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위는 조용했다.산림 전체가 순간에 고요해졌다.주위엔 다만 새소리만 들릴 뿐이었다.강현준이 손을 들자,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무사의 허리에 있던 칼은 그의 손에 들어왔다.그는 손을 들어 칼을 빼 들고 무릎 꿇고 있는 무사에게 겨누면서 얘기했다.”말해, 누가 왕비를 시해하라고 시킨 것이냐?”왕비를 시해한다고?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은 생각지도 못했다. 왜서 왕비를 시해하려 했을까?아무런 권력도 없는 왕비를, 그녀의 부군인 여왕 역시 어릴 때부터 몸이 안 좋아서 그 어떤 내정에도 참여하지 않는 사람인데.왕비를 시해하다니, 그럴 필요가 있었나.그 무사는 부들부들 떨면서 나지막이”소인, 소인 그런 적이 없사옵니다……아……. “무사는 땅에서 뒹굴면서 비명을 쳤다.“아!” 어느 집 여인이 비명을 질렀는지, 무서워서 뒷걸음질 쳤다.한쪽 손이 그녀의 발까지 굴러왔다.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여인들은 무서워서 숨도 못 내쉴 정도였고, 설사 비명소리가 없었더라도, 몸은 얼어 붙었고, 두려움에 강현준을 쳐다보았다,그의 손엔 아직도 칼이 있었고, 칼엔 피 한 방울 조차 없었다.아까 그저 손만 휘저었을 뿐인데 칼은 그의 손목을 짤라 냈다.무사는 아직도 땅에서 뒹구는 중이고, 현왕은 그저 차갑게 볼 뿐이다,산발된 머리는 말라버린 핏자국이 있었고, 진흙 먼지는 그의 멋지고 눈부신 얼굴에 살며시 흘러내렸다.분명 제일 초라한 모습인데, 그 살기 가득한 눈빛은 너무 매혹적이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이런 현왕은 거칠고 패기 있고, 독하고 당당하다!매혹적이고 무섭다!“아직도 입을 열지 않을 셈이냐?” 강현준은 또다시 칼을 들었다.이번엔 다들 똑똑히 보았다, 그 칼이 향한 곳은 바로 그 무사의 머리였다.“현왕 저하……”고월영이 그의 옷소매를 잡으며 머리를 저었다,그 피가 가득한 손은 이미 그녀를 속이 울렁이게 했다,그가 만약 또 칼을 휘두른다면, 땅에서 뒹구는 건 아마도 사람 머리겠지?그는 정말…… 마왕처럼 무서운 존재이다.강현준은 칼
주희가 쓰러졌다.강현정은 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주희야...”그녀는 힘겹게 고통을 참고 있었다.고개를 연신 젓고 있는 그녀는 입술이 피로 물들어 있었고 심한 통증으로 온몸이 아팠지만, 마음만은 따뜻했다.“전하의 손...”강현정은 손을 내려다보았다.무심한 화살의 흔적 때문에 손은 피로 흥건하게 젖었다.둘은 섬뜩했다.현왕의 조준 능력은 예상보다 정확했다.고개를 저으며 고통을 삼키고 있는 주희는 강현정만 바라보고 있었다.강현정은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표정에는 아무런 감정도 남아있지 않았다.“주희가 잘못한 거니 뒤처리는 현왕이 하는 게 좋겠다.”그는 그녀를 매몰차게 밀쳤다. 그녀는 그렇게 바닥으로 버려졌다.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조금 전 현왕이 모질게 쐈던 활이 주희 흉부에 남아 있지 않고 관통했다. 그랬기에 그의 이런 행동이 그녀에게 2차 상해가 되지 않을 수 있었다.고월영은 강현준의 옷자락을 움켜쥔 채 그저 담담하게 주희를 바라보았다.비록 화살이 흉부를 관통했지만, 그녀의 목숨까지 빼앗으려던 것은 아닌 강현준은 주희의 심장을 겨냥하지 않았다. 고월영은 의학을 배우는 사람으로서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하지만 다른 이들은 주희가 곧 죽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마음이 무거워 보이는 그들은 하나같이 경직된 표정이었다.주희는 이미 오랜 시간을 강현정의 곁에 있었다.비록 어떠한 명분도 내어주지는 않았지만, 그가 그녀를 아끼고 있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상처를 입은 그녀를 차디찬 바닥에 버렸다.현왕이 무정하다고 하지만 정왕도 똑같았다.강현준은 주희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강현정을 바라봤다.“버리시는 건가요?”강현정이 웃었다.“그저 조금 재미만 본 거다. 내가 너처럼 주위의 여자에 연민을 느낀다고 생각하는 거냐?”무심하게 쏘아붙이는 강현정은 차가운 눈빛으로 고월영을 한번 훑었다.그의 시선은 마치 독사마냥 그녀의 온몸을 집요하게 고문하는 것 같았다. 강현준의 손끝을 바라보는 고월영의
