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아침, 부승민은 온하랑이 아침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본 후에야 회사로 향했다. 전화가 걸려왔을 때는 온하랑이 침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독서를 하고 있을 때였다.그녀 역시 자신과 곧 태어날 아기를 위해 임신과 육아에 관련된 책들을 구매해두었다.전에는 부승민에게 임신 사실을 들키기라도 할까 봐 감히 알아볼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부승민이 온하랑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고 지극정성으로 돌보게 된 지금, 그녀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온전히 아이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벨 소리가 울리고 있던 온하랑의 휴대전화 화면에는 일련의 번호가 찍혀있었다. 온하랑은 새 휴대전화로 바꾼 이후, 전 휴대전화에 있던 연락처를 옮겨오지 않았던 상태라 아무 의심 없이 걸려오는 전화를 받았다.통화 수락 버튼을 누르자 이내 전화가 걸렸다.“여보세요?”수화기 너머에서 한 여자의 자조적인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야, 온하랑. 넌 지금 네가 뭐라도 된 것 같지? 부승민이 미디어에 너희 둘 사이 다 까발리고 이제 넌 임신까지 한 몸이니, 넌 지금 네가 그 누구보다도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있겠네?”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오미연이었다.부승민은 이미 오미연에게 정식으로 소송을 걸고 회사에서도 정리해고를 통보한 상태였다.다만 소송에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관계로 오미연은 아직도 법의 제재를 받지 않은 채 자유의 몸으로 마음껏 날뛸 수 있었다.온하랑이 퇴원하는 그 날, 오미연도 병원에 있었다. 그녀는 부승민이 온하랑을 아기 다루듯 조심스레 끌어안은 채 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그 둘의 모습은 오미연의 눈에는 꼴사납기 그지없었다.쟤가 뭔데?대체 온하랑 같은 촌년이 뭐길래 부승민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거냐고? 쟤는 어울리지 않아, 자격이 없다고! 온하랑은 갑자기 걸려온 오미연의 전화에 어이없다는 듯 가볍게 실소를 터뜨리고는 일부러 오미연의 화를 더 돋울 심산으로 대답했다.“그러게, 난 오히려 너한테 고마워해야지. 만약 네 스캔들만 아니었다면 부승민
당당한 온하랑의 대답에 수화기 너머의 오미연은 한동안 침묵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할 말이 없어진 그녀는 바로 욕부터 내뱉기 시작했다.“이런 빌어먹을. 그래 계속 그렇게 센 척 해봐. 언제까지 그렇게 당당할 수 있나 두고 봐!”오미연은 온하랑의 말을 죽었다 깨어나도 믿지 않을 듯싶었다.분명 온하랑이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것이라 믿고 싶었다.천하의 부승민이 어떻게 고작 온하랑 하나 때문에 BX 그룹 대표 자리를 버린다고?부승민은 젊은 나이에 피라미드 꼭대기까지 올라간 사람이다. 손에 이토록 막강한 권력을 쥐기까지 마냥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부승민이 이 눈부신 순간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려왔는지 오미연은 잘 알고 있었다.그런 자리를 이렇게 쉽게 포기할 리가 있나?전화가 끊긴 후, 온하랑은 침대 위에 앉아 오미연이 했던 말을 천천히 되짚어보았다.만약 오미연의 말이 사실이라면 임원들의 눈에 들어온 차기 대표라는 사람은 대체 누구인 걸까? 경영 매니저일 리는 절대 없었다. 그런 직업군의 사람들은 믿을 게 못 되니까.그럼 그나마 가능성 있는 사람은 몇 안 되었다.둘째 삼촌인가?둘째 삼촌이라면 지금 회사의 회장직을 꿰차고 있는 것은 맞지만 정작 회사 일에는 손도 대지 않고 자신의 프랜차이즈 사업에만 몰두하는 사람이었다. 일전 둘째 이모와의 만남을 잠깐 가졌을 때도 둘째 삼촌 부광훈은 지금 B 시에서 운영 중인 프랜차이즈에 문제가 생겨 그쪽으로 출장을 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그렇다고 사촌 동생일 리도 없었다.부승민이 사촌 동생에게 승진을 권유했을 때 이미 한 번 매몰차게 거절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온전히 연구센터에만 머물며 연구개발에만 집중하고 싶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굳이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 여러 가지 일들을 모두 책임지며 사는 것은 사촌 동생의 성격에도 맞지는 않았다.그럼 남은 사람은 단 한 명, 부민재 밖에 없었다.부민재는 워낙 천성이 온순하고 다정한 사람인지라 분명 임원들이 좋아할 스타일이었다.한참이나 생각에 잠겨있던
