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 온사야. 내가 미안해. 오라비가 몹쓸 짓을 했어! 흑….”온자신은 계속해서 사과를 하다가, 결국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통곡을 터뜨렸다.그를 둘러싼 사태들은 어안이 벙벙해서 서로 눈치를 살폈다.상대가 눈물까지 보일 줄은 그들도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사태들은 분분히 고개를 돌려 막수 사태를 바라보았다.막수가 담담히 눈짓하자 사태들은 방망이를 내려놓고 막수 사태의 등 뒤로 가서 섰다.“사과는 들었으니 제가 무우에게 전하겠습니다.”온자신의 모습이 초라하고 구슬피 울고 있지만 막수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그는 싸늘하게 말을 마친 후에 사람을 시켜 문을 닫게 했다. 홀로 남은 온자신은 그 자리에서 계속 울었다.온자월은 그런 둘째 형이 너무 창피해서 다가가 온자신을 걷어찼다.“형님, 이렇게까지 울 일은 아니지 않아?”그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며 다시 물었다.“그렇게 온사와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하지만 온자신은 계속 울기만 할 뿐, 온자월의 말엔 대답도 하지 않았다.옆에서 지켜보는 온모는 분노에 이가 갈렸다.‘이 멍청이가 진심이었어? 그냥 미친 건가?’자신이 온사에게 무력을 행사해 다치게 만들고 이제 와서 미안하다고 후회한다는 꼴이라니.온모는 자신이 온사라도 이런 멍청이는 용서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길게 심호흡하고는 혐오스러움을 감추며 다가가서 온자신을 달랬다.“둘째 오라버니, 그만 울어요. 지금 여기서 울고 있어도 아무 소용없잖아요. 제가 보기에 언니는 오라버니가 온 줄도 모를 수 있어요. 언니의 마음을 돌리고 싶으면 돌아가서 다시 방법을 생각하는 게 좋겠어요.”가장 중요한 건 그가 여기서 울고 있으니 창피해 죽겠다는 것이었다.순진하고 선량한 여동생의 형상을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진작에 이 멍청이를 버리고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막내 하는 말 들었지? 사과를 마쳤으면 빨리 돌아가자. 할 얘기 있으면 나중에 하고. 지금 아버지랑 큰 형님 그리고 넷째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 그동안 아버지가
“되었다. 네가 그렇게 싫다면 앞으로는 얘기 안 하마.”막수는 온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숙제 검사까지 마친 후에 말했다.“참. 근래 나랑 하산해야 할 일이 있다.”“예? 저도 같이 가도 되나요?”기운 없던 온사는 그 말을 듣자 눈을 반짝 빛냈다.“당연하지.”막수 사태는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산 아래에 내 환자가 한 명 있는데 하산해서 치료를 해주어야 해.”잠시 머뭇거리던 막수가 말을 이었다.“그런데 상대의 신분이 너한테 좀 곤란할 수도 있겠구나.”“누구인데요?”온사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충용 후작가의 노부인이시다.”그 말을 들은 온사는 왜 막수가 머뭇거렸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충용 후작가의 노부인이면 그녀의 전 약혼자 최소택의 할머니였다.하지만 온사는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분이셨군요. 괜찮아요, 사부님. 저와 충용 후작가는 이미 혼약을 해지했고 최소택을 만나러 가는 것도 아니니 굳이 신경 쓸 필요도 없어요.”“그래.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니 안심이구나.”안 그래도 이 일로 걱정이 많았던 막수였다.전에 알아본 바로 온사와 최소택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 우애가 아주 깊다고 했는데, 안타깝게도 최소택은 온사에게 큰 상처를 주고 말았다.충용 후작가의 노부인이 오래 전에 막수에게 은혜를 베푼 일이 있지 않았다면 그 요청을 받지도 않았을 것이다.온사는 안도하는 스승의 모습에 웃으며 말했다.“설마 이 일로 오래 고민하신 건 아니지요?”“오래 고민했지.”그러자 막수가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이것 봐. 어젯밤에 잠을 설쳐서 안색도 안 좋아졌어.”오늘 하루 종일 시무룩해 있는 온사를 위해 기분전환을 해주고 싶지 않았다면 이 얘기를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온사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사부. 이제는 다 지나간 일인걸요.”“그리고 사부께서 그리 가르치셨잖아요. 출가인은 욕망을 끊어야 한다고요. 연정도 그 중 하나에 속하지요.”온사는 두 손을 합장하고 아미타불을 외웠다.막
