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이서의 모든 것을 잘 아는 사람이었기에, 그녀의 작은 숨결만으로도 쉽게 흥분할 수 있었다.그가 등을 꼿꼿이 펴며 말했다.“이서야, 조금만 뒤로 물러나 줄래?” 한 글자 한 글자를 뱉는 그의 심장은 갈기갈기 찢기는 듯했다.이서는 그제야 지환과의 거리가 너무도 좁혀졌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볼이 새빨갛게 변한 그녀가 얼른 뒤로 물러났다.공기 중에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이서가 침묵을 깨며 말했다. “죄송해요, H선생님.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 단지 선생님의 눈이 너무 예쁘고 어디선가 본 것만 같아서...” 이 말을 들은 지환이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인제 그만 가볼게.”“이렇게 갑자기요?”‘내가 너무 무례하게 행동한 걸까?’ “갑작스러운 건 아니야.”이서의 걱정을 눈치챈 지환이 부드러운 어투로 말했으나, 몸을 돌린 그는 더 이상 그녀에게 자신의 눈을 보여주지 않았다.“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래.” “이렇게 늦었는데 또 일을 하신다고요?” “응.”지환이 이서를 등진 채 손을 흔들었다.“다음에 또 보러 올게.” “그게 언젠데요?”이서가 지환을 따라나섰으나, 그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고, 성큼성큼 이씨 가문의 고택을 떠났다. 차에 다다른 지환이 문을 닫고 피곤하다는 듯 고개를 젖혔다. ‘내 눈을 어디선가 본 것 같다니... 앞으로 이서를 보러 오려면 눈까지 가려야 하는 걸까? 아니면, 다시는 이서를 마주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불이 환하게 켜진 장원을 바라보던 지환이 매섭게 미간을 찌푸린 채 마이클 천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환이 가면을 쓰고 이서를 만났으며, 그녀가 아무런 자극을 받지 않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마이클 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제 이서 아가씨의 곁에 머물 생각이신 겁니까?] ‘여태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현상이긴 해.’‘하지만 비운의 하 대표님에게는 정말 좋은 일인 것 같아.’ “그런데...” “내 눈이 낯이 익다고,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선선한 저녁 바람이 부는 강변에 앉은 심가은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시계를 바라보던 그녀는 분침이 12에 떨어지자 고개를 들었다. 가은이 고개를 드는 순간, 키가 크고 장대한 덩치의 한 남자가 가은의 맞은편에 앉는 것이 보였다. 그는 행동이 거칠었으며 몸에서도 역한 냄새를 뿜어내고 있었다. 게다가 덥수룩한 그의 머리는 몇 년간 감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가은을 가장 불쾌하게 한 것은 그 사람이 가은의 면전에서 발을 후벼 파고 있다는 것이었다. ‘윤이서만 아니었어도...’ 가은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며 간신히 혐오감을 억눌렀으나, 표정을 풀 수는 없는 듯했다. 그녀가 한 묶음의 사진을 꺼내어 그 남자에게 건넸다. 그 남자의 탁한 눈이 곧 번쩍이기 시작했다. 마치 사냥감을 정한 짐승처럼 매서운 눈빛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아.’ “이 사진 속의 여자를 처리해 주기만 한다면, 사례금은 두둑하게 챙겨 드릴게요.” 가은은 외국어로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M국에서 유학한 적이 있었다. 비록 외국어 성적이 그리 좋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것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 남자는 가은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눈동자에 가득한 욕정은 곧 흘러넘칠 것만 같았다.가은은 그의 눈빛을 보기만 해도 오한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남자가 이서를 상대할 것이라 생각하자, 그녀의 마음은 이내 후련해지는 듯했다. “알겠어요.”마침내 탐욕스러운 눈빛을 거둔 남자가 혀를 내밀어 아랫입술을 핥았다.“그런데, 이 여자를 어디서 만날 수 있는 겁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때가 되면 제가 알려드릴 테니까요.” 가은의 말을 들은 남자가 아쉽다는 듯 입을 열었다.“더 기다리라는 거군요, 알겠습니다...” 그 남자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혹시라도 연락을 주지 않는다면...” 그가 거리낌 없는 눈빛으로 가은을 훑어보았는데, 방금
