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서야, 물 좀 마실래?”곽승재의 손이 고은서의 이마에 닿았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곽승재가 이혼 합의서에 서명하라고 차갑게 말하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왜 갑자기 나한테 잘해주나 했어! 달콤한 말로 속여서 사인하게 만들려고 그러는 거야!’고은서는 곽승재의 손을 홱 밀쳐내며 몸을 뒤로 물렸다.“일부러 속여가며 잘해주는 척할 필요 없어! 난 사인하지 않을 거야! 이혼 안 해!”순간 멍해진 곽승재가 침대에 앉으며 물었다.“은서야, 우리 지금 이혼했어? 안 했어?”그 말을 듣자 고은서는 눈물을 흘리며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안 해! 나 이혼 안 해! 할머니 만날 거야! 할머니는 우리가 이혼하는 걸 허락하지 않을 거야! 날 강제로 사인하게 할 수는 없어!”곽승재는 눈앞의 고은서를 바라보았다.그녀의 얼굴은 술기운에 의해 붉어져 있었고 두 눈에는 긴장감과 혼란이 가득했다.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렀고 그녀는 두 손을 자신의 등 뒤로 감췄다.마치 그가 억지로 그녀의 손을 잡고 사인하게 할까 두려워하는 듯했다.그녀의 모습에 곽승재의 마음은 저도 모르게 아파졌다.“은서야...”“나가! 난 사인 안 할 거야! 그건 내가 한 게 아니야! 이혼 못 해!”곽승재가 뭐라 하기도 전에 고은서는 침대 끝으로 가 몸을 움츠리고 고개를 베개 아래에 숨기며 울부짖었다.곽승재는 급히 고은서를 품에 안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랬다.“흥분하지 마. 억지로 사인하라고 하지 않을게. 우리 이혼 안 해.”고은서는 곽승재의 품속에서 몸을 떨며 웅크렸다.그녀는 마치 자신만의 세계에 갇힌 듯 슬픔에 빠져 울었다.“승재 오빠, 그 방화 사건은 정말 내가 한 게 아니야. 제발 나 믿어줘...”고은서의 눈물이 곽승재의 팔에 닿자 그의 심장은 뜨겁게 달아오르며 아파졌다.곽승재는 그녀의 여린 몸을 꼭 안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울지 마. 너 믿어.”...고은서는 목이 말라 깼다.흐릿한 정신으로 물을 마시려 몸을 일으켰지만 욱신거리는 두통이 찾
고은서의 질문에 곽승재는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며 말했다.“취해서 계속 나한테 승재 오빠라고 부르면서 가지 못하게 했어.”고은서는 그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렸다.피곤했던 그녀는 어젯밤 마사지를 받으며 깊이 잠 들었고 그 이후 어떻게 방에 돌아왔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난 취했으니까 네 말이 맞는 걸로 할게.”고은서가 콧방귀를 뀌며 말을 이었다.“곽승재, 일부러 과일주 사서 마시게 하고 스파까지 데려간 거지? 그렇게 해서 내가 방심한 틈을 타서 뭐라도 하려고 한 거야?”곽승재는 화도 내지 않고 차분히 답했다.“너한테 무슨 짓 하려는 생각은 없었어. 너는 어젯밤 날 못 가게 했을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이혼은 안 된다고 하면서 강제로 사인시킬 수는 없다고 하더라. 고은서, 이혼은 분명히 네가 먼저 얘기했고 나한테 사인하라고 강요한 것도 너였잖아. 내가 언제 널 강제로 사인하게 한 적 있어?”고은서는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또 환생한 걸 깜빡했나 보네. 정신병원에 있었던 걸로 착각했나...’전생에서 곽승재의 변호사가 이혼 합의서를 가지고 와서 강압적으로 사인하라고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그때 고은서는 거절하며 곽승재에게 직접 만나서 물어보겠다고 했지만 변호사는 싸늘한 어조로 곽승재가 바빠서 만날 시간이 없다고 했다.또한 사인하지 않으면 소송으로도 빠르게 판결을 받아내겠다고 협박하기도 서슴지 않았다.고은서는 울며 변호사에게 곽승재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변호사는 그녀에게 짜증 내며 두 명의 간호사를 데리고 그녀를 강제로 사인하게 했다.“고은서, 방화 사건은 어떻게 된 거야? 나한테 진실을 밝히라고 했는데 무슨 진실을 얘기하는 거야?”곽승재가 물었다.고은서가 환각제를 먹었을 당시에도 곽승재를 보고 승재 오빠라고 부르며 사건의 진상을 밝혀달라고 했었다.어젯밤에도 마찬가지로 술에 취한 고은서는 억울하고 절망적인 어조로 방화 사건은 그녀가 한 일이 아니라고 믿어달라고 했다.처음에는 고은서가 환각 상태라서
