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하랑은 실소를 터뜨렸다.‘역시 그렇게 하진 못하는구나. 욕심이 그득그득해서 모든 걸 원하고 있지? 나랑 이혼하고 옛 연인과 재결합은 해야겠고, 또 옛 연인을 위해 총알받이가 되어줄 나도 필요하고.’“오빠도 알겠지만 사람들은 전무인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어. 그래서 퇴사하고 싶은데, 그렇게 해줄 수 있어?”“그건 안 돼. 절대 동의할 수 없어.”부승민이 단호하게 거절했다.온하랑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어차피 부승민과 더 따져도 얻을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알았다.부승민이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건 돈밖에 없었다. 하지만 온하랑은 돈이 필요하지 않았다.그녀는 BX그룹에서 일하는 3년 동안 이미 많은 연봉과 보너스를 벌어들였다.“그냥 끊자. 나 더 할 얘기도 없어. 그럼 이만.”온하랑은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린 후 미련이 전혀 남지 않은 얼굴로 침대에 누워버렸다. 일순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이때 휴대폰이 또다시 울렸다.온하랑이 전화를 받고는 바로 말했다.“나 그만 얘기하고 싶다고 했잖아. 전화하지 마.”“하랑아, 나야.”이주혁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온하랑이 멈칫하더니 스크린을 확인하고는 말했다.“미안, 사람 잘못 알고 받았어.”“알아. 인터넷에 일어난 일들을 봤어. 지금 어때? 괜찮아?”“괜찮아, 내가 뭐 별일이 있겠어. 그냥 욕받이가 된 것뿐인데.”인터넷으로 받은 비난은 그녀에게 상처가 되지 않았다.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할 수 있는 건 부승민 뿐이었다.“괜찮다고 하니까 다행이야. 실검이 점점 내려가고 있어. 아무래도 부 대표님이 사람 시켜 실검을 내린 것 같아.”온하랑이 그 말을 듣더니 물었다.“그 사람이 한 일인 걸 어떻게 알았어?”“실검 한 번 확인해보면 알게 될 거야.”이주혁의 말을 들은 온하랑은 태블릿으로 다시 소셜 미디어 앱을 열었다.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실검 하나를 발견했는데 연관 검색어는 ‘수운성 출연진 첫 공개’였다.그뿐만 아니라 연예인과 작품 캐릭터도 연관검색어로 묶이면서 실검
온하랑은 실검을 체크하면서 이주혁에게 물었다.“이게 바로 네가 며칠 전에 나한테 말했던 그 드라마야?”“맞아, 바로 이거야.”온하랑이 웃으면서 말했다.“정말 축하해. 원하는 역할을 맡게 되어서 정말 좋겠다. 화이팅, 남우 주연상을 기대할게.”이주혁은 호감 이미지였다. 게다가 여러 장르 역할을 시도하고 있어 젊은 남자 배우들 사이에서는 그래도 눈이 많이 가는 편이었다.얼마 전에도 스릴러에서 남자 주연을 맡아 많은 호평을 받았다.“남우 주연상을 좋아해?”“당연하지. 실력파 배우를 안 좋아하는 사람도 있어?”“그렇긴 하네. 그럼 내가 노력해서 남우 주연상을 한 번 노려볼게.”이주혁과 전화를 끊은 후 온하랑은 계속 보이는 대로 기사를 눌렀다.이때, 또 하나의 연관 검색어를 발견하게 되었다. 바로 ‘부승민 추서윤’이었다.온하랑은 대충 그 안에 어떤 내용이 들어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결국 궁금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클릭했다.아니나 다를까, 역시 커플 케미에 관한 얘기가 많았다.팬들은 두 사람의 설레는 포인트를 찾아냈다.수운성은 추서윤이 귀국한 후 여주인공을 맡은 첫 드라마였고, 그 드라마를 투자한 회사가 바로 스타 엔터테인먼트였다. 또 스타 엔터테인먼트는 BX그룹 산하의 자회사였다.스타 엔터테인먼트가 수운성에 투자하고, 또 추서윤이 수운성의 여주인공으로 된 이 두 사건 사이에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건 팬들은 물론 온하랑도 믿지 않을 것이다.이 검색어는 많은 머글들의 관심도 불러일으켰다. 덕분에 두 사람을 응원하는 커플 갤러리 회원 수는 두 배나 늘었다.온하랑은 가슴을 쿡쿡 찌르듯이 아팠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스크롤을 내렸다. 마치 갤러리에 올려진 내용을 모두 확인하려는 듯이 말이다.그녀는 집중한 채로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는데 소매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점점 더 주게 되었다.어떤 네티즌이 부승민과 추서윤을 위한 동영상을 하나 올렸다. 뉴스에 출연한 부승민과 추서윤이 주연한 드라마를 편집해 가사까지 붙여주면 감동적인 스토리
