실수로 그의 구두를 밟았다."미안해." 온하랑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다가 너무 가까운 얼굴사이 거리에 당황했다.부승민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괜찮아."온하랑은 그대로 넋이 나가버렸다. 무대 위의 조명은 유난히 반짝였고 그의 잘생긴 얼굴을 비추어 마치 고대 그리스의 조각처럼 각진 이목구비를 돋보이게 했다.부승민은 입꼬리가 위로 한껏 올라간 채 보석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왜? 내 미모에 반했어?""아니거든." 온하랑은 황급히 고개를 돌리다 자칫 자신의 발을 밟을 뻔했다.부승민은 조용히 웃었다.온하랑의 귀 끝이 어느새 빨갛게 달아올랐다.잠시 후, 그녀는 어느 정도 스텝에 능숙해졌다.치맛자락이 펄럭이고 스텝은 가볍고 춤 선은 우아했다.부승민은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잡고 온하리에게 리듬을 맡기고 그저 따라갔다."이제는 어떻게 추는지 감이 와?"부승민은 귓가에 대고 소곤소곤 물었다."응."그때, 온하랑은 갑자기 누군가와 부딪쳤다.그녀는 순간 평형을 잡지 못해 부승민의 넓은 가슴통에 머리를 토갰다.그러자 부승민은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괜찮은지 물었다. "나는 괜찮
부드럽고 따뜻한 입술이 서로 맞닿자 온하랑의 심장은 두근거렸다.부승민이 그녀의 입술을 깊이 입으로 빨아들이자 격렬한 접촉에 온하랑의 입술은 이내 빨개졌다. 부승민의 혀끝은 날렵하게 그녀의 입안 곳곳을 헤집으며 달콤한 입맛을 마음껏 맛보고 있었다.온하랑은 두 손을 그의 어깨에 걸치고 손가락은 그의 목덜미를 스치자 그의 말끔한 머리카락이 그녀에게 사랑스럽게 대꾸했다.두 사람의 숨결이 가쁘게 교차했다.밀폐된 차 안에 두 사람의 숨소리가 더욱 굵어졌다.부승민의 숨이 뜨거워지며 그의 손은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몸 선을 따라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정신이 번쩍 든 온하랑은 다급하게 그의 손을 붙잡아 그를 제지하며 흐리멍덩하게 말을 했다."그만해, 지금 밖에 사람들 있어."부승민은 어쩔 수 없이 동작을 멈추고 그녀의 따뜻한 입술을 한 번 더 맛보고는 천천히 손을 뗐다.한 줄기의 투명한 줄이 늘어지더니 부승민이 멀어짐과 동시에 줄이 탁 끊어지더니 두 사람의 옷깃에 떨어졌다. 좁은 차 안에는 애매한 기운이 흘렀다.부승민은 깊게 심호흡을 하고 곧바로 시동을 걸었다. 그의 하얗고 긴 손은 핸들을 꽉 잡았다.차가 출발한 지 한참 후에야 온하랑은 창밖의 풍경을 보고는 이 길이 병원으로 가는 길이 아님을 눈치챘다."병원에는 안 가?"부승민은 고개를 돌려 덤덤하게 미소를 지었다. "오늘 밤 먼저 집에 가고 내일 아침에 병원에 가자.""그래."차는 더원파크힐로 들어가 집 앞 마당에서 멈춰섰다.부승민은 안전벨트를 풀고 옷깃을 느슨하게 한 다음 바로 온하랑을 향해 덮쳤다. 그는 그녀의 입술을 물고 핥고 뜯고 하면서 두 혀끝이 뒤엉켜 진액이 섞이고 거친 숨결이 서로 얽혔다.부승민은 온하랑의 안전벨트를 풀어 자신의 다리에 앉힌 채 한 손으로는 그녀의 뒷머리를 받치고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치맛자락을 걷어내며 속을 기웃거렸다."앗...음..."온하랑은 눈을 감은 채 두 손으로 그의 옷깃을 움켜쥐고 두 볼은 뜨겁게 달아올라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부승민의 뜨거운
전화기 너머로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부승민의 얼굴은 어느새 더욱 굳어있었다. "그래, 알았어, 금방 갈게."그는 곧바로 옷깃을 정리하고 외투를 입은 뒤 온하랑에게 말했다."나 잠시 어디 좀 다녀올게.""무슨 일이야?"온하랑은 이불을 어깨까지 덮어 쓰고 몸은 반쯤 괴고 있었다."이 늦은 시간에 꼭 가야 돼?"부승민은 옷을 정리하다 손을 멈칫했다."안 매니저? 설마 안수빈이야? 서윤 씨 한테 뭔일 생긴 거야?"그의 침묵에 온하랑의 눈엔 걱정이 가득했고 온몸은 차가워 졌다."추서윤이 연락이 안된대.""연락이 안돼? 그럼 경찰에 먼저 신고해야지, 지금 가도 도움이 안되잖아."온하랑은 추서윤이 그가 찾으러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서윤의 심리가 불안정한 상황에 혼자 떠돌아 다니게 냅두면 너무 위험해. 