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은 그 말에 적잖이 당황했다.남녀 간 농을 들어본 적이 없던 터라 그런 대화엔 도무지 익숙하지 않았다.허나 여전히 굳은 얼굴이었기에 겉으론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내 어찌 미색에 이끌려 정사를 그르칠 사람이겠느냐. 그런 일은 없으니 염려 마라.” 그는 꼿꼿이 앉아 정색한 채로 대답하였다.강미는 너무나 진지한 그의 태도에 장난칠 맛이 떨어졌다. 하지만 속으로는 ‘정말 재미 없는 사람’이라며 그를 나무랐다.한편 강준은 그가 방금 전에 소은과 마주쳤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여인의 수작이
“내 부주의였군. 형은 저런 무희들 따위엔 흥미가 없으신 분이지요. 우리 가문의 호희들조차도 그의 눈엔 들지 못하였으니 말이지.” 육황자가 보기에 강민은 남녀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고 강준은 모든 것을 꿰뚫고는 있으나 여색에는 그다지 흥이 없는 자였다.그의 뜻은 오로지 권세에만 있었고 다른 것은 관심 밖이었다.헌데 선왕부는 그의 모후인 운귀비의 친정이었고, 그 세력이 날로 창대하여 천자까지도 그 움직임을 살핀다 하였으니, 택문은 그 권세의 팽창을 오히려 반기고 있었다.“내 그대에게 호희들을 들여보낸 것은 즐기라 하여
이곳은 지형이 평탄하고 탁 트여 있어 숨을 만한 데가 없었다.소은은 그저 강준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체념한 듯 눈을 감아버렸다.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으나 그녀의 가슴속 싸늘한 냉기에 비길 바가 아니었다.이제는 강준이 이를 캐묻느냐 마느냐에 달렸다.만약 그가 이 일을 추궁한다면, 선왕부는 어렵지 않게 처리할 것이다.그가 무희에 관한 일을 알아채기만 하면 소문 몇 줄 흘리는 것만으로도 소은은 세간의 입방아에 오를 것이다.그리되면 그녀는 곧장 선왕부의 측실로 들어가게 될 터였다.
소은은 그녀를 막아서며 한숨을 내쉬었다.“또 다른 약점 하나를 쥐여주려는 거야?” 위씨 가문과 선왕부는 애초부터 한패가 아니었다.위경화는 순간 놀라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내 이 어리석은 머리를 어찌하면 좋으랴…” “오늘 이 이야기를 꺼낸 건 사과를 듣기 위함이 아니야. 다만 이후로는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소은은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훗날 위경화와 소준이 혼인하게 된다면, 집안의 내실이며 첩들과의 더러운 다툼이 끝없을 테니, 그녀가 전생처럼 당하고만 살지 않기를 바랐다.국공부 또한
소은은 쑤시는 팔을 주무르며 화제를 바꾸었다.“그러지요.” 진명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 대신 화살통을 정리해 주었다.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 그를 보며 소은은 호감이 더 생겼다.두 사람은 함께 돌아가진 않았다.소은이 막 진영에 도착했을 때, 마침 사냥을 마친 대군이 돌아오는 중이었고, 그녀는 경무제 앞에 무릎 꿇고 조심스레 예를 올렸다.“만복을 누리시옵소서.”경무제는 처음 보는 이 여인의 모습을 보며 눈이 번쩍 띄었다.꽃처럼 고운 자태에 순간 마음이 사로잡힌 것이다.그녀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은 자는 황제뿐만이 아
소은의 한마디에 경무제의 얼굴빛이 한결 누그러졌다.“그렇다면 오늘 마침 그대를 만난 것도 인연이구나.”소은은 곰곰이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저 경합에 응하겠노라 밝히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자신이 말 위에서 자란 공주를 이이긴 어려울 터, 중요한 건 패하더라도 황제께 책망받지 않을 구실을 마련하는 일이었다.그리하여 그녀는 곁눈질로 오라버니 소준을 바라보았다.그 뜻을 헤아린 소준이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었다.“저희 집 여식이 기마와 궁술을 익힌 지 불과 열흘 남짓합니다. 게다가 며칠 전엔 병세가 위중하여 침상에 누워 있