모두 발걸음을 멈췄다. 그들의 시선은 일제히 고월영에게 향했다.현왕이 고월영을 업으려 한다고?그들은 별안간 그들이 돌아올 때 절뚝이며 걸어오던 고월영의 모습이 떠올랐다.절벽 아래에서부터 그런 느린 속도라면 내일이 밝아야 간신히 여기에 도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그럼, 그 길을 현왕이 그녀를 업고 왔단 말인가?추측으로 가득한 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고월영은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강현준의 옷을 잡고 있던 그녀는 손을 풀었다.비록 정왕은 주희를 밀쳤지만, 고월영은 정왕이 주희를 아주 아끼고 있음을 보아낼 수 있었다.그는 단지 자신의 약점을 들키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더욱 아랑곳하지 않은 척하는 만큼 사실은 더욱 신경 쓰이는 법이다.그렇다면 그녀를 이렇게 대놓고 애지중지하고 있는 강현준은 그녀를 약 올리고 있는 게 분명하다.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씁쓸함을 느낀 고월영은 낮은 소리로 그를 마다했다.“괜찮습니다. 저는 말을 타고 가면 됩니다.”그녀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강현준이 돌아보았을 때의 그녀의 모습은 온몸으로 거부하는 듯한 몸짓이었다.점점 멀어져 가는 그녀의 모습에 표정이 어두워진 그는 그만 기분이 잡쳤다.그는 손을 들며 차가운 목소리로 부하들에게 지시했다.“안전하게 모셔라.”그러자 지언이 말과 함께 다가오며 공손하게 말했다.“왕비님, 오르세요.”고월영은 고개를 돌려 바닥에 쓰러져있는 주희를 힐끔 보았다지언: “왕비님을 습견한 자이기에 왕께서는 왕비님의 결정에 맡기시겠다고 하셨습니다.”“정왕의 저택으로 보내세요.”고월영은 지언의 부축으로 말에 올랐고 고개를 돌려 주희를 보았다.주희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마음속에 알 수 없는 쓸쓸함이 밀려들었다.이것이 왕의 여자로서 맞이하게 될 피할 수 없는 결말인가?남자는 여자를 오냐오냐하며 떠받들어도 결코 사랑하지는 않는다.아마 정말로 조금 중요할지도 모르지만, 권력에 비하면 너무 보잘것없다.고월영이 떠나고 주희도 정왕의 저택으로 돌아갔다.밤이 되고, 강현정이
청아가 고월영을 모시며 안비의 뜻이라고 했다.시안이 그토록 겁을 먹은 것은 얼마 전 자객을 잡으러 왔을 때 고월영이 안중에도 없는 청아 행동이 소름 끼쳤기 때문이다.시안에게는 안비 사람들이 건드려 선 안 되는 사람들이다.시안이 고월영을 부축했다.어제보다 발목 상태가 괜찮아졌지만, 여전히 통증이 있었다.여전히 절뚝이고 있었다.“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냐?”의자에 앉아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는 안비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한치의 놀라움도 보아낼 수 없었다.마치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고월영은 시안에 의지하며 그녀에게 인사했다.“어머님.”“발목을 접질렸을 뿐이옵니다. 별거 아니라서 금방 나을 겁니다.”안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너도 이젠 우리 집안 사람이니 앞으로의 거사들은 너와 형님이 함께 잘 이끌어야 한다.”“형..님?”고월영의 심장이 갑자기 철렁 내려앉았다.안비는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난 오늘 너랑 왕비를 들이는 것에 대해 상의하러 여기 온 거란다.”왕비!이 가문에는 왕이 두 명 있었다.우왕은 이미 결혼했다.그럼 이건 당연히 강현준의 혼사를 말하는 것이다.“이분은 안양 대감의 따님이고, 이분은 소군 대감의 손녀다, 그리고 이분은...”안비는 사진 여러 장을 고월영에게 보여주었다.그녀는 여전히 웃음이 만개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이분은 서정 장군의 딸이고 문무에 뛰어나 왕비로 제격이다.”“이 세 명 중에서 한번 골라보거라.”옷 속에 숨겨진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창백한 얼굴에 억지스러운 미소가 걸렸다.“윗사람의 혼사는 어머니께서 결정하시는 게 좋을 것 같사옵니다. 저는 자격이 없는 것 같사옵니다.”그에게 왕비를... 무엇때문인지 그렇게 하면 그가 고월영을 죽이려 들 것 같았다.하여 그녀는 그의 일에는 잠자코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그럼 안 된다. 너도 우리 집안의 주인인데 앞으로는 형님하고 함께 이 집안을 책임져야 한단 말이다.”날카로운 눈빛 뒤에 다른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
“준아!”안비가 그를 흘겼다. 하지만 나무라려 하는 뜻은 없었다.“말을 왜 그렇게 하는 거냐? 모두 널 위해서 그러는 것 아니냐.”“그렇다면 저는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고월영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더 이상 그의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고약한 성격이라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안비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고월영은 몸을 돌렸다.그리고 아무런 미련 없이 떠났다.고월영의 모습이 멀어지자 안비의 얼굴에 걸려있던 미소도 자취를 감췄다.탁- 소리와 함께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찻잔이 그의 발 옆에 떨어졌다.그제야 밖을 바라보던 그가 시선을 거뒀다.“왜 이러시는 것입니까?”“저 애가 뭐라고 목숨까지 내 던지냔 말이다! 너의 안중에 내가 있긴 한 거냐?”어제 수렵장에서 있었던 일을 그녀도 안 모양이다.