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하랑은 아연실색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입만 뻐끔거렸다.그녀는 깊은숨을 들이마셨는데 마음이 괴롭고 씁쓸했다. 이 내기를 할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부승민에게 있어서 추서윤에 비하면 온하랑은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그녀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부승민은 떨어지는 책장 때문에 다칠 수 있는 추서윤을 보호하기 위해 그녀를 밀어낼 수도 있는데 추서윤의 명예를 위해 그녀를 희생시키는 일도 당연히 할 수 있었다.게다가 그녀에게 쏟아진 비난은 오로지 인터넷을 통해 전해 온 것들이었다. 그녀에게는 추호의 물리적인 상처도 주지 않는데 말이다.오미연은 온하랑이 침묵하자 더 건방진 말투로 말했다.“온 전무, 내기할 엄두가 나지 않는 거 아니야?”온하랑은 대답하는 대신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무조건 지는 게임에 굳이 참여할 필요가 없었다.부승민이 이 일에 대해 모른다고 한들 나중에 알게 된다고 해도 그는 오히려 찬성할지도 모른다.하지만 온하랑은 이대로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다.그녀는 반드시 이 일을 통해 누군가가 대가를 치르길 바랐다.스튜디오 책임자가 그녀에게 그날 메이크업 룸에 있었던 CCTV를 보내왔다.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현장 분위기와 추서윤의 행동으로만 봐도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충분히 보아낼 수 있었다.온하랑은 그중 한 장면을 캡처한 후 추서윤 팀 멤버들이 있는 그룹 채팅방에 보냈다. 그리고 추서윤 갤러리에 올라온 오픈 채팅방의 캡처도 추가했다.[지금 SNS에 당장 사과하세요. 아니면 저는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이 캡처를 인터넷에 올릴 거예요. 그때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저도 장담할 수 없어요.”사람들은 모두 침묵을 지켰다.그 누구도 답장한 사람이 없었는데 아무래도 이 일을 위해 책임질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5분 후.온하랑은 그룹 채팅방에 아무도 말이 없자 여러 기자나 유튜버들을 연락하기 시작했다.그녀는 PPL 광고를 맡아본 적이 있었기에 자주 협력하는 유튜버가 있었다.이왕 일이 커진 김에 그녀는 차라
온하랑은 실소를 터뜨렸다.‘역시 그렇게 하진 못하는구나. 욕심이 그득그득해서 모든 걸 원하고 있지? 나랑 이혼하고 옛 연인과 재결합은 해야겠고, 또 옛 연인을 위해 총알받이가 되어줄 나도 필요하고.’“오빠도 알겠지만 사람들은 전무인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어. 그래서 퇴사하고 싶은데, 그렇게 해줄 수 있어?”“그건 안 돼. 절대 동의할 수 없어.”부승민이 단호하게 거절했다.온하랑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어차피 부승민과 더 따져도 얻을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알았다.부승민이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건 돈밖에 없었다. 하지만 온하랑은 돈이 필요하지 않았다.그녀는 BX그룹에서 일하는 3년 동안 이미 많은 연봉과 보너스를 벌어들였다.“그냥 끊자. 나 더 할 얘기도 없어. 그럼 이만.”온하랑은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린 후 미련이 전혀 남지 않은 얼굴로 침대에 누워버렸다. 일순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이때 휴대폰이 또다시 울렸다.온하랑이 전화를 받고는 바로 말했다.“나 그만 얘기하고 싶다고 했잖아. 전화하지 마.”“하랑아, 나야.”이주혁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온하랑이 멈칫하더니 스크린을 확인하고는 말했다.“미안, 사람 잘못 알고 받았어.”“알아. 인터넷에 일어난 일들을 봤어. 지금 어때? 괜찮아?”“괜찮아, 내가 뭐 별일이 있겠어. 그냥 욕받이가 된 것뿐인데.”인터넷으로 받은 비난은 그녀에게 상처가 되지 않았다.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할 수 있는 건 부승민 뿐이었다.“괜찮다고 하니까 다행이야. 실검이 점점 내려가고 있어. 아무래도 부 대표님이 사람 시켜 실검을 내린 것 같아.”온하랑이 그 말을 듣더니 물었다.“그 사람이 한 일인 걸 어떻게 알았어?”“실검 한 번 확인해보면 알게 될 거야.”이주혁의 말을 들은 온하랑은 태블릿으로 다시 소셜 미디어 앱을 열었다.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실검 하나를 발견했는데 연관 검색어는 ‘수운성 출연진 첫 공개’였다.그뿐만 아니라 연예인과 작품 캐릭터도 연관검색어로 묶이면서 실검
