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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1화

Author: 류한나
고은서는 서인수에게 납치된 일만 떠올리면 여전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서인수가 곧 판결을 받게 된다니 이제는 보복에 대한 걱정을 덜 수 있어 마음이 조금 놓였다.

“서인수가 사람을 통해 저를 만나고 싶다고 전해왔어요.”

도아름이 말을 이었다.

“아마도 곽 대표님께 선처를 부탁해달라고 할 것 같은 데 시간 낭비하기 싫어서 만나지 않으려고요. 굳이 가치 없는 말 들을 필요 없잖아요.”

“아름 언니, 저는 언니의 그 용기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서인수랑 몇 년 동안 부부로 살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끊어낼 수 있어요?”

박지연이 감탄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고은서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언니는 진정한 여장부야. 잡을 땐 잡고 놓을 땐 놓을 줄 아는 여자지. 안 맞는 걸 알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우리랑은 달라. 하지만 이제 나도 용기 내서 내려놓았어. 지연아, 싱글 클럽의 문은 항상 널 향해 열려있어.”

고은서는 박지연을 웃기려고 건넨 말이었지만 박지연은 반박하지 않고 진지하게 답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한 건 사실이에요. 온 닥터는 제가 처음으로 사랑한 남자예요. 한 번 선택한 이상 끝까지 지키고 싶다는 욕심이 들어요. 그런데 가끔은 제 그 고집이 우스워 보일 때도 있어요.”

“지연 씨, 부부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두 사람은 늘 사이가 좋지 않았나요?”

박지연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큰 문제는 없어요. 하지만 그게 오히려 문제에요. 큰 문제가 아니라서 말하면 사소하고 치졸해 보이고 그냥 넘기려니 또 마음이 답답해요.”

도아름이 답했다.

“감정적인 문제는 자기 마음을 잘 들여다보아야 해요. 그 안에 답이 다 있으니까요. 지연 씨가 진정 원하는 게 사랑인지 안정감인지 한 번 들여다봐요. 저도 인수 씨랑 몇십 년간 부부로 살아왔어요. 인수 씨가 선을 넘는 일만 하지 않았다면 저도 여전히 그와 함께 살고 있겠죠.”

분위기가 점점 무거워지자 고은서가 잔을 들었다.

“이제 이 얘기는 그만 해요! 오늘 맛있는 음식 먹으며 즐겁게 보내려고 모인 거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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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게인, 비긴   제502화

    박지연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내가 가니 유혜린이 바로 해명하더라. 자기가 먹고 싶어서 시켰는데 온 닥터한테 자신이 직접 한 건강식이라고 거짓말해서 속아서 먹게된 거라고 말이야.”박지연이 말을 이었다.“그리고 내가 들고 있던 음식을 보자마자 눈을 반짝이더니 집 밥이 먹고 싶었다며 자기도 한입 얻어먹을 수 있냐고 묻더라.”“그래서 어떻게 했어?”고은서가 물었다.“준비한 양이 한 사람 몫밖에 안 된다고 정중히 거절했어. 그랬더니 유혜린이 자기는 원래 입이 짧다며 남편한테 조금만 나눠줄 수 없냐고 묻더라.”“온 선생님께서 허락했어?”“응. 안 그래도 저녁을 적게 먹는 사람이라 햄버거 몇 입 먹고 배부르다면서 내가 준비한 음식을 유혜린에게 넘기더라.”고은서는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걸 느끼며 외쳤다.“온 선생님 진짜 너그럽네! 유혜린은 생각보다 더 뻔뻔하고! 세상에 왜 이렇게 뻔뻔한 사람들이 많지?”그녀는 속으로 백유미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백유미도! 유혜린도 다 똑같아!’“난 기분이 상했지. 하지만 남편은 퇴근하고 집에 와서도 아무것도 모르더라고. 바로 서재에 가서 학술 보고지를 보는데 화가 나서 샤워하러 간 사이에 학술 보고서에 차를 엎질렀어.”고은서는 이를 듣고 손뼉을 치며 웃었다.“잘했어! 온 선생님이 뭐라고 안 했어?”“실수로 그랬다고 하니 아무 말도 안 하더라. 매일 밤 서재에서 뭘 하는지 정말 모르겠어. 다음 날 아침 러닝 다녀오면서 남편에게 주려고 아침 사 왔는데 마침 시어머니가 방문하셨어. 왜 아침을 차려주지 않냐면서 뭐라 하시더라고. 온 닥터는 외부 음식을 먹으면 안 된다고 말이야. 그때 마침 아름 언니한테서 전화 와서 무시하고 옷 갈아입고 나왔지.”“잘했어! 진작부터 그래야 했어!”고은서가 열정적으로 맞장구를 쳤다.“평소 온 선생님이 집에 있을 땐 정성스레 음식을 차려주는데 아침 한 끼 안 챙겼다고 잔소리라니... 정말 아들이 황태자라도 되는 줄 아나 봐. 지연아, 이렇게 억울하고 불행하게 살 거면

