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 망월각은 손님이 찾아온 것 같았다.지언은 고월영을 막아서며 입을 열었다.“시간도 늦었는데 전하에게 무슨 용건이라도 있으신지요? 제가 전달해 드리겠습니다.”“급한 일로 상의할 게 있어요.”이건 직접 얼굴을 보며 말을 꺼내야 한다. 지언을 통해 전달한다면 돌고 돌아 언제쯤 최신 소식을 알 수 있을지 모른다. 평소 그녀에게 깍듯했던 지언이 그녀를 자꾸 붙잡는다.“죄송합니다. 오늘은 중요한 분과 선약이 있으셔서 곤란...”“그럼, 손님이 돌아갈 때까지 기다리죠.”고월영은 머지 않은 곳에 자리 잡은 정자로 향했다. 그 모습은 쉬이 돌아갈 것 같지 않았다.그녀의 발목은 이쯤이면 거의 나을 때도 된 것 같았으나 아직 움직임이 시원찮아 보인다. 하지만 자세는 다행히 괜찮아 보였다. 그가 뒤를 따랐다.“가을밤은 공기가 차서 감기 걸릴 수도 있사옵니다.”“괜찮아요. 저는 그 정도로 허약체는 아니랍니다.”고월영이 그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마음이 무거워서 웃음도 나지 않았다.고개를 들어 본 어두운 하늘과 같이 그녀도 우울했다.마치 비라도 내릴 것 같이 답답한 공기, 날씨는 확실히 좋지 않았다.“무사님...”“저의 이름을 부르시면 됩니다.”“지언 씨 등불을 들어줄래요? 책을 좀 보고 싶어서요.”고월영의 시선은 여전히 하늘에 머물러 있다.정자에도 작은 등불이 있었지만, 너무 어두워서 시력에 좋지 않았다.“그러지 말고 돌아가 계세요. 시간 나면 제가 알려드리죠.”지언도 하늘을 한번 보았다. 확실히 너무 흐렸다.고월영은 잠시 생각했다. 비록 설득력은 있었지만, 몸만 잠깐 일으켰다가 다시 도로 앉았다.“저와의 만남을 달가워하지 않으실 것 같아서 여기에서 기다리려는 겁니다.”“오늘의 손님은... 얘기가 길어질 수도 있사옵니다.”그는 손님방을 힐끔 보았다.고집스런 고월영에게 그가 다시 말했다.“그럼, 제가 가서 아뢸게요.”“괜찮습니다. 여기서 기다리면 됩니다.”지금 그녀는 도움이 필요한 입장이라 특별대우를 받으며 주목을 받고 싶지
고월영은 깜짝 놀랐다.여기는 정자다.손님방과 꽤 멀리 떨어져 있었고 그들의 대화 소리도 높지 않았는데 강현준이 어떻게 이렇게 똑똑히 들었단 말인가?고월영은 책을 덮고 급히 다가가 입을 열었다.“전하, 다름이 아니라...”“오라버니, 이렇게 늦은 시간에 누구세요?”요염한 실루엣이 손님방에서 걸어 나와 강현준의 옆에 섰다.그들에게 다가오는 고월영을 보던 남궁 나희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녀는 아니꼬운 눈빛으로 고월영을 보았다.“남편도 있는 몸으로 이렇게 늦은 시간에 오라버니를 찾아오는 건 도가 지나쳐 보입니다?”고월영이 담담하게 대꾸했다.“급히 상의드릴 게 있어서요. 그리고 윗사람이니 조언을 구한다고 도가 지나칠 것까지는 없죠?”남궁 나희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오라버니는 곧 안주인을 맞이할 몸인데 혹시라도 미래 왕비께서 자신의 남편이 딴 여자랑 밤에...”“잘 아시는 분이 왜 이렇게 늦은 시간에 전하와 같이 있는 거죠? 만약 미래의 왕비께서 보시면 분명히 노하실 것입니다.”“당신...”“미래의 왕비님께서 노하시지 않게 당장 여기에서 나가주세요.”안비도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그녀도 이 가문의 주인이라고.그러니 미래의 한 집 식구를 보호하는 것은 그녀의 책임이다.“당신! 말 다 했...”약이 오른 남궁 나희는 강현준을 보면서 응석을 부리기 시작했다.“오라버니, 이것 좀 보세요. 너무한 거 아니에요?”무표정인 강현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월영은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가며 다시 입을 열었다.“고귀한 신분이니 부디 그 명성에 누를 끼치지 마시기를 바랄게요.”그녀가 고개를 돌려 지언을 불렀다.“지언 씨, 손님을 모시세요.”지언이 급히 명을 받들었다.“이쪽이 십니다.”남궁 나희는 화가 나 발을 동동 굴렀다.“오라버니,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십니까?”“집안의 잡다한 일은 왕비께서 관리하고 계시는데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냐?”강현준이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러자 남궁 나희는 안달이 났다.“내가 오라버니 미래의
