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서 접견실.곽승재는 차가운 눈빛으로 백유미를 바라보며 물었다.“날 만나겠다고 한 이유가 뭐야?”“내가 조사받으러 왔는데 GS그룹 대표인 널 불러서 증언해달라고 하는 게 정상이 아니야?”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백유미는 살면서 처음으로 그에게 화를 내며 말했다.“지금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왜 날 업무 횡령죄로 신고한 건데? 난 서인수가 한 짓에 참여한 적이 없어. 그저 회사 업무 때문에 몇 번 연락한 것뿐이야. 판주 투자은행이 명운 프로젝트 때문에 손해를 본 건 사실이지만 그게 내 탓은 아니잖아. 내가 서인수를 도와 일 처리를 한 것도 서인수한테 속아서 그런 거라고. 난 서인수가 진짜 억울하게 누명을 썼다고 틀린 판단을 내렸을 뿐이야!”“그럼 사실대로 경찰한테 말하면 되잖아.”곽승재가 덤덤하게 말했다.백유미는 헛웃음을 치면서 말을 이어갔다.“승재야, 아무리 내가 책임이 있다고 해도 이미 지나간 일을 가지고 갑자기 내 죄를 묻는다는 게 맞다고 생각해? 넌 지금 다른 이유 때문에 이러는 거잖아.”곽승재는 부정하지 않았다.“또 무슨 일을 나한테 덮어씌우려는 거야? 우리 아빠가 고은서한테 당한 것도 모자라 이젠 너까지 우리 부녀를 망가뜨리려고 해?”“네가 했던 일들과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곽승재는 억울해하는 백유미를 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고은서를 납치하게끔 서인수를 교사한 죄. 대체 왜 그런 걸까? 네가 말한 모순만 일으키고 고은서를 해치려 한 적은 절대 없다는 게 바로 이거야?”백유미는 순간 흠칫하더니 이내 진정하고 부정했다.“지금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난 서인수 대신 일 처리를 해준 것 빼고는 서인수랑 따로 연락한 적이 없어. 서인수가 곧 판결받게 된다는 소식은 나도 들었어. 죄명도 꽤 크다며? 하지만 도아름 씨랑 은서 씨가 가까이 지낸다는 이유로 날 일부러 모함하면서 죄책감을 덜려 하거든 난 절대 가만있지 않을 거야. 이런 억울한
“동물원을 ZY 그룹 새로운 투자 프로젝트로 만드는 것도 꽤 괜찮은 아이디어인 것 같더라고. 내가 조사해봤는데 동물원 규모가 꽤 커. 새로운 장비 추가하고 또 홍보를 제대로 하면 지금 수입 2배 정도는 얼마든지 벌어들일 수 있어.”“널 좋아한다고 준 선물을 갑자기 투자 프로젝트로 만든다고?”박지연이 물었다.“그럼 어떡해? 난 아무런 감정도 없는데 그 선물을 받는다는 것도 이상하잖아.”고은서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틀린 말도 아니지.”박지연도 따라 한숨을 내쉬었다.“그런데 거절하니까 민시후는 어떤 반응이었어? 엄청 실망해 할 것 같은데.”방금전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선물을 받아달라고 하는 민시후를 고은서가 단호하게 밀어내자마자 그는 약간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냥 평범한 사업 파트너로 생각한다고 명확하게 말했어. 실망하든 말든 내가 알 바가 아니잖아.”“너 요즘 남자운 좋은가 봐? 전남편 곽승재랑 널 오랫동안 좋아하면서 널 위해 MQ로 들어간 유성준, 그리고 이젠 민시후까지 널 좋아한다고 하는데 넌 누굴 고를 거야?”박지연이 호기심 어린 말투로 물었다.“다 싫은데. 난 내 사업을 선택할 거야.”고은서는 고민하는 척하더니 아주 단호하게 다 거절해버렸다.“재미없게 왜 그래. 사업한다고 연애를 못 하는 건 아니잖아. 그럼 어제 곽승재랑 왜 그렇게 다정하게 서 있었던 거야? 다시 시작할 생각인 거야?”고은서는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박지연을 쏘아보며 답했다.“아니. 그저 사고였을 뿐이야.”“더 자세히 말해 봐봐. 무슨 사고였는데 그렇게 다정하게 가까이 서 있었던 거야?”“미안하지만 거절할게요.”두 사람이 한창 수다 떨고 있을 때 고은서의 폰이 울렸다. 확인해 보니 곽승재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박지연의 호기심으로 가득 찬 눈빛 아래 고은서는 망설임 없이 폰을 꺼버렸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곽승재한테서 어제저녁 더는 자신을 밀어내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냐고 문자가 왔다.전화벨 소리가 또다시 울렸을 때 고은서는
