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인아 아가씨!”장문호와 허유나는 서인아와 수미가 호텔 압구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즉시 그들에게 다가갔다. “왜 아직 가지 않은 거죠?”서인아는 즉시 눈살을 찌푸렸다.허유나는 서인아의 차가운 시선에 당황하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장문호는 훨씬 교활했기에 진지한 척하며 여유 있게 말을 꺼냈다.“서인아 아가씨, 방금 호텔 로비에서 조명주 중령님을 만났는데, 임유환을 찾으러 온 거였습니다!”“임유환을요?” 서인아의 표정이 바뀌더니 그에게 물었다.“조명주가 임유환을 찾는 이유가 뭐죠?” 그녀도 의아해하며 물었고, 그녀와 임유환은 불과 1분 차이로 조명주의 차를 타고 떠났기에 그에게 이유를 물을 시간조차 없었다. 장문호는 서인아가 이유를 묻는 것을 보고 다급하게 대답했다.“서인아 아가씨, 임유환이 범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조 중령님이 직접 그 사람을 데려간 겁니다.” “범행이요?” 서인아의 미간이 더욱 진해졌다. “맞습니다, 아가씨!”장문호는 서인아의 표정을 바라보며 더욱 열정적으로 말했다. “방금 조 중령님께서 그의 개인 파일에 문제가 있다고 하더군요. 또한 사건 현장과 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임유환에게 확인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개인 파일? 사건 현장?”서인아는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임유환의 개인 파일에 대해 몰랐고 알 필요도 없었다.하지만 장문호가 언급한 사건 현장에 대해서는 그녀는 바로 방금 습격을 받은 곳을 말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산 꼭대기에서 일어난 일 때문인가?” 수미도 눈동자가 흔들렸다. 설마 그때 임유환이 정말 저격수를 처리하러 산꼭대기에 갔었단 말인가? 하지만… 시간적으로 말이 안 됐다! 분명 다른 사건 때문이겠지! 그 당시 그 자식은 분명 무서워서 숨어 있었을 텐데!이를 생각한 수미는 갑자기 화가 났고, 임유환이 조명주에게 체포되어 보름 동안 갇혀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네, 조 중령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장문호는 두 사람의 반응을 보고 희색이 만면 해지며
“조 중령님, 저를 어디로 데려가시는 겁니까?” 임유환은 픽업트럭 조수석에 앉아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물었다.“걱정하지 마세요. 난 당신을 전투 구역으로 데려가지 않을 거고, 그냥 아무데나 가고 있는 중입니다.” 조명주는 이 말을 하더니 곧이어 설명했다.“물론 만약 임유환 씨가 나의 질문에 사실대로 답하지 못한다면, 난 당신을 데려가서 고문을 할 수밖에 없겠죠. 어쨌든 당신은 파일이 없는 사람이니까요.” “조 중령님, 저는 법률을 준수하는 시민입니다.” 임유환은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그는 조명주가 정말로 그를 전투 구역에 데려가 고문할 거라고 걱정하지 않았다. “흥, 그건 조사해 봐야 아는 거죠.” 조명주는 시큰둥하게 말하더니 이내 눈빛이 다시 날카로워졌다. “임유환 씨, 물어보겠습니다. 산꼭대기에 있던 저격수를 죽인 사람이 정말 당신입니까?”“맞습니다.” 임유환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조명주는 이 말을 들었을 때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숨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그렇다면, 당신의 실력 순위는 도대체…” 조명주는 차의 속도를 늦추고 임유환을 응시했다. “어... 순위를 정한 적도 없고, 고수 명단에 있는 사람도 모르지만, 그들과 정말 겨루게 된다면 10초도 버티지 못할 겁니다.” 임유환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10초도 버티지 못할 거라고요?” 조명주의 눈이 커지며 물었다.“당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아는 거죠?”“압니다.” 임유환은 조명주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허풍이 심하네요!” 조명주는 곧장 임유환을 무시하며 말했다. 이 사람은 최소한 겸손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자만심이 지나친 사람이었군. 그러자 임유환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실을 말하는데도 믿지 못하다니. “됐어요, 당신은 고수의 실력을 모를 테니 더 이상 따지지 않을게요.” 조명주는 임유환이 고수를 몰랐기 때문에 그들의 실력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며 말했다. 세계 5위권
