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는 안 돼.”“퇴사 아니에요.”“그럼 한 번 말해봐.”“내가 원하는 건 앞으로 MQ 브랜드의 대응에 관한 일들은 예전처럼 내가 맡았으면 하는데. 어때요?”부승민은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그녀를 보고는 침묵을 지켰다.온하랑이 씩 웃고는 다시 느긋하게 식사하기 시작했다.“얘기 안 꺼냈던 거로 할게요.”‘이럴 줄 알았어. 나 견제하려고 그 일을 오미연에게 맡긴 거잖아. 나를 전혀 믿지 않는 거네. 그리고 내가 추서윤을 해코지할까 봐 두려워하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다른 요구는 들어줄 수 있어.”“필요 없어요.”부승민은 그녀가 원하는 걸 모두 만족시킬 수 없었다.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부승민이 말했다.“저녁에 할아버지랑 할머니가 본가에 밥 먹으러 오래.”온하랑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아무래도 부승민과 추서윤이 실검에 오른 일 때문에 할아버지가 부승민이 출장에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본가에 부른 듯하다.식사를 마친 후 온하랑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대표님 덕분에 잘 먹었어요.”부승민이 시계를 보며 말했다.“아직 출근까지 시간이 좀 남았으니 내 휴게실에 가서 좀 잘래?”온하랑이 고민하고는 대답했다.“그래요.”다친 발목 때문에 앉는 것보다는 눕는 게 훨씬 편했다.온하랑이 휴게실로 들어갔다.이곳은 안방 못지않게 크고, 없는 물건이 없었다.온하랑은 신발을 벗은 후 침대에 오르고는 이불을 꼭 덮었다.잠깐 눈을 붙이려고 했지만 깜빡 깊은 잠이 들었다.잠에서 깨어난 온하랑은 베개 옆에 있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화면을 눌렀는데 어느덧 오후 3시가 넘었다.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쭉 켜고는 신발을 신고 휴게실을 나섰다.“왜 나 깨우지 않았어...”온하랑은 그제야 연민우도 있다는 걸 발견했다.부승민의 휴게실에서 나오는 온하랑을 보더니 연민우는 애써 고개를 돌리며 아무것도 못 본 척했다.회사에서 그녀와 부승민의 관계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자고로 회사 대표들은 모두 내연녀 하나씩은 데리고
도우미가 다른 반찬을 내왔다.김정숙은 기쁜 마음으로 온하랑과 부승민에게 직접 국을 퍼주며 말했다.“하랑아, 승민아. 많이들 먹어. 이건 할머니가 너희들을 위해 특별히 끓인 거야. 빨리 먹어 봐.”“할머니, 할머니도 빨리 앉아서 드세요.”온하랑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을 때 국에서 느끼한 냄새가 갑자기 훅 올라왔다. 무방비하게 냄새를 들이킨 그녀는 순간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빠르게 달려가더니 헛구역질했다.“하랑아, 왜 그래? 괜찮아?”할머니는 온하랑의 반응을 보더니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어머나! 설마 하랑이 임신한 거야?”하지만 부승민이 침착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니에요. 최근 위가 좋지 않아서 음식을 가리면서 약을 먹고 있어서 그래요.”“그래? 정말이야? 병원에는 가봤고?”김정숙은 그래도 혹시나 해 다시 물었다.“하랑이가 가봤어요.”부승민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김정숙은 그제야 희망의 불씨가 꺼지는 것을 느꼈다.그녀는 약간 한심해하는 눈빛으로 부승민을 흘기며 말했다.“너희는 어쩌면 결혼한 지 3년이 지났는데 아무 소식도 없니. 그렇게 부실해서 어떡해.”“…”부승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온하랑이 입을 헹구고 화장실에서 나오더니 앞에 놓여 있던 국을 멀찍이 밀어 놓았다.“할머니, 정말 죄송해요. 요즘 속이 좋지 않아서 이 냄새만 맡으면 헛구역질이 올라와요. 기껏 해주셨는데 못 먹어서 죄송해요.”그러자 김정숙이 손사래 치며 말했다.“괜찮아, 괜찮아. 몸이 제일 중요하지.”말을 마친 김정숙이 온하랑의 몫이었던 국을 부승민에게 건네주며 말했다.“승민아, 하랑이가 못 마시겠다고 하니 이것까지 네가 다 마시렴.”부승민이 두 그릇 가득 담긴 국을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할머니, 이렇게 많은 양은 다 못 먹을 것 같아요.”“이게 뭐가 많다고 그러니. 왜 못 먹어 남자가 돼서. 그렇게 적게 먹어서 어째. 그러니까 부실하지.”“…”저녁을 다 먹자 시간이 거의 열 시가 되어가고 있었기에 할아버지가 그들에게 자고 갈 것