곽승재는 원망과 결연함으로 가득찬 표정을 하고 있는 고은서를 보면서 말했다.“은서야, 네가 생각하는 대로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야. 내가 도와줄게. 나한테 보상할 기회를 줘.”‘보상?’고은서는 속으로 보상이라는 두 글자를 곱씹으면서 순간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전생에 백유미가 한 짓을 무시하며 그녀의 편을 들어준 죄, 그리고 이번 생에 고은서를 의심하면서 아이까지 잃게 한 죄.그가 그녀에게 입한 상처는 보상이라는 한 마디로 쉽게 사라질 수 있는 상처가 아니었다.게다가 그녀는 처음부터 그의 보상을 바란 적이 없었다.“너무 뻔뻔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지나간 상처가 보상한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야. 나한테 있어 제일 큰 보상은 당신이 나랑 거리를 유지하면서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 거야.”자신을 향해 날을 세우는 고은서를 보면서 곽승재는 그녀가 일부러 자신의 화를 돋우면서 자신을 쫓으려 한다는 걸 알아차렸다.그녀의 속셈을 알아차린 곽승재는 화를 내지 않았다.고은서가 그를 무시하지 않고 밀어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미 쉽지 않은 일이었기에 그는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다시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곽승재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담담하게 말했다.“은서야, 시간도 늦었는데 얼른 올라가서 쉬어. 난 이만 돌아갈게.”그는 디저트를 그녀의 손에 쥐여주고는 운전석에 올랐다.고은서는 약간 어리둥절해졌다.‘화내면서 다신 날 찾아오지 않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왜 저렇게 담담해 보이는 거야.’...곽승재가 육현석을 찾아갔을 때 그는 열심히 배구시합 해설 동영상을 보고 있었다.“그저 간단한 친선 경기일 뿐인데 이렇게 신중하게 준비할 필요가 있어? 누가 보면 네가 국제대회라도 나가는 줄 알겠어.”곽승재가 덤덤하게 말했다.“친선 경기가 어때서! 나한테는 모든 경기가 다 최선을 다할 만큼 엄청 중요하 거든.”육현석이 불만스러운 말투로 반박했다.“지연 씨가 참가하니까 창피당하는 걸 피면하기 위해 그러는 거잖아.”곽승재가 육현석
곽승재의 경고하는 듯한 차가운 눈빛에도 육현석은 꿋꿋하게 말을 이어갔다.“아무리 꿈이라고 해도 그만큼 형한테 실망하고 상처받았으니까 그런 끔찍한 꿈을 꾼 거겠지.”곽승재의 눈빛 속의 한기가 순간 사그라들었다.다른 일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보상하려고 노력하겠지만 악몽만큼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옆에 있던 육현석은 곽승재가 자신의 말을 듣고 약간 속상해하는 것 같아 보이자 조심스레 그를 위안했다.“그래도 형수님이 형을 싫어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잖아. 행동으로 형수님의 생각을 바꾸면 되지. 악몽 속에서 있었던 일이 현실에서는 발생하지 않을 거라고 믿게 만들면 되잖아. 그럼 형수님도 형을 다시 받아들이려고 할 거야.”육현석은 또 요즘 그가 했던 일들에 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백씨 가문을 도와주지 않고 백유미 직무를 정지시킨 것부터 엄청 좋은 스타트야. 형수님이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신분을 막론하고 우리의 적이라고 생각하면 돼.”...며칠 후.제인 제약에서 반나절 동안 미팅을 한 고은서과 송민아는 ZY 그룹으로 돌아가자마자 또 부문 직원들과 함께 짧은 미팅 하나를 했다.송민아는 점차 자신만의 업무 템포를 찾아가고 있었고 비서 업무를 처리함에 있어서 날이 갈수록 더 노련해졌다.미팅은 퇴근이 시간이 다 되어서야 끝났다.고은서가 직원들과 함께 수다 떨면서 회사 문을 나설 때 갑자기 익숙한 사람 한 명이 회사 문밖에 서 있는 걸 발견했다.그 사람은 다름 아닌 민시후였다.그는 흰색 정장에 은색 넥타이를 하고 손에는 아주 큰 장미꽃다발을 들고 회사 문 앞에 서 있었다.고은서는 그를 보자마자 순간 불안감에 휩싸였다.아니나 다를까, 민시후가 그녀를 향해 다가오면서 꽃다발을 내밀었다.“고은서, 선물이야!”직원들의 와 하는 소리와 함께 고은서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면서 민시후를 발로 차버리고 싶었다.‘어제 분명히 좋아하지 않는다고 절대 사귈 리가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건만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야!’회사에 들어올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곽승재였다.