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야.”온하랑은 미소를 띤 채 허리를 굽혀 부시아를 안았다, 그리고 애틋하게 시아의 볼을 꼬집으면서 물었다.“강남에는 무슨 일로 왔어?”부시아는 온하랑의 얼굴에 뽀뽀를 쪽 하고 턱을 세우고 말했다.“저 방학했어요. 할머니가 일이 있으셔서 저 못 돌보신대요.”부시아는 손에 들린 투명한 상자를 온하랑에게 건넸다.“숙모, 이건 숙모한테 주는 선물이에요.”부시아의 포도알 같은 눈은 테이블 밑에 숨은 송이를 떠올리게 해 온하랑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었다.“선물 고마워, 시아야. 숙모랑 올라가서 놀까?”왜인지는 몰라도 부시아를 대할 때 말 못할 친근감이 느껴졌다. 만약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있었다면 시아처럼 귀엽지 않았을까?부시아는 고개를 강하게 끄덕이며 말했다.“네!”“가자, 가서 놀자.”온하랑은 부시아의 손을 잡고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부승민은 자신이 먼지만도 못한 취급을 받은 거에 머쓱해져 코를 만지며 뒤에서 묵묵히 따라 들어갔다. 온하랑이 두 발짝 걷고 제자리에 멈춰서고는 고개를 돌려 부승민을 바라봤다. 부승민도 우뚝 멈춰 섰고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온하랑은 머리를 숙여 부시아한테 말했다.“시아야, 오늘은 하루 종일 숙모랑 놀까?”부시아는 부승민을 곁눈질하더니 두 식지의 끝을 부딪치며 말했다.“삼촌이랑도 놀면 안 돼요? 시아는 삼촌이랑 숙모랑 다 같이 놀고 싶어요.”부승민은 고개를 들어 기대가 가득 담긴 눈으로 온하랑을 쳐다봤다.“하랑아...”온하랑은 허리를 굽히고 부시아한테 해석했다.“시아야, 삼촌이랑 숙모는 이미 이혼했어. 삼촌은 이후에 자기만의 가정이 있게 될 거야. 그래서 삼촌은 숙모랑 같이 있으면 안 돼. 안 그러면 시아 새 숙모가 기분이 안 좋을 거야.”부승민이 뭔가를 설명하려는 때 온하랑이 그를 째려봤다. 그런데 누가 부시아가 이런 말을 할 줄 알았겠는가.“삼촌, 진짜 새 숙모 데려올 거예요? 숙모는 삼촌이 애지중지 여기는 귀염둥이고 삼촌은 평생 숙모 한 사람만 좋아할 거라면서요? 다 거짓말이었네
“삼촌이 말해줬는데 숙모네 집에 고양이가 있다면서요? 저도 고양이 좋아해요!”“고양이가 있긴 한데 지금 링웜에 감염됐어. 사람한테도 전염될 수 있거든. 시아는 아직 너무 어리니까 고양이와 닿으면 감염될 수 있어.”“링웜이 뭔데요?”여자아이는 실망이 가득한 얼굴로 의아해서 물었다.“그건 말이지. 피부병의 일종이야.”온하랑은 휴대폰을 열어 인터넷에서 링웜 사진을 검색해 부시아에게 보여줬다.“이거 봐. 이게 바로 링웜이야.”면역력이 강한 어른이라면 전염될 확률이 낮지만, 부시아는 아직 너무 어린아이인지라 온하랑은 괜한 모험을 하고 싶지 않았다.링웜이 아무리 치료 가능한 피부 질병이라고는 하지만 부시아가 자기 아이도 아닌데 만약 링웜에 감염되기라도 한다면 부선월의 질책을 피할 수 없었다. 링웜에 감염된 고양이 사진을 본 어린아이는 오만상을 쓰며 말했다.“윽, 너무 징그러워요. 나을 수는 있어요?”“그렇긴 한데 발진 부위가 조금 간지러울 거야”그 말을 들은 부시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가락을 입에 물고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그래도 고양이와 놀고 싶은데 어쩌면 좋죠?”온하랑은 빙긋 웃었다.“그럼 놀면 되지. 놀고 나서 목욕하고 소독하면 아마 괜찮을 거야.”부시아는 건강한 아이라 어쩌면 링웜에 감염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부시아는 온하랑의 말을 듣고 두 눈이 반짝 빛났다.“좋아요!”부시아를 데리고 엘리베이터에 오른 온하랑은 버튼을 눌렀다. 아파트는 제일 위층에 근접해 있었고, 층수가 매우 높았다. 