[네, 한 장만 보내주시면 돼요. 첫날에 찍은 거로요.]곧이어 주현은 온하랑에게 사진 한 장을 보냈다.사진작가와 현장에서 유출된 사진 각도는 유난히 달랐는데 포토샵의 보정까지 더해져 오히려 다른 매력이 느껴지기도 했다.온하랑은 사진을 비서에게 보낸 뒤 말했다.“MQ 공식 계정으로 사진 일부분을 캡처해서 올려요. 원본으로 올리진 말고요.”비서는 곧바로 온하랑이 시킨 대로 공식 계정으로 피드를 올렸다.[현장 직찍~ 서윤 언니 너무 예뻐요~]사진과 함께 칭찬하는 글도 같이 말이다.댓글 분위기는 화기애애했고 팬들도 서로 추서윤을 칭찬하기 바빴다.이 일은 이렇게 지나간 듯하다. 다행히도 큰일이 아니라 온하랑에게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온하랑은 발목이 거의 다 나아 수요일부터 회사에 출근하기 시작했다.온하랑이 화장실에서 나온 뒤 엘리베이터를 지날 때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부승민 뒤로 비서들이 엘리베이터에서 우르르 몰려나왔다.연민우는 온하랑을 본 후 바로 인사를 건넸다.“전무님, 안녕하세요.”온하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인사를 하고는 또 부승민에게 인사를 건넸다.“대표님, 방금 돌아오신 거예요?”부승민이 온하랑을 보고는 ‘응’하고 대답했다.“나 그럼 먼저 가서 일 볼게.”점심이 되기 전에 온하랑은 부승민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전화벨 소리를 듣다가 거의 끝날 즈음에야 온하랑은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대표님, 무슨 분부라도 있으십니까?”“점심에 밥 먹을 때 내 사무실로 와.”“나 사내 식당으로 갈 건데요?”“네 것까지 시켰어.”“알겠어요.”점심 12시가 되자마자 자리에 앉아있던 직원들이 벌떡 일어서고는 다함께 사내 식당으로 향했다.밖에 사람이 거의 다 흩어지고서야 온하랑은 사무실에서 나와 곧바로 대표 사무실로 향했다.그녀는 문을 두드리지 않고 바로 문을 밀고 들어갔다.대표 사무실 테이블 위에는 오늘 점심 식사가 가득 놓여 있었다.포장만 봐도 분명 향만루에서 주문한 음식들이었다. 겉모양이 예쁜 데다 향기와
“퇴사는 안 돼.”“퇴사 아니에요.”“그럼 한 번 말해봐.”“내가 원하는 건 앞으로 MQ 브랜드의 대응에 관한 일들은 예전처럼 내가 맡았으면 하는데. 어때요?”부승민은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그녀를 보고는 침묵을 지켰다.온하랑이 씩 웃고는 다시 느긋하게 식사하기 시작했다.“얘기 안 꺼냈던 거로 할게요.”‘이럴 줄 알았어. 나 견제하려고 그 일을 오미연에게 맡긴 거잖아. 나를 전혀 믿지 않는 거네. 그리고 내가 추서윤을 해코지할까 봐 두려워하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다른 요구는 들어줄 수 있어.”“필요 없어요.”부승민은 그녀가 원하는 걸 모두 만족시킬 수 없었다.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부승민이 말했다.“저녁에 할아버지랑 할머니가 본가에 밥 먹으러 오래.”온하랑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아무래도 부승민과 추서윤이 실검에 오른 일 때문에 할아버지가 부승민이 출장에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본가에 부른 듯하다.식사를 마친 후 온하랑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대표님 덕분에 잘 먹었어요.”부승민이 시계를 보며 말했다.“아직 출근까지 시간이 좀 남았으니 내 휴게실에 가서 좀 잘래?”온하랑이 고민하고는 대답했다.“그래요.”다친 발목 때문에 앉는 것보다는 눕는 게 훨씬 편했다.온하랑이 휴게실로 들어갔다.이곳은 안방 못지않게 크고, 없는 물건이 없었다.온하랑은 신발을 벗은 후 침대에 오르고는 이불을 꼭 덮었다.잠깐 눈을 붙이려고 했지만 깜빡 깊은 잠이 들었다.잠에서 깨어난 온하랑은 베개 옆에 있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화면을 눌렀는데 어느덧 오후 3시가 넘었다.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쭉 켜고는 신발을 신고 휴게실을 나섰다.“왜 나 깨우지 않았어...”온하랑은 그제야 연민우도 있다는 걸 발견했다.부승민의 휴게실에서 나오는 온하랑을 보더니 연민우는 애써 고개를 돌리며 아무것도 못 본 척했다.회사에서 그녀와 부승민의 관계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자고로 회사 대표들은 모두 내연녀 하나씩은 데리고