“세계 갑부에 군부와 정계의 수뇌라고요?”눈이 튀어나올 듯 깜짝 놀란 조명주는 하마터면 길 한복판에서 급브레이크를 밟을 번 했다.“제 말 믿어요?”임유환이 싱글벙글 웃으며 물었다.“믿긴 개뿔! 당신이 세계 갑부에 군부, 정계의 수뇌라면 전 세계 5위 안에 드는 고수겠네요! 당신 하나 없애는 건 일도 아니고요!”조명주는 임유환을 향해 눈을 흘겼다.그녀는 이런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이 사람은 입만 열면 거짓말이야!임유환은 이런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다. 방금 망설였던 이유이기도 했다.“그러니까, 국가급 특수 요원이라서 너무 많은 걸 털어놓을 수 없다는 거네요?”이때, 조명주가 갑자기 진지하게 물었다.임유환의 실력이나 그가 정체를 일부러 감추는 걸로 미루어 보아 특수 요원이라는 신분이 가장 유력했다.“특수 요원?”임유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아니에요?”조명주도 덩달아 눈썹을 치켜뜨면서 임유환을 흘깃 쳐다봤다. “설마 진짜 밀입국한 거예요?”그녀는 갑자기 경계하는 듯했다.“밀입국이요?”임유환은 멈칫했다가 어이가 없어서 실소를 터뜨렸다. “맞아요. 요원이에요. MSS 소속 특수 요원 003입니다.”뭘 말해도 조명주가 믿질 않으니 아예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하,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조명주는 뿌듯해하면서 턱을 치켜들었다.역시나 임유환이 특수 요원일 줄 알았다.“엥......”임유환은 어이가 없었다.솔직하게 말할 때는 들은 척도 하지 않다가 이런 헛소리는 또 믿네?뭔 003, MSS야, 정보사령부에 이런 코드네임이 어디 있다고......“무슨 표정이에요?”임유환의 얼굴을 본 조명주가 불쾌해했다. 왜 이렇게 약 오르지?“아니, 그냥. 조 중령님이 엄청 대단하신 것 같아서요. 제 정체를 단번에 알아채시고.”임유환이 칭찬했다.“당연할 소릴!”조명주가 흐뭇해하면서 대답했다.임유환은 속으로 살짝 웃었다. 이 조 중령도 성격이 좀 불같아서 그렇지 그다지 똑똑한 사람은 아니네.“아 참, 조 중령님. 서인아를 습격했던
흰 BMW 차량이었다.따라온 지는 꽤나 된 것 같았다.조명주의 표정이 살짝 심각해졌다. “우리 뒤를 밟는 사람이 있어요.”“우릴요?”임유환이 흠칫 놀랐다.왜 살기를 전혀 느끼지 못했지?“뒤에 저 흰 차 보여요? 오는 길 내내 따라왔는데.”조명주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임유환은 그제야 백미러를 들여다봤다. 확실히 흰 차가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서린이?”임유환의 눈빛이 반짝였다.누가 봐도 윤서린의 차 BMW 320i이잖아.“서린?”조명주가 멈칫했다가 말했다. “당신 여자친구요?”“음...... 아직 여자친구는 아니에요.”임유환이 잠깐 머뭇거렸다.“ ‘아직’ 이요?”조명주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이렇게 오래 따라온 걸 보면 그쪽이 많이 걱정됐나 봐요?”“중령님이 직접 오셔서 데려갔는데 누구라도 걱정되지 않을까요?”임유환이 눈썹을 올리면서 말했다.“하긴, 그렇긴 해요.”조명주가 중얼거리면서 임유환의 말에 동의했다.“그래서 말인데요, 조 중령님. 여기서 그만 내려주시죠. 궁금하신 거 다 대답해드린 것 같은데.”임유환은 윤서린을 더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알았어요. 다음에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할 테니까 번호 줘요.”조명주도 그렇게 억지스러운 사람이 아니었다.“010XXXXXXXX”임유환은 조명주가 꽤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하여 번호를 알려줬다.조명주는 연락처를 저장하고 길가에 차를 세웠다.흰 차도 따라서 섰다.임유환은 차에서 내려 운전석에 있는 윤서린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서린아.”“유환 씨!”윤서린도 곧바로 차에서 내려 임유환을 다정하게 쳐다봤다. “괜찮은 거예요?”“괜찮아.”임유환이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이때 조명주도 운전석에서 내려 윤서린에게 인사를 건넸다.“서린 씨, 안녕하세요.”“안녕하세요, 조 중령님.”윤서린이 깍듯하게 대답했다. “유환 씨 이제 돌아가도 되는 거예요?”“네, 서린 씨. 그냥 제가 물어볼 게 좀 있어서 찾았을 뿐이에요. 사고 안 쳤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조명주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서인아의 마음이 무거웠다.“아가씨, 방금 하백 집사님이 조 중령님과 연락했는데 임유환의 일이 잘 해결되었다 합니다. 임유환은 이미 집으로 돌아갔대요.”이때, 수미가 룸으로 들어와 보고했다.“그래, 알겠어.”서인아의 말투에 피곤함이 묻어있었다.“아가씨, 왜 그러세요?”수미는 서인아의 컨디션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단번에 알아챘다.평소의 아가씨라면 이 소식을 듣고 엄청 기뻐했어야 했다.“며칠 후에 우빈 씨가 S시로 오겠다네.”서인아가 이유를 말했다.딱히 숨길 필요가 없는 사실이기도 했고.“우빈 도련님?”수미의 눈빛이 흔들렸다. “도련님이 전장에서 돌아오신대요?”“응.”서인아가 머리를 끄덕였다.“좋은 소식 아닌가요, 아가씨?”수미는 이 말에 기분이 좋았다.“난 아직, 그 사람 별로 보고 싶지 않아.”서인아에 말투에 서먹함과 냉담함이 묻어났다.“그래도 아가씨 약혼자 시잖아요. 