온사는 후작 부인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원래부터 그녀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던 고모이기도 했다.전에는 원래 그런 성격이려니 했는데 온모가 가문에 들어온 후로부터는 온아려가 극진히 챙기는 모습을 보고 고모는 단순히 자신을 안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래서 온아려가 자신을 불렀음에도 그녀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온아려는 요지부동으로 가만히 있는 그녀를 보고 불쾌한 표정으로 다가갔다.“이 계집애가 뭘 멍 때리고 있어? 고모 봤으면 인사부터 해야지. 여전히 예의가 없구나.”말을 마친 그녀는 손을 뻗어 온사의 옷깃을 잡아당겼다.“당장 일어나. 웃어른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 도리 몰라?”“시주.”막수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길을 내치고 싸늘하게 말했다.“제 제자에게 함부로 하지 마십시오.”온아려 막수를 그저 나이 든 여승으로만 생각했다.“온사야, 출가해서 드디어 의지할 사람을 찾았니? 늙은 여승이나 데리고 와서 의기양양한 꼴이라니. 설마 너 성녀가 됐다고 우리가 널 두려워할 거라 생각하는 거 아니지?”“우리 소택이는 절대 너 같은 애와 혼인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출가인이든 성녀든 앞으로 우리 집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고 소택이한테서 멀리 떨어져!”“후작 부인!”막수의 얼굴에 짙은 분노가 피어났다. 그녀는 온사를 뒤에 감추고 싸늘한 눈빛으로 온아려를 노려보며 말했다.“말은 똑바로 해야죠. 저희는 노부인의 초대를 받고 진료를 보러 온 것입니다. 그러니 이상한 망상에 젖어 무례한 발언하지 마십시오.”온아려는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진료를 봐? 여자 땡중들이 무슨 진료를 본다고. 너희들….”“에미야, 당장 그 입 안 다물어?”온아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침상에 누운 노부인이 입을 열었다.노인은 굳은 얼굴로 온아려에게 호통치고는 말했다.“막수 사태와 이 어린 승려분은 내 손님이다. 계속 내 손님들에게 무례를 범한다면 아무리 너라도 용서 못해.”“어머님, 저 사람들은….”“당장 안 나가?”더 이상 그녀의 말이 듣기 싫어
지난번 명절 때 한번 뵙고 몇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노부인은 원래는 손주며느리였어야 할 아이를 다시 마주하니 마음이 착잡했다.온사는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다.그래서 밖에서 바람 좀 쐬고 오겠다고 막수에게 말했다.막수도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일 있으면 바로 돌아와서 나를 찾거라.”그 말인 즉 후작가에서 온사를 괴롭히기라도 한다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의미였다.온사는 노부인의 오색한 표정을 힐끗 보고는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그녀 역시 어색한 상황이기에 어디 멀리 나갈 생각은 아니었다. 밖으로 나온 그녀는 입구에 서서 멍하니 정원 풍경을 바라보았다.그녀가 그렇게 잠시 따분함을 느끼고 있을 때, 온아려는 분을 참지 못하고 아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그녀의 목적은 온사와 마주치지 않게 오늘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집에 오지 말라고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온사가 집에 왔다는 소리를 들은 최소택은 사람을 보내 국공부에 서신을 전하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온 것이었다.노부인의 처소에 들자 밖에서 멍 때리고 있는 온사가 보였다.출가한 후 법복을 입은 온사의 모습은 그 역시 처음이었다.그는 청색의 법복을 입은 소녀를 보고 순간 멈칫하고 걸음을 멈추었다.자신의 전 약혼녀가 아름다운 용모를 가졌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여자복이 넘친다고 우스갯소리로 말하기도 했지만 그는 외모만 따지는 속물이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여인은 온모처럼 마음이 선량한 여인이었다.그는 내적 아름다움만이 진짜 아름다움이라고 여겼고, 그런 여자만이 자신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온사처럼 겉모습만 화려하고 속은 시커먼 여인은 자신을 진심으로 연모하는 마음도 없었더라면 절대 기회조차 주지 않았을 것이다.최소택은 그런 생각을 하며 가볍게 기침을 했다. 그러자 온사가 화들짝 놀란 것을 보고는 느긋하게 다가갔다.“네가 왜 여기 있어? 일부러 나 보려고 온 거니?”최소택은 고고하게 턱을 치켜들고 온사에게 물었다.온사는 그를 힐
