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선한 저녁 바람이 부는 강변에 앉은 심가은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시계를 바라보던 그녀는 분침이 12에 떨어지자 고개를 들었다. 가은이 고개를 드는 순간, 키가 크고 장대한 덩치의 한 남자가 가은의 맞은편에 앉는 것이 보였다. 그는 행동이 거칠었으며 몸에서도 역한 냄새를 뿜어내고 있었다. 게다가 덥수룩한 그의 머리는 몇 년간 감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가은을 가장 불쾌하게 한 것은 그 사람이 가은의 면전에서 발을 후벼 파고 있다는 것이었다. ‘윤이서만 아니었어도...’ 가은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며 간신히 혐오감을 억눌렀으나, 표정을 풀 수는 없는 듯했다. 그녀가 한 묶음의 사진을 꺼내어 그 남자에게 건넸다. 그 남자의 탁한 눈이 곧 번쩍이기 시작했다. 마치 사냥감을 정한 짐승처럼 매서운 눈빛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아.’ “이 사진 속의 여자를 처리해 주기만 한다면, 사례금은 두둑하게 챙겨 드릴게요.” 가은은 외국어로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M국에서 유학한 적이 있었다. 비록 외국어 성적이 그리 좋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것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 남자는 가은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눈동자에 가득한 욕정은 곧 흘러넘칠 것만 같았다.가은은 그의 눈빛을 보기만 해도 오한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남자가 이서를 상대할 것이라 생각하자, 그녀의 마음은 이내 후련해지는 듯했다. “알겠어요.”마침내 탐욕스러운 눈빛을 거둔 남자가 혀를 내밀어 아랫입술을 핥았다.“그런데, 이 여자를 어디서 만날 수 있는 겁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때가 되면 제가 알려드릴 테니까요.” 가은의 말을 들은 남자가 아쉽다는 듯 입을 열었다.“더 기다리라는 거군요, 알겠습니다...” 그 남자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혹시라도 연락을 주지 않는다면...” 그가 거리낌 없는 눈빛으로 가은을 훑어보았는데, 방금
심가은은 오랫동안 고기를 먹지 못한 짐승과 같은 저 남자라면 이서라는 사냥감을 매섭게 물어뜯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물어 죽여버려도 좋겠어.’ 음침한 생각을 하던 그녀의 귓가에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은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니?” 깜짝 놀라 고개를 든 가은은 그 여자가 하이먼 스웨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매우 당황했다.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도대체 무슨 일이야?”하이먼 스웨이가 다정하게 물었다.“가은아, 몸이 좋지 않은 거라면 엄마랑 같이 병원에 가자. 여태 바쁘다는 핑계로 너를 잘 챙기지 못한 것 같아서 미안하구나.” 하이먼 스웨이는 이틀 전에야 단편소설 집필을 끝냈다. 소설의 세계에서 나온 하이먼 스웨이는 그제야 심가은을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녀에게 급히 연락하여 M국에서 가장 유명한 카페에서 만나자는 약속 제의를 했다. 가은은 흔쾌히 동의했으며, 아무런 성질도 내지 않았다. 도리어 그녀는 하이먼 스웨이를 위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방금 생각에 잠긴 가은의 모습을 보자 하니, 하이먼 스웨이의 미안한 감정과 걱정은 다시 시작되는 듯했다. “엄마, 저는 정말 괜찮아요.”가은이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그나저나, 제가 며칠 전에 누구를 마주쳤는지 아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누구?”가은은 그녀와 거의 일상을 공유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서로를 알고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사이에는 시종일관 일정한 간격이 있는 듯했으며,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듯했다.그래서 하이먼 스웨이는 가은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윤이서 씨요.”이서 얘기가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의 표정이 굳어졌다. “정말 신기하죠? 저도 정말 놀랐어요.” 가은이 고의성이 다분한 말을 이어 나갔다.“그것도 이씨 가문의 유람선 앞에서 이서 씨를 만났어요. 허허, 혹시 H국에 있다던 남편을 버리고 이씨 가문에 시집가려 하는 건 아니겠죠?” 하이먼 스웨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만났을 때의 장면을 상상하는 듯하자, 가은의 표정이 냉랭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그녀는 다시 미소를 되찾았다. “괜찮아, 이서한테 잘 이야기하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가은이 하이먼 스웨이의 팔을 잡았다.“엄마, 엄마 말씀대로 제가 이서 씨에 대해 오해했던 것 같아요.” 하이먼 스웨이는 크게 기뻐했다.“가은아, 그동안 정말 많이 성장했구나. 그럼 이서를 초대하는 일을 너한테 맡기마.” “네, 알겠어요.”가은이 다정하게 대답했다. ‘반드시 성공시켜야 해, 윤이서와 그 변태남을 만나게 해야 하니까.”...심리 진료실.긴장감이 가득한 기다림 끝에 마침내 이서의 차례가 되었다.오늘은 이서의 전신 검사가 예정된 날이었으며, 그 검사는 지환의 출현이 이서의 심리상태에 영향을 미쳤는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서에게 이 사실을 알릴 수는 없었기에, 그저 정기검진이라고만 설명했다. 오늘 이서와 함께 검사하러 온 사람은 상언이었다. “이서 씨, 이제 들어가야 해요.”상언이 멍하니 앉아 있는 이서를 일깨워 주었다. “아, 네.”겨우 정신을 차린 이서가 간호사의 안내를 따라 검사실로 들어갔다. 검사실 안에는 한 명의 정신과 의사가 있었는데, 젊고 잘생긴 그는 사람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신기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듯했다. 자리에 앉은 이서가 서서히 긴장을 풀었다. “안녕하세요.”“네, 안녕하세요.”“긴장하실 필요 없어요. 저는 그저 투명 인간이라고 생각하세요.” 의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의 말투에는 친화력이 가득했다.“이제 몇 가지 검사를 진행할 건데요, 깊이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자, 제 리듬에 맞춰 눈을 감으시고... 천천히 긴장을 풀어주세요...”의사의 안내에 따라 이서는 곧 최면 상태에 빠져들었다. 의사는 절차에 따라 몇 가지 질문을 했으며, 모든 대답을 들은 의사는 이서를 깨우고 또 여러 가지 검사를 진행했다. 모든 검사를 마치자, 두 시간가량의 시간이
