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회사에 나오지 않아도 별다른 소리 없던 사람이 갑자기 무슨 일로 연락한 거지?’“민 대표님, 무슨 일이세요?”고은서는 아주 공식적인 말투로 물었다.고은서는 민시후가 그녀를 좋아하는 가능성이 아주 작긴 하나 그래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별일 없으면 연락하면 안 돼?”“그러니까 볼 일이 없다는 거지?”고은서가 되물었다.“같이 밥 먹으러 가자.”“나 할 일이 있어...”“고은서, 쓸데없는 생각 좀 그만해. 내가 널 좋아하거든 너한테 도망칠 기회를 줄 것 같아?”민시후가 그녀의 말을 끊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민 대표님, 이런 장난은 안 쳤으면 좋겠는데요...”“알았어. 그저 널 놀리려고 장난친 것 가지고 성가시게 구네. 설마 내가 진짜 널 좋아하겠니? 내려갈 테니까 준비하고 있어.”민시후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그의 사무실은 투자 은행과 다른 층에 있었는데 내려온다고 해도 이삼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고은서가 준비하고 가려고 할 때 계속 자리에 앉아 서류를 정리하고 있는 송민아를 발견했다.“송민아 씨, 아직도 퇴근 안 했어요?”고은서의 목소리에 송민아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짜증과 피곤함으로 가득했다.“상관 마세요. 이 서류들 다 보고 갈 예정이니까요.”“일할 땐 수량보다 질이 우선이에요. 어떻게 하는지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서류를 다 본다고 해도 소용없을 거예요. 퇴근하세요. 내일 시간 되는 대로 어떻게 하는지 제가 알려줄게요.”그러나 송민아는 약간 불쾌하다는 듯 입을 삐죽거리며 반박했다.“회사에 당신밖에 없는 것도 아닌데 내가 왜 당신한테서 배워야 해요? 당신보다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관심해줘도 불만이 그렇게 많아.”바로 이때 민시후가 걸어오면서 차가운 눈길로 송민아를 바라보며 말했다.“고은서가 싫으면 굳이 이곳에서 일할 필요 없어. 다른 편한 자리로 안배해 줄게. 그러면 서로 마주 보며 불쾌해할 일도 없고 좋잖아?”“시후 오빠, 지금 저 무시하는 거예요?”
고은서는 그제야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는 걸 깨달았다.그러나 송민아를 볼 때마다 전생의 자신이 떠오르며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나도 오빠 없이 못 살 정도로 좋아하는 건 아니야!”뒤에서 갑자기 송민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송민아는 여태껏 보지 못했던 견고한 눈빛을 하고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민시후, 어릴 때부터 많은 사람이 계속 네가 내 남편이 될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않았으면 나도 널 이렇게까지 좋아하려고 하지 않았을 거야! 사실대로 말하자면 너도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거든!”민시후는 아무렇지 않다는 송민아를 힐끗 보면서 말했다.“지금까지 들은 소식 중에서 제일 좋은 소식인 것 같네. 얼른 돌아가서 약혼을 없었던 일로 하자고 가족들한테 전해.”“너!”송민아는 화가 난 탓에 얼굴이 빨개졌다. 그러나 그녀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를 악문 채 씩씩거리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고은서는 송민아가 민시후를 향한 사랑을 거두어들이는 데 시간이 걸릴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직접 민시후를 향해 저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주 좋은 스타트였다.“쉽게 가질 수 있는 걸 소중히 여기지 않는 건 모든 남자들의 본성인 거야?”고은서가 물었다.“그것도 상대가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다르지. 글쎄 너라면 이유가 뭐든 상관없이 나랑 만나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소중히 여길 것 같은데.”민시후가 껄렁껄렁한 말투로 답했다.고은서는 성가시다는 듯 그를 힐끗 쏘아보고는 다른 엘리베이터에 올랐다.민시후와 저녁을 먹은 후 그녀는 호텔로 돌아갔다.그녀가 고은혜에게 연락해 현재 상황에 관해 물으려고 할 때 갑자기 원지훈한테서 문자가 왔다.무슨 원인인지 모르겠지만 백유미가 갑자기 계획을 미루자고 한다는 내용이었다.이 문자를 확인한 고은서는 눈살을 찌푸렸다.[혹시 우리 계획을 알아차린 건 아니지?][모르겠어요. 원래도 신중한 편이어서 조금이라도 수상한 부분이 있으면 계획을 뒤로 미루곤 했었어요.][요즘 어머니께서 백유미