고은서가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가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그는 맞춤 제작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우월한 기럭지와 출중한 미모 덕분에 마치 패션쇼 모델 같은 느낌을 주었다.ZY 그룹 직원들도 자연스레 곽승재를 보게 되었고 심지어 대부분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꽃다발을 선물하는 민시후 하나로도 충분히 의아할 만 한데 곽승재까지 찾아오다니.평소와 별다른 바가 없는 퇴근 시간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재밌는 광경을 목격할 줄은 그 누구도 생각 못 했다.흥분해 하는 직원들과 달리 고은서는 머리가 아파왔다. ‘만날 때마다 다투는데 덕분에 또 구설수에 오르게 되겠네.’“곽 대표가 우리 회사엔 무슨 일이야?”아니나 다를까 민시후가 먼저 입을 열었다.민시후 손에 있는 장미 꽃다발을 본 곽승재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이내 고은서를 보며 말했다.“은서야, 퇴근했지? 집까지 데려다줄게.”‘또 왜 이러는 거야. 갑자기 집까지 왜 데려다주려는 건데?’“필요 없어. 나 차 있어.”고은서가 단칼에 거절해버렸다.“얼른 밥 먹으러 가자.”민시후가 콧방귀를 뀌면서 고은서를 향해 말했다.곽승재의 얼굴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진 걸 본 고은서는 두 사람 사이의 모순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나 볼 일 있으니까 알아서들 해.”고은서가 말하면서 차에 올라탔다. 그러나 민시후가 갑자기 조수석에 올라타더니 곽승재가 따라 오르지 못하게 재빠르게 차 문을 잠갔다.“너...”고은서가 민시후를 쫓으려고 할 때 그녀의 폰이 울렸다.확인해 보니 육현석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전에는 곽승재 일이 아니면 연락 오는 일이 별로 없었는데. 게다가 지금 곽승재가 내 눈앞에 서 있는데 무슨 일로 전화 한 거지?’고은서가 전화를 받고 입을 열기도 전에 육현석의 다급한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형수님, 얼른 온 닥터한테 전화해요!”“지연이한테 무슨 일 생겼나요?”고은서는 약간 불안해 났다.“지연이 시어머니가 지연이를 강제로 끌고 갔어요. 혼자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유혜린이었다. 조수연도 그녀와 함께 있었다.박지연은 전의 일로 약간 불쾌하긴 했지만 그래도 애써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어머니, 유혜린 씨.”“지연 씨, 제가 아줌마를 너무 오래 못 뵈어서요. 마침 오늘 휴일이라서 아줌마랑 데이트 중이었어요. 저녁 시간이 다 돼서 간단히 요기하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유혜린이 먼저 입을 열고 설명했다.“승준이는 병원에서 힘들게 일하면서 따뜻한 밥 하나 챙겨 먹기도 힘든데 넌 혼자 부귀영화를 아주 잘 누리며 다닌다.”조수연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시비를 거는 듯한 그녀의 말투에 박지연은 더는 다투고 싶지 않았다.“우리 다른 곳으로 가자.”육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박지연, 너 지금 무슨 태도야! 이젠 내 말은 듣기 싫다는 거야? 내가 틀린 말을 했어? 요즘 승준이가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 알아? 넌 네가 남편 있는 몸이라는 건 기억이나 하고 다니니?”조수연이 호통쳤다.“아줌마, 화내지 마세요. 지연 씨도 일이 바빠서 그러는 거겠죠.”유혜린이 옆에서 조수연을 달랬다.“바쁘긴 뭐가 바쁘다는 거야! 그까짓 간호사밖에 안 되어서는 월급도 얼마 받지 못하면서 고집 하나는 세 가지고. 승준이를 챙겨주지 않는 건 둘째 치고 이 시어머니 전화도 받지 않는다니까. 교양 없는 년.”조수연이 씩씩거리며 말했다.“저기요, 여기 공공장소예요. 교양 있는 분이시라면 큰소리로 소란 피워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계실 텐데요.”육현석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넌 누구야!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조수연은 육현석의 말을 듣자마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내가 내 며느리를 교육하는 게 뭐가 어때서. 내 아들은 아직도 힘들게 일하고 있는데 저년은 기생오라비 같은 너하고 바람이나 피우려 하고. 내가 몇 마디 교육한 게 뭐가 어때서!”“어머니, 말이 지나치신 것 같은데요. 그냥 친구랑 밥 먹으러 나왔을 뿐인데 제가 언제 바람을 피웠다고 그러세요!”