그러자 온하랑이 방금 자신이 나온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나 다 썼어. 오빠 들어가서 씻어.”부승민은 잠옷을 가지고 욕실로 들어갔고, 안에 들어서자마자 훅 풍겨오는 바디 워시 향을 맡았다.그 향기는 방금 온하랑의 몸에서도 나던 향이었다.향기는 발이라도 달린 듯 부승민의 코끝에 머물다가 그의 신경을 따라 결국 뇌까지 도달했다.부승민의 몸은 이미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워졌고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예전에 온하랑과 보냈던 좋은 시간들이 떠올랐다.한편 온하랑은 침대에 앉아 핸드폰을 보다가 잠들려고 했다.하지만 순간 그녀는 부승민이 화장실에 들어간 지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물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의아한 마음이 들었던 온하랑은 침대에서 내려와 화장실 문 앞에 섰다. 그리고 그녀는 안에서부터 간간이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몇 초의 시간이 흐른 후, 부승민이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눈치챈 온하랑은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재빨리 침대로 다시 뛰어들었다.시간이 조금 지난 후 욕실에서는 그제야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물소리가 멈추더니 부승민이 욕실에서 걸어 나왔다.온하랑은 침대가 한쪽으로 꺼지는 것을 느끼며 빠르게 잠에 빠졌다.늦은밤, 그녀는 갑자기 잠에서 깼고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어디선가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를 들었다.차차 정신이 돌아옴에 따라 온하랑은 숨소리가 꿈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니라 옆에 누워있는 부승민에게서 들려오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온하랑은 달빛에 비친 부승민의 얼굴을 보며 그에게 물었다.“오빠, 자고 있어?”“아니.”부승민이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온하랑이 손을 내밀어 부승민의 이마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그의 이마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 뜨거웠고, 그에 온하랑은 깜짝 놀라며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오빠, 열나?”부승민이 느끼기에 그녀의 손은 가뭄의 단비처럼 차가웠다.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뜨거운 눈으로 그녀를
온하랑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방안은 두 사람의 숨소리만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그러나 온하랑은 아까의 잠기운이 모두 달아나 말똥말똥한 정신으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녀는 부승민이 잠드는 걸 방해할까 봐 꼼짝달싹 못한 채 불편한 자세로 있었다.같은 자세를 유지한 채 시간이 꽤 지나자, 몸이 약간 뻣뻣해진 그녀는 자세를 바꿔 누웠다.그리고 또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 나서 부승민이 낮은 목소리로 기침을 몇 번 하더니 그녀를 조심스레 불렀다.하지만 온하랑이 아무런 대답도 없자 숨을 한번 깊게 들이마신 부승민은 조심스럽게 이불을 들추고 침대에서 내려가더니 다시 욕실로 들어갔다.물소리가 잠시 들리더니 샤워가운을 걸친 부승민이 욕실에서 걸어 나왔다.온하랑이 다시 한번 자세를 바꾸자 부승민이 물었다.“나 때문에 깼어?”그가 침대 곁에 앉으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니.”온하랑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잠이 안 와?”“응.”“그럼 내가 독일어책 읽어 줄까?”“응, 고마워.”부승민은 한국어, 영어, 일본어, 독일어 등 네 가지 언어를 할 줄 알았다.예전에 그녀가 잠들지 못할 때면 그는 종종 독일어책을 읽어 주고는 했다.그녀는 독일어를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가 책을 읽어 주는 부드러운 억양을 들으면 항상 마음이 진정되곤 했다.방 안에는 부승민의 낮고 듣기 좋은 저음이 가득 찼고 온하랑은 머릿속의 잡념을 떨쳐내며 그 목소리에만 집중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규칙적인 호흡 소리가 들려오자 부승민은 책을 읽는 것을 멈추더니 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하랑아?”대답은 없었고, 그녀는 잠이 들었다.부승민은 그녀의 이불을 꼼꼼히 여며주고는 눈을 감으며 잠에 들었다.밤중, 핸드폰이울리자 온하랑은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고 눈을 감은 채 전화를 받았다.“누구세요?”‘뚝-’ 하는 소리와 함께 전화를 건 사람은 한마디 말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온하랑은 그제야 눈을 가늘게 뜨고 핸드폰 화면을 보았고, 그녀가 지금 쥐고 있는 것이 부승
