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서의 질문에 곽승재는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며 말했다.“취해서 계속 나한테 승재 오빠라고 부르면서 가지 못하게 했어.”고은서는 그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렸다.피곤했던 그녀는 어젯밤 마사지를 받으며 깊이 잠 들었고 그 이후 어떻게 방에 돌아왔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난 취했으니까 네 말이 맞는 걸로 할게.”고은서가 콧방귀를 뀌며 말을 이었다.“곽승재, 일부러 과일주 사서 마시게 하고 스파까지 데려간 거지? 그렇게 해서 내가 방심한 틈을 타서 뭐라도 하려고 한 거야?”곽승재는 화도 내지 않고 차분히 답했다.“너한테 무슨 짓 하려는 생각은 없었어. 너는 어젯밤 날 못 가게 했을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이혼은 안 된다고 하면서 강제로 사인시킬 수는 없다고 하더라. 고은서, 이혼은 분명히 네가 먼저 얘기했고 나한테 사인하라고 강요한 것도 너였잖아. 내가 언제 널 강제로 사인하게 한 적 있어?”고은서는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또 환생한 걸 깜빡했나 보네. 정신병원에 있었던 걸로 착각했나...’전생에서 곽승재의 변호사가 이혼 합의서를 가지고 와서 강압적으로 사인하라고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그때 고은서는 거절하며 곽승재에게 직접 만나서 물어보겠다고 했지만 변호사는 싸늘한 어조로 곽승재가 바빠서 만날 시간이 없다고 했다.또한 사인하지 않으면 소송으로도 빠르게 판결을 받아내겠다고 협박하기도 서슴지 않았다.고은서는 울며 변호사에게 곽승재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변호사는 그녀에게 짜증 내며 두 명의 간호사를 데리고 그녀를 강제로 사인하게 했다.“고은서, 방화 사건은 어떻게 된 거야? 나한테 진실을 밝히라고 했는데 무슨 진실을 얘기하는 거야?”곽승재가 물었다.고은서가 환각제를 먹었을 당시에도 곽승재를 보고 승재 오빠라고 부르며 사건의 진상을 밝혀달라고 했었다.어젯밤에도 마찬가지로 술에 취한 고은서는 억울하고 절망적인 어조로 방화 사건은 그녀가 한 일이 아니라고 믿어달라고 했다.처음에는 고은서가 환각 상태라서
“죽고 싶으면 곱게 죽지, 투신자살은 왜 한대?”혐오감이 잔뜩 담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난들 곱게 죽고 싶지 않...”고은서는 문득 곽승재의 말에서 이상한 느낌을 감지했다.그녀가 대체 언제 투신자살했단 말이지?“사모님, 드디어 깼군요.”이때, 도우미 이미숙이 물과 약을 들고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머리가 아프시죠? 의사 선생님께서 가벼운 뇌진탕 증상이 있다고 해서 약 처방해주셨는데 지금 드실래요?”고은서는 널찍한 침실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이미숙의 말에 대답하는 것조차 까먹었다.실내 인테리어를 봐서는 예전의 곽씨 일가 별장 같았다.정신병원에 입원한 이후로 2년이 넘도록 발길이 끓긴 곳이지 않은가?설마 곽승재가 그녀를 다시 집으로 데려왔단 말인가?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칼로 심장을 찌른 이상 설령 살아있더라도 수술실에 실려 갔을 테니까.고은서는 서둘러 고개를 숙여 가슴을 확인해봤는데 멀쩡하기만 했다.그리고 머리와 손목에는 의료용 거즈가 둘둘 감겨 있었다.곽승재는 눈살을 찌푸린 채 때로는 괴로워하고 때로는 경악을 금치 못하는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짜증을 꾹꾹 눌러 담았다.“나중에 투신자살하고 싶으면 더 높은 곳에 올라가. 고작 2층에서 떨어진다고 죽진 않으니까.”싸늘한 말 한마디를 끝으로 그는 기다란 다리를 움직여 방을 나섰다.고은서는 곽승재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자기 몸 상태를 살피기 바빴다.2년 넘게 정신병원에 갇혀 있으면서 안색은 이미 초췌하다 못해 창백했고, 살이 쏙 빠져 장작처럼 삐쩍 말랐지만 지금은 피부가 뽀얗고 매끈하니 탄력까지 넘쳤다.몸과 팔뚝에도 간병인과 환자들 때문에 난 상처와 멍을 찾아볼 수 없었다.“사모님, 도련님께서 화가 난 나머지 말을 좀 심하게 했을 뿐이에요.”이미숙은 그녀가 상처받은 줄 알고 조심조심 위로했다.“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이따가 도련님과 잘 얘기...”“아줌마! 오늘 며칠이죠?”고은서는 아연실색하며 황급히 이미숙의 말을 끊었다.
