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하랑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방안은 두 사람의 숨소리만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그러나 온하랑은 아까의 잠기운이 모두 달아나 말똥말똥한 정신으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녀는 부승민이 잠드는 걸 방해할까 봐 꼼짝달싹 못한 채 불편한 자세로 있었다.같은 자세를 유지한 채 시간이 꽤 지나자, 몸이 약간 뻣뻣해진 그녀는 자세를 바꿔 누웠다.그리고 또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 나서 부승민이 낮은 목소리로 기침을 몇 번 하더니 그녀를 조심스레 불렀다.하지만 온하랑이 아무런 대답도 없자 숨을 한번 깊게 들이마신 부승민은 조심스럽게 이불을 들추고 침대에서 내려가더니 다시 욕실로 들어갔다.물소리가 잠시 들리더니 샤워가운을 걸친 부승민이 욕실에서 걸어 나왔다.온하랑이 다시 한번 자세를 바꾸자 부승민이 물었다.“나 때문에 깼어?”그가 침대 곁에 앉으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니.”온하랑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잠이 안 와?”“응.”“그럼 내가 독일어책 읽어 줄까?”“응, 고마워.”부승민은 한국어, 영어, 일본어, 독일어 등 네 가지 언어를 할 줄 알았다.예전에 그녀가 잠들지 못할 때면 그는 종종 독일어책을 읽어 주고는 했다.그녀는 독일어를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가 책을 읽어 주는 부드러운 억양을 들으면 항상 마음이 진정되곤 했다.방 안에는 부승민의 낮고 듣기 좋은 저음이 가득 찼고 온하랑은 머릿속의 잡념을 떨쳐내며 그 목소리에만 집중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규칙적인 호흡 소리가 들려오자 부승민은 책을 읽는 것을 멈추더니 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하랑아?”대답은 없었고, 그녀는 잠이 들었다.부승민은 그녀의 이불을 꼼꼼히 여며주고는 눈을 감으며 잠에 들었다.밤중, 핸드폰이울리자 온하랑은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고 눈을 감은 채 전화를 받았다.“누구세요?”‘뚝-’ 하는 소리와 함께 전화를 건 사람은 한마디 말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온하랑은 그제야 눈을 가늘게 뜨고 핸드폰 화면을 보았고, 그녀가 지금 쥐고 있는 것이 부승
“서윤아, 약속했었잖아, 너랑 같이 있겠다고. 걱정하지 마. 내가 약속을 번복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근데 넌 이미 결혼도 했고 아내도 있잖아. 넌 더 이상 내 사람이 아니야. 넌 날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만약 네가 이미 결혼한 걸 알았다면 너한테 연락하지 않았을 거고 절대 너랑 같이 있지 않았을 거야. 나더러 하랑이 얼굴을 어떻게 보라는 거야.”추서윤이 눈물을 펑펑 흘리며 말했다.“내가 걔한테 몹쓸 짓을 한 거지 너랑은 아무런 상관도 없어. 그리고 이미 그녀와 합의 이혼하기로 했어. 곧 이혼 수속 밟을 거야.”“그러니까 서윤아, 나 한 번만 더 믿어주면 안 돼? 나 정말 약속 지킬게.”“진짜야?”추서윤이 머뭇거리며 물었다.“진짜야.”부승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확실하게 대답하자 추서윤은 부승민의 품 안에 뛰어들며 큰소리로 엉엉 울었다.“승민아, 나 정말 너 없이 살 수 없어. 내가 널 어떻게 떠나. 너 없이 살 바엔 그냥 죽는 게 나아.”부승민은 추서윤을 마주 안고는 그녀의 등을 조심스럽게 토닥이며 위로했다.“부 대표님,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곁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안수빈이 말했다.“뭐죠?”“서윤이 연예인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만약 대표님이 이혼한 사실이 밝혀지게 되면 서윤이는 부부를 갈라놓은 내연녀로 몰려서 앞으로 연예계 생활을 못 할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서윤이의 안전을 보장해 주실 게 아니라면 가까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걱정하지 마세요. 서윤이한테 해가 될 일은 하지 않을 거니까.”부승민이 정중하고도 단호하게 약속했다.“알겠어요, 그러면 안심이 되네요. 예전에 외국에서 서윤이를 처음 만났을 때는 생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모습이었는데, 부 대표님은 아마 모르시겠죠…”그때 추서윤은 우연히 부승민의 목 부근에서 키스 마크 같아 보이는 붉은색 흔적을 발견했다. 순간 그녀의 몸이 굳고 눈빛에는 어두운 기운이 잠깐 스쳐 지나갔다.