그리고 그분 마음도 다 아시면서...... 이번에도 아가씨 보고 싶으셔서 급하게 오시나 봐요.”수미는 정우빈을 편을 들었다.그녀는 우빈 도련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아가씨에게 걸맞은 남자라고 생각했다.임유환 그 겁쟁이 같은 놈이 대체 어디가 좋다고 아가씨는 연경에서부터 여기까지 오셨는지.게다가 그 자식은 반기지도 않고!우빈 도련님이 이 일을 아신다면 절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정우빈은 본인의 능력이 출중할 뿐만 아니라 집안 대대로 군인이었다.그의 할아버지는 연경 작전 지역의 부사령관이었고,본인은 현재 연경 작전 지역의 대장이었다!연경에서도 아주 대단한 가문이었다.서인아의 아버지인 서강인이 이 혼약을 맺은 원인이기도 했다. 두 집안이 혼인 관계를 맺는다면 S그룹은 연경에서의 입지를 100년은 더 탄탄히 할 수 있었다.해서, 서인아가 이 관계를 깨버린다면 그 후폭풍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만약 정 씨 집안의 눈에 나기라도 한다면 아무리 큰 S그룹이라 해도 아마......“우빈 씨가 훌륭한 분이란 거 알아. 또 나를 많이 아껴
어둠이 깃들었다.하지만 서인아의 기분은 여전히 나아지질 않았다.이를 눈치챈 수미가 서인아를 살폈다. “아가씨, 우빈 도련님이 S시에 오시는 것 때문에 그러세요?”“응.”서인아가 머리를 살짝 끄덕였다.“그러면 예정보다 일찍 돌아가실 건가요?”수미가 물었다.그녀는 아가씨의 수행비서로서 당연히 아가씨가 행복하길 바랐다.그리고 무엇보다 우빈 도련님과 행복하길 바랐다.주제도 모르는 임유환보다는 도련님이 백배 더 낫지.임유환이라는 인간과 비교하는 자체가 누가 될 만큼 훌륭한 사람이었다.“일단 상황 보고. 최대한 끌어봐야지.”서인아가 답했다.그녀는 연경으로 일찍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이번이 임유환과의 마지막 만남이 될 테니까.보름 뒤면 그녀는 정우빈과 결혼해야 한다.그렇게 되면 아마 평생 연경을 뜨지 못할 것이다.임유환이 그렇게 귀찮은 티를 내도 그녀가 여전히 S시에 머무르는 이유이기도 했다.남은 보름 동안 서인아는 그저 임유환이 더 잘 살 수 있도록 돕고 싶을 뿐이었다.그걸로 족한다.무엇보다, 정우빈이 임유환을 만나는 일은 없어야 한다.서인아는 둘의 성격을, 특히 정우빈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만약 정우빈이 임유환에게 손을 댄다면 본인이 나서도 막기가 어렵다.아예 만남 자체를 차단하는 편이 안전했다.“네, 아가씨.”수심이 가득한 아가씨를 보니 수미도 마음이 말이 아니었다.“그리고 수미야, 내가 유환이를 만나러 온 건 우빈 씨에게 절대 말해선 안된다. 알겠지?”수미의 입이 무거운 걸 알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더 단단히 일렀다.“알아요, 아가씨. 입단속 잘 하겠습니다.”수미가 대답했다.아가씨의 비서로서 수미도 이 정도 눈치는 있었다.“그래.”“그럼 수미야, 이만 나가봐. 혼자 있고 싶어.”너무 지쳐버린 서인아가 관자놀이를 짚으며 말했다.“네, 아가씨. 나가보겠습니다. 푹 쉬세요.”수미는 조용히 방을 나갔다.텅 빈 방, 서인아는 다시 유리창으로 다가가 번화한 도시의 야경을 바라보았다.화려한 풍경과 달
편의점.점원이 수미에게로 서서히 다가갔다.그의 발걸음은 마치 유령처럼 가벼워 어떤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이때, 한창 진열대에서 좋아하는 음료들을 골라 담던 수미는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그림자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마지막 오렌지에이드를 바구니에 넣은 뒤 카운터에서 계산하려고 몸을 돌린 그때,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꺄아!”그녀의 얼굴이 하마터면 남자의 볼캡과 부딪힐 뻔했다.“무슨 짓이에요!”수미는 눈썹을 치켜뜨면서 크게 호통쳤다.“허.”남자는 입꼬리를 찢어 히죽 웃을 뿐이었다. 모자챙에 가려진 두 눈아 더러운 욕망으로 꿈틀거렸다.“뭐...... 뭐 하는거야!”점원의 검은 속내를 알아챈 수미는 목소리가 떨렸지만 단호함을 유지했다.남자는 말없이 자신의 표정을 볼 수 없도록 모자를 더 꾹 눌러썼다. 정돈되지 않은 까칠까칠한 턱수염으로 40대 좌우라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비켜! 잘 들어, 나 바로 옆 호텔에 들었거든. 주위에 경호원이 이렇게 많은데 내가 소리 지르면 다 들릴걸!”수미는 더 크게 말하면서 상대방에게 겁을 주려 했다.하지만 남자는 말을 듣고서도 입을 더 히죽 찢을 뿐이었다.수미는 뭔가 잘못됨을 감지하고 눈썹을 찌푸렸다.생각 없이 들어온 편의점 점원이 변태라니!그녀는 입을 벌려 큰 소리로 경호원을 부르려 했다.아무래도 이 편의점은 S호텔 근처에 있었고 스물네 시간 순찰하는 경호원들이 쫙 깔려있었다.“수미 비서님, 저랑 어디 좀 가시죠.”이때, 남자가 입을 열었다.쩍쩍 갈라진 음침한 목소리였다. 마치 말라비틀어진 두 나무껍질이 마찰하는 것 같은 아주 불쾌한 소리였다.수미의 동공이 흔들렸다.이 자식이 내 이름을 알고 있다!단순히 편의점 점원이 아니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어찌할 새도 없이 남자는 주머니에서 준비해뒀던 손수건을 꺼내 수미의 얼굴에 확 덮었다.“읍, 읍!”코를 찌르는 냄새가 덮쳐왔다. 수미는 반항하려고 했지만 상대방의 힘이 너무 세 손수건을 떼낼 수가 없었다. 갑자기 머리가 핑 돌더니 그