그녀가 애지중지 키운 아들이 한 여자를 구하기 위해 서슴없이 벼랑에서 뛰어내렸다.미친 것인가?“제가 구한 것은 강현우의 와이프이옵니다.”강현준이 담담하게 대꾸했다.하지만 너무 화가 난 안비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내가 너를 낳고 키웠다. 남의 눈을 속을 수 있어도 내 눈은 못 속인다.”강현준은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안비를 더 격분하게 만드는 것은 아들의 이런 모습 때문이었다. 그는 말하고 싶지 않을 때는 칼을 목에 대더라도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기억해라! 그 애는 현우의 와이프다.”말을 마친 그녀는 몸을 돌렸다.“운조가 또 시끄러워서 너의 아바마마가 제압하려고 계획을 짜고 있더구나. 아마도 너한테 맡길 거다.”“아무튼, 떠나기 전에 마음에 드는 사람을 꼭 선택해 놔라.”...그날 이후, 고월영은 강현준을 보지 못했다.운조가 시끄러워져 수성의 민심이 황황했다.그리고 그 소문은 경성에서 급속도로 퍼졌다.비록 경성이 수성과 멀리 떨어져 있지만 요 몇 년 동안 전쟁이 끊이질 않고 있으니 전 대륙이 불안에 떨고 있었다.누구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결국에 현왕이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시안은 짐을 싸면서
오늘 밤, 망월각은 손님이 찾아온 것 같았다.지언은 고월영을 막아서며 입을 열었다.“시간도 늦었는데 전하에게 무슨 용건이라도 있으신지요? 제가 전달해 드리겠습니다.”“급한 일로 상의할 게 있어요.”이건 직접 얼굴을 보며 말을 꺼내야 한다. 지언을 통해 전달한다면 돌고 돌아 언제쯤 최신 소식을 알 수 있을지 모른다. 평소 그녀에게 깍듯했던 지언이 그녀를 자꾸 붙잡는다.“죄송합니다. 오늘은 중요한 분과 선약이 있으셔서 곤란...”“그럼, 손님이 돌아갈 때까지 기다리죠.”고월영은 머지 않은 곳에 자리 잡은 정자로 향했다. 그 모습은 쉬이 돌아갈 것 같지 않았다.그녀의 발목은 이쯤이면 거의 나을 때도 된 것 같았으나 아직 움직임이 시원찮아 보인다. 하지만 자세는 다행히 괜찮아 보였다. 그가 뒤를 따랐다.“가을밤은 공기가 차서 감기 걸릴 수도 있사옵니다.”“괜찮아요. 저는 그 정도로 허약체는 아니랍니다.”고월영이 그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마음이 무거워서 웃음도 나지 않았다.고개를 들어 본 어두운 하늘과 같이 그녀도 우울했다.마치 비라도 내릴 것 같이 답답한 공기, 날씨는 확실히 좋지 않았다.“무사님...”“저의 이름을 부르시면 됩니다.”“지언 씨 등불을 들어줄래요? 책을 좀 보고 싶어서요.”고월영의 시선은 여전히 하늘에 머물러 있다.정자에도 작은 등불이 있었지만, 너무 어두워서 시력에 좋지 않았다.“그러지 말고 돌아가 계세요. 시간 나면 제가 알려드리죠.”지언도 하늘을 한번 보았다. 확실히 너무 흐렸다.고월영은 잠시 생각했다. 비록 설득력은 있었지만, 몸만 잠깐 일으켰다가 다시 도로 앉았다.“저와의 만남을 달가워하지 않으실 것 같아서 여기에서 기다리려는 겁니다.”“오늘의 손님은... 얘기가 길어질 수도 있사옵니다.”그는 손님방을 힐끔 보았다.고집스런 고월영에게 그가 다시 말했다.“그럼, 제가 가서 아뢸게요.”“괜찮습니다. 여기서 기다리면 됩니다.”지금 그녀는 도움이 필요한 입장이라 특별대우를 받으며 주목을 받고 싶지
고월영은 깜짝 놀랐다.여기는 정자다.손님방과 꽤 멀리 떨어져 있었고 그들의 대화 소리도 높지 않았는데 강현준이 어떻게 이렇게 똑똑히 들었단 말인가?고월영은 책을 덮고 급히 다가가 입을 열었다.“전하, 다름이 아니라...”“오라버니, 이렇게 늦은 시간에 누구세요?”요염한 실루엣이 손님방에서 걸어 나와 강현준의 옆에 섰다.그들에게 다가오는 고월영을 보던 남궁 나희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녀는 아니꼬운 눈빛으로 고월영을 보았다.“남편도 있는 몸으로 이렇게 늦은 시간에 오라버니를 찾아오는 건 도가 지나쳐 보입니다?”고월영이 담담하게 대꾸했다.“급히 상의드릴 게 있어서요. 그리고 윗사람이니 조언을 구한다고 도가 지나칠 것까지는 없죠?”남궁 나희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오라버니는 곧 안주인을 맞이할 몸인데 혹시라도 미래 왕비께서 자신의 남편이 딴 여자랑 밤에...”“잘 아시는 분이 왜 이렇게 늦은 시간에 전하와 같이 있는 거죠? 만약 미래의 왕비께서 보시면 분명히 노하실 것입니다.”“당신...”“미래의 왕비님께서 노하시지 않게 당장 여기에서 나가주세요.”안비도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그녀도 이 가문의 주인이라고.그러니 미래의 한 집 식구를 보호하는 것은 그녀의 책임이다.“당신! 말 다 했...”약이 오른 남궁 나희는 강현준을 보면서 응석을 부리기 시작했다.“오라버니, 이것 좀 보세요. 너무한 거 아니에요?”무표정인 강현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월영은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가며 다시 입을 열었다.“고귀한 신분이니 부디 그 명성에 누를 끼치지 마시기를 바랄게요.”그녀가 고개를 돌려 지언을 불렀다.“지언 씨, 손님을 모시세요.”지언이 급히 명을 받들었다.“이쪽이 십니다.”남궁 나희는 화가 나 발을 동동 굴렀다.“오라버니,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십니까?”“집안의 잡다한 일은 왕비께서 관리하고 계시는데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냐?”강현준이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러자 남궁 나희는 안달이 났다.“내가 오라버니 미래의