게다가 걔는 공인이여서 경찰에 신고하면 피해가 너무 커. 약속할게. 가능한 한 빨리 걔를 찾아서 돌아올게."부승민의 완강한 표정을 보니 온하랑은 가슴이 아팠다.관심이란 어지러운 것이다.이건 아마 추서윤이 부승민을 불러내기 위한 꼼수일 것이다. 온하랑은 바로 알아차렸지만 안타깝게도 부승민은 아니었다.그의 눈에 추서윤은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된다.그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온하랑은 부승민이 이대로 가면 절대 돌아오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내가 오빠를 보내기 싫다면?"온하랑은 입술을 깨물고 용기를 내고 말했다."온하랑, 애처럼 떼쓰지 마.""오빠가 할아버지한테 약속한 말 잊었어?"온하랑은 서러움을 참고 다시 한번 잡아보았다.그는 마음속으로 추서윤을 걱정하고 있었다. 추서윤에게 무슨 일만 생기면 쏜살같이 달려가는데 그녀와 함께 지내겠다고 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언제든 다른 여자에게 불려갈 수 있는 남편을 곁에 두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난 그저 할아버지한테 너랑 잘 지내겠다고 한 것 뿐이야, 약속을 한 것도 아니고. 지금 한 사람 목숨이 달린 상황에서 꼭 나랑 싸워야겠어?
부승민이 추서윤을 데리고 할아버지를 만나러 온 것이다.그는 감히 애인을 데리고 할아버지를 뵈었다.바람결에 쏟아지는 차가운 빗방울과 같은 따뜻한 마음의 그늘이 그녀를 흠뻑 적셨다.온하랑은 그가 왜 자신한테 이토록 가혹하게 구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그들이 잠자리를 가지려는 중, 추서윤의 전화 한 통에 불려가고는 아무런 소식도 없이 추서윤을 데리고 할아버지를 뵈러 왔다.부승민은 도대체 아내인 그녀를 얼마나 무시하고 있는 걸까.온하랑은 병실 문 앞에 서서 안에서 나누는 대화 소리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추서윤은 환심을 사려는 듯했지만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태도는 무뚝뚝했다."아가씨의 좋은 말씀에 감사드려요."이야기하는 동안 할머니는 부승민에게 화제를 돌렸다. "승민아, 너 어제 하랑이랑 같이 돌아가지 않았니? 오늘은 왜 너 혼자 이 아가씨랑 같이 왔어? 이 아가씨는 일이 바쁘실 텐데. 너도 그래! 굳이 이렇게 오라고 귀찮게 할 필요가 있었냐? 만약 또 어느 언론사 기레기에게 찍혀서 한바탕 기사를 휘갈겨 쓴다면 아가씨한테 피해 끼치지 않겠어?"추서윤은 발 빠르게 부승민을 옹호하고 나섰다. "할머니, 제가 직접 오겠다고 했어요. 할아버지가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걱정돼서 승민한테 데려다 달라고 한 거에요."할머니는 눈살을 찌푸렸다. "승민아, 너는 왜 모든 일은 남한테 떠벌이고 다니는 거냐? 아가씨, 나는 지금 그쪽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만약 다른 외부 사람들이 할아버지가 입원해 있다는 것을 알고 물건을 사 들고 와서 뻔뻔하게 들러붙어 사람 짜증 나게 할까 봐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부승민과의 평온한 결혼생활을 빼앗은 것도 모자라 할아버지한테 까지 찾아와 날뛰니 할머니는 최대한 정중하게 경고를 날렸다.추서윤은 얼굴이 창백해져서 억울한 표정으로 부승민을 쳐다보았다."할머니, 죄송해요. 제가 먼저 서윤이를 데리고 오려고 한 거에요. 탓을 하려면 제 탓을 하세요."부승민은 모든 질책을 떠안고 말했다.그는 어젯밤에 한참 동안 돌아다녀서
