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기 너머로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부승민의 얼굴은 어느새 더욱 굳어있었다. "그래, 알았어, 금방 갈게."그는 곧바로 옷깃을 정리하고 외투를 입은 뒤 온하랑에게 말했다."나 잠시 어디 좀 다녀올게.""무슨 일이야?"온하랑은 이불을 어깨까지 덮어 쓰고 몸은 반쯤 괴고 있었다."이 늦은 시간에 꼭 가야 돼?"부승민은 옷을 정리하다 손을 멈칫했다."안 매니저? 설마 안수빈이야? 서윤 씨 한테 뭔일 생긴 거야?"그의 침묵에 온하랑의 눈엔 걱정이 가득했고 온몸은 차가워 졌다."추서윤이 연락이 안된대.""연락이 안돼? 그럼 경찰에 먼저 신고해야지, 지금 가도 도움이 안되잖아."온하랑은 추서윤이 그가 찾으러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서윤의 심리가 불안정한 상황에 혼자 떠돌아 다니게 냅두면 너무 위험해. 게다가 걔는 공인이여서 경찰에 신고하면 피해가 너무 커. 약속할게. 가능한 한 빨리 걔를 찾아서 돌아올게."부승민의 완강한 표정을 보니 온하랑은 가슴이 아팠다.관심이란 어지러운 것이다.이건 아마 추서윤이 부승민을 불러내기 위한 꼼수일 것이다. 온하랑은 바로 알아차렸지만 안타깝게도 부승민은 아니었다.그의 눈에 추서윤은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된다.그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온하랑은 부승민이 이대로 가면 절대 돌아오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내가 오빠를 보내기 싫다면?"온하랑은 입술을 깨물고 용기를 내고 말했다."온하랑, 애처럼 떼쓰지 마.""오빠가 할아버지한테 약속한 말 잊었어?"온하랑은 서러움을 참고 다시 한번 잡아보았다.그는 마음속으로 추서윤을 걱정하고 있었다. 추서윤에게 무슨 일만 생기면 쏜살같이 달려가는데 그녀와 함께 지내겠다고 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언제든 다른 여자에게 불려갈 수 있는 남편을 곁에 두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난 그저 할아버지한테 너랑 잘 지내겠다고 한 것 뿐이야, 약속을 한 것도 아니고. 지금 한 사람 목숨이 달린 상황에서 꼭 나랑 싸워야겠어?
부승민이 추서윤을 데리고 할아버지를 만나러 온 것이다.그는 감히 애인을 데리고 할아버지를 뵈었다.바람결에 쏟아지는 차가운 빗방울과 같은 따뜻한 마음의 그늘이 그녀를 흠뻑 적셨다.온하랑은 그가 왜 자신한테 이토록 가혹하게 구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그들이 잠자리를 가지려는 중, 추서윤의 전화 한 통에 불려가고는 아무런 소식도 없이 추서윤을 데리고 할아버지를 뵈러 왔다.부승민은 도대체 아내인 그녀를 얼마나 무시하고 있는 걸까.온하랑은 병실 문 앞에 서서 안에서 나누는 대화 소리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추서윤은 환심을 사려는 듯했지만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태도는 무뚝뚝했다."아가씨의 좋은 말씀에 감사드려요."이야기하는 동안 할머니는 부승민에게 화제를 돌렸다. "승민아, 너 어제 하랑이랑 같이 돌아가지 않았니? 오늘은 왜 너 혼자 이 아가씨랑 같이 왔어? 이 아가씨는 일이 바쁘실 텐데. 너도 그래! 굳이 이렇게 오라고 귀찮게 할 필요가 있었냐? 만약 또 어느 언론사 기레기에게 찍혀서 한바탕 기사를 휘갈겨 쓴다면 아가씨한테 피해 끼치지 않겠어?"추서윤은 발 빠르게 부승민을 옹호하고 나섰다. "할머니, 제가 직접 오겠다고 했어요. 할아버지가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걱정돼서 승민한테 데려다 달라고 한 거에요."할머니는 눈살을 찌푸렸다. "승민아, 너는 왜 모든 일은 남한테 떠벌이고 다니는 거냐? 아가씨, 나는 지금 그쪽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만약 다른 외부 사람들이 할아버지가 입원해 있다는 것을 알고 물건을 사 들고 와서 뻔뻔하게 들러붙어 사람 짜증 나게 할까 봐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부승민과의 평온한 결혼생활을 빼앗은 것도 모자라 할아버지한테 까지 찾아와 날뛰니 할머니는 최대한 정중하게 경고를 날렸다.추서윤은 얼굴이 창백해져서 억울한 표정으로 부승민을 쳐다보았다."할머니, 죄송해요. 제가 먼저 서윤이를 데리고 오려고 한 거에요. 탓을 하려면 제 탓을 하세요."부승민은 모든 질책을 떠안고 말했다.그는 어젯밤에 한참 동안 돌아다녀서