“너와 단둘이 해외로 가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노력해 보겠다고 할머니한테 부탁했어. 하지만 해외로 가기 전날 백유미 집에 누군가가 들어와 집을 털고 방화까지 했다고 했어. 범인이 잡히자 그 사람은 내가 시킨 거라고 했어. 너는 내 말을 믿지 않았고 나를 정신병원에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가둬놨어. 심지어 너는 백유미랑 결혼하려고 변호사를 보내 이혼 계약서에 사인하라고 강요했잖아!”고은서가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나는 정신병원에서 인간답지 못한 삶을 살았어.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해서 위암까지 걸렸어. 나는 내가 오래 살지 못할 걸 알았기에 외할아버지에게 마지막 인사라도 드리려고 했어. 할머니가 준 팔찌를 팔아서라도 너와 한 번만이라도 만나려고 했지만 내가 아무리 부탁하고 빌어도 너는 나를 내보내 주지 않았어. 내가 너와 백유미의 결혼을 방해할까 봐 두려워서.”곽승재가 정신병원에서 보였던 냉담한 표정과 그녀가 빨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듯한 싸늘한 시선이 떠오르자 고은서는 목이 막힌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환생한 지 몇 달 지났고 곽승재가 이전보다 그녀에게 잘해주고는 있지만 그 기억은 여전히 고은서를 분노와 절망으로 몰아넣었다.곽승재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췄다.그는 여러 가능성을 떠올렸었지만 고은서가 꿈 때문에 한순간에 태도를 바꿀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곽승재, 비록 꿈에 불과하지만 내가 예전처럼 너에게 매달리면 꿈에서처럼 일이 진행되지 않았을까?”곽승재의 생각을 읽은 고은서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너는 나를 한 번이라도 믿어본 적 있어? 전에 GS 그룹 프런트에 있는 직원이 나를 모함해도 너는 나를 믿지 않았는데 죽마고우 백유미의 말은 어떻겠어.”곽승재는 반박하려고 했지만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걸 깨닫고 이내 고개를 저었다.예전의 고은서는 그의 마음속에서 고집스럽고 성격이 궂은 사람으로만 여겨졌기 때문이다.고은서와 얽힌 일이 생기면 그는 저도 모르게 고은서가 문제를 일으켰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난 한 번도
곽승재는 기념일을 함께 보내지 않아서 화가 나서 뛰어내렸다고만 생각하며 이혼을 요구한다고 생각했다.그는 고은서가 방법을 바꿔서 매달린다고 여기고 결국은 후회할 거라고 믿고 있었다.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고은서의 결심은 더 확고해졌고 고은서는 여러 이유를 들었지만 곽승재는 여전히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고은서가 꿈에 관해 얘기하자 곽승재는 고은서가 꿈속에서 겪은 비참함을 떠올리며 마음이 아파졌다....고은서가 세안 후 방을 나왔을 때 곽승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고은서는 그가 어디 갔는지 신경 쓰지 않고 짐을 정리한 후 기지를 들러 귀여운 아기판다들을 보고 오후 비행기를 타고 해성으로 돌아갔다.이륙 전 고은서는 늦게 온 곽승재를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곽승재는 그녀 옆에 앉아 작은 보석함을 건넸다.“은서야, 선물이야.”보석함을 열어보니 안에는 판다 모양의 금팔찌가 들어있었다. 팔찌 참들은 하나같이귀여운 판다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정교하고 특별했다.곽승재가 아침 내내 보이지 않았던 이유가 이 팔찌를 제작하느라 그랬다는 것을 고은서는 바로 눈치챘다.“이전에는 제대로 선물 준 적이 없잖아. 네가 판다를 좋아한다고 해서 특별히 주문 제작한 거야.”곽승재는 아침에 아무런 대화를 한 적도 없다는 듯이 차분히 말을 이었다.“금은 재물을 불러들인다고 해. 네가 좋아하는 판다와 함께 착용하면 일석이조라고 하더라.”다른 보석이라면 거절했겠지만 판다 모양의 팔찌는 처음 본 것이기도 했고 아래 이니셜이 각인되어 있어 고은서는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얼마야? 이체해 줄게.”고은서가 말했다.“은서야, 이건 선물이야. 날 너무 밀어내지 마.”고은서는 팔찌를 꺼내며 말을 이었다.“그럼 네가 재혼할 때 축의금 많이 내줄게.”“다른 사람이랑 결혼할 생각 없어.”고은서가 팔찌를 착용하려고 하자 곽승재가 나섰다.“내가 도와줄게.”“괜찮아.”고은서가 곽승재의 손을 피하며 팔찌를 착용했다.“그러면 이 팔찌는 내 재혼 선물을 미리 받은 걸로 할