이상언이 인상을 찌푸렸다.“그러니까 선생님의 말씀은 지금의 이서 씨는 온실 속의 화초와 같으니까, 조금의 타격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거죠?” “네, 아주 작디작은 돌에 맞는다고 하더라도, 줄기가 꺾여 버릴 겁니다.”“네, 알겠습니다.”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눈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서가 돌아왔다. 상언은 의사와 인사를 나눈 후, 이서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온 그는 일을 핑계로 서재로 향했고, 곧바로 지환에게 검사 결과를 알렸다. 상언의 말을 들은 지환의 심장은 되살아나는 듯했다. 그의 우려는 눈 녹듯이 사라졌으며, 가면을 쓴 채 이서의 곁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기쁨만이 그를 감쌌다.‘게다가 M국은 나의 영역이잖아. 나는 이서를 잘 보호할 수 있을 거야.’ [오늘 저녁에 갈게.]“야, 지환아, 너무 조급해하는 거 아니야?” 상언이 지환을 놀렸다. 바로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저녁에 와, 방은 마련해 둘게.” 말을 마친 그가 전화를 끊었다. “들어오세요.”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배미희였다. “왜 그렇게 급하게 서재로 들어간 거야? 급한 일이라도 있어?” 배미희는 문을 닫았음에도 불구하고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상언이 웃으며 말했다.“엄마, 여기에는 우리 두 사람뿐이잖아요.” “쉿.”배미희가 비밀스럽게 초대장 한 장을 꺼내어 상언에게 건네주었다.“봐봐.”상언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가 초대장을 열었다.그 초대장은 뜻밖에도 하이먼 스웨이가 보낸 것이었는데, 정중한 어투로 이씨 가문의 가족이 아닌 이서를 초대하고 있었다. “오후에 하이먼 스웨이 여사 쪽 사람이 직접 와서 이걸 건네더구나.”배미희가 말했다.“지난번 유람선에서 하이먼 스웨이 여사의 이야기만 꺼냈는데도 이서 씨가 정신을 잃었었잖니, 그래서 우선 답장은 하지 않았단다.” “아마 계속 답장을 기다리고 있을 거야. 아들아, 이서 씨에게 이 초대장을 전달해야 할까?” 상언이 대답했다. “절대 안 돼요.” “내 생각도 그래, 그
저녁 무렵.2층에 있던 이서가 익숙한 차를 보았고, 흥분한 새가 날개를 퍼덕이는 듯 아래층으로 내려가 지환의 앞에 다다랐다. 이 장면을 바라보던 배미희가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조심해요!”그녀가 부러움을 띄는 눈빛으로 상언의 팔을 건드렸다.“젊은 게 정말 좋구나.” 상언은 배미희가 무슨 말을 이어 나갈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잠시만요, 잠시만, 엄마가 무슨 말씀을 하시려 건지 저도 잘 알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곧 어머니께 며느리를 소개해 드릴 테니까요.”상언이 입을 연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놀라움을 금치 못한 배미희가 질문을 이어 나가려던 찰나, 상언이 검지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댔다.배미희는 마음속의 의혹을 억누르고 이서 쪽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매우 놀란 그녀는 이내 멍해지는 듯했다. ‘드라마가 따로 없잖아?’ 지환의 앞에 선 이서는 아담하고 귀여웠으며, 따뜻한 햇빛이 그녀에게 떨어지자 마치 후광이 비치는 듯했다. 그리고 그녀의 맞은편에 서 있는 지환은 가면을 쓰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던 탓에 눈빛을 볼 수는 없었으나, 배미희는 이서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대단히 다정할 것이라 예상할 수 있었다. 지난번 이씨 가문의 고택에서 밥을 먹을 때처럼.“H선생님.”이서가 반가워하며 그를 바라보았으나, 가까이 다가가자니 익숙한 것에 대한 두려움이 몰려오는 듯했다. 고개를 숙인 지환이 이서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녀의 안색에는 활기가 돌고 있었으며, 눈빛도 이전보다 더욱 총명해져 있었다. 보아하니 외국 생활은 확실히 그녀를 과거의 시시비비에서 멀어지게 하여, 기억을 잃은 생활에 더욱 잘 적응하게 한 듯했다.지환이 마음속의 깊은 고통을 거두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왜 이렇게 급하게 달려온 거야?”“그게...”이서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저도 모르겠어요, H선생님을 보니까 달려오고 싶었어요.” 지환이 무의식중에 손을 내밀어 이서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려 하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그래, 모두.”지환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으나, 상언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안 돼, 그건 지호 형한테 기회를 주는 것일 뿐이야. 지호 형이 호시탐탐 YS를 노리고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된다고.”당초에 하지호는 하씨 가문의 회사에 대한 비뚤어진 마음을 가지고, 회사를 자신의 손에 넣으려 하다가 지환에게 발각된 바 있었다. 그리고 이때를 시작으로 두 사람의 사이가 악화된 것이었다. 하지호는 본래 고아였으나, 하씨 가문에게 입양된 후 줄곧 하씨 가문에서 길러졌다. 하씨 가문은 어린 하지호가 장차 하씨 가문을 집어삼킬 것이라고는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하지호는 하씨 가문에 들어온 첫날부터 이미 하씨 가문의 재산을 독식하기 위한 계산을 하고 있었다. 악독한 늑대와 같은 하지호가 지환이 모든 사람을 동원하여 이서를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틀림없이 기회를 이용할 것이었다. 이런 일은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다. “이서는 조금의 상처도 받아서는 안 돼.” “하지만 YS를 잃는 한, 넌 이서 씨를 보호할 수 없게 될 거야!” 상언이 화가 나서 말했다. 두 사람이 싸우는 소리는 순식간에 이서와 배미희의 귀에도 전해졌다. “왜 그래?”“무슨 일이에요?” 배미희는 두 사람의 사이가 아주 좋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상언은 지환의 계책을 따르면서도 아주 일관성 있게 그를 대해주었다. ‘두 사람이 얼굴을 붉히며 다투는 걸 보게 될 줄이야.’ 긴장한 이서는 두 사람은 지나쳤지만, 그녀의 시선은 지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서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접한 지환이 미간을 찌푸렸다.“아주머니, 단지 회사의 일로 의견이 맞지 않아서 그러는 거니까 크게 걱정은 마세요. 곧 의견을 조율할 수 있을 거예요.”배미희가 상언을 쳐다보았다. 상언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지환이 말이 맞아요. 별일 아니에요.” 두 사람은 이서와 배미희를 안심시키려 했으나, 두 사람은 바보가 아니었다.배미희