박지연은 고은서를 보자마자 눈시울이 붉어졌다.그녀는 괜찮다고 고개를 저으면서 물었다.“네가 여긴 어떻게 왔어?”“육현석이 나한테 연락 왔어.”고은서가 말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집 안에는 조수연뿐만 아니라 온승준의 아버지 온범준도 소파에 앉아있었다. 두 사람은 일그러진 표정을 한 채 마음먹고 박지연의 죄를 물으려는 것 같았다.고은서는 자연스럽게 박지연 앞에 막아섰다.온승준도 따라 들어오면서 말했다.“어머니,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지연이한테 호되게 굴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가족끼리 좋게 얘기하면 될 것을 왜 말도 없이 지연을 강제로 끌고 오면서 난리세요!”박지연 때문에 이미 기가 막힐 정도로 화났던 조수연은 그녀의 조력자들과 자신을 비난하는 아들을 보자 화가 점점 더 치밀어올랐다.분노가 극치에 달한 그녀는 휘청거리면서 하마터면 뒤로 고꾸라질 뻔했다.온범준이 황급히 소파에서 일어나 조수연을 부축하면서 자기 아들을 향해 호통쳤다.“온승준, 너 지금 엄마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우리가 며느리한테 물어볼 게 있으니까 여기로 데려왔겠지. 뭐가 잘못됐다고 그러는 거야!”그의 말을 들은 고은서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온승준 씨, 그쪽 부모님께서 지연이한테 물어볼 일이 있는 게 아니라 지연이를 거의 범인처럼 심문하는 것 같은데요?”고은서는 애써 예절을 지키며 온승준 부모님을 드러내고 비난하지 않았다. 그녀는 온승준을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보면서 말을 이어갔다.“지연이는 당신 아내예요. 이 집안 도우미나 하인이 아니라고요.”온범준은 명성이 꽤 높은 교수였고 또 고은서가 집안사람도 아닌 데다가 문 쪽에 그녀가 데려온 범상하지 않은 남자까지 서 있어서 내뱉고 싶은 욕을 꾹 참았다.“승준아, 이 사람들 누구야? 우리 집안일을 처리하는데 끼어들지 말고 얼른 나가라고 해!”온범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집안일은 무슨. 우릴 다 쫓아내고 며느리 한 명만 잡고 괴롭히려고 그러는 거잖아요.”민시후가 혀를 끌끌 차면서 말했다.“넌 또
온범준은 박지연이 해성에서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는 곽씨 가문의 장손이자 GS그룹의 대표인 곽승재와 아는 사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곽 대표님, 우린 그 누구도 모욕할 의도가 없었어요. 그저 집안일을 처리하는 것뿐인데 갑작스레 찾아와서 우리가 며느리를 괴롭힌다고 몰아붙이는 게 예의에 맞다고 생각하시나요?”“피해자인 것처럼 말을 바꾸지 마세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괴롭혔는지 안 괴롭혔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거든요.”민시후가 콧방귀를 뀌면서 반박했다.“우리가 언제 쟤를 괴롭혔다고 그래? 지금 그쪽한테 괴롭힘당하는 건 우리야. 레스토랑에서 만난 남자로 모자라서 또 두 명이나 불러와?”조수연이 씩씩거리면서 말했다.“어머니, 그만 하세요.”온승준이 미간을 어루만지며 조수연을 말렸다. 그리고 이내 뒤돌아 곽승재와 민시후에게 말했다.“두 분도 이만 가보시죠.”“지연아, 너도 은서 씨랑 먼저 돌아가 봐. 내가 나중에 연락할게.”지금 이 상황에 말을 더 해봤자 조수연과 온범준 귀에는 변명으로 들릴 것이다. 박지연도 더는 자신을 모욕하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는지라 고은서와 함께 라이트문으로 돌아가려고 했다.“가자.”곽승재와 민시후가 먼저 나가고 박지연과 고은서가 두 사람 뒤를 따라 나가려고 했는데 뒤에서 조수연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자기가 진짜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봐. 그때 당시 승준이가 혜린이 새 남자친구를 보고 자극받았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고서야 너랑 왜 결혼했겠어.”박지연은 발걸음을 멈췄다.그녀가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분쟁을 그치고 결혼 생활을 이어나가려고 노력한 이유가 온승준한테 그나마 미련이 남아서였다.그녀는 온승준과 결혼하게 된 게 하늘이 준 계시라고 생각하면서 그와 남남이 되기 싫었다.그러나 조수연의 말을 듣는 순간 모든 환상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나랑 결혼한 게 내가 마음에 들어서도 아니고 하늘이 준 계시도 아니었어. 그저 새 남자가 생긴 첫사랑을 약 올리기 위함이었어.’“지연아.”박지연과 함께 걷고 있던 고
“곽 대표님은 제가 그렇게 싫으세요? 병뚜껑 열어주는 것조차 꺼릴 만큼?”여시은의 말투에는 약간의 유감과 억지로 짜낸 서운함이 섞여 있었다.곽승재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시은 씨가 원하는 건 물을 마시는 결과가 아닌가요? 물을 마실 수 있으면 되지, 누가 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잖아요.”“왜 중요하지 않아요?”여시은은 눈을 깜박이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농담을 던졌다.“저는 곽 대표님이 열어준 병의 물만 마시고 싶은데요.”노골적인 애정 공세에 곽승재는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여시은은 전혀 민망한 기색이 없이 여전히 공세를 이어갔다.“솔직히 말할게요.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우리가 천생연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두 집안 어른의 뜻대로 조금씩 알아가면 안 될까요?”곽승재는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우리 집안에서 할머니와 어머니는 정략결혼을 반대하세요. 아버지의 일방적인 희망 사항일 뿐이죠.”