  • 어게인, 비긴   제503화

    더 매력적인 사실은 집안에 가전제품과 가구가 모두 갖춰져 있어서 몸만 오면 바로 입주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아름 언니, 인테리어가 정말 새것처럼 보이네요. 친구가 정말 판대요?”고은서가 물었다.도아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원래는 본인이 살려고 했는데 가족이 해외로 이민 가게 돼서 그 친구도 어쩔 수 없이 따라가야 한대요. 굳이 국내에 집을 남겨둘 필요는 없죠.”도아름이 중간에서 연결해 준 덕분에 고은서는 빠르게 집을 결정할 수 있었다.계약서를 작성하고 돈을 이체하는 과정이 너무 매끄러워서 고은서는 옷 한 벌 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이사 끝내면 다 같이 와서 집들이 제대로 해요.”도아름이 말했다.고은서도 흔쾌히 동의했다.집을 사게 되어 기쁜 세 사람은 저녁 식사까지 함께했다.박지연은 도아름과 함께 소량의 술도 곁들였다.술과 음식으로 배를 채운 후 술을 마시지 않은 고은서가 박지연을 그녀가 살고 있는 아파트로 데려다주었다.마음이 힘들어 술로 달래고 싶어 하는 박지연을 이해하기에 고은서는 박지연이 내리기 전에 참지 못하고 말을 건넸다.“지연아, 이혼하기 싫으면 조금 더 시간을 가지고 지켜봐.”사랑했던 사람에게서 완전히 마음을 떼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박지연은 고은서처럼 이전 생의 비극을 겪은 것도 아니기에 고은서처럼 단호하게 결정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이 언니 괜찮아!”박지연은 머리를 한 번 흩날리고는 호기롭게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집으로 돌아온 박지연이 문을 열었을 때 집 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오늘은 온 닥터가 쉬는 날이었다.그는 보통 집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박지연은 가방을 내려놓고 물 한 잔 따라 마시려 했으나 물병에 물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오늘 물을 받아놓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부엌에는 설거짓거리가 쌓여있었다.‘시어머니가 도우미를 불러 음식은 준비했지만 청소할 시간이 없어 먼저 돌아갔나 보네. 자기 아들이 배고플까 봐 끔찍이 걱정하면서도 내가 설거지로 힘들어할지는

  • 어게인, 비긴   제504화

    박지연의 말을 들은 온 닥터는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말 좀 잘할 수는 없어?”“내가 무슨 말을 제대로 안 했는데?”박지연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원래부터 순순히 참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남편을 위해 좋은 아내와 어머니가 되려고 노력했었다.그렇다고 해서 그녀에게 성깔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당신이 그렇게 말을 잘하면 당신이 해보든지!”온 닥터는 안경 너머로 그녀를 보며 놀라움을 드러냈다.항상 밝고 유쾌했던 아내에게 이런 날카로운 면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한 모습이었다.“술 마셨어?”온 닥터가 술 냄새를 맡고 물었다.“그래! 마셨어!”박지연이 당당히 답했다.“하지만 취하지는 않았어.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알아.”온 닥터는 그녀가 취했는지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고 물었다.“왜 스스로 가정부라고 생각해?”박지연이 싸늘하게 웃으며 답했다.“삼시 세끼는 전부 내가 하고 집안일도 내가 다 하잖아. 당신의 그 결벽증 때문에 난 매일 집 구석구석까지 깨끗하게 닦아야 해. 집안일뿐만 아니라 당신 어머니도 무슨 일만 생기면 꼭 나를 불러. 심지어 지난번에 당신 첫사랑이 집에 갔을 때도 나를 요란하게 불러댔잖아. 고작 음식 준비하라고. 이게 가정부가 아니면 뭐야?”온 닥터가 태연하게 말했다.“하기 싫으면 가사 도우미 불러. 난 상관없어.”“당신은 상관없다 치고 당신 어머니도 상관없을까?”박지연이 참다못해 소리 질렀다.“결혼하고 나서 바로 말했잖아. 나도 직장이 있어 바쁘니 가사 도우미를 부르자고. 그런데 당신 어머니는 내 월급으로 도우미 고용 비용도 못 낸다고 차라리 직장 그만두고 당신만 돌보라고 했어. 내가 왜 직장을 그만두고 당신 뒷바라지를 해야 해? 내 커리어는 커리어가 아니야?”박지연의 말투와 표현에 온 닥터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신이 직접 부르면 되잖아. 내 월급도 다 당신한테 맡겼잖아.”그 말이 박지연의 화를 더 돋웠다.“그 말은 꺼내지도 마. 그 월급 카드 당신 어머니가 가져갔어.