수다쟁이 꼬마는 신나서 떠들었다.“와, 숙모네 집 엄청나게 높아요.”잠시 고민하던 온하랑이 부시아에게 일러줬다.“시아야, 삼촌이랑 난 이미 이혼했거든. 그러니까 앞으로는 숙모 말고 고모라고 부를래?”부시아는 어리둥절해서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고모요?”“그래.”“그럼 앞으로 저한테 고모부가 생기나요?”꼬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이 꼬마는 지나치게 조숙했다.“음... 그건 아직 확실하지 않아.”온하랑이 말했다.
온하랑은 부시아가 실망하는 모습을 보며 위로했다.“너를 처음 봐서 낯설어서 그러는 거야. 앞으로 자주 놀러 오면 괜찮아질 거야.”부시아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내일도 송이 보러 올래요.”두 사람은 방에서 한참 동안 고양이와 놀다가 온하랑이 제의했다.“시아야, 너 강남에 처음 왔으니까 아직 시내를 못 돌아봤지? 같이 밖에 나가 놀까? 마침 어제 새로 산 카메라도 왔거든.”부시아가 대답하자 온하랑은 차 키를 들고 부시아와 함께 집을 나섰다. 강남은 제의도의 가장 큰 도시이자 정치 및 경제 중심지이며 관광업도 발전해 있고, 전국적으로 유명한 관광지가 몇 군데 있었다. 그래서 휴가철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온하랑은 부시아를 데리고 차를 운전해 강남의 두 명소로 가서 많은 사진을 찍고 주변을 둘러보았다.부시아는 신나서 할머니와 친구들에게 선물할 기념품을 한가득 샀다. 점심이 되자 온하랑은 부시아를 데리고 명소 근처의 맛집을 찾아가 식사했다.두 사람은 바깥 풍경을 볼 수 있는 창가 쪽 자리를 찾아 앉았다. 의자가 높아서 온하랑은 부시아를 안아 자리에 앉혀줬다. 꼬마 아이의 짧은 다리는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앞뒤로 흔들리고 있었다.온하랑은 아이를 쉽게 돌보기 위해 옆에 가서 앉아 먹고 싶은 음식에 대해 물은 뒤 몇 가지를 주문했다.로스앤에 있을 때 부시아는 코리아타운에 살았던지라 한식을 먹는 것에 익숙했다. 하지만 해외라 한식 종류가 국내처럼 다양하지는 않았다.점심 식사 때 부시아는 드디어 맛있는 음식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군침을 삼키는 천진한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선 볼에 잔뜩 묻히며 냠냠 맛있게 먹었다.다 먹고 나서 온하랑은 부시아를 데리고 화장실에 가서 얼굴을 씻겨주고 자리로 돌아와 옆에 꼭 붙어 앉아 휴식을 취하며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을 보았다.이때 온하랑이 테이블에 올려둔 휴대폰 화면이 밝아지더니 카톡 문자가 들어왔다. 온하랑이 들여다보니 민지훈에게서 온 문자였다.[누나, 점심 드셨어요?]이윽고 그는 또 한 장의
부시아의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온하랑은 디저트를 주문하고 계속 부시아와 함께 사진을 보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휴대폰을 테이블에 올려둔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카톡 알림음과 함께 화면이 다시 밝아졌다. 보나 마나 또 민지훈이 보낸 문자라고 단정한 그녀는 못 들은 척하며 카메라를 들었다. 그러자 부시아가 의아해서 물었다.“숙모, 문자 왔는데 왜 안 봐요?”온하랑은 무심히 대답했다.“중요한 문자가 아니라서 괜찮아.”“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요?”“...”이 꼬마는 왜 이렇게 똑똑할까?!맛있는 디저트로도 입을 막을 수 없다니!“저에게 보여주기 싫어서 그래요?”