추서윤은 갑자기 부승민을 힘껏 밀치더니 그 자리에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긴 아니? 아침도 안 먹고 급하게 나가길래 회사에 가는 줄 알았더니 추서윤을 찾으러 가? 할아버지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지? 3년 내내 하랑이가 너한테 잘못한 게 뭐가 있니.”“끝까지 책임질 생각이 아니라면 애초에 결혼도 하지 말았어야지. 할아버지가 너한테 그 애를 맡긴 건 네가 그 애를 행복하게 해줄 줄 알아서 그랬던 거야. 이제 와서 이러면 내가 무슨 면목으로 하랑이를 보니.”부승민은 잠깐 침묵하는 듯하더니 말했다.“할아버지, 다음에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게 주의하도록 할게요. 하지만 할아버지께서도 다음부터는 저랑 먼저 상의하셨으면 해요.”…늦은 아침, 온하랑이 잠에서 깼고, 저택의 도우미들은 온하랑을 위해 아침밥을 다시 한번 차렸다.그녀가 밥을 다 먹자 시간은 이미 열 시가 넘었고, 지금 출근해봤자 지각할 게 뻔했기에 온하랑은 아예 저택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함께 얘기를 나누다가 점심밥까지 먹었다.온하랑이 떠나려고 할 때 할머니가 초대장을 건네주며 말했다.“이건 오로라 자산 파티의 초대장이야. 내 앞으로 오긴 했지만 나이 든 늙은이가 거기 가서 뭐 하겠니. 그러니 너랑 승민이가 대신 참석해 줘. 승민이한테는 내가 말해 둘게.”온하랑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갖은 방법을 동원해 그녀와 부승민을 연결시켜 주려는 걸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다만 그들이 모르는 게 있다면, 부승민과 온하랑은 이미 이혼합의서에 사인을 했다는 것이었다.“할머니, 근데 저는 이런 파티에 참석해 본 적이 없어서, 혹시라도…”“괜찮아, 승민이가 너랑 같이 갈 거야.”“아무 문제 없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하랑아. 힘내.”할머니가 온하랑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며 부드럽게 다독였다.그 덕분에 온하랑은 용기가 조금이나마 샘솟는 걸 느꼈다.저택을 떠난 온하랑은 바로 회사로 들어갔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사무실로 들어가려고 할 때 복도에서 대표실의 비서를 마주쳤다.비서가 온하랑을 발견하고는 그녀에게 말했다.“전무님, 대표님께서 잠깐
저녁 6시, 퇴근한 온하랑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부승민을 기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부승민이 내려왔고 운전기사가 두 사람을 개인 편집숍으로 모셨다.메이크업과 세팅을 끝내고 안에서 옷을 갈아입은 온하랑이 치마를 살짝 든 채 커튼을 열고 걸어 나왔다.이미 세팅을 끝낸 채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부승민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들었고 그대로 잠깐 굳어 버리고 말았다.화장을 마친 온하랑은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고 그녀의 눈길이 닫는 곳마다 간질거리는 듯했다.아이 메이크업과 같은 계열 색깔의 립스틱을 바른 그녀는 매혹적이고도 우아했다.그녀는 머리에 크게 힘을 주지 않고 평소처럼 풀어 내렸는데 간단한 웨이브를 넣어 얼굴형을 더욱 두드러지게 부각했다.그녀는 일자형 어깨의 하늘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옷 밖으로 드러난 둥근 어깨가 빛을 받아 희고 깨끗하게 빛났다.온하랑이 부승민의 앞으로 걸어가더니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며 그에게 물었다.“어때?”부승민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그녀의 신발을 보며 물었다.“발목 나은 지 얼마 안 됐는데 하이힐 신는 거 불편하지 않아?”“괜찮아.”“그래도 힐 없는 걸로 바꾸자.”온하랑은 배 속의 아이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러자 그럼.”온하랑이 직원을 시켜 드레스와 어울리는 플랫슈즈를 가져오게 했다.그녀가 소파에 앉아 허리를 굽히고 신발을 벗으려고 할 때, 부승민이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더니 말했다.“내가 도와줄게.”그의 큰 손이 온하랑이 발목에 닿더니 그녀의 발에 신겨 있던 하이힐을 하나씩 벗겼다. 그러고는 플랫슈즈를 가져와 조심조심 그녀에게 신겨주었다.온하랑은 그런 그를 묵묵히 바라보았다.그는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로 신발을 신겨 주었다. 진지한 표정과 아름다운 얼굴, 그리고 매끄러운 턱선이 그녀의 뇌리에 깊게 박혔다.신발을 모두 신겨 준 부승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가자.”“나 이번이 처음 가는 거라서, 혹시 알아 둬야 할 규칙 같은 게 있으면 지금 알려 줘.