심가은은 오랫동안 고기를 먹지 못한 짐승과 같은 저 남자라면 이서라는 사냥감을 매섭게 물어뜯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물어 죽여버려도 좋겠어.’ 음침한 생각을 하던 그녀의 귓가에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은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니?” 깜짝 놀라 고개를 든 가은은 그 여자가 하이먼 스웨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매우 당황했다.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도대체 무슨 일이야?”하이먼 스웨이가 다정하게 물었다.“가은아, 몸이 좋지 않은 거라면 엄마랑 같이 병원에 가자. 여태 바쁘다는 핑계로 너를 잘 챙기지 못한 것 같아서 미안하구나.” 하이먼 스웨이는 이틀 전에야 단편소설 집필을 끝냈다. 소설의 세계에서 나온 하이먼 스웨이는 그제야 심가은을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녀에게 급히 연락하여 M국에서 가장 유명한 카페에서 만나자는 약속 제의를 했다. 가은은 흔쾌히 동의했으며, 아무런 성질도 내지 않았다. 도리어 그녀는 하이먼 스웨이를 위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방금 생각에 잠긴 가은의 모습을 보자 하니, 하이먼 스웨이의 미안한 감정과 걱정은 다시 시작되는 듯했다. “엄마, 저는 정말 괜찮아요.”가은이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그나저나, 제가 며칠 전에 누구를 마주쳤는지 아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누구?”가은은 그녀와 거의 일상을 공유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서로를 알고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사이에는 시종일관 일정한 간격이 있는 듯했으며,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듯했다.그래서 하이먼 스웨이는 가은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윤이서 씨요.”이서 얘기가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의 표정이 굳어졌다. “정말 신기하죠? 저도 정말 놀랐어요.” 가은이 고의성이 다분한 말을 이어 나갔다.“그것도 이씨 가문의 유람선 앞에서 이서 씨를 만났어요. 허허, 혹시 H국에 있다던 남편을 버리고 이씨 가문에 시집가려 하는 건 아니겠죠?” 하이먼 스웨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만났을 때의 장면을 상상하는 듯하자, 가은의 표정이 냉랭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그녀는 다시 미소를 되찾았다. “괜찮아, 이서한테 잘 이야기하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가은이 하이먼 스웨이의 팔을 잡았다.“엄마, 엄마 말씀대로 제가 이서 씨에 대해 오해했던 것 같아요.” 하이먼 스웨이는 크게 기뻐했다.“가은아, 그동안 정말 많이 성장했구나. 그럼 이서를 초대하는 일을 너한테 맡기마.” “네, 알겠어요.”가은이 다정하게 대답했다. ‘반드시 성공시켜야 해, 윤이서와 그 변태남을 만나게 해야 하니까.”...심리 진료실.긴장감이 가득한 기다림 끝에 마침내 이서의 차례가 되었다.오늘은 이서의 전신 검사가 예정된 날이었으며, 그 검사는 지환의 출현이 이서의 심리상태에 영향을 미쳤는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서에게 이 사실을 알릴 수는 없었기에, 그저 정기검진이라고만 설명했다. 오늘 이서와 함께 검사하러 온 사람은 상언이었다. “이서 씨, 이제 들어가야 해요.”상언이 멍하니 앉아 있는 이서를 일깨워 주었다. “아, 네.”겨우 정신을 차린 이서가 간호사의 안내를 따라 검사실로 들어갔다. 검사실 안에는 한 명의 정신과 의사가 있었는데, 젊고 잘생긴 그는 사람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신기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듯했다. 자리에 앉은 이서가 서서히 긴장을 풀었다. “안녕하세요.”“네, 안녕하세요.”“긴장하실 필요 없어요. 저는 그저 투명 인간이라고 생각하세요.” 의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의 말투에는 친화력이 가득했다.“이제 몇 가지 검사를 진행할 건데요, 깊이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자, 제 리듬에 맞춰 눈을 감으시고... 천천히 긴장을 풀어주세요...”의사의 안내에 따라 이서는 곧 최면 상태에 빠져들었다. 의사는 절차에 따라 몇 가지 질문을 했으며, 모든 대답을 들은 의사는 이서를 깨우고 또 여러 가지 검사를 진행했다. 모든 검사를 마치자, 두 시간가량의 시간이
