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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Author: 이제리
“그대들의 말이 옳습니다. 전 제 동생이 아니고, 그리 착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절 괴롭히고 제게 모욕을 주었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하나 복수할 것입니다.”

온사의 말투는 차가웠다. 그녀는 최소택을 보며 전생에 사람들 앞에서 하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던 말을 꺼냈다.

“최소택, 파혼하고 싶다 하였지? 그래, 나도 좋아. 아무 조건도 필요 없어. 그저 오늘 이후로 나 온사는 너희 충용후 저택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야!”

그녀가 뱉은 말로 장 내는 고요해졌다.

최소택 본인마저 멍하니 있었다.

그…… 그냥 이렇게 알겠다고?

그는 오늘 파혼 얘기를 꺼내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온사가 그렇게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온사가 매달리고 울며 소란을 피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곳에 오기 전, 최소택은 많은 가능성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유일하게 생각하지 못했던 건, 정말 온사가 이렇게 쉽게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아니, 이건 쉽게 받아들인 게 아니다.

심지어 그의 뺨을 때렸으니.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고, 체면이 구겨졌다고 생각한 최소택은 순식간에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뜨거운 자신의 얼굴을 만지며 차가운 눈으로 온사를 흘끗 보고 말했다.

“네가 눈치가 있는 것을 보아서, 방금 맞은 것은 내 넓은 아량으로 따지지 않겠네. 다만 너도 기억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야. 앞으로 네가 감히 또 나를 귀찮게 하거나 온모에게 무슨 수작을 부린다면, 나는 결코 널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쾅!

갑자기 위에서 거세게 상을 내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온권승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무표정으로 두 사람을 훑어보았다.

“할 말은 다 했는가?”

온사는 눈을 내리깔고 담담하게 말했다.

“저는 다 했습니다. 아버지 선택만 남았습니다.”

그녀는 온권승이 아무리 조카 최소택을 소중히 여긴다고 해도, 자신이 오늘 이렇게 소란을 피웠으니 아버지가 아무 일 없던 것처럼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역시, 곧이어 온권승의 말이 들렸다.

“네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이 혼사는 여기서 끝내고, 내일 혼약 증표를 각자 돌려주게나.”

이 말을 들은 최소택과 온아려 모자는 기쁜 얼굴이었다.

“다만.”

온권승은 압박감 가득한 시선을 최소택에게 돌리며 말했다.

“파혼은 가능하다, 하지만 혼담은 안 된다.”

“외삼촌!”

최소택은 다급해졌다.

“하지만 저랑 온모는 서로 좋아하는데, 외삼촌께서……”

“거짓이다!”

“그 입 닫으라!”

“막내를 모욕하지 말게!”

서로 좋아한다는 최소택의 말은 온모가 진짜 자신의 형부가 될 사람을 꼬시고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

온자신 일행이 가장 먼저 깨닫고 바로 화를 내며 큰 소리로 최소택의 말을 끊었다.

온모도 속으로 조용히 ‘멍청한 놈’이라며 욕을 했다.

말이 끊긴 최소택도 자신이 말을 잘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급히 입을 닫았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와 온모는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최소택은 참지 못하고 애원하는 눈빛으로 자신의 엄마를 보았다.

온아려는 그런 아들이 안쓰러워 더듬더듬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사실 제가 계속 온모를 좋아했던 거 오라버니도 알고 계셨지 않습니까? 아니면……”

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온권승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하자, 그녀는 바로 입을 닫았다.

“온모는 아주 괜찮지. 하지만 최소택은 뭐라도 되는가?”

온권승의 딸이 아무리 멍청하고 악랄해도, 최소택이 사람들 앞에서 모욕해선 안 되었다.

최소택이 오늘 한 말들은 거의 온사의 욕이었지만 이건 진국공 저택의 위엄에 도발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오늘 그가 모욕한 것은 온사였지만, 내일은 온권승의 머리 위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심지어 하나는 버리고 하나는 데려가겠다니, 온씨 가문이 뒤뜰이라 생각하기라도 하는 건가?

온권승은 냉담하게 말했다.

“오늘 충용후의 체면을 보아 더 이상 따지고 들지 않겠네.”

