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긴 아니? 아침도 안 먹고 급하게 나가길래 회사에 가는 줄 알았더니 추서윤을 찾으러 가? 할아버지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지? 3년 내내 하랑이가 너한테 잘못한 게 뭐가 있니.”“끝까지 책임질 생각이 아니라면 애초에 결혼도 하지 말았어야지. 할아버지가 너한테 그 애를 맡긴 건 네가 그 애를 행복하게 해줄 줄 알아서 그랬던 거야. 이제 와서 이러면 내가 무슨 면목으로 하랑이를 보니.”부승민은 잠깐 침묵하는 듯하더니 말했다.“할아버지, 다음에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게 주의하도록 할게요. 하지만 할아버지께서도 다음부터는 저랑 먼저 상의하셨으면 해요.”…늦은 아침, 온하랑이 잠에서 깼고, 저택의 도우미들은 온하랑을 위해 아침밥을 다시 한번 차렸다.그녀가 밥을 다 먹자 시간은 이미 열 시가 넘었고, 지금 출근해봤자 지각할 게 뻔했기에 온하랑은 아예 저택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함께 얘기를 나누다가 점심밥까지 먹었다.온하랑이 떠나려고 할 때 할머니가 초대장을 건네주며 말했다.“이건 오로라 자산 파티의 초대장이야. 내 앞으로 오긴 했지만 나이 든 늙은이가 거기 가서 뭐 하겠니. 그러니 너랑 승민이가 대신 참석해 줘. 승민이한테는 내가 말해 둘게.”온하랑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갖은 방법을 동원해 그녀와 부승민을 연결시켜 주려는 걸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다만 그들이 모르는 게 있다면, 부승민과 온하랑은 이미 이혼합의서에 사인을 했다는 것이었다.“할머니, 근데 저는 이런 파티에 참석해 본 적이 없어서, 혹시라도…”“괜찮아, 승민이가 너랑 같이 갈 거야.”“아무 문제 없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하랑아. 힘내.”할머니가 온하랑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며 부드럽게 다독였다.그 덕분에 온하랑은 용기가 조금이나마 샘솟는 걸 느꼈다.저택을 떠난 온하랑은 바로 회사로 들어갔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사무실로 들어가려고 할 때 복도에서 대표실의 비서를 마주쳤다.비서가 온하랑을 발견하고는 그녀에게 말했다.“전무님, 대표님께서 잠깐
저녁 6시, 퇴근한 온하랑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부승민을 기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부승민이 내려왔고 운전기사가 두 사람을 개인 편집숍으로 모셨다.메이크업과 세팅을 끝내고 안에서 옷을 갈아입은 온하랑이 치마를 살짝 든 채 커튼을 열고 걸어 나왔다.이미 세팅을 끝낸 채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부승민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들었고 그대로 잠깐 굳어 버리고 말았다.화장을 마친 온하랑은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고 그녀의 눈길이 닫는 곳마다 간질거리는 듯했다.아이 메이크업과 같은 계열 색깔의 립스틱을 바른 그녀는 매혹적이고도 우아했다.그녀는 머리에 크게 힘을 주지 않고 평소처럼 풀어 내렸는데 간단한 웨이브를 넣어 얼굴형을 더욱 두드러지게 부각했다.그녀는 일자형 어깨의 하늘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옷 밖으로 드러난 둥근 어깨가 빛을 받아 희고 깨끗하게 빛났다.온하랑이 부승민의 앞으로 걸어가더니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며 그에게 물었다.“어때?”부승민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그녀의 신발을 보며 물었다.“발목 나은 지 얼마 안 됐는데 하이힐 신는 거 불편하지 않아?”“괜찮아.”“그래도 힐 없는 걸로 바꾸자.”온하랑은 배 속의 아이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러자 그럼.”온하랑이 직원을 시켜 드레스와 어울리는 플랫슈즈를 가져오게 했다.그녀가 소파에 앉아 허리를 굽히고 신발을 벗으려고 할 때, 부승민이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더니 말했다.“내가 도와줄게.”그의 큰 손이 온하랑이 발목에 닿더니 그녀의 발에 신겨 있던 하이힐을 하나씩 벗겼다. 그러고는 플랫슈즈를 가져와 조심조심 그녀에게 신겨주었다.온하랑은 그런 그를 묵묵히 바라보았다.그는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로 신발을 신겨 주었다. 진지한 표정과 아름다운 얼굴, 그리고 매끄러운 턱선이 그녀의 뇌리에 깊게 박혔다.신발을 모두 신겨 준 부승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가자.”“나 이번이 처음 가는 거라서, 혹시 알아 둬야 할 규칙 같은 게 있으면 지금 알려 줘.