"고은서, 이제 그만해! 대체 언제까지 소란 피울 거야?”곽승재가 버럭 화를 내며 타박하자 고은서는 말없이 냉소를 지었다.자기 와이프를 대하는 태도가 어쩌면 남보다 더 못할 수 있단 말인가?“승재야, 화내지 마.”고은서가 입을 열기도 전에 백유미가 먼저 말을 꺼내더니 설명을 보탰다.“은서 씨, 승재가 오늘 내 생일 파티에 참여하려고 찾아온 건 아니야. 사실 우리 아빠가 오랜만에 보고 싶다고 해서 가볍게 저녁이나 같이 먹으려고 집으로 초대했는데 이렇게 큰 오해를 불러일으킬 줄은 몰랐어. 게다가 은서 씨가 다쳤다는 소리를 듣고 마음에 걸려 서둘러 해명하러 달려왔거든. 다 내 탓이니까 이제 그만 화 풀어.”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긋나긋한 말투로 사과하는 백유미의 모습은 진정성이 가득했다.고은서는 3년 전에도 백유미가 집까지 찾아와서 똑같은 변명을 했던 거로 기억했다.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는 침실이었다.당시 백유미의 말을 듣고 나서 나란히 서 있는 선남선녀를 보자 열이 확 올랐다.이내 악을 쓰며 백유미에게 꺼지라고 했고, 탁자에 놓인 꽃병을 집어던지기도 했다.꽃병에 머리를 부딪힌 백유미는 피를 철철 흘리며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곽승재는 노발대발하면서 곧바로 백유미를 안고 병원으로 데려가 몇 날 며칠이나 돌봐주었다.그러고 나서 두 사람의 관계는 점점 소원해졌다.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화를 돋우는 말이었지만, 이제 고은서의 마음에 아무런 파장을 일으키지 못했다.심지어 대수롭지 않게 미소 짓는 여유까지 되찾았다.“유미 씨, 멀리서 해명하러 여기까지 찾아오느라 애썼네. 나 화 안 났어. 아버님께서 승재를 식사에 초대하셨다며? 얼른 가 봐. 연장자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지.”백유미는 고은서가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살짝 당황했다.곽승재도 미간을 찌푸렸다.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상황이란 말이지?자신에게 혼났는데 울고불고 떠들기는커녕 백유미와 밥 먹으러 가라고 흔쾌히 보내주기까지 하다니?분명 2시간 전만
그녀를 가장 아끼는 분이지만, 전생에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모습도 보지 못했다.이번 생에는 반드시 곁에서 효도하여 외할아버지를 실망시켜 드리지 않으리라 다짐했다.고은서는 몸이 만신창이라 당분간 외할아버지 만나러 갈 수가 없었다.결국 설렘과 간절함을 애써 억누르고 며칠 후에 찾아뵙기로 약속했다.전화를 끊고 나서 고은서는 테라스에 앉아 지난 일들을 회상했다.18살이 되던 해, 사랑에 막 눈을 뜨기 시작한 그녀는 자신을 ‘구해준’ 곽승재에게 첫눈에 반했다.사랑에 빠진 소녀는 체면 불고하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남자에게 대시했지만, 끝내 마음을 사로잡는 데 실패했다.대학 졸업할 때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린 곽승재의 할머니 전미자가 둘이 혼인신고 하도록 적극 추진한 덕분에 사모님이라는 자리를 꿰차게 되었다.비록 곽승재는 대놓고 그녀를 싫어했지만, 언젠간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거라는 이름다운 환상을 줄곧 품고 있었다.결혼하고 나서 6개월이 지나자 백유미가 귀국해서 곽승재의 회사에 입사했다.두 사람 사이의 남다른 인연은 그녀에게 어쩌면 곽승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겨주었다.결국 점점 초조해지면서 떼를 부리기 시작했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관해 확인받고 싶었다.하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그녀가 투신자살로 협박하는 바람에 곽승재과 백유미의 사이는 갈수록 돈독해졌고, 곽승재가 집에 돌아오는 횟수도 점차 줄어들었다.절망에 빠진 그녀는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전미자에게 도움을 청했고, 곽승재와 단둘만의 시간을 갖도록 출국할 기회를 만들어달라고 했다.하지만 출국 전날, 뜻하지 않게 집에 강도가 들어 불까지 지핀 탓에 백유미는 자칫 목숨마저 잃을 뻔했다. 심지어 범인을 붙잡았는데 다름 아닌 그녀가 시켰다고 딱 잡아뗐다.이 사건은 곽승재의 인내심을 바닥나게 한 계기가 되었고, 입이 아프게 변명해봤자 그녀를 감옥에 보내겠다고 대쪽 같이 밀어붙였다.결국 외할아버지의 설득과 전미자의 도움을 받아 옥살이는 면하게 하겠다는 대답을 어렵게 받아냈다.그