이상언이 인상을 찌푸렸다.“그러니까 선생님의 말씀은 지금의 이서 씨는 온실 속의 화초와 같으니까, 조금의 타격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거죠?” “네, 아주 작디작은 돌에 맞는다고 하더라도, 줄기가 꺾여 버릴 겁니다.”“네, 알겠습니다.”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눈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서가 돌아왔다. 상언은 의사와 인사를 나눈 후, 이서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온 그는 일을 핑계로 서재로 향했고, 곧바로 지환에게 검사 결과를 알렸다. 상언의 말을 들은 지환의 심장은 되살아나는 듯했다. 그의 우려는 눈 녹듯이 사라졌으며, 가면을 쓴 채 이서의 곁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기쁨만이 그를 감쌌다.‘게다가 M국은 나의 영역이잖아. 나는 이서를 잘 보호할 수 있을 거야.’ [오늘 저녁에 갈게.]“야, 지환아, 너무 조급해하는 거 아니야?” 상언이 지환을 놀렸다. 바로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저녁에 와, 방은 마련해 둘게.” 말을 마친 그가 전화를 끊었다. “들어오세요.”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배미희였다. “왜 그렇게 급하게 서재로 들어간 거야? 급한 일이라도 있어?” 배미희는 문을 닫았음에도 불구하고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상언이 웃으며 말했다.“엄마, 여기에는 우리 두 사람뿐이잖아요.” “쉿.”배미희가 비밀스럽게 초대장 한 장을 꺼내어 상언에게 건네주었다.“봐봐.”상언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가 초대장을 열었다.그 초대장은 뜻밖에도 하이먼 스웨이가 보낸 것이었는데, 정중한 어투로 이씨 가문의 가족이 아닌 이서를 초대하고 있었다. “오후에 하이먼 스웨이 여사 쪽 사람이 직접 와서 이걸 건네더구나.”배미희가 말했다.“지난번 유람선에서 하이먼 스웨이 여사의 이야기만 꺼냈는데도 이서 씨가 정신을 잃었었잖니, 그래서 우선 답장은 하지 않았단다.” “아마 계속 답장을 기다리고 있을 거야. 아들아, 이서 씨에게 이 초대장을 전달해야 할까?” 상언이 대답했다. “절대 안 돼요.” “내 생각도 그래, 그
저녁 무렵.2층에 있던 이서가 익숙한 차를 보았고, 흥분한 새가 날개를 퍼덕이는 듯 아래층으로 내려가 지환의 앞에 다다랐다. 이 장면을 바라보던 배미희가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조심해요!”그녀가 부러움을 띄는 눈빛으로 상언의 팔을 건드렸다.“젊은 게 정말 좋구나.” 상언은 배미희가 무슨 말을 이어 나갈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잠시만요, 잠시만, 엄마가 무슨 말씀을 하시려 건지 저도 잘 알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곧 어머니께 며느리를 소개해 드릴 테니까요.”상언이 입을 연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놀라움을 금치 못한 배미희가 질문을 이어 나가려던 찰나, 상언이 검지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댔다.배미희는 마음속의 의혹을 억누르고 이서 쪽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매우 놀란 그녀는 이내 멍해지는 듯했다. ‘드라마가 따로 없잖아?’ 지환의 앞에 선 이서는 아담하고 귀여웠으며, 따뜻한 햇빛이 그녀에게 떨어지자 마치 후광이 비치는 듯했다. 그리고 그녀의 맞은편에 서 있는 지환은 가면을 쓰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던 탓에 눈빛을 볼 수는 없었으나, 배미희는 이서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대단히 다정할 것이라 예상할 수 있었다. 지난번 이씨 가문의 고택에서 밥을 먹을 때처럼.“H선생님.”이서가 반가워하며 그를 바라보았으나, 가까이 다가가자니 익숙한 것에 대한 두려움이 몰려오는 듯했다. 고개를 숙인 지환이 이서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녀의 안색에는 활기가 돌고 있었으며, 눈빛도 이전보다 더욱 총명해져 있었다. 보아하니 외국 생활은 확실히 그녀를 과거의 시시비비에서 멀어지게 하여, 기억을 잃은 생활에 더욱 잘 적응하게 한 듯했다.지환이 마음속의 깊은 고통을 거두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왜 이렇게 급하게 달려온 거야?”“그게...”이서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저도 모르겠어요, H선생님을 보니까 달려오고 싶었어요.” 지환이 무의식중에 손을 내밀어 이서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려 하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그래, 모두.”지환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으나, 상언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안 돼, 그건 지호 형한테 기회를 주는 것일 뿐이야. 지호 형이 호시탐탐 YS를 노리고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된다고.”당초에 하지호는 하씨 가문의 회사에 대한 비뚤어진 마음을 가지고, 회사를 자신의 손에 넣으려 하다가 지환에게 발각된 바 있었다. 그리고 이때를 시작으로 두 사람의 사이가 악화된 것이었다. 하지호는 본래 고아였으나, 하씨 가문에게 입양된 후 줄곧 하씨 가문에서 길러졌다. 하씨 가문은 어린 하지호가 장차 하씨 가문을 집어삼킬 것이라고는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하지호는 하씨 가문에 들어온 첫날부터 이미 하씨 가문의 재산을 독식하기 위한 계산을 하고 있었다. 악독한 늑대와 같은 하지호가 지환이 모든 사람을 동원하여 이서를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틀림없이 기회를 이용할 것이었다. 