고은서는 곽승재의 모습을 보고 화내지 않고 말했다“결혼 선물은 미리 고마워.”말을 마친 고은서는 팔찌를 잠시 감상하다가 핸드폰을 들고 앨범을 정리했다.두 시간 정도 지나자 비행기는 해성에 도착했다.고은서가 착륙하자 민시후에게서 연락이 와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곽승재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그를 알아본 사람에게 잡혀 한참 인사를 나눴다.고은서는 그 틈에 먼저 밖으로 향했다.주차장에 다다르자 민시후는 정말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여느 때처럼 눈에 띄는 스포츠카를 몰고 하얀색 바지를 입은 채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있었다.차 옆에 기대 서 있는 민시후는 자유분방하면서도 멋진 모습이었다.“은서야, 여기!”그녀를 보자 민시후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손짓했고 그녀 쪽으로 걸어왔다.고은서는 민시후 쪽으로 가려고 했으나 갑자기 큰 손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뒤돌아보니 어느새 따라 나온 곽승재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왜 나 안 기다렸어? 운전기사가 우리 기다리고 있어. 내 차 타.”고은서가 답하기도 전에 민시후가 이미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곽 대표, 자꾸 나랑 은서가 같이 있는 걸 방해하는데 내가 매번 참을 거로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곽승재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고은서는 공항 라운지에서의 상황이 재현되는 것을 원치 않아 곽승재의 손을 뿌리치고 민시후의 소매를 잡아끌며 말했다.“가자.”“은서를 봐서라도 오늘은 그냥 넘어간다.”민시후는 곽승재를 향해 냉소적으로 말했다.차에 올라탄 고은서는 안전벨트를 매고 민시후에게 빨리 가자고 재촉했다. 그녀는 더 이상 주목받고 싶지 않았다.민시후도 망설이지 않고 엑셀을 밟았다.“곽 대표, 먼저 갈게.”곽승재 옆을 지나갈 때 민시후는 일부러 그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곽승재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이를 본 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민시후를 째려보며 말했다.“민 도련님. 제발 유치하게 굴지 않으면 안 돼?”민시후가 콧방귀를 뀌며 답했다.“곽승재가 나를 집으로 쫓아낸
고은서는 단호히 거절했다.민시후도 굳이 고집하지 않고 말했다.“그러면 내일 시간 내서 우리 형 좀 만나줘.”고은서는 어리둥절했다.“내가 왜 너희 형을 만나야 해? 만나서 뭐 하게.”고은서가 놀라서 물었지만 민시후는 느긋하게 답했다.“어떤 여자가 내 마음을 훔쳤는지 궁금해서 직접 만나보고 싶다는 거겠지.”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민시후, 너희 형을 만나는 건 절대 안 돼. 네가 적당한 이유 만들어서 거절해.”고은서가 단호히 말했다.“내가 왜 널 도와야 하지?”고은서는 할 말을 잃었다.“이게 날 돕는 거야? 우리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없다는 거 네가 제일 잘 알잖아. 그런데 왜 해명 한마디도 안 하고 직접 거절하지도 않아?”민시후가 귀를 파며 답했다.“우리 스캔들이 퍼지지 않은 건 우리 형 덕분이기도 하거든. 내가 해명하면 믿을 것 같아?”고은서는 기가 막혔다.“그건 네가 자초한 일이잖아. 굳이 내 방에서 두 시간씩이나 붙어 있었으니 말이야. 민씨 가문 체면이 문제가 아니라 너는 내 체면을 깍고 싶은 거겠지!”“나도 민씨 가문 체면을 좀 깎아내리고 싶은데 그 집 사람들이 원치 않으니 어쩔 수 없잖아.”민시후가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게다가 내가 그러지 않았으면 네가 무사히 곽승재랑 이혼할 수 있었겠어? 됐어. 이번엔 내가 한 번 도와줄게. 혼자 형 만나러 가면 되지 뭐. 대신 조건이 있어. 내가 너랑 사촌 동생 집까지 바래다줄게.”고은서는 의심스러운 눈길로 민시후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날 데려다주겠다는 거야? 또 무슨 속셈이 있는 거 아니야?”빨간불 때문에 앞 차가 멈춰서자 민시후도 브레이크를 밟으며 장난스럽게 고은서를 보며 말했다.“그냥 너희 집사람들이 네 옆에 나 같은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하고 싶어서.”“알면 뭐가 달라지기라도 해?”고은서가 물었다.앞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민시후는 고개를 돌리며 답했다.“고은서, 네 EQ는 외모에 몰빵된 거야? 가족들이 알게 되면 그때 가서 다