손님방에는 두 명의 여자가 있었다.한 명은 하얀 드레스 차림의 단아한 모습이었고 다른 한 명은 연녹색 원피스 차림의 당찬 모습이었다.그중 연녹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저는 서정 장군의 딸 전옥빈이라고 하옵니다. 전에 한번 뵌 적 있사옵니다.”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자도 자리에서 일어서며 가볍게 인사했다.“전 안양 대감의 셋째 딸 유진이라고 하옵니다. 저도 뵌 적 있사옵니다.”오늘은 손님이 남궁남희 한 명뿐이 아니었나 보다.고월영도 둘을 어디서 본 것 같았다. 그날, 안비가 보여 준 그 여자들이다.“조금 전에는...”고월영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그저 조금 약 올리기만 하려던 거예요. 두 분께는 아무 감정 없어요. 진짜예요.”한밤중에 강현준을 찾아온 이가 남궁나희 만이 아닌 것을 그녀가 어떻게 알았겠는가.전옥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별말씀을요. 소군대감 자제분이 심하긴 했어요. 왕비께서 잘 혼내셨다고 봅니다. 다음에 저는 낮시간으로 약속을 잡을게요.”솔직하고 시원시원한 것이 고월영의 마음에 들었다.유진도 한마디 했다.“왕비께서 잘하신 거예요. 저도 다음에는 명심할게요.”고월영은 해석하려 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굳이 필요할까 싶었다.그녀는 강현준의 혼사에 일절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하여 강현준에게 시선을 옮겼다.“아직 손님이 계시니 저는...”“밤이 늦었다고 하지 않았느냐? 이들을 이대로 쭉 여기에 머무르게 하면 구설에 오른다고 했잖냐?”강현준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두 분은 우리 가문의 사람이 아니니 그만 돌아가세요.”“...”고월영은 어이가 없었다.더 이상 그녀에게 적을 만들어 주지 않으면 안 되나?전옥빈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저는 이만 돌아갈게요. 다음에 다시 찾아뵐게요.”그녀의 행동은 보이시했다.고월영의 옆을 지날 때 그녀를 향해 싱긋 웃었다.“적의 적은 아군이죠. 왕비님을 뵐러 또 올게요.”그리고 홀연히 떠났다.그녀가 말하는 ‘적’은 당연히 남궁
황족들 사이의 암투는 예전부터 존재해 오던 것이었다.황족과 혼인한 여자는 살기 위해서 그런 것들을 몸에 익혀야 했다.그들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다른 여자보다 더 많이 총애를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황족 남자들이 황위를 위해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그들의 싸움은 피를 흘리지만 여자들 사이의 암투는 소리 없는 전쟁이었다.고월영은 반항을 포기하고 몸에 긴장을 풀었다.주변을 돌던 호위 무사들은 둘을 보고 멀리 피해서 도망갔다.남령국에서 여왕비의 명성은 아마 눈앞의 이 남자로 인해 바닥으로 추락한지 오래였다.“황족으로 사는 삶은 저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전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그래도 나를 위해서….”“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 살고 싶습니다. 저는 이런 삶의 방식이 너무 싫어요! 게다가 전하께서도 저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으셨잖습니까.”지금 하는 모든 말은 의미가 없었다.고월영은 원망이 아닌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전하의 이 현왕부에서 저는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전하의 세력 범위 안에서요. 벌써 잊으셨나요?”잊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이 왕부의 상공에 얼마나 거대한 먹구름이 끼었는지 처음으로 확인했다.더 이상 현왕부에는 따뜻한 햇살이 비치지 않을 것 같았다.고월영은 그를 부드럽게 밀치고 갈 길을 가버렸다.그는 홀로 정원에 남아 고독을 달랬다.고월영이 영하각으로 돌아오니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무아린이었다.“어머니께서는 무안희를 버리셨습니다. 저에게 돌아가서 성녀의 자리를 물려받으라고 하더군요.”무아린은 작별인사를 하러 온 것이었다.“그래서 떠나려고요?”고월영은 무아린을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사람마다 각자의 선택이 있는 법이다.“저에게는 선택지가 없습니다. 돌아가지 않으면 갈 곳도 없고요.”어머니가 그녀를 마음먹고 찾으면 어디로 도망가도 소용없었다.며칠 돌아가는 시간만 늦출 뿐이었다.무안희마저 백단교 사람들의 마수를 피해가지 못했는데 무아린은 자신이 없었다.“오라버니랑은 이