표정이 굳어진 지환이 긴장하며 물었다.“이서야, 괜찮아?” 운서는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요, 단지 방금 머릿속에 뭔가 스쳐 지나간 것 같았는데... 제가 잃어버린 기억인 것 같았어요.” 지환이 심하게 떨리는 이서의 팔을 붙잡았다. 고개를 숙였던 이서가 어색하게 지환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등에서는 핏줄이 서서히 불거지고 있었다. 그는 대단히 흥분한 것 같았다. 이서는 그가 왜 이토록 흥분한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었으나, 왜인지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H선생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이서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H선생님, 방금은 왜 눈물을 흘리신 거예요?” 이서가 다시 한번 물었다. 지환이 이서를 끌고 소파에 앉았다.“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어떤 친구가 생각나서 그랬던 거야. 그 친구도 너와 마찬가지로 늘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선량했거든...” “그럼 그분은 분명 H선생님께 소중한 분이시겠네요?” ‘그래서 눈물이 나셨던 거구나.’ “응, 그 사람은 내 목숨보다 소중한 사람이었어. 비록 지금은 그 사람을 잃었지만 말이야.”지환의 두 눈동자에 다시 한번 거대한 슬픔이 차오르는 것을 본 이서는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그녀는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은 듯했다. 이서가 떨면서 물었다.“그 분이... H선생님의 애인이셨나요?” 지환이 이서를 바라보며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그랬지,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 여자였어.” “나는 앞으로도 다른 사람이 아닌 그 사람만을 사랑할 거야.’ 지환의 말에 이서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H선생님께 너무 의존하느라 독신인지 묻는 것도 잊었었네. 그런데 지금 보니까...’이서가 지환과의 거리를 벌렸다. “그럼 왜 그분을 되찾으려 하지 않으시는 거예요?”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눈동자에 빛이 반짝였다.“노력 중이야.” 이서의 마음속에 알 수 없는 불이 떠올랐다. 그 불은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으나, 그녀는 자신이 전혀 화를 낼
‘H선생님은 왜 진작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걸까?’ ‘H선생님의 눈에 들 수 있다니, 그 여자분은 분명 큰 행운을 가진 분이실 거야.’문득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상언이 떠오른 이서가 눈물을 닦았다.‘맞다, 사모님께서 이 선생님과 H선생님은 오래된 친구라고 하셨었잖아. 이 선생님은 틀림없이 H선생님의 모든 걸 알고 계실 거야.’여기까지 생각한 이서가 지체 없이 문을 열고 나와 옆 서재의 문을 두드렸다.서재에 있던 상언은 대단히 화가 나 있었다. 노크 소리를 들은 그가 하인일 것이라 생각하고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혼자 있고 싶어요.” 놀란 이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그녀는 H선생님을 위하여 입술을 깨물었고 다시 한번 용기를 냈다. “이 선생님, 저예요.” 이서의 목소리를 들은 상언이 어리둥절하여 얼굴의 초조함을 접고 문을 열었다.“이서 씨? 무슨 일 있어요?” 여태까지는 항상 상언이 주동적으로 이서를 찾았었다. 물론 이렇게 한 것은 임하나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여 가능한 한 빨리 돌파구를 찾기 위해서였다.이서는 하나에 관한 일은 자신이 아는 것이라면 모두 상언에게 알려주었다. 매번 하나가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간통 현장을 잡으러 다녀야만 했다는 것을 들은 상언은 대단히 안타까워했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그때로 돌아가서 하나 씨를 구하고 싶어.’‘이전에는 하나 씨가 안정감이 부족한 이유가 아버지의 일탈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까 어머니의 행동도 하나 씨에게 적지 않은 상처를 줬을 것 같아.’ “그게... H선생님에 대해 알고 싶어서요.” 상언이 경계하며 이서를 바라보았다.“또 뭐가 알고 싶으신 거예요?” 이서가 대답했다.“걱정하지 마세요. 단지 H선생님이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있는지 묻고 싶을 뿐이니까요.”이서의 말을 들은 상언은 이유 없는 화가 치미는 듯했다.“어디 목숨만 내놓겠어요? 제가 보기에 이 세상에 그 사람만큼 지독한 사랑을 하
지환과 이서는 곧 하도훈을 마주했는데, 두 사람을 보는 하도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래, 너희가 이겼어!” 겨우 이 말을 내뱉는 하도훈은 이미 온 힘을 다 쓴 듯했다.“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환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지만, 하도훈은 지환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허.”“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네가 윤이서와 급히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은철이가 이 세상을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비극은 너희들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하도훈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잘못을 깨닫지 않자, 이서는 더 이상 하도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의 눈빛을 마주한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형님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도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이런 상황에서 알려줄 게 있다니, 두 사람한테 아이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형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지환이 먹구름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하도훈을 응시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하도훈이 곧장 몸을 일으켜 지환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지환은 그저 묵묵하게 하도훈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하도훈이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자, 지환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하도훈은 급기야 고개를 저으며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하지환,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고?! 하하, 나는 절대 그 말에 속지 않을 거야!”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도훈의 손을 뿌리쳤고, 광기 어린 하도훈을 차갑게 응시했다.“그 여자는 형님을 만나기 전부터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하도훈은 정말 그 여자를 믿었던 걸까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이란다.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니?!” “정말 잘 됐어! 스웨이 여사도 이제야 소원을 하나 이룬 셈이니까!”배미희가 말했다.