이 말을 들은 온아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충용후 부인인 그녀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오라버니에게 체면을 구겼으니, 속으로 원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오라버니를 감히 원망할 수 없었고, 자신의 아들을 탓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쨌든 아들도 그저 악랄한 여자와 혼인하고 싶지 않았던 것뿐인데, 그가 무슨 잘못이 있는가?

잘못한 건 온사다!

다 이 년 때문이다.

역시 지 어미랑 똑같이 얄밉구나!

“됐다. 시작하자.”

비록 오늘 좋은 구경을 했지만, 온권승 진국공 앞에서 누가 감히 진짜로 온씨 가문을 비웃겠는가?

온권승이 표정 변화 하나 없이 계속 진행하자고 하니, 손님들도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민망함을 피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장이 마무리되고 모든 손님들이 떠난 뒤.

“서재로 오거라.”

온권승은 한 마디를 남기고 몸을 일으켜 자리를 떴다.

그는 누구의 이름도 언급하지 않았지만 감히 아무도 가지 못했다.

잠시 후, 온씨 가문 형제들은 온권승의 서재에 쭉 서있었다.

온권승은 붓을 들고 ‘진정’이라는 글자를 쓰고 있었고, 감히 아무도 소리를 내지 못했다.

서재는 아주 고요했다.

“온사.”

온사는 자신의 이름이 가장 먼저 불린 것에 대해 전혀 의외가 아니라는 듯했다.

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앞으로 한 발 나아갔다.

“아버지.”

“네 잘못을 아느냐?”

온권승이 붓을 책상에 던지자 먹물이 떨어져 ‘진정’ 글자를 더럽혔다.

또 이 말이다.

온사는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담담히 말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온권승은 온장온이 아니다.

오랜 세월을 보낸 높디높은 진국공은 누군가 억울하던 말던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저 온씨 가문의 체면을 구겼다면, 그게 누구든 상관없이 잘못이었다.

아 아니, 그의 보배 온모는 예외였다.

전생에 온모가 밖에서 얼마나 큰 사고를 당했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었고, 심지어 무릎을 꿇고 몸을 굽혀 온사는 들어본 적도 없는 부드러운 말투로 온모에게 말했다.

“너는 나 온권승의 딸이고, 아무도 널 괴롭힐 수 없다.”

예전에 그녀가 이 말을 들었을 때, 온권승에게 자신도 그의 딸이라고 너무 알려주고 싶었다. 왜 그녀가 괴롭힘을 당했을 때는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냐고.

설마 온모는 자기 딸이고, 나는 아닌가?

예전 생각이 난 온사는 눈을 감고 손을 꽉 쥐고 아픔을 견디며 스스로 정신을 차렸다.

“오늘 사람들 앞에서 파혼을 당하고, 온씨 가문의 체면을 구기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충용후 저택 세자의 뺨을 때렸으니 양가의 관계가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온사는 ‘쿵’하는 소리와 함께 고민도 없이 무릎을 꿇고 앉아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난처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가법 곤장 50대로 용서를 구하니 들어주세요.”

“곤장 50대?”

“온사, 네가 맞아 죽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냐?!”