  • 어게인, 비긴   제505화

    오전 내내 고은서는 병원에서 전미자와 이야기를 나눴다. 이후 그녀는 병실로 돌아가지 않고 곧바로 원지훈을 만나러 갔다.그 후에도 하루 종일 도아름, 박지연과 시간을 보내느라 곽승재가 입원 중이라는 사실은 이미 잊어버렸다.잊어버린 김에 굳이 곽승재의 메시지에 답할 필요를 못 느낀 고은서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마음 편히 샤워하러 갔다.향긋하게 목욕을 마치고 나온 고은서가 스킨케어를 하고 있을 때 밖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며칠 전 위험했던 일이 떠오르자 그녀는 순간 얼굴이 굳어졌다.핸드폰을 들고 경찰에 신고하려던 찰나 곽승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은서야, 안에 있어?”곽승재의 목소리에 고은서는 안심했지만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병원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 왜 호텔에 있는 거야? 내 방에는 어떻게 들어온 거지?’고은서가 곽승재를 불러 따지려 한 순간 곽승재가 급히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긴장했던 곽승재는 그녀를 본 순간 안도했다.“너...”고은서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곽승재는 몸을 돌려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귀찮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괜한 기우였네요. 제 아내는 괜찮습니다.”그제야 고은서는 거실에 호텔 직원 몇 명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직원들도 고은서가 괜찮은 것을 확인하고 안심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중 한 직원이 설명했다.“사모님, 원재 규정상 아무에게나 문을 열어드리지 않지만 남편분께서 사모님과 연락이 안 된다며 몹시 걱정하셨어요. 게다가 며칠 전 일도 있었던 터라 저희도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습니다.”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호텔에도 보안 요원이 있긴 했지만 복잡한 환경에서 모든 돌발 상황을 완벽히 대처하기란 어려웠다.며칠 전 사건도 있었으니 호텔 측에서도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우려되었다.“괜찮으니 이제 나가 보셔도 됩니다.”고은서가 말했다.“네, 사모님. 편히 쉬십시오.”직원들이 나간 뒤 고은서가 곽승재를 노려보며 말했다.“당신도 나가.”“호텔에 있으면서 왜 문자에 답도 없고 전화도 안 받

  • 어게인, 비긴   제506화

    곽승재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할머니가 다른 도시에 흉터 없애주는데 능한 의사 선생님 한 분 계신다면서 나 대신 예약해줬어. 며칠 후에 실을 뽑으면 그때 시간 내서 나랑 같이 가줘.”고은서는 약간 어리둥절했다.“내가 왜 같이 가줘야 하는데? 비서가 없는 것도 아니잖아. 없다고 해도 새 사람 청할 능력은 충분하잖아.”곽승재는 그녀의 말을 듣고도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난 네가 직접 같이 가줬으면 좋겠어.”‘또 시작이야. 어쩌면 날이 갈수록 더 뻔뻔해지는 거지?’고은서는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미안하지만 당신이랑 같이 가줄 시간 없어.”곽승재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으면서 다리에 담요까지 덮었다.“뭐 하는 거야?”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내가 회복될 때까지 날 간병해준다고 했으면 응당히 약속 지켜야 하는 거 아니야?”고은서는 헛웃음을 치면서 말했다.“너무 억지 부린다는 생각 안 들어?”“내가 언제 억지를 부렸다고 그래? 나 너 때문에 다친 거야. 게다가 날 간병해준다고 약속한 사람도 너야. 그런데 자꾸 네가 병원에 오는 걸 거부하니까 난 그저 내 발로 찾아왔을 뿐이야.”‘진짜 그까짓 상처 하나로 날 쫓아다니면서 피곤하게 만들 생각인 거야?’위장염 때문인지 곽승재는 평소보다 무기력해 보였고 얼굴도 약간 초췌해졌다. 눈살을 찌푸리고 소파에 앉아있는 걸 보아서는 어깨 쪽의 상처가 계속 아파 나는 듯했다.그날 곽승재가 아니었더라면 그녀는 어떤 험한 꼴을 당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가 그녀를 구하다가 다친 것도 명백한 사실이었다.전미자를 보아서도 차마 신고하면서 그를 내쫓을 수가 없었다.“호텔에 남아있는 건 막지 않을게. 그런데 계속 똑같은 이유로 자꾸 나한테 새로운 요구를 제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고은서가 말했다.“좋아.”곽승재도 흔쾌히 승낙했다.고은서는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그를 보며 약간 불안해졌다. 그녀는 폰을 꺼내 들고 카메라를 켜면서 말했다.“촬영해서 기록 좀 남기게 다

  • 어게인, 비긴   제507화

    고은서는 소파에 앉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곽승재를 보면서 말을 보태었다.“거실 바닥에서 자기 싫으면 다시 맞은 켠 방으로 돌아가. 아직 체크아웃 안 한 거로 알고 있는데.”곽승재는 예전부터 생활 퀄리티에 관해 요구가 높았는데 호텔도 오성급이 아니면 눈여겨보지도 않았고 옷도 맞춤 제작이 아니면 입지 않았기에 그녀의 이런 제안을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고은서는 이 점을 이용해 일부러 그더러 바닥에서 자라고 제기했던 것이다.‘아무튼 난 호텔에 남아도 된다고만 했지 내 방에 남아라고는 하지 않았잖아.’아니나 다를까, 곽승재는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소파에서 일어섰다.고은서는 손을 털면서 이내 입을 열었다.“웨이터한테 방키를 가져다 달라고 연락해줄까?”그러나 그녀가 속으로 득의양양해 하고 있을 때 곽승재는 땅에 있는 이불과 베개를 주어 다시 방으로 가져오면서 말했다.“거실은 그냥 맨땅이어서 불편해. 차라리 카펫을 깐 방바닥이 나아.”고은서는 이 상황을 상상조차 못 했다.‘미친 거 아니야? 진짜 바닥에서 자려는 거야?’“당신 몸을 생각해서라도 폭신한 침대와 부드러운 이불이 있는 맞은 켠 스위트룸에 가서 자는 게 더 좋지 않을까?”고은서가 애써 그를 설득해 자신의 방에서 내쫓으려고 했다.“방금전에는 바닥에서 자는 게 더 좋다며?”‘아무리 좋다고 해도 네 스위트룸에 있는 침대보다 더 좋겠니?’이미 그녀의 방에 남으려고 마음을 먹은 듯한 곽승재를 보면서 고은서는 순간 인내심이 바닥이 났다.“여기서 자는 것까진 허용해줄게. 그런데 밤중에 몰래 내 침대에 올라오거든 환자라고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땐 진짜 밖으로 내쫓을 거니까 알아서 주의하도록 해.”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베개를 이불 위에 던지고 아까 소파에서 덮고 있던 담요를 가져오더니 이내 이불 위에 누워버렸다.고은서는 어이가 없었지만 입을 꾹 다물고 그를 무시한 채 방금전에 하고 있던 스킨케어를 이어했다.곽승재는 땅에 누워서 고은서를 바라보았다.가녀린 몸매를 가진 그녀는 화장대