고은서가 몸을 홱 돌렸다.“누가 버리라고 했죠? 당장 주워요.”프런트 직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어차피 대표님은 볼 생각도 없을 텐데 굳이 헛수고할 필요 있어요? 그동안 챙겨온 물건도 다 버리라고 했거든요.”당시 고은서는 곽승재가 일하는 게 힘들까 봐 번거로움도 마다하지 않고 음식이며, 옷이며, 스트레스 해소용 장난감마저 가져다주었다.게다가 로맨스 소설 여주인공처럼 속마음을 담은 편지를 써서 보내기도 했다.하지만 결국은 진심이 무자비하게 짓밟히는 꼴이라니.어떻게 고작 프런트 직원이 감히 그녀의 물건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냐는 말이다.고은서는 싸늘한 시선으로 프런트 직원을 노려보았다.“대표님이 보든 말든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내 물건을 함부로 버리죠? 얼른 챙기지 못해요?”여자는 납득할 수 없다는 듯 입을 삐죽거렸다.“알겠어요, 다시 챙기면 되잖아요. 목을 매서 겨우 대표님을 만난 주제에 어디서 사모님 행세를 하는 건지, 참.”“무슨 일이죠?”그녀에게 사과를 요구하려던 찰나, 남자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이내 고개를 돌리자 곽승재의 비서 주민기가 눈에 들어왔다.그리고 주민기 옆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검은색 프리미엄 맞춤 정장 차림의 곽승재였다.훤칠한 키에 수려한 외모, 비록 안색이 싸늘하다 못해 얼음장 같았지만 비주얼 자체가 워낙 훈훈한지라 오히려 남성미를 한층 더 부각했다.만약 예전이었다면 그를 만날 때마다 고은서는 떨림을 주체하지 못하고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수줍게 이름을 불렀을 테지만, 지금은 입도 벙긋하기 싫었다.“사모님, 안녕하세요.”주민기가 예의상 인사를 건넸다.득의양양한 얼굴로 잽싸게 대답하는 예전과 달리 고은서는 시종일관 시큰둥했다.어차피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곽승재가 인정한 아내가 아니었다.남들이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필요한 처세술에 불과했으니까.“무슨 일이지?”고은서가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 꿈에도 모르는 곽승재는 프런트 직원에게 다시 물었다.그녀는
“펜 이리 줘요.”“대표님, 거래처 분들이 계약 체결하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주민기가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는 GS 그룹에서 오랫동안 논의해온 중요한 협력 건이었는데, 자칫 고은서 때문에 망칠 뻔했다.곽승재는 고은서를 무시하고 주민기와 함께 급히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곽승재!”고은서가 뒤쫓아갔다.“저 여자 끌어내.”곽승재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경호원들이 고은서를 에워쌌다.고은서는 곽승재가 워커홀릭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바빠지기 시작하면 오늘은 이혼하기 글렀기에 일방적으로 밀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내일 오전 9시, 구청에서 봐!”곽승재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미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타 쌩하니 떠났다.대체 간다는 건가? 만다는 건가?하루빨리 그녀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곽승재라면 무조건 올 텐데...이런 생각에 고은서는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곧이어 별장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메일에 접속했다.메일함에는 여러 투자은행에서 보낸 채용 제의가 들어 있었는데, 예전처럼 바로 메일을 삭제하는 대신 하나씩 클릭해 봤다.그러나 전부 기한이 지난 메일로 심지어 난다긴다하는 금융권 엘리트들이 앞다투어 입사하고 싶어 하는 유명한 투자은행도 있었다.정작 그녀는 쓰레기 같은 곽승재의 시중을 들어주기 위해 이렇게 좋은 기회를 제 발로 뻥 걷어차지 않았는가?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땅을 치고 후회할 지경이었다.따라서 이번 생에는 반드시 계획을 잘 세워서 절대로 남자에게 정신이 팔려 삶을 망치는 일이 없도록 다짐했다.몇 군데에 이력서를 제출하고 나서 내일이면 곽승재와 이혼할 수 있다는 생각에 고은서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이내 PC 전원을 끄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그리고 이혼 절차를 밟으면 곧바로 떠날 작정이다.한창 열심히 짐을 싸고 있을 때 이미숙이 걸어 들어왔다.“사모님, 짐을 왜 싸는 거죠? 여행 가시게요?”이미숙은 곽승재가 임시 고용한 도우미로 혹시라도 두 사람의 상황을 전미자에게 보고하는