서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감히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던 온자신은 이 말을 듣자 놀라서 더더욱 할 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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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승님과 제 아버지요?”온사는 이 말을 듣고 순간 멍해졌다.덕자는 마치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왼쪽의 햇살을 즐기며 온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이 일은 말하자면 재밌습니다. 예전에 막수 스승님께서는 하산을 하지 않으셨고, 수월관을 떠나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가씨께서 태어나신 해에 막수 스승님께서 사람을 시켜 진국공 저택에 선물을 보냈고, 외부 사람들은 그제야 세상사에 관심 없던 막수 스승과 진국공 저택이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사람들은 진국공 어르신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뒤로 막수 스승님은 더 이상 진국공 저택과 왕래하지 않았습니다. 진국공 부인의 병세가 악화되어 세상을 뜨던 날까지요. 그날 막수 스승님께서는 급히 하산하시어 진국공 부인의 마지막을 함께 했습니다.”“장례를 치른 뒤, 막수 스승님께서는 사람들 앞에서 진국공께 양심이 없다며 욕을 퍼붓고 그의 부인에게 미안하니 앞으로 다시는 진국공 저택의 사람들과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그제야 외부 사람들은 알게 되었죠. 알고 보니 막수 스승님께서 오래 알던 사람은 진국공이 아닌 국공 부인이었다는 것을요.”덕자가 묵묵히 얘기했다.“아가씨, 어머니와 막수 스승님께서는 확실히 오래 알고 지내셨습니다. 하지만 아가씨께서는 진국공의 딸이기도 하시니 막수 스승님께서는 아가씨 체면을 살려주지 않으실 겁니다.”“그러니까,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셔야 합니다.”온사는 정말 상상도 못했다.그녀는 수월관의 관주인 스승이 온씨 가문과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은 상상도 못했고, 그게 그녀의 어머니 때문이었다는 것은 더더욱 몰랐다.이 일은 그녀의 전생에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온사는 입술을 문지르며 말했다.“덕공님,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기왕 이렇게 된 거, 그녀도 수월관에 가봐야 한다.마차는 한참을 흔들거리며 남산에 도착했다.덕자는 온사를 수월관 앞까지 바래다주고 말했다.“아가씨, 들어가세요. 저는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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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군은 그녀의 어머니 별명, 란자군을 뜻하는 것이었다.막수 스승과 그녀의 어머니는 정말 오래 알고 지낸 사이였다.온사는 상대방이 자신을 어머니라고 착각했다는 것을 알고 살짝 허리를 굽혀 예의를 갖추었다.“소녀 온사, 막수 스승님을 뵙습니다.”막수 스승은 멈칫했다.그녀는 순식간에 다시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왔고, 난초를 안은 채 뒤로 돌아 안뜰의 다른 방향으로 갔다.그곳에는 다양한 난초가 놓인 나무 선반이 있었는데, 그 위에 빈자리가 하나 있었다.품에 있던 것은 아마 손질을 한 것 같았다. 막수는 난초를 올려둔 뒤 따뜻함이라고는 전혀 없는 목소리로 다시 한번 맨 처음에 했던 말을 반복했다.“여기는 대전이 아닙니다. 참배를 하시려면 나가셔서 오른쪽으로 쭉 가시면 됩니다.”온사는 안타까웠다.역시 이 스승은 온씨 가문에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이 말은 길을 알려주는 것처럼 들리지만, 사람을 쫓아내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스승님, 오늘 소녀는 참배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다른 일로……”“참배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면, 시주께서는 돌아가 주시지요. 수월관은 경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머물 곳이 못 됩니다.”막수 스승은 온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아쉽지만 그녀도 오늘 목표를 달성하기 전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온사가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스승님 소녀에게 시간을 조금만 내어 주십시오. 아주 잠깐이면 됩니다. 최소한 소녀가 이곳에 온 사유만이라도 말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하지만 막수 스승의 태도도 아주 단호했다.“시주께서 무슨 연유로 오셨든, 여승은 듣고 싶지 않고 함께하고 싶지 않습니다.”그녀는 이 말을 끝으로 심지어 그대로 뒤돌아 가버렸다.온사가 가지 않으니 그녀가 가는 것 같았다.온사는 어쩔 수 없이 급히 월동문의 앞을 가로막고 빠르게 말했다.“저도 스승님께서 온씨 가문과 어떠한 관계도 맺고 싶지 않으시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온씨 가문의 일로 온 것이 아닙니다. 저는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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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승이 된 나에게 무릎꿇고 돌아오라고 비는 오빠들   제253화