“네? 수미 비서님이 납치당했다고요?”조명주의 다급한 말투에 임유환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범인이 누굽니까?”“열에 아홉은 점심에 서인아 씨를 습격했던 그놈들 같아요.”조명주가 말했다. “비서님을 납치한 사람이 아마 그 두목 아닐까요? 저도 비서님에게 드렸던 GPS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해서요.”오늘 점심, 수미가 사건 현장을 떠나기 전 조명주가 특별히 위치추적기를 줬었다. 혹시 모르니 늘 가방에 넣어두라면서.이게 이렇게 빨리 쓰일 줄은 몰랐다.이 야밤에 수미의 위치가 호텔에서부터 교외로 옮겨갔다. 무조건 납치라고 확신했다!“그놈이 벌써 나타났다고요?”가늘게 뜬 임유환의 눈빛에 한기가 들었다.놈을 어떻게 유인해야 하나 생각 중이었는데 제 발로 기어 나올 줄이야.목숨이 아깝지 않은 놈인가 보지.“어디 있는데요.”임유환이 물었다.“교외의 폐공장 근처에서 움직이고 있어요.”조명주가 핸드폰의 빨간 점을 보다가 갑자기 말했다. “멈췄어요!”“알겠어요. 위치 보내주세요. 금방 가겠습니다.임유환이 대답했다.“네. 저도 지금 출발해요. 비서님이 지금 그들 손에 있으니까 꼭 신중히 행동하셔야 합니다. 혼자 가는 게 좋을듯해요.”조명주가 한 마디 보탰다.많은 사람이 움직였다가 상대가 알아채고 수미를 죽이기라도 한다면......“알았어요.”임유환이 대답했다. 조 중령이 영 명석하지 못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이런 데서는 아주 프로페셔널하다고 생각했다.둘은 곧바로 교외로 향했다.같은 시각.교외의 버려진 공장에서.낡아빠진 페공장의 2층에 희미한 불빛이 비쳤다.회색 런닝에 검은 색 볼캡을 쓴 남자가 방 중앙에 서있었다.그는 고개를 숙이고 책상 위의 차가운 수술기구들을 정리하고 있었다.니들통, 메스, 가위, 실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그 옆에는 날카로운 톱까지 있었다!수미는 여전히 정신을 잃은 채 남자 뒤의 시멘트 기둥에 묶여있었다.남자가 수술도구들을 놓으면서 금속끼리 부딪히는 소리 때문이었는지, 또는 이미 약효가 지났었는지.수미의
임유환과 윤여진은 최서우의 병이 악화될까 염려하여 일부러 그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조용히 임씨 집안으로 향했다.임씨 집안으로 가는 차 안에서 윤여진은 사건의 자초지종에 대해 간략하게 전해 듣게 되었다.영상 속의 그 여자는 임유환의 시중을 들던 나비라는 이름의 메이드이고 그 메이드를 남자들에게 건네준 이가 임준호라는 사실까지 다 듣고 난 윤여진도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윤여진이 알고 있는 임준호는 자상하고 따뜻한 분이었는데 그런 분이 한 일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조차도 없는 잔인한 행동에 15년 전 자신의 친아들을 직접 내쫓던 그때의 임준호가 떠올라 윤여진은 온몸이 오싹해났다.아마도 15년 전 그날부로 임준호가 완전히 변한 게 아닌가 싶었다.30분 뒤 그들은 임씨 집안에 도착했지만 워낙 깊은 밤이라 저택의 대문은 당연히 잠겨있었고 흑기군을 데리고 대문 앞에서 한참 동안 대기하고 있던 흑제가 임유환을 보고 인사를 건네왔다.“임 선생님.”“오셨어요?”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세계 제일 갑부의 느닷없는 등장이 윤여진은 놀랍기만 했다.임유환을 대하는 흑제의 태도가 지나치게 깍듯해 그 둘의 사이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물을 때가 아니라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할 때라서 윤여진은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그리고 영상에서 봤던 모습을 떠올리며 윤여진이 다시 표정을 굳히자 아까부터 냉랭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임유환이 앞으로 나서더니 대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임준호, 당장 나와!”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저택 사람들 몇 명이 눈을 떴고 하인 두 명이 달려 나왔다.밖에 나와 상황을 살피던 하인 두 명은 익숙한 임유환의 얼굴에 깜짝 놀랐지만 그런 놀라움도 얼마 오래가진 못했다.하인들은 이내 비아냥거리며 임유환을 향해 말했다.“어머, 이게 누구야, 우리 임유환 도련님 아니세요?”입으로는 도련님이라 하고 있었지만 그 말투 속에 진하게 녹아나 있는 조롱은 눈치를 못 챌 수가 없을 정도였다.“무슨 도련님이야, 버려진 도련