“우리 집이 널 빈털터리로 내쫓을 만큼 못 살진 않아.”어리둥절한 고은서를 가뿐히 무시하고 곽승재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두둑하게 챙겨줄 테니까 민기한테 협의서를 다시 쓰라고 할게.”“괜찮아.”고은서가 거절했다.“어차피 돈 때문에 너랑 결혼한 거 아니야.”사실 그녀는 꽤 유복한 편이다.외할아버지가 남겨준 주식은 둘째치고 충분히 스스로 먹고살 수 있을 정도로 유능했다.곽승재와 기어코 결혼한 이유는 단지 사랑에 눈이 멀어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했을 뿐이었다.“그러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야.”곽승재는 단호한 말투로 딱 잘라냈다.“다만 서로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내 말대로 협의서를 다시 써.”고은서는 굳이 언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그럼 알아서 해. 내일 구청에서 봐.”말을 마친 고은서는 뒤로 물러나 방문을 닫고 다시 짐을 싸기 시작했다.문밖에 덩그러니 남은 곽승재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정말 이혼 얘기만 하려고 그를 불렀단 말인가?일을 보고 나니 미련 없이 방문을 닫아? 심지어 그와 단 한 마디도 더 섞지 않는다니?그가 집에 돌아오면 고은서는 항상 참새처럼 따라다니며 재잘거리기 바빴다.같이 산책해달라는 둥, 꽃 보러 가자는 둥 요구가 끝도 없었다.게다가 일하고 있을 때마저 갖은 이유를 들먹이며 앞에서 알짱거렸다.만약 지금처럼 얌전하고 신경이 덜 쓰이게 한다면 집에 돌아가는 걸 꺼릴 정도는 아닐 것이다.비록 고은서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 알 수 없지만, 내일 정말 이혼한다면 한시름 놓게 되는 셈이다....“오빠, 나 외할아버지 산소에 인사드리러 가고 싶어. 딱 하루면 되니까 오빠와 백유미 결혼식에 절대로 훼방 놓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그래도 믿지 못하겠다면 지금 증명해줄게.”“고은서, 넌 정말 구제 불능이구나. 죽고 싶으면 혼자 죽어, 절대로 유미에게 손을 대지 못하게 할 거야.”푹!곽승재의 싸늘한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는 칼로 자기 심장을 찔렀다.뜨거운 피가 몸속에서 철철 흘러내렸고, 체온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말투만 들어보면 언제는 사정을 봐준 듯싶었다.고은서는 어이가 없었다.다시 말해서 아직도 그녀를 의심하고 있다는 뜻이며, 행여나 이혼을 빌미로 명성이나 더럽힌다고 생각하는 것이다.결혼한 지 1년 만에 이혼이라니, 자랑거리도 아닌데 할 일이 없어서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니겠냐는 말이다.“단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그래도 걱정된다면 이것도 조항으로 만들어 협의서에 추가해.”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조롱이 가득한 미소를 짓는 고은서를 보자 곽승재는 대뜸 빈정이 상했다.“시간 끌지 말고 사인해.”마치 그녀가 시간을 끌었던 것처럼 말하다니?곽승재와 굳이 실랑이할 생각이 없는지라 그녀는 펜을 들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기 이름을 썼다.“이제 네 차례야.”고은서는 펜과 협의서를 테이블 반대쪽에 있는 곽승재 앞까지 쭉 밀어 보냈다.이미 프린트까지 했는데 미리 사인이나 할 거지, 대체 시간 낭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를 판이다.아니꼬운 듯한 고은서의 태도에 곽승재는 화를 꾹꾹 눌러 담았다. 어차피 곧 끝날 관계라서 조금만 더 참아주기로 했다.펜을 들고 사인하려던 찰나 별안간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연락처를 확인하자 할머니의 개인 간병인 장순이였다.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장순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도련님! 할머님께서 갑자기 쓰러지셨어요. 의사 선생님은 불렀고, 얼른 댁으로 돌아오셔야 할 것 같아요.”이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곽승재는 긴 다리를 움직여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어디 가!”고운서가 버럭 외쳤다.“사인 안 해?”곽승재는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듯 싸늘한 얼굴로 고은서를 노려보았다.“네가 꾸민 짓이지?”고은서는 어리둥절했다.“내가 뭘? 전화한 사람이 누구였는데?”일부러 곽승재와 멀리 떨어져 앉은 탓에 상대방이 꽤 급한 상황이라는 것만 어렴풋이 알 수 있었을 뿐 통화 내용까지 들리지 않아 구체적으로 무슨 일인지는 몰랐다.진지한 표정의 고은서를 보자 곽승재도 꼬치꼬치 따질 겨를이 없었다.“고은서, 우리 할