여자는 그의 발목을 한번 흘깃 쳐다보고는 말도 없이 곁에 앉아서 팔꿈치로 온하랑을 툭툭 치며 물었다.“전 소유진이라고 해요. 그쪽은요?”“온하랑이에요.”소유진은 온하랑 쪽으로 가깝게 몸을 붙이더니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아까 보니까 부승민이랑 같이 들어오던데, 어떻게 꼬신 거예요?”온하랑이 고개를 돌려 소유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소유진은 부티 나게 입고 있었지만 자세히 보면 이미 시즌이 지난 옷이었고, 들고 있는 가방도 잘 알려지지 않은 브랜드의 시즌이 지난 가방이었다.온하랑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소유진이 이어서 말했다.“입고 있는 걸 보니까 부승민이 그쪽한테 돈을 꽤 쓰나 봐요. 부승민같은 부자들은 아무래도 꼬시기 좀 힘들겠죠?”“저는 잘 몰라요.”“에이, 그러지 말고 좀 알려 줘 봐요. 그거 알아요? 제 애인은 너무 쪼잔해서 제가 오랫동안 매달려서야 겨우 저를 오늘 파티에 동행시켜 줬다니까요. 안 그래도 조만간 바꿀 생각이었어요.”“다시 말하지만 저는 몰라요. 꼬신 적 없어요.”온하랑이 술잔과 디저트를 들고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다른 자리를 찾아 다시 앉았다.소유진은 그런 그녀를 보며 흥하고 비웃었다.‘어차피 같은 꽃뱀인데, 혼자 고고한 척하는 거야 뭐야.’파티장 입구에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고 고개를 든 온하랑은 우연히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추서윤, 그녀도 자선 파티에 온 것이었다.“뭐 보고 있어?”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싶더니 이주혁이 온하랑의 곁에 앉았다.정신을 차린 온하랑이 이주혁을 보고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네가 어떻게 여기 있어?”“매니저가 오라고 했어. 근데 너도 여기 있을 줄은 몰랐네. 발 다친 건 어때?”“거의 다 나았어.”“그럼 다행이고. 혼자 온 거야?”“대표님이랑 같이 왔어.”이준혁이 눈썹을 올리며 말했다.“나 아까 추서윤 봤는데, 그래서 그 여자랑 부성민이 같이 온 줄 알았어. 봐봐, 저기 있네.”온하랑은 이주혁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파티장에는 사람이
온하랑은 부승민을 따라서 앞쪽으로 걸어갔다.그때, 제일 앞줄에 앉아 있던 추서윤이 몸을 돌리더니 부승민에게 손을 흔들었다.“승민아, 여기.”그러자 부승민이 온하랑을 보며 말했다.“가자.”온하랑은 순간 몸이 굳었고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그녀는 부승민과 그녀, 단둘이 같이 앉는 건 줄 알았다.그래서 드디어 추서윤을 한번 이겨 보았다며 속으로 좋아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이번에도 부승민이 그녀를 가엽게 여겨 챙겨주는 것이었다.“거기서 뭐 해?”앞으로 걸어 나가던 부승민은 온하랑이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자 뒤돌아서 보며 물었다.온하랑은 눈을 내리깔고는 숨을 한번 깊게 들이마시더니 앞으로 걸어가서 부승민의 옆자리에 앉았다.“추서윤씨도 계셨네요.”추서윤은 안색이 창백해져서는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며 말했다.“미안해, 하랑아. 매니저가 참석하라고 해서 온 거야. 나도 너희들이 여기 올 줄은 몰랐어. 불편하면 내가 뒤에 가서 앉을게.”말을 마친 추서윤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몸을 뒤로 돌렸다.그러나 부승민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며 말했다.“괜찮아, 그냥 여기 앉아.”추서윤이 온하랑을 보며 말끝을 흐렸다.“하지만…”“괜찮아, 얜 신경 안 써.”온하랑은 손으로 치맛자락을 꽉 잡았다. 그녀는 가슴이 너무 아픈 나머지 숨을 쉬기 힘들었다.부승민, 내가 신경 쓰는지 안 쓰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부승민, 나는 심장이 없는 줄 알아?그녀는 눈을 감은 채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부승민이 부드럽게 추서윤을 달래고 있는 걸 바로 옆에 앉아서 듣고 있자니 그녀는 마음속에서부터 질투가 끓어 올라 당장이라도 미칠 것만 같았다.온하랑은 옆에 있던 책자를 꺼내 들어 오늘 저녁에 경매에 나올 물건의 이름, 사진, 재료, 소개 등을 찬찬히 보았다.그녀는 지금 당장 주의를 돌릴 물건이 필요했다. 안 그랬다가는 정말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온하랑은 손으로 책자를 한 장씩 넘기고 있었지만 전혀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이게 마음에