임유환의 몸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이미 덜덜 떨리고 있었다.“주인님, 그건 저도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이 영상도 그 경찰에 대해 조사할 때 경찰 시스템을 뒤지다 발견한 겁니다.”“경찰 시스템?”“그럼 이것도 정씨 집안에서 한 짓이란 말이야?”“그것까진 아직 모르겠는데... 제가 알아본 바로는 저 여자분은 주인님... 아버님께서 직접 저 남자들 손에 넘긴 거였습니다.”이 일이 임유환의 아버지와 관련되어있기도 했고 영상 속의 여자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하면 더 위험한 일에 휘말릴 것 같아 흑제는 대답을 망설였다.“아버지?”“네, 주인님.”흑제의 말에 당황하던 임유환은 재차 확인을 거친 후에 또다시 기운을 뿜어내며 당장이라도 임준호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임유환은 어떻게 자신이 직접 데려온 아이를 또 내다 버릴 수가 있는지 임준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당연히 제 한 목숨 부지하고자 행한 나약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겠지만 저 사람들 손에 끌려가면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내어준 게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짓인지 의문이 갔다.영상 속 사람들이 말하는 비밀 열쇠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임유환은 나비가 지금 아주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임준호!”갑자기 소리 지르는 임유환 때문에 방 안에 있던 윤여진은 화들짝 놀랐다.“흑제.”“예, 주인님.”“지금 당장 흑기군 준비해서 나랑 임씨 집안으로 간다.”“예, 주인님.”지금 임유환은 약해빠진 임준호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있었다.그래서 직접 집으로 쳐들어가서 대체 나비를 누구에게 넘겨준 것인지, 나비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살아있다면 직접 얼굴을 봐야 했고 죽었다면 그 시체라도 봐야 진정될 것 같았다.임유환은 나비가 그 짐승 같은 놈들 손에 놀아나도록 두고 볼 수가 없었다.살아있다면 당장 데려다가 직접 치료를 해줄 것이고 죽었어도 데리고 와서 묻어줄 생각으로 눈이 빨갛게 충혈된 임유환은 차오르는 분노와
“나비?”아까는 얼굴이 제대로 안 보여서 몰랐는데 영상 속의 여자는 바로 임유환만 보면 도련님이라 부르며 해맑게 웃던 나비였다.그렇게 밝고 예쁘게 웃던 아이가 피범벅이 된 채 모진 고문을 견뎌내는 걸 보고 임유환은 낯빛이 창백해졌고 머리가 울려왔으면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서 쫓겨난 지도 15년이니 나비도 많이 커서 얼굴만 보면 못 알아봤겠지만 나비 문양의 반점 덕분에 한눈에 그녀의 알아볼 수 있었다.나비라는 아이는 5살의 어린 나이에 임씨 집안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름도 없어서 나비도 임유환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었다.나비는 어릴 때 강도들의 손에 부모님을 잃고 그들에게 이끌려 여기저기 팔려 다니던 이이였는데 그런 그녀를 불쌍하게 여긴 임준호가 큰돈을 들여 데리고 오는 바람에 임씨 집안에서 메이드로 일을 하게 된 것이다.나비는 임유환을 보자마자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을 때릴까 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눈빛이 너무나도 슬퍼 보여서, 웅크린 몸을 떨고 있는 아이가 너무 애처로워 보여서 임유환은 아직까지도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 들어온 이상 더는 그 어떤 괴롭힘도 없을 거라고 다독여봐도 나비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었다.다른 메이드들을 시켜 깔끔히 씻기고 머리도 빗겨주고 깨끗한 옷까지 갈아입혀 주니 왼쪽 얼굴에 있는 나비 모양의 반점도 드러났다.임유환이 그 반점을 바라보고 있으니 나비는 신분이 낮은 제가 얼굴에 난 반점으로 임유환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어 동굴 속에서 강도들에게 폭행당하던 것처럼 맞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반점을 가리며 몸을 떨었다.그에 임유환은 바로 나비의 손을 잡아주며 자신은 그들과는 다르다고 천천히 타일러주었다.그리고는 나비의 긴장과 두려움을 해소해주기 위해 정원 산책까지 데리고 갔다.드넓은 정원에는 많은 꽃들이 피어있었고 그것들이 함께 조화로운 향도 만들어내고 있었다.이런 아름다운 곳은 처음 보는 나비는 처음에는 몸이 굳어버리며 어색해했지만 이
“아!”남자의 행동과 함께 흘러나온 여자의 처절한 비명이 밀실을 가득 채웠다.화면을 뚫고도 전해지는 여자의 절망과 고통에 핸드폰을 들고 있던 임유환의 몸도 떨려왔고 마찬가지로 비명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윤여진도 임유환 쪽으로 다가오며 화면을 바라보았다.“어머!”사람한테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하는 영상 속 인간들 때문에 윤여진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고 소리쳤다.너무 집중해서 본 나머지 옆에 윤여진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던 임유환이 다급하게 화면을 가리며 말했다.“여진아, 넌 보지 마.”“오빠, 이 사람들 누구예요?”“아직 모르겠어.”