추서윤은 온하랑한테 슬렁슬렁 다가갔다."며칠 전 교통사고가 났다고 들었는데 사고 낸 사람이 내 팬이야. 내 팬이 왜 그랬는지 알아?"온하랑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추서윤을 바라보았다."네가 바로 나와 부승민 둘 사이에 훼방 놓은 불륜녀니까!"온하랑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감히 제 앞에서 당당히 말하시네요. 도대체 누가 제3자인지 서윤 씨도 잘 알고 있을 텐데요. 근데 말이죠, 서윤 씨가 이렇게 제 앞에서 날뛰시면 제가 언론에 까발려서 서윤 씨가 불륜녀로 낙인 찍힐까 봐 두렵지 않으세요?"추서윤은 하하 비웃었다."왜 웃어요?"온하랑은 저 웃음의 의미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내가 웃는 게 뭐? 너 정말 어리석어서 웃음이 다 나오네. 지금 언론과 네티즌들한테도 네가 불륜녀야!"온하랑이 침묵하자 추서윤은 계속 보탰다."이렇게 오래 지났는데도 여전히 오리무중이네. 네가 네 인스타를 보고만 와도 이런소리 못할 텐데."온하랑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요즘 눈앞이 흐릿해 핸드폰을 볼 때 증상이 더 심해져서 거의 보지 않았고 인스타 역시 들어가 보지 않은 지 오래였다.그녀는 요 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불안해 났고 왜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는지 원망도 하다가 부승민이 자신을 속인 건가 의심하기 시작했다."왜? 못 보겠어?"온하랑의 양쪽으로 떨어진 두 손은 꽉 움켜쥐어 손바닥에는 검붉은 자국을 남겼다.그녀는 이건 추서윤이 그녀를 자극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추서윤이 시비를 걸수록 그녀의 뜻대로 흘러가게 가만있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하하, 하랑아, 네가 승민의 아내라고 자신만만해 하면서 이런 용기도 없어? 부승민이 너를 좋아하지는 않는거 너도 잘 알잖아. 봐, 내가 어제 부승민 한테 전화 한 통만 걸어도 할아버지 할머니 앞에 나를 데리고 왔잖아. 너만 아니었으면 부승민은 나와 진작에 결혼했을 거야. 승민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야, 네가 우리 사이에 끼어든 거야.""서윤 씨, 대체 누가 불륜녀인지 저보다 그쪽이 더 잘 알겠죠
온하랑은 온몸이 굳어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혔다. 마음은 칼로 베인 듯 아팠다. 그녀는 단지 이 일을 생각하고 싶지 않아 문제를 의식하지 못한 것처럼 굴었다."승민이가 일부러 너를 속였으니까. 그날 정말 승민이가 별생각 없이 네 핸드폰을 가져간 줄 알았어? 아니, 일부러 그런 거야. 네가 뉴스를 보면 분명 해명할 거라고. 그래서 네 핸드폰을 가져가고 너희 아주머니한테도 입단속을 시켰지."추서윤의 득의양양한 목소리가 지옥의 잔인한 수라처럼 들려왔다."왜 아무도 해명하려 나서지 않는지 맞춰봐. 승민이가 다 차단했거든. 걔가 직접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찾아가 해명할 기회도 모두 짓밟은 건 내가 불륜녀라는 소리를 듣게 하고 싶지 않아서야. 승민이의 마음속에 진정한 아내는 나거든, 제일 사랑하는 사람 역시 나야!""하지만 너는 부승민 마음속에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고 나를 대신해 욕받이가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고 걔 마음속에 제3자야!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제3자인거야!"온하랑의 머리는 어질어질 해났다.그녀는 믿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정신없이 핸드폰을 열어 김시연과의 카카오톡 채팅 기록을 찾았다.여태껏 확인하지 못했던 채팅 기록들을 본 그녀의 마음은 차갑게 식었다.추서윤이 말한 것은 모두 사실이었다.김시연이 보내온 톡이 었다. "하랑 씨, 실검 봤어요? 하랑 씨와 대표님이 파파라치에 찍혔던데요. 제가 두 사람이 그런 관계가 아닌 걸 몰랐다면 보고 바로 믿을 정도던데요."그 톡 밑에는 온하랑의 생소한 답장이 보내져 있었다. "고마워요. 이제 알았으니까 제가 처리할게요."하지만 온하랑은 이 답장이 자신이 보낸 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채팅 기록을 계속 밑으로 밀어내면 다른 친구들에게도 비슷한 답장이 보내져 있었다. 전화 기록을 뒤집어 보니 그날 통화 기록이 몇 개 있었지만 온하랑은 그날 핸드폰을 손에 넣기도 전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전화를 아예 받지 못했다.이것들은 모두 부승민이 대신 처리해 준 것이었다.그는 줄곧 그녀를 속이고