  • 어게인, 비긴   제508화

    비록 그저 영상을 보고 있었을 뿐이지만 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곽승재에게 외도를 들킨 죄책감이 들었다.그러나 그녀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이젠 곽승재랑 부부 사이도 아닌데 내가 왜 이런 일로 죄책감을 느껴야 해?’고은서는 영상 정지 버튼을 누르고 곽승재를 보며 말했다.“가까이 와서 볼래? 그러면 더 잘 보일 텐데.”곽승재는 진짜 그녀의 말대로 바닥에서 일어나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그는 아이패드를 보는 대신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이런 애들이 뭐가 좋아서 그렇게 뚫어지라 쳐다보는 거야?”“볼 곳이 얼마나 많은데. 저 매끈한 몸선과 멋진 춤사위, 당신보다 훨씬 낫거든.”고은서는 일부러 아이패드를 들고 곽승재를 약 올렸다. 그녀는 곽승재가 화를 내면서 아이패드를 빼앗아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이 일을 핑계로 그를 방에서 쫓아낼 수 있었다.그러나 그녀의 생각과 다르게 곽승재는 화를 내는 대신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고은서, 내가 저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몸 관리하면 예전처럼 나한테 관심 가져줄 수 있어?”고은서는 순간 멈칫했다.‘약 잘못 먹은 것도 아닌데 왜 갑자기 이러는 거야?’정장을 입고 춤을 추는 곽승재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그려본 고은서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모습일 것 같았다.“아니. 내가 전에도 말했지만 나 때문에 쓸데없는 일을 하는 건 삼가줬으면 좋겠어. 내가 당신한테 감동 받을 일은 더는 없을 테니까.”그녀의 말을 들은 곽승재의 눈빛이 더 어두워졌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바닥에 누웠다.‘인내심이 날이 갈수록 느는 것 같네.’고은서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동영상을 끝까지 다 보고서야 잠에 들었다.이튿날, 잠에서 깬 고은서는 곽승재가 방 안에 없는 걸 발견했다.자신의 옆자리와 옆에 놓은 베개를 확인해 보았는데 누운 흔적 하나 없이 어젯밤 그대로였다.고은서는 화장실로 들어가 몸에 이상한 흔적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시

  • 어게인, 비긴   제509화

    고은서는 김치찌개를 반 그릇 정도 먹고 옆에 놓인 육전도 한 점 맛보았는데 육즙이 주르륵 흐르는 바람에 황급히 손을 턱 아래 받쳤다.바로 이때, 그녀의 전화가 울렸다.고은서 손이 기름 범벅이 된 탓에 곽승재가 그녀 대신 폰을 가져다주었다.화면에 뜬 도아름의 전화번호를 확인하자마자 고은서는 어제 그녀에게 부탁한 일을 떠올렸다.그녀는 손을 닦고 폰을 가지고 발코니에 가서 전화를 받았다.“좋은 아침이에요, 아름 언니.”“내가 자는 걸 깨운 건 아니죠?”“아니에요, 방금 아침 먹고 있었어요.”고은서가 웃으면서 답했다.도아름도 따라 웃으면서 그녀에게 대원에 있는 친구에게 비밀리에 고은혜를 보호할 사람을 대신 안배해달라고 이미 부탁했다고 전했다.그리고 그 친구의 연락처를 카톡으로 보냈으니 수시로 연락하면 된다고 말을 보태었다.“진짜 너무 고마워요, 언니.”고은서가 좋아하면서 도아름에게 감사하다고 인사했다.“별로 큰일도 아닌데 괜찮아요. 도움이 필요한 곳이 있으면 얼마든지 연락해요.”“네, 알겠어요!”전화를 끊은 후, 고은서는 도아름 친구의 카톡을 추가했다. 그리고 고은혜에게도 그 친구의 연락처를 보내주면서 그와 연락하라고 당부했다.거실로 돌아갔을 때 곽승재는 이미 아침 식사를 다 마쳤다.“무슨 일 있어?”“아무것도 아니야.”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아침 식사 후 고은서는 곽승재를 병원으로 돌아가라고 방에서 쫓아내고는 이내 원지훈에게 연락했다.원지훈은 오후에 고은혜가 있는 대원으로 가보겠다고 말했다. 그는 별일이 없을 거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비록 도아름 친구에게도 연락해놓은 상황이지만 고은혜의 안전이 달린 일이었기에 고은서는 차마 시름을 놓을 수가 없었다.그러나 백유미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직접 대원까지 따라갈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그저 고은혜에게 조심하라고 신신당부밖에 할 수 없었다.손에 있던 일을 다 처리한 후, 고은서는 웨이터에게 방 청소를 맡기고 제인 제약에 들렀다가 다시 ZY 그룹으로 갔다.사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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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게인, 비긴   제677화