얼굴과 입술이 창백해진 윤여진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임유환은 한숨부터 쉬며 대답했다.“여진아, 네 방 화장실 좀 쓸게.”말을 마친 임유환은 화장실로 들어가서 다시 영상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화면 속의 여자는 여전히 은침에 찔린 손을 들고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온몸을 비틀려고 발버둥 치는 여자는 마치 불판 위에 올라간 미꾸라지 같기도 했다.하지만 검은 옷차림의 남자는 그런 여자가 불쌍하지도 않은지 여전히 차가운 눈을 하고 두 번째 은침을 꺼내 들어 여자의 다른 손가락에 찔러넣었다.“아!”가슴을 관통하는 듯한 고통에 여자는 순간 고개를 확 젖혀버렸고 이미 흑과 말라 굳어버린 핏자국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머리카락이 여자의 얼굴을 가렸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몰라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요...”“그냥 날 죽여줘요 제발...”“죽여주세요...”남자가 아까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여자는 울며불멸 죽기를 애원하고 있었다.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으면 죽는 걸 원하고 있을까 싶어 임유환은 비통하다 못해 화까지 나고 있었다.“말했잖아, 얘기하면 죽여준다고.”말을 마친 남자는 섬뜩하게 웃더니 나머지 손가락에도 하나하나 은침을 꽂아 넣었고 여자는 온몸에 경련이 일듯 몸을 떨어대다가 한계에 다다른 건지 다시 한번 기절했다.은침이 가지런히 꽂혀있는 열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피들은 빠르게 작은 웅덩이
“마음의 준비요?”의미심장한 흑제의 말에 임유환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영상인데 그래요?”“혼자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미 암호 걸어서 이메일 보내놨어요.”임유환이 영상을 보면 어떤 반응일지 알기에 흑제는 말을 내뱉기가 어려웠다.“알겠어요.”임유환은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나서 빠르게 흑제가 보내온 이메일을 확인했다.이메일의 정체는 5분쯤 되는 영상이었는데 영상의 장소는 어두운 밀실같이 보였다.밀실 안에는 똑같은 옷차림을 한 남자가 다섯이나 있었는데 그들은 전부 눈 하나만 내놓고 있었다.임유환은 그들의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핸드폰 화면으로만 들여다보고 있음에도 무시무시한 그들의 기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남자들의 발밑에는 거의 죽어가는 젊은 여자 하나가 누워있었다.남루한 옷차림의 여자는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고 몸에는 채찍에 맞느라 생긴 생채기들이 한가득이었다.생채기 주위의 살들은 진작에 터져나갔고 팔은 안에 있는 뼈가 다 보일 정도로 앙상했다.그리고 몸에 난 상처는 그뿐만이 아니라 담배로 인해 생긴 작은 화상 자국들도 빼곡했다.옛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새로 난 상처들은 이미 옷과 붙어버려 여자의 처참한 상태를 더욱 잘 보여주고 있었다.영상을 보고 있던 임유환도 서서히 여자가 불쌍해졌다.다섯 남자들은 대체 누구길래 여자한테 이토록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그리고 여자는 또 누구인지 임유환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영상 하단에 떠 있는 시간을 보니 아직 5분 1밖에 진행되지 않은 영상에 임유환은 계속해서 화면을 들여다봤다.화면은 빠르게 전환됐고 여전히 같은 복장을 한 남자 다섯 명과 아까와 다를 게 없는 밀실이 나타났지만 아까 그 일로부터 며칠은 지난 듯 보였다.영상 속의 남자는 찬물을 들어 쓰러져있는 여자의 몸 위로 뿌렸고 여자는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고통 속에서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검은 복면을 쓴 남자 하나가 입을 열자 나머지 네 명도 여자를 차갑게 바라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검사할 거예요 오빠?”그때 귀를 간질거리는 윤여진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부끄러워하면서도 도발적인 말을 뱉어내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심장이 쿵쾅거렸다.“여진아, 나는...”오해를 풀어보려고 고개를 돌려 윤여진을 보던 임유환은 몸을 앞으로 숙인 탓에 훤히 드러난 검은색 슬립 아래의 몸매에 다시 말을 삼켜낼 수밖에 없었다.임유환을 포함한 모든 남자들은 시각 동물인지라 완벽한 몸매와 유독 눈에 띄는 풍만한 가슴에 저도 모르게 심장이 반응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감정도 이내 임유환의 이성에 묻혀버렸다.