부시아는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숙모는 제가 꼬마라서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죠. 사실 저 다 알거든요. 민지훈이라는 사람 제 고모부가 되고 싶어서 그런다는 거...”“고모는 시아가 볼까 봐 그러는 게 아니라, 진짜 중요하지 않은 문자라서 그러는 거야.”“그러다 다른 사람이면 어떡해요?”“...”온하랑은 하는 수 없이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민지훈이 보낸 문자였다.[누나한테 식사를 대접하고 싶은데 요즘 시간 있어요?]혹시라도 온하랑이 거절할까 봐 민지훈은 얼른 한마디를 더 보냈다.[이제 막 인턴십을 시작해서 모르는 것도 너무 많아서요. 누나가 전에 BX 그룹 직원이었으니까, 누나한테서 이것저것 조언을 구하고 싶어요.]“이 사람 고모랑 밥 먹자고 하네요.”“그래.”온하랑은 이내 휴대폰 화면을 꺼버렸다.“회답 안 해요?”“안 해도 돼.”“알았다. 숙모는 이 사람 안 좋아하는 거 맞죠! 저도 안 좋아해요!”“넌 왜 안 좋아하는데?”부시아는 두 손가락을 맞대더니 냉큼 온하랑의 팔을 끌어안고 칭얼거렸다.“이 사람 삼촌한테서 숙모 뺏으려고 하잖아요! 전 숙모가 좋아요. 계속 제 숙모였으면 좋겠어요.”“시아가 좋으면 그냥 고모 하면 되지 굳이 숙모일 필요는 없잖아. 이미 삼촌이랑은 이혼했고, 이건 평생 돌이킬 수 없는 일이야. 더 이상 숙모가 될 수
부시아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이제 고작 하루밖에 안 됐는데 만약 부승민을 위해서 더 많이 말했다가는 온하랑의 의심을 살 게 뻔했다.“그럼 됐잖아. 이제 이 이야기는 그만하고 같이 사진이나 고를 까? 네가 돌아갈 때 고모가 앨범 하나 만들어 줄게.”“고마워요, 숙모.”부시아는 온하랑의 볼에 쪽쪽 뽀뽀했다.“...”호칭을 여러 번 고쳐줬지만 부시아가 여전히 숙모라고 불러서 온하랑은 이미 포기한 상태였고, 이제 그냥 내버려두기로 생각하는 그녀였다.음식점에서 나오자 부시아는 조금 졸려 보였다. 온하랑은 아이를 데리고 집에 와서 낮잠을 좀 자다가 다시 강남을 돌아다녔다.저녁 5시쯤이 되니 하늘이 차츰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온하랑은 부시아를 데리고 생선구이 전문점에 밥먹으러 왔다. 주문을 마치자마자 부시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숙모, 저 화장실 다녀올게요.”“숙모랑 같이 가자.”“괜찮아요. 저 들어올 때 저기 화장실이 있는 걸 봤어요.”부시아는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그래, 그럼 혼자 갔다 와.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부르고.”이 음식점은 쇼핑센터 안에 있지 않았고, 화장실도 실내에 있어 온하랑은 부시아가 혼자 가게 내버려둘 수 있었다.화장실에 간 부시아는 아무 칸에나 들어가 변기 위에 앉아 휴대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했다. 전화가 이내 연결되고 부시아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삼촌, 우리 지금 문화로에 있는 화연정에 있어요. 아직 음식이 오르지 않았어요. 빨리 와요.”온하랑이 음식이 오르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테이블에 놓인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부승민의 이름이 나타났다.“숙모, 삼촌한테서 전화 왔어요.”눈치가 빠른 부시아는 냉큼 휴대폰 화면을 보며 말했다. 온하랑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집이야? 지금 시아 데리러 갈게.”온하랑은 휴대폰을 멀찍이 치우고 옆에 있는 부시아를 보며 물었다.“시아야, 삼촌이 데리러 오겠대. 저녁에 고모랑 돌아갈래? 아니면 밥 먹고 삼촌이랑 돌아갈래?”곰