    “그럼요!”온사는 힘껏 고개를 끄덕이고는 간식을 먹는데 집중했다.“날 찾아온 게 이 일 때문이었어?”“예, 맞아요.”자신이 보고 싶어 찾아온 줄 알고 기대했던 북진연은 순식간에 풀이 죽었다.물론 그도 온사가 지금 당장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길 바라는 건 아니었다.어차피 시간은 많고 천천히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참, 너에게 전해줄 소식이 있어.”“뭔가요?”온사는 동작을 멈추고 호기심 어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북진연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입가에 묻은 과자 찌꺼기를 닦아주었다.온사가 뭔가 이상한 것 같아 뒤로 빼려는 순간, 북진연이 말했다.“내 부하가 며칠 전에 한때 경성에 살았던 란씨 가문 사람을 찾았더군.”온사는 순간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그게… 사실인가요?”“그럼.”북진연은 손을 내리고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내가 너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아니, 그냥 너무 뜻밖이라서요.”온사는 다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북진연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란씨 가문 사람들은 경성을 떠난 친척들 외에 경성에 남아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그래서 북진연이 갑자기 란씨 가문 사람을 찾았다고 했을 때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한번 만나보지 그래? 마침 사는 곳이 경성과 그리 멀지 않더라고.”“경성 밖에서 살고 있나요?”온사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예, 만나봐야죠.”그녀는 외조부 가문의 사람이 확실한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좋아, 그럼 지금 가지. 마차는 이미 대기시켜 뒀으니까.”북진연은 온사가 당연히 갈 거라고 생각하고 준비를 마친 모양이었다.그만큼 북진연은 온사의 성격에 대해 그녀 자신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온사는 자신만의 생각에 잠겨 입을 다물었다.두 시진 후, 마차는 유가마을 입구에 도착했다.“이곳이 유가마을인가요?”하필 오전에 우왕재가 말했던 그 영감님도 유가마을에 살고 있었다.온사는 이따가 친척을 만나고 시간 되면 그 영감님도 한번 찾아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잠시 후, 마차

  • 여승이 된 나에게 무릎꿇고 돌아오라고 비는 오빠들   제252화

    “섭정왕 전하가 얼마나 여자를 혐오하는지 몰라? 그분의 사람이 되고 싶다고? 네가 뭔데? 너 그분께 접근했다가 죽지 않고 살아남을 자신은 있고?”안비각은 각박한 얼굴로 비아냥거렸다.“서녀 주제에 돌아가서 수놓이나 연습하지 않고 어디 못된 것만 배워서는. 난 네 헛소리 들어줄 시간 없어. 나가!”“저 섭정왕 전하의 비밀을 알고 있어요. 그분이 저를 받아주게 할 자신이 있다고요.”안란심이 말했다.“네가 전하의 비밀을 알아?”안비각은 냉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네가 뭘 알아?”“그건 제가 온사한테서 들은 거예요.”안란심은 표정 하나 안 바꾸고 거짓말을 술술 했다.“온사?”안비각은 인상을 찌푸렸다.“너와 성녀 전하는 그날 이후로 완전히 척을 진 거 아니었어? 성녀 전하께서 너한테 비밀을 알려줘?”안란심은 침착하게 답을 했다.“원수지간이 된 건 맞지만 성녀 전하께서 워낙 여린 분이잖아요. 제가 눈물 흘리며 찾아가서 빌었더니 저를 용서해 주셨어요.”“그게 사실이니?”안비각은 눈을 가늘게 뜨고 딸을 빤히 바라보았다.온사가 여리고 착한 마음씨를 가진 것은 알고 있었다. 과거 안란심 때문에 하마터면 물에 빠져 죽을 뻔했는데도 그녀는 못난 그의 딸을 용서해 주었다.그래서 안비각은 외부에서 진국공부 적녀가 악랄하고 독사 같은 여자라고 욕할 때도 그는 여전히 온사가 여리고 멍청한 애라고 생각했다.“물론이죠. 못 믿으시겠으면 사람을 보내 조사해 보세요. 오후에 온사와 약속을 잡고 만났었거든요. 긴 얘기를 나누고 온사는 저를 용서해 줬어요. 얘기가 끝나고 저는 그 애를 섭정왕부까지 데려다줬고요.”안비각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턱을 매만졌다.“그래서 네가 말하고자 하는 섭정왕의 비밀이 뭐니?”안란심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건 아직 말씀드릴 수 없어요. 말씀드렸다가 아버지께 피해만 갈 수 있으니까요.”그 말을 들은 안비각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그건 네가 알아서 하거라.”“그럼 아버지, 제 부탁을 들어주시는 건