    고은서가 갑자기 경계의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하루 세 통 이상은 안 돼.”“세 통은 너무 적어. 다섯 통.”“네 통. 더는 안돼. 그게 한계야.”민시후도 더 이상 실랑이하지 않았다.마침 두 사람의 협상 장면을 마주한 박지연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은서야, 잠깐만 나와 줄래? 할 말이 있어.”고은서는 밖으로 나갔다.두 사람은 한적한 곳에 앉았다.“내가 방해한 거 아니지?”박지연이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그녀의 의도를 파악한 고은서가 그녀를 향해 눈을 흘기며 말했다.“수간호사님, 그렇게 한가하시면 차라리 가십 팀 팀장 하나 맡으세요.”“오, 괜찮네. 좋은 팀 있으면 소개해 줄래?”고은서는 다시 한번 그녀를 향해 눈을 흘겼다.“자, 이제 얘기해 봐. 왜 불러낸 거야?”박지연이 비로소 본론을 말했다.“곽승재가 우리 병원에 와서 치료받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어. 병원 측에서는 곽승재를 위해 제일 좋은 병실과 의사를 준비한다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어.”그 말을 들은 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렸다.조금 전 곽씨 일가 본가에서 마주쳤을 때 곽승재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그런데 갑자기 이 병원에 오기로 했다는 것은 분명 목적이 있을 것이었다.“곽승재는 민시후가 여기 있는 거 알고 있을 거고 네가 자주 여기 올 거라는 것도 알지. 그래서 일부러 우리 병원을 선택한 거야. 곽승재도 참 재밌어. 한 편으로는 널 놓지 못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백유미에게 너그럽잖아. 하지만 육현석이 말하길 백유미는 아직 T 국 병원에서 돌아오지 않았대. 범가온이 백유미를 죽도록 때려서 이제는 호흡기까지 달아야 한대.”박지연은 오후에 육현석과 통화하며 들은 내용을 고은서에게 전했다.범가온은 갑작스럽게 아들을 잃은 충격으로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입어 T 국 병원에서 정신병 판정을 받았다.따라서 그녀는 백유미에게 한 폭력에 대해 법적인 책임을 질 필요가 없었다.고은서는 잠시 놀랐다.범가온은 굉장히 강하고 이기적이며 탐욕적인 사람이다.‘아무리 아들을 사랑한다고 해

  • 어게인, 비긴   제676화

    “얼른 와서 은서랑 인사하지 않고 거기서 멍하니 뭐 하고 있는 거야?”전미자가 말했다.장순이 과일을 내려놓고 부엌으로 갔다.곽승재는 느린 걸음으로 그녀들 앞으로 다가왔다.그는 고은서를 어두운 눈빛으로 한 번 쳐다본 뒤 입술을 약간 움직였으나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요 며칠 뭐하면서 지낸 거야? 왜 이렇게 병든 고양이처럼 힘이 없어 보여?”전미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할머니, 제가 T 국에서 사고를 당했는데 승재는 저를 도와주려다가 다쳤어요.”고은서가 솔직하게 말했다.“아직 몸이 다 회복되지 않았으니 너무 다그치지 말아 주세요.”‘은서를 도와주고도 은서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니. 내가 모르는 일들이 더 많이 있었겠네.’전미자는 다른 사람들 모르게 몰래 한숨을 쉰 후 더 이상 곽승재를 질책하지 않았다.“할머니, 저 친구가 아직 병원에 있어서 먼저 가봐야겠어요. 저녁은 가서 먹을게요.”곽승재가 돌아오지 않은 줄 알고 저녁을 함께 먹겠다고 했던 고은서였지만 그가 돌아오자 고은서는 그와 더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전미자는 다시 한번 나서 고은서를 잡으려 했다.“주방에도 다 준비했는데 먹고 가. 급한 거 아니잖아.”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제안은 감사하지만 먼저 가볼게요.”전미자도 더 이상 만류할 수 없음을 알고 더 이상 설득하지 않았다.“은서야, 시간 나면 자주 와.”“네. 할머니, 다음에 봬요.”말을 마친 고은서가 몸을 일으켰다.“바래다줄게.”곽승재가 말하자 고은서는 싸늘한 어조가 아닌 평소와 다름없는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괜찮아. 넌 좀 쉬어.”곽승재는 그 말에 다시 한층 더 어두운 표정을 지었지만 고집을 부리지는 않았다.그저 고은서가 밖으로 나갈 때 뒤따라 나갔다.고은서가 차키를 누르자 곽승재가 마침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은서야, 어깨는 이제 괜찮아졌어?”고은서는 그를 한 번 쳐다보고 평온하게 답했다.“응, 괜찮아.”말을 마친 고은서가 운전석에 앉으려 했다.“민시후를 돌보려고 병원에 급하