이서는 병실 입구까지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결과에 놀란 하이먼 스웨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서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잠시 후,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된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눈물 속에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배미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서야, 엄마라고 불러보렴.” 이서는 이전에도 하이먼 스웨이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하이먼 스웨이가 친엄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라는 호칭은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이서는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온몸을 떨며 말했다.“엄, 엄마...”이서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 드디어 널 찾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앞으론 엄마가 널 지켜줄게.”“엄마... 엉엉...”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한 이서는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을 다 토해내는 듯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잠시 후,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지환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놓아주며 지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서 오렴.” 지환은 서서히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갔고, 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의 손을 이서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이야. 하 서방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지.” “하 서방한테 널 맡길 수 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환은 몸에 난 상처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지환과 입을 맞추며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우리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는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는데, 눈치 빠른 소희가 이서를 붙잡았다.이서가 다소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자, 하나는 깔깔거리며 가지고 온 건강식품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이내 상언과 지환은 그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서는 하나와 소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 화해한 거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나가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기뻐하며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잘 생각했어. 형부가 신분을 속이긴 했지만, 형부가 널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하은철은 형부의 반도 못 따라올 거야!” “근데 대체 언제까지 형부랑 그 쓰레기를 비교할 생각이야?”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비교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지환 씨와 다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서의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그러는 너는? 너는 상언 오빠랑 어떻게 됐어?’그동안 이서는 하나와 상언의 일을 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우리는...”하나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꽤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소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하나가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결정했어, 그 사람을 내 영원한 남자 친구로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생 이 선생님과 함께 할 생각이야. 물론 이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지만 말이야.” “아, 이제야 알겠다!” 이서가 말했다.“네 마음속 상언 오빠의 지위가 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남편이 될 자격
이서가 이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크게 일었다. 사람들은 그 위력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서는 어렴풋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선회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상 위에 누운 상태였고, 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있었다.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서야, 좀 괜찮니?” “... 네.”이서는 간신히 대답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배미희의 손을 잡았다.“엄마, 지환 씨는요?” “무사해.”배미희가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다른 병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단다.” “지환 씨한테 가보고 싶어요.” 이서가 눈물을 머금고 배미희를 바라보자, 배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에게 이서를 옆 병실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지환을 본 순간, 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고요.”그 순간, 병실 안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떨어진 창가에 멋지게 걸터앉은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그 여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마세요.”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호리병이 이서를 가로막으며 보물을 자랑하듯 말했다.“윤이서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서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 콜록콜록, 두 사람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이서 씨와 하 대표님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났을 겁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한 것도 당신들이었나요?”“맞아요, 우리가 하도훈이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해치웠고, 하지호와 박예솔까지 해결