그때는 어린 마음에 부모님의 무관심이 좋기만 했는데 클수록 오재원은 그게 다 기대가 없어서였다는 걸 깨달아가고 있었다.주위 사람들은 은연중에 자신과 형을 비교하고 있었고 또 어떤 이들은 집안의 무게는 형이 다 짊어지니 마음대로 살 수 있어서 좋겠다며 부러움의 눈길을 보내오기도 했다.모두가 내놓은 자식이라 해서 정말 그렇게 사니 부모님은 또 제대로 하는 일이 없다고 타박했다.그런 사람들 속에서 오직 임연지만이 오재원을 인정해주었다.오재원의 우수함을 발견하지 못한 건 오승은과 오형일이 부모 노릇을 잘 못 했기 때문이라며, 오재원이 이렇게 된 것도 다 책임을 다하지 못한 부모 때문에 엇나간 거라며 그의 마음을 헤아려주었다.노력만 하면 절대 형한테 뒤지지 않을 거라는 그 한마디가 오재원의 가슴을 울렸고 오재원은 그때부터 임연지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오재원도 자신이 형보다 못 한 게 아니라 형이 받았던 교육을 못 받아서 이렇게 된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재원아, 부모님이 반대하시는 결혼생활은 오래갈 수 없는 거야. 넌 아주머니, 아저씨 자식이니까 너를 탓하진 않겠지만 나한테 그 화살이 올 거야. 그러면 날 더 싫어하시겠지.”“나도... 떳떳하게 너랑 결혼하고 싶은데...”임연지가 얼굴까지 붉히며 말하자 오재원은 그녀를 향해 무턱대고 약속부터 했다.“걱정 마 연지야. 내가 부모님 설득해볼게. 네가 내 아이까지 임신했으니까 부모님도 어쩌진 못하실 거야.”“고마워 재원아... 네가 내 옆에 있으니까 너무 든든하다.”오재원은 눈물을 글썽이는 임연지를 꼭 껴안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당연한 일인데 뭐. 넌 나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이니까 내가 너만은 꼭 지킬 거야.”“우리 부모님은 아직 내가 귀국한 거 모르셔. 내일 집에 가서 너랑 결혼하겠다고 말씀드리고 너희 집 가서 의논할 거니까 너도 고모랑 고모부한테 미리 말해놔.”“응. 아주머니, 아저씨랑 싸우지 마.”“알겠어.”...리우그룹 대표 사무실.“나가 봐.”보고도 끝난 마당에 최동철
소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임연지는 이튿날 아침 바로 예쁜 원피스를 입고 청초함이 돋보일 수 있게 화장도 연하게 한 뒤 오재원에게 문자를 보냈다.[재원아, 나 너한테 할 말 있는데 우리 자주 보던 카페에서 볼까?]역시나 문자를 보낸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오재원이 답장을 보내왔다.[알겠어, 바로 갈게.]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던 임연지는 그의 답장에 입꼬리를 올렸다.30분 뒤, 카페에 도착한 오재원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구석에 앉아있는 임연지를 발견하고는 서둘러 그리고 걸음을 옮겼다.어딘가 불안하면서도 초조해 보이는 모습에 오재원은 걱정스레 물었다.“연지야, 왜 그래? 너 무슨 일 있어?”오재원의 목소리에 고개를 든 임연지는 빨개진 눈시울을 하고 천천히 말했다.“재원아, 나... 나 임신 한 것 같아.”“진짜? 연지야, 이거 진짜야?”잠시 당황하던 오재원이 펄쩍 뛰며 좋아하자 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생리가 5일이나 밀려서 아침에 테스트기 해봤는데... 두 줄이더라.”두 줄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오재원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임연지의 손을 맞잡았다.“너무 잘됐다! 우리한테 드디어 아이가 생긴 거잖아!”그에 똑같이 기뻐하며 손을 맞잡던 임연지는 이내 울상을 지었다.너무 기쁜 마음에 임연지의 이마와 볼에 뽀뽀를 하며 희열을 만끽하던 오재원도 그제야 그녀의 굳은 표정을 발견하고 물었다.“연지야, 표정이 왜 그래? 우리한테 아이가 생긴 건데 너는 안 기뻐?”“기쁘지.”임연지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그냥 내가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아서. 감금 피하려고 임신한 애를 미혼모 가정에서 태어나게 하는 게...”“너도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거잖아. 네 탓 아니야. 그리고... 우리가 결혼만 하면 미혼모 가정도 아니잖아. 나랑 결혼하자 연지야.”“싫어.”임연지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오재원을 외면했다.“왜 싫은데?”임연지가 침묵만 유지하자 조급해 난 오재원은 자리까지 옮기며 물었다.“연지야,