이런 일은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다. “이서는 조금의 상처도 받아서는 안 돼.” “하지만 YS를 잃는 한, 넌 이서 씨를 보호할 수 없게 될 거야!” 상언이 화가 나서 말했다. 두 사람이 싸우는 소리는 순식간에 이서와 배미희의 귀에도 전해졌다. “왜 그래?”“무슨 일이에요?” 배미희는 두 사람의 사이가 아주 좋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상언은 지환의 계책을 따르면서도 아주 일관성 있게 그를 대해주었다. ‘두 사람이 얼굴을 붉히며 다투는 걸 보게 될 줄이야.’ 긴장한 이서는 두 사람은 지나쳤지만, 그녀의 시선은 지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서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접한 지환이 미간을 찌푸렸다.“아주머니, 단지 회사의 일로 의견이 맞지 않아서 그러는 거니까 크게 걱정은 마세요. 곧 의견을 조율할 수 있을 거예요.”배미희가 상언을 쳐다보았다. 상언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지환이 말이 맞아요. 별일 아니에요.” 두 사람은 이서와 배미희를 안심시키려 했으나, 두 사람은 바보가 아니었다.배미희
표정이 굳어진 지환이 긴장하며 물었다.“이서야, 괜찮아?” 운서는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요, 단지 방금 머릿속에 뭔가 스쳐 지나간 것 같았는데... 제가 잃어버린 기억인 것 같았어요.” 지환이 심하게 떨리는 이서의 팔을 붙잡았다. 고개를 숙였던 이서가 어색하게 지환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등에서는 핏줄이 서서히 불거지고 있었다. 그는 대단히 흥분한 것 같았다. 이서는 그가 왜 이토록 흥분한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었으나, 왜인지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H선생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이서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H선생님, 방금은 왜 눈물을 흘리신 거예요?” 이서가 다시 한번 물었다. 지환이 이서를 끌고 소파에 앉았다.“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어떤 친구가 생각나서 그랬던 거야. 그 친구도 너와 마찬가지로 늘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선량했거든...” “그럼 그분은 분명 H선생님께 소중한 분이시겠네요?” ‘그래서 눈물이 나셨던 거구나.’ “응, 그 사람은 내 목숨보다 소중한 사람이었어. 비록 지금은 그 사람을 잃었지만 말이야.”지환의 두 눈동자에 다시 한번 거대한 슬픔이 차오르는 것을 본 이서는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그녀는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은 듯했다. 이서가 떨면서 물었다.“그 분이... H선생님의 애인이셨나요?” 지환이 이서를 바라보며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그랬지,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 여자였어.” “나는 앞으로도 다른 사람이 아닌 그 사람만을 사랑할 거야.’ 지환의 말에 이서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H선생님께 너무 의존하느라 독신인지 묻는 것도 잊었었네. 그런데 지금 보니까...’이서가 지환과의 거리를 벌렸다. “그럼 왜 그분을 되찾으려 하지 않으시는 거예요?”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눈동자에 빛이 반짝였다.“노력 중이야.” 이서의 마음속에 알 수 없는 불이 떠올랐다. 그 불은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으나, 그녀는 자신이 전혀 화를 낼
단톡방은 한동안 조용했는데, 한참 지나서야 하나가 고개를 빼꼼 내밀며 말했다. [대체 뭐가 네 눈을 흐리게 만든 거야? 형부가 인기가 없다고 생각한 이유가 대체 뭐냐고.]이서가 당황하던 찰나, 소희도 메시지를 보내왔다.[언니가 싫어할 말인 건 알지만, 형부와 결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줄 세우면, H국에서 M국까진 이어질걸요?]나나도 끼어들며 한마디 했다. [솔직히 말해서 형부가 원한다면 매일 여자 친구를 바꾸는 것도 가능할 거예요. 매번 다 다른 사람일 거고, 죄다 아주 예쁜 여자들이겠죠... 아, 물론 형부가 원한다는 전제가 있어야겠지만요!]“...” 이서는 조용히 지환을 쳐다보았고, 이서의 시선을 느낀 지환도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이서는 지환을 몇 번 더 흘깃 본 후, 마지못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서는 지환이 정말로 인기가 많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서 그저 닭고기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맛이 나쁘진 않았지만 그렇게 대단한 정도는 아니었다. 