손님방에는 두 명의 여자가 있었다.한 명은 하얀 드레스 차림의 단아한 모습이었고 다른 한 명은 연녹색 원피스 차림의 당찬 모습이었다.그중 연녹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저는 서정 장군의 딸 전옥빈이라고 하옵니다. 전에 한번 뵌 적 있사옵니다.”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자도 자리에서 일어서며 가볍게 인사했다.“전 안양 대감의 셋째 딸 유진이라고 하옵니다. 저도 뵌 적 있사옵니다.”오늘은 손님이 남궁남희 한 명뿐이 아니었나 보다.고월영도 둘을 어디서 본 것 같았다. 그날, 안비가 보여 준 그 여자들이다.“조금 전에는...”고월영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그저 조금 약 올리기만 하려던 거예요. 두 분께는 아무 감정 없어요. 진짜예요.”한밤중에 강현준을 찾아온 이가 남궁나희 만이 아닌 것을 그녀가 어떻게 알았겠는가.전옥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별말씀을요. 소군대감 자제분이 심하긴 했어요. 왕비께서 잘 혼내셨다고 봅니다. 다음에 저는 낮시간으로 약속을 잡을게요.”솔직하고 시원시원한 것이 고월영의 마음에 들었다.유진도 한마디 했다.“왕비께서 잘하신 거예요. 저도 다음에는 명심할게요.”고월영은 해석하려 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굳이 필요할까 싶었다.그녀는 강현준의 혼사에 일절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하여 강현준에게 시선을 옮겼다.“아직 손님이 계시니 저는...”“밤이 늦었다고 하지 않았느냐? 이들을 이대로 쭉 여기에 머무르게 하면 구설에 오른다고 했잖냐?”강현준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두 분은 우리 가문의 사람이 아니니 그만 돌아가세요.”“...”고월영은 어이가 없었다.더 이상 그녀에게 적을 만들어 주지 않으면 안 되나?전옥빈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저는 이만 돌아갈게요. 다음에 다시 찾아뵐게요.”그녀의 행동은 보이시했다.고월영의 옆을 지날 때 그녀를 향해 싱긋 웃었다.“적의 적은 아군이죠. 왕비님을 뵐러 또 올게요.”그리고 홀연히 떠났다.그녀가 말하는 ‘적’은 당연히 남궁
들어가?이 야심한 밤에 남자와 여자가 단둘이, 과연 괜찮을까?“싫으면 돌아가라. 나에게 그 정도의 인내심은 없다.”강현준의 차가운 목소리가 또다시 들렸다.고월영은 크게 심호흡하고 발을 내디뎠다.이것저것 따질 여유가 없다. 이 상황에서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안으로 들어가니 그는 침대에 앉아있었다. 멀리 떨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온몸으로 내 뿜고 있는 그의 한기를 느낄 수 있었다.고월영이 가까이 다가가려는데 그의 냉랭한 목소리가 들렸다.“문 닫거라.”“전하...”“싫으면 돌아가라.”거친 소리와 함께 고월영이 문을 닫았다. 그녀는 조금 언짢아 보였다.강현준은 그녀의 모습에 냉소를 지었다.“담도 크다. 부탁하러 왔다면서 감히 이렇게 성질을 부리느냐?”“아니옵니다.”고월영이 고개를 푹 숙였다.“제가 여기 온 이유를 아셨으니 저희 집 상황도 아실 거라 믿사옵니다. 저 대신 잘 말씀드려 줄 수 있으신지요? 저에게 1달만 시간을 주세요.”“충심인 저의 오라버니는 절대 그런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옵니다. 분명 위험에 빠져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을 것이옵니다.”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병풍을 사이에 두어 그저 어렴풋한 그의 실루엣만 보일 뿐, 그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전하?”그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고월영은 문뜩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는 병풍을 사이에 두고 얘기하고 있는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다.전에 그와 나눴던 감정들 때문에 그녀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그는 곧 반쪽을 선택할 것이고 자신의 신부가 생길 것이다.어느 신부가 자신의 낭군이 외딴 여자와 다정하길 원할까?남자인 그는 별일이 아니라고 여길지 몰라도 그녀는 아니다.“전하, 황제께서 저의 아버지를 손님으로 궁에 불러 한동안 궁 밖을 나가지 못하게 해주세요. 오라버니가 수성의 상황을 적에게 폭로하게 될까 봐 두렵습니다.”“아버지는 연세도 많으셔서 불안에 떨게 하고 싶지 않사옵니다. 그의 몸은 이런 일을 감당하시지 못하세요.