그 순간 최소택의 표정이 굳어졌다.“온사, 그게 대체 무슨 소리지?”“못 알아듣겠어?!”온사가 짜증스럽게 말했다.“나한테서 멀리 꺼지라는 소리야. 자꾸 귀찮게 하지 말라고.”그러자 자존심이 상한 최소택이 이를 갈았다.“지금 나한테 꺼지라고 했어? 온사야, 지금 나랑 밀고 당기기를 시전하는 거니?”“누가 너한테 그런 짓을 한대?”그녀는 너무 어이가 없었지만, 최소택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그게 아니면 뭐야? 전에는 그렇게 나한테 매달리더니 지금 나한테 꺼지라고? 그런 걸 밀고 당기기라고 하는 거야.”그는 가소롭다는 듯이 냉소를 지으며 네 속을 내가 다 안다는 표정으로 온사를 바라보았다.“다른 사내들한테는 그런 수법이 통할지 몰라도 나한테는 안 통해. 정실의 자리는 온모여야만 해. 그러니 앞으로 그딴 역겨운 수작 나한테 부리지 마. 안 그럼 첩실의 자리도 안 남겨줄 테니까!”“역겨운 건 너야.”최소택은 사람 말을 못 알아듣는 인간이었다.게다가 자기애가 과한 듯했다.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최소택은 그녀가 자신을 유혹한다고 해석했다.그래서 더 이상 그와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뒤돌아서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최소택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잠깐, 어딜 가려고?”온사는 힘껏 그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최소택은 손아귀에 힘을 더욱 꽉 주었다.분노가 치민 그녀가 말했다.“사부한테 가는데 그것도 막으려고?”“안 돼.”최소택은 굳은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내가 그랬지. 내 첩실이 되려면 먼저 속세로 돌아오라고. 그러니 그 사부라는 사람한테 갈 필요 없어.”온사는 눈을 감고 길게 심호흡한 뒤에 차갑게 말했다.“나도 그랬지. 첩실이든 정실이든 네 사람이 되는 것엔 관심이 없다고. 이만 나 좀 놔주면 안 될까?”그녀는 충분히 입장을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최소택은 말을 듣지 않았다.“홧김에 하는 말인 거 알아. 가자. 국공부 사람들이 너 데리러 오고 있어. 나랑 같이 집에 돌아가자.”온사의 얼굴이 급변했다.더 이상 참을 수 없
퍽!이번에 온사는 귀뺨이 아닌 주먹을 날리고는, 최소택의 멱살을 잡고 이를 갈며 말했다.“다시 정실이며 첩실 소리를 내 앞에서 꺼내면 네 뒤에 있는 사람 시켜서 거세해 버리겠어!”최소택은 순간 아랫도리가 싸늘해졌다.그는 경악한 표정을 하고 온사를 노려보았다.그러자 온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지시를 내렸다.“추월, 이자를 끌고 가서 한바탕 패줘. 머리가 정상이 될 때까지 패!”그녀는 자기애가 강한 최소택 같은 인간이 언제까지 버틸지 궁금했는데,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최소택은 더욱 완강했다.추월은 그의 입을 틀어막고 사람이 없는 구석으로 가서 그를 실컷 팼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온사, 이건 너무하는 거 아니야! 정도껏 해!”혹독한 매를 맞은 최소택은 입을 열자마자 불평을 늘어놓았다.“내가 너한테 관대하다고 감히 나를 이런 식으로 대해? 측실의 자리는 꿈도 꾸지 마! 너 같이 악랄한 여자는 첩으로 들여도….”짝!온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걸레를 최소택의 입에 물리고 싸늘하게 말했다.“더 패야겠네.”추월은 곧바로 그를 끌고 나갔다.충용 후작가의 세자가 자신의 저택 구석에서 맞고 있는데도 아무도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그렇게 최소택이 결국 고통에 눈물까지 흘리고 나서야 온사는 추월을 멈추게 했다.그녀는 한심하다는 듯이 시선을 거두고 추월에게 말했다.“기절시켜서 아무데나 버려.”그녀는 극심한 피로가 몰려왔다.더 이상 이 멍청이를 상대하고 싶지 않으니 눈앞에서 치워버리는 게 최선이었다.추월이 최소택을 해결한 후, 온사는 노부인의 방으로 돌아갔다.들어가 봤더니 노부인은 잠들어 있었고 곁을 지키는 어멈도 졸고 있었고, 막수 사태만 옆에서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소리를 들은 막수는 담담한 어조로 온사에게 물었다.“해결했어?”온사는 고개를 끄덕인 후에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사부님, 이 사람들은….”막수가 담담히 말했다.“앞으로 사람을 때릴 땐 소리를 좀 줄여. 남이 들으면 어쩌려고.”온사는