이서는 이 식당이 이렇게 인기 있는 건 순전히 ‘속설’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을 한 입 더 먹은 이서는 문득 지환과 두 시간 넘게 줄은 선 게 별로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 먹고 나서는 뭐 할 거예요?”이서가 물었다. “영화 보러 가자.” 이서는 눈썹을 살짝 올리며 말했다. “우리 같이 영화 본 적은 없지 않아요?” “정확히 말하면,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한 적이 없었지.” 지환은 조용히 이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해, 이서야.” 이서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런 일로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난 늘 뭔가 부족하다고 느껴. 내가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 우리 사이는 달라졌을지도 모르잖아.” 지환은 속눈썹을 내리깔며 말했다. 이서는 지환의 그런 모습에 마음이 묘하게 불편해졌다. “다 지나간 일일 뿐이에요. 오늘은 그런 얘기하지 말고... 우리 그냥 제대로... 데이
“왜 굳이 여기서 먹어야 하는 거예요?” 이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식당 내부는 특별한 것 없는 평범한 인테리어였다. 이서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환이라면 굳이 이런 곳이 아니라, 훨씬 더 좋은 7성급 호텔에서 우아한 분위를 즐기며 식사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호텔의 고급스러움은 이 식당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 식당, 속설이 하나 있대.” 잠시 침묵을 지키던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가 지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치 무언가 말하기 어려운 사연이라도 있는 듯, 지환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여기서 밥을 먹은 부부는, 가정법원 앞까지 가서 이혼하려고 했던 사이라도 다시 화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 이서는 그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나를 여기로 끌고 온 거예요?” 지환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부정하지도 않은 채, 창밖만을 바라보았다.이서는 그런 지환을 흘겨보았지만, 어느새 마음속 깊은 곳이 살짝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럼 이 비서님께 미리 예약하라고 하지 그랬어요.”그 정도는 지환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괜히 여기서 줄을 서서 기다릴 필요는 없었을 텐데 말이지.’지환에게는 매 순간이 아까운 시간일 터였다. 지환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진지하게 대답했다. “이천한테 예약하라고 시키면 정성이 부족한 거잖아. 정성이 부족하면 일이 잘 안 풀릴 수도 있단 말이야.”이서는 순간 멍해져서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물었다. “정성을 들여도 안 통하면요?” 지환은 담담하게 말했다. “안 통하더라도 시도는 해봐야지. 우리 둘이 다시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이라면, 아무리 바보 같아 보여도 해볼 만한 가치가 있어.” “하지환 씨...” 이서가 무언가 더 말하려던 순간, 지환이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이서야, 네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아. 하지만 하도훈 문제가 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지환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서의 귓가에 들려오자, 이서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지환을 바라보았다. 햇살 아래 빛나는 지환의 완벽한 이목구비는 어떤 각도에서 보더라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더라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잘생기지 않았다’는 말은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바로 지환이었다. 지환은 이 세상에 내려온 최고의 선물과 같았는데, 한때 그를 가졌던 이서에게도 그것은 분명 큰 행운이었다.“‘그날 내가 하지환 씨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복수 계획에 동의했더라면 지금쯤 우리는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이서의 조용한 목소리에 지환이 잠시 이서를 바라보다 대답했다. “글쎄,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해.” 