  • 어게인, 비긴   제675화

    고은서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승재랑 이혼할 때 급해서 제때 돌려드리지 못했어요. 오늘 마침 시간이 나서 가져왔어요.”“은서야, 이건 할머니가 너한테 준 선물이야. 그걸 돌려주면 이 할머니가 섭섭하잖니?”전미자가 부드럽게 타이르며 말했다.“할머니 마음은 너무 감사해요. 하지만 이건 원래 미래 손자며느리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잖아요. 그런 물건을 제가 가지고 있는 건 부적절한 것 같아요.”고은서는 다시 다이아몬드 브로치가 담긴 상자를 꺼내며 말했다.“이것도 저 대신 곽승재한테 전해 주세요.”지난번 곽승재가 가져갔던 브로치를 다시 돌려주려 하자 전미자는 대략적인 상황을 짐작한 듯 고은서의 손을 잡았다.“은서야, 할머니는 너와 승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알지는 못하지만 분명 승재가 또 너를 실망하게 했겠지. 너에게 무언가를 강요하고 싶지는 않아. 다만 날 너무 어려워하지 말렴. 이 목걸이는 손자며느리를 위한 게 아니라 너에게 준 선물이야.”전미자가 말을 이었다.“너처럼 똑똑하고 착한 아이가 승재와의 결혼 생활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겠지. 할머니도 다 알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네가 승재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거로 생각한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어. 네가 힘들 걸 알면서도 네 마음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어.”고은서는 전미자의 따뜻한 말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할머니를 원망하지는 않아요. 곽승재랑 결혼한 건 제 고집이지 할머니랑 상관없는 일이었잖아요. 목걸이를 돌려드리는 것도 할머니랑 거리를 유지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이 목걸이가 할머니에게 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 제가 가지고 있는 건 부적절한 것 같아서예요.”“뭐가 부적절하다는 거야? 너도 1년 넘게 내 손자며느리로 살았잖니. 내가 준 선물을 돌려주면 내가 얼마나 속상하겠니?”그 말에 고은서는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음을 느끼고 말했다.“할머니께서 제가 주시겠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그래야지.”전미자는 다시 다이아몬드 브로치를 보며 말했다.“이건 승재가 네가 좋아한다고

  • 어게인, 비긴   제674화

    유성준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너에게 부담 주고 싶지는 않아. 지금 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돼. 다만 내가 항상 이 자리에 있다는 것만 알아줬으면 좋겠어.”고은서는 유성준이 몇 년 동안 자신을 좋아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자기 뜻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 그는 계속 기다릴 것이 분명했다.고은서는 미안해하며 말했다.“죄송해요. 성준 오빠. 이미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람의 감정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다고 약속했어요.”고은서의 솔직한 말에 유성준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살짝 쓸쓸하게 변했다.“네 마음에 든 사람이라면 분명히 아주 훌륭한 사람이겠지.”...오후, 고은서는 다이아몬드 브로치와 전미자가 생일에 선물해 준 에메랄드 펜던트 목걸이, 그리고 그녀가 전미자를 위해 직접 조향한 캔들을 챙겨 곽씨 일가 본가로 향했다.본가에 도착했을 때 고은서는 차 속도를 늦췄다.저택의 정원 입구에는 인공 폭포와 연못이 있는 조형물이 있었고 연못에는 녹색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그때 연못 가장자리에서 한 가냘픈 소녀가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고 그녀의 뒤에서는 가정부가 그녀를 설득하고 있었다.“아가씨, 이제 들어가세요. 바람이 차요. 감기라도 걸리실까 봐 걱정됩니다.”가정부의 호칭을 듣고 고은서는 그녀가 곽승재의 여동생 곽승연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곽승재가 전에 말하길 그녀는 어떤 충격을 받아 심장병이 재발했고 약간 폐쇄적인 성향이 있다고 했다.‘어머니께서 귀국하셔서 전문의를 찾으러 오신 걸까?’연못 가장자리에 쪼그리고 앉은 곽승연은 가정부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연못 속의 초록색 잎을 잡으려 하고 있었다.가정부는 어떻게든 설득하려 했지만 그녀는 듣지 않았다.고은서는 차를 세우고 걸어 내려갔다.“사모님.”가정부는 고은서를 보자 예전과 같은 호칭으로 그녀를 불렀다.“저는 이제 곽승재랑 이혼했어요. 이제 저를 아가씨라고 부르는 게 더 적합할 것 같네요.”고은서가 곽승연을 바라보며 물었다.“왜 저러는 거예요?”가정부는 그녀가 산책하러 나왔다