온사는 주저없이 뒤돌아서 막수를 끌고 뒷문으로 향했다.이때, 떠나려는 그녀를 본 온자신이 마차가 서기도 전에 뛰어내려서 막았다.“둘째 도련님, 부상을 조심하셔야죠!”하지만 온자신은 그러거나 말거나 다급히 온사에게 달려가서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온사야, 가지 마!”“이거 놓으세요!”온사는 고개를 돌려 분노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그래, 그래. 놓을게. 네가 안 간다고 약속만 하면 오라비가 다신 건들지 않을게.”온사의 분노한 시선을 마주한 온자신은 다급히 손을 내렸다.“날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온사가 싸늘하게 말했다.“저는 수월관 여승이지, 공자께서 말하는 온사가 아닙니다.”온자신은 목구멍이 꽉 막히고 숨쉬기조차 힘들어졌다.“온사야, 그렇게 말하지 마….’“형님!”온자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뒤에 두 사람이 나타났다.바로 온모와 온자월이었다!“형님, 아버지께서 했던 말씀 절대 잊지 마.”온자월은 들어오자마자 온사를 싸늘하게 노려보았다.온자신은 굳은 표정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듯 온자월에게 말했다.“셋째야! 쟤 온사야, 우리의 여동생이라고! 친동생한데 꼭 이렇게 매정하게 굴어야겠어?”“이제는 아니지.”온자신에 비해 온자월의 태도는 매우 냉담했다.“지금 저 사람은 수월관 여승이지, 국공부의 온사가 아니야. 그러니 우리의 동생도 아니지.”“셋째 오라버니, 그런 말하지 마세요. 언니가 들으면 얼마나 상심이 크겠어요?”온모는 정말 걱정하는 척, 온사를 바라봤다.온자월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상심? 그건 자업자득이라고 해.”순간 온사는 가슴이 찔린 것처럼 통증이 느껴졌다.하지만 표정으로는 아무런 동요 없이 시선을 내릴 뿐이었다.그랬다.그녀가 원하는 게 이런 거였다. 그러니 절대 후회는 없을 것이다. 국공부에는 그녀가 미련을 둘만한 것이 이제 없다.“셋째야!”온자신은 온자월의 멱살을 잡고 분노해서 말했다.“그런 말은 나중에 하면 되잖아? 굳이 사람들 앞에서 온사한테 그런 말을 해야겠어?”충용 후작
온아려는 피식 웃고는 온사를 바라보며 물었다.“설마 저 계집애랑 관련된 일이니?”온자신과 온자월 두 형제는 여전히 의견이 갈렸다.“형님, 아버지께서 전하라고 하신 말씀이니 언젠가는 꼭 해야 해. 그리고 고모가 남도 아니고, 여기서 얘기하는 게 밖에서 얘기하는 것보다 나을 텐데?”온자월이 담담히 말했다.“온자월, 그 입 다물어!”하지만 온자신은 여전히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여기서 말하거나 밖에 사람들 있는 곳에서 말하거나 선택하라는 온자월의 압박이었다.온사가 뭐라고 말하려는데 막수가 먼저 나섰다.“나무아미타불, 할 얘기 있으면 바로 하시죠. 더 할 얘기 없으면 저는 제자 데리고 이만 가보겠습니다.”말을 마친 그녀는 온사를 이끌고 자리를 뜨려 했다.하지만 그들이 떠나는 걸 바라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잠깐,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온아려는 일부러 다가가서 두 사람을 막고는 경멸에 찬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온사야, 그래도 한때는 온씨 가문 사람이었는데 네 아버지가 너에게 할 말이 있다잖니. 그걸 안 듣고 가? 넌 옛정이라는 것도 없어?”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진 온사는 결국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후작 부인께서 옛정 얘기를 꺼내셨으니 저도 묻고 싶은 게 있군요. 전에 부인께서 내 어머니께 애걸복걸해서 겨우 충용 후작가에 시집을 오셨는데 이것도 옛정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그 말을 들은 온아려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예전에 진국공부는 지금처럼 큰 힘이 없었으며, 실권도 없는 허울뿐이었다.교활하고 지략이 뛰어난 온권승이 있긴 했지만 그것도 천천히 위로 올라가야 성공했다.그래서 온씨 가문은 란씨 가문을 찾아 정략혼인을 제안하고 한배를 타기로 한 것이었다.온권승이 란자군과 혼인하자 란씨 가문은 국공부를 도와 선황의 신임을 얻고 드디어 온권승은 대권을 쥐게 되었다.그때의 온권승은 중년이 되기도 전에 조정에서 발언권이 생겼다.권력의 맛을 본 그는 당연히 더 많은 것을 갖고 싶었기에 인맥을 넓히기로 했고, 그 중에는