“서윤아, 약속했었잖아, 너랑 같이 있겠다고. 걱정하지 마. 내가 약속을 번복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근데 넌 이미 결혼도 했고 아내도 있잖아. 넌 더 이상 내 사람이 아니야. 넌 날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만약 네가 이미 결혼한 걸 알았다면 너한테 연락하지 않았을 거고 절대 너랑 같이 있지 않았을 거야. 나더러 하랑이 얼굴을 어떻게 보라는 거야.”추서윤이 눈물을 펑펑 흘리며 말했다.“내가 걔한테 몹쓸 짓을 한 거지 너랑은 아무런 상관도 없어. 그리고 이미 그녀와 합의 이혼하기로 했어. 곧 이혼 수속 밟을 거야.”“그러니까 서윤아, 나 한 번만 더 믿어주면 안 돼? 나 정말 약속 지킬게.”“진짜야?”추서윤이 머뭇거리며 물었다.“진짜야.”부승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확실하게 대답하자 추서윤은 부승민의 품 안에 뛰어들며 큰소리로 엉엉 울었다.“승민아, 나 정말 너 없이 살 수 없어. 내가 널 어떻게 떠나. 너 없이 살 바엔 그냥 죽는 게 나아.”부승민은 추서윤을 마주 안고는 그녀의 등을 조심스럽게 토닥이며 위로했다.“부 대표님,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곁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안수빈이 말했다.“뭐죠?”“서윤이 연예인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만약 대표님이 이혼한 사실이 밝혀지게 되면 서윤이는 부부를 갈라놓은 내연녀로 몰려서 앞으로 연예계 생활을 못 할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서윤이의 안전을 보장해 주실 게 아니라면 가까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걱정하지 마세요. 서윤이한테 해가 될 일은 하지 않을 거니까.”부승민이 정중하고도 단호하게 약속했다.“알겠어요, 그러면 안심이 되네요. 예전에 외국에서 서윤이를 처음 만났을 때는 생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모습이었는데, 부 대표님은 아마 모르시겠죠…”그때 추서윤은 우연히 부승민의 목 부근에서 키스 마크 같아 보이는 붉은색 흔적을 발견했다. 순간 그녀의 몸이 굳고 눈빛에는 어두운 기운이 잠깐 스쳐 지나갔다.추서윤은 갑자기 부승민을 힘껏 밀치더니 그 자리에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긴 아니? 아침도 안 먹고 급하게 나가길래 회사에 가는 줄 알았더니 추서윤을 찾으러 가? 할아버지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지? 3년 내내 하랑이가 너한테 잘못한 게 뭐가 있니.”“끝까지 책임질 생각이 아니라면 애초에 결혼도 하지 말았어야지. 할아버지가 너한테 그 애를 맡긴 건 네가 그 애를 행복하게 해줄 줄 알아서 그랬던 거야. 이제 와서 이러면 내가 무슨 면목으로 하랑이를 보니.”부승민은 잠깐 침묵하는 듯하더니 말했다.“할아버지, 다음에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게 주의하도록 할게요. 하지만 할아버지께서도 다음부터는 저랑 먼저 상의하셨으면 해요.”…늦은 아침, 온하랑이 잠에서 깼고, 저택의 도우미들은 온하랑을 위해 아침밥을 다시 한번 차렸다.그녀가 밥을 다 먹자 시간은 이미 열 시가 넘었고, 지금 출근해봤자 지각할 게 뻔했기에 온하랑은 아예 저택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함께 얘기를 나누다가 점심밥까지 먹었다.온하랑이 떠나려고 할 때 할머니가 초대장을 건네주며 말했다.“이건 오로라 자산 파티의 초대장이야. 내 앞으로 오긴 했지만 나이 든 늙은이가 거기 가서 뭐 하겠니. 그러니 너랑 승민이가 대신 참석해 줘. 승민이한테는 내가 말해 둘게.”온하랑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갖은 방법을 동원해 그녀와 부승민을 연결시켜 주려는 걸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다만 그들이 모르는 게 있다면, 부승민과 온하랑은 이미 이혼합의서에 사인을 했다는 것이었다.“할머니, 근데 저는 이런 파티에 참석해 본 적이 없어서, 혹시라도…”“괜찮아, 승민이가 너랑 같이 갈 거야.”“아무 문제 없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하랑아. 힘내.”할머니가 온하랑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며 부드럽게 다독였다.그 덕분에 온하랑은 용기가 조금이나마 샘솟는 걸 느꼈다.저택을 떠난 온하랑은 바로 회사로 들어갔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사무실로 들어가려고 할 때 복도에서 대표실의 비서를 마주쳤다.비서가 온하랑을 발견하고는 그녀에게 말했다.“전무님, 대표님께서 잠깐