“오라버니를 대신해 수성을 지키겠다는 거냐?”강현준은 그녀의 말이 웃기지도 않았다.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를 비꼬았다.“전장이 애들 놀음인 줄 아느냐? 매 순간 피를 흘리고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게 전장이다.”“압니다.”고월영도 그곳이 얼마나 참혹한지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녀의 가족은 생사의 기로에 놓였고 누구도 나서지 않는다면 다음은 죽는 것밖에 없었다.“남령에 많은 여장군들이 있다고 들었사옵니다. 그러니 황제도 여자란 이유로 저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을 겁니다.”오늘 밤, 강현준을 만나러 온 전옥빈만 보아도 그렇다.그녀는 서정 장군의 딸이다. 고월영이 남령의 여장군들을 조사한 데 의하면 전옥빈의 언니 전옥비가 그중의 한 명이었다.“전하, 제발...”“내가 왜 널 도와야 하느냐?”강현준이 그녀를 흘겼다.고월영이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제가 우왕의 여자이니 우왕을 봐서라도...”“안 된다면?”“전하...”“이 세상에는 공짜는 없다.”강현준이 긴 손가락으로 다리를 두드리며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대가를 지불해야 하는데 감당할 수 있겠느냐?”“대가?”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고월영이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불안이 엄습 해왔다.“전하, 전 우...”“뭐?”강현준이 눈을 가늘게 뜨며 덧붙였다.“어디 한번 다시 지껄여 봐라.”고월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한참 머뭇거리던 그녀는 결심한 듯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뭘 원하는 것이옵니까?”“권력도 힘도 없는 너에게 내가 뭘 원한다고 생각하느냐?”“이유라도 말해주세요? 저 같은 유부녀를 왜 탐내시는 겁니까?”아직도 그녀를 향한 강현준의 마음이 순수하다고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녀가 순진하거나 바보거나 둘 중 하나다.그는 도대체 그녀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든 것인가?강현준이 그녀를 지그시 바라고 있다. 그 눈빛은 마치 처음 만났을 때처럼 차갑고도 뜨거웠다.“전하, 듣기 싫으시겠지만 전 어디까지나 우왕의 여자입니다. 그런데도 저에게... 한다면,
무슨 뜻인지에 대해서 강현준은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지금,”살짝 발그스름했던 그녀의 얼굴이 지금은 차갑게 식어있다. 그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널 가질 거다. 가족이 무사하길 바란다면 옷을 벗고 침대에 누워라.”그녀의 눈가에 절망마저 사라졌다. 고개를 돌린 그녀가 강현준에게 다가갔다.높이 든 그녀의 손이 옷 대신 그의 얼굴로 향했다.쨕- 소리와 함께 강현준의 분노도 슬슬 일기 시작했다.여전히 주먹을 꽉 쥔 고월영은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떠났다.“왕비님.”그녀의 모습을 보고 지언이 안절부절못했다.일이 왜 이 지경에 이르렀지?“전하께서는 그런 뜻이 아니에요. 그건...”고월영은 걸음을 재촉했다. 한마디도 듣고 싶지 않았다.그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고서야 지언이 조심스럽게 침실로 들어갔다.“전하, 이건... 좀... 너무 하신 것 같아요.”강현준은 말이 없다.지언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살폈다. 거기에는 선명한 손바닥 자국이 남아있었다.그저 잘못 들은 줄 알았는데 짐작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왕비가... 전하의 따귀를 날렸다.지언이 전하를 모시면서 전하가 누군가에게 맞은 것을 처음 보았다.심지어 여자에게 맞았다.그 손바닥 자국을 본 순간 지언의 심장도 내려앉았다.“전하, 왕비께서는 아무것도 모르시지 않사옵니까. 일편단심 우왕을 바라보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옵니까?”지언도 말을 함부로 하지 못했다. 그는 수시로 강현준의 눈치를 살폈다.강현준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그는 그저 한 곳을 응시한 채 말이 없었다.지언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 없었다.“일찍 왕비 가족을 위해 사정을 하셨고 이미 황제께도 수성을 잘 지켜내겠다고 약속하셨잖사옵니까. 이 사실을 왜 알리지 않사옵니까?”그녀의 아버지가 궁에서 받은 모든 혜택이 그가 그녀를 대신해 사정한 것임을 알게 된다면 그녀는 이토록...이정도로 현왕을 미워하지 않았을 것이다.이런 상황에 지언도 마음이 불편했다.“전하...”“술