한진이 답장을 하지 않아도 임연지는 혼자서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었다.설윤과 최씨 집안의 원한 관계를 짤막하게 설명해준 임연지는 설윤에게 파렴치하고 가증스럽다는 수식어를 갖다 붙였다.[나 그 여자가 우리 집에 들어오는 꼴 못 보겠어. 무슨 방법 없을까?]계속 답장이 없는 한진에 임연지는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고 그녀가 머리까지 다 말리고 나니 한진이 그제야 답장을 보내왔다.[네 고모가 이런 수모를 당한 게 아무래도 집안에서 발언권이 너무 없어서 그런 것 같아. 사촌 동생도 많이 어리니까 더 그렇지.][그럼 어떻게 해야 발언권이 좀 생길까?][옛날 역사를 보면 말이야 그때도 과거제도가 있었거든. 뭐 정시, 별시, 식년 아무튼 어마어마하게 많았는데 그때도 힘 있는 사람들이 좋은 자리는 다 꿰찼었어. 왕조가 망해도 권세가들은 그 부귀영화를 계속 이어갔지. 그런 집안들이 좀 되는데 나열하자면 많아.][...][그런 권세가들이 세력이 전부 다 조상들 덕분만은 아니거든. 중요한 건 혼인이야. 지금으로 말하면 정략결혼을 해서 자신들의 세력을 늘려나간 거지.][결혼을 시키라고? 그러기엔 동림이가 너무 어리잖아. 그리고 걔 결혼문제는 고모부가 나설 텐데 고모가 어떻게 끼어들어.][너 바보냐? 너 말하는 거잖아 너!][나?][그래.][그런데... 내 상황을 네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누가 나랑 결혼을 하고 싶어 하겠어?][오재원 있잖아. 너만 바라보는 놈.][!]생각해보니 오재원이라는 좋은 신랑감이 있긴 했다.한진의 말대로 오재원을 휘어잡다 보니 그는 이미 임연지 말에 따라 움직이는 개가 되어있었다.하지만 그럼에도 걸림돌은 있기 마련이었다.[그런데 그 집에서 나 별로 안 좋아하는데.][그게 무슨 상관이야. 오재원이 너 아니면 죽는다는데.][네가 오씨 집안 사람이 돼서 고모 도와주면 고모부도 이런 일로 이혼하자고 하지는 못할걸.][그리고 정말 백만 번 양보해서 이혼한다고 해도 넌 오씨 집안 사람이니까 당당하게 네 동생 만나러 갈 수 있는 거잖아
“...”최동철이 생각보다 쉽게 동의하자 최국환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경계했다.“나중에 말 바꾸지 마.”“당연하죠. 설윤 씨 배속에... 제 동생이 있는 건데.”“다른 하실 말씀 없으시면 전 먼저 나가볼게요.”웃으며 방을 나선 최동철은 문을 닫자마자 미소를 싹 지웠다.이어서 그가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넓은 복도에 울려 퍼졌다.임가희도 없는 거실을 지나 최동철은 밖으로 나갔다.시원한 밤바람을 맞으며 차에 탄 그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특유의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설윤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봐.”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대답에 핸드폰을 내려놓을 때 어두운 상사의 표정에 안절부절못하던 기사가 조심스레 물어왔다.“저택으로 모실까요 대표님?”“네.”...최씨 집안 방.임연지는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로 임가희를 향해 짜증을 부렸다.“고모, 진짜 그년 집에 들일 거예요?”“응.”“하지만!”이미 모든 걸 받아들인 임가희는 체념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임연지는 그 더러운 내연녀의 얼굴을 집안에서까지 보고 싶지는 않았다.파렴치하게 최씨 집안에 들어오는 것도 모자라서 자신의 고모가 상간녀가 남편의 자식을 낳는 것까지 지켜봐야 한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더 이상 방법이 없어 연지야.”“일을 좀 더 철저하게 못 한 내 잘못이지. 내가 설윤 그 년한테 도망갈 기회를 준 거야.”임연지는 한숨만 푹푹 내쉬는 고모를 보며 조급해서 발을 동동 굴렀다.“그 여자가 집으로 들어오면 너도 괜히 시비 걸지 마.”짜증 난다는 듯 대충 대답하던 임연지는 갑자기 무슨 수가 떠오른 듯 눈을 반짝였다.“고모, 일단 집에 들이고 그다음에 다시 처리...”“아니, 난 이제 아무 짓도 안 할 거야.”임가희는 임연지의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답했다.“그럼 진짜 그 년이 아이를 낳는 걸 지켜보겠다는 거예요?”“애 낳아봤자 재산 조금 받는 것뿐이야. 그런데 난 이혼하면 아무것도 못 가지는 거잖아.”아직 어린 동림이를 두고 이혼한다면 최씨 집