  • 어게인, 비긴   제673화

    이때 민시후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고 눈빛은 빛나고 있었다.감정에 흔들리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고은서조차도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약간 흔들렸다.고은서는 민시후가 겉으로는 가볍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원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감정을 내세우며 곽승재와 대립할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민시후는 정말 날 좋아하는 거야.’단순히 오빠 같은 존재로 여겨지는 유성준과 달리 민시후의 진심 어린 고백은 고은서의 마음에 파란을 일으켰다.하지만 고은서는 새로운 감정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그녀는 잠시 고민한 뒤 말했다.“민시후, 시간을 좀 줘.”그녀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실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기뻐하며 말했다.“고은서, 그 말을 나한테도 기회가 있다는 거지?”고은서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이제 국 마실 거야?”민시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그럼, 물론이지.”박지연은 이 소식을 듣고 당장 폭죽이라도 터뜨릴 기세로 기뻐했다.“은서야, 드디어 마음을 정리했구나.”박지연이 기뻐하며 말을 이었다.“안 되겠어. 이 소식을 육현석에게 알려서 곽승재와 너를 다시 만나게 하려는 노력은 하지 말라고 해야겠어.”“그렇게 유치하게 굴지 말아 줄래?”고은서가 박지연을 말렸다.“내가 민시후의 마음을 받아들이든 들이지 않든 그건 육현석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야. 굳이 그 사람한테 알릴 필요 없어.”육현석에게 알리는 것은 곽승재에게 알리는 것과 다름없었다.고은서는 곽승재가 자신이 백유미 일 때문에 그와 감정싸움을 하는 것으로 오해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비록 박지연은 당장 육현석에게 이 소식을 알려 곽승재가 후회하게 만들고 싶었지만 고은서가 원치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고집부리지 않았다.“알았어. 말 안 할게. 어차피 사귀게 되면 다 알게 될 테니까.”고은서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다음 날 고은서는 고씨 가문으로 향했다.유성준도 그 소식을 듣고 집으로 왔다.“은서야, 너 요즘 너

  • 어게인, 비긴   제672화

    고은서가 말을 이었다.“우리가 안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매번 술집이나 클럽에서 마주쳤잖아. 그때마다 양옆에 여자들을 끼고 있었잖아.”그 말을 들은 민시후는 대꾸하지 않고 매력적인 눈빛으로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고은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왜 그렇게 봐? 내가 없는 말 했어?”“아니, 틀린 말도 아니야.”민시후는 얼굴에서 불쾌한 기색을 지우,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예전에 주위에 여자가 많았던 건 맞아. 하지만 그건 그저 보여주기 위한 식일 뿐이었고 진지한 관계도 없었고 부적절한 행위도 없었어.”고은서는 믿지 않았다.“M 국에 있을 때 어떤 섹시한 여자랑 데이트했잖아. 아무 일도 없었어?”민시후의 미소는 더욱 깊어졌고 그의 눈빛은 빛나기 시작했다.고은서는 어리둥절했다.‘자랑스러운 일인가? 왜 저렇게 웃지?’민시후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물었다.“고은서, 혹시 질투야?”고은서는 그제야 자신이 민시후의 과거 연애사를 묻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오해하지 마. 그냥 네가 민아 일로 화내는 게 웃겨서 예로 든 거야.”고은서가 단호히 답했다.그러나 민시후는 여전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고은서, 뭔가 걸리는 구석이 있으니까 괜히 설명하는 거야. 평소 내가 이렇게 물었으면 넌 주먹부터 날렸을 거야.”고은서는 지금 당장 그에게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헛소리 그만해. 네 연애사가 나랑 무슨 상관이야? 별 관심 없어.”“괜찮아. 네가 신경 쓰든 안 쓰든 모두 솔직하게 얘기해 줄게. M 국의 그 여자는 내 친구야. 그날 우리는 다른 친구를 만나러 가던 중이었는데 네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어. 그 친구는 기다리는 게 지겨워서 몇 번 재촉했을 뿐이야. 외국은 보통 오픈 마인드 잖아. 그래서 호칭도 더 친근했을 뿐인데 우린 순수한 친구 관계였어.”민시후의 눈빛은 너무 반짝여서 고은서가 눈을 돌리며 기침했다.“이미 말했잖아. 나랑 상관없다고.”“상관있어.”민시후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고은서, 나는

  • 어게인, 비긴   제671화

    민시후가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눈빛으로 거절하자 고은서가 설득했다.“조금 전에 뭐 좀 먹어서 배가 부르네. 네가 마셔. 버릴 순 없잖아.”민시후는 그녀를 보며 일부러 말했다.“네가 먹여주면 한 번 생각해 볼게.”고은서는 화가 난 듯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숟가락 드는 데는 아무 지장 없잖아.”민시후가 콧방귀를 뀌며 답했다.“고은서,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내가 모를 것 같아? 진짜 화내는 거 보고 싶어?”화가 난 고은서는 결국 직접 국을 다 마셔버렸다.“민아야, 이거 정말 맛있네. 어떤 사람은 즐길 줄 모르는 것 같아. 복이 없는 거지 뭐.”송민아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고은서, 너도 정말 유치하다.”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그만해. 난 그냥 병문안 온 거야. 무사한 거 봤으면 됐어. 먼저 가볼게.”송민아가 가려고 하자 고은서는 그녀를 배웅했다.복도로 나온 송민아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은서야, 나 정말 시후 오빠 포기했어. 그러니까 앞으로 이렇게 도와주지 않아도 돼. 오빠 다친 거 너 때문이지?”송민아도 T 국에서 있었던 일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오빠 겉으로는 제멋대로인 것 같아도 꽤 믿을 만한 사람이야. 전에 오빠한테 감정적으로 더 상처를 주라고 말했던 건 그냥 화가 나서 한 말이었어. 너도 마음이 있다면 그냥 오빠 받아줘. 내 생각은 하지 않아도 돼.”고은서가 웃으며 답했다.“네가 민시후를 도와준다는 걸 민시후가 알면 네게 그렇게 까칠하게 굴었던 걸 후회하겠네.”송민아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도와주려고 하는 말 아니야. 그냥 내가 아직 오빠를 좋아한다고 오해하면서 난감해할까 봐 그러는 거야.”고은서는 다시 한번 웃을 뿐 별다른 설명은 덧붙이지 않았다.“들어가 봐. 민준 오빠가 북성 간식들을 좀 보내줬어. 얼른 먹고 싶어서 눈에 아른거리네. 이제 그만 갈게.”고은서는 그녀를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하며 무심코 말했다.“네 오빠는 널 잘 챙기네.”‘귀찮은 일도 처리해 주고 클럽까지 데리러 와주고 심지어 먹