가끔 고은서와 쇼핑하는 것 외에는 가정에만 집중했었다. 매일 집안일로 바삐 돌아 채야 했고 또 수많은 온씨 집안 규칙으로 골치 아파했다.전에 고은서가 그녀를 남편밖에 모른다고 하면서 모든 시간을 가정에 몰 붓는다고 장난치곤 했었는데 사실 온승준이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은 아주 드물었다. 심지어 휴식날에도 그는 조용히 혼자 있는 걸 좋아했고 외출하는 걸 꺼려했다.운호 산장에 갔던 때도 그녀가 한참 타일러서야 함께 나선 것이었다.박지연은 코미디 영화 한 편을 선택한 후 팝콘과 콜라까지 챙기고 영화관 입장 시간을 기다렸다. 비록 모든 게 온승준이 평소에 싫어하는 것들이지만 지금은 혼자였기에 별 상관이 없었다.“지연 씨?”박지연이 영화관에 입장하려고 할 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뒤돌아보니 육현석이었다.그의 곁에는 화려한 옷차림을 한 친구들이 북적북적했는데 그의 목소리에 그들의 시선이 박지연한테로 쏠렸다.“여기서 만나게 되네요. 현석 씨도 영화 보러 온 거예요?”박지연이 나긋하게 웃으면서 말했다.“네, 룸 하나를 전세 내고 맡았는데 우리 이쁜 아가씨도 함께 볼래요?”육현석 옆에 있던 친구 한 명이 그녀를 향해 인사했다.박지연은 손에 있는 영화표를 그들에게 보여주며 말했다.“기회 되면 다음에 같이 봐요. 오늘은 이미 표까지 다 구매해서 안 될 것 같네요.”“괜찮아요. 무슨 영화 보는데요? 룸 하나 더 맡으면 되죠.”육현석의 또 다른 친구가 말을 보태었다.“창피하게 굴지 말고 입 다물고 저리 가.”육현석이 보다 못해 그들을 쫓았다. 그는 희희덕거리며 VIP룸으로 들어가는 친구들을 보며 박지연을 향해 설명했다.“원래 저런 성격이에요. 나쁜 애들은 아니니까 너무 기분 나빠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별일도 아닌데 제가 왜 기분 나빠하겠어요. 얼른 가보세요. 저도 곧 방영 시간이라 들어가야 해요.”박지연은 생긋 웃으면서 말했다.육현석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박지연이 룸에 들어가 자리에 앉자마자 육현석이 따라 들어왔다
육현석은 눈치 있게 더는 묻지 않았다.“스트레스 다 풀리게 한 잔 더 마셔.”두 사람은 너무 늦게까지 마시지 않았다. 육현석의 친구들도 영화 관람을 마치고 그를 찾으러 칵테일바로 왔다.박지연은 밤이 더 깊어지기 전에 먼저 가기로 했다.육현석도 그녀를 잡지 않았다.“기사한테 데려다주라고 말해 놓을게.”박지연이 그의 호의를 거절하려고 할 때 그가 말을 보태었다.“이 늦은 시간에 여자애 혼자 집 가는 게 위험해 보여서 그러는 거야. 내 말 듣고 안전하게 집으로 가.”박지연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육현석은 그녀를 차에 태워주고 칵테일바로 다시 돌아갔는데 친구들은 그를 보자마자 장난치기 시작했다.“어머, 보내주기 싫은 거 보내는 거 아니야? 직접 차에 태워주기까지 하고 말이야.”그러나 육현석이 엄숙한 목소리로 반박했다.“닥쳐! 이미 가정이 있는 사람이야. 장난도 정도껏 쳐야지.”그의 말을 들은 친구들은 하나둘씩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육현석의 심각한 표정 때문에 더는 장난치지 않았다.집으로 돌아간 박지연은 집 안 불이 켜져 있는 걸 발견했다.그녀는 슬리퍼로 갈아신고 거실로 들어서자마자 소파에 앉아있는 조수연을 보았다.조수연은 그녀를 보자마자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입을 열었다.“어디 갔다 오는 거야? 전화는 왜 또 안 받아?”박지연은 가방을 내려놓으며 답했다.“영화 보러 갔다 왔어요.”“집안일도 하지 않고 내 전화도 받지 않으면서 지금 영화 보러 갔다 왔다는 거야?”“무음모드로 해놓아서 받지 못했어요. 무슨 일이세요?”박지연은 서재 쪽을 힐끔 보았는데 불이 켜져 있었다. 그 말인즉슨 온승준도 집에 있다는 것이다.“내가 무슨 일로 왔는지 뻔히 알면서 뭘 물어? 대체 넌 뭐 하고 사는 거니? 승준이 아침도 챙겨주지 않고 집안이 이 정도로 어지럽혀졌는데도 청소할 줄도 모르고 심지어 그릇도 이틀째 씻지 않았다며? 아내 노릇을 할 것이면 제대로 해야지!”박지연은 조수연의 잔소리에 응대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미간을 어루만지
박지연은 뒤로 한발 물러서면서 조수연의 손을 피했다.그러나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발이 걸리면서 나무 소파로 넘어지며 머리를 부딪쳤다.그녀는 갑작스레 밀려오는 고통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어머니, 그만 하세요!”온승준은 박지연을 때리려고 하는 조수연을 막았다.“승준아, 아직도 저년 편을 드는 거야?”조수연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얼마나 거만하게 구는지 너도 봤지? 집안일은 하나도 하지 않고 영화 보러 간 것도 모자라 술까지 마시고 온다는 게 말이 돼? 게다가 돌아오자마자 내 화를 돋우잖아! 이러다가 나중에 널 짓밟으려 할지도 모른다니까!”“어머니, 먼저 돌아가세요. 제가 잘 얘기할게요.”온승준이 조수연을 달랬다.그녀는 박지연한테 이런 대우를 받는 건 처음이라 화가 많이 났지만 내일 출근하는 아들을 보아서라도 참고 먼저 돌아갈 생각이었다.“내일 승준이가 출근하자마자 우리 집으로 와서 오늘 있었던 일을 잘 설명하도록 해.”조수연이 박지연을 향해 손가락질하면서 말했다.박지연은 헛웃음을 치면서 일어나 말했다.“그냥 오늘에 모든 걸 다 끝내죠. 저 이젠 그쪽 며느리 노릇 못하겠어요. 그리고 당신 아들도 이젠 더는 못 모시겠어요.”“너!”조수연은 박지연의 태도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이내 그녀를 향해 비아냥거렸다.“우리가 너한테 온씨 집안 며느리로 들어오라고 빈 것처럼 말하지 마! 