고은서의 질문에 곽승재는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며 말했다.“취해서 계속 나한테 승재 오빠라고 부르면서 가지 못하게 했어.”고은서는 그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렸다.피곤했던 그녀는 어젯밤 마사지를 받으며 깊이 잠 들었고 그 이후 어떻게 방에 돌아왔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난 취했으니까 네 말이 맞는 걸로 할게.”고은서가 콧방귀를 뀌며 말을 이었다.“곽승재, 일부러 과일주 사서 마시게 하고 스파까지 데려간 거지? 그렇게 해서 내가 방심한 틈을 타서 뭐라도 하려고 한 거야?”곽승재는 화도 내지 않고 차분히 답했다.“너한테 무슨 짓 하려는 생각은 없었어. 너는 어젯밤 날 못 가게 했을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이혼은 안 된다고 하면서 강제로 사인시킬 수는 없다고 하더라. 고은서, 이혼은 분명히 네가 먼저 얘기했고 나한테 사인하라고 강요한 것도 너였잖아. 내가 언제 널 강제로 사인하게 한 적 있어?”고은서는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또 환생한 걸 깜빡했나 보네. 정신병원에 있었던 걸로 착각했나...’전생에서 곽승재의 변호사가 이혼 합의서를 가지고 와서 강압적으로 사인하라고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그때 고은서는 거절하며 곽승재에게 직접 만나서 물어보겠다고 했지만 변호사는 싸늘한 어조로 곽승재가 바빠서 만날 시간이 없다고 했다.또한 사인하지 않으면 소송으로도 빠르게 판결을 받아내겠다고 협박하기도 서슴지 않았다.고은서는 울며 변호사에게 곽승재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변호사는 그녀에게 짜증 내며 두 명의 간호사를 데리고 그녀를 강제로 사인하게 했다.“고은서, 방화 사건은 어떻게 된 거야? 나한테 진실을 밝히라고 했는데 무슨 진실을 얘기하는 거야?”곽승재가 물었다.고은서가 환각제를 먹었을 당시에도 곽승재를 보고 승재 오빠라고 부르며 사건의 진상을 밝혀달라고 했었다.어젯밤에도 마찬가지로 술에 취한 고은서는 억울하고 절망적인 어조로 방화 사건은 그녀가 한 일이 아니라고 믿어달라고 했다.처음에는 고은서가 환각 상태라서
“은서야, 물 좀 마실래?”곽승재의 손이 고은서의 이마에 닿았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곽승재가 이혼 합의서에 서명하라고 차갑게 말하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왜 갑자기 나한테 잘해주나 했어! 달콤한 말로 속여서 사인하게 만들려고 그러는 거야!’고은서는 곽승재의 손을 홱 밀쳐내며 몸을 뒤로 물렸다.“일부러 속여가며 잘해주는 척할 필요 없어! 난 사인하지 않을 거야! 이혼 안 해!”순간 멍해진 곽승재가 침대에 앉으며 물었다.“은서야, 우리 지금 이혼했어? 안 했어?”그 말을 듣자 고은서는 눈물을 흘리며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안 해! 나 이혼 안 해! 할머니 만날 거야! 할머니는 우리가 이혼하는 걸 허락하지 않을 거야! 날 강제로 사인하게 할 수는 없어!”곽승재는 눈앞의 고은서를 바라보았다.그녀의 얼굴은 술기운에 의해 붉어져 있었고 두 눈에는 긴장감과 혼란이 가득했다.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렀고 그녀는 두 손을 자신의 등 뒤로 감췄다.마치 그가 억지로 그녀의 손을 잡고 사인하게 할까 두려워하는 듯했다.그녀의 모습에 곽승재의 마음은 저도 모르게 아파졌다.“은서야...”“나가! 난 사인 안 할 거야! 그건 내가 한 게 아니야! 이혼 못 해!”곽승재가 뭐라 하기도 전에 고은서는 침대 끝으로 가 몸을 움츠리고 고개를 베개 아래에 숨기며 울부짖었다.곽승재는 급히 고은서를 품에 안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랬다.“흥분하지 마. 억지로 사인하라고 하지 않을게. 우리 이혼 안 해.”고은서는 곽승재의 품속에서 몸을 떨며 웅크렸다.그녀는 마치 자신만의 세계에 갇힌 듯 슬픔에 빠져 울었다.“승재 오빠, 그 방화 사건은 정말 내가 한 게 아니야. 제발 나 믿어줘...”고은서의 눈물이 곽승재의 팔에 닿자 그의 심장은 뜨겁게 달아오르며 아파졌다.곽승재는 그녀의 여린 몸을 꼭 안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울지 마. 너 믿어.”...고은서는 목이 말라 깼다.흐릿한 정신으로 물을 마시려 몸을 일으켰지만 욱신거리는 두통이 찾
고은서의 이상함을 눈치챈 곽승재가 그녀를 잡으며 물었다.“왜 그래?”고은서는 곽승재의 손을 뿌리치며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날 속인 거 아니야? 이 과일주 사실은 도수가 높은 거지?”곽승재는 차분히 답했다.“이거 파는 사장님이 도수가 높지 않아 마시기 좋다고 했어. 특히 여자들이 좋아한다고 해서 산 건데 못 믿겠으면 병에 적힌 도수를 확인해 봐.”고은서는 병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손이 빗나가 허공만 휘저었다.곽승재는 그녀를 놀리지 않고 빈 병을 하나 들어 올려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자, 봐봐. 10도에서 15도 사이야. 높은 도수는 아닌데 너무 빨리 마셔서 그런가보다.”음료수처럼 벌컥벌컥 마셨으니 어지럽지 않을 리가 없었다.고은서는 여전히 자신이 멀쩡하다고 느끼며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렸다.“얼른 방으로 돌아가. 난 씻고 자야겠어.”곽승재가 말했다.“너 취한 것 같아. 