  • 여승이 된 나에게 무릎꿇고 돌아오라고 비는 오빠들   제251화

    말을 마친 온사는 바로 섭정왕부로 들어가 버렸다.“성녀 전하를 뵙습니다.”대문 앞을 지키는 호위는 그녀의 앞을 막지도 않고 예를 행한 뒤에 바로 그녀를 안으로 들여보냈다.안란심은 자신은 저런 대접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녀는 섭정왕부 대문 앞에 서서 멀어지는 온사의 모습을 바라만 보았다.“아가씨, 이제 어떡하죠? 성녀 전하는 섭정왕 전하와 아주 친한 거로 보이는데요. 성녀 전하를 상대하려면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겠어요.”안란심의 심복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괜찮아, 나한테 방법이 있어.”안란심은 피식 웃고는 그곳을 떠나 저택으로 돌아갔다.잠시 후, 중서령 저택 서재.“소녀 아버지께 문안드리러 왔습니다.”“들어오너라.”중서령 안비각(安比刻)이 싸늘한 목소리로 답했다.곧이어 문이 열리고 딸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안비각은 고개도 들지 않고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무슨 일인지 빨리 말하고 나가. 내 시간 낭비하지 말고.”그가 바로 안란심의 아버지이자 안씨 가문의 수장이었다.그는 권세에 따라 움직이고 자식들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안란심이 집에서 큰 부인과 적통 자매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다가 하마터면 얼어죽을 뻔했을 때도 그는 관심 한번 주지 않았다.안란심은 우연히 지나가다가 온사를 구해주고 그 뒤로 그녀의 삶에 커다란 변화가 찾아왔다.큰 부인과 자매들은 더 이상 그녀를 괴롭히지 못했고 십여 년 동안 눈길 한번 안 주던 아버지가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잘했다고 칭찬까지 해주었다.그 뒤로 안란심은 자기가 뭘 해야 할지 알게 되었다.그녀는 온사의 환심을 사고 온사의 충실한 개가 되기로 했다.안란심은 온사만 옆에 있으면 가문에서의 삶이 풍요로워진다는 것을 몸소 깨달았다.그녀는 그렇게 했고 우연히 베푼 호의 덕분에 온사와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온사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었다.그들은 친구였다.그때 두 사람 사이에는 제삼자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안란심은 줄곧 두 사람이 가장 친하다고 생각했

  • 여승이 된 나에게 무릎꿇고 돌아오라고 비는 오빠들   제250화

    “우리가 다시 만나서 이야기할 사이는 아니지 않나?”온사는 싸늘히 말했다.안란심은 한숨을 쉬며 답했다.“넌 참 매정하구나. 난 한때 너를 가장 친한 친구로 생각했었는데.”온사는 불쾌한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렸다.“날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마. 그리고 난 너의 친구가 아니야. 속세와 인연을 끊은지가 언제인데.”“속세와 인연을 끊어?”안란심은 살짝 당황하는 듯하더니 웃음을 터뜨렸다.“네가 진짜로 부처님을 모시는 승려가 되었을 줄이야. 난 온모에게 밀려나서 어쩔 수 없이 거기로 간 줄 알았지.”온사는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묵묵히 뒤돌아섰다.안란심은 달려와서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같이 가. 옛친구가 만났는데 얘기 좀 할 수 있잖아. 뭐가 그리 급해?”안란심은 종종걸음으로 온사의 옆으로 다가가서 그녀를 아래위로 훑더니 말했다.“머리를 안 자른 건 아쉽네. 빡빡이 여승이 된 네 모습이 궁금하긴 했는데 말이야.”온사는 여전히 무시로 일관했지만 안란심은 혼자서 주절주절 떠들었다.“그래도 지금 네 모습도 보기 좋아. 법복이 좀 소박해 보이긴 하지만 네가 입으니까 분위기가 다르네.”그녀는 둘이 진짜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온사를 칭찬했다.그럴수록 온사는 짜증이 치밀었다.“그만해, 안란심.”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상대를 노려보며 말했다.“우린 이제 아무런 사이도 아니야. 그러니 나랑 친한 척 좀 하지 마.”“온사야, 그렇게 말하면 내가 속상하지.”안란심은 미소를 지으며 온사에게 말했다.“우리 아무 사이 아니라고 누가 그래? 우린 서로 원수 지간이잖아? 난 내 손으로 널 밀어서 강에 빠뜨렸고 넌 그 일로 목숨까지 잃을 뻔했는데 내가 밉지도 않아?”미웠지만 그건 모두 지나간 일이었다.밉고 화도 났고 왜 안란심이 자신에게 그랬는지 이해할 수 없던 때가 있었다.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고 더 이상 온사는 그 일 때문에 괴롭지 않았다.“안란심, 너에 대한 미움은 내려놓은지 오래야. 우린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너도 알 거야.