온하랑은 실검을 체크하면서 이주혁에게 물었다.“이게 바로 네가 며칠 전에 나한테 말했던 그 드라마야?”“맞아, 바로 이거야.”온하랑이 웃으면서 말했다.“정말 축하해. 원하는 역할을 맡게 되어서 정말 좋겠다. 화이팅, 남우 주연상을 기대할게.”이주혁은 호감 이미지였다. 게다가 여러 장르 역할을 시도하고 있어 젊은 남자 배우들 사이에서는 그래도 눈이 많이 가는 편이었다.얼마 전에도 스릴러에서 남자 주연을 맡아 많은 호평을 받았다.“남우 주연상을 좋아해?”“당연하지. 실력파 배우를 안 좋아하는 사람도 있어?”“그렇긴 하네. 그럼 내가 노력해서 남우 주연상을 한 번 노려볼게.”이주혁과 전화를 끊은 후 온하랑은 계속 보이는 대로 기사를 눌렀다.이때, 또 하나의 연관 검색어를 발견하게 되었다. 바로 ‘부승민 추서윤’이었다.온하랑은 대충 그 안에 어떤 내용이 들어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결국 궁금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클릭했다.아니나 다를까, 역시 커플 케미에 관한 얘기가 많았다.팬들은 두 사람의 설레는 포인트를 찾아냈다.수운성은 추서윤이 귀국한 후 여주인공을 맡은 첫 드라마였고, 그 드라마를 투자한 회사가 바로 스타 엔터테인먼트였다. 또 스타 엔터테인먼트는 BX그룹 산하의 자회사였다.스타 엔터테인먼트가 수운성에 투자하고, 또 추서윤이 수운성의 여주인공으로 된 이 두 사건 사이에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건 팬들은 물론 온하랑도 믿지 않을 것이다.이 검색어는 많은 머글들의 관심도 불러일으켰다. 덕분에 두 사람을 응원하는 커플 갤러리 회원 수는 두 배나 늘었다.온하랑은 가슴을 쿡쿡 찌르듯이 아팠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스크롤을 내렸다. 마치 갤러리에 올려진 내용을 모두 확인하려는 듯이 말이다.그녀는 집중한 채로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는데 소매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점점 더 주게 되었다.어떤 네티즌이 부승민과 추서윤을 위한 동영상을 하나 올렸다. 뉴스에 출연한 부승민과 추서윤이 주연한 드라마를 편집해 가사까지 붙여주면 감동적인 스토리
[네, 한 장만 보내주시면 돼요. 첫날에 찍은 거로요.]곧이어 주현은 온하랑에게 사진 한 장을 보냈다.사진작가와 현장에서 유출된 사진 각도는 유난히 달랐는데 포토샵의 보정까지 더해져 오히려 다른 매력이 느껴지기도 했다.온하랑은 사진을 비서에게 보낸 뒤 말했다.“MQ 공식 계정으로 사진 일부분을 캡처해서 올려요. 원본으로 올리진 말고요.”비서는 곧바로 온하랑이 시킨 대로 공식 계정으로 피드를 올렸다.[현장 직찍~ 서윤 언니 너무 예뻐요~]사진과 함께 칭찬하는 글도 같이 말이다.댓글 분위기는 화기애애했고 팬들도 서로 추서윤을 칭찬하기 바빴다.이 일은 이렇게 지나간 듯하다. 다행히도 큰일이 아니라 온하랑에게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온하랑은 발목이 거의 다 나아 수요일부터 회사에 출근하기 시작했다.온하랑이 화장실에서 나온 뒤 엘리베이터를 지날 때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부승민 뒤로 비서들이 엘리베이터에서 우르르 몰려나왔다.연민우는 온하랑을 본 후 바로 인사를 건넸다.“전무님, 안녕하세요.”온하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인사를 하고는 또 부승민에게 인사를 건넸다.“대표님, 방금 돌아오신 거예요?”부승민이 온하랑을 보고는 ‘응’하고 대답했다.“나 그럼 먼저 가서 일 볼게.”점심이 되기 전에 온하랑은 부승민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전화벨 소리를 듣다가 거의 끝날 즈음에야 온하랑은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대표님, 무슨 분부라도 있으십니까?”“점심에 밥 먹을 때 내 사무실로 와.”“나 사내 식당으로 갈 건데요?”“네 것까지 시켰어.”“알겠어요.”점심 12시가 되자마자 자리에 앉아있던 직원들이 벌떡 일어서고는 다함께 사내 식당으로 향했다.밖에 사람이 거의 다 흩어지고서야 온하랑은 사무실에서 나와 곧바로 대표 사무실로 향했다.그녀는 문을 두드리지 않고 바로 문을 밀고 들어갔다.대표 사무실 테이블 위에는 오늘 점심 식사가 가득 놓여 있었다.포장만 봐도 분명 향만루에서 주문한 음식들이었다. 겉모양이 예쁜 데다 향기와