말을 마친 강현준은 뒤돌아섰다.“현준아!”안비가 다급히 붙잡으려 달려갔지만 강현준의 옷깃도 스치지 못했다.지금 헤어지면 또 언제 만날 수 있을는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현준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단지 너와 현우가 너무 보고 싶어서….”안타깝게도 그 말은 이미 멀리 가버린 강현준에게 닿지는 않았다.안비는 고개를 돌리고 마지막 희망을 강현우에게 걸었다.그녀는 달려가서 강현우의 손을 잡으려 했다.“현우….”강현우는 혐오스럽다는 듯이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현우 너마저 이 어미를 버리는 것이냐!”안비가 울며 울부짖었다.강현우는 그 모습을 낯선 눈빛으로 보고 있을 뿐이었다.그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그토록 자식을 아끼던 어머니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왜 이렇게 된 걸까?약병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결국 그는 쥐고 있던 약병이 그의 손 안에서 깨졌다.“현우야!”안비는 아들의 손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손을 뻗었다.하지만 강현우도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치고 가버렸다.두 아들이 모두 그녀를 버리고 가버린 것이다.“현우야!”여왕마저 떠난 뒤, 그녀는 무기력하게 바닥으로 주저앉아 흐느꼈다.고월영은 그 모습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뒤돌아섰다.등 뒤에서 안비의 외침이 들려왔다.“고월영, 이 악랄한 년! 넌 곱게 죽지 못할 거야!”걸음을 멈춘 고월영은 고개를 돌리고 담담히 말했다.“세상에 들통나지 않을 거짓말은 없어요, 마마. 무슨 일이든 책임이 따르는 법이지요.”“양심도 없는 년! 어찌 나한테 이렇게 대할 수 있느냐!”안비는 두 아들이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모든 원인이 고월영에게 있다고 생각했다.세상에 어찌 이렇듯 매정하고 악랄한 여자가 있단 말인가!고월영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안비를 바라보고는 걸음을 옮겼다.뒤에서 안비의 처절한 저주가 들려왔다.“언젠가 넌 나보다 더 비참한 처지가 될 것이야!”“모두에게 버림을 받을 것이고 모두가 널 혐오할 것이야!”“고월영, 이 죽일
시안이 자결했을 때 방 문은 안으로 잠겨 있었다.진심으로 죽음을 택했기 때문이었다.정말 죽으려는 사람은 절대 방해 받지 않을 시간과 환경을 마련하고 행한다. 일부러 누군가가 발견해 주기를 바라고 행한 게 아니라면 이 상황이 말이 되지 않았다.“내 궁에서 그딴 불경한 소리를 지껄이다니!”안비의 두 눈에 당황함이 스쳤다.고월영은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제 질문이 불편하셨다면 송구합니다. 다른 뜻은 없었어요.”자리에서 일어선 그녀는 품에서 약을 꺼내 강현우에게 건넸다.“현우 오라버니, 이걸 마마께 드리세요. 멍자국을 없애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멍자국?”강현우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안비는 아무리 봐도 어디 다친 것 같은 반응은 아니었다.고월영이 말했다.“목을 매달았다면 온몸의 중량이 저 천으로 쏠립니다. 그 과정에서 목덜미에 압박흔이 생길 수밖에 없지요. 이 약을 발라드리면 멍이 사라질 겁니다. 약을 안 바르면 나중에 흉터가 남을 수도 있어요.”모두의 시선이 안비의 목덜미로 향했다.안비는 밤중이라 잠옷을 입고 있었는데 하얗고 긴 목덜미가 그대로 드러났다.안비는 당황한 얼굴로 목덜미를 가렸다.“어머니….”강현우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갑자기 실망감이 몰려왔다.“나… 난 괜찮다. 사실 바로 발견돼서….”“참. 너는 이 밤중에 마마께서 나쁜 생각을 하실 줄 어떻게 알고 침소로 뛰어들어왔느냐?”고월영은 어린 궁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겁에 질린 어린 궁녀는 한발자국 뒤로 물러섰다.안비의 눈치를 보려고 했는데 고월영이 앞으로 나서며 시선을 가렸다.“설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냐?”고월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네 이년, 무슨 망언을 하는 것이냐!”안비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고월영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한발 다가섰다.“말해 보거라! 너는 어쩌다가 마마의 침소로 들어오게 된 것이냐!”“너 이….”강현준이 싸늘한 시선이 날아오자 안비는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아 버렸다.그는 고
