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작품을 좋아한다며 가격을 두 개 정도 높게 불렀어. 마침 할 일도 없어서 촬영하겠다고 했지.”김시연은 샌드위치를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너무 무리하지 마.”“알겠어. 다음 달에 정말 도진 씨랑 결혼하는 거야?”“응.”“어머님이랑 아버님이 그래도 도진 씨가 마음에 드시나 보네?”김시연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엄청 좋아해.”“나중에 두 사람이 이혼하겠다고 하면 동의하실까?”“음...”김시연은 말문이 막혔다.“동의 안 해도 어쩔 수 없지. 그리고 우린 애초에 결혼하는 것도 아닌데 뭔 이혼이냐? 시간 지나면 두 사람도 알아서 받아들이겠지.”“하긴... 요즘 정신없지?”“응. 오늘은 도진이랑 마트에 가서 필요한 물건들을 사려고.”외출 전, 김시연은 온하랑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하랑아, 나 먼저 나갈게.”“응. 잘 다녀와.”온하랑도 시간을 보고 서둘러 스튜디오로 출발했다.오늘 가게 되는 이 스튜디오는 평소 자주 가던 촬영장 바로 옆에 위치해 있었다.온하랑이 스튜디오에 도착하자 직원이 폴더 하나를 건네주며 말했다.“하랑 씨, 어제 계약한 손님이 작성한 계약서예요. 저랑 이미 얘기가 끝났는데 하랑 씨도 확인해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계약서를 건네받은 온하랑은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다.“손님께서는 총 4벌을 준비하셨고 이틀 동안 나눠서 찍을 예정입니다. 사진은 30장으로 정했고 더 원할 시 한 장당 10만 원의 추가 비용이 발생하게 됩니다. 액자는 손님께서 원하신다면...”“마감은 언제죠?”“그건 하랑 씨랑 직접 만나서 얘기한다고 하셨습니다. 촬영 들어가기 전에 선호하는 스타일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싶다며 지금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그래요?”온하랑은 폴더를 다시 건네줬다.“그럼 지금 바로 가볼게요.”온하랑은 곧바로 대기실을 향해 걸어갔다.조심스럽게 노크 두 번을 하고 안으로 들어갔으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본 순간 할 말을 잃었다.안에는 아무도 없었다.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때쯤 눈앞이 어두워
커플 사진은 찍는 건 온하랑도 처음이었다.비록 김시연과 연도진이 가짜 결혼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김시연의 말을 귀담아듣고 귀를 기울였다.온하랑은 어젯밤 벼락치기로 다른 작가들의 작품과 경험 글을 읽었다. 결국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포즈가 한정적이기에 옆에서 참견하는 것보다는 자유롭게 플레이하도록 돕는 게 훨씬 낫다고 했다.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쌓아온 경험이 있었던 김시연은 어떻게 하면 카메라에 잘 나올지 알고 있었다.“인터넷으로 웨딩 스튜디오에서 찍은 사진들을 엄청 많이 봤거든? 그런데 하나같이 자세가 너무 어색하거나 표정이 부자연스러운 거야. 난 이런 게 싫어.”김시연은 온하랑에게 사진을 보여줬다.대부분 남자가 여자의 허리를 감싸거나 여자가 남자의 어깨에 기대어있는 다정한 포즈들이었다.“나이 많은 어르신들은 참 좋아하겠다. 일단 엄마랑 아빠한테 보여줄 사진 몇 장 대충 찍고 그다음은 마음대로 하자.”“그래.”“난 자연스러운 게 좋아. 서로 눈도 마주치고 얘기도 하고, 예를 들면 이런거...”김시연은 마음에 드는 사진 몇 장을 온하랑에게 더 보여줬다.사진 속의 남녀는 석양 아래서 손을 잡고 서로를 바라보며 산책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밝은 미소와 따뜻한 분위기가 더해지니 더없이 자연스럽고 아름다웠다.두 사람이 스튜디오에 도착했을 때 연도진은 이미 분장실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어스트턴트 두 명이 여분의 옷과 로케이션 용품이 담긴 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연도진의 헤어스타일만 봐도 얼마나 세심하고 꼼꼼하게 준비했는지 티가 났다.그는 몸에 꼭 맞는 검은색 정장 차림에 훤칠한 몸매와 우아한 자태로 벽에 기대어 있었다.발소리를 듣고 고개를 든 연도진은 김시연을 바라보다가 다시 온하랑을 향해 꼬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김시연은 연도진을 쳐다보더니 조용히 앞으로 걸어가 손을 들고 그의 머리카락 끝을 만졌다.“딱딱하네.”“응.”연도진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헤어스프레이 뿌렸어.”그의 의상은 맞춤 제작한 것처럼 보였다.김시연은 또