도우미가 다른 반찬을 내왔다.김정숙은 기쁜 마음으로 온하랑과 부승민에게 직접 국을 퍼주며 말했다.“하랑아, 승민아. 많이들 먹어. 이건 할머니가 너희들을 위해 특별히 끓인 거야. 빨리 먹어 봐.”“할머니, 할머니도 빨리 앉아서 드세요.”온하랑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을 때 국에서 느끼한 냄새가 갑자기 훅 올라왔다. 무방비하게 냄새를 들이킨 그녀는 순간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빠르게 달려가더니 헛구역질했다.“하랑아, 왜 그래? 괜찮아?”할머니는 온하랑의 반응을 보더니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어머나! 설마 하랑이 임신한 거야?”하지만 부승민이 침착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니에요. 최근 위가 좋지 않아서 음식을 가리면서 약을 먹고 있어서 그래요.”“그래? 정말이야? 병원에는 가봤고?”김정숙은 그래도 혹시나 해 다시 물었다.“하랑이가 가봤어요.”부승민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김정숙은 그제야 희망의 불씨가 꺼지는 것을 느꼈다.그녀는 약간 한심해하는 눈빛으로 부승민을 흘기며 말했다.“너희는 어쩌면 결혼한 지 3년이 지났는데 아무 소식도 없니. 그렇게 부실해서 어떡해.”“…”부승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온하랑이 입을 헹구고 화장실에서 나오더니 앞에 놓여 있던 국을 멀찍이 밀어 놓았다.“할머니, 정말 죄송해요. 요즘 속이 좋지 않아서 이 냄새만 맡으면 헛구역질이 올라와요. 기껏 해주셨는데 못 먹어서 죄송해요.”그러자 김정숙이 손사래 치며 말했다.“괜찮아, 괜찮아. 몸이 제일 중요하지.”말을 마친 김정숙이 온하랑의 몫이었던 국을 부승민에게 건네주며 말했다.“승민아, 하랑이가 못 마시겠다고 하니 이것까지 네가 다 마시렴.”부승민이 두 그릇 가득 담긴 국을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할머니, 이렇게 많은 양은 다 못 먹을 것 같아요.”“이게 뭐가 많다고 그러니. 왜 못 먹어 남자가 돼서. 그렇게 적게 먹어서 어째. 그러니까 부실하지.”“…”저녁을 다 먹자 시간이 거의 열 시가 되어가고 있었기에 할아버지가 그들에게 자고 갈 것
그러자 온하랑이 방금 자신이 나온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나 다 썼어. 오빠 들어가서 씻어.”부승민은 잠옷을 가지고 욕실로 들어갔고, 안에 들어서자마자 훅 풍겨오는 바디 워시 향을 맡았다.그 향기는 방금 온하랑의 몸에서도 나던 향이었다.향기는 발이라도 달린 듯 부승민의 코끝에 머물다가 그의 신경을 따라 결국 뇌까지 도달했다.부승민의 몸은 이미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워졌고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예전에 온하랑과 보냈던 좋은 시간들이 떠올랐다.한편 온하랑은 침대에 앉아 핸드폰을 보다가 잠들려고 했다.하지만 순간 그녀는 부승민이 화장실에 들어간 지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물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의아한 마음이 들었던 온하랑은 침대에서 내려와 화장실 문 앞에 섰다. 그리고 그녀는 안에서부터 간간이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몇 초의 시간이 흐른 후, 부승민이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눈치챈 온하랑은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재빨리 침대로 다시 뛰어들었다.시간이 조금 지난 후 욕실에서는 그제야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물소리가 멈추더니 부승민이 욕실에서 걸어 나왔다.온하랑은 침대가 한쪽으로 꺼지는 것을 느끼며 빠르게 잠에 빠졌다.늦은밤, 그녀는 갑자기 잠에서 깼고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어디선가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를 들었다.차차 정신이 돌아옴에 따라 온하랑은 숨소리가 꿈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니라 옆에 누워있는 부승민에게서 들려오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온하랑은 달빛에 비친 부승민의 얼굴을 보며 그에게 물었다.“오빠, 자고 있어?”“아니.”부승민이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온하랑이 손을 내밀어 부승민의 이마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그의 이마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 뜨거웠고, 그에 온하랑은 깜짝 놀라며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오빠, 열나?”부승민이 느끼기에 그녀의 손은 가뭄의 단비처럼 차가웠다.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뜨거운 눈으로 그녀를