“정말 단순한 회사 대표야? 내 눈에는 왜 언니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고은혜가 바로 물었다.“아니야. 원래 장난기 많은 성격이라서 그래.”고은서가 답했다.고은혜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말도 안 돼. 언니를 바라보는 눈빛이 유성준이 언니를 바라보는 눈빛이랑 비슷해. 좋아하는 게 틀림없어.”반박하려던 고은서의 귓가에 단은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은서야, 은혜야. 어떻게 같이 왔어?”고개를 돌려 보니 장을 보고 온 단은숙과 가정부가 보였다.고은서와 고은혜는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는데 둘이 같이 고국성이 집에 온 건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은혜한테 연락했더니 집에 간다길래 마침 외숙모 요리가 먹고 싶어서 같이 왔어요.”고은서가 먼저 답했다.단은숙도 완전히 믿지는 않았지만 따질 기력도 없는지 다른 질문을 했다.“조금 전 스포츠카를 탄 남자는 누구야? 왜 그 차를 타고 온 거야?”‘외숙모도 민시후를 본 건가?’“제가 다니는 회사 대표예요.”“결혼은 안 했지?”단은숙이 묻자 고은혜가 끼어들며 답했다.“당연히 안 했죠. 고은서 좋아하는 것 같던데요?”고은서는 고은혜를 쏘아보며 말했다.“세상만사 다 아는 척하지.”“사실을 얘기하는 건데 뭐. 아까 얘기한 거 못 들었어? 네가 가족들에게 소개할 준비가 됐을 때 다시 오겠다고 했잖아.”고은혜가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보기에 집안도 괜찮은 것 같던데. 이혼도 했으니 너무 까다롭게 굴지 말고 적당한 사람 만나는 게 낫지 않겠니?”단은숙이 말했다.단은숙과 계속 화제를 이어 나가고 싶지 않았던 고은서가 말을 돌렸다.“왜 혼자 계세요? 삼촌은요?”단은숙은 고은서가 화제를 돌리는 걸 눈치채고는 약간 불쾌해하며 답했다.“성준이랑 일 보러 갔어. 곧 집으로 와서 밥 먹을 거야.”고은혜가 단은숙의 불편한 심기를 눈치채고는 급히 말했다.“와, 엄마! 맛있는 거 이렇게 많이 사셨어요? 저 오늘 많이 먹을 거예요.”“빨리 올라가자. 아주머니 기다리게 하지 말고.”단은숙도 더 이상 말을
고은서가 고국성과 유성준에게 인사를 건넸다.고국성은 여전히 그녀와 곽승재의 이혼 문제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는지 건성으로 인사를 받을 뿐이었다.반면 유성준은 그녀를 보자 반갑게 웃으며 말했다.“은서야, 서운에서 돌아온 거야?”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조금 전에 왔어요.”“인스타에 올린 사진은 봤어. 판다 기지에서 즐겁게 지낸 것 같더라.”유성준이 묻자 고은서가 웃으며 답했다.“맞아요. 아기 판다들 정말 귀엽더라고요.”유성준도 웃으며 말했다.“그럴 줄 알았으면 나도 이틀쯤 시간 내서 같이 갔을 텐데.”“다음에요! 다음에 또 가면 제가 안내해 줄 게요.”“좋아.”두 사람이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고국성은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고은혜는 몰래 두 사람 사진을 찍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조금 후 고국성이 다시 거실로 나오자 유성준은 맞춤형 향수 프로젝트 얘기를 꺼내며 고은서에게 도움을 청했다.고국성은 이를 듣고 고은서에 대한 불만이 다소 누그러졌는지 앉아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반 시간 후 단은숙은 주방을 가정부에게 맡기고 과일을 들고 와 테이블에 올려놨다.그리고 고은혜를 베란다로 불러냈다.“고은혜. 대원에서 왜 그렇게 오래 머물다 이제야 돌아온 거야?”고은혜는 핸드폰을 보며 건성으로 답했다.“말했잖아요. 몇몇 디자이너들과 교류하려고 좀 더 머물렀어요.”“곽승재랑 자주 연락해서 관계를 돈독히 하라고 했지? 그건 어떻게 됐니?”“바빴어요. 언제 그럴 시간이 있었겠어요.”“대화할 때 핸드폰은 좀 치워!”단은숙이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아무리 바빠도 결혼보다 바쁠 수 있겠니? 여자가 가장 예쁜 시기는 몇 년뿐이야. 그때 좋은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나중에 다른 사람이 널 선택해 주기를 기다려야 할 거 아니야.”단은숙의 말을 들은 고은혜도 기분 상한 듯한 말투로 답했다.“엄마. 제발 저를 어떤 가문에 시집보낼지만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 집안도 그렇게 나쁜 조건은 아니잖아요.