“그리고 이미 말씀드렸듯이 저는 재혼 계획이 없습니다.”여시은은 여전히 달콤한 미소를 유지했다.“당장 결혼하자는 뜻은 아니에요. 어쩌면 만나다가 전혀 안 맞는다는 걸 깨달을 수도 있잖아요?”“그럴 필요 없어요. 저는 시은 씨와 맞지 않아요.”곽승재는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고은서는 원래 활발하고 웃음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저와 결혼한 후 시들어버렸고,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온갖 방법을 다해 저한테서 도망쳤어요. 이혼한 후 그 여자는 다시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 됐죠. 그러니 저는 남편으로 자격 미달이에요.”“시은 씨는 여 회장님께서 애지중지하는 따님이고 조건이 우월하니 더 나은 남자를 만나셔야죠.”여시은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저는 고은서와 달라요. 고은서는 완전한 사랑을 원했지만 저는 조건이 맞는 파트너면 돼요.”“사랑이 있으면 금상첨화이고 없어도 상관없어요.”그녀는 돌직구를 날렸다.“제가 고은서보다 승재 씨에게 더 잘 맞는다고 생각해요. 고은서 만큼 똑똑하거나 유능하지는 않지만, 이게 남자들에게는 장
“아니, 유일 투자은행 개업식에서 여재훈 씨가 테이프 커팅에 참석했었잖아. 그때 외할아버지와 삼촌도 있었는데 서로 아는 눈치가 아니었어.”고은서는 말을 이어갔다.“당신도 우리 삼촌을 알잖아. 조금이라도 연줄이 될 만한 사람이라면 절대 놓치지 않지. 여재훈 씨와 단 한 번이라도 만난 적이 있었다면 당장 달려가서 인사하고 관계를 맺으려고 했을 거야.”사실 그날 삼촌은 여재훈과 안면을 트려고 했지만, 여재훈 주변에 중요 인물들이 너무 많아 접근할 수 없었다. 게다가 외할아버지가 말리는 바람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여시은이 오직 당신 때문에 나를 저격하는 거라고 생각해.”“당신들 둘이 Y국에서 만난 적 있잖아. 여시은은 그때 당신에게 첫눈에 반했을 거야.”고은서의 분석이 정확할 수도 있다.곽승재는 이전에 곽현수에게 왜 백유미를 귀국시켜 그와 고은서의 결혼 생활을 망쳤냐고 따진 적이 있었다.그때 곽현수는 고씨 가문이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며 여시은이 적합한 상대라고 말했었다.곽현수는 단지 할머니 때문에, 그리고 여씨 가문이 입방아에 오르는 것을 원치 않아서 이혼을 강요하지 않았을 뿐이다.여시은도 Y국의 파티에서 만난 두 집안 어른들이 둘을 만나게 하려 했고, 그녀도 그와의 정략결혼에 긍정적인 태도였다고 인정한 바 있다.고은서의 분석이 맞았지만 곽승재는 마음이 전혀 홀가분하지 않았다.그녀의 말투가 너무나 차분했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을 말하는 것처럼.곽승재는 고은서의 태도에서 자신을 향한 감정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가슴 속에서 둔탁한 통증이 밀려왔다.겨우 감정을 추스르고 입을 열려는 순간, 회의실 방향에서 여시은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곽승재는 일이 있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그 사이 눈앞까지 다가온 여시은이 배려심 있게 말했다.“곽 대표님, 일이 있으면 먼저 처리하세요. 10분 쉬고 회의를 계속한다고 전할게요.”여시은은 말하면서 생수 한 병을 곽승재에게 건넸다.곽승재는 거절의 뜻으로 고개를 저
“외할아버지, 숙모 말로는 엄마가 북성에 있을 때 가슴 아픈 연애사가 있었던 것 같대요. 제 생부는 아닐 거라고 하는데, 외할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고은서는 돌직구를 날렸다.“그럴 리 없어. 네 엄마는 활발하고 낭만적인 성격이었지만 고집스러운 면도 있었어. 쉽게 마음을 주지 않지만 한번 주면 절대 뒤돌아보지 않았어.”고준석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 점에서는 네가 엄마를 똑 닮았어. 그래서 그때 곽승재와의 결혼을 허락했던 건데...”‘왜 갑자기 내 얘기로 넘어간 거지?’“북성에 연인이 없었거나, 있었다면 제 생부란 말씀인가요?”고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생부일 가능성이 낮아. 북성에서 돌아왔을 때 다른 곳에서 돌아왔을 때와 별다른 정서 변화가 없었거든.”고준석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엄마가 유부남과 엮였을 리 없어. 송민준 부모의 이혼이 엄마와 상관없을 거야.’“오히려 해외에 머물던 어느 날 전화가 와서 깜짝선물을 준비했다며 신난 목소리로 말한 적이 있어.”말을 이어가던 고준석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연애하는 줄 알고 기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렇게 될 줄은...”“은서야, 네 엄마가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네 생부 때문에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알아.”고준석은 외손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때 네 엄마는 치료가 안 되는 불치병을 앓은 것도 아니었어.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가슴에 품고 너무 지쳐서 벗어나고 싶었던 거지...”목이 멘 듯한 외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은서도 코끝이 찡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노인의 아픔을 다시 건드린 자신이 미웠다.고은서는 고준석의 손을 꼭 잡았다.“외할아버지,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엄마는 외할아버지같이 이해심이 넘치는 분을 아버지로 두어 너무 행복했을 거예요.”하지만 고준석은 더 슬퍼 보였다.“가끔은 내가 너무 자유를 준 것은 아닌지 생각할 때도 있어. 조금 구속했으면 사랑 때문에 큰 상처를 받을 일도 없지 않았을까?”