온하랑도 처음에는 할아버지께서 기뻐하실 수만 있다면 같이 연기해 주고 그를 귀찮게 할 생각은 없었다.애초에 희망을 품지 않으면 실망도 없다.온하랑의 반응을 본 추서윤은 기분이 매우 고소했다."하랑아, 이제 알겠지, 승민이의 마음속에서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승민이가 진정으로 마음에 품은 사람은 나야. 지금 할아버지의 건강을 위해 너와 잘 지내보겠다고 약속했어도 결국엔 내 곁으로 돌아올 거야. 네가 승민이를 좋아하는 거 알아. 그럼 나머지 시간 동안 소중히 여겨. 내가 굳이 너와 뺏지는 않을게."온하랑은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고는 말했다. "말 다 하셨어요? 다 말했으면 저는 이만 먼저 가볼게요."온하랑은 추서윤이 그녀보고 실패자라 해도 좋고 무능하다 해도 상관없으니 빨리 이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잠깐만." 추서윤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온하랑은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아!"추서윤의 비명과 함께 그녀는 옆으로 밀려나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부승민은 언제 나타났는지 쏜살같이 달려가 추서윤을 부축하고 관심 어린 눈길로 바라봤다. "서윤아, 괜찮아?"눈앞의 어울리는 두 남녀를 바라보며 온하랑은 속으로 웃음을 참지 못했다.온하랑은 자신이 너무 우스웠다.온하랑은 부승민이 추서윤 한 사람만을 사랑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가 돌아오길 바라고 있었다.그녀는 미친 망상을 하고 있었다!"승민아, 난 괜찮아. 온하랑 탓하지 마, 내가 실수로 넘어진 것 뿐이야."추서윤은 몸을 일으키며 부승민한테 속삭였다.부승민은 온하랑을 냉랭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갑자기 움찔하더니 마음을 가라앉히고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온하랑, 사과해!"그는 정말 편심이 심했다!묻고 따지지도 않고 바로 추서윤에게 사과하라고 했다.온하랑은 입술을 질끈 다물고 부승민을 빤히 쳐다보며 천천히 앞으로 다가갔다.부승민도 온하랑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사과해.""짝--"빰을 때리는 소리가 유독 우렁찼다!추서윤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
온하랑은 천천히 병원을 나와 목적 없이 거리를 걸었다.그녀는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오늘따라 햇살은 쨍쨍했지만 그녀는 춥게 느껴졌다. 가슴속으로부터 냉한이 우러나오고 있었다.온하랑은 핸드폰을 꺼내 인스타 부계정을 등록하고 그날의 자초지종을 뒤졌다.분명 인스타 댓글들이 어떨지 뻔히 알면서도 참지 못하고 봤다. 댓글의 욕설들을 하나하나 뒤져보자 자기 가슴에 칼을 내 꽂고 있었다. 그리고 유튜브와 관련 기사 아래의 댓글 창까지 뒤져본 끝에 그 원인을 알게 됐다.그녀는 논란이 된 민윤커플에 관한 카테고리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두 뒤적였다.부승민이 바람을 피웠다는 뉴스가 나온 뒤 민윤커플 카테고리 내 침묵이 흘렀지만 여전히 많은 팬이 민윤커플을 응원하고 있었다.온하랑 조차도 그 영상들과 사진을 보고는 그 둘이 너무 잘 어울리고 찰떡궁합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부잣집 도련님과 출중한 외모를 지닌 스타의 조합은 천생연분이 따로 없었다.두 사람의 이야기에서 온하랑의 존재감은 온데간데 없었고 그녀는 단지 엑스트라일 뿐이었다. 하느님의 장난인지 온하랑은 나타나지 말아야 할 곳에 나타난 것이다.온하랑은 눈을 질끈 감고 부계정으로 하나의 카테고리를 편집했다. [제3자는 온하랑이 아니라 추서윤이다.]인스타에 편집한 카테고리를 올린 지 불과 몇 초 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다른 카테고리에 의해 밑으로 깔려 버린 것이다.온하랑은 두 눈을 믿을 수 없어 재차 확인했다.이건 부승민이 추서윤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다. 추서윤에 대한 불리한 언론은 절대퍼져 나가지 못하게 손을 쓴 것이다.온하랑은 분에 못 이겨 다시 또 카테고리를 게시했다. [온하랑은 제3자다.]이번에는 인스타에 성공적으로 게시되었다.온하랑은 홈페이지를 오가며 확인한 결과, 이 카테고리는 확실히 게시됐고 사라지지 않았다.심지어 그사이에 어떤 사람은 이 카테고리에 좋아요를 눌렀고 댓글까지 달았다.[맞아. 이 불륜녀는 죽어버려야 해. 온하랑이 절대 아이를 낳지
그녀는 냉랭한 표정으로 더는 그들과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지만 도통 벗어 날 수가 없었다.온하랑은 점점 짜증이 밀려와 끝내는 인내심의 극치에 다다랐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를 보내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즉시 방해죄로 경찰에 신고 할거에요."기자들은 그제야 슬금슬금 물러섰다.병원 부근은 늘 사람들로 붐빈다.기자들이 떠나자 주위의 행인들과 주민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온하랑에게 손가락질을했다.온하랑은 복잡한 마음으로 다시 길을 걸었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마침 버스 한 대가 도착했다. 그녀는 몇 호선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무작정 올라탔다.