온장온은 아무런 불만도 말할 수 없었다.분명 마차에 난입하려 한 사람은 셋째였는데 칼은 그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섭정왕께서 갑자기 기분 나쁘다고 그의 목을 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셋째가 흑기군의 호위 범위에 난입한 것은 사실이지만 왜 자신이 동생의 죄를 대신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온장온은 처음으로 아버지와 동생에게 원망을 느꼈다.온사의 명성을 갖고 섭정왕을 협박한 아버지, 그리고 얌전히 있으랬더니 마차에 난입하려고 한 동생, 둘이 친 사고를 왜 자신이 수습해야 하는지 분통이 터졌다.온장온은 차라리 오늘 따라오지 말걸 하고 후회했다.어머니의 시신이 온사에게 있지만 효심이 지극한 온사이니 시신을 훼손하지는 않을 것이다.온사가 화가 좀 풀리면 그가 찾아와서 사정해도 될 일이었다.아무리 생각해도 후회가 치밀자, 온장온은 불만 섞인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며 말했다.“아버지, 이제 그만하시죠? 어쨌거나 어머니의 시신은 온사가 가져갔지 않습니까. 아버지든 아들인 저희든 지금은 온사를 추궁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막수는 고개를 돌려 놀란 눈으로 온장온을 바라보았다.‘며칠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큰 애가 저렇게 변했지?’그녀는 온장온이 어쩌다가 사람이 할 말을 했다고 생각했다.어떻게든 이들과 대치를 이어가려던 온권승은 불쾌한 눈으로 장남을 노려보았다.북진연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진국공, 나이가 들었으면 패배를 인정하는 게 심신에 좋아. 자넨 이미 정신이 온전치 못한 것 같구만. 차라리 장남이 나아.”온권승이 냉소를 지으며 반박하려던 찰나, 마차에서 듣고만 있던 온사가 입을 열었다.“진국공 어르신, 자꾸 이렇게 시간을 끌면 당신께서 그렇게 아끼는 사생아가 목숨을 잃을 텐데요.”그 말을 들은 온씨 가문 사내들의 안색이 급변했다.온권승은 잔뜩 분노한 목소리로 마차에 대고 소리쳤다.“너 온모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그 애가 사람을 시켜 어머니의 시신을 훔쳐가고 보복한답시고 시신을 훼손하려 했습니다. 이렇게
어쨌거나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란자군의 시신을 가져갈 것이다.란자군은 진국공부 사람이고 죽어서도 그건 변함이 없었다.그녀의 시신은 그녀를 위한 조상묘에 묻혀야 마땅했다.그리고 세월이 지난 후, 그녀와 함께 묻힐 것이다.“섭정왕 전하, 괜히 논점 흐리지 마시죠. 온사의 명성을 그렇게 걱정하신다면 그 애를 설득해서 어미의 시신을 돌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안 그러면 저도 어떻게 할지 모릅니다.”“허튼소리는 여기까지!”북진연은 싸늘한 목소리로 온권승의 말을 잘랐다.말에서 내린 그는 성큼성큼 온권승의 앞으로 다가갔다.온권승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상대를 노려보았다. 북진연이 주는 위압감에 그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북진연이 앞으로 다가오자 키차이에서 오는 압박감과 함께 굴욕감이 온권승을 괴롭혔다. 그런 온권승에게 북진연은 더 모욕감을 주는 말을 했다.“난 진국공 자네랑은 달라. 내 목적을 달성하려고 한 여인의 명성을 갖고 사람을 협박하진 않는다고. 하지만 자네가 딸의 명성을 들먹이며 내게 답을 요구했으니 그 답을 지금 해주지!”그 순간 막수마저 주먹을 불끈 쥐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북진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북진연이 일시적인 충동으로 온사의 명성을 실추시키는 발언을 할까 봐 두려웠다.북진연이 말했다.“난 늘 정직하고 당당하게 살아왔어. 내가 여인의 접근을 혐오한다는 건 세상이 다 아는 일이지. 만약에 내가 마음에 품은 여인이 나타난다면 그것 역시 만 천하가 알게 될 거야. 내가 누구를 소중이 생각하고 아끼는 줄 알면 당연히 그 사람을 어렵게 대해야 하거늘!”그 말이 끝나자 현장에 적막이 감돌았다.온장온은 할 말 많은 표정으로 북진연을 바라보았고 온권승은 마치 똥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당장이라도 저 요망한 얼굴에 주먹을 꽂고 싶었다.“그러니 진국공, 내가 무우 사태에게 어떤 마음인지 이제 알겠나? 말귀를 못 알아들으니 한번 더 말해줘야 할까?”온권승은 혐오스럽다는 듯이 북진연을 노려보며 말했다.“그럴 필요 없습니다.