고은서는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엄마가 미혼모 신분으로 나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북성에 첫사랑까지 있었다고? 이렇게 복잡한 연애사가 있었다니.’“내가 그냥 제멋대로 추측한 거야. 연인 관계가 아니라 형님 마음을 아프게 한 친구일 수도 있지.”단은숙은 가방을 손에 들고 고은서에게 주의를 주었다.“이 얘기를 외할아버지나 삼촌한테 절대 하지 마. 내가 또 쓸데없는 소리 했다고 나무랄 거야.”외할아버지는 고은서의 엄마를 각별히 아꼈다. 미혼모가 됐어도 한 마디 비난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슴 아파하며 그녀의 과거를 캐묻지 않았다.외할아버지의 말씀대로 집은 따뜻한 피난처였고, 엄마는 그 안에서 조용히 상처를 치유했다. 말할 수 있는 건 스스로 털어놓을 것이고, 입을 다물고 있다면 아픈 기억일 테니 가족들이 상처를 건드릴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고은서의 엄마는 조향사로서 천재적 재능을 보였다. MQ의 베스트셀러 향수가 바로 그녀의 작품이었고, 이는 MQ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그래서 삼촌 부부도 그녀의 사생활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다.가족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니 주변 사람들도 무시하지 못했다. 그래서 고은서는 지금까지 아버지가 없는 것이 큰 결핍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씨 가문을 노리는 세력이 나타나서 진상을 파헤쳐야 하는 상황이 되지 않았다면, 평생 엄마의 과거를 캐지 않았을 것이다.단은숙은 가방을 부인들 단톡방에서 자랑하기 위해 급히 방으로 들어갔다.고은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엄마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엄마는 북성에서 무슨 일을 겪었을까? 정말 첫사랑이 있을까? 혹시 송씨 집안 사람?’문득 송민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송민준과 송민아는 이복남매였다.‘그렇다면 송민준의 친모가 아버지와 이혼하셨다는 건데, 설마 엄마가 두 분 사이에 끼어든 건 아니겠지?’이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고은서는 등골이 오싹해졌다.만약 송민준이 정말 C선생이라면, 그가 고씨 가문을 증오하는 이유는 충분하다.하지만 고은서는 엄마
“네 엄마는 아는 사람이 많지만 송씨 집안 사람과 안면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고준석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은서야, 왜 갑자기 송씨 집안 사람을 아는지 묻는 거야? 무슨 일이라도 생겼니?”아직 모든 게 오리무중이라 고은서는 외할아버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제가 그 집안 따님이랑 친한 친구이고 아드님과도 아는 사이라 인연이 있는 것 같아서 혹시 어른끼리 아는 사이가 아닌지 여쭤본 거예요.”“집안 어른까지 알아보면서 결혼 생각이 없다고?”단은숙이 다시 흥분했다.“은서야, 솔직히 말해봐. 그 송민준이라는 청년이 너를 좋아하지? 너를 쫓아다니지?”고은서는 황당해하며 부인했다.“아니에요. 절대 그럴 일이 없어요. 저와 송민준은 그냥 친구예요. 그리고 제가 만약 결혼할 마음이 생기면 반드시 숙모께 첫 번째로 말씀드릴게요.”“여보, 자꾸 결혼 얘기로 애를 못살게 굴지 마. 우리 은서는 능력도 뛰어난데 시집가지 않아도 괜찮아.”고국성이 뜻밖에 그녀 편을 들어주었다. 영악하고 연줄을 대기 좋아하는 삼촌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더 놀라운 것은, 숙모가 화내거나 반박하지 않고 그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 것이다.“당장 결혼하라고 닦달한 것도 아니잖아요. 곽승재와 비슷한 조건의 남자가 있다면 놓치지 말아야죠...”“괜찮아요. 숙모도 저를 걱정해서 그러시는 거죠.”고은서는 적당히 무마한 후 넉살스럽게 단은숙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숙모, 제가 최근에 G브랜드 핸드백을 샀는데 디자인이 예뻐요. 한번 보실래요? 마음에 드시면 드릴게요.”이렇게 좋은 일을 마다할 리 없는 단은숙은 급히 일어섰다.“아이고, 은서가 숙모 생각도 해주고! 은혜 그 계집애보다 백배 낫네.”“엄마, 다 들려!”멀지 않은 곳에 있던 고은혜가 기분 상한 듯 소리쳤다.“들리든 말든. 내가 틀린 말 했나?”단은숙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은서와 함께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고은서는 차에서 포장