우리 승준이처럼 우수한 애한테 시집오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승준이랑 결혼하게 된 걸 영광으로 생각해야지!”“어머니! 늦었으니 얼른 돌아가세요. 제가 아파트 밖까지 모셔다드릴게요.”온승준이 조수연을 막으면서 그녀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려고 했다.“그만 재촉해! 쟤 지금 내 머리 위로 기어오르려고 하잖아...”조수연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면서 더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박지연의 화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심지어 점점 더 세게 들끓어 올랐다.억울함과 분노가 함께 뒤섞이면서 집 안 곳곳을 잿더미로 만들고 싶을 정도로 곧 한계에
박지연은 몸도 마음도 다 지쳐갔다.내고 싶던 화도 다 냈고 순간 몸에 힘이 풀렸다.“온승준, 우리 이혼하자. 내일 마침 출근인데 시간 되는 대로 수속 밟으러 가자.”온승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전화 안 받고 늦게까지 술 마시고 또 집안을 아수라장으로 만든 건 없었던 일로 해줄게. 내일 어머니한테 사과하러 다녀와. 그러면 좋게 넘어가 줄게.”그의 말을 들은 박지연은 냉소를 흘렸다.‘사과하면 없었던 일로 해준다고? 끝까지 다 내 탓이라고만 생각하는 거네.’“그렇게 총명한 사람이 왜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당신은 날 탓할 자격이 없어. 그리고 내가 왜 사과해야 하는 거지?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당신이랑 이혼할 거야.”인내심이 바닥난 온승준은 더는 이런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그는 평소에 조수연과 자신의 말이라면 고분고분 다 들어주던 박지연이 왜 갑자기 며칠째 난동을 부리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지연아, 고집을 부린다고 일이 해결되는 건 아니야. 월급카드 외에 또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으면 이번 기회에 다 말해.”박지연도 온승준의 인내심이 바닥났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녀 또한 더는 그와 다투고 싶지 않았다.“딱 한 가지야. 도대체 내일 이혼하러 갈 시간이 되는 거야 안 되는 거야?”온승준은 성가시다는 듯 미간을 어루만지며 답했다.“내일 수술만 두 개야. 너...”“그럼 모레 구청에서 만나.”박지연은 온승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파에서 일어서면서 말했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으로 걸어 들어가서는 방문을 쾅하고 닫아버렸다.박지연에게서 방금전에 있었던 일을 전해 들은 고은서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온승준과 조수연을 때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귀부인처럼 오만하게 굴더니 하는 행동이라고는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네.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시비 거는 것도 모자라서 이젠 너한테 손대려고까지 한단 말이야?”고은서는 씩씩거리며 말했다.“당장 이혼하고 나와. 그까짓 온씨 집안 며느리
“이혼 수속 끝내자마자 전에 온승준을 위해 샀던 물건들까지 다 가지고 나와. 아무튼 네 시어머니라는 사람도 네가 산 물건들이 싸구려라면서 눈여겨보지도 않았잖아. 하나도 남김없이 다 가지고 나와.”그러나 고은서와 달리 박지연은 아주 덤덤해 보였다.“됐어. 이혼만 하면 되는데 굳이 원수 사이로 남을 필요는 없잖아.”고은서는 박지연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혼만 순리롭게 할 수만 있다면 그까짓 옷쯤이야 버리는 셈 쳐도 되지.’“지연아, 우리 쇼핑하러 가자. 마음에 드는 거 있으면 다 사. 내 카드 줄 테니까 원하는 대로 마음껏 긁어.”박지연은 망설임 없이 카드를 내미는 고은서를 보며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설마 오래전부터 나한테 관심 있었던 건 아니지? 마치 내가 이혼하길 학수고대한 구애자처럼 말하는 거 같은데.”고은서는 아주 당당하게 인정했다.“맞아. 오래전부터 네가 이혼하길 기다렸어.”박지연이 빨리 이혼해야만 그 집안에서 더 빨리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적어도 이번 생에 타지으로 가게 되는 일은 막을 수 있었다.박지연의 물건을 새집으로 옮긴 후 고은서는 집안을 한 바퀴 삥 돌면서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뒤돌아 박지연의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얼른 쇼핑하러 가자. 일상용품들도 꽤 사야 할 것 같아.”박지연은 더는 거절하지 않고 그녀와 함께 나섰다.고은서는 쇼핑하는 내내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그릇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가정용 전자 제품들도 구매했다. 그리고 이혼을 축하한다면서 박지연에게 옷과 신발까지 사줬다.온종일 쇼핑하면서 출출해진 두 사람은 매장 직원들에게 물건을 집까지 배송해 달라고 부탁한 뒤 밥 먹으러 가려고 했다.박지연이 워낙 매운 음식을 좋아했는데 마침 쇼핑몰 안에 훠궈집 하나가 있어 그곳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훠궈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면서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두 사람은 웨이터를 따라 위층으로 올라가면서 무슨 음식을 주문할지 토론했다.“은서야, 저기 저 두 사람 곽승재