강현준은 손에 힘을 풀었다.그녀가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어쩌다가 온기를 찾은 심장이 다시 순식간에 얼어붙었다.고월영은 그가 정신을 판 사이에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가보겠….”“전하!”밖에서 지언이 다급히 안으로 달려왔다.“전하, 안비마마께서 자결하셨습니다!”그날 밤 현왕부 사람들은 모두 궁으로 몰려갔다.고월영도 강현우의 부탁으로 함께 궁으로 갔다.다행히 안비는 자결 시도만 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안비는 고월영을 보자마자 버럭 화를 냈다.“저년이 내 궁에 어쩐 일이야? 누가 저년을 들여보냈어? 여봐라! 당장 저년을 밖으로 끌고 나가!”궁녀와 태감들이 소리를 듣고 다가왔다.하지만 현장에는 현왕과 여왕도 함께 있었다.강현준이 싸늘한 눈빛을 보내자 그들은 전부 고개를 숙이고 구석으로 물러섰다.고월영은 홀로 궁을 나갈 수는 없으니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그녀는 따분한 얼굴로 안비 궁 안의 시설들을 구경했다.방 안에는 안비의 울음소리만 들렸다.두 아들은 멀뚱멀뚱 서서 어머니가 우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한참을 울던 안비는 아들들이 반응이 없자 목청을 높였다.결국 마음이 약해진 강현우가 말했다.“어머니, 형님도 너무 화가 나셔서 그런 거지 않습니까. 며칠만 참고 기다리면 금족령은 금방 풀릴 겁니다.”안비는 조심스럽게 강현준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는 줄곧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그녀는 더 구슬피 울며 말했다.“그래도 이 어미를 가장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은 우리 현우밖에 없구나. 아들이라고 둘밖에 없는데 현준이는….”강현준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현왕은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그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면 한 마디도 꺼내지 않는 성격이었다.안비는 더 큰소리로 통곡했다.이 왕조에는 귀비가 없었다. 황후 다음으로 귀한 위치가 비였다. 현왕이 공훈을 많이 세웠기에 안비도 궁 안에서 모두에게 떠받들리는 존재가 되었다.그런 존재가 통곡하고 있자 안비 궁 궁인들의 눈에도
“대체 저를 어디로 데려가시는 겁니까?”고월영은 점점 강현준의 처소랑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그녀는 이 시점에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어차피 떠날 건데 더 이상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이따가 알게 될 거야.”강현우는 이번에 작정하고 둘을 화해시키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고월영은 그에게 질질 끌려가다시피 해서 현왕의 정원으로 들어왔다.강현준은 정원에 홀로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술 취한 사람이랑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그날 밤 술을 먹고 자신을 침범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울화가 치밀었다.이 사람이랑 영원히 보지 않고 살았으면 좋을 것 같았다.강현우는 그녀를 끌고 정원 안으로 저벅저벅 들어간 뒤, 그녀의 등을 밀치고는 휑하니 가버렸다.고월영은 발을 헛디뎌 그대로 강현준의 품에 무너졌다.‘저런 사람도 부군이라고!’고월영은 속으로 강현우를 욕하며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강현준은 팔을 뻗어 품을 벗어나려는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전하!”“네가 먼저 품에 달려들었다. 뭐가 불만이지?”강현준은 홀린 듯한 눈으로 탐스럽게 상기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눈빛에서도 다정함이 넘쳤다.정말 오랜만에 보는 다정한 눈빛이었다.고개를 든 고월영은 순간 홀린 듯 그를 바라보았다.“전하도 아시다시피 제가 원해서 넘어진 게 아니지 않습니까.”하지만 강현준에게 그런 말은 통하지 않았다.“전하, 자중하십시오!”“언제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인데?”궁에서 처음 그가 그녀를 껴안았을 때 했던 말이었다.몇 달밖에 지나지 않은 일인데도 아득하게 멀게 느껴졌다.“월영아, 우리 화해하면 안 될까?”강현준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덜미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그의 입가에서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화해?그게 가능할까?고월영은 한참을 반복적으로 생각했다.화해할까?하지만 이미 잃은 사람과 전에 입었던 상처는 여전히 그대로였다.결국 그녀는 그의 어깨를 살짝 밀치며 말했다.“전하, 제가