고준석과 고국성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해성의 곽씨 일가, 북성의 송씨 가문, 민씨 가문은 모두 명문가였다.“당연히 알지.”남편과 시아버지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단은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송씨 집안의 가주가 훈훈한 외모를 가진, 유명한 독신남이라는 것도 알아.”“은서야, 송씨 가문은 왜 물어?”단은숙이 갑자기 소리 질렀다.“너 설마 송씨 가문에 시집가려고?”“맞네! 송씨 가문이 해성에 지사를 세웠다더니 너와 사업 거래가 있었구나.”단은숙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그 집안 아드님이 우리 은서 얼굴을 보고 첫눈에 반한 게 틀림없어.”“...”그녀가 한 마디 물었을 뿐인데, 숙모는 기관총 쏘듯 수십 마디를 내뱉었다. ‘첫눈에 반했다’, ‘결혼한다’, 이런 말까지 나오니 고은서는 어느 것부터 반박해야 할지 난감했다.“바쁜 애가 언제 연애할 시간이 있겠어? 넘겨짚지 말고 은서 말을 들어보자꾸나.”단은숙은 화내지 않고 고은서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정확한 소식을 기다렸다.명문가와의 혼인, 이에 대한 숙모의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 고은서는 알고 있었다.“숙모, 너무 상상의 나래를 펼쳤어요. 어떻게 아무 남자나 저를 좋아하고 저와 결혼하려고 하겠어요? 저는 그저 우리가 과거에 송씨 가문과 무슨 거래가 없었는지 알고 싶을 뿐이에요.”이 말을 듣고 순식간에 흥미를 잃은 단은숙은 모른다고 했다.고준석과 고국성도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고씨 가문은 줄곧 북성에 있었던 송씨 가문과 거래할 기회가 없었다.“사업 거래도 없었어요? 송씨 가문에서 향료와 관련된 사업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고은서는 꼬치꼬치 캐물었다.“아니면 두 분이 사업차 북성에 갔다가 송씨 가문 사람과 마주친 적도 없으세요?”고국성이 입을 열었다.“송씨 가문은 줄곧 부동산 사업을 해왔고 송민준이 개척한 새로운 사업도 향료와는 무관한데, 우리와 무슨 사업 거래가 있었겠어?”고준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예상했던 결과였다.‘하지만 두 가문이 아예 모르는 사이
건전복 상자를 들고 주방에서 나오던 단은숙이 고은서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은서 왔어?”그녀가 고국성의 일을 도와준 뒤로 단은숙은 그녀를 훨씬 살갑게 대했다. 얼마나 진심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녀를 존중하고 예의를 차리기 시작했다.단은숙의 목소리를 들은 다른 사람들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은서야, 거기 서서 뭐 해? 얼른 외할아버지 곁으로 와.”고준석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고은서는 미소 띤 얼굴로 모두에게 인사하면서 고준석 곁으로 갔다.아내의 부름을 받은 고국성은 식재료를 손질하러 주방에 갔고, 고은서는 외할아버지 곁에 앉았다.“은서야, 너 살이 좀 빠진 것 같다. 요즘 밥은 잘 챙겨 먹니?”외할아버지는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일이 바빠도 쉴 때는 제대로 쉬어야지.”“할아버지 너무 해요.”고은혜가 입을 삐죽거리며 끼어들었다.“저한테는 살이 찐 게 아니냐고 하시더니 언니한테는 살이 빠졌다고 하시고. 언니만 일이 바쁜 게 아니라 저도 바쁘거든요.”고준석이 자애롭게 웃으며 그녀를 놀렸다.“일이 바쁜지는 모르겠지만, 군턱이 진 것을 보니 끼니는 굶지 않은 것 같구나.”“할아버지, 저 군턱이 지지 않았어요.”오기가 생긴 고은혜는 증명해 보이려고 목을 쭉 빼 들었다.“보세요. 전혀 안... 콜록!”목을 너무 세게 빼든 탓에 말이 끝나기 전에 사레가 들렸다.그녀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연거푸 기침했다. 유성준이 어이없는 듯한 표정으로 물과 휴지를 건넸다.“회사에서 센 척하더니 집에서도 이러네.”“콜록콜록! 제가 언제 센 척했다고 그래요? 저는 그런 적이 없어요. 콜록!”고은혜는 기침하면서도 발끈했다.이 정겨운 모습을 보고, 고은서는 문득 유성준과 고은혜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은 부드럽고 세심한 반면, 다른 한 사람은 덜렁대는 성격이다.다만 숙모 단은숙이 동의할지 모르겠다. 고은혜가 명문가에 시집가 상류층에 진입하기를 바라는 그녀였다.유성준도 집안이나 능력이 빠지지 않았지만,
고은서가 이미 생각을 정했다는 것을 확인한 곽승재는 더 이상 의견을 내지 않고 단지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할 말을 다 한 고은서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늦었는데 일찍 들어가 쉬어.”곽승재는 좀 더 있고 싶었지만, 억지로 머물 핑계를 찾지 않고 소파에서 일어났다.때마침 영상전화가 걸려 오자, 고은서는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고 영상전화를 받았다.문 쪽으로 걸어가던 곽승재가 무심결에 돌아보니, 그녀는 어느새 소파에 벌러덩 누워 한쪽 발을 다른쪽 무릎에 올리고 흔들거리고 있었다. 진지하고 엄숙했던 조금 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여유롭고 편안한 모습이었다.