민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자기 자신에게 화가 난 건지 아니면 아버지에게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려고 했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는 해외에서 혼자 지내며 꽤 많은 기술을 익혔다고 말했다.고은서는 민시후를 다시 보게 되었다.비록 지난 생에서 앞으로 그가 이루어낼 성과가 작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평소 그의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정말 믿음이 가지 않았다.미래를 알고 있는 게 아니라면 고은서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를 그냥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쯤으로 여겼을 것이다.“고은서, 나는 단 한 번도 내 약점을 다른 사람에게 얘기한 적이 없어. 이제 알게 되었으니 날 책임 져야 해.”민시후는 진지하면서도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고은서는 그에게 눈을 흘기며 답했다.“져야 할 책임이 너무 커서 감당 안 되겠는데?”“그럼 내가 너 책임질까?”민시후의 눈빛에는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고은서는 민시후가 자신을 어머니의 묘비 앞에 데려간 이유를 알았다.그는 자신의 과거를 공유하며 자신에게 진지함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고은서는 그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구애받았지만 그녀는 곽승재에게만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그녀는 최선을 다해 곽승재의 마음을 돌리려 했지만 자신도 사랑받을 자격이 넘치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잊고 살았었다.잠시 생각하던 고은서가 민시후에게 말했다.“다음 주 우리 삼촌 생일인데 부상이 다 나으면 나랑 같이 갈래?”그 말에 민시후는 얼굴이 밝아지며 말했다.“지금이라도 갈 수 있어. 믿지 못하겠으면 두 바퀴 뛰어서 보여줄까?”말을 마친 민시후가 날뛰려 했지만 고은서가 얼른 제지했다.“됐어. 얼른 앉아.”고은서는 어이가 없었다.“민시후, 여기서 몇 바퀴 돌다가는 구급차 불러야 할 거야.”민시후는 고은서의 핀잔을 들으면서도 기분이 좋았다.“그래. 알았어. 얌전히 앉아 있을게.”병동으로 돌아와 엘리베이터에 오른 고은서는 핸드폰을 차에 두고 왔다는 걸 깨달았다.그녀는 민시후에게 먼저 올라가라고 하고
다급한 민시후의 모습에 고은서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농담이야.”그 말을 들은 민시후의 잘생긴 얼굴에 매혹적인 미소가 떠올랐다.“고은서, 너는 진짜 예쁘면서 마음도 착해.”“야... 그러지 마.”고은서가 팔을 문지르며 말했다.“민 도련님, 정상적으로 돌아올 순 없을까? 그렇게 웃지도 말고 닭살 돋는 말 하지도 마. 아니면 뭔가 나쁜 의도가 있는 것 같잖아.”민시후는 말문이 막혔다.‘역시 장난은 그만 쳐야겠어. 전에 방탕하게 행동했더니 이제 이미지 회복은 글렀네.’고은서는 민시후가 자신을 재밌는 곳이나 특별히 경치가 좋은 곳에 데려갈 것으로 생각했다.그런데 민시후는 그녀를 묘지로 데려왔다.고은서는 민시후의 지시에 따라 한 묘비 앞에 섰다.묘비 사진에는 온화하고 단정한 표정의 중년 여성이 웃고 있었다.“우리 어머니야.”민시후가 말을 이었다.“여긴 외가 쪽 집안 묘지야. 비록 어머니가 북성으로 시집갔지만 외로울까 봐 여기에서 묘비를 세웠어.”고은서는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지켜봤다.평소 민시후는 세상만사에 무심한 듯한 태도를 보였지만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드물게 부드럽고 슬픈 표정을 지었다.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그의 심정이 여실히 느껴졌다.민시후는 휠체어에서 내려 준비한 꽃을 조심스럽게 묘비 앞에 놓고 묘비 위로 떨어진 나뭇잎을 정성껏 정리했다.“왜 곽승재를 그렇게 미워하냐고 물었었지?”고은서는 그 이유가 궁금해서 여러 번 물었었지만 지난번 서운에서 조금 얘기해줬을 뿐 전부는 얘기해 주지 않았다.묘비 앞에 앉아 어머니의 사진을 바라보는 민시후의 표정을 보며 고은서는 조심스레 짐작했다.“설마 경찰서에 끌려갔던 그날 밤 어머니께서 사고를 당하신 거야?”민시후의 눈에 슬픈 감정이 서렸다.그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그날 밤 내 소식을 들은 어머니께서 급하게 해성으로 오시다가 심각한 교통사고를 당했어. 이튿날 북성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나셨어. 난 어머니 마지막 모습도 보지 못