가벼운 스타일로 옷을 갈아입은 김시연은 연도진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재켓 벗어.”연도진은 순순히 정장 재켓을 벗어 어시스턴드에게 건네줬다.“넥타이도 벗어. 단추도 몇 개 풀고 셔츠를 이렇게 걷어 올려.”연도진은 김시연이 시키는 대로 했다.김시연은 연도진을 가리키며 한발 물러나 우스꽝스러운 포즈를 취하고선 빙그레 웃으며 카메라를 바라봤다.이를 놓칠 리가 없었던 온하랑은 재빨리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연도진의 표정도 카메라에 포착되었고 애정이 가득한 눈빛에서 그들의 애틋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정말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고 사실 두 사람은 평범한 커플이나 다름없었다.“이제 끝.”온하랑이 말했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그들은 야외 촬영을 나갔다.그렇게 저녁에 되어서야 촬영이 끝났다. 세 사람은 간단히 저녁을 먹고 연도진의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집으로 돌아온 온하랑은 낮에 찍은 사진들을 노트북에 옮기면서 김시연과 나란히 소파에 앉아 하나하나 살펴봤다.김시연은 사진을 보면서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미쳤네. 하랑아, 너 사진 왜 이렇게 잘 찍냐? 다 너무 예쁜데 어떻게 30장만 골라. 난 진짜 못 정하겠어.”“네가 봐도 너무 예쁘게 잘 나왔지?”“응.”김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너랑 도진 씨의 웨딩 사진이야.”김시연은 고개를 돌려 온하랑을 바라봤다.“응?”“시연아, 왜 웨딩 사진을 찍으려고 했는지 잊었어? 부모님께 너랑 도진 씨가 진지하게 만나는 사이인 걸 증명하고 싶어서 찍은 거잖아.”김시연은 곰곰이 생각했다.“맞아...”김시연은 웨딩 사진을 찍으려던 의도를 완전히 잊어버린 채 연도진과 찍은 사진에 심취해 버렸다.제3자가 봤을때도 김시연은 너무 깊이 빠져있었다.아직 결혼식도 안 올린 상황에서 이미 이렇게 몰입했으니 결혼식이 끝난 후에는 연도진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닐 게 뻔하다.연도진은 너무 똑똑하여 항상 자신도 모르게 김시연을 도랑으로 끌어들이곤 했다.물론 김시연도
임가희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다시 풀었다.“알겠어. 일단 호텔로 돌아가자.”호텔에서 내리기 전 임가희는 비서에게 지시했다.“이엘리아에 대해 더 자세하게 조사해 봐.”다음 날 아침, 비서는 그가 조사한 정보를 사실대로 임가희에게 보고했다.이엘리아의 어머니인 서희수는 서정훈의 친여동생이다. 유학 시절 남편 윌슨을 만나 필라시에서 결혼식을 올린 후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아들이 한 살 남짓 되었을 때 서희수는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인해 장례를 치르러 황급히 강남에 돌아왔고 그때 아들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10년 만에 찾은 아들이 바로 연도진이었고 위에 언급되었던 딸이 이엘리아다.이엘리아는 강남에 드나드는 일이 전혀 없었기에 이번에 들어온 건 부승민과의 딸인 부시아를 되찾는 것 외에도...이를 들은 임가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비서의 말을 잘랐다.“잠깐만, 이엘리아랑 부 대표? 부시아가 두 사람의 딸이란 말이야?”사실 임가희는 그들에 대해 자세히 조사한 적이 없었기에 오직 심증만으로 부시아가 온하랑과 부승민의 딸일 거라고 추측했다.“그렇습니다. 얼마 전 부 대표님이 부시아와 함께 서씨 가문을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사실 부시아는 하랑 씨와 부 대표님이 입양하려던 아이였어요. 모든 진실이 밝혀진 다음날 하랑 씨는 부 대표님의 집에서 나왔다고 합니다.”임가희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애써 감정을 추슬렀다.“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부씨 가문과 서씨 가문에 얽힌 일인 만큼 조사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다만 확실한 건 이 모든 게 부 대표님의 고모인 부선월 씨와 연관되어 있습니다.”임가희는 생각에 잠겼다.“계속 얘기해 봐. 그럼 이엘리아는 지금 원하는 게 뭐야?”“사실 이엘리아 씨는 부 대표님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딸에게 좋은 환경을 주고 싶다는 이유로 매달리며 부 대표님과 한 단계 더 발전하길 희망하고 있습니다.”임가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뭔가를 생각했다.“일단 알겠어. 내려가 봐.”“알겠습니다.”비서가 막
