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내내 고은서는 병원에서 전미자와 이야기를 나눴다. 이후 그녀는 병실로 돌아가지 않고 곧바로 원지훈을 만나러 갔다.그 후에도 하루 종일 도아름, 박지연과 시간을 보내느라 곽승재가 입원 중이라는 사실은 이미 잊어버렸다.잊어버린 김에 굳이 곽승재의 메시지에 답할 필요를 못 느낀 고은서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마음 편히 샤워하러 갔다.향긋하게 목욕을 마치고 나온 고은서가 스킨케어를 하고 있을 때 밖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며칠 전 위험했던 일이 떠오르자 그녀는 순간 얼굴이 굳어졌다.핸드폰을 들고 경찰에 신고하려던 찰나 곽승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은서야, 안에 있어?”곽승재의 목소리에 고은서는 안심했지만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병원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 왜 호텔에 있는 거야? 내 방에는 어떻게 들어온 거지?’고은서가 곽승재를 불러 따지려 한 순간 곽승재가 급히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긴장했던 곽승재는 그녀를 본 순간 안도했다.“너...”고은서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곽승재는 몸을 돌려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귀찮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괜한 기우였네요. 제 아내는 괜찮습니다.”그제야 고은서는 거실에 호텔 직원 몇 명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직원들도 고은서가 괜찮은 것을 확인하고 안심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중 한 직원이 설명했다.“사모님, 원재 규정상 아무에게나 문을 열어드리지 않지만 남편분께서 사모님과 연락이 안 된다며 몹시 걱정하셨어요. 게다가 며칠 전 일도 있었던 터라 저희도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습니다.”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호텔에도 보안 요원이 있긴 했지만 복잡한 환경에서 모든 돌발 상황을 완벽히 대처하기란 어려웠다.며칠 전 사건도 있었으니 호텔 측에서도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우려되었다.“괜찮으니 이제 나가 보셔도 됩니다.”고은서가 말했다.“네, 사모님. 편히 쉬십시오.”직원들이 나간 뒤 고은서가 곽승재를 노려보며 말했다.“당신도 나가.”“호텔에 있으면서 왜 문자에 답도 없고 전화도 안 받
곽승재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할머니가 다른 도시에 흉터 없애주는데 능한 의사 선생님 한 분 계신다면서 나 대신 예약해줬어. 며칠 후에 실을 뽑으면 그때 시간 내서 나랑 같이 가줘.”고은서는 약간 어리둥절했다.“내가 왜 같이 가줘야 하는데? 비서가 없는 것도 아니잖아. 없다고 해도 새 사람 청할 능력은 충분하잖아.”곽승재는 그녀의 말을 듣고도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난 네가 직접 같이 가줬으면 좋겠어.”‘또 시작이야. 어쩌면 날이 갈수록 더 뻔뻔해지는 거지?’고은서는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미안하지만 당신이랑 같이 가줄 시간 없어.”곽승재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으면서 다리에 담요까지 덮었다.“뭐 하는 거야?”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내가 회복될 때까지 날 간병해준다고 했으면 응당히 약속 지켜야 하는 거 아니야?”고은서는 헛웃음을 치면서 말했다.“너무 억지 부린다는 생각 안 들어?”“내가 언제 억지를 부렸다고 그래? 나 너 때문에 다친 거야. 게다가 날 간병해준다고 약속한 사람도 너야. 그런데 자꾸 네가 병원에 오는 걸 거부하니까 난 그저 내 발로 찾아왔을 뿐이야.”‘진짜 그까짓 상처 하나로 날 쫓아다니면서 피곤하게 만들 생각인 거야?’위장염 때문인지 곽승재는 평소보다 무기력해 보였고 얼굴도 약간 초췌해졌다. 눈살을 찌푸리고 소파에 앉아있는 걸 보아서는 어깨 쪽의 상처가 계속 아파 나는 듯했다.그날 곽승재가 아니었더라면 그녀는 어떤 험한 꼴을 당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가 그녀를 구하다가 다친 것도 명백한 사실이었다.전미자를 보아서도 차마 신고하면서 그를 내쫓을 수가 없었다.“호텔에 남아있는 건 막지 않을게. 그런데 계속 똑같은 이유로 자꾸 나한테 새로운 요구를 제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고은서가 말했다.“좋아.”곽승재도 흔쾌히 승낙했다.고은서는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그를 보며 약간 불안해졌다. 그녀는 폰을 꺼내 들고 카메라를 켜면서 말했다.“촬영해서 기록 좀 남기게 다