지환과 이서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더욱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데, 다크웹 고수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곳마다 파멸로 이끌었으니 말이다.이서는 바깥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에 휩싸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설마...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죠?”지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럴 리 없어.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아주 중요시하거든.”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둠의 호리병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차에 이서를 태웠다. “너는 우선 여길 떠나.”이서는 지환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지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길 떠나라니요?” 지환이 말했다.“하지호는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어. 그 자식들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너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가정법원에 가서 새로운 정보를 등록하지도 않았잖아요!” “일이 끝나는 대로 처리하러 가야 한다고요!” 이서는 여전히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이서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지환이 거친 손가락으로 이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일이 끝나는 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게.”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모진 마음을 먹고 이서의 손을 밀어냈고,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쳤다.“우리한테는 아직 아이도 없다고요!”지환이 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남은 당신의 운명이 죽음뿐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죽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지환 씨?” 지환은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 말은, 가정법원에 가서 다시 혼인 신고하자는 뜻이었어요.”“이전에 등록한 건 다 가짜 정보였잖아요. 내일은 진짜 정보를 등록하자고요.” 지환이 기뻐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 이서는 지환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다시 치켜세웠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두었다. “아, 하도훈 쪽을 깜빡했네요. 우리가 가정법원에 가는 틈을 타서 기습하면 어쩌죠?”지환은 이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을 미루고 싶진 않아. 하지만...’“그럼 어둠의 호리병이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바로 그때, 지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안색이 변한 지환은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서 총을 발포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하도훈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이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었다.“아무래도 하도훈이 이곳을 떠나는 어둠의 호리병을 지켜본 모양이야. 이 기회를 틈타 첫 번째 공격을 하려고 한 거지.”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향했고, 서랍에 있던 총을 꺼내며 이서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저 사람들을 쫓아내 볼게.” 이서가 지환은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혼자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지환이 말했다.“이서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일이 밝으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가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서는 지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나는 지환 씨를 믿어요. 당신은... 꼭 돌아올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지환이 떠나자마자 집 밖에선 몇 차례의 총소리가 울렸고, 머리를 감싼 이서는 구석에 웅크린 채 지환만을 기다렸다.‘이럴 때는 나 자신을 잘 보호해서 지환 씨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해.’ 이내 아래층의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서는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별장 전체가 고요한
“윤이서 씨가 하 대표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 사람들을 찾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이서와 지환은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둠의 호리병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특히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작은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요?”어둠의 호리병이 재촉하며 말했다.“뭐,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어요. 나야 그 사람들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만약 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서의 시선이 지환에게 떨어졌다.“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상대할 거라는 게 사실이에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응.” 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사람들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도울 건 없고요?”