“퇴사는 안 돼.”“퇴사 아니에요.”“그럼 한 번 말해봐.”“내가 원하는 건 앞으로 MQ 브랜드의 대응에 관한 일들은 예전처럼 내가 맡았으면 하는데. 어때요?”부승민은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그녀를 보고는 침묵을 지켰다.온하랑이 씩 웃고는 다시 느긋하게 식사하기 시작했다.“얘기 안 꺼냈던 거로 할게요.”‘이럴 줄 알았어. 나 견제하려고 그 일을 오미연에게 맡긴 거잖아. 나를 전혀 믿지 않는 거네. 그리고 내가 추서윤을 해코지할까 봐 두려워하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다른 요구는 들어줄 수 있어.”“필요 없어요.”부승민은 그녀가 원하는 걸 모두 만족시킬 수 없었다.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부승민이 말했다.“저녁에 할아버지랑 할머니가 본가에 밥 먹으러 오래.”온하랑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아무래도 부승민과 추서윤이 실검에 오른 일 때문에 할아버지가 부승민이 출장에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본가에 부른 듯하다.식사를 마친 후 온하랑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대표님 덕분에 잘 먹었어요.”부승민이 시계를 보며 말했다.“아직 출근까지 시간이 좀 남았으니 내 휴게실에 가서 좀 잘래?”온하랑이 고민하고는 대답했다.“그래요.”다친 발목 때문에 앉는 것보다는 눕는 게 훨씬 편했다.온하랑이 휴게실로 들어갔다.이곳은 안방 못지않게 크고, 없는 물건이 없었다.온하랑은 신발을 벗은 후 침대에 오르고는 이불을 꼭 덮었다.잠깐 눈을 붙이려고 했지만 깜빡 깊은 잠이 들었다.잠에서 깨어난 온하랑은 베개 옆에 있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화면을 눌렀는데 어느덧 오후 3시가 넘었다.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쭉 켜고는 신발을 신고 휴게실을 나섰다.“왜 나 깨우지 않았어...”온하랑은 그제야 연민우도 있다는 걸 발견했다.부승민의 휴게실에서 나오는 온하랑을 보더니 연민우는 애써 고개를 돌리며 아무것도 못 본 척했다.회사에서 그녀와 부승민의 관계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자고로 회사 대표들은 모두 내연녀 하나씩은 데리고
도우미가 다른 반찬을 내왔다.김정숙은 기쁜 마음으로 온하랑과 부승민에게 직접 국을 퍼주며 말했다.“하랑아, 승민아. 많이들 먹어. 이건 할머니가 너희들을 위해 특별히 끓인 거야. 빨리 먹어 봐.”“할머니, 할머니도 빨리 앉아서 드세요.”온하랑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을 때 국에서 느끼한 냄새가 갑자기 훅 올라왔다. 무방비하게 냄새를 들이킨 그녀는 순간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빠르게 달려가더니 헛구역질했다.“하랑아, 왜 그래? 괜찮아?”할머니는 온하랑의 반응을 보더니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어머나! 설마 하랑이 임신한 거야?”하지만 부승민이 침착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니에요. 최근 위가 좋지 않아서 음식을 가리면서 약을 먹고 있어서 그래요.”“그래? 정말이야? 병원에는 가봤고?”김정숙은 그래도 혹시나 해 다시 물었다.“하랑이가 가봤어요.”부승민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김정숙은 그제야 희망의 불씨가 꺼지는 것을 느꼈다.그녀는 약간 한심해하는 눈빛으로 부승민을 흘기며 말했다.“너희는 어쩌면 결혼한 지 3년이 지났는데 아무 소식도 없니. 그렇게 부실해서 어떡해.”“…”부승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온하랑이 입을 헹구고 화장실에서 나오더니 앞에 놓여 있던 국을 멀찍이 밀어 놓았다.“할머니, 정말 죄송해요. 요즘 속이 좋지 않아서 이 냄새만 맡으면 헛구역질이 올라와요. 기껏 해주셨는데 못 먹어서 죄송해요.”그러자 김정숙이 손사래 치며 말했다.“괜찮아, 괜찮아. 몸이 제일 중요하지.”말을 마친 김정숙이 온하랑의 몫이었던 국을 부승민에게 건네주며 말했다.“승민아, 하랑이가 못 마시겠다고 하니 이것까지 네가 다 마시렴.”부승민이 두 그릇 가득 담긴 국을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할머니, 이렇게 많은 양은 다 못 먹을 것 같아요.”“이게 뭐가 많다고 그러니. 왜 못 먹어 남자가 돼서. 그렇게 적게 먹어서 어째. 그러니까 부실하지.”“…”저녁을 다 먹자 시간이 거의 열 시가 되어가고 있었기에 할아버지가 그들에게 자고 갈 것
그러자 온하랑이 방금 자신이 나온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나 다 썼어. 오빠 들어가서 씻어.”부승민은 잠옷을 가지고 욕실로 들어갔고, 안에 들어서자마자 훅 풍겨오는 바디 워시 향을 맡았다.그 향기는 방금 온하랑의 몸에서도 나던 향이었다.향기는 발이라도 달린 듯 부승민의 코끝에 머물다가 그의 신경을 따라 결국 뇌까지 도달했다.부승민의 몸은 이미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워졌고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예전에 온하랑과 보냈던 좋은 시간들이 떠올랐다.한편 온하랑은 침대에 앉아 핸드폰을 보다가 잠들려고 했다.하지만 순간 그녀는 부승민이 화장실에 들어간 지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물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의아한 마음이 들었던 온하랑은 침대에서 내려와 화장실 문 앞에 섰다. 