곽승재는 차가운 얼굴빛을 하고 있는 고은서를 힐끔 보더니 백유미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백유미도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은서 씨, 지연 씨, 먼저 가볼게요.”미안해하는 말투와 달리 백유미는 자랑이라도 하는 듯 비꼬는 듯한 눈빛으로 고은서를 쏘아보았다.유산한 고은서를 바라보던 눈빛과 똑같은 눈빛이었다. 고은서는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박지연은 황급히 그녀를 달랬다.“그냥 무시해. 지금 곽승재 앞에서 일부러 너한테 시비 거는 거야.”그러나 박지연의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고은서는 테이블 위에 있던 찻잔을 들고 백유미를 향해 물싸대기를 날렸다.“아악!”백유미는 이내 비명을 질렀다.그녀는 얼굴과 머리카락이 온통 찻잎 찌꺼기 투성이가 되었고 갈색 찻물이 그녀의 얼굴을 따라 옷에까지 흘러내리면서 짙은 자국을 남겼다.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모습이 되었다.백유미의 비명소리 때문에 모든 시선들이 그들 쪽으로 쏠렸고 곽승재도 다시 뒤돌아 걸어왔다.“은서 씨, 갑자기 왜 이러는 거예요?”백유미가 억울하다는 듯 물었다.고은서는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덤덤하게 답했다.“당신 같은 악독한 여자한테 물싸대기 하나 날리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해?”백유미는 물 범벅이 된 얼굴을 쳐들고 아련한 눈빛으로 곽승재를 바라보았다.“승재야...”“곽 대표님, 시비를 먼저 건 사람은 백유미 씨에요. 우리 은서는 아무 잘못 없어요.”박지연이 고은서 앞에 막아서면서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지연 씨, 편견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니에요? 저 방금전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요.”백유미는 끝까지 억울한 척했다.이를 본 고은서는 콧방귀를 뀌면서 가려고 했다. 그러나 곽승재가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뭐하려는 거야?”고은서는 성가시다는 듯 차가운 눈빛으로 곽승재를 바라보았다.“백유미 편들어주게? 나 일부러 그런 거야. 부글부글 끓고 있는 찻물이었다면
“곽 대표님은 제가 그렇게 싫으세요? 병뚜껑 열어주는 것조차 꺼릴 만큼?”여시은의 말투에는 약간의 유감과 억지로 짜낸 서운함이 섞여 있었다.곽승재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시은 씨가 원하는 건 물을 마시는 결과가 아닌가요? 물을 마실 수 있으면 되지, 누가 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잖아요.”“왜 중요하지 않아요?”여시은은 눈을 깜박이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농담을 던졌다.“저는 곽 대표님이 열어준 병의 물만 마시고 싶은데요.”노골적인 애정 공세에 곽승재는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여시은은 전혀 민망한 기색이 없이 여전히 공세를 이어갔다.“솔직히 말할게요.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우리가 천생연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두 집안 어른의 뜻대로 조금씩 알아가면 안 될까요?”곽승재는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우리 집안에서 할머니와 어머니는 정략결혼을 반대하세요. 아버지의 일방적인 희망 사항일 뿐이죠.”“그리고 이미 말씀드렸듯이 저는 재혼 계획이 없습니다.”여시은은 여전히 달콤한 미소를 유지했다.“당장 결혼하자는 뜻은 아니에요. 어쩌면 만나다가 전혀 안 맞는다는 걸 깨달을 수도 있잖아요?”“그럴 필요 없어요. 저는 시은 씨와 맞지 않아요.”곽승재는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고은서는 원래 활발하고 웃음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저와 결혼한 후 시들어버렸고,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온갖 방법을 다해 저한테서 도망쳤어요. 이혼한 후 그 여자는 다시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 됐죠. 그러니 저는 남편으로 자격 미달이에요.”“시은 씨는 여 회장님께서 애지중지하는 따님이고 조건이 우월하니 더 나은 남자를 만나셔야죠.”여시은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저는 고은서와 달라요. 고은서는 완전한 사랑을 원했지만 저는 조건이 맞는 파트너면 돼요.”“사랑이 있으면 금상첨화이고 없어도 상관없어요.”그녀는 돌직구를 날렸다.“제가 고은서보다 승재 씨에게 더 잘 맞는다고 생각해요. 고은서 만큼 똑똑하거나 유능하지는 않지만, 이게 남자들에게는 장