곽승재는 사복을 입고 있었는데 단순히 바람 쐬러 나온 건지 아니면 볼일이 있어 나가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고은서가 민시후를 휠체어에 태운 모습을 보고 곽승재는 평소처럼 냉담하고 무표정한 눈빛을 보였지만 그 안에는 아픔도 서려 있었다.“아이고, 곽 대표. 여기서 입원 중이었어? 우연이네.”민시후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곽승재는 그에게 답하지 않고 고은서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눈빛을 보였다.고은서가 물었다.“할 말이라도 있어?”곽승재는 입술을 짓씹으며 답했다.“몇 분이면 되는데 병실에서 얘기할 수 있을까?”고은서는 차분하게 답했다.“여기서 얘기해.”곽승재는 민시후를 한번 보고 다시 고은서를 보며 말했다.“사적인 일이라서 다른 사람이 듣는 건 곤란해.”“그럼 미안하지만 시간이 안 되겠네. 저녁에 시간 되면 다시 얘기해.”고은서가 그렇게 말하자 곽승재의 가슴 속에서 무거운 통증이 밀려왔다.이제 고은서는 몇 분이라도 자신에게 할애하지 않으려는 듯했다.“지나가게 좀 비켜줄래?”고은서가 곽승재에게 길을 비키라고 재촉했다.곽승재는 고은서가 나중에 시간을 낸다는 말을 핑계로 그저 대화를 피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 결국 입을 열었다.“어제 승연이가 네가 준 캔들을 사용했더니 밤새 잠을 설치지 않고 잤다고 어머니가 말씀하시더라. 승연이가 그림 한 장 그렸는데 너한테 주고 싶대.”고은서는 약간 놀랐다.‘승연이랑은 한번 마주친 게 다인데? 날 쳐다보지도 않았으면서 나한테 그림을 선물로 준다고?’“외할아버지 댁에 아직 오일이 조금 남아 있어. 만약 승연이가 필요하면 사람을 보내 가져다줄게.”고은서가 여전히 자신과 관련된 사람들을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에 곽승재는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 풀렸다.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은서야, 어머니가 직접 승연이 그림을 너한테 전달하고 싶대. 언제 시간 되는지 알려주면 내가 장소를 정해서 알려줄게.”고은서가 차분한 표정으로 답했다.“그럴 필요 없어. 나도 어머니 연락처 있으니 나중
고은서가 민시후의 병실에 도착했을 때 민시후는 통화를 하고 있었다.그녀가 들어서려 하자 민시후는 전화를 끊고 백유미에게 정신 진단서를 발급한 병원에 관해 이야기하며 그 병원은 곽현수가 개인적으로 지분을 했다는 사실을 전했다.“관련 증거는 경찰서에 보내놨고 백유미가 돌아오면 재검사 신청할 거야. 원지훈의 사망 원인은 T 국 쪽 부검 보고서에서 군도로 목을 그었다고 나와.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 건지 실수로 찔린 건지는 알 수 없어. 상식적으로 백유미가 그 상태에서 성인 남성을 죽일 힘이 남아있을 리는 없지만 사람이 위급한 상황에서 초인적인 힘이 나타날 수도 있지. 하지만 이 부분은 증거로 삼을 수 없어. 폐기된 창고에는 CCTV가 없고 모든 사람의 시선이 너에게 향해 있었으니 그 누구도 안쪽 상황은 신경 쓰지 않았어. 새로운 증거가 없으면 사건 재조사는 힘들 거야.”민시후의 설명을 듣자 고은서는 마음이 따뜻해졌다.민시후는 대충 넘기지 않고 진지하게 T 국 사건을 조사하고 있었다.“고마워.”고은서는 진심으로 말했다.민시후는 고은서의 감사한 마음을 알아채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정말 고마우면 행동으로 표현해 줘.”고은서는 경계하며 한 발짝 물러섰다.“뭐 하려는 거야?”그 모습을 본 민시후가 불쾌하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고은서, 지금 누구랑 벽을 세우는 거야? 밥 챙겨왔다며? 어디 있어? 배고파 죽겠어!”고은서는 그제야 도시락을 열어 보여줬다.“특별히 찾아온 맛집이야. 얼른 드세요, 민 도련님.”민시후는 젓가락으로 몇 입 맛보고선 불만을 표했다.“특색이 하나도 안 살았잖아. 다음엔 내가 직접 요리해서 진짜 맛있는 음식이 뭔지 보여줄게.”고은서가 놀라며 물었다.“요리할 줄 알아?”민시후가 고은서를 쳐다보며 말했다.“그게 무슨 반응이야? 내가 요리할 줄 아는 게 이상해?”‘이상하고말고. 부잣집 도련님이 의식주에 대해 까다롭게 굴면서 사람들이 신경 써주는 생활이 익숙할 텐데 왜 스스로 요리를 배운 거지?’“혹시 어떤 여자
고은서가 여시은의 제안을 완곡히 거절하며 미소를 지었다.“시은 씨 혼자서도 충분할 것 같네요.”여시은은 다소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하지만 곽 대표님은 저보다 은서 씨를 더 보고 싶어 할 걸요? 같이 가면 제가 좀 더 편할 것 같은데 어때요?”여시은은 고은서의 팔을 붙잡고 병실로 이끌었다.여시은의 비서는 문을 두드리고 병실 문을 열었다.고은서는 여시은과 함께 예기치 않게 곽승재의 병실에 들어섰다.곽승재는 VIP 스위트룸에 입원해 있었는데 거실과 오픈형 주방 작은 재활실이 있었으며 병상도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곽승재는 소파에 앉아 주민기에게 업무 보고를 듣고 있었다.소리를 들은 곽승재가 고개를 들어 고은서를 바라보고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고은서의 방문이 믿기지 않는 듯했다.“사모님, 시은 씨.”주민기는 예의 있게 인사를 건네고 한쪽으로 물러났다.고은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여시은은 상냥하게 말했다.“주 비서님께서도 계셨네요.”여시은은 곧장 곽승재에게 말을 건넸다.“곽 대표님, 다치셨다는 말을 듣고 아버지 대신 제가 왔어요. 마침 은서 씨를 마주쳐서 같이 왔지 뭐예요?”여시은의 목소리는 달콤하고 귀여웠다.“곽 대표님, 너무 감사하죠?”