이서는 왠지 지환의 다음 말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뭔데요?” 지환은 이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널 사랑하게 됐을 거라는 건 변함이 없다는 거지.” 그 한마디에 이서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이서는 미칠 듯한 두근거림을 감추려 애써 지환의 시선을 피했다. “우리... 오늘 하루 종일 여기에 있는 거예요?” 지환이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나한테 주어진 시간은 24시간뿐이잖아. 물론 너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소중하지만, 시간을 낭비하고 싶진 않아. 이제 두 번째 장소로 가자.”“어디로 갈 건데요?” 이서는 호기심을 가득 담아 물었지만, 지환은 대답 대신 조수석 문을 열어줄 뿐이었다.이서는 잠시 망설이다가 차에 올랐고, 차는 천천히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서는 지환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가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가정법원 앞에 서 있는 신혼부부와 이혼하러 온 듯한 부부들을 보며 이서가 말했다. “덕분에 생각났네요. 우리... 아직 이혼 안 했잖아요.”지환은 안전벨트를 풀던 손을 멈추고 이서를 바라보았다.“혹시 지금 내려서 이혼하자는 건 아니지?”이서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왜 이미 고이서의 정보를 손에 넣고도 나한테 바로 알리지 않은 거예요?” 이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고, 지환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자료를 받았을 때는 어떤 카페의 근처였어. 그런데 마침 네가 소지엽을 만나러 가는 걸 보게 된 거지.”“하지환 씨가 밖에 있었다고요?” 이서가 놀라며 되물었다. ‘그럴 수가 있다고?’그 말은 곧 두 사람이 비슷한 시간대에 고이서의 자료를 입수했다는 얘기였다. ‘뭔가 이상한데...’ 이서는 지환을 보면서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지환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이서가 조수석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야 뭔가 눈치챈 듯 미소를 지었다.“내가 이겼다는 거야?” 이서는 살짝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시간을 계산해 봤는데, 하지환 씨는 구태우 씨보다 하루 늦게 고이서를 조사하기 시작했어요. 시간을 계산해 보면 하지환 씨가 이긴 게 확실한 셈이죠.”이서는 괜히 혼자서 이리저리 고민했던 게 허무하게 느껴졌다. “그럼...”지환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앞으로 24시간 동안 네 시간은 내 거라는 거야?” 이서는 그 말이 묘하게 들렸지만, 어쨌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든 해도 돼?” 이서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뭘 하려고요?” 지환은 이서를 힐끗 보며 미소를 지었다.“내가 뭘 할 것 같은데?” 이서는 눈썹을 찌푸리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불순한 생각들을 애써 지우려고 했다. 지환은 이서의 표정을 다시 한번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왜 말이 없어?” 지환은 이내 무슨 생각이 났는지 환한 웃음을 지었다.“이서야, 혹시...” “그런 거 아니에요!”이서는 빠르게 부인했지만, 오히려 그런 모습이 더 수상쩍었다. “네가 원한다면 나는 기꺼이 맞춰줄 수 있어.”지환이 즐거운 듯 웃음을 터뜨리자, 이서가 눈살을 찌푸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그것은 지환이 이서에게 보낸 고이서에 관한 자료였다.‘이게 왜 열린 거지?’이서는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왜 그래?]이서의 목소리가 좀처럼 들리지 않자, 지환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서의 시선은 시종일관 고이서의 자료에 머물러 있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지금 고이서의 자료를 보는 중인데, 다 보고 나서 다시 전화할게요.”이서는 전화를 끊고 자료를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 자료의 내용은 고이서가 제공한 이력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이서는 5살 때 화재 사고를 겪은 후 해외로 보내졌다.하지만 지환이 보내온 자료에는 더욱 상세한 내용이 있었는데, 그 당시 겨우 5살이던 고이서는 하룻밤 사이에 해외로 보내졌고, 병원에 도착한 후에는 병원에 있던 환자들이 차례로 퇴원하게 되었다. 딸의 치료 기간 동안, 성지영과 윤재하는 각기 다른 시점에 귀국했는데, 아주 흥미로운 것은 두 사람이 귀국한 후 처음으로 향한 목적지가 모두 보육원이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매번.