강현우는 얼굴을 붉히며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나중은 못 보았습니다.”단지 강현준이 뜨겁게 그녀의 입에 입술을 맞추는 장면을 보았을 뿐이었다.그때는 무슨 생각인지 그들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평생 살면서 남녀 사이의 일을 겪어보지 않은 강현우였기에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어졌다.“형님께서… 저고리 고름을 풀 때 돌아왔습니다. 나중은… 정말 못 보았어요.”강현준은 어색한 표정으로 기침했다.“끝까지 가지는 않았다.”적어도 그날 밤은 그랬다.하지만 어쩐 일인지 강현우 앞에만 서면 자꾸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방 안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형제였지만 이 순간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다.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까?한참이 지났을 때, 강현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또 할 말이 남았느냐?”강현우는 긴 한숨을 내쉬고 머뭇거리다가 말했다.“형님과 월영이 사이에 서로에게 미련이 남은 것을 압니다. 그날 밤 월영이는 진심으로 형님을 밀쳐내지 않았어요.”강현준은 말없이 붓대만 놀릴 뿐이었다.강현우는 계속해서 말했다.“만약 정말 형님께 마음이 없었더라면 제가 아는 월영이는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거절했을 겁니다.”붓대를 잡은 강현준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그가 아는 고월영이라면 죽더라도 원하지 않는 일은 거부하는 성격이었다.적어도 그날 밤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자 기분이 조금은 좋아졌다.역시 쌍둥이라서 그런지 강현우보다 강현준의 마음을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시안의 죽음이 월영이의 마음에 너무 큰 상처를 안겨서 아마 잠시는 잊어버릴 수 없을 거예요.”“하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나중에 상처가 아물고 옅어지면 형님을 다시 떠올리게 될 거라고 믿어요.”“녀석, 언제부터 이렇게 듣기 좋은 말만 골라했지?”강현준은 붓을 내려놓고 찻잔에 차를 따라 동생에게 건넸다.“말하느라 목도 말랐을 텐데 차나 한잔 하고 가거라.”강현우는 찻잔을 받아 한숨에 삼켜버렸다.형님이
운조와 서령 대군이 연합하여 청성이 함락될 위기라는 전보였다. 청성과 가까운 수성도 민심이 흔들리고 성 안은 혼란에 빠졌다고 했다.황제는 여왕 강현우를 선봉 장군으로 봉하고 내일 즉시 출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아침에 가신다고요?”고월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굳게 닫힌 방 문을 바라보았다.큰 오라버니는 길을 떠나도 문제없지만 심각하게 다친 고월영은 지금 길을 떠나기엔 무리였다.적어도 반 달은 요양해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고용기도 장군으로써 수성으로 복귀하는데 언니만 혼자 여기 남게 된 상황이 조금 안타까웠다.“알겠습니다. 저도 전하랑 같이 가겠습니다.”고월영이 말했다.강현우의 두 눈에 희열이 스쳤다.“나는… 네가 여기 남겠다고 할 줄 알고….”그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어차피 네 언니도 돌봄이 필요하니까.”“전하, 제가 현왕 전하 곁에 남겠다고 할까 봐 걱정하신 거지요?”고월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이제 오해도 풀렸으니….”“전하, 전장에 나가 보신 적은 있으세요? 현왕 전하 없이 스스로 전장에 나가신 적 있냐고요?”“월영아, 나에게는 네가 필요해.”강현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황제의 지시가 내려진 후 그는 줄곧 긴장한 상태였다.강현우의 가장 큰 약점은 스스로 결단을 내릴 주견이 없다는 점이었다.전에는 형의 말을 들었고 지금은 고월영의 의사에 따랐다. 스스로 무언가 결정을 내리는 일은 그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저와 현왕 전하는 이제 끝난 사이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이상한 생각하지 말아주세요.”뒤돌아서려던 그녀는 한마디 덧붙였다.“아직도 저를 전하의 왕비로 생각하신다면 조금만 더 전하의 곁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싫으시다면 앞으로 저를 시종으로 부려도 좋아요.”“난 한 번도 너를 내치려는 생각을 한 적 없다!”그가 두려운 건 그녀가 명의뿐인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일이었다.“그런데 왜 한동안만 내 곁을 지킨다고 하는 거냐? 평생 내 옆에 있으면 되지 않느냐?”“전하께서도 진짜 혼인을 하