“섭정왕 전하!”뒤늦게 온자월의 옆으로 달려간 온권승은 기이할 정도로 휘어진 아들의 다리를 보고 분노의 고함을 질렀다.“어찌 제 아들에게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애를 죽이려고 작정했어요?”북진연은 그런 온권승을 바라보며 냉소를 짓더니 말했다.“진국공, 난 명을 받들어 성녀 전하의 안전을 보호했을 뿐이야. 자네의 아들은 흑기군 호위를 따돌리고 강제로 성녀 전하가 계신 마차에 침입하려 했어. 건방지게도 말이야. 이건 섭정왕인 날 무시하는 행위 아닌가. 정말 한방에 죽여버릴까 생각도 했네만 자네를 봐서 참은 건데, 어떻게 생각하나?”“참으로 건방지군요, 섭정왕!”온권승은 분노에 치를 떨었다.“내가 모를 줄 알았습니까? 전하께서 이리도 온사 그 계집애를 감싸고 도는 이유 말입니다. 단순히 폐하의 어명 때문은 아니지 않습니까?”“전하께서 온사에게 어떤 마음인지 본인이 잘 아시지 않습니까? 사람을 바보 취급하지 마세요!”짝!온권승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막수의 안색이 급변하더니 손을 뻗어 온권승의 귀뺨을 쳤다.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온권승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온권승! 이 짐승보다도 못한 놈!”막수는 치미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그게 아비로서 할 말이야? 아무리 무우가 이제는 진국공부 사람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어찌 그런 식으로 딸의 명성을 더럽힐 수 있지?”만약 이 소문이 새어나간다면 온사는 경성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특히나 그녀는 부처님 앞에 맹세를 올리고 출가한 승려였다. 만약에 온사가 섭정왕을 홀려서 불도를 더럽혔다는 죄를 뒤집어쓰게 된다면 그녀를 벼랑으로 떠미는 격이었다.“아버지, 방금 하신 말씀은 선을 넘으셨어요!”듣다못한 온장온마저 고개를 돌리고 불만스러운 어투로 온권승에게 말했다.마차에 타고 있는 온사가 이 말을 들으면 얼마나 상심할까?아버지의 말로 그녀의 명예가 실추된다면 그건 정말이지 온사에게 큰 타격이 될 것이었다.하지만 온장온은 오라버니인 자기들이 온사의 명성을
잠자코 자리를 지키던 온사가 그 말을 듣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이때, 막수가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막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녀에게 말했다.“넌 나갈 필요 없어. 네 어머니를 잘 지키고 있어. 내가 나갈게.”말을 마친 막수는 마차에서 내려갔다.고개를 돌린 온권승 부자는 온사가 내려오길 기대했지만 나온 사람은 막수였다.막수는 온권승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온장온과 온자월을 번갈아보더니 담담히 말했다.“넷째는 안 왔네. 하긴, 그 놈은 말도 타지 못하는 약골이니까.”“넷째가 오든 안 오든 그쪽이랑 무슨 상관이야? 당장 온사 나오라고 해!”온권승이 옆에 있으니 온자월도 대담해졌다.그는 짜증스럽게 막수를 노려보며 소리쳤다.“감히 건방지게 성녀의 이름을 입에 담아?”아직도 반성을 모르는 아이에게 막수는 인내심을 잃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온권승을 노려보며 비아냥거렸다.“자군이가 세상을 떠난 후에 진국공 가문은 애들을 대체 어떻게 가르친 거지? 어찌 저런 예의 범절도 모르는 망나니가 됐어?”온권승은 불쾌한 얼굴로 경고했다.“막수, 네가 출가인 신분이라는 걸 잊지 마. 어디 출가인이 그런 불경한 말을 해?”“내 성격 진작에 알고 있었잖아? 예전 기억이 별로 없나? 승려한테 욕먹어서 기분이 불쾌해? 또 귀뺨 한번 맞고 싶어?”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당황해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온자월과 온장온 형제는 물론이고 북진연마저도 눈썹을 치켜올렸다.‘역시 온사의 사부여서 그런지 개성 있어.’경성에 진국공을 상대로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은 막수를 제외하고 몇 없을 것이다.온권승은 버럭 화를 내며 막수를 협박했다.“예전에는 부인 체면을 생각해서 참고 있었지만 감히 오늘 내 앞길을 막는다면 나도 더 이상 참고만 있지 않아!”그의 협박에 막수는 가소롭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네 주제에? 그럴 자격은 있고?”온권승이 음침한 눈으로 노려보는 가운데 막수는 싸늘히 덧붙였다.“넌 사생아의 신분을 은폐하려고 자군의 딸에게 온갖 고통과 시련을 주었
그녀의 침묵에 막수도 잠시 고민에 잠겼다.잠시 후, 막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내가 몇번을 말해. 독과 해독제는 동시에 제조해야 한다고 그렇게 일렀거늘.”온사는 기죽은 목소리로 말했다.“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제가 돌아가서 바로 만들게요!”다행히 좋은 소식이 전해졌다.북진연은 흑기군을 이끌고 근처를 배회하던 중에 뜻밖의 수확이 있었다.도주하던 사구 일당이 그대로 북진연의 포위 범위 안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그리고 그때 마침 진국공부에서 사람을 보내왔다고 한다.“그 사람들이 왜요?”온사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북진연은 안쓰러운 얼굴로 온사를 바라보며 말했다.“온모를 데려갔어. 김사도는 도망치고 사칠과 사구를 우리가 잡았어. 네가 쓸데가 있을 것 같아서 사람을 시켜 이쪽으로 끌고 오는 중이야.”당연히 김사도와 온사의 관계를 아는 북진연이 일부러 풀어준 거였다.