보육원 쪽에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두 사람이 고이서를 대신할 아이를 구하러 간 것임을 알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 아이가 바로 이서였다. ‘그때 윤수정이 내가 윤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던 게 전부 사실이었구나.’ 모든 퍼즐이 들어맞는 순간이었다.처음에 하은철이 이서와 결혼한 이유는 그녀의 신장을 위한 것이었는데, 윤재하와 성지영은 하은철의 행동이 지나치다고 생각하기는커녕, 오히려 이서와 하은철이 결혼하도록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도우려 했다. ‘하긴, 나는 윤씨 가문에 있어서 시집을 통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게 할 도구일 뿐이었어. 누가 그런 도구한테 큰 관심을 쏟으려 했겠어?’‘윤재하가 그렇게 막대한 자금을 횡령했을 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하씨 가문은 윤씨 가문에 그토록 많은 돈을 투자했지만, 윤씨 가문은 줄곧 재기하지 못했다. ‘이상하긴 했지만, 내가 윤씨 가문 사람들한테 배신당하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어제, 이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지환과 지엽이 보낸 자료를 동시에 받았다. 이서는 어떤 자료를 먼저 열어야 할지 심란해졌고, 아예 두 자료 모두 열어보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이제는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되었다. ‘하지환 씨를 골라야 할까, 아니면 지엽이를 골라야 할까?’이서는 서류봉투에 있는 전화번호를 쳐다보았지만, 여전히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몰랐다.이서는 갑자기 동전 던지기를 떠올렸다.‘그래, 어떻게 결정해야 할지 모를 때는 동전을 던지라고 했어!’사실, 동전을 던지는 최종 목적은 선택하기 위함이 아니라, 동전을 던지는 순간에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에 있었다.하지만 이서는 동전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편의점에서 잔돈을 바꿨고, 끝내 500원짜리 동전을 손에 쥐게 되었다.이서는 차로 돌아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동전 던지기를 시작했다.짤랑.이서의 머리가 하얘지던 찰나, 동전은 바닥에 떨어졌다. “...”‘내가 방금 무슨 생각을 한 거지?’‘됐어, 한 번 더 해보자.’생각을 정리한 이서는 곧장 동전을 던지지 않고, 깊게 한숨을 내쉬며 머릿속이 맑아지기를 기다린 후에야 동전을 위로 던졌다.동전은 다시 바닥에 나뒹굴었지만, 이서의 머릿속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이서는 어이가 없어서 동전을 다시 주워 들었다.‘이 방법은 전혀 쓸모가 없는 것 같아.’ ‘그래, 차라리 숫자나 그림으로 고르는 게 좋겠어.’ 이서는 다시 동전을 집어 들었다.‘숫자는 하지환 씨를, 그림은 지엽이를 가리키는 걸로 하자.’마음을 확실히 정한 이서는 다시 동전을 던졌다. 이번에는 동전이 그녀에게 확실한 답을 주었다.‘그림이구나.’하지만 이서는 명확한 답을 얻고도 기쁘지 않았다. 이서는 핸드폰을 보며 잠시 망설이다가 지엽이 건넨 서류를 들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한없이 얇은 서류 더미가 천근처럼 무겁게 느껴졌다.이서는 손을 들어 어렵사리 서류봉투를 열었는데, 서류를 꺼내려는 순간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지환에게서
“그럼 이번 일은 구태우 씨에게 조사를 맡기를 걸로 하겠습니다.”이서가 몸을 일으키며 소지엽을 바라보았다.“세부적인 내용은 심 대표님과 직접 이야기하면 돼. 나는 돌아가서 회사 일부터 처리해야겠어.”소지엽은 이서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바래다줄게.”“괜찮아.”이서는 짧은 대답을 끝으로 몸을 돌려 떠났다. 그 단호한 뒷모습과 깔끔한 마무리, 소지엽은 이서의 마음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달갑지 않은 게 분명해.’“소지엽 씨?”지엽은 심근영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심근영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자세히 이야기해 보자면...”한편, 아래층에 도착한 이서는 주동적으로 소희 모녀와 인사를 나누었다. 이서가 돌아가겠다고 하자, 이지숙은 꽤 의아해했다.“이렇게 빨리?” “네, 구체적인 사항은 지엽이가 대표님과 상의할 거예요. 저는 여기 있어도 도울 수 있는 게 없으니 먼저 가보겠습니다.”소희가 이서의 팔을 붙잡았다.“언니, 제가 데려다줄게요.”이지숙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데, 마음속으로는 소희와 이서의 관계가 더 좋아져서 지환이라는 큰 나무에 기댈 수 있기를 바랐다. “언니, 오늘 소지엽 씨와 같이 와줘서 정말 고마워요. 그렇지 않았다면, 유인이 언니의 만행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을 거예요.”이서가 말했다.“그러게, 타이밍을 잘 맞춘 것 같아.”“참, 소희 씨의 양부모가 아직도 문제를 일으키는 건 아니지?” “조금 이상하긴 해요. 꽤 오랫동안 저를 귀찮게 하지 않았거든요.”이서가 말했다. “심태윤도?”“네.”이서가 눈살을 찌푸렸다.“소희 씨에게 게임 회사의 기밀문서를 훔쳤다는 누명을 씌운 사람이 심태윤일 가능성은 없을까?”소희는 고개를 저었다.“걔가 벌인 짓이었다면 심씨 가문 사람들이 벌써 잡아냈을 거예요.” “심씨 가문 사람들이 이렇게 오랫동안 조사했는데도 못 찾아내는 걸 보면, 심태윤이 벌인 짓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럼 심태윤이 심씨 가문 사람들과 협력해서 벌인 일인 건 아닐