여자는 그의 발목을 한번 흘깃 쳐다보고는 말도 없이 곁에 앉아서 팔꿈치로 온하랑을 툭툭 치며 물었다.“전 소유진이라고 해요. 그쪽은요?”“온하랑이에요.”소유진은 온하랑 쪽으로 가깝게 몸을 붙이더니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아까 보니까 부승민이랑 같이 들어오던데, 어떻게 꼬신 거예요?”온하랑이 고개를 돌려 소유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소유진은 부티 나게 입고 있었지만 자세히 보면 이미 시즌이 지난 옷이었고, 들고 있는 가방도 잘 알려지지 않은 브랜드의 시즌이 지난 가방이었다.온하랑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소유진이 이어서 말했다.“입고 있는 걸 보니까 부승민이 그쪽한테 돈을 꽤 쓰나 봐요. 부승민같은 부자들은 아무래도 꼬시기 좀 힘들겠죠?”“저는 잘 몰라요.”“에이, 그러지 말고 좀 알려 줘 봐요. 그거 알아요? 제 애인은 너무 쪼잔해서 제가 오랫동안 매달려서야 겨우 저를 오늘 파티에 동행시켜 줬다니까요. 안 그래도 조만간 바꿀 생각이었어요.”“다시 말하지만 저는 몰라요. 꼬신 적 없어요.”온하랑이 술잔과 디저트를 들고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다른 자리를 찾아 다시 앉았다.소유진은 그런 그녀를 보며 흥하고 비웃었다.‘어차피 같은 꽃뱀인데, 혼자 고고한 척하는 거야 뭐야.’파티장 입구에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고 고개를 든 온하랑은 우연히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추서윤, 그녀도 자선 파티에 온 것이었다.“뭐 보고 있어?”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싶더니 이주혁이 온하랑의 곁에 앉았다.정신을 차린 온하랑이 이주혁을 보고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네가 어떻게 여기 있어?”“매니저가 오라고 했어. 근데 너도 여기 있을 줄은 몰랐네. 발 다친 건 어때?”“거의 다 나았어.”“그럼 다행이고. 혼자 온 거야?”“대표님이랑 같이 왔어.”이준혁이 눈썹을 올리며 말했다.“나 아까 추서윤 봤는데, 그래서 그 여자랑 부성민이 같이 온 줄 알았어. 봐봐, 저기 있네.”온하랑은 이주혁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파티장에는 사람이
온하랑은 부승민을 따라서 앞쪽으로 걸어갔다.그때, 제일 앞줄에 앉아 있던 추서윤이 몸을 돌리더니 부승민에게 손을 흔들었다.“승민아, 여기.”그러자 부승민이 온하랑을 보며 말했다.“가자.”온하랑은 순간 몸이 굳었고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그녀는 부승민과 그녀, 단둘이 같이 앉는 건 줄 알았다.그래서 드디어 추서윤을 한번 이겨 보았다며 속으로 좋아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이번에도 부승민이 그녀를 가엽게 여겨 챙겨주는 것이었다.“거기서 뭐 해?”앞으로 걸어 나가던 부승민은 온하랑이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자 뒤돌아서 보며 물었다.온하랑은 눈을 내리깔고는 숨을 한번 깊게 들이마시더니 앞으로 걸어가서 부승민의 옆자리에 앉았다.“추서윤씨도 계셨네요.”추서윤은 안색이 창백해져서는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며 말했다.“미안해, 하랑아. 매니저가 참석하라고 해서 온 거야. 나도 너희들이 여기 올 줄은 몰랐어. 불편하면 내가 뒤에 가서 앉을게.”말을 마친 추서윤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몸을 뒤로 돌렸다.그러나 부승민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며 말했다.“괜찮아, 그냥 여기 앉아.”추서윤이 온하랑을 보며 말끝을 흐렸다.“하지만…”“괜찮아, 얜 신경 안 써.”온하랑은 손으로 치맛자락을 꽉 잡았다. 그녀는 가슴이 너무 아픈 나머지 숨을 쉬기 힘들었다.부승민, 내가 신경 쓰는지 안 쓰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부승민, 나는 심장이 없는 줄 알아?그녀는 눈을 감은 채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부승민이 부드럽게 추서윤을 달래고 있는 걸 바로 옆에 앉아서 듣고 있자니 그녀는 마음속에서부터 질투가 끓어 올라 당장이라도 미칠 것만 같았다.온하랑은 옆에 있던 책자를 꺼내 들어 오늘 저녁에 경매에 나올 물건의 이름, 사진, 재료, 소개 등을 찬찬히 보았다.그녀는 지금 당장 주의를 돌릴 물건이 필요했다. 안 그랬다가는 정말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온하랑은 손으로 책자를 한 장씩 넘기고 있었지만 전혀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이게 마음에