“아니, 유일 투자은행 개업식에서 여재훈 씨가 테이프 커팅에 참석했었잖아. 그때 외할아버지와 삼촌도 있었는데 서로 아는 눈치가 아니었어.”고은서는 말을 이어갔다.“당신도 우리 삼촌을 알잖아. 조금이라도 연줄이 될 만한 사람이라면 절대 놓치지 않지. 여재훈 씨와 단 한 번이라도 만난 적이 있었다면 당장 달려가서 인사하고 관계를 맺으려고 했을 거야.”사실 그날 삼촌은 여재훈과 안면을 트려고 했지만, 여재훈 주변에 중요 인물들이 너무 많아 접근할 수 없었다. 게다가 외할아버지가 말리는 바람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여시은이 오직 당신 때문에 나를 저격하는 거라고 생각해.”“당신들 둘이 Y국에서 만난 적 있잖아. 여시은은 그때 당신에게 첫눈에 반했을 거야.”고은서의 분석이 정확할 수도 있다.곽승재는 이전에 곽현수에게 왜 백유미를 귀국시켜 그와 고은서의 결혼 생활을 망쳤냐고 따진 적이 있었다.그때 곽현수는 고씨 가문이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며 여시은이 적합한 상대라고 말했었다.곽현수는 단지 할머니 때문에, 그리고 여씨 가문이 입방아에 오르는 것을 원치 않아서 이혼을 강요하지 않았을 뿐이다.여시은도 Y국의 파티에서 만난 두 집안 어른들이 둘을 만나게 하려 했고, 그녀도 그와의 정략결혼에 긍정적인 태도였다고 인정한 바 있다.고은서의 분석이 맞았지만 곽승재는 마음이 전혀 홀가분하지 않았다.그녀의 말투가 너무나 차분했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을 말하는 것처럼.곽승재는 고은서의 태도에서 자신을 향한 감정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가슴 속에서 둔탁한 통증이 밀려왔다.겨우 감정을 추스르고 입을 열려는 순간, 회의실 방향에서 여시은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곽승재는 일이 있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그 사이 눈앞까지 다가온 여시은이 배려심 있게 말했다.“곽 대표님, 일이 있으면 먼저 처리하세요. 10분 쉬고 회의를 계속한다고 전할게요.”여시은은 말하면서 생수 한 병을 곽승재에게 건넸다.곽승재는 거절의 뜻으로 고개를 저
“외할아버지, 숙모 말로는 엄마가 북성에 있을 때 가슴 아픈 연애사가 있었던 것 같대요. 제 생부는 아닐 거라고 하는데, 외할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고은서는 돌직구를 날렸다.“그럴 리 없어. 네 엄마는 활발하고 낭만적인 성격이었지만 고집스러운 면도 있었어. 쉽게 마음을 주지 않지만 한번 주면 절대 뒤돌아보지 않았어.”고준석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 점에서는 네가 엄마를 똑 닮았어. 그래서 그때 곽승재와의 결혼을 허락했던 건데...”‘왜 갑자기 내 얘기로 넘어간 거지?’“북성에 연인이 없었거나, 있었다면 제 생부란 말씀인가요?”고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생부일 가능성이 낮아. 북성에서 돌아왔을 때 다른 곳에서 돌아왔을 때와 별다른 정서 변화가 없었거든.”고준석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엄마가 유부남과 엮였을 리 없어. 송민준 부모의 이혼이 엄마와 상관없을 거야.’“오히려 해외에 머물던 어느 날 전화가 와서 깜짝선물을 준비했다며 신난 목소리로 말한 적이 있어.”말을 이어가던 고준석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연애하는 줄 알고 기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렇게 될 줄은...”“은서야, 네 엄마가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네 생부 때문에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알아.”고준석은 외손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때 네 엄마는 치료가 안 되는 불치병을 앓은 것도 아니었어.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가슴에 품고 너무 지쳐서 벗어나고 싶었던 거지...”목이 멘 듯한 외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은서도 코끝이 찡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노인의 아픔을 다시 건드린 자신이 미웠다.고은서는 고준석의 손을 꼭 잡았다.“외할아버지,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엄마는 외할아버지같이 이해심이 넘치는 분을 아버지로 두어 너무 행복했을 거예요.”하지만 고준석은 더 슬퍼 보였다.“가끔은 내가 너무 자유를 준 것은 아닌지 생각할 때도 있어. 조금 구속했으면 사랑 때문에 큰 상처를 받을 일도 없지 않았을까?”