온하랑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방안은 두 사람의 숨소리만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그러나 온하랑은 아까의 잠기운이 모두 달아나 말똥말똥한 정신으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녀는 부승민이 잠드는 걸 방해할까 봐 꼼짝달싹 못한 채 불편한 자세로 있었다.같은 자세를 유지한 채 시간이 꽤 지나자, 몸이 약간 뻣뻣해진 그녀는 자세를 바꿔 누웠다.그리고 또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 나서 부승민이 낮은 목소리로 기침을 몇 번 하더니 그녀를 조심스레 불렀다.하지만 온하랑이 아무런 대답도 없자 숨을 한번 깊게 들이마신 부승민은 조심스럽게 이불을 들추고 침대에서 내려가더니 다시 욕실로 들어갔다.물소리가 잠시 들리더니 샤워가운을 걸친 부승민이 욕실에서 걸어 나왔다.온하랑이 다시 한번 자세를 바꾸자 부승민이 물었다.“나 때문에 깼어?”그가 침대 곁에 앉으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니.”온하랑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잠이 안 와?”“응.”“그럼 내가 독일어책 읽어 줄까?”“응, 고마워.”부승민은 한국어, 영어, 일본어, 독일어 등 네 가지 언어를 할 줄 알았다.예전에 그녀가 잠들지 못할 때면 그는 종종 독일어책을 읽어 주고는 했다.그녀는 독일어를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가 책을 읽어 주는 부드러운 억양을 들으면 항상 마음이 진정되곤 했다.방 안에는 부승민의 낮고 듣기 좋은 저음이 가득 찼고 온하랑은 머릿속의 잡념을 떨쳐내며 그 목소리에만 집중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규칙적인 호흡 소리가 들려오자 부승민은 책을 읽는 것을 멈추더니 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하랑아?”대답은 없었고, 그녀는 잠이 들었다.부승민은 그녀의 이불을 꼼꼼히 여며주고는 눈을 감으며 잠에 들었다.밤중, 핸드폰이울리자 온하랑은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고 눈을 감은 채 전화를 받았다.“누구세요?”‘뚝-’ 하는 소리와 함께 전화를 건 사람은 한마디 말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온하랑은 그제야 눈을 가늘게 뜨고 핸드폰 화면을 보았고, 그녀가 지금 쥐고 있는 것이 부승
“서윤아, 약속했었잖아, 너랑 같이 있겠다고. 걱정하지 마. 내가 약속을 번복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근데 넌 이미 결혼도 했고 아내도 있잖아. 넌 더 이상 내 사람이 아니야. 넌 날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만약 네가 이미 결혼한 걸 알았다면 너한테 연락하지 않았을 거고 절대 너랑 같이 있지 않았을 거야. 나더러 하랑이 얼굴을 어떻게 보라는 거야.”추서윤이 눈물을 펑펑 흘리며 말했다.“내가 걔한테 몹쓸 짓을 한 거지 너랑은 아무런 상관도 없어. 그리고 이미 그녀와 합의 이혼하기로 했어. 곧 이혼 수속 밟을 거야.”“그러니까 서윤아, 나 한 번만 더 믿어주면 안 돼? 나 정말 약속 지킬게.”“진짜야?”추서윤이 머뭇거리며 물었다.“진짜야.”부승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확실하게 대답하자 추서윤은 부승민의 품 안에 뛰어들며 큰소리로 엉엉 울었다.“승민아, 나 정말 너 없이 살 수 없어. 내가 널 어떻게 떠나. 너 없이 살 바엔 그냥 죽는 게 나아.”부승민은 추서윤을 마주 안고는 그녀의 등을 조심스럽게 토닥이며 위로했다.“부 대표님,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곁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안수빈이 말했다.“뭐죠?”“서윤이 연예인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만약 대표님이 이혼한 사실이 밝혀지게 되면 서윤이는 부부를 갈라놓은 내연녀로 몰려서 앞으로 연예계 생활을 못 할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서윤이의 안전을 보장해 주실 게 아니라면 가까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걱정하지 마세요. 서윤이한테 해가 될 일은 하지 않을 거니까.”부승민이 정중하고도 단호하게 약속했다.“알겠어요, 그러면 안심이 되네요. 예전에 외국에서 서윤이를 처음 만났을 때는 생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모습이었는데, 부 대표님은 아마 모르시겠죠…”그때 추서윤은 우연히 부승민의 목 부근에서 키스 마크 같아 보이는 붉은색 흔적을 발견했다. 순간 그녀의 몸이 굳고 눈빛에는 어두운 기운이 잠깐 스쳐 지나갔다.추서윤은 갑자기 부승민을 힘껏 밀치더니 그 자리에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