"뭐라?"그 여자가 장군부로 돌아갔다니?강현준은 이불을 걷어차고 침대에서 내려왔다.술기운이 채 가시지 않아 아직도 정신이 몽롱했다.침대에서 내려올 때 그는 다리가 풀려 바닥에 무릎을 꿇을 뻔 해 놀란 지언이 얼른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전하, 왕비께서 편지 한 통을 쓰시고는 아랫사람을 시켜 장군부에 있는 고장군께 보내라 했답니다. 그러곤 왕비께서 혼자 저녁에 급히 나갔다고 합니다.""저녁에 급히 나가다니?"강현준은 몸을 곧게 세우고는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장군부에 돌아간것이 아니더냐?"지언은 놀라며"그... 장군부로 돌아간것은 아니고 왕비께서 편지에.. 수성에 가서 고용기를 찾으러 간다고 쓰셨습니다."강현준은 순식간에 술이 깨는것을 느끼며"누굴 데리고 갔느냐?"지언은 불안해 하며 말하길"왕비님의 시녀인 시안을 데리고 가셨습니다.""미련한 여자 같으니라고!""전하, 그런것이 아니니.. 전하께서 한 번 편지를 들여다 봐주세요."왕비는 미련한 것이 아니었다.그저 실력이 출중하지 못할 뿐이었다.아마 권력도 없고 실력도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그러기에 편지가 장군부에 당도하기 전에 가로채져 지금 지언의 손에 들려 있는지도 모른다.강현준은 편지를 가져와 한 손으로는 책상을 부축하며 섰다.다른 한 손으로는 편지를 들고 빠른 속도로 읽어 나갔다.지금 이 순간, 그는 편지를 쓴 이보다도 마음이 무거웠다.이 망할 여자 같으니라고!진짜 자신한테 조금이라도 기대지 않으려는 것인가?어찌 고장군 더러 정왕을 찾으라 한 단 말인가!아무리 지금 강현정이 사람들을 끌어 모은다 한들,우왕에게 시집간 그녀의 장군부는 엄연히 현왕의 세력중의 하나이다.장군부에 일이 터졌을 때, 현왕을 찾지 않고 정왕을 찾는다니.만약 정왕이 이번 사태에 도움을 주게 된다면, 이후에 장군부의 모든 사람들은 정왕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될것이 뻔했다.장군부가 정왕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것은 장군부와 현왕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것을 설명한다."전하, 만약 그들이 지금
고월영의 말타는 기술은 사실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황성부터 수성까지 보통의 병사들은 빠르게는 7일,늦게는 13일이 걸리는 이 거리를 그녀는 단 5일만에 달렸다.그러나 이는 매일 두 시간씩 자며 달린 결과였다.짧디 짧은 5일내에 그녀는 많이 여위였다.시안이 그런 그녀 모습을 보며 마음 아파했다."도령님... 이 산길을 지나면 수성에 달할 수 있는데 오늘 저녁도 계속 달리는 겁니까?"시안은 진작에 지도를 연구하여 기억했다."도령님, 듣기로는 이 부근에... 산적이 있답니다.""우리 두 길로 나누어 갑시다.""네?"시안은 놀라며 즉시 머리를 내저었다."안됩니다. 도령님, 저희는 반드시 같이 가야합니다. 무슨 말을 하셔도 저는 도령곁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시안아, 내 말 듣거라. 난 한시도 못 기다린다. 이렇게 위험하게 도박하고 싶지 않다. 우리 둘 중 적어도 한 명은 반드시 수성에 하루 빨리 도착해야 된다."고월영은 손바닥에 하나의 기호를 표시하였다."기억하거라, 이 기호를 보게 된다면 반드시 오라버니를 찾을수 있으니, 꼭 기억해야 하느니라!"1년전, 그들이 도적떼에 의해 뿔뿔이 흩어졌을 때, 고월영이 도적떼의 손에 놀아날 뻔 한 것을 구한 이는 바로 강현우였다.고용기는 자신이 제때에 그녀를 찾지 못해 그녀가 다쳤다고 계속 자책하였다.그 후에 그는 고월영과 특별한 기호를 정했고, 이 기호는 둘만 알고 있었기에만약 후에 또 위험에 처한다면 이 기호를 남기라고 자신에게 당부했었다.이 기호를 남기면 상대방이 반드시 자신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고월영은 시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라버니를 찾게 된다면 갖은 방법을 대서라도 그를 구출하거라. 그가 즉시 돌아가서 성을 지킬수 있게 해서 공을 세워 벌을 피할수 있게 말이야.""도령님..."시안은 눈을 붉히며 눈물을 흘렸다.그녀는 너무나도 불안했다.이렇게 헤어지면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것 마냥 무서웠지만, 고월영은 되려 이상하게 담담해 보였다."나와 약속한 기호 기억했느냐?