고은서는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엄마가 미혼모 신분으로 나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북성에 첫사랑까지 있었다고? 이렇게 복잡한 연애사가 있었다니.’“내가 그냥 제멋대로 추측한 거야. 연인 관계가 아니라 형님 마음을 아프게 한 친구일 수도 있지.”단은숙은 가방을 손에 들고 고은서에게 주의를 주었다.“이 얘기를 외할아버지나 삼촌한테 절대 하지 마. 내가 또 쓸데없는 소리 했다고 나무랄 거야.”외할아버지는 고은서의 엄마를 각별히 아꼈다. 미혼모가 됐어도 한 마디 비난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슴 아파하며 그녀의 과거를 캐묻지 않았다.외할아버지의 말씀대로 집은 따뜻한 피난처였고, 엄마는 그 안에서 조용히 상처를 치유했다. 말할 수 있는 건 스스로 털어놓을 것이고, 입을 다물고 있다면 아픈 기억일 테니 가족들이 상처를 건드릴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고은서의 엄마는 조향사로서 천재적 재능을 보였다. MQ의 베스트셀러 향수가 바로 그녀의 작품이었고, 이는 MQ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그래서 삼촌 부부도 그녀의 사생활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다.가족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니 주변 사람들도 무시하지 못했다. 그래서 고은서는 지금까지 아버지가 없는 것이 큰 결핍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씨 가문을 노리는 세력이 나타나서 진상을 파헤쳐야 하는 상황이 되지 않았다면, 평생 엄마의 과거를 캐지 않았을 것이다.단은숙은 가방을 부인들 단톡방에서 자랑하기 위해 급히 방으로 들어갔다.고은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엄마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엄마는 북성에서 무슨 일을 겪었을까? 정말 첫사랑이 있을까? 혹시 송씨 집안 사람?’문득 송민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송민준과 송민아는 이복남매였다.‘그렇다면 송민준의 친모가 아버지와 이혼하셨다는 건데, 설마 엄마가 두 분 사이에 끼어든 건 아니겠지?’이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고은서는 등골이 오싹해졌다.만약 송민준이 정말 C선생이라면, 그가 고씨 가문을 증오하는 이유는 충분하다.하지만 고은서는 엄마
“네 엄마는 아는 사람이 많지만 송씨 집안 사람과 안면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고준석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은서야, 왜 갑자기 송씨 집안 사람을 아는지 묻는 거야? 무슨 일이라도 생겼니?”아직 모든 게 오리무중이라 고은서는 외할아버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제가 그 집안 따님이랑 친한 친구이고 아드님과도 아는 사이라 인연이 있는 것 같아서 혹시 어른끼리 아는 사이가 아닌지 여쭤본 거예요.”“집안 어른까지 알아보면서 결혼 생각이 없다고?”단은숙이 다시 흥분했다.“은서야, 솔직히 말해봐. 그 송민준이라는 청년이 너를 좋아하지? 너를 쫓아다니지?”고은서는 황당해하며 부인했다.“아니에요. 절대 그럴 일이 없어요. 저와 송민준은 그냥 친구예요. 그리고 제가 만약 결혼할 마음이 생기면 반드시 숙모께 첫 번째로 말씀드릴게요.”“여보, 자꾸 결혼 얘기로 애를 못살게 굴지 마. 우리 은서는 능력도 뛰어난데 시집가지 않아도 괜찮아.”고국성이 뜻밖에 그녀 편을 들어주었다. 영악하고 연줄을 대기 좋아하는 삼촌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더 놀라운 것은, 숙모가 화내거나 반박하지 않고 그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 것이다.“당장 결혼하라고 닦달한 것도 아니잖아요. 곽승재와 비슷한 조건의 남자가 있다면 놓치지 말아야죠...”“괜찮아요. 숙모도 저를 걱정해서 그러시는 거죠.”고은서는 적당히 무마한 후 넉살스럽게 단은숙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숙모, 제가 최근에 G브랜드 핸드백을 샀는데 디자인이 예뻐요. 한번 보실래요? 마음에 드시면 드릴게요.”이렇게 좋은 일을 마다할 리 없는 단은숙은 급히 일어섰다.“아이고, 은서가 숙모 생각도 해주고! 은혜 그 계집애보다 백배 낫네.”“엄마, 다 들려!”멀지 않은 곳에 있던 고은혜가 기분 상한 듯 소리쳤다.“들리든 말든. 내가 틀린 말 했나?”단은숙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은서와 함께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고은서는 차에서 포장