  • 여승이 된 나에게 무릎꿇고 돌아오라고 비는 오빠들   제249화

    “온사 넌 양심이 없어?”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온모의 앞으로 다가온 온자월은 다짜고짜 욕부터 퍼부었다.“어떻게 그 많은 그림자 호위를 다 죽였어? 그들은 우리 진국공부 사람이잖니! 그걸 보시고 아버지가 몸져누운 걸 몰라?”“몰라, 알고 싶지 않아.”온사는 싸늘한 어조로 대꾸했다.“넌 정말 양심을 개나 줬구나!”“내가 양심이 없어?”온사는 냉소를 지으며 반박했다.“내가 양심이 없으면 너희가 그렇게 싸고 도는 막내는 뭐지? 오라버니를 독살하려고 한 짐승인가?”“난 신경 안 써!”온자월은 눈을 부릅뜨고 온사를 노려보며 말했다.“너 아니었으면 막내가 나한테 그런 짓을 했을 리 없어!”“하, 멍청하기는.”온사는 그와 단 한마디도 더 나누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뒤돌아서 갈 길을 가려는 그녀의 앞을 온자월이 가로막았다.“어딜 가? 막내 네가 납치해서 숨겼지? 빨리 말해! 대체 애를 어디에 숨긴 거야? 당장 집으로 돌려보내!”“난 모르는 일이라고 말했어!”온사는 참을 수 없는 짜증이 치밀었다.“그렇게 막내가 보고 싶으면 나가서 찾아. 나 찾아와도 소용 없어. 내가 모른다고 하면 정말 모르는 거야!”“너!”온자월은 분노에 이를 갈았다.“뒤 봐주는 사람 있다고 건방 떨지 마! 내가 널 어쩌지 못할 것 같아?”짝!온사는 주저없이 손을 들어 그의 귀뺨을 때리고는 차갑게 말했다.“난 널 때렸어. 그리고 넌 날 못 때려. 용기 있으면 한번 해봐.”온자월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주먹을 움켜쥐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온사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이제 머리가 좀 돌아가나 보네. 하긴, 지금도 주제 파악을 못하면 진국공가 사람들 모두 감옥행이 될 테니까.”“건방 떨지 마, 온사!”“건방 떠는 게 아니라 사실이야.”온사는 그의 어깨를 밀치고는 가던 길을 갔다.그 자리에 홀로 남은 온자월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멍청한 정도로 놓고 보면 최소택 그 멍청이랑 비슷한 수준이네.”온사도 길을 가며 욕설을 퍼부었다.그러고 나

  • 여승이 된 나에게 무릎꿇고 돌아오라고 비는 오빠들   제248화

    서홍화를 구할 길이 없으니 만들고 싶어도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온사는 달랐다.처방을 보니 해독제가 맞는 것 같았고 그녀는 서홍화를 갖고 있었다.김사도 무리가 계속 온모가 해독제를 만들어 주길 기다렸다면 죽기를 기다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물론 그렇게 쉽게 김사도에게 해독제를 줄 생각은 없었다.이 약초가 필요한 사람이 그들뿐이 아니었다.온사는 한숨을 쉬며 어떻게든 공간의 약초를 현세에서 재배할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다짐했다.해독약에 대해 대략적으로 이해한 온사는 처방전을 도로 숨겼다.다음 날, 그녀는 산을 내려갈 생각으로 짐을 정리했다.밖으로 나온 그녀는 어제 오후에 심은 철피석괴가 잘 자라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물론 그것은 옮겨 심기 전에 희석한 령수를 주어서 토양 속에 영기가 아직 남아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영기가 철피석괴가 완전히 외부 환경에 적응할 때까지 버텨줄지는 모를 일이었다.온사는 대전으로 가서 아침 공부를 시작했다.기도까지 마친 그녀는 어머니의 위패가 있는 편전으로 가서 큰절을 올리고 일어섰다. 마침 장명등을 든 막수가 안으로 들어왔다.“사부님, 등유를 넣으러 다녀오시나 보네요. 저 시키지 그랬어요.”“괜찮아.”막수 사태는 장명등을 조심스레 내려놓고 그녀에게 물었다.“어제 네 거처에 또 누가 찾아갔다더구나?”“예, 전에 제가 말씀드렸던 이국인 사내 김사도가 찾아왔는데 제가 잘 해결했어요.”“해결했어? 이렇게 빨리? 놈은 독충을 잘 쓴다고 하지 않았어?”“그렇긴 한데 제가 한수 위니까요. 저는 독왕인 사부님이 친히 가르친 제자잖아요.”온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어리광 부리기는. 말해, 오늘은 또 어딜 가려고?”온사는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사부님,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보따리를 잔뜩 들고 나왔는데 내가 장님도 아니고.”막수는 담담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바깥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데 굳이 산을 내려가야겠느냐.”“화내지 마세요, 사부님. 뭐 좀 사러