황족들 사이의 암투는 예전부터 존재해 오던 것이었다.황족과 혼인한 여자는 살기 위해서 그런 것들을 몸에 익혀야 했다.그들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다른 여자보다 더 많이 총애를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황족 남자들이 황위를 위해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그들의 싸움은 피를 흘리지만 여자들 사이의 암투는 소리 없는 전쟁이었다.고월영은 반항을 포기하고 몸에 긴장을 풀었다.주변을 돌던 호위 무사들은 둘을 보고 멀리 피해서 도망갔다.남령국에서 여왕비의 명성은 아마 눈앞의 이 남자로 인해 바닥으로 추락한지 오래였다.“황족으로 사는 삶은 저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전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그래도 나를 위해서….”“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 살고 싶습니다. 저는 이런 삶의 방식이 너무 싫어요! 게다가 전하께서도 저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으셨잖습니까.”지금 하는 모든 말은 의미가 없었다.고월영은 원망이 아닌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전하의 이 현왕부에서 저는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전하의 세력 범위 안에서요. 벌써 잊으셨나요?”잊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이 왕부의 상공에 얼마나 거대한 먹구름이 끼었는지 처음으로 확인했다.더 이상 현왕부에는 따뜻한 햇살이 비치지 않을 것 같았다.고월영은 그를 부드럽게 밀치고 갈 길을 가버렸다.그는 홀로 정원에 남아 고독을 달랬다.고월영이 영하각으로 돌아오니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무아린이었다.“어머니께서는 무안희를 버리셨습니다. 저에게 돌아가서 성녀의 자리를 물려받으라고 하더군요.”무아린은 작별인사를 하러 온 것이었다.“그래서 떠나려고요?”고월영은 무아린을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사람마다 각자의 선택이 있는 법이다.“저에게는 선택지가 없습니다. 돌아가지 않으면 갈 곳도 없고요.”어머니가 그녀를 마음먹고 찾으면 어디로 도망가도 소용없었다.며칠 돌아가는 시간만 늦출 뿐이었다.무안희마저 백단교 사람들의 마수를 피해가지 못했는데 무아린은 자신이 없었다.“오라버니랑은 이
말을 마친 강현준은 뒤돌아섰다.“현준아!”안비가 다급히 붙잡으려 달려갔지만 강현준의 옷깃도 스치지 못했다.지금 헤어지면 또 언제 만날 수 있을는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현준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단지 너와 현우가 너무 보고 싶어서….”안타깝게도 그 말은 이미 멀리 가버린 강현준에게 닿지는 않았다.안비는 고개를 돌리고 마지막 희망을 강현우에게 걸었다.그녀는 달려가서 강현우의 손을 잡으려 했다.“현우….”강현우는 혐오스럽다는 듯이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현우 너마저 이 어미를 버리는 것이냐!”안비가 울며 울부짖었다.강현우는 그 모습을 낯선 눈빛으로 보고 있을 뿐이었다.그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그토록 자식을 아끼던 어머니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왜 이렇게 된 걸까?약병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결국 그는 쥐고 있던 약병이 그의 손 안에서 깨졌다.“현우야!”안비는 아들의 손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손을 뻗었다.하지만 강현우도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치고 가버렸다.두 아들이 모두 그녀를 버리고 가버린 것이다.“현우야!”여왕마저 떠난 뒤, 그녀는 무기력하게 바닥으로 주저앉아 흐느꼈다.고월영은 그 모습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뒤돌아섰다.등 뒤에서 안비의 외침이 들려왔다.“고월영, 이 악랄한 년! 넌 곱게 죽지 못할 거야!”걸음을 멈춘 고월영은 고개를 돌리고 담담히 말했다.“세상에 들통나지 않을 거짓말은 없어요, 마마. 무슨 일이든 책임이 따르는 법이지요.”“양심도 없는 년! 어찌 나한테 이렇게 대할 수 있느냐!”안비는 두 아들이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모든 원인이 고월영에게 있다고 생각했다.세상에 어찌 이렇듯 매정하고 악랄한 여자가 있단 말인가!고월영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안비를 바라보고는 걸음을 옮겼다.뒤에서 안비의 처절한 저주가 들려왔다.“언젠가 넌 나보다 더 비참한 처지가 될 것이야!”“모두에게 버림을 받을 것이고 모두가 널 혐오할 것이야!”“고월영, 이 죽일