고준석과 고국성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해성의 곽씨 일가, 북성의 송씨 가문, 민씨 가문은 모두 명문가였다.“당연히 알지.”남편과 시아버지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단은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송씨 집안의 가주가 훈훈한 외모를 가진, 유명한 독신남이라는 것도 알아.”“은서야, 송씨 가문은 왜 물어?”단은숙이 갑자기 소리 질렀다.“너 설마 송씨 가문에 시집가려고?”“맞네! 송씨 가문이 해성에 지사를 세웠다더니 너와 사업 거래가 있었구나.”단은숙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그 집안 아드님이 우리 은서 얼굴을 보고 첫눈에 반한 게 틀림없어.”“...”그녀가 한 마디 물었을 뿐인데, 숙모는 기관총 쏘듯 수십 마디를 내뱉었다. ‘첫눈에 반했다’, ‘결혼한다’, 이런 말까지 나오니 고은서는 어느 것부터 반박해야 할지 난감했다.“바쁜 애가 언제 연애할 시간이 있겠어? 넘겨짚지 말고 은서 말을 들어보자꾸나.”단은숙은 화내지 않고 고은서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정확한 소식을 기다렸다.명문가와의 혼인, 이에 대한 숙모의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 고은서는 알고 있었다.“숙모, 너무 상상의 나래를 펼쳤어요. 어떻게 아무 남자나 저를 좋아하고 저와 결혼하려고 하겠어요? 저는 그저 우리가 과거에 송씨 가문과 무슨 거래가 없었는지 알고 싶을 뿐이에요.”이 말을 듣고 순식간에 흥미를 잃은 단은숙은 모른다고 했다.고준석과 고국성도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고씨 가문은 줄곧 북성에 있었던 송씨 가문과 거래할 기회가 없었다.“사업 거래도 없었어요? 송씨 가문에서 향료와 관련된 사업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고은서는 꼬치꼬치 캐물었다.“아니면 두 분이 사업차 북성에 갔다가 송씨 가문 사람과 마주친 적도 없으세요?”고국성이 입을 열었다.“송씨 가문은 줄곧 부동산 사업을 해왔고 송민준이 개척한 새로운 사업도 향료와는 무관한데, 우리와 무슨 사업 거래가 있었겠어?”고준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예상했던 결과였다.‘하지만 두 가문이 아예 모르는 사이
건전복 상자를 들고 주방에서 나오던 단은숙이 고은서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은서 왔어?”그녀가 고국성의 일을 도와준 뒤로 단은숙은 그녀를 훨씬 살갑게 대했다. 얼마나 진심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녀를 존중하고 예의를 차리기 시작했다.단은숙의 목소리를 들은 다른 사람들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은서야, 거기 서서 뭐 해? 얼른 외할아버지 곁으로 와.”고준석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고은서는 미소 띤 얼굴로 모두에게 인사하면서 고준석 곁으로 갔다.아내의 부름을 받은 고국성은 식재료를 손질하러 주방에 갔고, 고은서는 외할아버지 곁에 앉았다.“은서야, 너 살이 좀 빠진 것 같다. 요즘 밥은 잘 챙겨 먹니?”외할아버지는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일이 바빠도 쉴 때는 제대로 쉬어야지.”“할아버지 너무 해요.”고은혜가 입을 삐죽거리며 끼어들었다.“저한테는 살이 찐 게 아니냐고 하시더니 언니한테는 살이 빠졌다고 하시고. 언니만 일이 바쁜 게 아니라 저도 바쁘거든요.”고준석이 자애롭게 웃으며 그녀를 놀렸다.“일이 바쁜지는 모르겠지만, 군턱이 진 것을 보니 끼니는 굶지 않은 것 같구나.”“할아버지, 저 군턱이 지지 않았어요.”오기가 생긴 고은혜는 증명해 보이려고 목을 쭉 빼 들었다.“보세요. 전혀 안... 콜록!”목을 너무 세게 빼든 탓에 말이 끝나기 전에 사레가 들렸다.그녀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연거푸 기침했다. 유성준이 어이없는 듯한 표정으로 물과 휴지를 건넸다.“회사에서 센 척하더니 집에서도 이러네.”“콜록콜록! 제가 언제 센 척했다고 그래요? 저는 그런 적이 없어요. 콜록!”고은혜는 기침하면서도 발끈했다.이 정겨운 모습을 보고, 고은서는 문득 유성준과 고은혜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은 부드럽고 세심한 반면, 다른 한 사람은 덜렁대는 성격이다.다만 숙모 단은숙이 동의할지 모르겠다. 고은혜가 명문가에 시집가 상류층에 진입하기를 바라는 그녀였다.유성준도 집안이나 능력이 빠지지 않았지만,