곽승재는 이혼하기 전의 일이 문득 떠올랐다. 한번은 그가 외할아버지 댁에 같이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은서가 삐진 적이 있었다. 그녀가 며칠째 외할아버지 댁에 머물며 집에 돌아오지 않자, 이 일을 알게 된 할머니가 그를 고씨 가문으로 보냈다.그때의 고은서도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편안한 실내복 차림으로 소파에 엎드려 두 발을 흔들거리며 아이패드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맨발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곽승재는 그 순간 모든 불쾌감이 사라졌다. 원래 불만 가득했던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은서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 도우미가 말을 걸어서야 정신을 차렸다.다시 모습을 드러낸 고은서는 흠 잡을 데 없이 단정한 차림에 화장도 완벽하게 끝낸 상태였다.그와 함께 마구 뛰던 곽승재의 심장도 평온을 찾았다. 고은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해서 잠깐 넋을 잃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그것이 실은 설렘의 순간이었다는 것을 끝내 깨닫지 못했다...고은서와 이야기하던 중, 고은혜가 문 쪽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언니, 저기 혹시... 형부?”고은서가 몸을 뒤로 젖힌 채,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는 여전히 문어귀에 서 있었다.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잘생긴 얼굴에서 고통스러운 기색이 언뜻 보였다.‘갑자기 왜 저런 표정이지?’고은서가 자세히 보려고 일어났을 때는 그가
“당시 시은이가 부상당한 쿠아를 쫓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일에 대한 기억이 전부 시은이가 쿠아를 구해 준 그 따뜻한 장면으로만 남아있어. 시은이가 왜 거기에 있었을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고은서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곽승재는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고은서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두려워하지 마, 자책하지도 마. 아무도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할 거야.”곽승재가 부드럽게 위로했다. “내가 민기 씨에게 송민준과 시은 씨사이의 관계를 조사해 보라고 시켰어.”고은서는 살며시 손을 빼냈다. “그럼 부탁할게.”곽승재는 살짝 실망한 표정을 애써 숨기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시은이가 당신과 결혼을 하려 하기에 날 싫어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가 가. 하지만 송민준은 왜 나를 미워할까?” 고은서가 의문을 제기했다.비록 그녀가 예전에 민시후와 가까웠다고 해도 고씨 가문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었다.게다가 유미 씨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귀국한 것은 곽 회장님의 뜻뿐만 아니라 이 C 선생의 지시도 있었다고 했다. 그 시절 자신은 민시후와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었다.‘고씨 가문이 송민준에게 크게 잘못한 거라도 있나?’고은서는 머리가 터질 정도로 생각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곽승재도 이 일의 전후 관계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우리의 추측일 뿐이야. 증거 없이는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 없으니 서두르지 마.”고은서는 급할 수밖에 없었다. 뒤에 숨은 검은 손을 잡아내지 못하면 그녀와 고씨 가문은 영원히 불안에 떨어야 했다.전생의 비극적 결말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범인을 색출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곽승재는 고은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MQ에 관련된 일은 내가 사람을 시켜 주의 깊게 보고 있어. 무슨 움직임이 생기면 바로 나에게 보고할 거야.”고은서는 곽승재가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사실에 놀랐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곽승재를 바라보았다.거실의 하얀 색 조명 아래서 그의 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