그러자 소유진이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어차피 이 일 시작 했으면서 뭘 그렇게 고고하게 굴어요? 부승민 옆에 추서윤이 있는 거 못 봤어요? 거기가 진짜 여자 친구인 거고, 우리처럼 남들 앞에 나서지 못하는 애인들은 알아서 눈치 보면서 자기 게 아닌 건 탐내지 말아야죠.”“조용히 좀 해 줄래요?”온하랑이 짜증스럽게 말했다.그녀는 자기가 충분히 의사 전달을 했다고 생각했다. 조금이라도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녀가 지금 소유진과 말 한마디도 섞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어머, 제 말이 다 맞는 것 같으니까 지금 화내는 거죠? 부승민 옆에 붙어 있다고 당신은 남들이랑 뭐 다른 줄 알아요? 어차피 다 같은 몸 파는 처진데 누구는 고상하고 누구는 더러워요?”“닥쳐요 좀. 듣고 싶지 않으니까 좀 가 줄래요?”“전 안 갈 건데요? 여기가 당신 집이라도 돼요?”“그럼 제가 가죠.”온하랑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성큼성큼 자리를 떠났다. 소유진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분노를 삭였다.‘왜 온하랑은 젊고, 잘 생기고, 돈까지 많은 부승민 옆에 붙어 있는데 나는 배 나온 뚱뚱한 아저씨 곁에 붙어 있을 수밖에 없지?’‘같은 내연녀 주제에 저 여자는 뭐가 그렇게 잘 났길래 사람을 깔보는데?’생각할수록 점점 화가 난 소유진은 충동적으로 온하랑을 밀어버렸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몸에 힘을 주고 있지 않았던 온하랑은 수영장에 풍덩 빠져 버렸다.소유진도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깜짝 놀라서는 현장을 빨리 벗어났다.“우우웁… 꼬르륵…”차디찬 수영장 물이 그녀의 몸을 감쌌고, 온하랑은 팔다리를 버둥거리다가 물을 몇 모금 연거푸 들이마셨다.당장이라도 질식할 듯한 느낌이 들더니 익숙한 공포감이 그녀에게 드리웠다.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덜덜 떨다가 손발에 약간씩 마비가 오기 시작했다.숨도 쉬지 못하고 의식도 점점 옅어지고 있을 때, 그녀의 머릿속에 갑자기 잊고 있던 기억 조각이 떠올랐다.사람들은 그녀를 부모가 없는
병원에 도착한 온하랑은 몇 가지 검사를 진행했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근데 의사 선생님, 저 임신 중인데 혹시 문제가 생겼을까요?”의사가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신중하게 말했다.“그러면 산부인과 검사도 함께 진행하는 걸 추천해 드려요.”“알겠습니다.”온하랑은 의사가 준 처방을 가지고 진료실에서 나왔다.그녀가 나오는 걸 확인한 이주혁이 재빨리 다가가 걱정스럽게 물었다.“어때? 의사가 뭐래?”“아무 문제 없대. 근데 검사를 조금 더 받아봐야 할 것 같아. 이제부턴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으니까 넌 먼저 돌아가. 오늘 정말 고마웠어. 나중에 내가 꼭 한턱 크게 낼게.”“괜찮아, 어차피 여기까지 왔는데 같이 있어 줄게. 가자, 무슨 검사 해야 하는데?”“병원은 사람도 많고 검사 결과 나오자면 시간도 한참 걸려. 너는 너무 눈에 띄기도 하고 사람들도 많이 알아봐서 혹시 사진이라도 찍히면 많이 곤란하잖아.”온하랑이 한 말도 틀리지 않았다. 이주혁은 오늘 마스크를 하지 않고 나왔다. 다행히도 오늘 밤 응급실은 사람이 적은 축에 속했고 다급하게 오가는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환자 가족들은 모두 다른 사람에게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하지만 그가 온하랑과 함께 검사를 받으러 가면 그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주혁을 알아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그는 하는 수 없이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알겠어, 그럼 난 먼저 갈게. 몸조심해. 검사 결과 나오면 나한테 알려 주고.”“응, 알겠어.”이주혁을 보낸 온하랑은 혼자서 산부인과에 가서 검사를 받았다.검사 결과가 나온 후 의사 선생님은 그녀에게 하루만 입원하며 상태를 지켜볼 것을 권유했기에 그녀는 병원에서 하룻밤 머물기로 했다.요즘 병원에 오는 일이 부쩍 잦았다.온하랑은 집에 있는 도우미 아줌마에게 전화를 걸어 깨끗한 옷을 한 벌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전화를 끊고 나서도 온하랑은 몇 번이나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이미 한 시간이 넘게 지났는데 부승민에게서는 전화 한 통, 문자 한 통이