곽승재는 그녀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예의를 갖춰 말했다.“감사합니다. 여시은 씨. 아저씨한테도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그럼요.”여시은은 눈빛으로 비서에게 과일 바구니를 내려놓으라고 지시했다.“뭘 준비해야 할지 몰라서 과일 좀 준비했어요. 성의 없어 보인다고 하진 말아주세요.”곽승재는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전했지만 눈길은 여전히 고은서에게 가 있었다. 그는 그녀의 수중에 들린 도시락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고은서도 곽승재의 시선을 느꼈지만 그에게 말하는 대신 여시은에게 말을 건넸다.“시은 씨. 얘기 나눠요. 저는 다른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그녀를 보내고 싶지 않았떤 여시은이 작은 목소리로 고은서에게 부탁했다.“은서 씨, 저도 대표님이랑 친하지
이메일 알림 소리가 울리자 온승준이 압축 파일을 열고 비디오를 재생했다.어머니의 말은 더 이상 그의 마음을 흔들지 않았지만 박지연이 독신으로 살아도 다시는 그와 결혼하지 않겠다는 말은 온승준의 마음을 깊게 찔렀다.그는 잠시 멍하니 화면을 응시하며 감정을 추스르려 했다....고은서는 조수연이 온 일로 인해 벌어진 소동을 들었다.고은서는 화내며 말했다.“도대체 무슨 낯으로 와서 너한테 난리 치는지 모르겠네? 다음에는 그냥 신고해 버려.”박지연은 이미 화가 가라앉은 상태에서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응. 다음엔 바로 신고할게.”고은서는 박지연을 몇 번 쳐다보며 물었다.“너 진짜 괜찮은 거 맞아?”박지연은 고은서를 향해 눈을 흘기며 대답했다.“지금 나 얕보는 거야? 그런 사람 주위에 많아. 더 심한 사람도 그냥 그러려니 하며 지내고 있다고. 전에는 시어머니니까, 중간에 낀 온승준을 난처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좀 존중하려고 했지. 하지만 이제 상관없어. 욕하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지.”고은서는 박지연의 태도에 웃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좋네. 제대로 정신 차린 거 맞네. 응원해.”박지연은 그 칭찬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은서는 박지연에게 점점 더 감탄했다. 이혼 이후 박지연은 한 번도 온승준이나 그와 관련된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이혼한 날 밤 잠시 울고 소리 지른 후 그 일에 대해 한 번도 걱정하거나 마음 쓰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박지연의 말에 따르면 전에 발생한 일은 모두 허상으로 그 누구도 허상을 위해 슬퍼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그날 밤, 박지연은 온승준에게서 온 사과 문자를 받았다.[어머니 대신 사과할게. 앞으로는 다시 너를 찾는 일은 없을 거야.]박지연은 문자를 확인하고는 답하지 않고 핸드폰을 거뒀다.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었다.고은서는 먼저 ZY 그룹에 들러 송민아와 몇 가지 업무를 마친 뒤 민시후가 배가 고프다고 해서 병원으로 향했다.병실로 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고은서는 우연히 여시은을 마주쳤다.여시은은 비서
온승준이 급히 자신의 어머니를 막아섰다.“뭐 하시려는 거예요?”조수연이 분노하며 말했다.“쟤 상사한테 가서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욕보일 수 있냐고 따지려고.”“어머니, 제발 이러지 마세요!”온승준이 목소리를 높이자 조수연은 더 화를 내며 말했다.“승준아, 엄마한테 무슨 말투야? 박지연 때문에 나랑 또 싸우려고? 너 그 여자가 우리를 어떻게 협박했는지 잊은 거야? 박지연이 우리를 얼마나 하찮게 얘기했는지 기억 안 나? 굳이 이혼하겠다고 난리 쳐서 이혼했으면서 왜 또 뒤꽁무니 쫓아온 거야!”온승준이 짜증 내며 말했다.“지연이도 틀린 말 한 거 아니잖아요. 우리도 지연이에게 잘해준 거 없어요.”“지금 그 여자 편을 드는 거야?”조수연은 분노로 몸을 떨며 말을 이었다.“우리가 뭘 못해 줬는데? 네 아내로서 널 돌보고 시부모 돌보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다른 사람들이 다 하는 일을 왜 못 하겠다는 건데? 게다가 그런 학력과 직업으로 우리 집에 시집온 걸 감사해야지!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성격은 왜 그 모양이야? 몇 마디 했다고 바로 말대꾸하고. 미리 얘기하는데 나랑 네 아버지는 박지연이 다시 우리 집안에 들어오는 거 절대로 반대다.”온승준이 싸늘한 말투도 답했다.“지연이도 우리 집에 들어오고 싶지 않아 해요. 이제는 저랑 말도 잘 안 한다고요.”“마침 잘됐네. 이제 박지연한테 그만 굽신거리고 얼른 이전에 있던 병원으로 돌아가. 혜린이도 싫으면 엄마가 성격 좋고 집안 좋은 여자들 소개해 줄게.”“어머니!”온승준이 조수연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다른 여자는 싫어요. 직장도 그만두지 않겠어요. 어머니가 정말 저를 위한다면 아버지랑 같이 와서 지연이한테 사과해 주세요.”“우리가 사과하라고?”조수연은 그 말을 듣고 헛웃음이 나왔다.“그 여자가 무슨 자격으로 우리 사과를 받아!”온승준은 더 이상 조수연과 대화를 이어 나가고 싶지 않았다.그는 곧바로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박지연은 간호사실에서 동료들에게 일을 맡기고 옷을 갈아입은