현대병원 역에서 승객들이 많이 내려 버스는 텅텅 비어 있었다. 온하랑은 맨 뒤 쪽 창가 자리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강남 시는 큰도시로서 요 몇 년 동안 다른 도시에 비해 가장 빠르게 발전했다.병원 부근이 가장 번화해서 식당과 호텔이 곳곳에 널려 있다.행인들은 분주하게 움직였고 어떤 사람들은 다른 병원의 보고서류를 들고 있었다.몇 정거장 지나자 행인이 뜸해졌고 가로변 파란 들판이 눈에 들어왔고 양쪽에는 고층 빌딩이 즐비했다.어느새 재개발 구역에 도착했다.재개발 구역을 지나고 승객들이 잇따라 내리자 버스 안에는 온하랑과 어떤 아주머니 두 명만 남았다."다음 역은 논현역입니다."버스 안은 조용하고 안내방송 소리만 났다.갑자기 핸드폰 벨 소리가 울리자 그 아주머니는 뒤를 돌아보았다.온하랑은 멍해 있다가 뒤늦게 자신의 핸드폰임을 깨닫고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자 핸드폰 화면에 부승민 세글자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온하랑의 엄지손가락은 몇 초간 멈춰 있다가 버튼을 왼쪽으로 당겼다.전화를 끊어버렸다.2초도 지나지 않아 핸드폰 벨 소리가 다시 울렸고 부승민의 전화가 다시 걸려왔다.온하랑은 다시 거절하고 모든 앱을 종료하고 전원을 끄고 가방에 쑤셔 넣었다.그녀의 동작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아주머니는 도시 외곽에 곧 도착하기 전 정류장에서 내렸다.버스가
온하랑은 먼저 휴대폰으로 돈을 지불하고 통화 기록을 누르자 그 안에는 부승민 한테서 온 부재중 전화가 수십 통과 부승민이 보낸 메시지 몇 통이 있었다.그녀는 차례차례 확인했다. [온하랑, 너 어디야? 내가 널 데리러 갈게.][그 기사는 내가 설명할게.][미안해.]그 세 문자를 보고 온하랑은 피식 웃었다.[미안해.]또 미안하다는 말이다.그는 영원히 이 한마디만 할 것이다.미안한 줄 알면서도 계속 미안한 짓을 한다.한참 뒤에 네 번째 문자가 보내져 있었다. [온하랑, 네가 병원 입구에서 한 인터뷰가 악의적으로 편집되어서 내가 이미 손을 써서 기사를 모두 막았어. 너 어디야? 내가 데리러 갈게, 이 문자 보면 연락 줘.”온하랑이 인스타에서 검색하자 과연 자신에 대한 찌라시를 보았고 얼마 전 여러 공식계정에서 게시했다.언론매체에서는 이 찌라시에 [부승민의 바람 상대 온하랑]이라는 별명을 붙였다.온하랑은 어떤 조치가 있었는지 확인을 했다.과연 아무런 조치도 없었다.다만 여러 공식계정과 언론에서는 온하랑의 이런 태도를 보고 그녀가 찔리는 구석이있다고 판단했다. 찌라시 아래에 달린 댓글들은 모두 온하랑에 대한 비난과 외모 평가였다."비록 이 사건에 대해 잘 모르지만 지금 부승민이라는 이 사람은 도대체 뭔 생각이지? 추서윤이 그렇게 예쁜데 불륜녀를 찾으러 가다니. 이 여자는 추서윤과 비길 수도 없는데 말이지.""이건 즉 남자들이 바람 날 때 불륜녀의 외모보다 신선함에 끌린다는 거지.""아내는 첩보다 못하고 첩은 도둑질만 못하다는 말이 있지."한편 이 기간에 유튜브에는 추서윤과 온하랑의 비주얼 믹스컷이 쏟아졌다.가장 많이 재생된 영상 중 하나는 [부승민의 불륜 상대 VS 부승민 결혼 상대]라는 제목이다. 인기에 힘입어 이런 종류의 동영상은 셀 수 없이 많았다.이것들은 모두 중요치 않다.또 다른 인기 검색어는 [BX 그룹 공식계정 ‘좋아요’를 누르다] 였다.클릭 해 보니 누군가가 BX 그룹 공식계정으로 [온하랑은 불륜녀] 라는 게시글에
그때는 어린 마음에 부모님의 무관심이 좋기만 했는데 클수록 오재원은 그게 다 기대가 없어서였다는 걸 깨달아가고 있었다.주위 사람들은 은연중에 자신과 형을 비교하고 있었고 또 어떤 이들은 집안의 무게는 형이 다 짊어지니 마음대로 살 수 있어서 좋겠다며 부러움의 눈길을 보내오기도 했다.모두가 내놓은 자식이라 해서 정말 그렇게 사니 부모님은 또 제대로 하는 일이 없다고 타박했다.그런 사람들 속에서 오직 임연지만이 오재원을 인정해주었다.오재원의 우수함을 발견하지 못한 건 오승은과 오형일이 부모 노릇을 잘 못 했기 때문이라며, 오재원이 이렇게 된 것도 다 책임을 다하지 못한 부모 때문에 엇나간 거라며 그의 마음을 헤아려주었다.노력만 하면 절대 형한테 뒤지지 않을 거라는 그 한마디가 오재원의 가슴을 울렸고 오재원은 그때부터 임연지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오재원도 자신이 형보다 못 한 게 아니라 형이 받았던 교육을 못 받아서 이렇게 된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재원아, 부모님이 반대하시는 결혼생활은 오래갈 수 없는 거야. 넌 아주머니, 아저씨 자식이니까 너를 탓하진 않겠지만 나한테 그 화살이 올 거야. 그러면 날 더 싫어하시겠지.”“나도... 떳떳하게 너랑 결혼하고 싶은데...”임연지가 얼굴까지 붉히며 말하자 오재원은 그녀를 향해 무턱대고 약속부터 했다.“걱정 마 연지야. 내가 부모님 설득해볼게. 네가 내 아이까지 임신했으니까 부모님도 어쩌진 못하실 거야.”“고마워 재원아... 네가 내 옆에 있으니까 너무 든든하다.”오재원은 눈물을 글썽이는 임연지를 꼭 껴안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당연한 일인데 뭐. 넌 나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이니까 내가 너만은 꼭 지킬 거야.”“우리 부모님은 아직 내가 귀국한 거 모르셔. 내일 집에 가서 너랑 결혼하겠다고 말씀드리고 너희 집 가서 의논할 거니까 너도 고모랑 고모부한테 미리 말해놔.”“응. 아주머니, 아저씨랑 싸우지 마.”“알겠어.”...리우그룹 대표 사무실.“나가 봐.”보고도 끝난 마당에 최동철