그러자 소유진이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어차피 이 일 시작 했으면서 뭘 그렇게 고고하게 굴어요? 부승민 옆에 추서윤이 있는 거 못 봤어요? 거기가 진짜 여자 친구인 거고, 우리처럼 남들 앞에 나서지 못하는 애인들은 알아서 눈치 보면서 자기 게 아닌 건 탐내지 말아야죠.”“조용히 좀 해 줄래요?”온하랑이 짜증스럽게 말했다.그녀는 자기가 충분히 의사 전달을 했다고 생각했다. 조금이라도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녀가 지금 소유진과 말 한마디도 섞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어머, 제 말이 다 맞는 것 같으니까 지금 화내는 거죠? 부승민 옆에 붙어 있다고 당신은 남들이랑 뭐 다른 줄 알아요? 어차피 다 같은 몸 파는 처진데 누구는 고상하고 누구는 더러워요?”“닥쳐요 좀. 듣고 싶지 않으니까 좀 가 줄래요?”“전 안 갈 건데요? 여기가 당신 집이라도 돼요?”“그럼 제가 가죠.”온하랑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성큼성큼 자리를 떠났다. 소유진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분노를 삭였다.‘왜 온하랑은 젊고, 잘 생기고, 돈까지 많은 부승민 옆에 붙어 있는데 나는 배 나온 뚱뚱한 아저씨 곁에 붙어 있을 수밖에 없지?’‘같은 내연녀 주제에 저 여자는 뭐가 그렇게 잘 났길래 사람을 깔보는데?’생각할수록 점점 화가 난 소유진은 충동적으로 온하랑을 밀어버렸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몸에 힘을 주고 있지 않았던 온하랑은 수영장에 풍덩 빠져 버렸다.소유진도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깜짝 놀라서는 현장을 빨리 벗어났다.“우우웁… 꼬르륵…”차디찬 수영장 물이 그녀의 몸을 감쌌고, 온하랑은 팔다리를 버둥거리다가 물을 몇 모금 연거푸 들이마셨다.당장이라도 질식할 듯한 느낌이 들더니 익숙한 공포감이 그녀에게 드리웠다.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덜덜 떨다가 손발에 약간씩 마비가 오기 시작했다.숨도 쉬지 못하고 의식도 점점 옅어지고 있을 때, 그녀의 머릿속에 갑자기 잊고 있던 기억 조각이 떠올랐다.사람들은 그녀를 부모가 없는
병원에 도착한 온하랑은 몇 가지 검사를 진행했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근데 의사 선생님, 저 임신 중인데 혹시 문제가 생겼을까요?”의사가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신중하게 말했다.“그러면 산부인과 검사도 함께 진행하는 걸 추천해 드려요.”“알겠습니다.”온하랑은 의사가 준 처방을 가지고 진료실에서 나왔다.그녀가 나오는 걸 확인한 이주혁이 재빨리 다가가 걱정스럽게 물었다.“어때? 의사가 뭐래?”“아무 문제 없대. 근데 검사를 조금 더 받아봐야 할 것 같아. 이제부턴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으니까 넌 먼저 돌아가. 오늘 정말 고마웠어. 나중에 내가 꼭 한턱 크게 낼게.”“괜찮아, 어차피 여기까지 왔는데 같이 있어 줄게. 가자, 무슨 검사 해야 하는데?”“병원은 사람도 많고 검사 결과 나오자면 시간도 한참 걸려. 너는 너무 눈에 띄기도 하고 사람들도 많이 알아봐서 혹시 사진이라도 찍히면 많이 곤란하잖아.”온하랑이 한 말도 틀리지 않았다. 이주혁은 오늘 마스크를 하지 않고 나왔다. 다행히도 오늘 밤 응급실은 사람이 적은 축에 속했고 다급하게 오가는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환자 가족들은 모두 다른 사람에게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하지만 그가 온하랑과 함께 검사를 받으러 가면 그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주혁을 알아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그는 하는 수 없이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알겠어, 그럼 난 먼저 갈게. 몸조심해. 검사 결과 나오면 나한테 알려 주고.”“응, 알겠어.”이주혁을 보낸 온하랑은 혼자서 산부인과에 가서 검사를 받았다.검사 결과가 나온 후 의사 선생님은 그녀에게 하루만 입원하며 상태를 지켜볼 것을 권유했기에 그녀는 병원에서 하룻밤 머물기로 했다.요즘 병원에 오는 일이 부쩍 잦았다.온하랑은 집에 있는 도우미 아줌마에게 전화를 걸어 깨끗한 옷을 한 벌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전화를 끊고 나서도 온하랑은 몇 번이나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이미 한 시간이 넘게 지났는데 부승민에게서는 전화 한 통, 문자 한 통이