그때는 어린 마음에 부모님의 무관심이 좋기만 했는데 클수록 오재원은 그게 다 기대가 없어서였다는 걸 깨달아가고 있었다.주위 사람들은 은연중에 자신과 형을 비교하고 있었고 또 어떤 이들은 집안의 무게는 형이 다 짊어지니 마음대로 살 수 있어서 좋겠다며 부러움의 눈길을 보내오기도 했다.모두가 내놓은 자식이라 해서 정말 그렇게 사니 부모님은 또 제대로 하는 일이 없다고 타박했다.그런 사람들 속에서 오직 임연지만이 오재원을 인정해주었다.오재원의 우수함을 발견하지 못한 건 오승은과 오형일이 부모 노릇을 잘 못 했기 때문이라며, 오재원이 이렇게 된 것도 다 책임을 다하지 못한 부모 때문에 엇나간 거라며 그의 마음을 헤아려주었다.노력만 하면 절대 형한테 뒤지지 않을 거라는 그 한마디가 오재원의 가슴을 울렸고 오재원은 그때부터 임연지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오재원도 자신이 형보다 못 한 게 아니라 형이 받았던 교육을 못 받아서 이렇게 된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재원아, 부모님이 반대하시는 결혼생활은 오래갈 수 없는 거야. 넌 아주머니, 아저씨 자식이니까 너를 탓하진 않겠지만 나한테 그 화살이 올 거야. 그러면 날 더 싫어하시겠지.”“나도... 떳떳하게 너랑 결혼하고 싶은데...”임연지가 얼굴까지 붉히며 말하자 오재원은 그녀를 향해 무턱대고 약속부터 했다.“걱정 마 연지야. 내가 부모님 설득해볼게. 네가 내 아이까지 임신했으니까 부모님도 어쩌진 못하실 거야.”“고마워 재원아... 네가 내 옆에 있으니까 너무 든든하다.”오재원은 눈물을 글썽이는 임연지를 꼭 껴안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당연한 일인데 뭐. 넌 나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이니까 내가 너만은 꼭 지킬 거야.”“우리 부모님은 아직 내가 귀국한 거 모르셔. 내일 집에 가서 너랑 결혼하겠다고 말씀드리고 너희 집 가서 의논할 거니까 너도 고모랑 고모부한테 미리 말해놔.”“응. 아주머니, 아저씨랑 싸우지 마.”“알겠어.”...리우그룹 대표 사무실.“나가 봐.”보고도 끝난 마당에 최동철
소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임연지는 이튿날 아침 바로 예쁜 원피스를 입고 청초함이 돋보일 수 있게 화장도 연하게 한 뒤 오재원에게 문자를 보냈다.[재원아, 나 너한테 할 말 있는데 우리 자주 보던 카페에서 볼까?]역시나 문자를 보낸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오재원이 답장을 보내왔다.[알겠어, 바로 갈게.]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던 임연지는 그의 답장에 입꼬리를 올렸다.30분 뒤, 카페에 도착한 오재원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구석에 앉아있는 임연지를 발견하고는 서둘러 그리고 걸음을 옮겼다.어딘가 불안하면서도 초조해 보이는 모습에 오재원은 걱정스레 물었다.“연지야, 왜 그래? 너 무슨 일 있어?”오재원의 목소리에 고개를 든 임연지는 빨개진 눈시울을 하고 천천히 말했다.“재원아, 나... 나 임신 한 것 같아.”“진짜? 연지야, 이거 진짜야?”잠시 당황하던 오재원이 펄쩍 뛰며 좋아하자 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생리가 5일이나 밀려서 아침에 테스트기 해봤는데... 두 줄이더라.”두 줄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오재원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임연지의 손을 맞잡았다.“너무 잘됐다! 우리한테 드디어 아이가 생긴 거잖아!”그에 똑같이 기뻐하며 손을 맞잡던 임연지는 이내 울상을 지었다.너무 기쁜 마음에 임연지의 이마와 볼에 뽀뽀를 하며 희열을 만끽하던 오재원도 그제야 그녀의 굳은 표정을 발견하고 물었다.“연지야, 표정이 왜 그래? 우리한테 아이가 생긴 건데 너는 안 기뻐?”“기쁘지.”임연지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그냥 내가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아서. 감금 피하려고 임신한 애를 미혼모 가정에서 태어나게 하는 게...”“너도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거잖아. 네 탓 아니야. 그리고... 우리가 결혼만 하면 미혼모 가정도 아니잖아. 나랑 결혼하자 연지야.”“싫어.”임연지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오재원을 외면했다.“왜 싫은데?”임연지가 침묵만 유지하자 조급해 난 오재원은 자리까지 옮기며 물었다.“연지야,
한진이 답장을 하지 않아도 임연지는 혼자서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었다.설윤과 최씨 집안의 원한 관계를 짤막하게 설명해준 임연지는 설윤에게 파렴치하고 가증스럽다는 수식어를 갖다 붙였다.[나 그 여자가 우리 집에 들어오는 꼴 못 보겠어. 무슨 방법 없을까?]계속 답장이 없는 한진에 임연지는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고 그녀가 머리까지 다 말리고 나니 한진이 그제야 답장을 보내왔다.[네 고모가 이런 수모를 당한 게 아무래도 집안에서 발언권이 너무 없어서 그런 것 같아. 사촌 동생도 많이 어리니까 더 그렇지.][그럼 어떻게 해야 발언권이 좀 생길까?][옛날 역사를 보면 말이야 그때도 과거제도가 있었거든. 뭐 정시, 별시, 식년 아무튼 어마어마하게 많았는데 그때도 힘 있는 사람들이 좋은 자리는 다 꿰찼었어. 왕조가 망해도 권세가들은 그 부귀영화를 계속 이어갔지. 그런 집안들이 좀 되는데 나열하자면 많아.][...][그런 권세가들이 세력이 전부 다 조상들 덕분만은 아니거든. 중요한 건 혼인이야. 지금으로 말하면 정략결혼을 해서 자신들의 세력을 늘려나간 거지.][결혼을 시키라고? 그러기엔 동림이가 너무 어리잖아. 그리고 걔 결혼문제는 고모부가 나설 텐데 고모가 어떻게 끼어들어.][너 바보냐? 너 말하는 거잖아 너!][나?][그래.][그런데... 내 상황을 네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누가 나랑 결혼을 하고 싶어 하겠어?][오재원 있잖아. 너만 바라보는 놈.][!]생각해보니 오재원이라는 좋은 신랑감이 있긴 했다.한진의 말대로 오재원을 휘어잡다 보니 그는 이미 임연지 말에 따라 움직이는 개가 되어있었다.하지만 그럼에도 걸림돌은 있기 마련이었다.[그런데 그 집에서 나 별로 안 좋아하는데.][그게 무슨 상관이야. 오재원이 너 아니면 죽는다는데.][네가 오씨 집안 사람이 돼서 고모 도와주면 고모부도 이런 일로 이혼하자고 하지는 못할걸.][그리고 정말 백만 번 양보해서 이혼한다고 해도 넌 오씨 집안 사람이니까 당당하게 네 동생 만나러 갈 수 있는 거잖아