소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임연지는 이튿날 아침 바로 예쁜 원피스를 입고 청초함이 돋보일 수 있게 화장도 연하게 한 뒤 오재원에게 문자를 보냈다.[재원아, 나 너한테 할 말 있는데 우리 자주 보던 카페에서 볼까?]역시나 문자를 보낸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오재원이 답장을 보내왔다.[알겠어, 바로 갈게.]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던 임연지는 그의 답장에 입꼬리를 올렸다.30분 뒤, 카페에 도착한 오재원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구석에 앉아있는 임연지를 발견하고는 서둘러 그리고 걸음을 옮겼다.어딘가 불안하면서도 초조해 보이는 모습에 오재원은 걱정스레 물었다.“연지야, 왜 그래? 너 무슨 일 있어?”오재원의 목소리에 고개를 든 임연지는 빨개진 눈시울을 하고 천천히 말했다.“재원아, 나... 나 임신 한 것 같아.”“진짜? 연지야, 이거 진짜야?”잠시 당황하던 오재원이 펄쩍 뛰며 좋아하자 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생리가 5일이나 밀려서 아침에 테스트기 해봤는데... 두 줄이더라.”두 줄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오재원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임연지의 손을 맞잡았다.“너무 잘됐다! 우리한테 드디어 아이가 생긴 거잖아!”그에 똑같이 기뻐하며 손을 맞잡던 임연지는 이내 울상을 지었다.너무 기쁜 마음에 임연지의 이마와 볼에 뽀뽀를 하며 희열을 만끽하던 오재원도 그제야 그녀의 굳은 표정을 발견하고 물었다.“연지야, 표정이 왜 그래? 우리한테 아이가 생긴 건데 너는 안 기뻐?”“기쁘지.”임연지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그냥 내가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아서. 감금 피하려고 임신한 애를 미혼모 가정에서 태어나게 하는 게...”“너도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거잖아. 네 탓 아니야. 그리고... 우리가 결혼만 하면 미혼모 가정도 아니잖아. 나랑 결혼하자 연지야.”“싫어.”임연지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오재원을 외면했다.“왜 싫은데?”임연지가 침묵만 유지하자 조급해 난 오재원은 자리까지 옮기며 물었다.“연지야,
한진이 답장을 하지 않아도 임연지는 혼자서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었다.설윤과 최씨 집안의 원한 관계를 짤막하게 설명해준 임연지는 설윤에게 파렴치하고 가증스럽다는 수식어를 갖다 붙였다.[나 그 여자가 우리 집에 들어오는 꼴 못 보겠어. 무슨 방법 없을까?]계속 답장이 없는 한진에 임연지는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고 그녀가 머리까지 다 말리고 나니 한진이 그제야 답장을 보내왔다.[네 고모가 이런 수모를 당한 게 아무래도 집안에서 발언권이 너무 없어서 그런 것 같아. 사촌 동생도 많이 어리니까 더 그렇지.][그럼 어떻게 해야 발언권이 좀 생길까?][옛날 역사를 보면 말이야 그때도 과거제도가 있었거든. 뭐 정시, 별시, 식년 아무튼 어마어마하게 많았는데 그때도 힘 있는 사람들이 좋은 자리는 다 꿰찼었어. 왕조가 망해도 권세가들은 그 부귀영화를 계속 이어갔지. 그런 집안들이 좀 되는데 나열하자면 많아.][...][그런 권세가들이 세력이 전부 다 조상들 덕분만은 아니거든. 중요한 건 혼인이야. 지금으로 말하면 정략결혼을 해서 자신들의 세력을 늘려나간 거지.][결혼을 시키라고? 그러기엔 동림이가 너무 어리잖아. 그리고 걔 결혼문제는 고모부가 나설 텐데 고모가 어떻게 끼어들어.][너 바보냐? 너 말하는 거잖아 너!][나?][그래.][그런데... 내 상황을 네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누가 나랑 결혼을 하고 싶어 하겠어?][오재원 있잖아. 너만 바라보는 놈.][!]생각해보니 오재원이라는 좋은 신랑감이 있긴 했다.한진의 말대로 오재원을 휘어잡다 보니 그는 이미 임연지 말에 따라 움직이는 개가 되어있었다.하지만 그럼에도 걸림돌은 있기 마련이었다.[그런데 그 집에서 나 별로 안 좋아하는데.][그게 무슨 상관이야. 오재원이 너 아니면 죽는다는데.][네가 오씨 집안 사람이 돼서 고모 도와주면 고모부도 이런 일로 이혼하자고 하지는 못할걸.][그리고 정말 백만 번 양보해서 이혼한다고 해도 넌 오씨 집안 사람이니까 당당하게 네 동생 만나러 갈 수 있는 거잖아