  • 여승이 된 나에게 무릎꿇고 돌아오라고 비는 오빠들   제247화

    애지중지하는 지네를 남기고 가라니 김사도의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넌 파군을 쓸 일도 없는데 왜 굳이 데리고 있으려는 거야?”“그걸 네가 어찌 알아?”온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나도 저 녀석의 독을 연구하고 싶다고.”“알았어.”김사도는 마지못해 대답했다.“이제 나 좀 풀어줘야지?”온사는 등을 돌려 나무통에 있는 지네를 공간에 들여보낸 후, 추월에게 눈빛을 보냈다.추월이 다가와 장검으로 김사도를 묶고 있는 밧줄을 끊었다.드디어 자유를 되찾은 김사도는 밧줄을 벗어던지고 뻐근한 손목과 발목을 문질렀다.“독벌레는 내가 가진 게 좀 있어. 거미, 전갈, 불개미도 있고. 어떤 걸 원해? 지금은 줄 수 없고 다음에 올 때 가지고 올게.”“다 줘.”온사는 주저없이 말했다.김사도는 눈을 부릅떴다.“정말 전혀 사양을 안 하네. 그 많은 독충을 먹여 살릴 방법은 있고? 그것들에게 네가 당할 수도 있는데?”온사는 미소를 지으며 싸늘히 대꾸했다.“그건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내가 뭐 너 걱정해서 그러는 줄 알아? 그렇게 자신만만하다가 충독에 당해 죽을까 봐 그러지. 그럼 나도 또 해독제를 연구할 사람을 새로 찾아야 하잖아.”김사도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그건 걱정 마. 내가 죽으면 너와 온모 먼저 죽이고 죽을 거니까. 그러니 네가 다른 사람을 찾아갈 일은 없어.”그녀를 도와 진실을 파헤치거나, 죽음을 기다리는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의미였다.분명한 협박에 김사도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알았어, 알았어. 내가 사람 시켜 좀 알아볼게.”말을 마친 그는 온사의 주방을 떠났다.환각제 밭을 지날 때, 김사도는 한송이 챙겨갈 생각으로 손을 뻗었다.그러자 등 뒤에서 온사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너 내 약초 건드리면 난 네 파군의 배를 가를 거야.”김사도는 순간 손을 내렸다.“참, 쪼잔하긴.”“누가 쪼잔해? 넌 도둑놈이야. 추월, 당장 저놈을 발로 차서 내쫓아 버려!”“야, 야! 하지 마. 내가 갈게!”김사도