시안이 자결했을 때 방 문은 안으로 잠겨 있었다.진심으로 죽음을 택했기 때문이었다.정말 죽으려는 사람은 절대 방해 받지 않을 시간과 환경을 마련하고 행한다. 일부러 누군가가 발견해 주기를 바라고 행한 게 아니라면 이 상황이 말이 되지 않았다.“내 궁에서 그딴 불경한 소리를 지껄이다니!”안비의 두 눈에 당황함이 스쳤다.고월영은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제 질문이 불편하셨다면 송구합니다. 다른 뜻은 없었어요.”자리에서 일어선 그녀는 품에서 약을 꺼내 강현우에게 건넸다.“현우 오라버니, 이걸 마마께 드리세요. 멍자국을 없애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멍자국?”강현우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안비는 아무리 봐도 어디 다친 것 같은 반응은 아니었다.고월영이 말했다.“목을 매달았다면 온몸의 중량이 저 천으로 쏠립니다. 그 과정에서 목덜미에 압박흔이 생길 수밖에 없지요. 이 약을 발라드리면 멍이 사라질 겁니다. 약을 안 바르면 나중에 흉터가 남을 수도 있어요.”모두의 시선이 안비의 목덜미로 향했다.안비는 밤중이라 잠옷을 입고 있었는데 하얗고 긴 목덜미가 그대로 드러났다.안비는 당황한 얼굴로 목덜미를 가렸다.“어머니….”강현우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갑자기 실망감이 몰려왔다.“나… 난 괜찮다. 사실 바로 발견돼서….”“참. 너는 이 밤중에 마마께서 나쁜 생각을 하실 줄 어떻게 알고 침소로 뛰어들어왔느냐?”고월영은 어린 궁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겁에 질린 어린 궁녀는 한발자국 뒤로 물러섰다.안비의 눈치를 보려고 했는데 고월영이 앞으로 나서며 시선을 가렸다.“설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냐?”고월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네 이년, 무슨 망언을 하는 것이냐!”안비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고월영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한발 다가섰다.“말해 보거라! 너는 어쩌다가 마마의 침소로 들어오게 된 것이냐!”“너 이….”강현준이 싸늘한 시선이 날아오자 안비는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아 버렸다.그는 고
강현준은 손에 힘을 풀었다.그녀가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어쩌다가 온기를 찾은 심장이 다시 순식간에 얼어붙었다.고월영은 그가 정신을 판 사이에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가보겠….”“전하!”밖에서 지언이 다급히 안으로 달려왔다.“전하, 안비마마께서 자결하셨습니다!”그날 밤 현왕부 사람들은 모두 궁으로 몰려갔다.고월영도 강현우의 부탁으로 함께 궁으로 갔다.다행히 안비는 자결 시도만 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안비는 고월영을 보자마자 버럭 화를 냈다.“저년이 내 궁에 어쩐 일이야? 누가 저년을 들여보냈어? 여봐라! 당장 저년을 밖으로 끌고 나가!”궁녀와 태감들이 소리를 듣고 다가왔다.하지만 현장에는 현왕과 여왕도 함께 있었다.강현준이 싸늘한 눈빛을 보내자 그들은 전부 고개를 숙이고 구석으로 물러섰다.고월영은 홀로 궁을 나갈 수는 없으니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그녀는 따분한 얼굴로 안비 궁 안의 시설들을 구경했다.방 안에는 안비의 울음소리만 들렸다.두 아들은 멀뚱멀뚱 서서 어머니가 우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한참을 울던 안비는 아들들이 반응이 없자 목청을 높였다.결국 마음이 약해진 강현우가 말했다.“어머니, 형님도 너무 화가 나셔서 그런 거지 않습니까. 며칠만 참고 기다리면 금족령은 금방 풀릴 겁니다.”안비는 조심스럽게 강현준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는 줄곧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그녀는 더 구슬피 울며 말했다.“그래도 이 어미를 가장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은 우리 현우밖에 없구나. 아들이라고 둘밖에 없는데 현준이는….”강현준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현왕은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그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면 한 마디도 꺼내지 않는 성격이었다.안비는 더 큰소리로 통곡했다.이 왕조에는 귀비가 없었다. 황후 다음으로 귀한 위치가 비였다. 현왕이 공훈을 많이 세웠기에 안비도 궁 안에서 모두에게 떠받들리는 존재가 되었다.그런 존재가 통곡하고 있자 안비 궁 궁인들의 눈에도
“대체 저를 어디로 데려가시는 겁니까?”고월영은 점점 강현준의 처소랑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그녀는 이 시점에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어차피 떠날 건데 더 이상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이따가 알게 될 거야.”강현우는 이번에 작정하고 둘을 화해시키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고월영은 그에게 질질 끌려가다시피 해서 현왕의 정원으로 들어왔다.강현준은 정원에 홀로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술 취한 사람이랑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그날 밤 술을 먹고 자신을 침범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울화가 치밀었다.이 사람이랑 영원히 보지 않고 살았으면 좋을 것 같았다.강현우는 그녀를 끌고 정원 안으로 저벅저벅 들어간 뒤, 그녀의 등을 밀치고는 휑하니 가버렸다.고월영은 발을 헛디뎌 그대로 강현준의 품에 무너졌다.‘저런 사람도 부군이라고!’고월영은 속으로 강현우를 욕하며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강현준은 팔을 뻗어 품을 벗어나려는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전하!”