‘소희 씨의 심씨 가문 생활, 꽤 재미있는 것 같은데?’ “우리... 2층에 가서 얘기 좀 할까?”심근영이 2층 방향을 가리켰다. 이서는 소지엽을 한 번 보았고, 그가 고개를 끄덕인 후에야 대답했다.“네.”세 사람은 함께 위층으로 올라갔다.고용인이 차와 음료를 내려놓고 떠나자, 심근영이 입을 열었다.“윤 대표는 어떤 생각을 했길래, 소지엽 씨한테 우리 소희 사건을 조사해달라고 한 거지?” 이서가 대답했다.“말하자면 깁니다.”시간은 주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이서는 고이서와 성지영이 함께 있는 것을 보고 회사로 돌아갔고, 지환은 이서에게 구태우와 자신 중에 누가 먼저 고이서의 자료를 찾는지 비교해 보라고 했다.이서는 일요일 하루 종일 지환을 만나지 못했기에, 그가 분명히 고이서를 조사하러 갔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환 씨... 꽤 진지한 것 같아.’이서는 약간 긴장하기 시작했다. 이서도 자신이 왜 긴장했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지환이 구태우보다 더 빨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환이 지기를 바란다고 말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지환이 이기기를 바라는 복잡한 마음이었다. 복잡한 마음에 시달리던 이서는 오후 3시쯤 구태우의 메시지를 받았다.메시지를 보는 순간, 이서는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는데, 그제야 자신이 지환이 이기기를 바랐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바로 그때, 이서는 구태우의 전화를 받았다.[회사로 가겠습니다.]“그냥 자료를 보내주시면 되잖아요.” 구태우의 말투는 평소와 같지 않았다.[자료를 원하신다면 가져가겠습니다. 만나서 이야기하시죠.]이서는 자신이 구태우를 화나게 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오직 고이서를 생각하면서 카페로 향했다.몇 분 후.카페에서 소지엽을 만난 이서의 구태우의 말투가 어두운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서는 잠시 생각한 후, 소지엽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왜 네가 온 거야?” “내가 구태우한테 자료를 달라고 했어. 왜, 불편하기라도 한 거야?” 이서는 소지엽의
심유인이 말하지 않자, 심근영은 소민찬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민찬은 선물에 대해 전혀 몰랐던 터라, 값싼 선물들을 보고 당황하여 얼른 설명했다.“저,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 선물들은 제가 산 게 아니라, 전부 유인이가 산 거예요. 저는 아무것도 모른다고요.” “애초에 유인이는 저한테 몸만 오면 된다고 했습니다.”“여러분,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소민찬이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답례 선물은 안 받는 걸로 하겠습니다. 그럼 되겠죠?” 소민찬은 이 말을 끝으로 도망치듯 심씨 가문의 저택을 떠났다. 심유인은 그의 뒤를 쫓아가려다가 심근영에게 가로막히고 말았다.“유인아, 우리가 알아듣게끔 설명을 해야 하지 않겠니?”심유인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삼촌, 숙모, 저... 저는...”“차마 말이 안 나오는 모양이네요.”소희가 심유인의 곁으로 다가가 냉소하며 말했다.“제가 대신 말씀해 드릴게요.” “제 남자 친구가 운전기사라는 걸 알고, 일부러 소민찬 씨를 찾아가서 남자 친구 역할을 해달라고 한 거죠?” “소민찬 씨는 남자 친구인 척만 하면 되니까, 이 선물들도 소민찬 씨가 샀을 리 없어요.”“전부 다 언니 사비로 사신 거죠?” 심유인의 안색이 아주 어두워졌다.“그런 거 아니야...!”심유인은 아직도 변명하고 싶었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았다.“소민찬 씨가 선물을 준비한 게 아니라면, 그 많은 돈은 어디서 난 거니?”이지숙이 물었다. ‘다른 세 가지 선물은 전혀 가짜가 아니었어. 확실히 수십억은 되는 것들이었다고.’‘회사에서 근무하지도 않는 유인이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겠어?’심유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심근영은 심유인의 반응을 살피다가 집사를 불렀다.“당장 조사해, 당장!”심유인은 체면을 구기고 싶지 않아 ‘털썩’ 소리를 내며 심근영 앞에 무릎을 꿇었다.“삼촌, 제가 다 설명해 드릴게요. 그 선물들은... 전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