  • 여승이 된 나에게 무릎꿇고 돌아오라고 비는 오빠들   제246화

    의미심장한 말에 온모는 순간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설마 너희들 오랫동안 해독제를 먹지 못했니?”김사도가 이를 갈며 답했다.“그래. 아주 오랜 고통의 시간이었지.”그들은 해독제를 못 먹은지 이미 3년이 지났다.세번의 발작을 일으켰지만 그들은 해독제를 받지 못했다.그래서 그들의 인원수는 삼백 명에서 이미 이백 남짓으로 줄었다.그러다 금주로 온사를 암살하러 갔다가 실패하면서 또 반이 줄었다.현재 그들은 수십 명밖에 남지 않았다.이대로 가다가는 얼마 못가 모두가 죽게 될 것이다.“그럼 왜 죽이지 않고 살려뒀어?”온사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김사도는 한심하다는 듯이 온사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래도 성녀인데, 출가한 승려 주제에 무슨 그런 말을 그렇게 쉽게 해?”“말 안 할 거야?”온사는 그를 노려보며 압박했다.“해, 해! 하면 되잖아.”김사도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말했다.“우리도 죽이고 싶지. 그런데 온모의 어미는 죽기 전에 우리들한테 자신은 해독제의 처방을 온모에게 전수해 주었고 그러니 우린 온모 걔가 처방전을 해독할 수 있는 날까지 잘 지켜주어야 한다고 말했어. 그럼 독을 완치할 수 있는 해독제를 받을 수 있다고.”“최후의 해독제? 정말 그렇게 말했어?”“맞아.”“너희는 그걸 믿고 온모를 지켜준 거야?”온사는 무슨 이런 멍청이가 다 있나 하는 눈빛으로 김사도를 바라봤다.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은 속은 것 같았다.거짓말이 아니라고 해도 해독제만 있으면 그들을 통제할 수 있는데 온모가 최후의 해독제를 그들에게 줄 리가 없었다.그들의 체내의 독을 완치한다면 온모는 그들에 대한 통제권을 완전히 잃게 되는 것이다.김사도와 그의 무리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데 온모가 그런 멍청한 짓을 할 리 없었다.‘그동안 그 고생을 했으니 해독제를 받으면 온모를 갈가리 찢어 죽일 수도 있겠지.’“왜 그런 눈으로 봐? 안 들을 거야?”김사도는 온사의 눈빛이 불쾌했다.“알았어, 빨리 말해봐.”온사는 김사도가 순순히 말해줄 때 더 많은

  • 여승이 된 나에게 무릎꿇고 돌아오라고 비는 오빠들   제245화

    온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사도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온모가 순수하고 선량해? 천진난만? 웃기고 있네. 내 살면서 이런 웃기는 소리는 처음 들어보는군!”김사도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웃음을 터뜨렸다.“걔 그냥 사기꾼이야. 걔는 우리 모두를 속였어. 그 망할 어미랑 같이 우리 모두를 속였다고!”온사는 그가 실컷 욕설을 퍼부은 뒤에야 담담히 말했다.“내 말 또 한번 끊으면 네 벌레를 계속 괴롭힐 거야.”온사는 손가락으로 나무통을 가리켰다.김사도는 그제야 풀이 죽어 말했다.“알았어, 계속해봐.”“네 주인 얘기는 이쯤하고 이제 저 벌레 얘기를 하자.”온사는 약간 심드렁한 어조로 말했다.“저 녀석은 네가 날 독살하라고 보낸 놈이지. 저것 때문에 내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알아?”게다가 공간의 령수마저 몰래 훔쳐 마신 놈을 지금까지 살려둔 것만으로 자비를 베푼 것이었다.저놈이 령수를 먹고 변하지 않았다면 진작에 시체가 되었을 것이다.“그러니 난 저 놈을 예뻐할 수가 없어. 방금처럼 고통받기 싫으면 내 질문에 솔직히 대답해야 할 거야.”이미 포로가 된 김사도는 더 이상 반항할 수도 없었다.“물어봐. 아는 건 답해줄게. 모르는 건 나도 어쩔 수 없는 거고.”온사는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꺼냈다.“넌 온모가 네 주인이 아니라고 했어. 그럼 온모랑은 어떤 관계지? 너희랑 온모, 그리고 온모의 어미 말이야.”수많은 암살자들이 온모의 지시에 따랐다.온사는 그들이 온모 어미의 부하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김사도가 하는 걸 보니 생각과 전혀 다른 것 같았다.“우린 그 여자의 어미와 아무런 관계도 없어.”김사도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굳이 관계를 설명하자면 독에 당한 허수아비라고 보는 게 맞겠지.”“허수아비?”온사는 예상치 못했던 답에 살짝 놀랐다.“그래. 우리의 체내에는 온모의 어미가 몰래 먹인 독이 들어 있어. 일년에 한번씩 발작을 일으키고 해독제가 없으면 죽기보다 힘든 고통을 겪어야 하지. 그러다 가장 고통스럽게 죽어가.”‘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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