  • 어게인, 비긴   제670화

    이 사실은 전에 뛰어내리겠다고 곽승재를 협박할 때 고은서도 얘기한 적이 있었지만 그는 전혀 믿지 않았다.‘지연이는 어떻게 믿게 만든 거지?’고은서는 자신의 의문을 숨김없이 말했고 박지연도 오늘에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다 말해줬다.“유전자검사는 언제 한 거야? 난 모르고 있었는데.”고은서가 의아해하며 물었다.“하늘이 무너질 정도로 속상해하는 너를 보면서 어떻게 말을 꺼내.”박지연이 답했다.아무리 시간이 오래 지났다고 해도 고은서는 그 아이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아파왔다.당시 고은서는 백유미를 구하러 호수에 뛰어든 곽승재를 보며 이혼할 때 이 사실을 그에게 알려주면서 후회하게 만들 거라고 다짐했었다.그러나 막상 후회하는 그의 모습을 보게 되니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준다는 게 틀린 소리는 아니네.’이튿날, 고은서와 박지연은 귀국하기 위해 공항으로 갔다.아직도 거동이 불편한 민시후는 인파를 피면하기 위해 전용기로 귀국할 예정이었다.두 사람도 그와 동행했다.공항으로 가기 전에 고은서는 병원 로비에서 곽현수와 백승엽을 만났다.곽현수는 그녀를 보자마자 성가시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고 휠체어에 앉아있던 백승엽은 악의로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힐끗 째려만 볼뿐 자신의 감정을 함부로 드러낼 용기조차 없었는지 그녀와의 눈 맞춤을 피했다.“쯧.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범죄자를 감싸는 주제에 왜 저리 거만하게 구는 거야.”민시후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비록 이름을 직접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을 들은 곽현수와 백승엽의 표정이 다 굳어졌다.뻔뻔함을 타고난 사람들도 있다잖아요.”박지연은 맞장구를 치고는 이내 민시후의 휠체어를 밀고 밖으로 나갔다.고은서는 곽현수를 무시한 채 두 사람 뒤를 따라갔다.해성으로 돌아간 후, 민시후는 박지연이 출근하고 있는 이레 병원에서 계속 치료를 받기로 했다.고은서는 푹 쉬고 경찰서로 찾아가 T국에서 있었던 일에 관한 증거 자료를 제출하면서 백유미의 법적 책임을 묻겠다

  • 어게인, 비긴   제669화

    고은서는 몽롱한 상태에서 상대방의 품이 유독 따뜻하게 느껴졌다. 너무 허약한 탓에 차갑기만 하던 그녀의 몸도 따라서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그 사람은 등 뒤로 조심스럽게 그녀를 꼭 끌어안으면서 얼굴을 그녀 이마 가까이 붙였다.체온이 하도 높아서 불편함을 느낀 고은서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다.상대방은 더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지만 등이 점점 더 뜨거워 난 고은서는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잠에서 제대로 깨지 못한 탓에 제대로 벗어날 수가 없었다.얼마 후, 그 사람은 그녀를 다시 꼭 끌어안으면서 손으로 그녀의 배를 어루만지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흐느끼는 듯 몸을 떨기 시작했다.심상치 않음을 느낀 고은서는 눈을 번쩍 떴다.그러나 뒤돌아 확인하려고 할 때 그가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는 바람에 몸을 돌릴 수가 없었다.“은서야, 미안해...”귓가에서 곽승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하지만 그녀는 예전처럼 발버둥 치며 화를 내면서 그를 내쫓는 대신 아주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이거 놔.”곽승재는 여전히 그녀를 꼭 끌어안은 채 약간 울먹이면서 말했다.“은서야, 미안해.”고은서는 곽승재가 오후에 박지연한테서 들은 말 때문에 이런다는 걸 알고 있었다.“지연이 혼자만의 생각이니까 너무 신경쓰지 않아도 돼.”고은서의 말에서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당신 아버지랑 백승엽까지 여기로 온 이상 당신도 어쩔 수가 없었겠지. 할 만큼 했다는 거 나도 알아.”곽승재는 그녀를 놓아주기는커녕 방금전보다 더 세게 끌어안았다.고은서는 목 쪽으로 뜨거운 액체가 떨어지는 걸 느꼈다.“은서야, 차라리 욕이라도 해...”곽승재의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에서 그가 무척 후회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그러나 고은서는 여전히 담담했다.“곽승재, 굳이 이러지 않아도 돼. 난 당신이 한 말을 애초에 믿은 적이 없으니까.”곽승재는 순간 몸이 굳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치 이번이 그녀를 안아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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