“...”최동철이 생각보다 쉽게 동의하자 최국환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경계했다.“나중에 말 바꾸지 마.”“당연하죠. 설윤 씨 배속에... 제 동생이 있는 건데.”“다른 하실 말씀 없으시면 전 먼저 나가볼게요.”웃으며 방을 나선 최동철은 문을 닫자마자 미소를 싹 지웠다.이어서 그가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넓은 복도에 울려 퍼졌다.임가희도 없는 거실을 지나 최동철은 밖으로 나갔다.시원한 밤바람을 맞으며 차에 탄 그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특유의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설윤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봐.”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대답에 핸드폰을 내려놓을 때 어두운 상사의 표정에 안절부절못하던 기사가 조심스레 물어왔다.“저택으로 모실까요 대표님?”“네.”...최씨 집안 방.임연지는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로 임가희를 향해 짜증을 부렸다.“고모, 진짜 그년 집에 들일 거예요?”“응.”“하지만!”이미 모든 걸 받아들인 임가희는 체념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임연지는 그 더러운 내연녀의 얼굴을 집안에서까지 보고 싶지는 않았다.파렴치하게 최씨 집안에 들어오는 것도 모자라서 자신의 고모가 상간녀가 남편의 자식을 낳는 것까지 지켜봐야 한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더 이상 방법이 없어 연지야.”“일을 좀 더 철저하게 못 한 내 잘못이지. 내가 설윤 그 년한테 도망갈 기회를 준 거야.”임연지는 한숨만 푹푹 내쉬는 고모를 보며 조급해서 발을 동동 굴렀다.“그 여자가 집으로 들어오면 너도 괜히 시비 걸지 마.”짜증 난다는 듯 대충 대답하던 임연지는 갑자기 무슨 수가 떠오른 듯 눈을 반짝였다.“고모, 일단 집에 들이고 그다음에 다시 처리...”“아니, 난 이제 아무 짓도 안 할 거야.”임가희는 임연지의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답했다.“그럼 진짜 그 년이 아이를 낳는 걸 지켜보겠다는 거예요?”“애 낳아봤자 재산 조금 받는 것뿐이야. 그런데 난 이혼하면 아무것도 못 가지는 거잖아.”아직 어린 동림이를 두고 이혼한다면 최씨 집
최동철은 차분한 표정으로 무릎에 올린 손가락을 움직였다.“네. 얼마 전에 경주 떴다고 알고 있습니다.”‘어디 보기만 했을까, 잠도 잤는데.’“가희가 연지 데리고 사과하러 갔는데 설윤이 거절하고 가희를 다치게 했대. 그리고 그 책임을 물을까 봐 도망갔다던데 그때는 가희 몸에 상처도 나 있어서 그 말을 믿었거든.”여기까지는 최동철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그래서...”“그런데 오늘 설윤이가 초라한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난 거야. 알아보니까 설윤이 임신 사실을 가희가 받아들이지 못해서 내쫓은 거더라고.”최국환의 말을 듣다 보니 혼란스러워진 최동철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설윤... 설윤 씨가 혼자 경주로 돌아왔다고요?”임가희한테 쫓겨나기 전에 임신을 했다는 것 못지않게 다움시에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것도 놀라웠다.하지만 최국환은 설윤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최동철의 표정 변화를 알아채지 못하고 말을 이어나갔다.“응... 회사 주위를 맴돌다가 직원한테 발견된 거야. 울면서 그동안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 알려주는데 얼마나 짠하던지. 애도 유산될뻔했대.”그 말에 최동철은 입꼬리를 올렸다.돌아오기 전에 최동철이 같이 가겠냐고 물었을 때도 거절하던 설윤이었다.다움시에서 다른 사람의 신분으로 인터넷쇼핑까지 하던 사람이 힘들게 살았다니.최동철도 떠나기 전 설윤에게 몇억을 주고 왔었는데 수중에 돈이 남으면 남았지 모자랄 리는 없었을 것이다.자신의 제안을 거절하고 노인네에게 달라붙은 것도, 아이를 잃을뻔했다는 거짓말을 하는 것도 모두 우스워서 최동철은 냉소를 흘렸다.매일 밤 잠자리를 가질 때는 신경도 안 쓰던 아이가 갑자기 아쉬워진 건가.아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게 낯부끄러웠던 최국환은 그만 말을 멈추었다.“가희가 잘못했다고 하면서 설윤이 다시 데려오겠대. 아이 낳을 때까지 잘 보살펴주겠다고 해서 나도 동의했고.”이익을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재벌가에서 첩을 들이는 건 그리 큰일이 아니었다.어떤 본처는 첩을 데리고 쇼핑도 하면서 아이