“알겠습니다.”전화를 끊은 온하랑은 BX그룹 법무팀의 변호사에게 전화해 부탁했다.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조차 부승민에게서는 아무런 소식도 오지 않았다.그녀는 할 수 없이 실망을 안고 잠에 들었다.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핸드폰을 확인했지만 여전히 부승민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그녀는 오래전부터 부승민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리라 결심했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이 아픈 건 어쩔 수 없었다.병원에서 나온 온하랑은 바로 회사로 갔다.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비서는 온하랑이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마자 빠르게 말했다.“전무님, 대표님께서 잠깐 들르시랍니다.”온하랑이 쓰게 웃으며 부승민의 사무실로 걸어갔다.지난번에는 할아버지에게 추서윤의 일을 일러바친 게 온하랑이 아닌지 묻더니, 이번에는 또 무슨 일로 부른 걸까.사무실에 들어선 온하랑은 책상 앞에 서서 말했다.“부대표님, 부르셨어요.”그러자 부승민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가 어제랑 다른 옷차림을 한 것을 확인하고는 손에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의자에 깊이 몸을 기댔다.“왔어?”“응.”“도우미 아줌마가 말하던데, 어제저녁에 안 들어갔다며?”부승민이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쳐다보았다.“응, 일이 좀 있었어.”온하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담백하게 대답했다.“무슨 일? 혹시 내 도움 필요해?”어젯밤 그녀가 가장 연약하고 가장 도움이 필요했을 때, 그녀는 부승민에게서 연락이 오기를, 그리고 그녀를 위로해 주기를 간절하게 바랐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그의 관심이 필요하지 않았다.“아니, 별일 아냐.”온하랑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부승민은 굳은 눈빛을 한 채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의자의 팔걸이에 놓인 손가락이 규칙적으로 의자를 두드리고 있었다.“다른 일 없지? 그럼 난 먼저 가볼게.”온하랑이 몸을 돌려 문으로 다가갔을 때, 부승민이 다시 입을 열었다.“어젯밤에 이주혁이랑 계속 같이 있었어?”어젯밤, 부승민은 자신이 추서윤과 함께 있
그 말을 들은 부승민이 안색을 굳히더니 입술을 깨물었다.그는 기분이 약간 불쾌해졌다.온하랑이 자신의 원칙을 깨부술 정도로 이주혁을 좋아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다른 일 없지?”온하랑이 물었다.“너희들, 어젯밤에 뭐했어?”“오빠한테 해명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예전에 부승민이 그녀에게 했던 말을 똑같이 되돌려 주었다.부승민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마를 만지며 강한 어투로 말했다.“온하랑, 네 멋대로 행동 하지 마!”사랑은 눈을 멀게 한다더니, 온하랑은 지금 그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있었다.부승민는 온하랑이 행복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주혁은 그녀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내가 뭘 맘대로 했는데?”“난 널 걱정해서 하는 소리야. 이주혁은 너한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야. 그러니까 흘려듣지 말고 내 말 좀 잘 생각해 봐, 돌이킬 수 없는 일은 하지 말고!”“돌이킬 수 없는 일? 뭘 말하는 거야? 바람피우는 거 말하는 거야?”온하랑이 눈썹을 슬쩍 올리며 물었고, 부승민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우리가 정식으로 이혼하기 전에 내가 바람피울 일은 없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근데 오빠는… 아주 당당하게 피우더라. 전 세계 사람들이 오빠한테 여자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데?”온하랑이 비웃음을 담아 말했고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몸을 돌려 사무실을 나갔다.온하랑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순박한 농민이었고, 아버지는 정의로운 기자였다. 그녀가 16살에 부씨 가문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가치관이 어느 정도 형성되어 있을 때였다.평범하고 수수한 가치관을 가진 온하랑이 바람을 피우는 일 같은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도덕은 평범한 사람들을 구속하기 위한 것이지 부자들을 구속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바람피우는 건 이 바닥에서는 흔한 일이었다.당장 부승민부터가 혼외자 출신이었다.닫힌 문을 바라보던 부승민은 어이가 없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서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온하랑이 그에게 하는 말에는 온통 가시가 돋쳐 있었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