“네가 먼저 품에 달려들었다. 뭐가 불만이지?”강현준은 홀린 듯한 눈으로 탐스럽게 상기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눈빛에서도 다정함이 넘쳤다.정말 오랜만에 보는 다정한 눈빛이었다.고개를 든 고월영은 순간 홀린 듯 그를 바라보았다.“전하도 아시다시피 제가 원해서 넘어진 게 아니지 않습니까.”하지만 강현준에게 그런 말은 통하지 않았다.“전하, 자중하십시오!”“언제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인데?”궁에서 처음 그가 그녀를 껴안았을 때 했던 말이었다.몇 달밖에 지나지 않은 일인데도 아득하게 멀게 느껴졌다.“월영아, 우리 화해하면 안 될까?”강현준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덜미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그의 입가에서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화해?그게 가능할까?고월영은 한참을 반복적으로 생각했다.화해할까?하지만 이미 잃은 사람과 전에 입었던 상처는 여전히 그대로였다.결국 그녀는 그의 어깨를 살짝 밀치며 말했다.“전하, 제가
강현우는 얼굴을 붉히며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나중은 못 보았습니다.”단지 강현준이 뜨겁게 그녀의 입에 입술을 맞추는 장면을 보았을 뿐이었다.그때는 무슨 생각인지 그들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평생 살면서 남녀 사이의 일을 겪어보지 않은 강현우였기에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어졌다.“형님께서… 저고리 고름을 풀 때 돌아왔습니다. 나중은… 정말 못 보았어요.”강현준은 어색한 표정으로 기침했다.“끝까지 가지는 않았다.”적어도 그날 밤은 그랬다.하지만 어쩐 일인지 강현우 앞에만 서면 자꾸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방 안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형제였지만 이 순간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다.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까?한참이 지났을 때, 강현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또 할 말이 남았느냐?”강현우는 긴 한숨을 내쉬고 머뭇거리다가 말했다.“형님과 월영이 사이에 서로에게 미련이 남은 것을 압니다. 그날 밤 월영이는 진심으로 형님을 밀쳐내지 않았어요.”강현준은 말없이 붓대만 놀릴 뿐이었다.강현우는 계속해서 말했다.“만약 정말 형님께 마음이 없었더라면 제가 아는 월영이는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거절했을 겁니다.”붓대를 잡은 강현준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그가 아는 고월영이라면 죽더라도 원하지 않는 일은 거부하는 성격이었다.적어도 그날 밤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자 기분이 조금은 좋아졌다.역시 쌍둥이라서 그런지 강현우보다 강현준의 마음을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시안의 죽음이 월영이의 마음에 너무 큰 상처를 안겨서 아마 잠시는 잊어버릴 수 없을 거예요.”“하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나중에 상처가 아물고 옅어지면 형님을 다시 떠올리게 될 거라고 믿어요.”“녀석, 언제부터 이렇게 듣기 좋은 말만 골라했지?”강현준은 붓을 내려놓고 찻잔에 차를 따라 동생에게 건넸다.“말하느라 목도 말랐을 텐데 차나 한잔 하고 가거라.”강현우는 찻잔을 받아 한숨에 삼켜버렸다.형님이
운조와 서령 대군이 연합하여 청성이 함락될 위기라는 전보였다. 청성과 가까운 수성도 민심이 흔들리고 성 안은 혼란에 빠졌다고 했다.황제는 여왕 강현우를 선봉 장군으로 봉하고 내일 즉시 출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아침에 가신다고요?”고월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굳게 닫힌 방 문을 바라보았다.큰 오라버니는 길을 떠나도 문제없지만 심각하게 다친 고월영은 지금 길을 떠나기엔 무리였다.적어도 반 달은 요양해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고용기도 장군으로써 수성으로 복귀하는데 언니만 혼자 여기 남게 된 상황이 조금 안타까웠다.“알겠습니다. 저도 전하랑 같이 가겠습니다.”고월영이 말했다.강현우의 두 눈에 희열이 스쳤다.“나는… 네가 여기 남겠다고 할 줄 알고….”그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어차피 네 언니도 돌봄이 필요하니까.”“전하, 제가 현왕 전하 곁에 남겠다고 할까 봐 걱정하신 거지요?”고월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이제 오해도 풀렸으니….”“전하, 전장에 나가 보신 적은 있으세요? 현왕 전하 없이 스스로 전장에 나가신 적 있냐고요?”“월영아, 나에게는 네가 필요해.”강현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황제의 지시가 내려진 후 그는 줄곧 긴장한 상태였다.강현우의 가장 큰 약점은 스스로 결단을 내릴 주견이 없다는 점이었다.전에는 형의 말을 들었고 지금은 고월영의 의사에 따랐다. 스스로 무언가 결정을 내리는 일은 그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저와 현왕 전하는 이제 끝난 사이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이상한 생각하지 말아주세요.”뒤돌아서려던 그녀는 한마디 덧붙였다.“아직도 저를 전하의 왕비로 생각하신다면 조금만 더 전하의 곁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싫으시다면 앞으로 저를 시종으로 부려도 좋아요.”“난 한 번도 너를 내치려는 생각을 한 적 없다!”그가 두려운 건 그녀가 명의뿐인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일이었다.“그런데 왜 한동안만 내 곁을 지킨다고 하는 거냐? 평생 내 옆에 있으면 되지 않느냐?”“전하께서도 진짜 혼인을 하