고은서는 소파에 앉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곽승재를 보면서 말을 보태었다.“거실 바닥에서 자기 싫으면 다시 맞은 켠 방으로 돌아가. 아직 체크아웃 안 한 거로 알고 있는데.”곽승재는 예전부터 생활 퀄리티에 관해 요구가 높았는데 호텔도 오성급이 아니면 눈여겨보지도 않았고 옷도 맞춤 제작이 아니면 입지 않았기에 그녀의 이런 제안을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고은서는 이 점을 이용해 일부러 그더러 바닥에서 자라고 제기했던 것이다.‘아무튼 난 호텔에 남아도 된다고만 했지 내 방에 남아라고는 하지 않았잖아.’아니나 다를까, 곽승재는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소파에서 일어섰다.고은서는 손을 털면서 이내 입을 열었다.“웨이터한테 방키를 가져다 달라고 연락해줄까?”그러나 그녀가 속으로 득의양양해 하고 있을 때 곽승재는 땅에 있는 이불과 베개를 주어 다시 방으로 가져오면서 말했다.“거실은 그냥 맨땅이어서 불편해. 차라리 카펫을 깐 방바닥이 나아.”고은서는 이 상황을 상상조차 못 했다.‘미친 거 아니야? 진짜 바닥에서 자려는 거야?’“당신 몸을 생각해서라도 폭신한 침대와 부드러운 이불이 있는 맞은 켠 스위트룸에 가서 자는 게 더 좋지 않을까?”고은서가 애써 그를 설득해 자신의 방에서 내쫓으려고 했다.“방금전에는 바닥에서 자는 게 더 좋다며?”‘아무리 좋다고 해도 네 스위트룸에 있는 침대보다 더 좋겠니?’이미 그녀의 방에 남으려고 마음을 먹은 듯한 곽승재를 보면서 고은서는 순간 인내심이 바닥이 났다.“여기서 자는 것까진 허용해줄게. 그런데 밤중에 몰래 내 침대에 올라오거든 환자라고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땐 진짜 밖으로 내쫓을 거니까 알아서 주의하도록 해.”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베개를 이불 위에 던지고 아까 소파에서 덮고 있던 담요를 가져오더니 이내 이불 위에 누워버렸다.고은서는 어이가 없었지만 입을 꾹 다물고 그를 무시한 채 방금전에 하고 있던 스킨케어를 이어했다.곽승재는 땅에 누워서 고은서를 바라보았다.가녀린 몸매를 가진 그녀는 화장대
비록 그저 영상을 보고 있었을 뿐이지만 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곽승재에게 외도를 들킨 죄책감이 들었다.그러나 그녀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이젠 곽승재랑 부부 사이도 아닌데 내가 왜 이런 일로 죄책감을 느껴야 해?’고은서는 영상 정지 버튼을 누르고 곽승재를 보며 말했다.“가까이 와서 볼래? 그러면 더 잘 보일 텐데.”곽승재는 진짜 그녀의 말대로 바닥에서 일어나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그는 아이패드를 보는 대신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이런 애들이 뭐가 좋아서 그렇게 뚫어지라 쳐다보는 거야?”“볼 곳이 얼마나 많은데. 저 매끈한 몸선과 멋진 춤사위, 당신보다 훨씬 낫거든.”고은서는 일부러 아이패드를 들고 곽승재를 약 올렸다. 그녀는 곽승재가 화를 내면서 아이패드를 빼앗아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이 일을 핑계로 그를 방에서 쫓아낼 수 있었다.그러나 그녀의 생각과 다르게 곽승재는 화를 내는 대신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고은서, 내가 저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몸 관리하면 예전처럼 나한테 관심 가져줄 수 있어?”고은서는 순간 멈칫했다.‘약 잘못 먹은 것도 아닌데 왜 갑자기 이러는 거야?’정장을 입고 춤을 추는 곽승재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그려본 고은서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모습일 것 같았다.“아니. 내가 전에도 말했지만 나 때문에 쓸데없는 일을 하는 건 삼가줬으면 좋겠어. 내가 당신한테 감동 받을 일은 더는 없을 테니까.”그녀의 말을 들은 곽승재의 눈빛이 더 어두워졌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바닥에 누웠다.‘인내심이 날이 갈수록 느는 것 같네.’고은서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동영상을 끝까지 다 보고서야 잠에 들었다.이튿날, 잠에서 깬 고은서는 곽승재가 방 안에 없는 걸 발견했다.자신의 옆자리와 옆에 놓은 베개를 확인해 보았는데 누운 흔적 하나 없이 어젯밤 그대로였다.고은서는 화장실로 들어가 몸에 이상한 흔적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시