최동철은 차분한 표정으로 무릎에 올린 손가락을 움직였다.“네. 얼마 전에 경주 떴다고 알고 있습니다.”‘어디 보기만 했을까, 잠도 잤는데.’“가희가 연지 데리고 사과하러 갔는데 설윤이 거절하고 가희를 다치게 했대. 그리고 그 책임을 물을까 봐 도망갔다던데 그때는 가희 몸에 상처도 나 있어서 그 말을 믿었거든.”여기까지는 최동철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그래서...”“그런데 오늘 설윤이가 초라한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난 거야. 알아보니까 설윤이 임신 사실을 가희가 받아들이지 못해서 내쫓은 거더라고.”최국환의 말을 듣다 보니 혼란스러워진 최동철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설윤... 설윤 씨가 혼자 경주로 돌아왔다고요?”임가희한테 쫓겨나기 전에 임신을 했다는 것 못지않게 다움시에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것도 놀라웠다.하지만 최국환은 설윤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최동철의 표정 변화를 알아채지 못하고 말을 이어나갔다.“응... 회사 주위를 맴돌다가 직원한테 발견된 거야. 울면서 그동안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 알려주는데 얼마나 짠하던지. 애도 유산될뻔했대.”그 말에 최동철은 입꼬리를 올렸다.돌아오기 전에 최동철이 같이 가겠냐고 물었을 때도 거절하던 설윤이었다.다움시에서 다른 사람의 신분으로 인터넷쇼핑까지 하던 사람이 힘들게 살았다니.최동철도 떠나기 전 설윤에게 몇억을 주고 왔었는데 수중에 돈이 남으면 남았지 모자랄 리는 없었을 것이다.자신의 제안을 거절하고 노인네에게 달라붙은 것도, 아이를 잃을뻔했다는 거짓말을 하는 것도 모두 우스워서 최동철은 냉소를 흘렸다.매일 밤 잠자리를 가질 때는 신경도 안 쓰던 아이가 갑자기 아쉬워진 건가.아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게 낯부끄러웠던 최국환은 그만 말을 멈추었다.“가희가 잘못했다고 하면서 설윤이 다시 데려오겠대. 아이 낳을 때까지 잘 보살펴주겠다고 해서 나도 동의했고.”이익을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재벌가에서 첩을 들이는 건 그리 큰일이 아니었다.어떤 본처는 첩을 데리고 쇼핑도 하면서 아이
최동철은 사색에 잠긴 듯 한동안 임가희를 바라보았다.빨갛게 부어오른 눈과 눈물이 말라붙은 볼 때문에 사람이 유독 초췌해 보였다.설윤을 쫓아낸 일이 들통난 건지 임가희는 최국환 앞에서 고개도 못 들고 있었다.“넌 서재로 가 있어.”“... 제가 들으면 안 될 얘기라도 하시게요?”최동철이 못마땅하다는 듯 말하자 최국환의 눈치를 보던 임가희는 이내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불안한 마음을 감추려는 듯 옷자락을 꼭 쥐는 임가희와 똥 씹은 표정을 짓고 있는 최국환을 번갈아 보던 최동철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전 서재에 가 있을게요.”최동철이 계단을 올라가는 소리가 온 거실을 가득 채웠다.천장에 달린 샹들리에가 은은한 빛을 내며 집안의 장식들을 더욱 화려하게 빛냈지만 그럼에도 어두운 분위기는 감춰지지 않았다.최동철을 올려보낸 최국환은 금세 표정을 굳히더니 임가희를 보며 말했다.“당신 입으로 뱉은 말 지켜. 당장 다시 데려와서 치료부터 음식까지 당신이 다 책임져. 가희야, 넌 똑똑하니까 알 거야. 설윤이랑 걔 배 속의 아이가 잘못되면 어떻게 되는지.”임가희는 고분고분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알겠어요. 설윤 씨 아이 낳을 때까지 내가 잘 보살필게요.”설윤이 도망가버린 뒤로 임가희는 겉으로는 평온한 척했지만 사실 매일 밤을 불안 속에서 지새우고 있었다.사람을 시켜 알아보던 설윤의 행적을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됐을 때는 그 불안이 가시가 되어 그녀의 마음을 찌르고 할퀴었었다.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경계심을 내려놓고 있었는데 하필 이때 최국환이 모든 걸 알게 된 것이다.모든 거리의 CCTV, 간하림을 포함한 직원들의 증언 그리고 설윤의 임신 검사결과보고서까지 수많은 증거를 들이미니 임가희도 차마 변명을 할 수가 없었다.최국환 앞에서는 설윤의 존재를 흔쾌히 받아들이는 너그러운 본처 연기를 하며 임연지 더러 사과까지 하게 하고 선물도 전해줬었는데 뒤에서 이런 모진 짓을 했다는 게 들켜버리는 고개를 들기도 힘들었다.임신 사실을 뻔히 알