화장실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네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돌아갈게.”고은서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유심히 살폈다.담담한 표정과 침착한 말투를 한 곽승재는 그녀를 단순히 걱정하는 것 같았다.“괜찮아. 나 안 취했어. 아무 일도 없을 거야.”고은서가 단호히 말했다.“취하지 않았더라도 혼자 두면 안 돼. 호텔 3층에 피부과를 겸한 스파관이 있어. 여러 가지 서비스가 있던데 전신 스파도 받을 수 있대. 같이 가 줄까?”고은서는 최근 며칠간 피곤했던 터라 목욕도 하고 마사지를 받는 편이 방에서 곽승재와 함께 있는 것보다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결국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함께 3층으로 향했다.스파관은 남겨 구역이 나뉘어 있었다.고은서는 따뜻한 욕조에 편안히 몸을 담그고 미용사가 등을 마사지하는 것을 느꼈다.미용사의 숙련된 손길과 따뜻하고 향기로운 방 안에서 그녀는 점점 졸음에 빠져들었다.얼마나 지났을까 고은서는 누군가에게 들리는 느낌에 눈을 뜨려 했지만 어지럽고 무거운 머리로 인해 제대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들이 공손한 태도에서 여재훈의 지위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그들은 여시은이 수중에 든 물건들을 건네받으며 함께 밖으로 향했다.“곽 대표님, 우연이네요. 야식 사서 오시는 거예요?”여시은은 눈치 빠르게 곽승재를 발견하고 먼저 인사를 건넸다.곽승재는 차분히 물었다.“여시은 씨는 어디 가시는 길입니까?”여시은은 여재훈과의 통화를 간단히 설명했다.“곽 대표님. 오늘 정말 죄송합니다. 너무 많은 폐를 끼쳤네요. 그리고 조금 전에는 제가 조금 겁이 나서 은서 씨를 잡아 뒀는데 혹시 대표님 상처 회복에 영향을 드렸다면 다시 한번 사과드릴 수밖에 없겠네요.”여시은은 솔직하면서도 사랑스럽게 말했다.곽승재는 고은서를 한 번 바라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럼 먼저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여시은은 손을 흔들며 반짝이는 차 뒷좌석에 올라탔다.차가 떠나자 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여시은 씨 아버지는 높은 권력을 지니신 분인가요?”곽승재는 간결하게 답했다.“상당히 강한 실력을 갖춘 가문의 후계자야. 정치적 배경도 있긴 한데 더 깊게는 몰라. 나도 스쳐 가며 한번 만난 게 전부라서.”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어쩐지 전화로 여기 상황을 파악하고 바로 사람을 보내 여시은을 데려가더라니.’“아직 아프다더니 왜 나갔어?”고은서가 물었다.곽승재는 손에 든 여러 봉투를 살짝 흔들며 말했다.“간식 좀 사 왔어. 배고프지는 않아? 근처에서 꼬치랑 간식 좀 샀는데 같이 먹을래?”곽승재가 고은서를 초대했다.‘도도하기로는 남한테 뒤지지 않는 사람이 이렇게 서민적인 면모를 보인다고? 지난번에는 호텔 밖에서 아침을 사다 주더니 오늘은 야식이네.’고은서는 곽승재가 일부러 그러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이런 음식은 절대 손대지 않으면서 순전히 나를 유혹하려고 산 게 분명해.’저녁을 대충 때웠던 고은서였기에 고소한 냄새가 풍기자 그녀는 입에 군침이 돌았다.“샀으니 버릴 수는 없잖아.”그렇게 말하며 고은서는 봉투 하나를 받아 들고 즉시 옥수수를
고은서가 여시은을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러세요?”“두 분께 너무 큰 폐를 끼친 것 같아 정말 죄송하네요.”여시은이 미안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곽 대표님께서도 다쳤다고 들었는데 소파에서 주무시게 하는 건 도리가 아닌 것 같아요. 괜찮다면 저희 둘이 같은 방을 써도 될까요?”겁먹은 여시은의 모습과 품 안에 안긴 쿠아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고은서는 여시은과 그다지 친하지 않았기에 그녀가 불편할까 봐 방과 침대를 양보하려 했다. 게다가 곽승재가 먼저 소파에서 자겠다고 하니 여시은에게 방을 양보하려던 참인데 여시은만 괜찮다면 고은서는 곽승재와 한방에서 지내는 것보다 그녀와 함께 있는 게 더 나았다.곽승재에게 문자를 보낸 고은서가 여시은에게 말했다.“시은 씨, 얼른 씻고 푹 쉬어요.”여시은도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네. 쿠아를 좀 안아 주시겠어요? 많이 놀랐을 거예요.”쿠아를 받아 안아 든 고은서는 몸을 작게 웅크리고 두려워하는 쿠아를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고은서가 쿠아의 머리를 쓰다듬자 쿠아는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다.그때 곽승재에게서 답장이 왔다.[상처가 아프네.][흉터를 제거하기 위해 서운에 온 거 아니었어? 그럼 상처는 이미 나아서 실밥도 풀었어야 하는 거 아니야?]고은서는 일부러 사실을 들춰가며 답했다.곽승재는 한참 지나고도 답장이 다시 오지 않았다.고은서도 콧방귀를 뀌며 더 이상 묻지 않고 쿠아를 달래며 시간을 보냈다.담이 작고 체력이 좋지 않아 보여 물을 조금 주려고 할 때 책상에 놓인 여시은의 핸드폰이 울렸다.화면에는 아빠라고 표시되어 있었다.혹시 급한 일인가 싶어 고은서는 욕실 문을 두드렸다.“시은 씨, 전화 왔어요. 아버지신 것 같아요.”“죄송하지만 대신 받아서 이따 다시 전화하겠다고 해주실래요?”여시은이 답했다.고은서는 여시은의 말대로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이제야 전화를 받는 거야? 아직 서운에 있어?”고은서가 입을 열기도 전에 반대편에서 걱정스러운 목소