고은서는 김치찌개를 반 그릇 정도 먹고 옆에 놓인 육전도 한 점 맛보았는데 육즙이 주르륵 흐르는 바람에 황급히 손을 턱 아래 받쳤다.바로 이때, 그녀의 전화가 울렸다.고은서 손이 기름 범벅이 된 탓에 곽승재가 그녀 대신 폰을 가져다주었다.화면에 뜬 도아름의 전화번호를 확인하자마자 고은서는 어제 그녀에게 부탁한 일을 떠올렸다.그녀는 손을 닦고 폰을 가지고 발코니에 가서 전화를 받았다.“좋은 아침이에요, 아름 언니.”“내가 자는 걸 깨운 건 아니죠?”“아니에요, 방금 아침 먹고 있었어요.”고은서가 웃으면서 답했다.도아름도 따라 웃으면서 그녀에게 대원에 있는 친구에게 비밀리에 고은혜를 보호할 사람을 대신 안배해달라고 이미 부탁했다고 전했다.그리고 그 친구의 연락처를 카톡으로 보냈으니 수시로 연락하면 된다고 말을 보태었다.“진짜 너무 고마워요, 언니.”고은서가 좋아하면서 도아름에게 감사하다고 인사했다.“별로 큰일도 아닌데 괜찮아요. 도움이 필요한 곳이 있으면 얼마든지 연락해요.”“네, 알겠어요!”전화를 끊은 후, 고은서는 도아름 친구의 카톡을 추가했다. 그리고 고은혜에게도 그 친구의 연락처를 보내주면서 그와 연락하라고 당부했다.거실로 돌아갔을 때 곽승재는 이미 아침 식사를 다 마쳤다.“무슨 일 있어?”“아무것도 아니야.”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아침 식사 후 고은서는 곽승재를 병원으로 돌아가라고 방에서 쫓아내고는 이내 원지훈에게 연락했다.원지훈은 오후에 고은혜가 있는 대원으로 가보겠다고 말했다. 그는 별일이 없을 거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비록 도아름 친구에게도 연락해놓은 상황이지만 고은혜의 안전이 달린 일이었기에 고은서는 차마 시름을 놓을 수가 없었다.그러나 백유미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직접 대원까지 따라갈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그저 고은혜에게 조심하라고 신신당부밖에 할 수 없었다.손에 있던 일을 다 처리한 후, 고은서는 웨이터에게 방 청소를 맡기고 제인 제약에 들렀다가 다시 ZY 그룹으로 갔다.사무실
‘어제 회사에 나오지 않아도 별다른 소리 없던 사람이 갑자기 무슨 일로 연락한 거지?’“민 대표님, 무슨 일이세요?”고은서는 아주 공식적인 말투로 물었다.고은서는 민시후가 그녀를 좋아하는 가능성이 아주 작긴 하나 그래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별일 없으면 연락하면 안 돼?”“그러니까 볼 일이 없다는 거지?”고은서가 되물었다.“같이 밥 먹으러 가자.”“나 할 일이 있어...”“고은서, 쓸데없는 생각 좀 그만해. 내가 널 좋아하거든 너한테 도망칠 기회를 줄 것 같아?”민시후가 그녀의 말을 끊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민 대표님, 이런 장난은 안 쳤으면 좋겠는데요...”“알았어. 그저 널 놀리려고 장난친 것 가지고 성가시게 구네. 설마 내가 진짜 널 좋아하겠니? 내려갈 테니까 준비하고 있어.”민시후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그의 사무실은 투자 은행과 다른 층에 있었는데 내려온다고 해도 이삼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고은서가 준비하고 가려고 할 때 계속 자리에 앉아 서류를 정리하고 있는 송민아를 발견했다.“송민아 씨, 아직도 퇴근 안 했어요?”고은서의 목소리에 송민아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짜증과 피곤함으로 가득했다.“상관 마세요. 이 서류들 다 보고 갈 예정이니까요.”“일할 땐 수량보다 질이 우선이에요. 어떻게 하는지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서류를 다 본다고 해도 소용없을 거예요. 퇴근하세요. 내일 시간 되는 대로 어떻게 하는지 제가 알려줄게요.”그러나 송민아는 약간 불쾌하다는 듯 입을 삐죽거리며 반박했다.“회사에 당신밖에 없는 것도 아닌데 내가 왜 당신한테서 배워야 해요? 당신보다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관심해줘도 불만이 그렇게 많아.”바로 이때 민시후가 걸어오면서 차가운 눈길로 송민아를 바라보며 말했다.“고은서가 싫으면 굳이 이곳에서 일할 필요 없어. 다른 편한 자리로 안배해 줄게. 그러면 서로 마주 보며 불쾌해할 일도 없고 좋잖아?”“시후 오빠, 지금 저 무시하는 거예요?”