“알겠어요.” 부시아는 마지못해 대답했다.연도진은 부시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표정을 보자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병원 병실.연도진이 부시아를 데리고 도착했을 때 이엘리아는 저녁을 먹고 있었다.“오빠.” 이엘리아는 연도진 뒤에 서 있는 부시아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시아 왔구나. 엄마한테 와 봐.”부시아는 다가가서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삼촌이 말한 대로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들었는데 몸은 괜찮아요?”“천천히 회복 중이야.”“그렇군요.” 부시아는 고개를 돌려 연도진을 보며 기지개를 켰다. “삼촌, 저 하루 종일 비행기만 타고 있었더니 너무 피곤해요. 이제 집에 가요.”이엘리아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연도진은 이엘리아를 보고 조용히 말했다. “그럼 시아 데리고 먼저 갈게.”두 사람이 떠나는 뒷모습을 지켜보던 이엘리아의 눈빛 속에는 어딘지 모를 음산한 기운이 스쳤다.경주. 밤이 깊어가며 화려한 불빛들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거리에는 차들이 끊임없이 지나가고 네온사인 불빛이 창문에 비쳐 그 빛과 그림자가 뒤엉켰다.최동철은 하루의 바쁜 일정을 마친 뒤 차 뒷좌석에 앉아 피곤에 지쳐 좌석에 몸을 맡기며 눈을 감고 있었다.기사는 익숙하게 차를 시동 걸고 천천히 차들 사이로 움직였다.최동철은 이마를 문지르며 눈을 비비고 무심코 창밖을 훑어보다가 갑자기 익숙한 인물을 보았다그 인물은 바로 한 여인이었고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긴 머리를 풀어놓은 채 거리를 걷고 있었다.최동철은 본능적으로 몸을 바로 세운 뒤 그 방향을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그러나 그 여자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그는 몇 초간 멍하니 있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너무 피곤해서 헛것을 본 걸까?’‘설윤 씨가 여기 있을 리 없잖아.’그는 다시 좌석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그럼에도 머릿속엔 설윤의 얼굴과 민박집에서 일어난 일들이 떠올랐다.다움시에서 돌아온 이후 두 사람은 더
필라시 국제공항.공항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방송에서는 항공편 정보가 반복적으로 흘러나왔다.연도진은 도착 대기 구역에서 사람들 속을 살피며 부승민과 부시아를 찾고 있었다.그는 잘 맞춘 짙은 색 정장을 입고 차분한 표정으로 가끔씩 시계를 확인하며 여유 있게 서 있었다.잠시 후, 부승민이 짐 수레를 밀고 통로를 지나 나오고 부시아는 짐 수레 위에 앉아 손에 봉제 인형을 안고 신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어린 소녀는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두 개의 작은 땋은 머리를 한 채로 발랄하고 귀여운 모습이었다.“삼촌!” 부시아는 멀리서 연도진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짐 수레에서 뛰어내리며 작은 발걸음으로 달려왔다.연도진은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벌려 아이를 맞아 안았다. 드물게 부드러운 미소가 얼굴에 떠올랐다. “시아야, 돌아온 거 환영해.”