고은서도 쿠아를 구하고 싶었지만 생명이 더 소중하다는 걸 알기에 그녀는 여시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시은 씨, 먼저 나가요. 쿠아는 괜찮을 거예요!”“쿠아도 생명이 있는 아이예요! 제가 구해야 해요!”여시은이 고집을 부리며 쿠아 쪽으로 가려고 해서 그녀를 잡고 있던 고은서는 넘어질 뻔했다.다행히 곽승재가 빠르게 고은서를 붙잡아 세운 뒤 여시은까지 멈춰 세웠다.“소방대원들이 왔어요. 그들이 구해줄 거예요.”곽승재가 단호하게 말했다.고은서가 고개를 돌리며 막 도착한 소방대원들이 보였다.여시은도 그들을 발견하고 즉시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제 고양이가 안에 있어요. 꼭 먼저 구해주세요.”소방대원들이 약속하자 여시은은 고은서의 부축을 받으며 곽승재와 함께 안전 통로로 향했다.계단에는 이미 소식을 들은 여행객들로 가득 차 있어 매우 혼잡했다.조금만 실수하면 넘어질 위험도 있었고 밀려드는 사람들에 짓밟힐 위험도 있었다.고은서가 걱정된 곽승재는 그녀를 꼭 껴안으며 보호했다.그로 인해 고은서는 여시은을 돌볼 여력이 없었다.“저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여시은은 이 상황에서도 점점 침착해 보였다.그러나 목욕 가운을 입은 채 젖은 머리를 한 그녀는 비 맞은 강아지처럼 처량해 보였다.고은서는 그런 여시은이 신경 쓰였지만 곽승재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데리고 아래로 향했다.아래로 갈수록 사람들은 더 많아졌지만 곽승재의 보호 덕분에 고은서는 부딪히거나 다치지 않았다.호텔 밖으로 나오지 광장에는 많은 여행객들이 모여 있었고 소방대원들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사다리차도 준비해 두었다.“괜찮아?”곽승재가 물었다.고은서는 긴장감으로 물든 잘생긴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어깨 상처는 괜찮아?”‘조금 전까지 나를 보호하느라 끌어안고 사람들 틈에서 치였으니 부상이 심해졌을지도 몰라...’곽승재가 어깨를 살짝 움직이며 답했다.“큰 문제 없어. 나중에 병원 가서 한 번 볼게.”그들이 대화하는 동안 여시은도 소방대원의 보호 아
송민준은 문자로 이전에 부탁했던 백씨 가문 산업과 관련된 일을 처리했음을 알려왔다.비록 민시후에게서 사전에 소식을 전해 들었지만 고은서는 송민준의 문자를 받고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건넸다.[오히려 제가 감사하죠. 민아에게 듣기로는 친구가 되셨다면서요? 은서 씨 모습을 보고 정신 차렸는지 열심히 일하겠다고 하네요. 이전에 민아는 시후의 아내가 되어 현모양처가 되는 것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날도 오네요. 정말 놀라워요. 부모님께서도 아시면 기뻐하실 거예요. 은서 씨, 앞으로도 도움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네. 감사해요. 민준 씨.]고은서는 송민준과 예의상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다른 요청은 하지 않았다.송민준이 그녀를 도운 건 송민아의 가정부 진숙희 때문이긴 하지만 송민준 정도의 사람이라면 고은서와 백유미 사이의 갈등을 모를 리 없었다.처음 송민준을 끌어들일 때는 시험해 보려는 마음이었다.하지만 결과가 나왔으니 더 이상 그에게 다른 도움을 청할 생각은 없었다.원지훈의 전화를 받고, 송민준과 대화를 나누고 나니 고은서는 피곤함이 몰려왔다.그녀는 더 이상 곽승재의 인스타를 신경 쓸 힘도 없었다.침대에 누운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작스럽게 울리는 화재 경보음에 고은서는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복도에서도 분주한 발소리가 들려왔고 혼란스러운 분위기가 여실히 느껴졌다.하지만 해성 호텔에 있을 때 비슷한 상황을 겪었던 터라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확신하기 전에 함부로 나가기가 망설여 진 고은서였다.내선 전화를 들고 프런트에 문의하려던 찰나 문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곽승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은서야! 안에 있어? 빨리 문 열어!”동시에 고은서의 핸드폰 화면에 곽승재의 연락이 떠올랐다.“무슨 일이야?”고은서는 전화를 받으며 물었다.“화재 경보가 떴어. 빨리 나와!”