“...”최동철이 생각보다 쉽게 동의하자 최국환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경계했다.“나중에 말 바꾸지 마.”“당연하죠. 설윤 씨 배속에... 제 동생이 있는 건데.”“다른 하실 말씀 없으시면 전 먼저 나가볼게요.”웃으며 방을 나선 최동철은 문을 닫자마자 미소를 싹 지웠다.이어서 그가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넓은 복도에 울려 퍼졌다.임가희도 없는 거실을 지나 최동철은 밖으로 나갔다.시원한 밤바람을 맞으며 차에 탄 그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특유의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설윤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봐.”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대답에 핸드폰을 내려놓을 때 어두운 상사의 표정에 안절부절못하던 기사가 조심스레 물어왔다.“저택으로 모실까요 대표님?”“네.”...최씨 집안 방.임연지는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로 임가희를 향해 짜증을 부렸다.“고모, 진짜 그년 집에 들일 거예요?”“응.”“하지만!”이미 모든 걸 받아들인 임가희는 체념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임연지는 그 더러운 내연녀의 얼굴을 집안에서까지 보고 싶지는 않았다.파렴치하게 최씨 집안에 들어오는 것도 모자라서 자신의 고모가 상간녀가 남편의 자식을 낳는 것까지 지켜봐야 한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더 이상 방법이 없어 연지야.”“일을 좀 더 철저하게 못 한 내 잘못이지. 내가 설윤 그 년한테 도망갈 기회를 준 거야.”임연지는 한숨만 푹푹 내쉬는 고모를 보며 조급해서 발을 동동 굴렀다.“그 여자가 집으로 들어오면 너도 괜히 시비 걸지 마.”짜증 난다는 듯 대충 대답하던 임연지는 갑자기 무슨 수가 떠오른 듯 눈을 반짝였다.“고모, 일단 집에 들이고 그다음에 다시 처리...”“아니, 난 이제 아무 짓도 안 할 거야.”임가희는 임연지의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답했다.“그럼 진짜 그 년이 아이를 낳는 걸 지켜보겠다는 거예요?”“애 낳아봤자 재산 조금 받는 것뿐이야. 그런데 난 이혼하면 아무것도 못 가지는 거잖아.”아직 어린 동림이를 두고 이혼한다면 최씨 집
최동철은 차분한 표정으로 무릎에 올린 손가락을 움직였다.“네. 얼마 전에 경주 떴다고 알고 있습니다.”‘어디 보기만 했을까, 잠도 잤는데.’“가희가 연지 데리고 사과하러 갔는데 설윤이 거절하고 가희를 다치게 했대. 그리고 그 책임을 물을까 봐 도망갔다던데 그때는 가희 몸에 상처도 나 있어서 그 말을 믿었거든.”여기까지는 최동철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그래서...”“그런데 오늘 설윤이가 초라한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난 거야. 알아보니까 설윤이 임신 사실을 가희가 받아들이지 못해서 내쫓은 거더라고.”최국환의 말을 듣다 보니 혼란스러워진 최동철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설윤... 설윤 씨가 혼자 경주로 돌아왔다고요?”임가희한테 쫓겨나기 전에 임신을 했다는 것 못지않게 다움시에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것도 놀라웠다.하지만 최국환은 설윤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최동철의 표정 변화를 알아채지 못하고 말을 이어나갔다.“응... 회사 주위를 맴돌다가 직원한테 발견된 거야. 울면서 그동안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 알려주는데 얼마나 짠하던지. 애도 유산될뻔했대.”그 말에 최동철은 입꼬리를 올렸다.돌아오기 전에 최동철이 같이 가겠냐고 물었을 때도 거절하던 설윤이었다.다움시에서 다른 사람의 신분으로 인터넷쇼핑까지 하던 사람이 힘들게 살았다니.최동철도 떠나기 전 설윤에게 몇억을 주고 왔었는데 수중에 돈이 남으면 남았지 모자랄 리는 없었을 것이다.자신의 제안을 거절하고 노인네에게 달라붙은 것도, 아이를 잃을뻔했다는 거짓말을 하는 것도 모두 우스워서 최동철은 냉소를 흘렸다.매일 밤 잠자리를 가질 때는 신경도 안 쓰던 아이가 갑자기 아쉬워진 건가.아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게 낯부끄러웠던 최국환은 그만 말을 멈추었다.“가희가 잘못했다고 하면서 설윤이 다시 데려오겠대. 아이 낳을 때까지 잘 보살펴주겠다고 해서 나도 동의했고.”이익을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재벌가에서 첩을 들이는 건 그리 큰일이 아니었다.어떤 본처는 첩을 데리고 쇼핑도 하면서 아이