아무도 무안희가 어떻게 속박을 풀었는지 신경 쓰지 못했다.모두의 시선이 안비에게 쏠린 틈을 타서 그녀는 어느새 밧줄을 풀었다.그리고 손에 칼을 빼들고 고여추의 목에 겨누었다.강현준은 음침한 얼굴로 기를 모았지만 입에서 또 다시 피가 뿜어져 나왔다.“형님!”강현우는 다가가서 그를 부축하고 고월영의 손을 잡아당겼다.고용기는 무안희를 착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지금도 여전히 그녀에게 무력을 행사하는 것은 힘들었다.연일이 무안희를 쫓아갔다.“오지 마!”무안희는 비수를 고여추의 목에 들이댔다. 하얗고 가는 목에서 뻘건 피가 뿜어져 나왔다.“안 돼!”결국 고용기는 밖으로 쫓아 나갔다.고월영도 강현우의 손을 놓고 마당으로 달려나갔다.“무안희, 그만해!”“고월영, 너 때문에 난 모든 것을 잃었어. 내가 이 자리에서 네 언니의 목숨을 취해도 넌 할 말 없잖아?”고여추의 목에서는 점점 많은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조금만 더 깊게 들어가면 숨이 끊어질 것이다.“안 돼!”고월영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강현우가 다가와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무안희, 인질 풀어주면 오늘 무사히 왕부를 떠나게 해주겠다!”“내가 너희를 믿을 것 같아?”무안희는 고여추의 목에 칼을 들이댄 채로 후문을 향해 뒷걸음질쳤다.고여추는 안비에 의해 섭혼술이 중단된 이후로 의식이 흐릿한 상태였다.그녀는 마치 허수아비처럼 무안희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고 있었다.아무도 무안희를 막지 못했다.연일은 여러 번 강현준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가 미동이 없자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왕부의 하인들도 마찬가지였다.안 그래도 고월영은 강현준을 사무치게 증오하는데 이 왕부에서 언니마저 잃으면 아마 현왕에게 죽자고 달려들 수도 있었다.무안희는 그렇게 고여추를 끌고 뒷문을 통해 빠져나갔다.“쫓아!”연일은 그제야 부하들을 호령하여 쫓아 나갔다.고월영과 강현우도 뒤따라갔다. 무안희는 뒷산의 방향으로 도망쳤다.고월영 일행이 도착했을 때, 연일이 고여추를 안고 되돌아오고
강현준의 시선이 안비에게 닿았다.안비는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아들에게서 저런 시선을 본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처음은 심복이 고월영에게 독을 먹였을 때였고 이번이 두 번째였다.겁에 질린 안비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무안희는 강현준을 똑바로 보며 계속해서 말했다.“모두 안비의 짓이었습니다. 난원을 압박해서 고월영의 체내에 독을 주입했어요. 고월영은 그때까지 아이가 무사히 살아 있다고 애원했어요.”무안희는 안비를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하지만 마마는 한 번에 실패하자 난원에게 한 번 더 독을 주입하라고 명령했지요.”“그때 아무도 고월영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 않았어요. 독을 두 번이나 주입했고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었으니까요! 전하, 이게 당신 어머니의 본 모습이에요! 얼마나 감동스러운 아들 사랑인가요!”무안희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를 제외하고 아무도 웃지 않았다.두 번의 독 주입, 그건 고월영의 목숨을 노리고 한 짓이었다.강현우는 어느새 떨리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강현준은 온기 하나 없는 눈빛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봤다.안비는 그 시선을 마주하고 한발 한발 뒤로 물러섰다.“그런 거 아니야. 난원이… 아이가 정상이 아니라고 했어. 태어나도 정상이 아닐 거라고….”“현준아, 어미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하지만 정상이 아닌 아이가 태어나면 현왕부는… 이게 다 너를 생각해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어!”강현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어머니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아무도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강현준 본인도 포함이었다.머릿속에 자신의 여자가 죽어 가는 장면이 펼쳐졌다.그녀는 이미 복 중에서 숨이 끊어진 아이를 붙잡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쓰고 있었다.이기적인 인간들은 멈추지 않고 헐떡이는 고월영을 붙잡고 재차 독을 주입했다.푸흡!강현준의 입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주변 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