고은서는 그제야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는 걸 깨달았다.그러나 송민아를 볼 때마다 전생의 자신이 떠오르며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나도 오빠 없이 못 살 정도로 좋아하는 건 아니야!”뒤에서 갑자기 송민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송민아는 여태껏 보지 못했던 견고한 눈빛을 하고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민시후, 어릴 때부터 많은 사람이 계속 네가 내 남편이 될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않았으면 나도 널 이렇게까지 좋아하려고 하지 않았을 거야! 사실대로 말하자면 너도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거든!”민시후는 아무렇지 않다는 송민아를 힐끗 보면서 말했다.“지금까지 들은 소식 중에서 제일 좋은 소식인 것 같네. 얼른 돌아가서 약혼을 없었던 일로 하자고 가족들한테 전해.”“너!”송민아는 화가 난 탓에 얼굴이 빨개졌다. 그러나 그녀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를 악문 채 씩씩거리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고은서는 송민아가 민시후를 향한 사랑을 거두어들이는 데 시간이 걸릴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직접 민시후를 향해 저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주 좋은 스타트였다.“쉽게 가질 수 있는 걸 소중히 여기지 않는 건 모든 남자들의 본성인 거야?”고은서가 물었다.“그것도 상대가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다르지. 글쎄 너라면 이유가 뭐든 상관없이 나랑 만나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소중히 여길 것 같은데.”민시후가 껄렁껄렁한 말투로 답했다.고은서는 성가시다는 듯 그를 힐끗 쏘아보고는 다른 엘리베이터에 올랐다.민시후와 저녁을 먹은 후 그녀는 호텔로 돌아갔다.그녀가 고은혜에게 연락해 현재 상황에 관해 물으려고 할 때 갑자기 원지훈한테서 문자가 왔다.무슨 원인인지 모르겠지만 백유미가 갑자기 계획을 미루자고 한다는 내용이었다.이 문자를 확인한 고은서는 눈살을 찌푸렸다.[혹시 우리 계획을 알아차린 건 아니지?][모르겠어요. 원래도 신중한 편이어서 조금이라도 수상한 부분이 있으면 계획을 뒤로 미루곤 했었어요.][요즘 어머니께서 백유미
가끔 고은서와 쇼핑하는 것 외에는 가정에만 집중했었다. 매일 집안일로 바삐 돌아 채야 했고 또 수많은 온씨 집안 규칙으로 골치 아파했다.전에 고은서가 그녀를 남편밖에 모른다고 하면서 모든 시간을 가정에 몰 붓는다고 장난치곤 했었는데 사실 온승준이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은 아주 드물었다. 심지어 휴식날에도 그는 조용히 혼자 있는 걸 좋아했고 외출하는 걸 꺼려했다.운호 산장에 갔던 때도 그녀가 한참 타일러서야 함께 나선 것이었다.박지연은 코미디 영화 한 편을 선택한 후 팝콘과 콜라까지 챙기고 영화관 입장 시간을 기다렸다. 비록 모든 게 온승준이 평소에 싫어하는 것들이지만 지금은 혼자였기에 별 상관이 없었다.“지연 씨?”박지연이 영화관에 입장하려고 할 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뒤돌아보니 육현석이었다.그의 곁에는 화려한 옷차림을 한 친구들이 북적북적했는데 그의 목소리에 그들의 시선이 박지연한테로 쏠렸다.“여기서 만나게 되네요. 현석 씨도 영화 보러 온 거예요?”박지연이 나긋하게 웃으면서 말했다.“네, 룸 하나를 전세 내고 맡았는데 우리 이쁜 아가씨도 함께 볼래요?”육현석 옆에 있던 친구 한 명이 그녀를 향해 인사했다.박지연은 손에 있는 영화표를 그들에게 보여주며 말했다.“기회 되면 다음에 같이 봐요. 오늘은 이미 표까지 다 구매해서 안 될 것 같네요.”“괜찮아요. 무슨 영화 보는데요? 룸 하나 더 맡으면 되죠.”육현석의 또 다른 친구가 말을 보태었다.“창피하게 굴지 말고 입 다물고 저리 가.”육현석이 보다 못해 그들을 쫓았다. 그는 희희덕거리며 VIP룸으로 들어가는 친구들을 보며 박지연을 향해 설명했다.“원래 저런 성격이에요. 나쁜 애들은 아니니까 너무 기분 나빠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별일도 아닌데 제가 왜 기분 나빠하겠어요. 얼른 가보세요. 저도 곧 방영 시간이라 들어가야 해요.”박지연은 생긋 웃으면서 말했다.육현석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박지연이 룸에 들어가 자리에 앉자마자 육현석이 따라 들어왔다
“곽 대표님은 제가 그렇게 싫으세요? 병뚜껑 열어주는 것조차 꺼릴 만큼?”여시은의 말투에는 약간의 유감과 억지로 짜낸 서운함이 섞여 있었다.곽승재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시은 씨가 원하는 건 물을 마시는 결과가 아닌가요? 물을 마실 수 있으면 되지, 누가 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잖아요.”“왜 중요하지 않아요?”여시은은 눈을 깜박이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농담을 던졌다.“저는 곽 대표님이 열어준 병의 물만 마시고 싶은데요.”노골적인 애정 공세에 곽승재는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여시은은 전혀 민망한 기색이 없이 여전히 공세를 이어갔다.“솔직히 말할게요.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우리가 천생연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두 집안 어른의 뜻대로 조금씩 알아가면 안 될까요?”곽승재는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우리 집안에서 할머니와 어머니는 정략결혼을 반대하세요. 아버지의 일방적인 희망 사항일 뿐이죠.”“그리고 이미 말씀드렸듯이 저는 재혼 계획이 없습니다.”여시은은 여전히 달콤한 미소를 유지했다.