그리고 그녀는 안에서부터 간간이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몇 초의 시간이 흐른 후, 부승민이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눈치챈 온하랑은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재빨리 침대로 다시 뛰어들었다.시간이 조금 지난 후 욕실에서는 그제야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물소리가 멈추더니 부승민이 욕실에서 걸어 나왔다.온하랑은 침대가 한쪽으로 꺼지는 것을 느끼며 빠르게 잠에 빠졌다.늦은밤, 그녀는 갑자기 잠에서 깼고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어디선가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를 들었다.차차 정신이 돌아옴에 따라 온하랑은 숨소리가 꿈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니라 옆에 누워있는 부승민에게서 들려오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온하랑은 달빛에 비친 부승민의 얼굴을 보며 그에게 물었다.“오빠, 자고 있어?”“아니.”부승민이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온하랑이 손을 내밀어 부승민의 이마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그의 이마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 뜨거웠고, 그에 온하랑은 깜짝 놀라며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오빠, 열나?”부승민이 느끼기에 그녀의 손은 가뭄의 단비처럼 차가웠다.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뜨거운 눈으로 그녀를
온하랑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방안은 두 사람의 숨소리만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그러나 온하랑은 아까의 잠기운이 모두 달아나 말똥말똥한 정신으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녀는 부승민이 잠드는 걸 방해할까 봐 꼼짝달싹 못한 채 불편한 자세로 있었다.같은 자세를 유지한 채 시간이 꽤 지나자, 몸이 약간 뻣뻣해진 그녀는 자세를 바꿔 누웠다.그리고 또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 나서 부승민이 낮은 목소리로 기침을 몇 번 하더니 그녀를 조심스레 불렀다.하지만 온하랑이 아무런 대답도 없자 숨을 한번 깊게 들이마신 부승민은 조심스럽게 이불을 들추고 침대에서 내려가더니 다시 욕실로 들어갔다.물소리가 잠시 들리더니 샤워가운을 걸친 부승민이 욕실에서 걸어 나왔다.온하랑이 다시 한번 자세를 바꾸자 부승민이 물었다.“나 때문에 깼어?”그가 침대 곁에 앉으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니.”온하랑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잠이 안 와?”“응.”“그럼 내가 독일어책 읽어 줄까?”“응, 고마워.”부승민은 한국어, 영어, 일본어, 독일어 등 네 가지 언어를 할 줄 알았다.예전에 그녀가 잠들지 못할 때면 그는 종종 독일어책을 읽어 주고는 했다.그녀는 독일어를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가 책을 읽어 주는 부드러운 억양을 들으면 항상 마음이 진정되곤 했다.방 안에는 부승민의 낮고 듣기 좋은 저음이 가득 찼고 온하랑은 머릿속의 잡념을 떨쳐내며 그 목소리에만 집중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규칙적인 호흡 소리가 들려오자 부승민은 책을 읽는 것을 멈추더니 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하랑아?”대답은 없었고, 그녀는 잠이 들었다.부승민은 그녀의 이불을 꼼꼼히 여며주고는 눈을 감으며 잠에 들었다.밤중, 핸드폰이울리자 온하랑은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고 눈을 감은 채 전화를 받았다.“누구세요?”‘뚝-’ 하는 소리와 함께 전화를 건 사람은 한마디 말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온하랑은 그제야 눈을 가늘게 뜨고 핸드폰 화면을 보았고, 그녀가 지금 쥐고 있는 것이 부승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