최동철은 사색에 잠긴 듯 한동안 임가희를 바라보았다.빨갛게 부어오른 눈과 눈물이 말라붙은 볼 때문에 사람이 유독 초췌해 보였다.설윤을 쫓아낸 일이 들통난 건지 임가희는 최국환 앞에서 고개도 못 들고 있었다.“넌 서재로 가 있어.”“... 제가 들으면 안 될 얘기라도 하시게요?”최동철이 못마땅하다는 듯 말하자 최국환의 눈치를 보던 임가희는 이내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불안한 마음을 감추려는 듯 옷자락을 꼭 쥐는 임가희와 똥 씹은 표정을 짓고 있는 최국환을 번갈아 보던 최동철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전 서재에 가 있을게요.”최동철이 계단을 올라가는 소리가 온 거실을 가득 채웠다.천장에 달린 샹들리에가 은은한 빛을 내며 집안의 장식들을 더욱 화려하게 빛냈지만 그럼에도 어두운 분위기는 감춰지지 않았다.최동철을 올려보낸 최국환은 금세 표정을 굳히더니 임가희를 보며 말했다.“당신 입으로 뱉은 말 지켜. 당장 다시 데려와서 치료부터 음식까지 당신이 다 책임져. 가희야, 넌 똑똑하니까 알 거야. 설윤이랑 걔 배 속의 아이가 잘못되면 어떻게 되는지.”임가희는 고분고분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알겠어요. 설윤 씨 아이 낳을 때까지 내가 잘 보살필게요.”설윤이 도망가버린 뒤로 임가희는 겉으로는 평온한 척했지만 사실 매일 밤을 불안 속에서 지새우고 있었다.사람을 시켜 알아보던 설윤의 행적을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됐을 때는 그 불안이 가시가 되어 그녀의 마음을 찌르고 할퀴었었다.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경계심을 내려놓고 있었는데 하필 이때 최국환이 모든 걸 알게 된 것이다.모든 거리의 CCTV, 간하림을 포함한 직원들의 증언 그리고 설윤의 임신 검사결과보고서까지 수많은 증거를 들이미니 임가희도 차마 변명을 할 수가 없었다.최국환 앞에서는 설윤의 존재를 흔쾌히 받아들이는 너그러운 본처 연기를 하며 임연지 더러 사과까지 하게 하고 선물도 전해줬었는데 뒤에서 이런 모진 짓을 했다는 게 들켜버리는 고개를 들기도 힘들었다.임신 사실을 뻔히 알
“알겠어요.” 부시아는 마지못해 대답했다.연도진은 부시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표정을 보자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병원 병실.연도진이 부시아를 데리고 도착했을 때 이엘리아는 저녁을 먹고 있었다.“오빠.” 이엘리아는 연도진 뒤에 서 있는 부시아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시아 왔구나. 엄마한테 와 봐.”부시아는 다가가서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삼촌이 말한 대로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들었는데 몸은 괜찮아요?”“천천히 회복 중이야.”“그렇군요.” 부시아는 고개를 돌려 연도진을 보며 기지개를 켰다. “삼촌, 저 하루 종일 비행기만 타고 있었더니 너무 피곤해요. 이제 집에 가요.”이엘리아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연도진은 이엘리아를 보고 조용히 말했다. “그럼 시아 데리고 먼저 갈게.”두 사람이 떠나는 뒷모습을 지켜보던 이엘리아의 눈빛 속에는 어딘지 모를 음산한 기운이 스쳤다.경주. 밤이 깊어가며 화려한 불빛들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거리에는 차들이 끊임없이 지나가고 네온사인 불빛이 창문에 비쳐 그 빛과 그림자가 뒤엉켰다.최동철은 하루의 바쁜 일정을 마친 뒤 차 뒷좌석에 앉아 피곤에 지쳐 좌석에 몸을 맡기며 눈을 감고 있었다.기사는 익숙하게 차를 시동 걸고 천천히 차들 사이로 움직였다.최동철은 이마를 문지르며 눈을 비비고 무심코 창밖을 훑어보다가 갑자기 익숙한 인물을 보았다그 인물은 바로 한 여인이었고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긴 머리를 풀어놓은 채 거리를 걷고 있었다.최동철은 본능적으로 몸을 바로 세운 뒤 그 방향을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그러나 그 여자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그는 몇 초간 멍하니 있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너무 피곤해서 헛것을 본 걸까?’‘설윤 씨가 여기 있을 리 없잖아.’그는 다시 좌석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그럼에도 머릿속엔 설윤의 얼굴과 민박집에서 일어난 일들이 떠올랐다.다움시에서 돌아온 이후 두 사람은 더