최동철은 사색에 잠긴 듯 한동안 임가희를 바라보았다.빨갛게 부어오른 눈과 눈물이 말라붙은 볼 때문에 사람이 유독 초췌해 보였다.설윤을 쫓아낸 일이 들통난 건지 임가희는 최국환 앞에서 고개도 못 들고 있었다.“넌 서재로 가 있어.”“... 제가 들으면 안 될 얘기라도 하시게요?”최동철이 못마땅하다는 듯 말하자 최국환의 눈치를 보던 임가희는 이내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불안한 마음을 감추려는 듯 옷자락을 꼭 쥐는 임가희와 똥 씹은 표정을 짓고 있는 최국환을 번갈아 보던 최동철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전 서재에 가 있을게요.”최동철이 계단을 올라가는 소리가 온 거실을 가득 채웠다.천장에 달린 샹들리에가 은은한 빛을 내며 집안의 장식들을 더욱 화려하게 빛냈지만 그럼에도 어두운 분위기는 감춰지지 않았다.최동철을 올려보낸 최국환은 금세 표정을 굳히더니 임가희를 보며 말했다.“당신 입으로 뱉은 말 지켜. 당장 다시 데려와서 치료부터 음식까지 당신이 다 책임져. 가희야, 넌 똑똑하니까 알 거야. 설윤이랑 걔 배 속의 아이가 잘못되면 어떻게 되는지.”임가희는 고분고분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알겠어요. 설윤 씨 아이 낳을 때까지 내가 잘 보살필게요.”설윤이 도망가버린 뒤로 임가희는 겉으로는 평온한 척했지만 사실 매일 밤을 불안 속에서 지새우고 있었다.사람을 시켜 알아보던 설윤의 행적을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됐을 때는 그 불안이 가시가 되어 그녀의 마음을 찌르고 할퀴었었다.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경계심을 내려놓고 있었는데 하필 이때 최국환이 모든 걸 알게 된 것이다.모든 거리의 CCTV, 간하림을 포함한 직원들의 증언 그리고 설윤의 임신 검사결과보고서까지 수많은 증거를 들이미니 임가희도 차마 변명을 할 수가 없었다.최국환 앞에서는 설윤의 존재를 흔쾌히 받아들이는 너그러운 본처 연기를 하며 임연지 더러 사과까지 하게 하고 선물도 전해줬었는데 뒤에서 이런 모진 짓을 했다는 게 들켜버리는 고개를 들기도 힘들었다.임신 사실을 뻔히 알
“알겠어요.” 부시아는 마지못해 대답했다.연도진은 부시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표정을 보자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병원 병실.연도진이 부시아를 데리고 도착했을 때 이엘리아는 저녁을 먹고 있었다.“오빠.” 이엘리아는 연도진 뒤에 서 있는 부시아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시아 왔구나. 엄마한테 와 봐.”부시아는 다가가서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삼촌이 말한 대로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들었는데 몸은 괜찮아요?”“천천히 회복 중이야.”“그렇군요.” 부시아는 고개를 돌려 연도진을 보며 기지개를 켰다. “삼촌, 저 하루 종일 비행기만 타고 있었더니 너무 피곤해요. 이제 집에 가요.”이엘리아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연도진은 이엘리아를 보고 조용히 말했다. “그럼 시아 데리고 먼저 갈게.”두 사람이 떠나는 뒷모습을 지켜보던 이엘리아의 눈빛 속에는 어딘지 모를 음산한 기운이 스쳤다.경주. 밤이 깊어가며 화려한 불빛들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거리에는 차들이 끊임없이 지나가고 네온사인 불빛이 창문에 비쳐 그 빛과 그림자가 뒤엉켰다.최동철은 하루의 바쁜 일정을 마친 뒤 차 뒷좌석에 앉아 피곤에 지쳐 좌석에 몸을 맡기며 눈을 감고 있었다.기사는 익숙하게 차를 시동 걸고 천천히 차들 사이로 움직였다.최동철은 이마를 문지르며 눈을 비비고 무심코 창밖을 훑어보다가 갑자기 익숙한 인물을 보았다그 인물은 바로 한 여인이었고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긴 머리를 풀어놓은 채 거리를 걷고 있었다.최동철은 본능적으로 몸을 바로 세운 뒤 그 방향을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그러나 그 여자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그는 몇 초간 멍하니 있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너무 피곤해서 헛것을 본 걸까?’‘설윤 씨가 여기 있을 리 없잖아.’그는 다시 좌석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그럼에도 머릿속엔 설윤의 얼굴과 민박집에서 일어난 일들이 떠올랐다.다움시에서 돌아온 이후 두 사람은 더