‘설마 삼촌이 직접 나 데리러 온 건가?’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날 때 이엘리아의 눈앞에 나타난 건 낯선 여자였다. 실망한 만큼 기분이 착잡했던 그녀는 싸늘한 눈빛으로 쏘아보더니 짜증 내며 고개를 돌렸다.김시연의 어머니가 아니라면 이엘리아는 그 어떤 여자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임가희는 이엘리아의 얼굴을 빤히 살펴보다가 천천히 걸음을 늦추었고 문득 옛일이 떠올라 지금 이 순간이 꿈같은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임가희의 표정을 본 이엘리아는 역겨운 듯 표정이 일그러졌다.임가희는 마음이 심란했지만 애써 차분함을 되찾고 이엘리아의 맞은편 의자를 꺼내 앉았다.“아가씨가 이엘리아 윌슨 씨군요. 제가 누군지 아시겠어요?”“그쪽이 누구든 관심 없거든요? 그리고 저랑 무슨 상관이죠?”이엘리아는 콧방귀를 뀌더니 밖에 있는 경찰한테 소리쳤다.“이봐요, 누가 이 여자 들여보내라고 했어요?”“이엘리아 씨, 일단 진정하세요.”임가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타일렀다.“꺼져요.”결코 물러설 이엘리아가 아니다.“역겨워 죽을 것 같으니까 착한 척 그만해요.”“이엘리아 씨...”“사람말 못 알아들어요? 당장 꺼지라고요.”임가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할 말을 이어갔다.“하랑이랑 다툼이 있다고 들었는데 제가 대신해서 사과할게요. 워낙 고집불통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아이라 예전에도 제가 컨트롤할 수 없었어요. 이엘리아 씨가 절 반기지 않는 걸 알고 있으니 다시는 찾아와서 귀찮게 하는 일 없을 거예요. 단지 이 말을 하고 싶어서 찾아왔어요.”말을 마친 임가희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 모습을 본 이엘리아는 비꼬며 말했다.“위선자. 온하랑이 잘못했다고 생각하면 그쪽이 아니라 온하랑을 이곳에 보내왔어야죠.”‘온하랑 엄마였어? 난 또 김시연 엄마인 줄 알았네. 누구 엄마든 상관없어. 어차피 다 똑같이 역겨우니까.’“어릴 때 제 곁에서 자란 아이가 아니다 보니 성인이 되어서도 제 말을 듣지 않더군요. 고집스러운 성격 때문에 매일 싸우면서 지내다가 결국에는 사촌 언니를 죽음으로.
임가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려는 순간 이엘리아가 불러세웠다.“잠깐만요.”“왜 그러시죠?”임가희는 고개를 돌려 이엘리아를 바라봤다.이엘리아는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벙끗했으나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약속한 일 잊지 마세요.”사실 이엘리아는 온하랑의 임신 소식을 알려 아이를 없애는 방법으로 온하랑을 떼어내려고 했다.하지만 아직 정보가 전혀 없는 눈앞의 이 여자를 믿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온하랑의 엄마이기에 딸의 임신 소식을 듣고 충분히 마음이 바뀔 수도 있으니 섣불리 행동하지 않았다. 이엘리아는 두 사람이 알아서 싸우길 바라며 더 이상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경찰서에서 나온 임가희는 미간을 찌푸린 채 먼 곳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더니 곧이어 비서에게 말했다.“가자.”비서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 후 그녀의 뒤를 따랐다.“오늘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특히 회장님한테. 알아들었지?”임가희는 비서를 흘겨보더니 싸늘한 말투로 무언의 협박을 했다.“알겠습니다.”비서는 재빨리 답했다.“사모님, 저희는 지금 경주로 돌아가는 겁니까? 아니면...”계획대로라면 임연지의 일을 처리하고 경주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현재 상황으로 봤을 땐 계획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었다.아니나 다를까 임가희의 말은 어긋나지 않았다.“오늘은 일단 호텔로 가자. 언제 돌아갈지는 내가 나중에 얘기해줄게. 그리고 온하랑 요즘 뭐 하고 지내는지 조사해 봐.”온하랑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시달리는 걸까?“알겠습니다.”비서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임가희의 핸드폰이 울렸다.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낸 임가희는 발시자 표시를 보고 한껏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연지야?”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임연지의 목소리는 잔뜩 갈라져 있었다.“고모, 신청은 다 하셨어요?”“이미 끝냈으니까 걱정하지 마. 뭐 필요한 거 있어?”임가희의 목소리는 너무나 부드러웠다.임신 사실을 알고 구치소에서 나온 임연지는 우울