부승민은 거칠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니야. 그냥 속이 너무 아파서 네가 보고 싶었어.” “그럼 그냥 나한테 말하면 되잖아. 왜 연 비서를 시켜서 괜히 날 놀라게 하는 건데?” 온하랑은 그를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부승민은 허리에서 찌릿한 전율을 느끼며 전기가 온몸으로 퍼지는 느낌에 낮은 신음을 흘리며 대답할 겨를도 없었다. 온하랑은 손을 빼냈다. 그녀는 손끝에 묻은 뭔가를 보더니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는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부승민은 천장을 보며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불을 걷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왜 따라와?” 온하랑은 그를 힐끔 바라보며 물었다. “샤워하려고.” 부승민은 문틀에 기대어 배시시 웃더니 살짝 낮아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같이 할래?” “혼자 해.” 온하랑은 단호히 거절하며 말했다. “오늘 하루 종일 돌아다녔더니 너무 피곤해. 먼저 잘게.” “그럼 먼저 자.” “응.” 부승민이 샤워를 끝내고 나왔을 때 온하랑은 이미 간병용 침대에 누워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샤워 소리에도 전혀 깨지 않은 걸 보니 오늘 하루 정말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한 말이 부승민의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그는 눈은 가늘게 좁혀졌다. ‘별장에 있지 않고 비서한테 데리러 오라고 했다고?’ ‘정말 단순한 우연일까?’ 경주 국제공항. 임연지는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착용한 채 입구에 서서 사람들 사이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익숙한 실루엣이 보이자 그녀는 두 걸음 앞으로 나가며 손을 흔들었다. “연지야!” 한 키 큰 남성이 캐리어를 들고 마스크를 낀 채 서둘러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나 돌아왔어!” 임연지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주먹으로 치며 말했다. “생각보다 빠르네” “그럼!” 오재원은 웃으며 말했다. “네가 불렀는데 내가 안 올 수 있겠어?” “가자.” “호텔부터 가자.”
따스한 숨결이 천천히 귓불을 감싸더니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녀는 그의 귀에 입김을 불어 넣고 있었다. 부승민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마치 전류가 흐르듯 온몸에 간질간질한 감각이 번졌고 그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열기가 피어올랐다. 그는 목소리가 잠기고 몸은 저릿저릿하게 뜨거워졌다. 어느 한 곳은 이미 솔직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손이 너무 차가워. 부승민, 따뜻하게 해줘.” 그가 대답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그녀의 차가운 손이 이불 속으로 들어오더니 그의 옷 안으로 파고들었다. 셔츠 밑단은 벌써 벨트에서 빠져나왔고 차디찬 손이 뜨겁게 달아오른 그의 허리에 닿았다. 그녀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고 마음의 준비도 했었지만 예상했던 순간에도 그의 몸은 차가운 손길에 본능적으로 굳어졌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오히려 점점 대담해졌다. 차가운 손가락은 그의 복부를 따라 유회하듯 움직이며 탄탄하게 뻗은 근육의 선을 따라 내려갔다. 부승민은 숨을 꾹 참으며 손으로 침대 시트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녀의 행동을 막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그러던 중 그녀의 손끝이 천천히 더 아래로 내려가더니 그의 허리띠 바로 위에 닿았다. 부승민은 몸이 굳어지며 팽팽하게 긴장됐다. ‘만약 더 아래로 손을 내리면 내 변화를 눈치채고 내가 깨어 있다는 걸 알아차릴 텐데.’ 그녀의 손이 허리띠에 막혀 더 이상 내려가지 않았다. 부승민은 속으로 안도했지만 마음속에는 이유 모를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바로 그의 심장은 다시 요동쳤다. 그녀가 허리띠를 풀기 시작했다. ‘뭐 하자는 거지?’ 부승민의 마음 한구석에는 기묘한 기대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허리띠를 찬 채로 자는 건 불편할 거야.” 그녀는 조곤조곤 말하며 허리띠를 빼냈다. 그러다 그녀의 손끝이 그의 민감한 부위에 스쳤다. 부승민은 잠시 숨이 멎을 듯했고 그 순간 그는 목을 꽉 누르며 간신히 신음을 삼켰다. “바지는 벗겨주고 싶지만 네가 너무 무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