“후...”임유환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말했다.“여진아, 진짜 이제 그만해. 진짜 실수한다니까.”“오빠는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나긋나긋하게 말할 때마다 흘러나오는 뜨거운 숨결 때문에 점점 본능이 들끓고 있었던 임유환은 이대로 있었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 것만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런데 그 순간 윤여진이 임유환의 손을 덥석 잡아 오자 우유 크림처럼 부드러운 그 느낌에 임유환은 일어서려던 다리마저 굳어버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유환 오빠, 나 장난하는 거 아니라니까요.”윤여진은 여전히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하며 잡고 있던 임유환의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그 모습에 임유환은 순간 머리가 하얘졌고 이 손을 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까지 하고 있었다.그런데 마침 타이밍 좋게 울린 전화벨 소리에 둘 다 화들짝 놀랐고 임유환도 또 한 번 울리는 벨 소리에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윤여진도 겁먹은 고양이마냥 손을 빼내며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나... 전화 좀 받을게.”임유환이 어색하게 말하자 윤여진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네.”아까의 대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부끄럼 타는 고양이 같은 모습을 보며 웃음을 흘리던 임유환이 전화를 받았다.흑제에게서 온 전화라 조금 긴장한 채로 받았는데 역시나 전에 지시했던 일
가슴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지만 임유환은 애써 윤여진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장난치지 말라니까.”윤여진이 여전히 장난을 치는 거라고 생각한 임유환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둘러 말을 돌렸다.“아까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다고 했잖아, 그거 알려줄게.”“그 얘긴 나중에 하고, 오빠 아직 내 말에 대답 안 했잖아요.”“어... 그 얘기 먼저 하자, 불 끄면 졸려서 못 할 것 같아.”임유환은 기대에 찬 윤여진의 얼굴이 보였지만 어떻게든 이 숨 막히는 상황부터 끝내보고자 평소답지 않게 우겨댔다.그리고 사실 윤여진이 한 말이 장난인지 아닌지 제대로 분간도 가지 않아 아까부터 심장이 떨리고 있었다.장난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장난이 아니라면 아주 어색해질 것 같았다.“오빠, 왜 아까보다 땀을 더 많이 흘리는 것 같죠?”그때 임유환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들을 보며 윤여진이 부드럽게 물어왔다.“그... 그래?”“긴장한 거예요 설마?”임유환에게 질문을 하며 코앞까지 다가온 윤여진 때문에 둘의 거리는 3㎝도 채 남지 않게 되었다.정말 조금만 움직여도 바로 닿을 것같이 가까운 거리라서 임유환은 윤여진이 내뱉는 호흡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뜨거운 숨결과 함께 풍기는 향기에 임유환은 헛기침을 하며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여진아, 이제 진짜 그만해.”사람 둘은 족히 앉을 정도로 떨어져서야 임유환은 잔뜩 긴장했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장난 아니라니까요.”임유환이 저에게서 멀어지자 윤여진은 살짝 실망한 듯 보였지만 이내 연애 수첩 제1항을 떠올린 그녀는 다시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다.그래서 윤여진은 긴장한 듯 굳어있는 임유환을 보며 익살스레 웃어 보였다.“유환 오빠, 누가 그러는데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 앞에만 서면 이상하게 긴장을 한대요.”“오빠 설마 나 좋아하는 거예요?”윤여진이 이 질문을 할 때 임유환은 이게 장난이든 진심이든 간에 서둘러 이 화제가 지속되는 것부터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둘이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이상해지는 방 안의