박지연도 온승준을 발견하고는 고은서에게 말했다.“병실로 들어가서 얘기하자.”“그래.”그때 온승준이 박지연을 불렀다.“지연아.”“두 사람이 얘기해. 난 먼저 들어갈게.”“은서 씨.”온승준이 고은서를 부르자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평소 불필요한 교류는 하지 않는 온승준이 이렇게 먼저 나한테 말을 건넨다고?’“지연이 동료들에게서 들었는데 은서 씨 친구가 다쳤다면서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온승준이 고은서를 향해 말했다.고은서는 여전히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예의상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고은서는 민시후의 방으로 향했고 박지연은 온승준을 차분히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일이야?”“심장외과 쪽에서 환자를 보고 있었는데 네가 여기 있다고 해서 잠깐 들러봤어.”온승준은 박지연이 기분 나빠 할까 봐 해명했다.“그럴 필요 없는데. 온 선생님 업무도 바쁜 데 여기서 시간 낭비하지 마.”온승준은 말문이 막혔지만 다시 한번 물었다.“그동안 병원에 없던데 괜찮아?”“무슨 일 있었으면 출근도 못 했겠지?”박지연은 약간 짜증이 나는 목소리로 답했다.“온 선생님, 다른 일 없으면 가. 난 아직 할 일이 많아서.”온승준은 잠시 묵묵히 서 있었다.병원에서 근무한 지 반달이 넘었지만 그는 박지연을 자주 만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겨우 마주쳤지만 박지연이 낯선 사람을 대하듯 그에게 인사도 건네지 않으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요 며칠 박지연이 연차를 냈다는 사실도 그녀의 동료에게서 우연히 들은 것이었다.이전의 박지연은 어디를 가든, 뭘 하든, 어떤 사람을 만나든 모두 그에게 공유했었다.하지만 박지연은 이제 그녀의 세상에서 온승준이라는 사람을 지우기라도 한 듯 문자도 보내지 않았다.온승준이 먼저 연락하려 했지만 번호도 차단당한 듯했다.온승준은 겨우 만난 박지연과 이렇게 빨리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친구랑 밥은 먹었어? 안 먹었으면 내가 식사 한 끼 대접할게.”온승준은 겨우 타당한 이유 하나를 찾았다.이혼 전날 밤
고은서가 갑자기 경계의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하루 세 통 이상은 안 돼.”“세 통은 너무 적어. 다섯 통.”“네 통. 더는 안돼. 그게 한계야.”민시후도 더 이상 실랑이하지 않았다.마침 두 사람의 협상 장면을 마주한 박지연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은서야, 잠깐만 나와 줄래? 할 말이 있어.”고은서는 밖으로 나갔다.두 사람은 한적한 곳에 앉았다.“내가 방해한 거 아니지?”박지연이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그녀의 의도를 파악한 고은서가 그녀를 향해 눈을 흘기며 말했다.“수간호사님, 그렇게 한가하시면 차라리 가십 팀 팀장 하나 맡으세요.”“오, 괜찮네. 좋은 팀 있으면 소개해 줄래?”고은서는 다시 한번 그녀를 향해 눈을 흘겼다.“자, 이제 얘기해 봐. 왜 불러낸 거야?”박지연이 비로소 본론을 말했다.“곽승재가 우리 병원에 와서 치료받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어. 병원 측에서는 곽승재를 위해 제일 좋은 병실과 의사를 준비한다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어.”그 말을 들은 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렸다.조금 전 곽씨 일가 본가에서 마주쳤을 때 곽승재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그런데 갑자기 이 병원에 오기로 했다는 것은 분명 목적이 있을 것이었다.“곽승재는 민시후가 여기 있는 거 알고 있을 거고 네가 자주 여기 올 거라는 것도 알지. 그래서 일부러 우리 병원을 선택한 거야. 곽승재도 참 재밌어. 한 편으로는 널 놓지 못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백유미에게 너그럽잖아. 하지만 육현석이 말하길 백유미는 아직 T 국 병원에서 돌아오지 않았대. 범가온이 백유미를 죽도록 때려서 이제는 호흡기까지 달아야 한대.”박지연은 오후에 육현석과 통화하며 들은 내용을 고은서에게 전했다.범가온은 갑작스럽게 아들을 잃은 충격으로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입어 T 국 병원에서 정신병 판정을 받았다.따라서 그녀는 백유미에게 한 폭력에 대해 법적인 책임을 질 필요가 없었다.고은서는 잠시 놀랐다.범가온은 굉장히 강하고 이기적이며 탐욕적인 사람이다.‘아무리 아들을 사랑한다고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