부시아는 연도진의 품에 안겨 목을 감싸며 맑고 귀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삼촌, 정말 보고 싶었어요.”부승민은 부시아를 보고 잠시 말없이 눈을 가늘게 뜨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녀석, 사람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네.’부시아는 혀를 내밀고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연도진은 부드럽게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삼촌도 너 정말 보고 싶었어. 이번에 삼촌이랑 많이 놀자.”부승민은 짐 수레를 밀고 다가오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연도진 씨, 오랜만입니다.” 연도진은 일어난 후 부승민과 악수를 나누며 차분하면서도 예의를 갖춘 목소리로 말했다. “부 대표님, 시아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별 말씀을요.” 연도진은 눈길을 부시아에게 돌리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물었다. “시아야, 피곤하지 않아?” 부시아는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 “안 피곤해요. 비행기에서 만화도 보고 잠도 자고 왔어요.” 연도진은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부승민에게 말했다. “이엘리아가 며칠 전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아직 병원에 있어요. 시아를 데리고 이엘리아를 보러 갈 생각인데 같이 가실래요? 그
이엘리아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무심한 듯 말했다. “엘리샤, 우리 집에서 일한 지 얼마나 됐지?” 엘리샤는 잠시 생각하더니 조용히 대답했다. “벌써 6년이 되었어요. 아가씨.” “6년이라...”이엘리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감탄했다. “시간 참 빠르네. 처음 왔을 때는 수줍음 많던 소녀였는데 이제는 제법 어른스러워졌구나.” 엘리샤는 감사의 마음이 묻어나는 미소를 지었다. “과찬이십니다. 아가씨.” “고마워할 것까진 없어. 넌 요 며칠 동안 날 성심껏 돌봐줬잖아. 그 보답으로 네게 아파트 한 채를 선물하려고 해.” 엘리샤는 순간 귀를 의심한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정... 정말인가요?” “물론이지. 아치 거리 쪽에 있는 곳이야. 내가 아직 병원에 있어서 당장 처리하긴 어렵지만 퇴원하면 함께 소유권 이전을 하러 가자.” 이엘리아는 엘리샤의 놀란 표정을 보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게 흘러나왔지만 그 속에는 의심의 여지 없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너는 우리 집을 위해 정말 많은 걸 해줬어. 이건 당연히 네가 받을 자격이 있는 보상이야.” 엘리샤는 감정이 북받쳐 올라 목소리가 떨리며 말했다. “아가씨... 너무 과분한 선물이에요. 어떻게 받아야 할지...”이엘리아는 부드럽게 손을 흔들며 안심시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담 갖지 마. 내겐 그저 작은 선물일 뿐이지만 네겐 새로운 시작이 될 수도 있잖아. 난 늘 너한테 감사하고 있었어.” 엘리샤는 두 손을 꼭 모으며 감정이 북받친 듯 말했다. “아가씨,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일해서 아가씨의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이엘리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넌 똑똑한 아이야. 난 항상 널 높이 평가해왔어. 앞으로도 내 곁에서 충성심을 잃지 않는다면 더 큰 보상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엘리샤는 감동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가씨, 평생 윌슨 가문을 위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