만약 부시아가 정말 그와 온하랑의 아이라면 얼마나 좋을까.부승민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두 사람이 앉은 테이블로 걸어갔다. 그는 접시에 가득 남아있는 요리를 보며 말했다.“금방 먹기 시작한 거야?”“네, 맞아요.”온하랑이 입을 열기도 전에 부시아가 말했다.“삼촌, 식사했어요? 같이 먹을래요? 이 생선구이 진짜 맛있어요!”부승민은 두 사람 앞에 앉아 온하랑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나 아직 밥 안 먹었는데, 같이 먹어도 돼?”온하랑은 싸늘하게 두 글자를 내뱉었다.“안 돼!”“숙모, 삼촌도 같이 먹어요. 네?”부시아는 온하랑의 팔을 잡고 흔들며 애교를 부렸다. 온하랑은 부승민을 노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술을 꾹 다문 부승민은 온하랑이 아직도 토라져 있는 것을 알고는 스스로 자리에 앉아 종업원을 불러 수저를 부탁하고 온하랑과 부시아가 좋아하는 음식을 더 주문했다.“시아야, 오늘 숙모랑 어디 어디 갔었어?”부승민이 물어오자 부시아는 신나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똑 부러지는 말투가 어찌나 조리 있고 설득력이 넘치는지, 무심코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는 부시아의 목소리에 이끌려 참지 못하고 온하랑에게 말을 건넸다.“저기요, 실례지만 따님이 몇 살이에요? 말을 너무 조리 있게 잘하네요. 우리 애는 이제 초등학교에 갔는데 아직도 말을 잘 못 해서 걱정이에요.”부시아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아주머니, 전 이제 4살이에요.”“뭐 4살밖에 안 됐어?!”그 아주머니는 흠칫 놀라더니 부시아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며 말했다.“아이를 잘 키우셨네요. 똑똑하고 예절도 바르고 너무 귀여워요! 물론 부모님들도 이렇게 미남 미녀시니까, 아이도 예쁠 수밖에 없겠죠!”온하랑은 겸연쩍게 웃었다.“딸이 아니고 조카예요.”그 말을 들은 아주머니는 뜻밖의 대답에 깜짝 놀란 눈치였다.“어머, 미안해요. 아이가 남자 친구랑 정말 많이 닮았네요. 전 두 분 따님인 줄 알았어요!”아주머니는 말하며 온하랑 앞에 있는 부승민을 쳐다보았다. 온하랑은 난처해서
부승민은 곧바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눈썹이 아래로 축 처지고 눈동자는 어둡게 변했다.“그렇게 내가 꼴 보기 싫은 거야?”“제가 대표님을 보고 싶을지 말지는 본인이 더 잘 아시지 않나요?”“...”부승민은 온하랑의 대꾸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는 온하랑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보았다. 결혼 전에 그녀는 항상 그를 예의 바르게 대했고, 결혼 후에는 그의 말이라면 더더욱 따라줬다. 그 결혼 생활을 이어가는 동안 온하랑이 그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평온한 삶을 유지하기를 원했다는 것쯤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아이도 잃고, 이혼도 하고 그녀는 더 이상 그를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온하랑은 부승민의 말을 무시하고 부시아에게 말했다.“시아야, 숙모 먼저 갈게.”“숙모, 저 내일도 숙모랑 놀래요. 그래도 되죠?”입가가 지저분해서 고개를 쳐들고 말똥말똥한 눈을 깜빡이며 말하는 부시아는 마치 작은 얼룩 고양이 같았다. 온하랑은 이성적으로는 부시아와 너무 가깝게 지내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부승민과도 계속 흐지부지 엮이게 될 테니까. 