“당장 결혼하자는 뜻은 아니에요. 어쩌면 만나다가 전혀 안 맞는다는 걸 깨달을 수도 있잖아요?”“그럴 필요 없어요. 저는 시은 씨와 맞지 않아요.”곽승재는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고은서는 원래 활발하고 웃음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저와 결혼한 후 시들어버렸고,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온갖 방법을 다해 저한테서 도망쳤어요. 이혼한 후 그 여자는 다시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 됐죠. 그러니 저는 남편으로 자격 미달이에요.”“시은 씨는 여 회장님께서 애지중지하는 따님이고 조건이 우월하니 더 나은 남자를 만나셔야죠.”여시은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저는 고은서와 달라요. 고은서는 완전한 사랑을 원했지만 저는 조건이 맞는 파트너면 돼요.”“사랑이 있으면 금상첨화이고 없어도 상관없어요.”그녀는 돌직구를 날렸다.“제가 고은서보다 승재 씨에게 더 잘 맞는다고 생각해요. 고은서 만큼 똑똑하거나 유능하지는 않지만, 이게 남자들에게는 장
“아니, 유일 투자은행 개업식에서 여재훈 씨가 테이프 커팅에 참석했었잖아. 그때 외할아버지와 삼촌도 있었는데 서로 아는 눈치가 아니었어.”고은서는 말을 이어갔다.“당신도 우리 삼촌을 알잖아. 조금이라도 연줄이 될 만한 사람이라면 절대 놓치지 않지. 여재훈 씨와 단 한 번이라도 만난 적이 있었다면 당장 달려가서 인사하고 관계를 맺으려고 했을 거야.”사실 그날 삼촌은 여재훈과 안면을 트려고 했지만, 여재훈 주변에 중요 인물들이 너무 많아 접근할 수 없었다. 게다가 외할아버지가 말리는 바람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여시은이 오직 당신 때문에 나를 저격하는 거라고 생각해.”“당신들 둘이 Y국에서 만난 적 있잖아. 여시은은 그때 당신에게 첫눈에 반했을 거야.”고은서의 분석이 정확할 수도 있다.곽승재는 이전에 곽현수에게 왜 백유미를 귀국시켜 그와 고은서의 결혼 생활을 망쳤냐고 따진 적이 있었다.그때 곽현수는 고씨 가문이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며 여시은이 적합한 상대라고 말했었다.곽현수는 단지 할머니 때문에, 그리고 여씨 가문이 입방아에 오르는 것을 원치 않아서 이혼을 강요하지 않았을 뿐이다.여시은도 Y국의 파티에서 만난 두 집안 어른들이 둘을 만나게 하려 했고, 그녀도 그와의 정략결혼에 긍정적인 태도였다고 인정한 바 있다.고은서의 분석이 맞았지만 곽승재는 마음이 전혀 홀가분하지 않았다.그녀의 말투가 너무나 차분했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을 말하는 것처럼.곽승재는 고은서의 태도에서 자신을 향한 감정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가슴 속에서 둔탁한 통증이 밀려왔다.겨우 감정을 추스르고 입을 열려는 순간, 회의실 방향에서 여시은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곽승재는 일이 있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그 사이 눈앞까지 다가온 여시은이 배려심 있게 말했다.“곽 대표님, 일이 있으면 먼저 처리하세요. 10분 쉬고 회의를 계속한다고 전할게요.”여시은은 말하면서 생수 한 병을 곽승재에게 건넸다.곽승재는 거절의 뜻으로 고개를 저
“외할아버지, 숙모 말로는 엄마가 북성에 있을 때 가슴 아픈 연애사가 있었던 것 같대요. 제 생부는 아닐 거라고 하는데, 외할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고은서는 돌직구를 날렸다.“그럴 리 없어. 네 엄마는 활발하고 낭만적인 성격이었지만 고집스러운 면도 있었어. 쉽게 마음을 주지 않지만 한번 주면 절대 뒤돌아보지 않았어.”고준석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 점에서는 네가 엄마를 똑 닮았어. 그래서 그때 곽승재와의 결혼을 허락했던 건데...”‘왜 갑자기 내 얘기로 넘어간 거지?’“북성에 연인이 없었거나, 있었다면 제 생부란 말씀인가요?”고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생부일 가능성이 낮아. 북성에서 돌아왔을 때 다른 곳에서 돌아왔을 때와 별다른 정서 변화가 없었거든.”고준석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엄마가 유부남과 엮였을 리 없어. 송민준 부모의 이혼이 엄마와 상관없을 거야.’“오히려 해외에 머물던 어느 날 전화가 와서 깜짝선물을 준비했다며 신난 목소리로 말한 적이 있어.”말을 이어가던 고준석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연애하는 줄 알고 기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렇게 될 줄은...”“은서야, 네 엄마가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네 생부 때문에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알아.”고준석은 외손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때 네 엄마는 치료가 안 되는 불치병을 앓은 것도 아니었어.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가슴에 품고 너무 지쳐서 벗어나고 싶었던 거지...”목이 멘 듯한 외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은서도 코끝이 찡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노인의 아픔을 다시 건드린 자신이 미웠다.고은서는 고준석의 손을 꼭 잡았다.“외할아버지,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엄마는 외할아버지같이 이해심이 넘치는 분을 아버지로 두어 너무 행복했을 거예요.”하지만 고준석은 더 슬퍼 보였다.“가끔은 내가 너무 자유를 준 것은 아닌지 생각할 때도 있어. 조금 구속했으면 사랑 때문에 큰 상처를 받을 일도 없지 않았을까?”