고은서가 이미 생각을 정했다는 것을 확인한 곽승재는 더 이상 의견을 내지 않고 단지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할 말을 다 한 고은서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늦었는데 일찍 들어가 쉬어.”곽승재는 좀 더 있고 싶었지만, 억지로 머물 핑계를 찾지 않고 소파에서 일어났다.때마침 영상전화가 걸려 오자, 고은서는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고 영상전화를 받았다.문 쪽으로 걸어가던 곽승재가 무심결에 돌아보니, 그녀는 어느새 소파에 벌러덩 누워 한쪽 발을 다른쪽 무릎에 올리고 흔들거리고 있었다. 진지하고 엄숙했던 조금 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여유롭고 편안한 모습이었다.곽승재는 이혼하기 전의 일이 문득 떠올랐다. 한번은 그가 외할아버지 댁에 같이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은서가 삐진 적이 있었다. 그녀가 며칠째 외할아버지 댁에 머물며 집에 돌아오지 않자, 이 일을 알게 된 할머니가 그를 고씨 가문으로 보냈다.그때의 고은서도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편안한 실내복 차림으로 소파에 엎드려 두 발을 흔들거리며 아이패드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맨발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곽승재는 그 순간 모든 불쾌감이 사라졌다. 원래 불만 가득했던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은서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 도우미가 말을 걸어서야 정신을 차렸다.다시 모습을 드러낸 고은서는 흠 잡을 데 없이 단정한 차림에 화장도 완벽하게 끝낸 상태였다.그와 함께 마구 뛰던 곽승재의 심장도 평온을 찾았다. 고은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해서 잠깐 넋을 잃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그것이 실은 설렘의 순간이었다는 것을 끝내 깨닫지 못했다...고은서와 이야기하던 중, 고은혜가 문 쪽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언니, 저기 혹시... 형부?”고은서가 몸을 뒤로 젖힌 채,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는 여전히 문어귀에 서 있었다.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잘생긴 얼굴에서 고통스러운 기색이 언뜻 보였다.‘갑자기 왜 저런 표정이지?’고은서가 자세히 보려고 일어났을 때는 그가
“당시 시은이가 부상당한 쿠아를 쫓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일에 대한 기억이 전부 시은이가 쿠아를 구해 준 그 따뜻한 장면으로만 남아있어. 시은이가 왜 거기에 있었을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고은서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곽승재는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고은서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두려워하지 마, 자책하지도 마. 아무도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할 거야.”곽승재가 부드럽게 위로했다. “내가 민기 씨에게 송민준과 시은 씨사이의 관계를 조사해 보라고 시켰어.”고은서는 살며시 손을 빼냈다. “그럼 부탁할게.”곽승재는 살짝 실망한 표정을 애써 숨기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시은이가 당신과 결혼을 하려 하기에 날 싫어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가 가. 하지만 송민준은 왜 나를 미워할까?” 고은서가 의문을 제기했다.비록 그녀가 예전에 민시후와 가까웠다고 해도 고씨 가문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었다.게다가 유미 씨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귀국한 것은 곽 회장님의 뜻뿐만 아니라 이 C 선생의 지시도 있었다고 했다. 그 시절 자신은 민시후와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었다.‘고씨 가문이 송민준에게 크게 잘못한 거라도 있나?’고은서는 머리가 터질 정도로 생각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곽승재도 이 일의 전후 관계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우리의 추측일 뿐이야. 증거 없이는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 없으니 서두르지 마.”고은서는 급할 수밖에 없었다. 뒤에 숨은 검은 손을 잡아내지 못하면 그녀와 고씨 가문은 영원히 불안에 떨어야 했다.전생의 비극적 결말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범인을 색출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곽승재는 고은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MQ에 관련된 일은 내가 사람을 시켜 주의 깊게 보고 있어. 무슨 움직임이 생기면 바로 나에게 보고할 거야.”고은서는 곽승재가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사실에 놀랐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곽승재를 바라보았다.거실의 하얀 색 조명 아래서 그의 각진