“훌륭하도다!”함께 온 북제 사신은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크게 외쳤다.소은도 속으로 감탄했다.이는 사내라 하여도 쉽지 않은 실력이었다.오늘은 이기기 어려운 승부라는 것쯤, 소은도 잘 알고 있었다.허나 자신의 실력 또한 잘 알고 있었기에, 결코 보기 흉할 정도로 패하진 않을 터였다.어디까지나 그녀는 강준이 손수 가르친 제자였고 그의 궁술은 당대 제일이라 평을 받 은바, 그의 가르침을 받은 자라면 그 실력 또한 크게 뒤처지지는 않을 것이다.소은은 힘에서는 북제의 한아 공주만큼의 완력은 부족하였으나 기술과 정확도에 있어서는
강준이 곁에서 그녀를 지켰기에, 시합 내내 별다른 불상사는 없었다.이번에는 말을 다루는 실력을 겨루는 것이었으며, 여전히 승리하진 못하였으나, 뛰어난 기량을 보였다.경무제는 흡족해하며 말하였다. “공주께서는 실로 명불허전이로다. 소은 또한 칭찬받을 만하니, 두 사람에게 모두 상을 내릴 것이다.”황제가 친히 하사하니, 더없이 큰 영광이었다.소은은 기뻐하며 공손히 말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한아 공주도 고개 숙였다.“성은이 망극하옵니다.”경무제는 진명우를 돌아보며 말하였다.“실력이 제법이구나. 훗날 궁중의 황
강준이 말했다.“괜찮습니다. 어차피 언젠가 알게 될 거니까요.”이는 어떻게든 그녀를 끌어들이겠다는 의미였다. 앞으로 그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더 많아질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소은은 가슴이 철렁했지만 겉으로는 침착함을 유지했다.“저는 세자를 위해 일할 수 있습니다. 다만 앞으로 제 아버지를 관대하게 대해주셨으면 합니다.”“송 각로 사건에 관해 아버님께 죄를 사하여 주라는 상소문은 올리지 말라고 하세요.”강준이 말했다.소은의 입장에서는 꽤 의외였다. 그러다가 전에 진명우를 찾아갔을 때가 떠올랐다. 그는 일 때문에 랑야에 다
밀실의 차가운 온도에 소은은 손발이 마비가 올 것 같았지만 억지로 눈물을 참아냈다.그녀를 바라보는 강준의 시선은 동물이나 물건을 바라보는 것처럼 싸늘하기 그지없었다.그와의 대치에서 소은은 당연히 우위를 점할 수 없었다.“저는 세자의 비밀을 알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다.”결국 그녀는 먼저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그가 두려운 것은 아니나 감정적으로 굴며 자존심을 내세워서 좋을 게 없었다.“난 아씨의 비밀에 꽤 관심이 있습니다만.”미풍이 불어와 책상 위에 놓인 한지가 살짝 날아올랐다. 그것은 소은이 며칠 전 부가은에게 건넸던
소은은 진작에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선왕비는 그녀를 싫어하는 사람이니 그녀에게서 나온 처방이라고 하면 절대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을 것이다.선왕부와 소국공부가 엮이는 것을 굉장히 꺼려하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후배에게서 처방을 받는다면 분명 자랑하고 다닐 것이다. 어린 후배들의 마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웃어른들의 생각은 거의 비슷했다.강미는 이미 그녀를 경계하고 있으니 소은은 심지연을 설득하는 게 빠르다고 생각했다.“처방을 알약으로 만들고 괜찮은 이름을 붙여 심지연 언니에게 줄 거예요. 그리고 언니가 왕
항상 이 주제를 피하기만 하던 강민은 오늘따라 꽤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제가 마음에 둔 사람을 어머니가 마음에 들어하시지 않을까 봐 걱정이지요.”강준은 저도 모르게 그를 바라보았다.강 부인이 말했다.“청렴한 가문의 아이라면 다 좋아.”둘째는 선왕부의 세자도 아니고 장남도 아니니 혼인 문제에서 꽤 자유로운 편이었다.강민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좀 더 시간을 주세요.”아들의 성미를 잘 아는 강 부인은 그가 머뭇거리는 것을 봐서 신분이 특별하거나 셋째와 혼담이 오간 사이라고 짐작했다.하지만 그녀는 그리 보수적인 사