고은서는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엄마가 미혼모 신분으로 나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북성에 첫사랑까지 있었다고? 이렇게 복잡한 연애사가 있었다니.’“내가 그냥 제멋대로 추측한 거야. 연인 관계가 아니라 형님 마음을 아프게 한 친구일 수도 있지.”단은숙은 가방을 손에 들고 고은서에게 주의를 주었다.“이 얘기를 외할아버지나 삼촌한테 절대 하지 마. 내가 또 쓸데없는 소리 했다고 나무랄 거야.”외할아버지는 고은서의 엄마를 각별히 아꼈다. 미혼모가 됐어도 한 마디 비난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슴 아파하며 그녀의 과거를 캐묻지 않았다.외할아버지의 말씀대로 집은 따뜻한 피난처였고, 엄마는 그 안에서 조용히 상처를 치유했다. 말할 수 있는 건 스스로 털어놓을 것이고, 입을 다물고 있다면 아픈 기억일 테니 가족들이 상처를 건드릴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고은서의 엄마는 조향사로서 천재적 재능을 보였다. MQ의 베스트셀러 향수가 바로 그녀의 작품이었고, 이는 MQ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그래서 삼촌 부부도 그녀의 사생활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다.가족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니 주변 사람들도 무시하지 못했다. 그래서 고은서는 지금까지 아버지가 없는 것이 큰 결핍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씨 가문을 노리는 세력이 나타나서 진상을 파헤쳐야 하는 상황이 되지 않았다면, 평생 엄마의 과거를 캐지 않았을 것이다.단은숙은 가방을 부인들 단톡방에서 자랑하기 위해 급히 방으로 들어갔다.고은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엄마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엄마는 북성에서 무슨 일을 겪었을까? 정말 첫사랑이 있을까? 혹시 송씨 집안 사람?’문득 송민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송민준과 송민아는 이복남매였다.‘그렇다면 송민준의 친모가 아버지와 이혼하셨다는 건데, 설마 엄마가 두 분 사이에 끼어든 건 아니겠지?’이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고은서는 등골이 오싹해졌다.만약 송민준이 정말 C선생이라면, 그가 고씨 가문을 증오하는 이유는 충분하다.하지만 고은서는 엄마
“네 엄마는 아는 사람이 많지만 송씨 집안 사람과 안면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고준석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은서야, 왜 갑자기 송씨 집안 사람을 아는지 묻는 거야? 무슨 일이라도 생겼니?”아직 모든 게 오리무중이라 고은서는 외할아버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제가 그 집안 따님이랑 친한 친구이고 아드님과도 아는 사이라 인연이 있는 것 같아서 혹시 어른끼리 아는 사이가 아닌지 여쭤본 거예요.”“집안 어른까지 알아보면서 결혼 생각이 없다고?”단은숙이 다시 흥분했다.“은서야, 솔직히 말해봐. 그 송민준이라는 청년이 너를 좋아하지? 너를 쫓아다니지?”고은서는 황당해하며 부인했다.“아니에요. 절대 그럴 일이 없어요. 저와 송민준은 그냥 친구예요. 그리고 제가 만약 결혼할 마음이 생기면 반드시 숙모께 첫 번째로 말씀드릴게요.”“여보, 자꾸 결혼 얘기로 애를 못살게 굴지 마. 우리 은서는 능력도 뛰어난데 시집가지 않아도 괜찮아.”고국성이 뜻밖에 그녀 편을 들어주었다. 영악하고 연줄을 대기 좋아하는 삼촌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더 놀라운 것은, 숙모가 화내거나 반박하지 않고 그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 것이다.“당장 결혼하라고 닦달한 것도 아니잖아요. 곽승재와 비슷한 조건의 남자가 있다면 놓치지 말아야죠...”“괜찮아요. 숙모도 저를 걱정해서 그러시는 거죠.”고은서는 적당히 무마한 후 넉살스럽게 단은숙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숙모, 제가 최근에 G브랜드 핸드백을 샀는데 디자인이 예뻐요. 한번 보실래요? 마음에 드시면 드릴게요.”이렇게 좋은 일을 마다할 리 없는 단은숙은 급히 일어섰다.“아이고, 은서가 숙모 생각도 해주고! 은혜 그 계집애보다 백배 낫네.”“엄마, 다 들려!”멀지 않은 곳에 있던 고은혜가 기분 상한 듯 소리쳤다.“들리든 말든. 내가 틀린 말 했나?”단은숙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은서와 함께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고은서는 차에서 포장