그러나 감정적으로는 부시아를 밀어내려야 밀어낼 수가 없었다. 아마도 아이를 잃은 그녀라서 아이에게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는 원인도 있겠지만, 부시아는 정말이지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웠다.“좋아, 그럼 내일...”“내일 네가 와서 시아를 데려가. 난 일 때문에 데려다주지 못할 거야.”부승민은 갑자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온하랑은 얼굴빛이 가라앉더니 부승민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부시아를 보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시아야, 내일 아침 9시 반에 데리러 갈게.”“좋아요, 숙모. 조심히 가세요.”온하랑은 웃으며 부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래, 내일 봐.”“내일 봐요.”그녀는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 온하랑이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부시아가 고개를 돌리고 부승민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삼촌, 오늘 오전에 잘생긴 아저씨가 숙모랑 밥 먹자고 했어요. 근데 숙모가 대답하지 않았어요.”부승민은 미
[먼저 10년 전에 발생한 납치 사건부터 말씀드리자면 인터넷에 대부분 정보가 지워져 있었습니다. 제가 복구 기술로 뉴스와 게시물을 회복해 보았지만, 여전히 그때 납치 사건에 관한 정보는 그다지 많지 않았어요. 인질이 가정 형편이 평범하지 않은 대학생이라는 점과 성공적으로 구출되었다는 것이 전부였어요. 그리고 누가 그 뉴스 보도를 지웠는지에 대한 제 생각은 인질이 대중들 앞에 노출되는 것을 꺼린 인질의 가족이 유력합니다. 당시 보도에서 언론이 인질의 이름조차 언급하지 않았거든요.]온하랑이 물었다.[납치범들이 몸값을 받았나요? 사건은 해결됐어요?]서우현:[몸값에 관한 건 잘 모르겠지만 범인들은 잡히지 않았어요. 현재 시스템 명단에는 두 명의 지명수배자 정보가 있는데 뭔가 합리적이지 않아요. 왕대운과 같은 업계에 종사한 사람의 정보를 찾아봤는데 이름은 민성주고 왕대운과는 같은 고향 사람입니다. 다만 민성주는 지명수배자 명단에 없어요. 민성주가 10년 전에 해외로 이민했는데 이민 간 시간이 하랑 씨 아버님이 사망한 바로 다음 날입니다. 외모를 대조해 보면 사건 당시 빠뜨린 범인일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제가 민성주의 구체적인 파일을 보내드릴게요. 한 번 보세요.]온하랑:[네, 고마워요.]서우현은 민성주에 관한 파일을 보냈다. 온하랑이 열어보려고 하는데 서우현에게서 또 문자가 왔다.[하지만 민성주는 지명수배자 시스템 명단에 올라와 있지 않아서 그 사람이 왕대운과 관계가 있다고 해도 딱히 뭐라고 정의할 수는 없어요.]민성주는 경찰조사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 아버지의 교통사고가 일반 음주 운전 사고로 분류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온하랑:[그래서 핵심은 여전히 납치 사건에 있단 말씀이죠?]만약 민성주가 납치범이라는 사실만 밝혀낸다면 왕대운과의 관계가 더해져 모든 실마리가 순조롭게 풀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민성주가 당시 납치범 중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한단 말인가?서우현:[맞아요. 다만 이 납치 사건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