고승범 이사의 말이 끝나자 회의실에는 숨 막히는 정적만이 흘렀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어 엄청난 긴장감을 조성했다.임원들은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며 아무도 먼저 입을 열 엄두를 내지 못했다.누군가는 서로 귓속말을 나누며 수군대고 있었고, 또 누군가는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인 척 모르쇠를 시전했고, 서로 눈빛을 주고받는 임원들도 있었다.고승범은 주위를 슬쩍 둘러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저도 당연히 부승민 대표가 회사를 위해 이뤄낸 업적들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 공로들이 부승민 대표 해임의 면책 사유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수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적이 있는 장군이라고 해도 단 한 번의 실수로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게 도리이니까요. 게다가 이때까지 회사 이미지에 타격을 주었던 그 일들은 모두 부승민 대표의 사생활 때문에 벌어진 일 아닙니까? 앉아 계신 여러분들도 잘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부승민 대표의 위치에서는 일거수일투족이 회사를 대표할 수 있다는 걸 자각하고 항상 처신을 똑바로 했었어야 합니다. 그 간단한 회사 이미지도 지켜내지 못한 대표가 저희 임원진들과 주주들은 지켜낼 수 있을까요?”고승범 이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 임원이 머뭇거리는 듯한 음성으로 맞받아쳤다.“하지만 지금 이 타이밍에 대표이사를 교체해버리면, 주주들이 새로운 대표이사를 믿을 수 있을까요?”“적어도 주주들에게 저희의 진심 어린 태도는 보여드릴 수 있겠죠. 주주들이 원하던 해명을 대신한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이대로 주주들이 우리 회사 주식을 헐값에 팔아버리는 걸 보고만 있을 겁니까?”고승범 이사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질문에 대답했다.“최근 들어 업무에 사적인 감정을 끌어들이는 일이 지나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전 누가 MQ 전무 교체를 제안했을 때도 빗발치는 언론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그게 최선이었습니다. 하지만 부승민 대표는 자신의 아내인 온하랑을 지키기 위해 본사
“하지만 오늘 다들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신 걸 보니 다들 제 경영방식이랑은 맞지 않으신 모양이네요. 그렇다면 저도 더는 강요할 생각 없습니다. 뜻이 다른데 같은 길을 계속 갈 수는 없죠. 오늘부로 저 부승민은 BX 그룹 대표이사 및 총지배인 자리에서 내려올 것을 선언합니다!”“저와 함께 일 하면서 안 좋았던 경험도 분명 있으셨겠지만 그래도 이 5년 동안 저를 믿고 따라와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내년이면 저는 서른 살이 됩니다. 제가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는 해이기도 하죠. 아내가 임신했으니 저는 이제 아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에 더 많은 힘을 쏟아보려 합니다.”자리에 있던 임원들의 표정은 아주 다양했다.회의실에는 몇 분 동안 고요한 적막이 내려앉았다.그러던 중 한 임원이 침묵을 깨고 질문을 던졌다.“대표이사 자리가 BX 그룹에서 어떤 의미인지를 다들 잘 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대표님께서도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마시고요. 제가 봤을 때 이 일은 투표로 결정해야 한다고 봅니다.”“필요 없습니다.”부승민이 앉아있던 의자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바퀴가 달려있던 의자는 그 반동으로 뒤로 쓱 밀려났다.“서면으로 된 사직서도 진작에 이사회 공식 메일로 보내놨으니까 확인하고 처리 부탁드리겠습니다. 회사의 성장에 적합한 새 대표를 정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해지는 즉시 저도 회사의 규정에 따라 인수인계하고 가겠습니다.”역시 예상했던 대로, 오늘 이사회에서 일어난 일은 모두 부승민의 예상대로였다.그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사직서를 내버리자 현장에 있던 임원들은 당황한 나머지 뭐라 입을 더 열지 못한 채 멍청한 표정으로 부승민을 지켜보았다.임원들도 부승민이 이토록 고분고분할 줄은 몰랐다.뒤늦게 알아챈 임직원들도 놀란 눈으로 부승민을 바라보았다. 사람 성격이 이렇게 쉽게 바뀌어도 되는 거였나? 임원들은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 불안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새로운 대표는 임원진 분들께서 잘 상의해보시고 결정해주시길 바랍니다.