고준석과 고국성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해성의 곽씨 일가, 북성의 송씨 가문, 민씨 가문은 모두 명문가였다.“당연히 알지.”남편과 시아버지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단은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송씨 집안의 가주가 훈훈한 외모를 가진, 유명한 독신남이라는 것도 알아.”“은서야, 송씨 가문은 왜 물어?”단은숙이 갑자기 소리 질렀다.“너 설마 송씨 가문에 시집가려고?”“맞네! 송씨 가문이 해성에 지사를 세웠다더니 너와 사업 거래가 있었구나.”단은숙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그 집안 아드님이 우리 은서 얼굴을 보고 첫눈에 반한 게 틀림없어.”“...”그녀가 한 마디 물었을 뿐인데, 숙모는 기관총 쏘듯 수십 마디를 내뱉었다. ‘첫눈에 반했다’, ‘결혼한다’, 이런 말까지 나오니 고은서는 어느 것부터 반박해야 할지 난감했다.“바쁜 애가 언제 연애할 시간이 있겠어? 넘겨짚지 말고 은서 말을 들어보자꾸나.”단은숙은 화내지 않고 고은서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정확한 소식을 기다렸다.명문가와의 혼인, 이에 대한 숙모의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 고은서는 알고 있었다.“숙모, 너무 상상의 나래를 펼쳤어요. 어떻게 아무 남자나 저를 좋아하고 저와 결혼하려고 하겠어요? 저는 그저 우리가 과거에 송씨 가문과 무슨 거래가 없었는지 알고 싶을 뿐이에요.”이 말을 듣고 순식간에 흥미를 잃은 단은숙은 모른다고 했다.고준석과 고국성도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고씨 가문은 줄곧 북성에 있었던 송씨 가문과 거래할 기회가 없었다.“사업 거래도 없었어요? 송씨 가문에서 향료와 관련된 사업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고은서는 꼬치꼬치 캐물었다.“아니면 두 분이 사업차 북성에 갔다가 송씨 가문 사람과 마주친 적도 없으세요?”고국성이 입을 열었다.“송씨 가문은 줄곧 부동산 사업을 해왔고 송민준이 개척한 새로운 사업도 향료와는 무관한데, 우리와 무슨 사업 거래가 있었겠어?”고준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예상했던 결과였다.‘하지만 두 가문이 아예 모르는 사이
건전복 상자를 들고 주방에서 나오던 단은숙이 고은서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은서 왔어?”그녀가 고국성의 일을 도와준 뒤로 단은숙은 그녀를 훨씬 살갑게 대했다. 얼마나 진심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녀를 존중하고 예의를 차리기 시작했다.단은숙의 목소리를 들은 다른 사람들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은서야, 거기 서서 뭐 해? 얼른 외할아버지 곁으로 와.”고준석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고은서는 미소 띤 얼굴로 모두에게 인사하면서 고준석 곁으로 갔다.아내의 부름을 받은 고국성은 식재료를 손질하러 주방에 갔고, 고은서는 외할아버지 곁에 앉았다.“은서야, 너 살이 좀 빠진 것 같다. 요즘 밥은 잘 챙겨 먹니?”외할아버지는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일이 바빠도 쉴 때는 제대로 쉬어야지.”“할아버지 너무 해요.”고은혜가 입을 삐죽거리며 끼어들었다.“저한테는 살이 찐 게 아니냐고 하시더니 언니한테는 살이 빠졌다고 하시고. 언니만 일이 바쁜 게 아니라 저도 바쁘거든요.”고준석이 자애롭게 웃으며 그녀를 놀렸다.“일이 바쁜지는 모르겠지만, 군턱이 진 것을 보니 끼니는 굶지 않은 것 같구나.”“할아버지, 저 군턱이 지지 않았어요.”오기가 생긴 고은혜는 증명해 보이려고 목을 쭉 빼 들었다.“보세요. 전혀 안... 콜록!”목을 너무 세게 빼든 탓에 말이 끝나기 전에 사레가 들렸다.그녀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연거푸 기침했다. 유성준이 어이없는 듯한 표정으로 물과 휴지를 건넸다.“회사에서 센 척하더니 집에서도 이러네.”“콜록콜록! 제가 언제 센 척했다고 그래요? 저는 그런 적이 없어요. 콜록!”고은혜는 기침하면서도 발끈했다.이 정겨운 모습을 보고, 고은서는 문득 유성준과 고은혜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은 부드럽고 세심한 반면, 다른 한 사람은 덜렁대는 성격이다.다만 숙모 단은숙이 동의할지 모르겠다. 고은혜가 명문가에 시집가 상류층에 진입하기를 바라는 그녀였다.유성준도 집안이나 능력이 빠지지 않았지만,
고은서가 이미 생각을 정했다는 것을 확인한 곽승재는 더 이상 의견을 내지 않고 단지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할 말을 다 한 고은서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늦었는데 일찍 들어가 쉬어.”곽승재는 좀 더 있고 싶었지만, 억지로 머물 핑계를 찾지 않고 소파에서 일어났다.때마침 영상전화가 걸려 오자, 고은서는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고 영상전화를 받았다.문 쪽으로 걸어가던 곽승재가 무심결에 돌아보니, 그녀는 어느새 소파에 벌러덩 누워 한쪽 발을 다른쪽 무릎에 올리고 흔들거리고 있었다. 진지하고 엄숙했던 조금 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여유롭고 편안한 모습이었다.