저녁 6시, 퇴근한 온하랑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부승민을 기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부승민이 내려왔고 운전기사가 두 사람을 개인 편집숍으로 모셨다.메이크업과 세팅을 끝내고 안에서 옷을 갈아입은 온하랑이 치마를 살짝 든 채 커튼을 열고 걸어 나왔다.이미 세팅을 끝낸 채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부승민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들었고 그대로 잠깐 굳어 버리고 말았다.화장을 마친 온하랑은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고 그녀의 눈길이 닫는 곳마다 간질거리는 듯했다.아이 메이크업과 같은 계열 색깔의 립스틱을 바른 그녀는 매혹적이고도 우아했다.그녀는 머리에 크게 힘을 주지 않고 평소처럼 풀어 내렸는데 간단한 웨이브를 넣어 얼굴형을 더욱 두드러지게 부각했다.그녀는 일자형 어깨의 하늘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옷 밖으로 드러난 둥근 어깨가 빛을 받아 희고 깨끗하게 빛났다.온하랑이 부승민의 앞으로 걸어가더니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며 그에게 물었다.“어때?”부승민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그녀의 신발을 보며 물었다.“발목 나은 지 얼마 안 됐는데 하이힐 신는 거 불편하지 않아?”“괜찮아.”“그래도 힐 없는 걸로 바꾸자.”온하랑은 배 속의 아이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러자 그럼.”온하랑이 직원을 시켜 드레스와 어울리는 플랫슈즈를 가져오게 했다.그녀가 소파에 앉아 허리를 굽히고 신발을 벗으려고 할 때, 부승민이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더니 말했다.“내가 도와줄게.”그의 큰 손이 온하랑이 발목에 닿더니 그녀의 발에 신겨 있던 하이힐을 하나씩 벗겼다. 그러고는 플랫슈즈를 가져와 조심조심 그녀에게 신겨주었다.온하랑은 그런 그를 묵묵히 바라보았다.그는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로 신발을 신겨 주었다. 진지한 표정과 아름다운 얼굴, 그리고 매끄러운 턱선이 그녀의 뇌리에 깊게 박혔다.신발을 모두 신겨 준 부승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가자.”“나 이번이 처음 가는 거라서, 혹시 알아 둬야 할 규칙 같은 게 있으면 지금 알려 줘.
여자는 그의 발목을 한번 흘깃 쳐다보고는 말도 없이 곁에 앉아서 팔꿈치로 온하랑을 툭툭 치며 물었다.“전 소유진이라고 해요. 그쪽은요?”“온하랑이에요.”소유진은 온하랑 쪽으로 가깝게 몸을 붙이더니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아까 보니까 부승민이랑 같이 들어오던데, 어떻게 꼬신 거예요?”온하랑이 고개를 돌려 소유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소유진은 부티 나게 입고 있었지만 자세히 보면 이미 시즌이 지난 옷이었고, 들고 있는 가방도 잘 알려지지 않은 브랜드의 시즌이 지난 가방이었다.온하랑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소유진이 이어서 말했다.“입고 있는 걸 보니까 부승민이 그쪽한테 돈을 꽤 쓰나 봐요. 부승민같은 부자들은 아무래도 꼬시기 좀 힘들겠죠?”“저는 잘 몰라요.”“에이, 그러지 말고 좀 알려 줘 봐요. 그거 알아요? 제 애인은 너무 쪼잔해서 제가 오랫동안 매달려서야 겨우 저를 오늘 파티에 동행시켜 줬다니까요. 안 그래도 조만간 바꿀 생각이었어요.”“다시 말하지만 저는 몰라요. 꼬신 적 없어요.”온하랑이 술잔과 디저트를 들고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다른 자리를 찾아 다시 앉았다.소유진은 그런 그녀를 보며 흥하고 비웃었다.‘어차피 같은 꽃뱀인데, 혼자 고고한 척하는 거야 뭐야.’파티장 입구에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고 고개를 든 온하랑은 우연히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추서윤, 그녀도 자선 파티에 온 것이었다.“뭐 보고 있어?”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싶더니 이주혁이 온하랑의 곁에 앉았다.정신을 차린 온하랑이 이주혁을 보고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네가 어떻게 여기 있어?”“매니저가 오라고 했어. 근데 너도 여기 있을 줄은 몰랐네. 발 다친 건 어때?”“거의 다 나았어.”“그럼 다행이고. 혼자 온 거야?”“대표님이랑 같이 왔어.”이준혁이 눈썹을 올리며 말했다.“나 아까 추서윤 봤는데, 그래서 그 여자랑 부성민이 같이 온 줄 알았어. 봐봐, 저기 있네.”온하랑은 이주혁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파티장에는 사람이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