그래서 북진연은 부하를 시켜 김사도에게 틈을 주었고 그걸 눈치챈 김사도는 사구와 사칠을 버려둔 채,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다.“여기로 끌고 올 것까진 없습니다. 사칠은 그냥 죽이고 사구의 몸에 뱀독 해독제가 있는지 수색하고 있든 없든 그냥 목을 치면 됩니다.”뱀독 해독제를 연구하는데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아예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그녀는 더 이상 후환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출가인이 사람을 죽이라는 말을 이리도 쉽게 하는데도 북진연은 전혀 그게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온사가 그들의 죽음을 원한다면 그렇게 해줄 것이다.곧 지시가 내려졌고 결과가 나왔다.사구의 몸에는 해독제가 없었지만 그는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거짓말을 하고 협박까지 했다고 한다.안타깝게도 온사는 주저없이 죽이라고 말했고 사구의 목이 떨어졌다.온사와 막수는 온자신과 란자군의 시신을 챙겨 길을 나섰다.당나귀를 타고 갈 수는 없으니 당나귀는 자연스럽게 고요에게 맡겨졌다.“걱정 마세요, 성녀 전하. 제가 이 녀석을 어떻게든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흑기군은 그들을 호송하기로 했다.남산 산기슭
“무우야!”“사태!”막수와 추월이 동시에 소리쳤다.온사는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온자신에게 밀쳐져서 바닥에 쓰러졌다.그녀는 다급히 온자신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팔뚝에는 가느다란 독사가 매달려서 독니로 그의 살을 깨물고 있었다.추월은 바로 독사를 쳐내고 검으로 그것의 머리를 잘랐다.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온사는 재빨리 온자신의 옷소매를 위로 걷었다. 독사에게 물린 부위가 이미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빨리 팔뚝을 묶어!”막수는 란자군의 시신을 온사에게 넘긴 후, 해독제를 꺼내 온자신에게 먹였다.그러나 사구의 독사는 독성이 아주 강한 품종이라 해독제도 독이 몸에 퍼지는 시간만 늦출 뿐이었다.그들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일각만 지나면 온자신은 독성이 온몸에 퍼져 죽게 될 것이다.“온사야, 내 동생… 괜찮아? 그 뱀… 멀리 도망쳐… 위험해….”온자신이 자신이 곧 죽을 것을 모르는 사람처럼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온사의 안위를 먼저 걱정했다.온사는 그 모습을 보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그만 말해요. 지금 위험한 건 당신이니 체력을 아껴요.”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자신에게 말하는 온사를 보고 온자신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네 말 들을게.”온사는 고개를 홱 돌리며 막수에게 물었다.“사부님, 다른 방법이 없을까요?”막수는 은침을 꺼내 온자신의 혈자리에 꽂으며 말했다.“있어. 걱정 마. 내가 있는 한 이 녀석 절대 죽지 않아.”그제야 온사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곧이어 막수는 싸늘한 얼굴로 온사에게 말했다.“네 전갈을 시켜서 뱀에게 물린 부위를 물게 해. 독으로 독을 공격해서 뱀독을 약화시켜야 해!”“예.”온사는 전갈왕을 하나 꺼내 온자신의 팔뚝에 놓았다.한 마리로 부족해서 막수는 또 한 마리를 부르라고 했다.그렇게 전갈왕 두 마리가 양쪽에서 독사가 물린 부위를 깨물었다.그러자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잠시 후, 온자신의 안색이 급변하더니 고통스럽게 몸부림치기 시작했다.“악! 아파, 너무
전갈을 본 사구와 사칠은 의심의 눈초리로 김사도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자신들보다 더 충격에 빠진 그를 보고 의심이 약간 사그라들었다.“가야 합니다!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야 해요!”저것들은 일반 전갈이 아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소중한 독사들이 떼죽음을 당할 상황이었다.사구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사칠과 함께 온모를 붙잡고 뛰었다.“싫어! 나 안 가! 이 무능한 자식들! 어떻게 여자 셋을 처리하지 못해서 이 난리야!”온모는 악에 받쳐 소리쳤다.하지만 이번에 사구와 사칠은 그녀의 말을 따라주지 않았다. 그들은 강제로 온모를 끌고 갔다.김사도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온사를 힐끗 바라본 뒤에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사구가 자리를 뜨자 요행으로 살아남은 뱀들도 뿔뿔이 흩어졌다.물론 움직임이 느린 자들은 전갈의 집게발에 찔려 죽었다.“도망쳤네.”막수는 미간을 찌푸리고 사구와 온모가 도망친 방향을 노려보며 말했다.그러고는 흐뭇한 얼굴로 온사를 바라보았다.“미리 대비해 뒀기에 다행이야. 섭정왕 전하의 사람들도 좋은 소식을 전해오겠지.”한차례 대결이 드디어 끝나자 온사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정리 좀 하고 저희도 이곳을 떠나죠.”그녀는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고는 막수에게 말했다.