곽승재는 이혼하기 전의 일이 문득 떠올랐다. 한번은 그가 외할아버지 댁에 같이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은서가 삐진 적이 있었다. 그녀가 며칠째 외할아버지 댁에 머물며 집에 돌아오지 않자, 이 일을 알게 된 할머니가 그를 고씨 가문으로 보냈다.그때의 고은서도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편안한 실내복 차림으로 소파에 엎드려 두 발을 흔들거리며 아이패드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맨발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곽승재는 그 순간 모든 불쾌감이 사라졌다. 원래 불만 가득했던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은서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 도우미가 말을 걸어서야 정신을 차렸다.다시 모습을 드러낸 고은서는 흠 잡을 데 없이 단정한 차림에 화장도 완벽하게 끝낸 상태였다.그와 함께 마구 뛰던 곽승재의 심장도 평온을 찾았다. 고은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해서 잠깐 넋을 잃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그것이 실은 설렘의 순간이었다는 것을 끝내 깨닫지 못했다...고은서와 이야기하던 중, 고은혜가 문 쪽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언니, 저기 혹시... 형부?”고은서가 몸을 뒤로 젖힌 채,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는 여전히 문어귀에 서 있었다.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잘생긴 얼굴에서 고통스러운 기색이 언뜻 보였다.‘갑자기 왜 저런 표정이지?’고은서가 자세히 보려고 일어났을 때는 그가
“당시 시은이가 부상당한 쿠아를 쫓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일에 대한 기억이 전부 시은이가 쿠아를 구해 준 그 따뜻한 장면으로만 남아있어. 시은이가 왜 거기에 있었을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고은서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곽승재는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고은서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두려워하지 마, 자책하지도 마. 아무도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할 거야.”곽승재가 부드럽게 위로했다. “내가 민기 씨에게 송민준과 시은 씨사이의 관계를 조사해 보라고 시켰어.”고은서는 살며시 손을 빼냈다. “그럼 부탁할게.”곽승재는 살짝 실망한 표정을 애써 숨기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시은이가 당신과 결혼을 하려 하기에 날 싫어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가 가. 하지만 송민준은 왜 나를 미워할까?” 고은서가 의문을 제기했다.비록 그녀가 예전에 민시후와 가까웠다고 해도 고씨 가문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었다.게다가 유미 씨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귀국한 것은 곽 회장님의 뜻뿐만 아니라 이 C 선생의 지시도 있었다고 했다. 그 시절 자신은 민시후와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었다.‘고씨 가문이 송민준에게 크게 잘못한 거라도 있나?’고은서는 머리가 터질 정도로 생각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곽승재도 이 일의 전후 관계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우리의 추측일 뿐이야. 증거 없이는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 없으니 서두르지 마.”고은서는 급할 수밖에 없었다. 뒤에 숨은 검은 손을 잡아내지 못하면 그녀와 고씨 가문은 영원히 불안에 떨어야 했다.전생의 비극적 결말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범인을 색출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곽승재는 고은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MQ에 관련된 일은 내가 사람을 시켜 주의 깊게 보고 있어. 무슨 움직임이 생기면 바로 나에게 보고할 거야.”고은서는 곽승재가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사실에 놀랐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곽승재를 바라보았다.거실의 하얀 색 조명 아래서 그의 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