“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럼...”이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우리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 조건을 승낙할게요.” 옆에 있던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의 말에 흥분하며 말했다.“이서야, 하 서방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니?” “네.”이서가 짧게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의 제안은 이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준 셈이었고, 이서는 그 구멍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안고 말했다.“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제 DNA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어!” 지환도 이서를 꽉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배미희는 하이먼 스웨이와 어둠의 호리병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나가볼까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이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고, 이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적막한 방 안에는 순식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고, 이서는 지환을 바라볼 수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배미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 벌써 잊은 거야?”“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 그 가짜랑 DNA 검사를 했을 때 이서 네가 그 여자랑 함께 있었잖아!” “그때 우리는 CCVT 자료를 찾진 못했지만,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DNA 검사를 진행했단다.” 그 일은 아주 명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그 가게에 있던 사람 중에 누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인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때 그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을 조사했어.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야!” 배미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이서의 몸에 떨어지자, 하이먼 스웨이도 그제야 배미희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과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이서야...”이서도 감격에 겨워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설마... 그럴 리가...”배미희가 말했다.“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는데, 너랑 스웨이 여사만 DNA를 대조하지 않았잖니? 아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서 DNA 검사를 하는 건 어떨까, 응?” 배미희의 말에 하이먼 스웨이와 이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서도 하이먼 스웨이가 친부모이길 바란 적이 있었고, 하이먼 스웨이도 이서가 딸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두 사람 모두 반신반의했다.“제 생각에도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면 아주 기쁠 일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지환의 눈빛을 마주했다.이서는 다시금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래, 좋고말고...”잠시 후, 연락
성지영이 곧장 입을 열려고 하자, 윤재하가 성지영을 제지하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저 X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해주자고!” “당신은 윤이서가 정말 우리한테 가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고도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되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는 모양이네요.” 성지영은 자신이 정말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소리쳤다.“이 사기꾼아!” 하지만 성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윤재하와 성지영은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윤재하와 성지영이 경찰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서는 꼭꼭 숨겨두었던 나약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평생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하지만... 나는 절대 오늘의 일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지환과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친부모님을 찾을 순 없지만, 저 친구들이 내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거니까.’“이만 돌아가자.” 이서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는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이겨내기 위해 푹 쉬어야만 했지만, 이서가 윤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가십이 온 세상을 들썩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서는 일부로 그 가십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고, 되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도록 방치했다.이내 그 소식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윤씨 가문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토록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어머, 그럼 윤이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이 윤씨 가문의 도구가 된 거예요? 너무 불쌍하네요.] [윤씨 가문 사람들, 정말 파렴치해요! 자기 딸은 자기 딸이지만, 다른 사람은 딸은 다른 사람의 딸인 거잖아요.][윤이서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이서 씨의 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