필라시 국제공항.공항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방송에서는 항공편 정보가 반복적으로 흘러나왔다.연도진은 도착 대기 구역에서 사람들 속을 살피며 부승민과 부시아를 찾고 있었다.그는 잘 맞춘 짙은 색 정장을 입고 차분한 표정으로 가끔씩 시계를 확인하며 여유 있게 서 있었다.잠시 후, 부승민이 짐 수레를 밀고 통로를 지나 나오고 부시아는 짐 수레 위에 앉아 손에 봉제 인형을 안고 신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어린 소녀는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두 개의 작은 땋은 머리를 한 채로 발랄하고 귀여운 모습이었다.“삼촌!” 부시아는 멀리서 연도진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짐 수레에서 뛰어내리며 작은 발걸음으로 달려왔다.연도진은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벌려 아이를 맞아 안았다. 드물게 부드러운 미소가 얼굴에 떠올랐다. “시아야, 돌아온 거 환영해.”부시아는 연도진의 품에 안겨 목을 감싸며 맑고 귀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삼촌, 정말 보고 싶었어요.”부승민은 부시아를 보고 잠시 말없이 눈을 가늘게 뜨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녀석, 사람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네.’부시아는 혀를 내밀고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연도진은 부드럽게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삼촌도 너 정말 보고 싶었어. 이번에 삼촌이랑 많이 놀자.”부승민은 짐 수레를 밀고 다가오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연도진 씨, 오랜만입니다.” 연도진은 일어난 후 부승민과 악수를 나누며 차분하면서도 예의를 갖춘 목소리로 말했다. “부 대표님, 시아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별 말씀을요.” 연도진은 눈길을 부시아에게 돌리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물었다. “시아야, 피곤하지 않아?” 부시아는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 “안 피곤해요. 비행기에서 만화도 보고 잠도 자고 왔어요.” 연도진은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부승민에게 말했다. “이엘리아가 며칠 전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아직 병원에 있어요. 시아를 데리고 이엘리아를 보러 갈 생각인데 같이 가실래요? 그
이엘리아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무심한 듯 말했다. “엘리샤, 우리 집에서 일한 지 얼마나 됐지?” 엘리샤는 잠시 생각하더니 조용히 대답했다. “벌써 6년이 되었어요. 아가씨.” “6년이라...”이엘리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감탄했다. “시간 참 빠르네. 처음 왔을 때는 수줍음 많던 소녀였는데 이제는 제법 어른스러워졌구나.” 엘리샤는 감사의 마음이 묻어나는 미소를 지었다. “과찬이십니다. 아가씨.” “고마워할 것까진 없어. 넌 요 며칠 동안 날 성심껏 돌봐줬잖아. 그 보답으로 네게 아파트 한 채를 선물하려고 해.” 엘리샤는 순간 귀를 의심한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정... 정말인가요?” “물론이지. 아치 거리 쪽에 있는 곳이야. 내가 아직 병원에 있어서 당장 처리하긴 어렵지만 퇴원하면 함께 소유권 이전을 하러 가자.” 이엘리아는 엘리샤의 놀란 표정을 보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게 흘러나왔지만 그 속에는 의심의 여지 없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너는 우리 집을 위해 정말 많은 걸 해줬어. 이건 당연히 네가 받을 자격이 있는 보상이야.” 엘리샤는 감정이 북받쳐 올라 목소리가 떨리며 말했다. “아가씨... 너무 과분한 선물이에요. 어떻게 받아야 할지...”이엘리아는 부드럽게 손을 흔들며 안심시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담 갖지 마. 내겐 그저 작은 선물일 뿐이지만 네겐 새로운 시작이 될 수도 있잖아. 난 늘 너한테 감사하고 있었어.” 엘리샤는 두 손을 꼭 모으며 감정이 북받친 듯 말했다. “아가씨,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일해서 아가씨의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이엘리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넌 똑똑한 아이야. 난 항상 널 높이 평가해왔어. 앞으로도 내 곁에서 충성심을 잃지 않는다면 더 큰 보상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엘리샤는 감동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가씨, 평생 윌슨 가문을 위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