필라시 국제공항.공항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방송에서는 항공편 정보가 반복적으로 흘러나왔다.연도진은 도착 대기 구역에서 사람들 속을 살피며 부승민과 부시아를 찾고 있었다.그는 잘 맞춘 짙은 색 정장을 입고 차분한 표정으로 가끔씩 시계를 확인하며 여유 있게 서 있었다.잠시 후, 부승민이 짐 수레를 밀고 통로를 지나 나오고 부시아는 짐 수레 위에 앉아 손에 봉제 인형을 안고 신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어린 소녀는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두 개의 작은 땋은 머리를 한 채로 발랄하고 귀여운 모습이었다.“삼촌!” 부시아는 멀리서 연도진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짐 수레에서 뛰어내리며 작은 발걸음으로 달려왔다.연도진은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벌려 아이를 맞아 안았다. 드물게 부드러운 미소가 얼굴에 떠올랐다. “시아야, 돌아온 거 환영해.”부시아는 연도진의 품에 안겨 목을 감싸며 맑고 귀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삼촌, 정말 보고 싶었어요.”부승민은 부시아를 보고 잠시 말없이 눈을 가늘게 뜨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녀석, 사람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네.’부시아는 혀를 내밀고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연도진은 부드럽게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삼촌도 너 정말 보고 싶었어. 이번에 삼촌이랑 많이 놀자.”부승민은 짐 수레를 밀고 다가오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연도진 씨, 오랜만입니다.” 연도진은 일어난 후 부승민과 악수를 나누며 차분하면서도 예의를 갖춘 목소리로 말했다. “부 대표님, 시아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별 말씀을요.” 연도진은 눈길을 부시아에게 돌리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물었다. “시아야, 피곤하지 않아?” 부시아는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 “안 피곤해요. 비행기에서 만화도 보고 잠도 자고 왔어요.” 연도진은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부승민에게 말했다. “이엘리아가 며칠 전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아직 병원에 있어요. 시아를 데리고 이엘리아를 보러 갈 생각인데 같이 가실래요? 그
이엘리아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무심한 듯 말했다. “엘리샤, 우리 집에서 일한 지 얼마나 됐지?” 엘리샤는 잠시 생각하더니 조용히 대답했다. “벌써 6년이 되었어요. 아가씨.” “6년이라...”이엘리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감탄했다. “시간 참 빠르네. 처음 왔을 때는 수줍음 많던 소녀였는데 이제는 제법 어른스러워졌구나.” 엘리샤는 감사의 마음이 묻어나는 미소를 지었다. “과찬이십니다. 아가씨.” “고마워할 것까진 없어. 넌 요 며칠 동안 날 성심껏 돌봐줬잖아. 그 보답으로 네게 아파트 한 채를 선물하려고 해.” 엘리샤는 순간 귀를 의심한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정... 정말인가요?” “물론이지. 아치 거리 쪽에 있는 곳이야. 내가 아직 병원에 있어서 당장 처리하긴 어렵지만 퇴원하면 함께 소유권 이전을 하러 가자.” 이엘리아는 엘리샤의 놀란 표정을 보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게 흘러나왔지만 그 속에는 의심의 여지 없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너는 우리 집을 위해 정말 많은 걸 해줬어. 이건 당연히 네가 받을 자격이 있는 보상이야.” 엘리샤는 감정이 북받쳐 올라 목소리가 떨리며 말했다. “아가씨... 너무 과분한 선물이에요. 어떻게 받아야 할지...”이엘리아는 부드럽게 손을 흔들며 안심시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담 갖지 마. 내겐 그저 작은 선물일 뿐이지만 네겐 새로운 시작이 될 수도 있잖아. 난 늘 너한테 감사하고 있었어.” 엘리샤는 두 손을 꼭 모으며 감정이 북받친 듯 말했다. “아가씨,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일해서 아가씨의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이엘리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넌 똑똑한 아이야. 난 항상 널 높이 평가해왔어. 앞으로도 내 곁에서 충성심을 잃지 않는다면 더 큰 보상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엘리샤는 감동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가씨, 평생 윌슨 가문을 위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