그런데 이때, 등뒤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온사야,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니?”나무 뒤에 숨어서 이 사태를 지켜보던 온자신이 밖으로 나오며 온사에게 물었다. 그는 바닥에 널브러진 독사의 사체를 보고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온사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이미 다 봤으면서 새삼스럽게 뭘 물어봐요? 보신 그대로예요. 더 설명할 것도 없어요.”온자신은 흠칫하며 막수가 안고 있는 시신으로 시선을 돌렸다.“그러니 막내가… 널 협박하려고 어머니의 시신을… 도둑질해갔다는 얘기야?”“협박이 아니지요.”온사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보복이에요. 분을 못 이겨서 나에게 보복하려고 어머니의 시신을 도굴해서 훔쳐간
온모의 호령이 떨어지기 바쁘게 등 뒤에 있던 사구가 담담한 미소를 짓더니 답했다.“명을 받들겠습니다, 아가씨.”걸걸한 목소리가 울리자 사방에서 쉭쉭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수십 마리나 되는 비취색 독사들이 빠른 속도로 온사 일행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그것들은 온사 일행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사방을 포위했다.그 광경을 본 온모는 지금 당장 고통받는 온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온사가 자기 앞에 무릎 꿇고 살려달라 애원할 생각을 하니 웃음이 터져나왔다.그런데 이때, 온모의 안색이 급변하더니 갑자기 입에서 피를 뿜었다.“아가씨!”당황한 사구가 얼른 달려와서 온모를 부축했다. 그녀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피는 검붉은색이었다.“감히 아가씨께 독을 먹였어?”사구는 눈을 부릅뜨고 온사를 노려보았다.온사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독사들을 노려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사전에 독을 먹이지 않았으면 너희 같은 비겁한 자들을 어떻게 상대하라고?”“젠장! 당장 해독제 내놔!”“그 전에 네가 우릴 무사히 보내준다면 기꺼이 줄 수 있어.”온사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안 돼… 절대 보내주지 마!”온모는 피를 토하면서도 사구를 꽉 잡고 이를 갈며 말했다.“온사는 절대 돌려보내면 안 돼!”그동안 그 고생을 견디며 참아온 이유는 바로 오늘을 위해서였다.그래서 절대 온사를 무사히 돌려보낼 수 없었다.“하지만 아가씨, 체내의 독은….”“닥쳐! 이 무능한 자식! 당장 저 늙은 할망구부터 잡아. 저 할망구가 쟤 사부야. 저 늙은이만 잡으면 온사가 어련히 알아서 해독제를 내놓겠지!”사구는 그 말을 듣고 곧장 반절이 넘는 독사를 막수에게로 보냈다.막수는 자신을 향해 덮쳐오는 독사를 발로 차버리고는 소매에서 웅황이 든 독약을 독사들에게 뿌렸다. 앞에서 돌진하던 독사 몇 마리가 독을 맞고 쓰러졌다.하지만 그 뒤로 더 많은 독사가 몰려왔다.수량이 많아지니 막수도 점점 상대하기 버거워졌다.그녀는 란자군의 시신까지 안고 있어서 자칫 잘못하면 시신을
“좋아.”사구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잠자코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막수 사태가 주저없이 요구를 승낙했다.막수는 고개를 들려 단호한 눈빛으로 온사를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갈 테니 넌 여기 가만히 있어.”온사는 자기가 가겠다고 말하려 했지만 상의할 여지조차 없어 보이는 막수 사태의 모습에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예, 그렇게 할게요. 조심해요, 사부님.”김사도는 몰래 온사를 힐끗 보고는 짐짓 여유 넘치는 어투로 물었다.“내가 갈까?”사구가 담담히 말했다.“아니, 사칠 네가 가.”눈만 빼고 온몸을 꽁꽁 사맨 사칠이 고개를 끄덕였다.“예, 형님.”저들이 말하는 것으로 보아 사구는 일당 중에서도 꽤 지위가 있어 보였다.김사도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사칠을 힐끗 보고는 어깨를 으쓱하며 길을 비켰다.사칠은 관을 내려놓고 맞은편을 향해 걸어갔다.그와 동시에 막수 사태도 천천히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사구는 눈앞의 늙은 여승을 빤히 노려보았다.3일 전 수월관에서 만났던 모습이 떠올랐다.그때 악취미가 발동해서 상대를 겁주려고 시도했는데 상대의 반응이 참 재미없었던 거로 인상에 남았다.그런데 그 여승이 성녀의 사부이자 수월관의 주지 사태였을 줄이야.사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겼다.한편, 사칠이 다가오자 검은 인영이 온사의 뒤편에 나타났다.추월은 살기 어린 눈빛으로 상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사칠이 자칫 조금만 선을 넘는 행동을 하면 당장 죽여버릴 기세였다.거래 과정은 꽤 순조롭게 진행되었다.사칠이 다가오는 동안에도 온사는 칼로 온모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막수가 어머니의 시신을 옮기려면 시간이 필요했다.그녀는 막수가 어머니의 시신을 관에서 안고 돌아올 때에야 천천히 비수를 내렸다.“아가씨, 가시죠.”사칠의 목소리는 사구보다도 더 흉측했는데 마치 쇠가 갈리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그는 예의고 뭐고 다짜고짜 온모의 팔목을 잡아당기며 일행이 있는 쪽으로 이끌었다.“가자! 빨리 가자!”온모는 허둥지둥 사칠을 따라갔다. 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