부승민은 온하랑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똑바로 마주 보았다.지금 부승민의 모습은 어딘가 불쌍해 보였다. 마치 억울하게 주인에게 버림받은 대형견의 모습과도 같아 보였다.부승민의 그런 모습에 홀리는 듯한 기분을 느낀 온하랑의 심장이 어딘가 모르게 간질간질해왔다.분명히, 먼저 이혼 얘기를 꺼낸 사람은 부승민인데.그가 사랑하는 사람 역시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온하랑은 잘 알고 있었다.부승민이 사랑하는 사람은 추서윤이다.온하랑도 고작 아이 때문에 부승민을 물고 늘어질 생각은 없었다.온하랑은 두 눈을 떨구고 부승민의 질문에 답했다.“네가 BX 그룹 대표이사이든 아니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지금 나한테 남은 거라곤 너랑 아이뿐이야.”부승민이 온하랑을 꼭 껴안으며 자신의 머리를 그녀의 아이가 있는 배 위로 갖다 댔다. 여태껏 부승민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던 다정하고 따뜻한 모습이었다.이런 장면은 온하랑이 예전부터 수천수만 번이고 꿈에 그려왔던 순간이었다. 과거의 온하랑은 이 순간을 위해서라면 무슨 대가든 지불할 수 있던 사람이었다.하지만 그녀의 바람이 현실이 된 지금, 온하랑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평온했다.부승민은 자신을 좋아해 줄 리가 없었다. 그걸 잘 알기에 다시는 멍청한 짓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나중에 애기 나오면 자주 보러 와도 돼.”순간적으로 멈칫한 부승민이 고개를 들어 온하랑을 바라보았다.“그게 무슨 뜻이야? 애 낳으면, 바로 나랑 이혼하겠다는 소리야?”온하랑의 답변이 들려오기도 전에 부승민은 다급하게 몸을 일으켰다.“내 아이가 이주혁한테 아빠라고 부르는 모습을 봐야 한다는 거야?”“이게 주혁이랑은 또 무슨 상관인데? 아이는 나 혼자 돌볼 거야.”“왜? 이 아이도 너처럼 편모가정에서 자라게 만들려고? 태어날 때부터 아빠도 없는 자식으로 키울 생각이야?”머리가 지끈해진 온하랑의 안색이 창백해졌다.“그것도 아니면, 또 다른 새 아빠 하나 찾아주게? 세상에 어느 누가 친자식도 아닌 애를 진짜 사랑으로 돌봐줄 수 있을
”넌 내가 무슨 바보인 줄 알아?”온하랑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BX 그룹 새 대표는 누군데? 네 형?”“응, 근데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역시 부민재였다니.“오미연한테서 전화 왔었어.”온하랑의 말에 부승민의 표정이 흔들렸다.“너한테 뭐 심한 말 같은 건 안 했지?”온하랑은 굳이 부승민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오늘 일에 대해 진작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얘기하더라고.”부승민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회사에서 나올 때, 형이랑 오미연이 같이 있는 걸 봤거든.”“... 이미 다 짜여있던 판 같더라. 이 판에서 형이 어떤 역할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사실 이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온하랑 역시 부민재가 오미연 전무와 연락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몰랐다. 단순히 연락만 하고 지낸 게 아니라 부승민까지 대표 자리에서 밀어내고 BX 그룹의 새로운 주인으로 대표의 자리에 오를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한때 세 사람이 한집에서 같이 살던 때, 온하랑이 두 사람에 대한 인상은 사뭇 달랐다. 부승민은 냉정하고도 매정할 정도로 차가운 사람이었고 부민재는 그와 반대로 다정하고 친근한 느낌이었다. 그만큼 온하랑도 잘 챙겨주던 사람이었다. 온하랑 역시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부승민에게는 입을 열 엄두를 못 내고 부민재에게 도움을 요청해왔다. 예를 들면 학창 시절, 자꾸 성가시게 따라붙는 남자를 수십 번 거절해도 계속 달라붙을 때, 그런 온하랑을 도와주던 건 항상 부민재였다. 사실 부민재가 어떤 짓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이후로 온하랑을 성가시게 하는 남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큰아들이 아닌 둘째 부승민이 대표이사 자리에 오른 것도 모두 할아버지의 결정이었다. 온하랑 역시 할아버지의 결정이 틀렸다고는 생각해본 적 없다.온하랑이 부승민을 좋아하던 시절, 콩깍지가 단단히 씌어버려 그때까지만 해도 부승민은 성격만 빼면 부민재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나다고 생각했었으니까 말이다. 그게 학업이든 일 처리 능력이든.하지만 방관자가 된 지금