부승민은 거칠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니야. 그냥 속이 너무 아파서 네가 보고 싶었어.” “그럼 그냥 나한테 말하면 되잖아. 왜 연 비서를 시켜서 괜히 날 놀라게 하는 건데?” 온하랑은 그를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부승민은 허리에서 찌릿한 전율을 느끼며 전기가 온몸으로 퍼지는 느낌에 낮은 신음을 흘리며 대답할 겨를도 없었다. 온하랑은 손을 빼냈다. 그녀는 손끝에 묻은 뭔가를 보더니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는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부승민은 천장을 보며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불을 걷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왜 따라와?” 온하랑은 그를 힐끔 바라보며 물었다. “샤워하려고.” 부승민은 문틀에 기대어 배시시 웃더니 살짝 낮아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같이 할래?” “혼자 해.” 온하랑은 단호히 거절하며 말했다. “오늘 하루 종일 돌아다녔더니 너무 피곤해. 먼저 잘게.” “그럼 먼저 자.” “응.” 부승민이 샤워를 끝내고 나왔을 때 온하랑은 이미 간병용 침대에 누워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샤워 소리에도 전혀 깨지 않은 걸 보니 오늘 하루 정말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한 말이 부승민의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그는 눈은 가늘게 좁혀졌다. ‘별장에 있지 않고 비서한테 데리러 오라고 했다고?’ ‘정말 단순한 우연일까?’ 경주 국제공항. 임연지는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착용한 채 입구에 서서 사람들 사이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익숙한 실루엣이 보이자 그녀는 두 걸음 앞으로 나가며 손을 흔들었다. “연지야!” 한 키 큰 남성이 캐리어를 들고 마스크를 낀 채 서둘러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나 돌아왔어!” 임연지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주먹으로 치며 말했다. “생각보다 빠르네” “그럼!” 오재원은 웃으며 말했다. “네가 불렀는데 내가 안 올 수 있겠어?” “가자.” “호텔부터 가자.”
따스한 숨결이 천천히 귓불을 감싸더니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녀는 그의 귀에 입김을 불어 넣고 있었다. 부승민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마치 전류가 흐르듯 온몸에 간질간질한 감각이 번졌고 그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열기가 피어올랐다. 그는 목소리가 잠기고 몸은 저릿저릿하게 뜨거워졌다. 어느 한 곳은 이미 솔직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손이 너무 차가워. 부승민, 따뜻하게 해줘.” 그가 대답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그녀의 차가운 손이 이불 속으로 들어오더니 그의 옷 안으로 파고들었다. 셔츠 밑단은 벌써 벨트에서 빠져나왔고 차디찬 손이 뜨겁게 달아오른 그의 허리에 닿았다. 그녀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고 마음의 준비도 했었지만 예상했던 순간에도 그의 몸은 차가운 손길에 본능적으로 굳어졌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오히려 점점 대담해졌다. 차가운 손가락은 그의 복부를 따라 유회하듯 움직이며 탄탄하게 뻗은 근육의 선을 따라 내려갔다. 부승민은 숨을 꾹 참으며 손으로 침대 시트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녀의 행동을 막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그러던 중 그녀의 손끝이 천천히 더 아래로 내려가더니 그의 허리띠 바로 위에 닿았다. 부승민은 몸이 굳어지며 팽팽하게 긴장됐다. ‘만약 더 아래로 손을 내리면 내 변화를 눈치채고 내가 깨어 있다는 걸 알아차릴 텐데.’ 그녀의 손이 허리띠에 막혀 더 이상 내려가지 않았다. 부승민은 속으로 안도했지만 마음속에는 이유 모를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바로 그의 심장은 다시 요동쳤다. 그녀가 허리띠를 풀기 시작했다. ‘뭐 하자는 거지?’ 부승민의 마음 한구석에는 기묘한 기대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허리띠를 찬 채로 자는 건 불편할 거야.” 그녀는 조곤조곤 말하며 허리띠를 빼냈다. 그러다 그녀의 손끝이 그의 민감한 부위에 스쳤다. 부승민은 잠시 숨이 멎을 듯했고 그 순간 그는 목을 꽉 누르며 간신히 신음을 삼켰다. “바지는 벗겨주고 싶지만 네가 너무 무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