“어...”단도직입적인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은 뭐라 변명이라도 해야 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임유환의 생각이 불순한 건 맞지만 그게 오로지 임유환의 잘못은 아니었다.이미 성인이 된 그들은 15년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윤여진은 얼굴이며 몸매며 누가 봐도 예쁜 여자로 성장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도 멀쩡할 남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임유환 역시 남자였으니 검은색 레이스 속옷에 슬립까지 입고 제 눈앞을 돌아다니고 있는 윤여진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슬립 아래로 보일 듯 말 듯 한 윤곽이 아까부터 자꾸 눈앞에 아른거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임유환은 지금 온 정신력을 다 쏟아서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자신의 눈이 윤여진의 몸으로 향하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던 임유환이기에 당연히 같이 자자는 그녀의 요구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모든 남자들의 워너비인 그 몸을 가까이에서 본다면 밤을 조용히 보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오빠, 이상한 생각 한 거 맞죠?”한편 윤여진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임유환을 보며 기쁨이 섞인 목소리로 장난스레 물었다.“어...”임유환은 이젠 정말 자신이 무슨 생각인지도 잘 모를 지경에까지 이르렀다.정말 윤여진을 두고 이상한 생각을 했다고 말하기에는 그는 윤여진이 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고 말하기에는 그녀의 몸만 보면 저절로 뜨거워지는 가슴이 대신해서 부정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여진아, 사실... 나는...”다그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해명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어떻게 말을 해야 진심이 전달될지 몰라 말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임유환에게 윤여진은 여전히 15년 전 꼬맹이였고 임유환 또한 그때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그는 윤여진이 자신의 마음에 대해 오해하는 것도 원치 않았고 또 윤여진도 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대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여전히 그때처럼 윤여진이 힘들 때 그녀에게 힘이 돼주는 든든한 오빠가 되고 싶었는데 이 마음을 전하기에 말 한마디
“아니야, 그냥 네가 아까 한 말 생각하고 있었어.”“그럼 오빠도 나랑 같이 있고 싶은 거예요?”다급히 해명하는 임유환에 시무룩해 있던 윤여진은 다시 밝게 웃으며 물었다.“그럼.”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지만 사실 그와 윤여진이 말한 같이 있는다는 서로 전혀 다른 뜻이었다.“그럼 오빠, 오늘 밤은 나랑 같이 있어 줄 수 있어요?”임유환의 팔을 감싸 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간드러지게 말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몸이 먼저 반응할 뻔한 걸 간신히 참고는 물었다.“여기서 너랑 같이 밤을 보내자고?”“네!”윤여진이 이런 부탁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임유환이기에 제 팔에 닿아오는 말랑거리는 그 느낌도 까맣게 잊은 채 놀랐다.그런 임유환의 반응을 보던 윤여진은 혹시라도 거절당할까 봐 다급하게 한마디 더 보탰다.“여기서 자는 건 처음이라 좀 무서워요, 워낙 낯설기도 하고...”“어...”윤여진의 부탁도 일리가 있어 보여 임유환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오빠, 그냥 남아서 나랑 같이 자면 안 돼요?”윤여진은 임유환의 팔을 좌우로 흔들며 입술을 살짝 깨문 채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임유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가만히 있어도 예쁜 얼굴인데 애교까지 부리니 귀여우면서도 섹시한 모습이 섞여 있어 웬만한 남자라면 다 윤여진한테 넘어갈 것 같았다.인내심과 자제력 하나는 자부하면서 살아왔던 임유환도 윤여진의 애교 공세에 3초도 못 버티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알... 알겠어.”임유환은 저도 모르게 긍정의 대답을 해버렸다.정말 이런 말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바로 거절하고 싶었지만 저를 향해 애원의 눈빛을 보내는 윤여진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역시, 오빠는 내 말 들어줄 줄 알았어요!”결국 제 말을 들어준 임유환에 윤여진의 촉촉한 눈망울에서는 빛이 나기 시작했다.“너랑 같이 있어 줄 수는 있는데, 난 바닥에서 잘 거야.”같은 방에서 밤을 보내는 건 이미 엎질러진 물이 돼버렸으니 임유환은 나름대로 그 안에서 최선책을 찾으려고 노력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