몇 초간의 침묵이 흘렀지만 그 어떤 이상함도 발견하지 못했다.충격을 받은 듯 정신 못 차리는 임가희의 표정을 보자 임연지는 한껏 비꼬며 말했다.“고모부가 그 두 사람을 어떻게 대했는지 잊은 건 아니죠?”임가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진지하게 생각했다. 놀라움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점차 임연지의 말을 믿게 되었다.심지어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던 의혹들도 마침내 답을 얻었다.최국환은 부승민을 만나고 나서부터 갑자기 임연지를 포기하겠다 주장하며 경주에 돌아가자고 설득했다.생각해 보니 어쩌면 부씨 가문과의 다툼을 꺼렸던게 아니라 부승민의 아들이어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온하랑을 기어코 최씨 가문에 들이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있었네. 며느리 될 사람이라서 그랬던 거네?’임연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온하랑의 훌륭함을 부정하며 자기 멋대로 생각했다.부승민은 자신을 둘러싼 비밀에 대해 모르거나, 이미 알고 있으면서 최씨 가문에 돌아갈 생각이 없어 거절했거나 둘 중 하나다. 뭐가 됐든 부승민과의 관계를 좁히려면 온하랑이 필요한 건 사실이다.임가희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던 임연지는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고모, 설마 이 일 때문에 절 버리실 건가요?”임연지는 초조하게 바라보며 내심 아니라는 답이 들려오기를 기대했다.최동림은 건강이 안 좋을 뿐만 아니라 최동철과 나이 차이도 많이 났다. 다른 세력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절대 최동철을 이길 수가 없다.온하랑은 최동림의 누나다.만약 임가희가 최씨 가문에 대해 다른 계획이 있다면 얼마든지 온하랑을 받아들여도 된다. 심지어 최국환과 부승민이 가까워질 수 있도록 도와주면서 자연스레 부승민과 친해질 수 있다. 나중에 부승민과 손을 잡고 최동철을 맞선다면 본인과 최동림에게 더 많은 이익이 생기니 결코 불가능한 일인 건 아니다.그러나 알다시피 온하랑과 임연지는 절대 한배를 같이 탈 수 있는 사이가 아니다.임연지도 걱정이 앞서 그런 질문을 했던 것이다.임가희는 아련하게 임연지를 바라보며 그녀의 손을 잡
김시연의 웨딩 촬영을 마친 온하랑은 곧바로 다른 촬영장으로 넘어갔고 그렇게 부지런히 저녁까지 일하다가 간신히 시간을 빼내 부시아를 만나러 병원으로 향했다.온하랑은 침대 반대편에 앉아 간호사가 부시아의 상처를 살펴보는 걸 지켜봤다.“회복이 아주 잘됐어요. 내일 바로 실밥 제거해도 될 것 같아요.”간호사의 말에 부시아는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실밥만 풀면 퇴원할 수 있는 거죠?”“맞아요.”“아싸!”부시아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듯 신나게 춤을 추며 온하랑을 바라봤다.저녁 식사를 마친 후 온하랑은 부시아의 손을 잡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산책했다.“어휴...”어디선가 들려오는 한숨 소리에 온하랑은 고개를 숙였고 마침 애어른처럼 수심에 가득 찬 채 표정을 찌푸리고 있는 부시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온하랑은 그 모습이 귀여운 듯 웃음을 참지 못하며 물었다.“무슨 일 있어? 왜 한숨을 쉬는 거야?”부시아는 고개를 들어 온하랑을 바라봤다.“숙모, 실은 오전에 아저씨가 절 보러 오셨어요.”온하랑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저씨라는 사람이 이엘리아의 오빠를 가리킨다는 걸 알았다.윌슨 가문에서 강남을 방문했다는 건 이엘리아를 빼내기 위해 서정훈의 도움을 청하러 온 게 분명하다.“그 사람이 무슨 말을 했길래 이렇게 한숨을 쉬는 거야?”온하랑이 물었다.“돈을 엄청 많이 주면서 앞으로 누구랑 살고 싶은지 물어봤어요. 전 고민도 없이 삼촌이랑 살고 싶다고 얘기했거든요? 그러니까 그 이상한 아줌마가 경찰서에서 나오면 다시는 제 근처에 얼씬도 못 하게 쫓아낸대요.”온하랑은 의아했다.“그럼 잘된 일 아니야?”이엘리아의 최측근마저도 그녀의 행동이 잘못됐다고 생각한 모양이다.부시아는 초조하게 손톱을 뜯으며 말을 이었다.“그쵸... 사실 처음에는 그 아줌마를 대신해서 부탁하러 온 줄 알고 엄청 쌀쌀맞게 대했거든요.”온하랑은 웃으며 말했다.“괜찮아. 다 이해해 주실 거야. 시아가 퇴원할 때 그분이 아직도 강남에 계신다면 식사 한 끼 대접하는 게 어때? 이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