“둘째 공자, 오늘 제가 찾아온 일을 세자께는 말씀드리지 말아주세요.”대화가 거의 끝나갈 때쯤 소은이 말했다. 또 강준이 자신이 의도적으로 가족들에게 접근한다고 오해받기는 싫었다.“그래.”어차피 개인적인 일을 강준에게 얘기할 필요는 없었다.전생의 소은은 강민과 사적으로 교류한 적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가 겉으로는 차갑지만 속은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대화가 이렇게 순조로울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그녀는 할머니가 애초에 강민을 신랑감으로 점찍었다면 오히려 나았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강준보다는 교류하기
소은은 복희를 위로해 주었다. 그러자 복희가 울음을 터뜨렸다.“제가 둘째 공자의 먹을 깨뜨렸으니 분명 공자께서 저를 벌하실 겁니다.”복희가 겁에 질려 말했다.그건 강민이 정말 어렵게 구한 먹이었는데 먹 중에서도 희귀품이라고 했다.강민은 나가기 전에 먹을 자신의 서재로 가져가라고 분부했는데 그걸 가지고 가다가 깨뜨렸으니 어떻게 주인에게 보고해야 할지 막막했다.하물며 강민은 큰 공자나 세자처럼 부드러운 사람도 아니었다. 군영에서 부하들을 벌할 때도 절대 봐주지 않은 거로 유명했다.복희가 세자를 부드러운 사람이라고 평가한 걸
소은은 조금 걱정이 됐지만 그렇다고 강준에게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어서 심지연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최근에는 소준도 집에 없으니 강준이 아니면 진명우의 상황을 알아볼 사람이 없었다.강미는 그녀를 멀리하는 상황이니 다가가고 싶지도 않고 심지연에게도 자신이 누구에게 마음을 주었는지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었다.그리고 심지연은 입이 무거운 사람이라 딱히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소은의 부탁을 들은 심지연은 그녀를 자세히 관찰했다. 강준이 소은을 거절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소은이 진명우의 상황을 궁금해한다는 얘기를 들으니 저도 모르
예전에 그녀가 선왕비에게 추천한 흉터를 없애는 처방도 그 중 하나였다.“우리 가문 이름을 달고 점포를 차리려는 거라면 도와드릴 수 있어요. 하지만 그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어요.”부가은은 단번에 소은의 말을 알아들었다.“첫째, 아가씨의 말을 들어보니 주요 고객은 경성의 귀족 부인이나 아가씨들 같군요. 만약에 사고가 나면 우리 가문은 그 책임을 감당하지 못해요. 그러니 처방의 안전성은 제가 직접 확인해야겠어요. 그러면 제가 처방을 누설할 위험 부담이 존재하겠죠. 그건 아가씨의 선택에 달렸어요. 둘째, 우리가 수익을 어떻게
소은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상인 가문의 딸 부가은에게 시선을 두었다.전생에 오라버니와 부가은은 온갖 반대를 겪고 힘겹게 약혼했는데 결국 혼인식도 올리지 못하고 오라버니가 세상을 떠버렸다. 부가은은 다른 사람과 혼인할 수는 없다면서 자결을 택했다. 소은은 이번 생에는 그들이 행복한 부부가 되기를 바랐다.부씨 가문은 현재 명성도 꽤 올라간 상태였다. 경성에 부자 가문이 누구냐고 따지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가문이 부씨 가문이었다. 궁중의 마마님들이 쓰는 비단, 자기, 찻잎, 백성들이 자주 차 마시러 가는 객잔, 옷감, 각 업계에 모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