“지금 바로 갈게요!”할머니의 다급한 목소리에 심장이 쪼그라드는 듯한 기분을 느낀 부승민이 바로 대답했다.“우선 하랑이한테는 알리지 마.”“알겠어요, 할머니.”집을 나서기 전, 부승민은 안방으로 들러 선의의 거짓말을 남겼다.“하랑아, 인수인계 때문에 회사에 잠깐 볼 일이 있어서, 금방 다녀올게.”“가봐, 집에는 아주머니 계시니까.”온하랑도 별생각 없이 부승민의 말에 대충 대답했다....급하게 병원에 도착한 부승민은 아직 응급실의 응급상황을 알리는 빨간 신호등이 꺼지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할머니와 가정부가 밖에 있는 간이의자에서 할아버지가 무사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할머니!”부승민은 빠른 걸음으로 할머니에게 달려가 다급하고도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어떻게 된 일이에요? 할아버지께서 갑자기 왜...”어두운 낯빛의 할머니는 그저 한숨만 푹푹 내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옆에 함께 있던 가정부가 부승민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오전에 추서윤 씨가 왔다 가셨는데, 대체 할아버님께 무슨 말을 한 건지... 그리고 회사 일까지 전해 들으시더니, 갑자기 저렇게…”부승민은 착잡한 마음에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부승민의 눈빛에는 순간적으로 차가운 기운이 감돌더니 깊이 숨을 들이쉬고는 비상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겨 휴대전화를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오늘 오전에, 추서윤이 할아버님 집을 찾아왔어. 당장 찾아내!”“네.”통화를 끝마친 부승민은 다시 대기실로 돌아와 할머니의 앞으로 가 한쪽 무릎을 꿇고는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할머니를 바라보는 그의 눈시울은 이미 붉게 물들어있었다.“할머니, 차라리 제 탓을 하세요.”만약 부승민이 추서윤을 데리고 귀국하지만 않았어도 온하랑이 이혼 서류를 내미는 일도 없었을 테고, 그랬다면 지금 할아버지가 저런 곳에 누워 있을 일도 없었다.만약 부승민이 진작에 추서윤을 외국으로 떠나보내기만 했어도 할아버지가 쓰러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이 모든
전화를 끊고 돌아선 부민재는 풀이 죽어 혼자 우두커니 의자에 앉아있는 부승민을 보았다. 마치 하나의 동상처럼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그저 멍하니 앞만 응시하고 있었다.부민재는 다가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승민아.”정신을 차린 부승민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부민재를 향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괜찮아요, 형.”그저 갑자기 힘이 빠져버렸을 뿐이다.부승민에게 있어 할아버지는 온하랑이 온강호를 생각하는 마음과 같았다.그는 어머니가 누군지도 모르고, 아버지의 모습도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하기 시작할 때부터 쭉 할아버지의 곁에 있었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수 그를 키웠다. 한 대를 건너뛰었다고는 하지만 그에게 있어 그분들은 부모님과 다름없었다.“하랑이한테 알리지 않을 거야?”“일단 비밀로 해요. 지금 가뜩이나 태동도 불안정한데, 견뎌내지 못할까 봐 겁나요.”부승민은 아득한 눈빛으로 말했다.그도 이렇게 큰일을 얼마 감추지 못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그래, 그게 좋겠다.”“형, 기자들이 왔어요.”부현승이 멀지 않은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경비더러 일단 막고 있으라고 해. 내가 경호원 부를게.”부민재가 말했다.BX 그룹 회장이 오늘 급히 입원하며 그룹 내에 불러 올 인사 변동에 대한 소식은 일부 언론 매체에 놓고 말하면 핫이슈 그 자체였다.요즘에는 사람들의 인기를 끌기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리고 덤벼드는 언론 매체가 적지 않았다. 전에 한 여배우가 암 투병으로 사경을 헤맬 때만 해도 한 무리의 기자들이 그녀의 병실 앞에 진을 치고 있으며 사망선고가 내려지기만을 기다리다가 의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바로 뉴스를 내보냈다.한편 기자들이 너무 많이 몰려온 탓에 경호원들도 섣불리 막을 수 없었고,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이때 한 기자가 응급실 앞으로 뛰쳐나와 주변을 둘러보더니 부승민 앞에 불쑥 카메라를 들이밀었다.“안녕하세요, 부승민 씨. 지금 어떤...”우당탕!발아래 떨어진 망가져 버린 카메라와 자리에서 일어선 부승민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