고은서는 화재라는 말에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내선 전화를 내려놓고 문을 열었다.문을 열자 곽승재가 초조한 표정으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은서는 그가 건네주는 물을 받지 않았고 여행 체험에 당첨된 일도 묻지 않았다.그녀는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바꾸고 박지연에게 온승준에 관해 물었다.“온승준은 세미나로 간 후로 연락 있어?”“어제 전화 왔는데 바빠서 못 받았어.”박지연이 답했다.“그리고?”“없어. 이게 다야. 나도 다시 연락하지 않았고 온승준도 다시 연락 오지 않았고.”“결정은 내렸어?”박지연의 고은서의 물음에 한참 침묵하면서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이혼할 거야. 그런데 이혼하고 나면 남남이 된다고 생각할 때마다 아쉽긴 해. 하지만 더 잡고 있어 보았자 의미가 없잖아. 요즘 직장 일 때문에 바삐 보내다 보니까 결혼이 별거 아니라는 생각도 들곤 해. 이제부터 일에만 몰두하려고.”고은서는 박지연의 선택을 지지했다.전화를 끊고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가 여전히 물병을 들고 선 자리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날씨가 엄청 좋았는데 밝은 햇살이 나뭇잎 사이를 뚫고 곽승재를 비추면서 남다른 분위기를 조성했다.‘왜 갑자기 외로워 보이는 거지? 아니야,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고은서는 곽승재의 외모에 취해 쓸데없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고 자신에게 주의를 줬다.“난 힘들어서 먼저 호텔로 돌아가서 쉴게.”고은서는 말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관광버스를 타고 혼자 호텔로 돌아갔다.그녀는 폭신한 침대에 누워 자신의 인스타를 확인했는데 많은 사람이 좋아요를 눌러주었다.그 밑엔 민시후의 댓글도 달려있었다.[판다 하나 입양한 걸 가지고 입이 귀에 걸렸네. 돌아오면 네가 좋아하는 동물들을 모아서 내가 동물원 하나 차려줄게.][감사하지만 사양할게요. 해성에 동물원이 이미 충분하게 많아서요. 차라리 보너스 상금을 더 두툼하게 넣어주세요.]고은서는 민시후의 댓글을 답장해준 후 새로 고침 버튼을 눌렀다. 그러다 갑자기 그녀가 인스타를 올린 지 일 분도 안 됐을 때 곽승재가 그녀와 똑같은 인스타 내용을 업데이트해 올린 걸 발견했다.그의 사진은 한 장도 없었고 다 그녀의 단독
그러나 큰소리를 치던 고은서는 아무리 고민해 봐도 좋은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끝내는 자신의 마음이 가리키는 대로 진주라는 이름을 지어주기로 했다.“진주처럼 이쁘고 소중히 여기는 존재라는 뜻이에요. 비록 듣자마자 탄복할 만한 이름은 아니지만 기억하기 쉽잖아요. 게다가 진주라는 이름이 여자애한테 엄청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고은서가 진지하게 말했다.옆에 있던 곽승재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좋네. 그 이름으로 해.”“저도 우리 집 쿠아 이름처럼 엄청 좋은 것 같아요!”여시은도 맞장구를 쳤다.직원들은 당연하게도 별다른 의견이 없었다.이름을 확정한 후 직원은 고은서에게 기념증서를 증여하면서 그녀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을 알려주었다.그중에는 직접 사육사를 통해 아기 판다의 성장 근황을 알 수 있는 혜택과 수시로 현장에 보러 올 수 있는 혜택이 포함되어 있었다.고은서는 자신이 직접 이름을 지어준 판다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매우 좋았다.“은서 씨, 곽 대표님, 괜찮으면 카톡 아이디 알려주세요. 방금전에 찍은 사진이랑 동영상 보내드릴게요.”여시은이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그러나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는 고은서와 달리 곽승재는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저는 필요 없으니까 은서한테만 보내시면 돼요.”“그래요.”고은서의 카톡을 추가한 후 여시은은 가방에서 만년필을 꺼내 곽승재에게 건네주었다.“곽 대표님, 이거 돌려드릴게요. 기회가 없어서 계속 못 돌려줬어요. 그렇다고 저녁에 곽 대표님 방 문을 두드리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마침 생각났을 때 돌려드리려고요.”하지만 곽승재는 담담하게 거절했다.“그저 만년필뿐인데 굳이 돌려주지 않아도 돼요.”“혹시 쿠아가 물었다고 꺼리시는 건가요? 그럼 제가 새 만년필을 장만해서 회사로 보내드릴게요.”“괜찮습니다.”곽승재가 또 한 번 사양했다.이를 본 여시은도 더는 강요하지 않고 나긋하게 웃으면서 말했다.“나온 지 한참 되는데 쿠아가 절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서 먼저 돌아가 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