아무도 무안희가 어떻게 속박을 풀었는지 신경 쓰지 못했다.모두의 시선이 안비에게 쏠린 틈을 타서 그녀는 어느새 밧줄을 풀었다.그리고 손에 칼을 빼들고 고여추의 목에 겨누었다.강현준은 음침한 얼굴로 기를 모았지만 입에서 또 다시 피가 뿜어져 나왔다.“형님!”강현우는 다가가서 그를 부축하고 고월영의 손을 잡아당겼다.고용기는 무안희를 착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지금도 여전히 그녀에게 무력을 행사하는 것은 힘들었다.연일이 무안희를 쫓아갔다.“오지 마!”무안희는 비수를 고여추의 목에 들이댔다. 하얗고 가는 목에서 뻘건 피가 뿜어져 나왔다.“안 돼!”결국 고용기는 밖으로 쫓아 나갔다.고월영도 강현우의 손을 놓고 마당으로 달려나갔다.“무안희, 그만해!”“고월영, 너 때문에 난 모든 것을 잃었어. 내가 이 자리에서 네 언니의 목숨을 취해도 넌 할 말 없잖아?”고여추의 목에서는 점점 많은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조금만 더 깊게 들어가면 숨이 끊어질 것이다.“안 돼!”고월영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강현우가 다가와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무안희, 인질 풀어주면 오늘 무사히 왕부를 떠나게 해주겠다!”“내가 너희를 믿을 것 같아?”무안희는 고여추의 목에 칼을 들이댄 채로 후문을 향해 뒷걸음질쳤다.고여추는 안비에 의해 섭혼술이 중단된 이후로 의식이 흐릿한 상태였다.그녀는 마치 허수아비처럼 무안희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고 있었다.아무도 무안희를 막지 못했다.연일은 여러 번 강현준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가 미동이 없자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왕부의 하인들도 마찬가지였다.안 그래도 고월영은 강현준을 사무치게 증오하는데 이 왕부에서 언니마저 잃으면 아마 현왕에게 죽자고 달려들 수도 있었다.무안희는 그렇게 고여추를 끌고 뒷문을 통해 빠져나갔다.“쫓아!”연일은 그제야 부하들을 호령하여 쫓아 나갔다.고월영과 강현우도 뒤따라갔다. 무안희는 뒷산의 방향으로 도망쳤다.고월영 일행이 도착했을 때, 연일이 고여추를 안고 되돌아오고
강현준의 시선이 안비에게 닿았다.안비는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아들에게서 저런 시선을 본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처음은 심복이 고월영에게 독을 먹였을 때였고 이번이 두 번째였다.겁에 질린 안비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무안희는 강현준을 똑바로 보며 계속해서 말했다.“모두 안비의 짓이었습니다. 난원을 압박해서 고월영의 체내에 독을 주입했어요. 고월영은 그때까지 아이가 무사히 살아 있다고 애원했어요.”무안희는 안비를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하지만 마마는 한 번에 실패하자 난원에게 한 번 더 독을 주입하라고 명령했지요.”“그때 아무도 고월영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 않았어요. 독을 두 번이나 주입했고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었으니까요! 전하, 이게 당신 어머니의 본 모습이에요! 얼마나 감동스러운 아들 사랑인가요!”무안희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를 제외하고 아무도 웃지 않았다.두 번의 독 주입, 그건 고월영의 목숨을 노리고 한 짓이었다.강현우는 어느새 떨리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강현준은 온기 하나 없는 눈빛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봤다.안비는 그 시선을 마주하고 한발 한발 뒤로 물러섰다.“그런 거 아니야. 난원이… 아이가 정상이 아니라고 했어. 태어나도 정상이 아닐 거라고….”“현준아, 어미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하지만 정상이 아닌 아이가 태어나면 현왕부는… 이게 다 너를 생각해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어!”강현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어머니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아무도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강현준 본인도 포함이었다.머릿속에 자신의 여자가 죽어 가는 장면이 펼쳐졌다.그녀는 이미 복 중에서 숨이 끊어진 아이를 붙잡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쓰고 있었다.이기적인 인간들은 멈추지 않고 헐떡이는 고월영을 붙잡고 재차 독을 주입했다.푸흡!강현준의 입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주변 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